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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크로아티아
(1)국기 :
(2)위치 : 유럽 아드리아해 동부해안
(3)수도 : 자그레브
(4)화폐 : 쿠나(HRK)
(5)언어 : 크로아티아어
(6)인구 : 4,489,409명 (2010), 120위 전체순위
(7)면적 : 56,594㎢, 125위 전체순위
(8)기후 : 서안해양성기후, 온난습윤성기후, 지중해성기후
(9)종교 : 로마가톨릭 88%, 세르비아정교 4%
(10)종족 : 크로아티아인 90%, 세르비아인 5%
(11)정체 : 공화제
(12)의회형태 : 다당제&단원제
(13)국가원수 : 대통령 |
(14)정부수반 : 총리
(15)나라꽃 : 아이리스 Iris Croatica
(16)도메인 : HR
[유고 연방]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마케도니아어: Социјалистичка Федеративна Република Југославија, 세르보크로아트어: Socijalistička federativna republika Jugoslavija, 슬로베니아어: Socialistična federativna republika Jugoslavija)은 1945년에서 1991년까지 발칸 반도에 존재했던 공산국가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신 유고슬라비아 연방)과 대비해서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줄여서 구 유고 연방 또는 구 유고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고슬라비아로 가장 많이 불리고 있다. 1943년 11월 29일 요시프 티토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중부유럽 공산 국가와 달리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은 채 요시프 티토의 지도 아래 비동맹 운동 노선을 걸었다. 그래서 티토의 자주적인 정치노선을 티토주의라고 부른다.
티토가 사망한 이후 잠재되어 있던 민족 갈등이 악화되어 1991년 유고슬라비아의 구성 공화국이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분리 독립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치른 후 1992년 남은 공화국인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신 유고연방)을 결성, 구 유고연방은 역사에서 사라졌다.그러나 2006년 6월 5일 다시 몬테네그로가 신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참고] 본격적인 크로아티아 지역 여행을 하기 전에 유고 사태 전말에 대하여 살펴보자!
가. 사태의 본질
유고 사태는 각 공화국의 분리독립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르비아계 유고 연방간의 전쟁으로 귀결된다.
오래된 역사의 반목과 이질적인 성격의 민족이 발칸반도에 섞여 있는 탓도 있지만 세르비아의 범세르비아주의를 표방하는 과정에서 각 공화국의 자치권을 무시하면서부터 각 공화국의 독립운동은 가열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각 공화국 내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의 강력한 독립저지 투쟁이 가세해 더욱 복잡한 형태를 띤다. 서로 다른 종족간의 오랜 적대감으로 인해 연방의 지속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독립
91년 6월 25일 유고 연방에 속해 있으면서도 공화국으로서 자치권을 지녔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면서 내전의 불씨는 터졌다.
연방군은 즉각 슬로베니아 국경 거점을 장악하고 무력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연방군과 연방정부간의 불협화음과 연방정부와 슬로베니아의 지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곧 휴전에 들어가고, 슬로베니아는 별다른 피해 없이 EC의 평화 중재안에 합의해 독립이 실현됐다.
슬로베니아와 연방간 전쟁 후에 내전은 크로아티아와 벌어진다.
7월 들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공화국간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더니 곧바로 내전 상황으로까지 번졌다. 10월들어 연방군은 크로아 수도 자그레브을 공습해 대통령궁을 폭격했다.
대규모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전쟁은 EU가 세르비아에 대해 경제제재의 압력을 넣는 등 적극적인 중재활동을 펴 10여 차례의 휴전 끝에 92년 1월 완전 독립을 이뤄냈다.
EU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공식 승인하고 유엔 평화군을 유고내 전쟁우려지역에 파견하면서 대규모적인 내전은 피하게 된다.
세르비아계의 유고 연방은 독립승인 과정에서 크로아티아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유고 연방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은 곧바로 보스니아 공화국의 독립을 자극했다.
보스니아 공화국은 92년 3월 독립 찬반투표를 통해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주민의 30%를 차지하는 세르비아계가 투표 거부와 독립반대를 외치면서 공화국 곳곳에서 유혈 사태를 촉발했다.
보스니아 내전은 다른 유고연방의 내전과는 달리 보스니아 자체의 내전으로 4백여만 공화국 주민 가운데 44%인 회교도와 17%인 크로아티아계가 33%인 세르비아계와 치르는 전투양상을 보였다.
이후 사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화되면서 인접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자민족 보호를 구실로 내전에 개입하면서부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92년 6월 유엔 안보리는 유고 연방에 경제제재를 결의하는 등 세르비아계의 보스니아 철수를 촉구했으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는 못한다.
세르비아는 내전 1년만에 보스니아 영토의 70%이상을 차지했고 동시에 크로아티아가 20%, 회교정부가 10% 정도를 차지했다.
전쟁 도중 세르비아 민병대는 보스니아 내의 회교도와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하고 강제추방시켰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의 잔학한 `인종청소'가 국제사회를 크게 자극했다.
93년 3월 유엔과 EU측이 마련한 국제 평화인인 벤스-오웬안이 무위로 끝난 뒤 영토분할에 대한 회교정부와 크로아티아계간의 의견이 충돌함에 따라 세르비아에 대항하던 양자간의 연합전선도 무너졌다.
이로 인해 3개 세력이 서로 대립하는 3국 전쟁으로 전개됐다.
내전이 장기화되자 유엔과 EU는 세르비아 민병대를 지원하고 있는 신유고 연방에 대해 92년 무역 금수조치, 93년 무역봉쇄 및 해외자산 동결조치, 공습경고 등을 내놓았다.
94년 4월에는 유엔은 나토 공군기를 동원해 세르비아계가 주둔하고 있는 고라제를 수차례 공습했으나 세르비아의 강력한 저항 및 평화유지군 억류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94년 12월 카터 전 미대통령의 중재로 세르비아계가 평화협상안에 합의함에 따라 일시 평화의 무드가 감돌았으나 내전은 3개월만에 속개됐다.
95년 5월부터 8월 사이 나토군이 세르비아 공습을 수차례 재개하고 8월에는 크로아티아가 자국내 세르비아 지역에 무차별 포격을 가함으로써 전쟁은 더욱 확대됐다.
서방은 세르비아 공습과 함께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노력도 병행했다. 협상의 초점은 영토의 분할방법. 초점은 영토의 70%를 점령하고 있는 세르비아에 50%만 차지하도록 유도하는 일이었다.
95년 12월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보스니아 내전은 막을 내린다. 평화 성사를 위해 나토는 2주일간 공습을 계속해 세르비아 점령지를 50%까지 축소시켰다.
평화안 주요 내용은 회교-크로아티아 연방이 51%의 영토를 갖고 49%를 세르비아계 공화국이 갖되 보스니아 1국 체제로 하는 `한지붕 2가족' 형태를 띠는 것이다.
평화 유지를 위해서는 나토의 지휘를 받는 6만명의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기로 했다.
이로써 3년 7개월동안 끌었던 보스니아 내전은 20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3백여 만명의 난민을 양산한 채 일단 막을 내렸다.
※ 유고 내전 일지
1990년 : 구 유고 6개 공화국 최초 다당제 선거 실시,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대통령 당선
1991.6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각각 독립선포, 유고군 슬로베이나 공격
1991.7 : 크로아티아공화국에서 크로아 정부와 세르비아계간 내전 발발
1992.1 : 유엔 중재로 크로아티아 휴전
1992.2 : 크로아티아에 유엔평화유지군 파병, 보