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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색인
{100}박동망(朴東望)1566(명종21)∼1615(광해군7).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자는 자진(子眞)조년(兆年)의 증손으로,祖는 사간 소(紹)父는 대사헌 응복(應福),
母는 증 좌승지 임구령(林九齡)의 딸. 유조인(柳祖認)의 문인. 1594년(선조 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대교,봉교,지평,평산부사,신천군수,강화부사,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1613년(광해군5)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당상관에 올라 길주목사, 영흥부사로 전임.
161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 오던 중 안주(安州)의 공관(公館)에서 죽었다.
{101}김용(金涌)1557(명종12)∼1620(광해군12) 조선 중기 문신.자는 도원(道源)호는 운천(雲川).
본관은 의성(義城)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정자(正字),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신병으로 사퇴,
임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해 항쟁하다가 이듬해 행재소(行在所)로 올라가 이조좌랑(吏曹佐郎),교리(校理)를
역임하고 독운(督運)어사,체찰사종사관 등을 역임.1598년(선조31)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모함을 받아 축출되자
함께 배척받아,선산부사로 체직됨.
1609년(광해군1)에 태상시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이 되어 실록(宣祖)수찬(修撰)에 참여.저서로 운천집(雲川集)이 있다.
{102}박수겸(朴守謙)1576~1622 자는 경정(景靜)이고 본은 함안(咸安).
1613년(광해군5) 사마시에 합격,尹承勳의 추천으로 참봉(參奉)봉사(奉事)사첨시(司贍寺)직장(直長)을 역임함.
통훈대부(通訓大夫). 구전(苟全:金中淸)선생의 친구.
{103}이안눌(李安訥)1571∼1637(선조4∼인조15)) 조선 중기 문신·시인.자는 자민(子敏)호는 동악(東岳).
본관은 덕수(德水).1599년(선조 32)문과에 급제,예조,이조정랑,
1601년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성균관직강 겸 봉조하(奉朝賀).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
1615년(광해군 7)승문원부제조동부승지,강화부윤,부사과(副司果)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해 사직.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여러 관직을 지냈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시작(詩作)이 일자일구(一字一句)도 가벼이 쓰지 않아 4379수에 이르고,
저서에 동악집이 있다. 시호는 문혜(文惠).
{104}유숙(柳潚)1564(명종19)∼?.
본관은 고흥(高興)자는 연숙(淵叔)호는 취흘(醉吃)부정(副正) 유몽표(柳夢彪)의 아들.조선 중기의 문신.
159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검열,사가독서(賜暇讀書)후 사서,수찬,응교,장악원 정,종부시 정 등을 역임,
부제학 때 영주군(瀛州君)에 봉해짐.대사간,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나,인조반정 직후 광해군 때 역신(逆臣)의 심복이었다는
죄로 청하(淸河)에 위리안치 되었다.
뒤에 숙부 유몽인(柳夢寅)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다시 위리안치 되었다.
{105}심집(沈諿)1569(선조2)∼1644(인조22).
본관은 청송(靑松),자는 자순(子順),호는 남애(南崖).심우정(沈友正)의 아들.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29년(1596)정시 문과에 급제.검열,대교,검열,수원판관,옹진현령,전적,예조정랑,정언 겸문학,죽산부사,
광해군 즉위 뒤 장령,은계찰방,해운판관,고령현감,사예,검상,사인,보덕을 역임.
폐모론이 대두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 인조반정 후 병조 참지,예조참판,도승지,안변부사,형조 및 공조판서,
한성판윤,예조판서에 복관,아들 심동구(沈東龜)가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1644년 유배지에서 죽음. 시호는 효간(孝簡).
{106}김개(金闓)1582년,임오년생,광해군(光海君)2년(1610년),알성시(謁聖試) 갑과1(甲科1)급제,자(字)계숙(啓叔),
본관(本貫)상주(尙州),부(父)김귀영(金貴榮),조부(祖)김응무(金應武),증조(曾祖)김사원(金士元),
어모장군(禦侮將軍),통정대부(通政大夫)좌윤(左尹).
{107}이경엄(李景嚴)1579(선조12)∼1652(효종3).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자는 자릉(子陵)호는 현기(玄磯)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호민(好閔)의 아들.
1610년(광해군2)에 현감으로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1617년 현감이던 그는 폐모론에 대하여
“이 일은 중대하여 의정부에서 잘 처리할 일이다.”라고 함.
1624년(인조 2)에 배천군수,1628년 사옹원정(正)으로 있던 중 가자(加資)를 받고, 그 뒤 가도(가島)의
문안사(問安使)로서 까닭 없이 지체하여 파직되었고, 1647년 연천군(延川君)으로 있으면서 수령으로 천거한 자가
적합하지 못하다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08}조국빈(趙國賓)1570(선조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자는 경관(景觀)호는 설죽(雪竹)유백(惟白)의 아들.1606년(선조3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정언,지평 등을 역임,광해군10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데 반대하다가 거제도에 유배,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1632년(인조10)형조참의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반대파의 박해로 벼슬에서 물러나 충주에서 은거하였다.
{109}한정국(韓正國)1591(선조24)∼1623(인조1).조선 중기의 문신.자는 직경(直卿).
본관은 청주(淸州).승권(承權)의 증손,祖는 경우(景祐),父는 영(瀛),母는 정유일(鄭惟一)의 딸.정국(定國)의 아우.
1616년(광해 8)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대술(代述)의 의심이 있었다.
승정원가주서,겸설서,설서를 역임,1619년 예조좌랑으로서 과거시험을 함부로 차지하고 사치한 죄로 파직,추고.
영변통판(迎邊通判)으로 내려가 있다가 살인혐의로 물러났다가1622년(광해군14)에 지평,헌납으로 있던 형 정국(定國)이
중국 황제의 사은(賜恩)에 대한 대례(大禮) 문제로 피혐한 일을 처치할 때 상피하지 않았다고 대사간 유대건(兪大建)의
비난을 받았고 이후 박홍도(朴弘道),한효중(韓孝仲)등의 죄상에 대한 탄핵과 아울러 이귀(李貴)의 죄를 파직에
그치게 한 대사헌 남근(南瑾)을 비난, 이귀 등이 김자점(金自點)과 더불어 서궁(西宮)을 부호한다고 비난하면서
서궁을 폐하자는 정청(庭聽)에 참여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이이첨(李爾瞻)에 붙어 공동으로 흉론을 주창한 죄로
형과 함께 주살됨.
{110}고용후(高用厚)1577(선조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흥(長興)자는 선행(善行)호는 청사(晴沙)형조좌랑 운(雲)의 증손,祖는 참의 맹영(孟英),
父는 의병장 경명(敬命)母는 김백균(金百鈞)의 딸.160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예조좌랑,병조좌랑,병조정랑,
남원부사가 되었으며,1624년(인조 2)고성군수를 역임.1631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판결사(判決事)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은퇴.
{111}임성지(任性之)1582(선조15)∼1628(인조6).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자는 수초(遂初)호는 서봉(西峰)정(楨)의 증손,祖는 응신(應臣)父는 협(鋏)母는 장징(張徵)의 딸.
1613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예조좌랑,정언,수찬,1615년 독서당(讀書堂)에 간택되었으며,
지평,헌납,문학,부교리,이조좌랑,필선,응교,보덕이 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폐모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정산(定山),간성(杆城)으로 유배 중
1628년 반역을 도모한 유효립(柳孝立)옥사의 관련자로 추국 중에 죽었다.
{112}이위경(李偉卿)1586(선조19)∼1623(인조1).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자는 장이(長而)祖는 판서 준민(俊民)父는 유훈(有訓),母는 조응공(趙應恭)의 딸.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예문관검열,정언,동부승지,우승지,대사간,좌승지,예조참의를 지냈고,
1622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강원도관찰사 백대형(白大珩)과 결탁하여 경운궁(慶雲宮)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시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이첨,백대형,정조,윤인 등과 함께 능지처참됨.
{113}김시국(金蓍國)1577(선조10)∼1655(효종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자는 경징(景徵)호는 동촌(東村)여명(汝明)의 증손,祖는 사원(士元),父는 급(汲),
母는 임보신(任輔臣)의 딸.낙(洛)에게 입양.호조판서 신국(藎國)의 아우.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병조좌랑,직강(直講),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이조좌랑,정언(正言),전라도선유어사(全羅道宣諭御史),
우부승지,호조판서,우승지,참찬관,도승지,1632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1640년에 대사성,참판,대사간,제학(提學),
대사성,1649년(효종 즉위년) 판의금부사를 지냄.
{114}유약(柳瀹)1613년(광해군5)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615년 사가독서하고 이어 설서(說書),검열,병조좌랑,헌납(獻納),교리(敎理),형조정랑 등 요직을 지내고
정인홍(鄭仁弘)등의 사주를 받아 폐모론을 주장.인조반정으로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115}신의립(辛義立)1565(명종20)∼1631(인조9).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자는 자방(子方)호는 죽옥(竹屋)祖 중곤(仲坤)父는 내옥(乃沃)
母는 영양남씨(英陽南氏)구수(龜壽)의 딸.1603년(선조36)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충주교수(忠州敎授),평안도사,북청판관,양산군수,풍기군수,호조정랑,함양군수,청도군수 등을 역임.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온 뒤에는 1618년(광해군10)공조참의,형조참의,병조참의,김해부사,대구부사,철산부사를 거쳐
1622년(광해군14)동부승지로서 접반사를 겸하여 부호군이 되었다.
{116}조유도(趙有道)을유1585(乙酉1585)생,자(字) 칙견(則見),
본관(本貫)양주(楊州)부(父)조정(趙挺)조부(祖父)조충수(趙忠秀)증조부(曾祖父)조방보(趙邦俌)처부(妻父)유희분(柳希奮),
광해군(光海君)2년 (경술,1610년),식년시(式年試)병과20(丙科20)급제,이조좌랑,교리,직강,검상,형조참의,호조참의로서
우의정 한효순(韓孝純)등과 함께 폐모론에 동조.유희분(柳希奮)의 사위로서 교만하고 사납다는 평판과 함께,
분수 이상의 말을 타고 다녀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받았다. 1640년(인조 18) 허유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유배당하였다.
{117}한희(韓暿)한찬남의 아들,1616년(광해군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수찬,지평,겸사서,부교리,문학 이조정랑,
응교,겸보덕,1621년(광해군13)에 직제학,이이첨의 당여로서 당시의 삼사는 한희를 포함하여
‘이이첨의 논의가 바로 삼사의 논의’라고 언급할 정도로 이이첨을 적극적으로 비호.
1618년 허균(許筠) 역모사건에서 그의 부친인 한찬남이 연루자 한희가 추천한 금부도사 이전방(李傳芳)을 시켜
제거했다는 유희분(柳希奮)의 주장으로 서로 반목.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 아버지는 복주(伏誅)되었으며,
이듬해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주살되었다.
{118}김기종(金起宗)1585(선조18)∼1635(인조13).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자는 호는 청하(聽荷)혼(渾)의 증손,祖는 광렬(光烈)父는 철명(哲命)母는 신백윤(申伯潤)의 딸.
1618년(광해군10)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자(正字),이듬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전날 이이첨(李爾瞻)이 사당(私黨)을 심기 위한 과거에 참여하여 장원하였다는 지적을 받아
청요직(淸要職)이 허락되지 않다가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할 때 장만(張晩)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우자,
양사(兩司)의 벼슬을 거쳐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영해군(瀛海君)에 봉해지고 호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
{119}이정구(李廷龜)1564(명종19)∼1635(인조13).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본관은 연안(延安)자는 성징(聖徵)호는 월사(月沙)또는 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父 계(啓),
母는 김표(金彪)의 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2년 임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 중국어에 능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활약,
34세 때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중국에 갔다 와서 대제학이 됨,
1604년 세자책봉주청사로 또 명나라에 다녀오고, 병조판서,예조판서,우의정, 좌의정을 역임. 시호은 문충(文忠).
{120}박재(朴梓)(1564~ ?)본관은 고령,자는 子貞,1602년에 별시문과에 급제,공조좌랑,집의,강릉부사 등을 역임.
1617년(광해9)에 정사(正使)오윤겸(吳允謙),박재(朴梓)가 부사(副使),이경직(李景稷)이 종사관으로 일본사신으로
다녀온 동사(東使)일기가 있다.
{121}정인(鄭寅)1561(명종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자는 자청(子淸)사의(思義)의 증손,祖는 숙겸(淑謙),父는 희천(希天).
1591년(선조2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1600년(선조33)중국 장수의 접반관(接伴官)에 임명되었으나 분수에 넘치는
추한 짓을 하고 있다는 탄핵을 받아 병조좌랑의 직에서 파직.1606년 예조좌랑에 다시 등용되고,
이어 강원도사(江原都事)에 임명됨.사람됨이 용렬하고 오활하여 열읍(列邑)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체차(遞差:관직이 교체되면서 다른 관직을 받지 못한 상태)됨.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의 추천을 받아 1611년(광해군 3) 병조정랑에 다시 등용되었으며,
1615년에는 지평을 역임하였다.
{122}김주국(金柱國)1586(선조19)~1657(효종8)조선 중기의 학자.자 임대(任大).
구전(苟全:金中淸)선생의 차남(次男).1618(광해10)년 생원시(生員試)입격(入格),처 영천이씨 찰방 협(莢)의 딸.
{123}신암(申黯)본 평산(平山),사간공(思簡公)신호(申浩)의 6대손,
그의 형인 점(點)은 임란 때 선무공신(宣武公臣)이 되어 그의 직손(直孫)인 신율(申慄)이 광해군 때
대북파(大北派)에 가담, 소북파(小北派)를 숙청하는 옥사에 관여하여 인조반정이후로는 쇠퇴.
반면 신암(申黯)의 아들 민일(敏一)은 대사성,현손인 사철(思喆)이 영중추부사,사철의 아들 만(晩)회(晦) 형제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냄.
{124}조희일(趙希逸)1575(선조8)∼1638(인조16).
본관은 임천(林川)자는 이숙(怡叔)호는 죽음(竹陰),팔봉(八峰),父는 승지 조원(趙瑗).조선 중기의 문신,
1608년에 문과 중시에서 을과로 급제,저작,주서,예조좌랑,설서,정언,사서,문학 등을 역임.
광해군 5년(1613) 이조정랑으로 재직 중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이산(理山:초산)에 안치되었다가 1619년에 방면.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교리,부응교,경연관,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광주목사,예조,형조참판,
경상감사 등을 역임, 모문룡(毛文龍)을 맞는 접반사(接伴使)도 하였다.
{125}정홍익(鄭弘翼)1571(선조4)∼1626(인조4))조선 중기 문신.자는 익지(翼之),호는 휴옹(休翁)휴헌(休軒)휴암(休庵).
본관은 동래(東萊).1597년(선조 3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예조좌랑,정언,형조좌랑,정언을 거쳐
사헌부지평으로 재직 중 정인홍(鄭仁弘)이 성혼(成渾)을 탄핵하자 이에 대한 부당함을 극간(極諫)하다가
단천채은관(端川採銀官)으로 좌천.1612년(광해군4) 성천부사(成川府使),1613년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폐모론에 반대하여 진도(珍島)종성(鐘城)광양(光陽)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인조반정 뒤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유배지에서 얻은 병으로 부임하지 못함. 저서에 휴옹집, 시호는 충정(忠貞).
{126}권득기(權得己)1570(선조3)∼1622(광해군14))조선 중기 문신.자는 중지(重之),호는 만회(晩晦).
본관은 안동(安東)1610년(광해군 2)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예조좌랑(禮曹佐郎),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야인(野人)으로 일생을 마쳤다.
사후 공조참판에 추증,공주(公州)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저서로는 만회집(晩晦集),연송잡기(然松雜記)등이 있다.
{127}이사경(李士慶)1569(선조2)∼1621(광해군 13).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자는 이선(而善)호는 쌍곡(雙谷).계인(啓仁)의 아들. 1601년 식년문과에 장원,
전적,정언,병조좌랑,삼화현령,예조좌랑,정언,지평이 되고,1613년(광해군 5)에 성천부사로 나갔다가 선조가 임란 때
피란하였던 관사의 화재로 파직.1618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이듬해 대사간에 승진,
이때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西宮:경운궁)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경상도관찰사 윤훤(尹喧)과 충청도관찰사 이춘원(李春元)이 서장(書狀)에서 폐모에 대한 존칭을 그대로 쓴 것을
묵인하여 준 것이 말썽이 되자 사직. 다시 승지,병조,예조의 참의 등을 역임.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청렴하여 존경을 받았다.
{128}박지술(朴知述)1552(명종8)~1631(인종9)조선 중기의 문신,
본은 함양(咸陽)세영(世榮)의 孫子,자(字)는 선이(善而)호는 구당(九堂)선조 계미년 벼슬길에 올라 사산감역(四山監役),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사직서령(社稷署令),형조좌랑,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형조정랑.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안음(安陰).태인(泰仁).용담(龍潭).자산(慈山).부평부사(富平府使)를 지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름. 80享壽.
{129}이수록(李綏祿)1564(명종19)∼1620(광해군12) 조선 중기 문신.자는 수지(綏之),호는 동고(東皐).
본관은 전주(全州).세종의 6대손으로 이극강(李克綱)의 아들. 1586년(선조19) 별시문과에 급제,
병조좌랑,정언,문학,수찬 등을 거쳐 1602년 서북면체찰사(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동.
이어 교리,응교,대동도찰방,내자시정,상주목사,봉상시정,사헌부장령,의정부사인,폐비론이 대두되자 사직,
뒤에 여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30}이함일(李涵一)1563(명종18)∼1621(광해군13).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풍(咸豊)자는 일오(一吾)호는 일사(一査). 父는 방필(邦弼),母는 광산김씨(光山金氏) 유인(有仁)의 딸.
1589년(선조 22)사마시에 합격, 임란이 일어나자 관생(館生)으로서 반궁(泮宮)을 지켰고
1606년 성균관학정 겸 중학훈도(中學訓導),종부시주부,사헌부감찰,지평,강진현감,보령현감,영해부사,
일본에 가서 포로 쇄환(刷還)해오고 성균관사성,1618년 폐모론이 대두되자 조반(朝班)에 불참,강진현감으로 좌천됨.
{131}안경(安璥)1564(명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자는 백온(伯溫),호는 근전(芹田). 父 의손(義孫).1612년(광해군4)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봉교,예조좌랑,1619년 장령,1623년 금교찰방(金郊察訪)이 되었으나 광해조 권신의 비호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조반정으로 삭직.향리에 돌아가 후진교육에 힘쓰며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함.
{132}정홍원(鄭弘遠)1586년 生.
본관(本貫) 동래(東萊)자(字)는 자유(子裕)호(號)는 만천(晩川).별좌(別坐) 상신(象信)의 아들,祖는 순복(純福),
曾祖는 한용(漢龍),母는 이식(李湜)의 딸,
1513년(광해5)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로 합격,형조좌랑.장령(掌令),필선(弼善)을 역임.
{133}이덕형(李德泂)1566(명종21)∼1645(인조23).
본관은 한산(韓山),자는 원백(遠伯),호는 죽천(竹泉),호군 이오(李澳)의 아들,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29년(1596)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예문관검열,정언,지평,수찬,부교리,헌납,전적,문학,집의,교리,부응교,사간,
사섬시부정,응교,보덕,사도시정 등을 역임.광해군 때에는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참의,우승지,
병조참판,도승지,나주목사,전라 감사,황해 감사를 지냄.광해군이 영창대군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고,광해군 말년 도승지로 있을 때 인조반정에 협조하여 한성부 판윤이 되어 이괄의 난 진압에 공로가 있어
숭정대부로 승계하고,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중국 관리들에게 뇌물공세와 애원 끝에 명나라로부터 인조의
즉위 승인을 받고 면류관과 곤룡포를 받아오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죽천행록이 있다.
정묘,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고,예조판서,판의금부사,지돈녕부사,우찬성을 역임,영의정에 추증됨. 시호는 충숙(忠肅).
{134}권진(權縉)1572(선조5)∼1624(인조2).
본관은 안동(安東)자는 운경(雲卿)호는 수은(睡隱).父는 권현(權晛).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30년(1597)에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정언(正言),수찬(修撰),형조정랑(刑曹正郞),장령(掌令),
교리(校理),사간(司諫),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등을 거쳐 광해군 원년(1609)에 경주부윤(慶州府尹),승지(承旨),
수원부사(水原府使),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지고,
의금부사(兼義禁府事),우참찬(右參贊),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양산(梁山)에
귀양 갔다가 이듬해 왜인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하였다는 것으로 참형을 당하였다.
{135}이춘원(李春元)1571(선조4년)∼1634(인조12년)초명은 신원(信元)자는 원길(元吉)소자(小字)는 입지(立之),
호는 구완(九완),본관은 함평(咸平),창의 이자(二子).급제 후 승문원(承文院)에서 공직생활을 시작,
폐모론에 반대하여 파직당하고,충청관찰사 재직시 서궁 유폐(幽廢)를 반대하다 파직당함며,
광해군 12년(1620)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때에 득병하여 사직하였다.
종형 이영원(從兄李榮元)과 함께 인조반정 배후세력이라 평가되고,당세에 三玉(詩如玉心如玉貌如玉)이라 칭송되었다.
{136}김제남(金悌男)1562(명종17)∼1613(광해군5).
본관은 연안(延安)자는 공언(恭彦)으로 사정(司正)김오의 아들,영의정 김전(金詮)의 증손.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30년(1597)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연천현감(漣川縣監)을 거쳐
선조 35년(1602) 이조좌랑(吏曹佐郞)일 때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宣祖繼妃:인목왕후(仁穆王后))가 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짐. 인목왕비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자 문호(門戶)는
성대하였으나,광해군 5년(1613)에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은 하옥(下獄)당하고 그는 서소문(西小門) 밖 자택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으며 세 아들(래,珪,瑄)도 모두 화를 입었고.
부인 노씨(盧氏)와 어린 손자 김천석(金天錫)만이 화를 모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신원되었고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137}이정신(李廷臣)1559(명종14)∼1627(인조5).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자는 공보(公輔).종실,신손(神孫)의 증손,祖는 춘(春),父는 몽상(夢祥),母는 남상덕(南尙德)의 딸.
1588년(선조21)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정언,헌납이 되어 임란이 일어나자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책임을 추궁,
파직시킴, 선천군수,광주목사(光州牧使),전주부윤,동부승지,나주목사,광주목사(廣州牧使),용양위호군을 역임,
경상도관찰사,의주부윤,충청도관찰사,사은사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윤홍국(尹弘國)1576(선조9)∼1615(광해군7).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자는 장경(張卿).계훈(繼勳)의 증손,祖는 시우(時雨),父는 상(商),母는 이원우(李元友)의 딸.
1601년(선조34)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1615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다녀와 그 해에 사망함,
정철(鄭澈)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정철과 같이 연좌되어,이이첨(李爾瞻)이 그를 꺼려 하료(下僚)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옛것을 사모하고 의를 중하게 여겼으며, 세속에 초연하고 안빈낙도를 몸소 실천하였다.
{139}윤선(尹銑)1559(명종14)∼1637(인조15).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자는 택원(澤遠),호는 추담(秋潭).연(硏)의 증손,祖는 수종(秀宗),父는 언례(彦禮),
母는 밀양박씨(密陽朴氏)승효(承孝)의 딸.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학록,전적,정자,박사,장령,부안현감,대사간,
예조,호조참의,우승지,도승지,대사성,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조·병조·예조참판을 역임.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로 인목대비가 구금되자 위졸을 시켜 미육(米肉)을 헌납.
1614년 주문사(奏聞使)로 중국을 다녀왔고,1617년 우참찬에 임명되어,조경기(趙慶起)홍무적(洪茂績)등을 구원하였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여 다시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산수를 즐기며 여생을 마침,
{140}김치(金緻)1577(선조10)∼1625(인조3).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자는 사정(士精)호는 남봉(南峰)심곡(深谷)아버지는 부사 시회(時晦)증 영의정 시민(時敏)에게 입양됨.
1597년(선조3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설서(說書)를 거쳐1608년 사가독서(賜暇讀書)후.사복시정(司僕寺正),이조참의,
동부승지,대사간을 거쳐,홍문관교리,부제학,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되었다.
한때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이조에 있으면서 일을 벌였으며, 대사간이 되어서는 영창대군(永昌大君)살해음모를
반대하는 정온(鄭蘊)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다가.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大北派)로 몰려 유배당하였다.
그 뒤 풀려나 동래부사를 거쳐1625년(인조3)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점술을 연구하여 천문(天文)에 밝았다. 深谷祕訣이 있다.
{141}남근(南瑾) 1556(명종 11)∼1635(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계헌(季獻), 호는 용호(龍湖). 祖는 세건(世健), 父는 응운(應雲), 母는 신세량(辛世良)의 딸.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지평, 장령, 사간, 부수찬, 종부시정, 부교리, 우부승지, 호조참의, 우승지, 도승지, 1603년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와 한성부우윤, 경주부윤, 광해군 때 강릉부사, 대사성, 예조참의, 대사간, 대사헌, 한성부좌윤, 지돈녕부사, 대사헌,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논의를 일으켜 폐비절목을 작성하는 등, 대북세력의 첨병으로 김제남(金悌男)을 공격, 이이첨을 도와 최기(崔沂)의 처벌을 주장해 인조반정 뒤 유배되어 풀려나지 못하였다.
{142}오포(烏哺)오유반포지효(烏有反哺之孝)의 준말로 까마귀에는 반포(反哺)하는 효성이 있음.
반포(反哺)는 새끼 까마귀가 자란 뒤 어릴 때 길러 준 어미의 은혜 보답으로 어미 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 주는 일.
부모의 은혜에 보답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143}심언명(沈彦明)신유1561(辛酉1561)생,자(字)사회(士晦),호(號)금은(琴隱),
본관(本貫)청송(靑松)부(父)심화(沈鏵)조부(祖父)심거원(沈巨源)증조부(曾祖父)심순도(沈順道)모(母)이출(李秫)의 딸,
선조(宣祖)19년(병술,1586년), 알성시(謁聖試)병과6(丙科6)급제,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냄.
{144}정양윤(鄭良胤)기축1589(己丑1589)출생.
본관은 동래(東萊)자는 효원(孝元)부솔(副率)부(父)는 아산현감 정연(鄭演)조부(祖父)는 정순복(鄭純復)
증조부(曾祖父)는 정대년(鄭大年).광해군(光海君)7년.을묘년(1615)문과 합격.수찬(修撰)을 지냄.
{145}김봉조(金奉祖)1572(선조5)∼1630(인조8)조선 중기 학자.자는 효백(孝伯),호는 학호(鶴湖).
본관은 풍산(豊山)父 증 이조참판 대현(大賢)母는 전주이씨 찬금(纘金)의 딸.
유성룡(柳成龍)의 문인,1613년(광해군 5)증광문과(增廣文科)갑과에 급제,사도시직장(司導寺直長),전적(典籍),감찰(監察),
단성현감(丹城縣監),경상도도사,익산군수,예조정랑,지평(持平)을 거쳐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이름.
동생 영조(榮祖)와 함께 영남에서 문명(文名)을 떨쳤다. 저서에 학호집(鶴湖集)이 있다.
146}홍가신(洪可臣)1541(중종36)∼1615(광해군7).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남양(南陽).자는 흥도(興道),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父는 온(昷)이며,母는 신윤필(申允弼)의 딸.
1567년(명종22) 진사시에 합격,강릉참봉(康陵參奉),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형조좌랑,지평,안산군수,수원부사,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 때 파직당하였다가 파주목사,홍주목사로 부임하여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1등,영원군(寧原君)에 봉해지고,강화부사,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
개성부유수,광해군 초 장례원정한성부우윤 겸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1610년 형조판서에 이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아산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장(文壯).
{147}유조생(柳肇生)
본관은 전주(全州)임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3등에 책록됨.
{148}최숭(崔嵩)임신1572(壬申1572)생,자(字)중망(中望),
본관(本貫)수원(水原)부(父)최언국(崔彦國)조부(祖父)최걸(崔傑)증조부(曾祖父)최도만(崔燾萬)
외조부(外祖父)한팽수(韓彭壽),母는 정인서(鄭麟瑞)의 딸,
선조(宣祖) 34년(신축,1601년), 식년시(式年試) 을과3(乙科3)급제 훈도(訓導),판관(判官)을 지냄.
{149}이순(李楯)정축1577(丁丑1577),자(字)숙한(叔閑),
본관(本貫) 전주(全州),부(父)이제민(李齊閔),조(祖)함원부수 이옹(咸原副守 李顒),증조(曾祖)영신수 이이(永新守 李怡)
광해군(光海君)4년(임자, 1612년),식년시(式年試)병과18(丙科18)급제,교서관 교리(校書館 校理)를 역임.
{150}이호의(李好義)1560(명종15)∼?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자는 사의(士宜).헌보(憲輔)의 손자,교관(敎官)천경(天擎)의 아들,母는 유헌(柳憲)의 딸.
1597(선조30)년 모화관정시문과(慕華館庭試文科)에 갑과로 급제,병조좌랑정언,사서,지평,평안도도사,헌납,장령,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1609년(광해군1)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동부승지,우승지,1615년 형조참판,1623년(인조 1) 양양부사로 나감.
{151}조직(趙溭)1592(선조25)∼1645(인조23).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자는 지원(止源),호는 지재(止齋).父는 수이(守이)이며,母는 찰방 정남경(鄭南慶)의 딸.
1613년(광해군5)폐모사건이 일어나자,
나이 22세에 나라의 기강을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아우 옥(沃)에게 부모의 봉양을 부탁한 다음 폐모반대의
항소(抗疏)를 올리자 광해군은 크게 노하여 반드시 뒤에 사주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정국(庭鞫)을 열어 신문하였지만,
조정의 그릇된 처사를 바르게 하려는 뜻에서였음을 진술하고, 이듬해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석방되어
호조좌랑,형조좌랑,형조정랑,배천,간성고성군수를 역임함.1659년(효종10) 대사헌으로 추증, 한천군(漢川君)에 추봉됨.
{152}김익청(金益淸)1582(선조15,임오)생,
본관 안동(安東),자 이경(而敬),구전(苟全)선생의 문인으로 여절교위(勵節校尉)를 역임.
{153}조식(曺植)1501(연산군7)∼1572(선조5)조선 중기 학자.자는 건중(楗中),호는 남명(南冥).
본관은 창녕(昌寧)어려서부터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섭렵하고 천문,지리,의약·병략(兵略) 등에 널리 통했으며,
또한 좌구명(左丘明)유종원(柳宗元)의 문장과 노장학(老莊學)에 심취,초탈(超脫)의 경지에 이르렀다.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처음 읽고 크게 깨우친 바 있어 이후로 유학에만 힘써 대학자로 추앙받았다.
그의 학문목표는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거경실행(居敬實行)하는 데 있었다.
중종 때부터 명종·선조 때까지 삼조(三朝)에 걸쳐 그에게 여러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 덕천동(德川洞)에서 선비를 모아 강학(講學)에 힘쓰는 등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문하에서 오건(吳健)김우옹,정구(鄭逑)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한 학파를
형성하였으며,그의 문인들은 스승의 기상과 학풍에 영향을 받아 대체로 은일적(隱逸的)인 학풍을 지녔고
특히 절의(節義)를 중시하였다.
그의 제자 가운데 임진왜란 때 정인홍,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 등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운 사람이
60여 명에 달했다.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진주(晉州)의 덕천서원(德川書院),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됨.
저서로 남명집. 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
{154}조경기(趙慶起)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동학유생(東學儒生)으로 권념(權념),정복형(鄭復亨),심지한(沈之漢),
구방(具枋),노원범(盧元範),이원충(李元忠) 등과 함께 폐모론을 주도하는 이위경(李偉卿)정조(鄭造)윤인(尹認) 등을
극형에 처하도록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상소에 참여한 21명과 함께 유적(儒籍)에서 삭제당하고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門外黜送)가 귀양 갔다.
{155}전형(全瀅)1565년,을축생,자(字) 택보(澤甫),
본관(本貫)용궁(龍宮),부(父)는 전수백(全壽百),전원발(全元潑)의 후손으로 진사(進士)에 오르고
선조(宣祖)39년(1606년),증광시(增廣試) 병과21(丙科21)급제,충청,서호 도사(忠淸,西湖 都事)를 역임,
{156}최경일(崔敬一)1585 을유생,자(字)는 사흠(士欽),
본관은 충주(忠州),광해2 (경술,1610년) 식년시(式年試) 丙科22 급제,
그의 아들인 천주(天柱:1607년생)와 동주(東柱:1610년생)가 인조(仁祖)17년(1639년)식년시(式年試)에 같이 급제 함.
{157}강홍립(姜弘立)1560(명종15)∼1627(인조5)) 조선 중기 무신.자는 군신(君信),호는 내촌(耐村).
본관은 진주(晉州).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설서(說書), 검열(檢閱),
1605년(선조38)도원수(都元帥)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보덕(輔德),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순검사(巡檢使)를 역임, 1618년 진녕군(晉寧君)에 봉해짐.
그해에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원병(援兵)을 보내게 되자,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해
1619년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휘하에 들어가 부차(富車)에서 패하자 휘하 전군을 이끌고 청(淸)에 항복.
다음해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김경서(金景瑞) 등 10여 명과 함께 계속 억류당하다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군의 선도(先導)로서 입국하여 강화(江華)에서의 화의(和議)를 주선하고
국내에 머물게 되었으나 역신(逆臣)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사후에 복관(復官)되었다.
{158}정언각(鄭彦慤)1498(연산군4)∼1556(명종11).
본관은 해주(海州),자는 근부(謹夫),진사 정희검(鄭希儉)의 아들,조선 중기의 문신.1533년 별시 문과에 급제,
검열,박사,정언,지평,장령,교리,응교,사간,사옹원 정,의정부 사인,검상,
1547년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비방하고 이기(李기) 등의 전횡을 비방한 양재역 벽서사건을
알려 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등을 죽이고 권발,이언적(李彦迪) 등 20여 인을 유배시키는 동시에
윤원형(尹元衡)의 정권 장악에 기여하였다.
이후 도승지,판결사를 지내면서 윤원형의 권세를 믿고 온갖 횡포를 자행,
전라관찰사로 나갔다가 이열(李悅)의 노비를 약탈하여 파직되기도 함.
이듬해 서용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경상도관찰사,
한성판윤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낙마사고로 죽음.
{159}박홍선(朴弘先)기사1569(己巳1569)생,자(字) 계술(季述),
본관(本貫)함양(咸陽),부(父)박응원(朴應元),조부(祖父)박세장(朴世長),증조부(曾祖父)박식정(朴植精),
인조(仁祖)6년(무진,1628년), 별시(別試) 을과1(乙科1)합격,사헌부 감찰(監察)을 역임,유학(幼學)때 상소를 올림,
{160}윤효전(尹孝全)1563(명종18)∼1619(광해군11).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초명은 효선(孝先),자는 영초(詠初),호는 기천(沂川).父는 희손(喜孫),母는 이수(李琇)의 딸.
휴(鑴)의 아버지이다.
1605년(선조 38) 현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왕자사부를 거쳐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1613년(광해군5)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대사헌이 되었을 때는 임해군(臨海君)옥사를 모사한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의 꾐에 빠져 곤혹을 치렀다.
그 뒤 지의금부사에 이르고 1617년 경주부윤을 역임.일찍이 호남의 군수로 재임시 군도사(郡都事)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시험을 관장하던 중 시제가 휘호에 저촉되어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1}이수일(李守一)1554(명종9)~1632(인조10).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자는 계순(季純),호는 은암(隱庵).父는 난(鸞),母는 우담령(禹聃齡)의 딸.아들이 우의정 완(浣)이다.
1583년(선조16) 무과에 급제,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1590년 선전관.1592년 장기현감,
임란 때 예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으나 패함.이듬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고,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북도방어사북도병마절도사,남도병마절도사,경상우도병마절도사,
길주목사,수원부사,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1616년(광해군 8)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이괄(李适)의 난 때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출정하여 안현(鞍峴)에서 반군을 대파해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형조판서를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됨. 시호는 충무(忠武).
{162}이정(李淀)1589(선조22)∼1668(현종9).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초명은 종호(淙薃).자는 노천(老泉).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수일(守日)의 아들.
1612년(광해군4)진사시에 합격,1629년 금오랑(金吾郎)에 제수됨.
이이첨(李爾瞻)이 그를 그의 당(黨)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 뒤 직장으로 승진하였지만 사직함.
인조반정 뒤 거창현감, 이괄(李适)의 난 때는 아버지를 도와 반군(叛軍)을 막고 그 뒤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상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이를 핑계로 사양하였고, 이어 장례원판결사로 임용되었다.
1661년(현종2)노비의 일이 궁액(宮掖)으로 확대되어 왕과 마찰을 빚자 파직되고,
1668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고 경림군(慶林君)에 습봉(襲封)되었다.
{163}유혁(柳湙)정묘1567(丁卯1567)생,자(字)호숙(浩叔),
본관(本貫)흥양(興陽),부(父)유몽표(柳夢彪),조(祖)유탱(柳樘),증조(曾祖)유충관(柳忠寬),외조(外祖)이택(李澤),
처부(妻父)임발(林潑),숙(叔)유몽인(柳夢寅),형(兄)유숙(柳潚),선조(宣祖)30년(1597년),별시(別試)병과2(丙科2),
1616(丙辰)급제,승지(承旨)를 역임.
{164}이일장(李日章)1572(선조5)∼1623(인조1)조선중기의 무신.
본관은 星州,자는 회숙(晦叔),호는 회사.
초계에서 태어난 그는 무과에 등재하여 정유재란 때 충무공 휘하에서 무공을 세웠고,
선조 34년(1601년)에 通訓大夫.戶曹佐郎을 특배(特拜)하였고 광해조에 고성현령을 지냈다.
진전면 봉곡리 회사정에서 향사하고 있다.
{165}박이서(朴彛敍)1561(명종16∼1621(광해군13)조선 중기의 문신.초명은 문서(文敍),자는 서오(敍吾),호는 비천(泌川)·
동고(東皐).본관은 밀양(密陽).1588년(선조21)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성균관학유,군자감참봉,승문원주서,
임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순찰사종사관,1599년 홍여순(洪汝諄)등의 세력을 탄핵하였다가 관직을 빼앗기고 8년간 은둔.
1607년 대사령(大赦令)으로 복직되어 장악원첨정,부응교,우부승지,호조참의,이조참판,도총부부총관 등을 지냄,
폐모론이 대두된 뒤 여러 차례 대북파를 탄핵하다가 1615년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1620년 진위사(陳慰使)로 명(明)나라에 갔다 돌아오던 중 죽었다. 시호는 충간(忠簡).
{166}임혁(任奕)전 봉화현감.고을 관장(官長)으로서의 횡포를 부린 사람.
1608년 학문에만 전념하던 구전(苟全)선생이 관아에 와서 인사를 안 한다고 선생의 두 아들을 잡아 가두고
옥사를 일으켜서 할 수없이 선생은 부모를 모시고 봉화를 떠나 예안 남양리로 이사 가게 만든 사람.
당시는 고을 관장의 눈 밖에 나면 록명(錄名)이 안 되어 과거를 못 보므로 선생께서는 이사를 가서
그 다음해 풍기 동당시(東堂試)의 종장(終場)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고 그 이듬해에 복시에서 급제했다.
{167}윤수민(尹壽民)을묘1555(乙卯1555)생,조선 중기의 문신,자(字)인수(仁叟),
본관(本貫)파평(坡平),부(父)참판 윤길(尹吉),조(祖)윤봉종(尹奉宗),증조(曾祖)윤렴(尹렴),母는 조영조(趙榮祖)의 딸,
처부(妻父)한극창(韓克昌),자(子)윤양(尹讓),선조(宣祖16)(계미,1583년),알성시(謁聖試)병과2(丙科2)급제,
예조참의,예조참판,1615(광해7)년에 대사간,대사헌(大司憲)에 이름.
{168}나인(羅紉)신미1571(辛未1571)생,자(字)자용(子佣),
본관(本貫)안정(安定),부(父)나윤충(羅允忠),조(祖)나빈(羅濱),증조(曾祖)나운걸(羅云傑),외조(外祖父)이악(李渥),
처부(妻父)조찬(趙璨),자(子) 나만기(羅萬紀),나만엽(羅萬葉),선조(宣祖)36년(계묘,1603년),정시(庭試)병과2(丙科2)급제,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
{169}권엽(權曄)1574(선조7)∼1650(효종1).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초명은 계(啓),자는 제중(霽仲),호는 구사(龜沙).오(悟)의 아들.1615년 알성문과에 장원,
호군 겸 오위장,분병조참의,평해군수,박정길(朴鼎吉)의 사주를 받은 사형수의 무고로 면직되어 충주에 은거.
1624년(인조2)동지사 겸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5년 무고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바로 호군으로 서용(敍用)되고, 이듬해 사건에 연좌되어 또 파직.
1627년 파주목사를 거쳐 1635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 환도한 뒤 강릉부사,
1639년 오위도총부부총관·고성군수를 역임.
{170}홍명원(洪命元)1573(선조6)∼1623(인조1).
본관은 남양(南陽),자는 낙부(樂夫),호는 해봉(海峰).홍영필(洪永弼)의 아들.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30년(1597)문과에 급제,검열(檢閱),설서(說書),사서(司書),헌납(獻納)이 되어 권신(權臣)들을 탄핵하다가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 좌천,광해군 2년(1610)에 필선(弼善),장령(掌令),1614년에는 승지(承旨),광주목사(光州牧使),
광해군 초에 후금(後金)과 수교한 일로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급고사(急告使)로 명나라에 다녀옴,
계속된 후금(後金)의 위협에 대해서는 배금(排金)을 주장 인조반정(仁祖反正)후 기보관찰사(畿輔觀察使)가 됨.
그를 장덕군자(長德君子)라 일컬었다.
{171}양극선(梁克選)을해1575(乙亥1575)생,자(字)군거(君擧),
본관(本貫)남원(南原)부(父)양여지(梁汝止)조부(祖)양경우(梁慶祐)증조(曾祖)양천수(梁千壽)외조(外祖) 정호지(鄭好智),
선조(宣祖)39년 (병오1606년),식년시(式年試)병과11(丙科11)급제,목사(牧使)를 역임.
{172}도목정사(都目政事)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해마다 관원의 성적(成績)을 조사하여 그 결과에 따라 영전, 좌천 또는
파면시키던 일. 도목(都目)도정(都政)이라고도 한다.
매년 6월(권무정(權務政))과 12월(대정(大政)) 2차례에 걸쳐 관리 적격자(適格者)를 심사하여 관리의
출척이동(黜陟異動)을 하였는데,이에 관한 사령(辭令)을 도목, 관리의 재직기간과 근태(勤怠)공과(功過)재부(才否) 등을
기록한 전형(銓衡)의 자료를 정안(政案)이라 하였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빈 관원의 자리는 도목 이외는 새로 보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외도 있어 1년에 4도목의 인사이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173}이상급(李尙伋)1571(선조4)∼1637(인조15).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자는 사언(思彦),호는 습재(習齋).희선(喜善)의 아들.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의 정자,저작,박사,형조좌랑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평안도사,형조정랑,풍기군수 때 경상도관찰사로
정조(鄭造)가 임명되자,그의 속관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고향 성주로 낙향,인조반정 후 장령,집의,단천군수,
연안군수,보덕,병조참지,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하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간 형 상길(尙吉)을 찾아가다가,도중에서 적병에게 살해됨.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 시호는 충강(忠剛).
{174}이지화(李之華)1588(선조21)∼1666(현종7).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자는 이실(而實),호는 다포(茶圃)부강거사(浮江居士)동계(東溪).祖는 경두(慶斗),父는 종문(宗文),
母는 전경창(全慶昌)의 딸.장현광(張顯光)의 문인.161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설서,검열,대교를 역임,
1621년에 정언으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다가 파직.인조반정 후 예천군수,정주.김해.창원·파주목사,
병조참의,예조참의,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1654년(효종5)함양군수로 있다가 안렴사(按廉使)의 배척을 받고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남.
{175}박동명(朴東命) ?∼1636(인조1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순천(順天).자는 시응(時應),호는 매은당(梅隱堂).춘무(春茂)의 아들.
임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의병에 참전,전란이 평정된 뒤 선전관(宣傳官),태안군수,제주목사 등을 역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청나라 군사의 공격을 받아 분전하다가 전사함.공조판서에 증직됨.시호는 충경(忠景).
{176}제용감(濟用監)현재 종로구 중학동에 있던 모시[苧]마포(麻布)피물(皮物)인삼(人蔘)등의 진상과,사여(賜與)되는
의복,사라(沙羅)능단(綾緞)에 관한 일, 교환수단으로 통용한 포화(布貨)의 관리 등을 맡아본 곳이다.
1392년(태조1)설치한 제용고(濟用庫)를 1409년(태종 9)에 이 이름으로 고치고,
1461년(세조7)도염서(都染署)를 병합,염직(染織)에 관한 일도 맡아보았다.
관원으로는 겸직인 제조(提調)정(正:정3품)부정(副正:종3품)첨정(僉正:종4품) 판관(判官:종5품)주부(主簿:종6품)
직장(直長:종7품)봉사(奉事:종8품)부봉사(副奉事:정9품)참봉(參奉:종9품)각 1명을 두었다.
{177}이정혐(李廷馦)임술1562(壬戌1562)생,자(字) 사훈(士薰),
본관(本貫) 경주(慶州),부(父)이탕(李宕),조(祖)이달준(李達遵),증조(曾祖)이거(李筥),외조(外祖) 김응진(金應辰),
처부(妻父)오이순(吳以順),1594(선조27)년 별시(別試)병과6(丙科6)급제,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
{178}강유(姜瑜)1597(선조30)~1668(현종9)조선 중기의 문신.자는 공헌(公獻),호는 상곡(商谷),
1624년(인조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1627년 예빈시직장,주전파.1639년 최명길의 천거로 병조좌랑,
지평,1651년 의주부윤, 함경도 병마절도사,1656년 승지,수군절도사,충청도관찰사,
1659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황해도 관찰사,1661년(현종2) 수원부사,승지,황해도관찰사,
1664년(현종 5)우부승지,1666년 강릉부사,호조참의를 역임,이조판서에 추증, 시호는 충선(忠宣).
{179}이사맹(李師孟)1570(선조3)년,경오생,자(字)호연(浩然),개명(改名)이사성(李師聖),
본관(本貫)전주(全州),부(父)이승기(李承器),조(祖)이응(李應),증조(曾祖) 이련(李璉),외조(外祖)변홍(邊洪),
처부(妻父)유순경(柳舜卿),광해군(光海君)3년(1611년) 별시(別試) 을과1(乙科1)급제,동지중추부사,형조참의에 이름.
{180}정세미(鄭世美)1583(선조16)∼1624(인조2).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자는 고원(高元),호는 동와(東窩).진(振)의 증손으로,祖는 좌의정 언신(彦信),父는협(協),
母는 조순명(趙順命)의 딸.1608년(선조41)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도사,승문원권지정자,검열,
1611년(광해군3) 수찬,정언,도호부사를 역임.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1}신경희(申景禧)?∼1615(광해군 7).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평산부원군(平山府院君)잡(砸)의 子,도순변사(都巡邊使)입(砬)의조카.1588년(선조21)음보(蔭補)로
임관.이듬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시 그 일당인 선홍복(宣弘福)을 붙잡은 공로로 6품직에 발탁되어
제용감주부(濟用監注簿),고산현감,임란 시 권율(權慄)의 휘하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행주대첩보(大捷報)를
제일 먼저 왕에게 보고 면천군수,중화부사 등을 역임,재령군수로 재직 중 장계(狀啓)날조로 삭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1611년(광해군 3)수안군수에 등용,
1615년 수원방어사 시절에 양시우(楊時遇)김정익(金廷益)소문진(蘇文震) 등과 반역을 모의하여 능창군(綾昌君)
전(佺)을 추대하려 하였다는 무고로 장살(杖殺)됨.
{182}지제교(知製敎)조선시대 관직의 하나.왕에게 교서(敎書) 등을 기초(起草)하여 바치는 일(文翰)을 담당하였다.
조선 초에는 별도로 문신 10명을 선정하여 지제교를 겸임하게 하였으며, 세종 때는 집현전 학사에게 겸임하게 하였다.
그 뒤에는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정3품) 이하 부수찬(副修撰;종6품)까지의 관원이 모두 지제교를 겸임,
이를 내지제교(內知制敎)라 하였으며 대제학이 이조판서와 상의,홍문관이나 규장각의 관원이 아닌 6품 이상의 문관을
초계(抄啓), 지제교를 겸임시켰는데, 이를 외지제교라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내외의 구분이 없다.
{183}안전(安佺)갑오1534(甲午1534)생,자(字) 자진(子眞),
본관(本貫)순흥(順興),부(父)안충보(安忠輔),조(祖)안서봉(安瑞鳳),처부(妻父)방윤지(方允止),
명종(明宗) 19년(갑자,1564년),식년시(式年試)병과3(丙科3)급제,금부도사,사정(寺正)을 역임.
{184}정구(鄭逑)1543(중종38)∼1620(광해군12).본관은 청주(淸州),자는 도가(道可),호는 한강(寒岡).
판서 정사중(鄭思中)의 아들,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성주 출신,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서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구전(苟全:金中淸)선생의 만년의 스승으로,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으나 유일로 천거되어
선조 13년(1580)창녕현감,사헌부지평,동복현감,교정랑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를 교정.
1591년 통천군수를 지내고 이듬해 임란이 일어나자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킴.
1594년부터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목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광해군 즉위년(1608)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낙향.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구하기위해 상소하였고 그 후에는 벼슬을 단념하고 후학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는 경학,병학(兵學),의학,역사,천문,풍수지리 등 다방면에 통달하였는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심경발휘(心經發揮),심경후론(心經後論),고금충모(古今忠謨),
고금치란제요(古今治亂提要),의안집방(醫眼集方),광사속집(廣嗣續集),함주지(咸州誌),성현풍(聖賢風),태극문변(太極問辨)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심의제도(深衣制度),무이지(武夷志),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
와룡지(臥龍志),역대기년(歷代紀年),경현속록(景賢續錄),관혼장설의(冠婚葬愆儀),갱장록(羹墻錄) 등이 있다.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에 추증,회연(檜淵),천곡(川谷),운곡(雲谷),관산(冠山),학령서원(學翎書院) 등에 제향 됨.
{185}찬집청(撰集廳)조선시대 문헌자료의 찬집을 위하여 설치한 임시관서.
처음에는 1513년(중종8)으로 연산군일기를 찬집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 뒤 대행왕(大行王)의 행장이나
시장(諡狀)을 찬집하고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으레 설치되었다가 국정에 부담이 되는 중요한 사안이 생길 때마다
폐지됨과 동시에 찬집의 업무도 중단되었다.
1516년 실록의 편찬을 위하여 남별궁(南別宮)의 빈터에 설치되고,
1536년 실록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설치된 일이 있고,
1614년(광해군 6) 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선조실록의 편찬을 위하여 설치되었으며,
1777년(정조 1) 영조의 행장과 시장을 편찬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그 후에도 역대왕의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개설되었다가 일이 마무리되면 폐지되곤 했었다.
{186}정영국(鄭榮國)1564(명종19)∼1623(인조1).조선 중·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덕(盈德).자는 방언(邦彦),호는 관원(灌園).계전(繼全)의 증손,祖는 윤인(允仁),父는 홍(鴻).
1594년(선조27)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병조좌랑,세자시강원사서,장령,해주판관,보령현감,대구판관,평안도도사,
은계찰방(銀溪察訪),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서 춘추관편수관,
이이첨 (李爾瞻)의 일당으로 활동,
해주목사가 되어서는 최기(崔沂)를 무고하여 옥사를 일으키는 등 비행을 자행하다가 인조반정 후 처형되었다.
{187}이지완(李志完)1575(선조8)∼1617(광해군9).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자는 양오(養吾),호는 두봉(斗峯).상의(尙毅)의 아들.1597년(선조30)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사서,형조정랑,이조정랑,홍문관부교리,사간,응교를 거쳐 세자시강원필선으로 왕세자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였다.
그 뒤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역대실록의 중간에 참여하였다. 1608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를 하였고,
광해군 초기에 승지, 대사간을 지냈다. 동지의금부사로 계축옥사를 다스려 형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우참찬,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다.
시문에 능하여 1606년 중국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 이호민(李好閔), 허균(許筠) 등과 접반하였고,
광해군 때에는 인정전정시 등에 대독관(對讀官)으로 자주 배석하였다.
여성군(驪城君)에 봉하여졌으며, 시호는 정간(貞簡).
{188}허난설헌(許蘭雪軒)1563(명종18)∼1589(선조22).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본명은 초희(楚姬).자는 경번(景樊),호는 난설헌.강릉출생.엽(曄)의 딸,
봉(篈)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워 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고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허균마저 귀양 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작품 일부를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그녀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89}김권(金權)1549(명종4)∼1622(광해군14).본관은 청풍(淸風),자는 이중(而中),호는 졸탄(拙灘),김식(金湜)의 손자,
김덕무(金德懋)의 아들.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13년(1580)별시 문과에 급제,승문원 정자,검열,전적,감찰,정언,수찬,헌납,
1590년 지평으로 기용되었다가 정철(鄭澈)의 일당이라 하여 삭직,임란 중에는 문학,교리,지평,사간,연안부사,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광해군 즉위 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 청풍군(淸風君)에 봉해지고,
호조참판,오위도총부 도총관,광해군 7년(1615)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유배지인 무안(務安)에서 죽었다. 인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90}김치원(金致遠)1572(선조 5)∼?.본관은 완산(完山),자는 사의(士毅),호는 탁계(濯溪),김장의 아들.
조선 중기의 학자로 이희안(李希顔)의 문인.선조 25년(1592)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낙동강에서 적선(敵船)의
운행을 차단하여 공을 세워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선조 36년(1603)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정자(正字),1606년 감찰,
행 충무위 부사과(行忠武衛副司果)로 춘추관 기사관,
광해군 즉위년(1608)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이듬해 대북파(大北派)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어 1627년 서흥 부사(瑞興府使)를 지냈다.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191}이상항(李尙恒)1588(선조21)∼1623(인조1).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완산(完山).자는 덕부(德夫).원우(元友)의 증손,祖는 노(輅)이교,父는 창후(昌後),母는 신진(申津)의 딸.
이이첨(李爾瞻)의 사위이다.1615년(광해군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설서,정언,사서,
충원현감(忠原縣監),문학,교리,응교 겸사서,이조좌랑,이조정랑,겸문학,수찬 등을 역임.
1613년(광해군5)에 유생(儒生)으로 이위경(李偉卿)의 폐모론(廢母論)에 동조하여 유적(儒籍)에서 제명당함.
이들은 이 일을 의거로 자처하면서 대론(大論)의 절목(節目)을 만들어 일을 완결 짓자고 여러 차례 왕에게 청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직후 참형을 당함.
{192}유대정(兪大楨)1552(명종7)∼1616(광해군8).
본관은 기계(杞溪),자는 경휴(景休).유호(兪灝)의 아들,조선 중기의 문신.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북평사(北評事)에 좌천되어 가던 도중 파직,
다시 등용되어 이천(伊川)현감.광해군 1년(1609)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612년 동지중추부사로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임.
1614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등 대북파(大北派)의 전횡이 심하자 사직상소를 올리고 낙향하였다.
1615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겸 비변사 당상,병조 참판 등에 등용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93}남관묘(南關廟)서울 남대문 밖 도동(桃洞)에 있었던 관우(關羽)의 사당으로
원래는 1598(선조31)년에 명나라 장수인 진인(陳寅)이 세운 휴양소의 후원 사당이었다.
관우는 충신의 전형으로 송나라 때 이후로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그를 무신(武神) 또는 재신(財神)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관우(關羽) 신앙의 본산인 동관묘가 지금도 서울 동대문밖에 있다.
속칭 성균관을 문묘(文廟)라 부른 데 비하여 동관묘는 무묘(武廟)라 할 만큼 격이 높았으며,
임진왜란 때 왜병을 물리친 것도 이 관우의 음덕으로 여겨 춘추에 베풀어진 대제(大祭) 때는
임금이 손수 무복(武服)을 입고 참례를 했다고 한다.
{194}이경현(李景賢)1579(선조12)∼1632(인조10)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명지(明之).父는 부사 상민(尙閔),母는 판관 이학수(李鶴壽)의 딸.
1610년(광해군2)세마(洗馬),1612년에 전옥주부(典獄主簿),전중도감(殿中都監),낭청,1617년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교,전적,형조정랑,직강,1623년(인조1)흥해군수,공조좌랑,
1625년에 관서에 가서 북쪽 여진의 사신인 모도사(毛都司)를 접반(接伴)하였다.
형조정랑을 거쳐서 고양군수,1627년에 수부랑첨정(水部郎僉正)을 거쳐 상례원통례가 되었고,
이듬해 정랑이 되었다가 군기시정(軍器寺正),군자감정(軍資監正),고원군수로 나갔다가,풍토병에 걸려 임지에서 죽었다.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사람됨이 폭넓고 천진하였다.
{195}이경의(李景義)1590(선조23)∼1640(인조18). 본관은 연안(延安),자는 자방(子方,子房),호는 만사(晩沙),
홍문관수찬 이세범(李世範)의 증손,이천현감 이국주(李國柱)의 손자,창성부사(昌城府使) 이상민(李尙閔)의 아들.
조선 중기의 문신,광해군 8년(1616)진사,1619년 선교랑(宣敎郞)으로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성균관 전적,
1623년 인조반정 후 공조,형조,예조좌랑을 지내고,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지평,정언,헌납,직장,병조정랑,시강원 문학,
홍문관 수찬,교리,헌납,군기시 정,장령,집의,사간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조달하고 어가(御駕)를 호종하였으며,
1638년 홍주목사, \호조참의, \1639년 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안눌(李安訥)과 친교를 맺었으며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196}김시주(金是柱)1575(선조8)∼1617(광해군9).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자는 이립(以立).호는 개호(開湖).父는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김용(金湧)이며,
母는 진보이씨(晉寶李氏)첨정(僉正)준(寯)의 딸이며,이황(李滉)의 손녀이다.
1609년(광해1)사마시에 장원하였고,1613년(광해 5) 문과에 급제,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발탁되었으며,
병부랑(兵部郞)에 이르렀다. 어버이에게 효심이 지극하였고,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저서로는 개호유고(開湖遺稿)가 있다.
{197}유진(柳袗)1582(선조15)~1635(인조13).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자는 계화(季華),호는 수암(修巖).영의정을 지낸 성룡(成龍)의 아들.
1610년(광해군2)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이 일어나 5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1616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으며,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학행으로 추천되어 봉화현감을 지냈다. 그 뒤 형조정랑,청도군수를 지냈으나
1628년 수포장인(收布匠人)에 대한 허위보고로 인해 파직 당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경상북도 안동 병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국문으로 쓴 임진록(壬辰錄)과 임자록(壬子錄)이 있다.
{198}정광경(鄭廣敬)1586(선조19년)∼1644(인조22). 본관은 동래(東萊),자는 공직(公直),호는 추천(秋川),
좌의정 정창연(鄭昌衍)의 아들,판서 정광성(鄭廣成)의 아우.아들이 정지화(鄭知和).조선 중기의 문신,
광해군 4년(1612)생원시와 증광문과에 차례로 급제,수찬,정언을 지내고,
이듬해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언론을 주장.
1616년부터 사간,상의원 정,사인,응교,전한,사성을 역임,
1618년 폐모론이 다시 제기되자 두문불출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정청(庭請)에 참가하였다.
인조반정 후 사간에 임명되자 정청참가를 자수하고 사퇴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 임금을 호종. 그 후 예조참의,충청도 관찰사,대사헌,대사간,이조 참판을 지냈다.
{199}백대형(白大珩)1575(선조8)∼1623(인조1).
본관은 수원(水原),자는 이헌(而獻),父는 백수종(白守宗),母는 이희덕(李希德)의 딸. 조선 중기의 문신,
1599년에 문과 급제,예문관 검열이 되어서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병조참판에 이르렀는데,
광해군 때 권신인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하였을 때 대비를 살해하고자
이위경(李偉卿)과 공모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습격하였는데,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 온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때문에 실패하였다. 인조반정 후 가장 먼저 주살되었다
{200}안경심(安景深)신미1571(辛未1571) 출생.
본관은 죽산(竹山).자는 자연(子淵).부(父)는 안언상(安彦鏛).조(祖)는 안종전(安從㙉).증조(曾祖)는 안방경(安邦烱).
광해군(光海君) 8년.병진년(1616) 증광시 병과29 합격.형조정랑(刑曹正郞),부사(府使)를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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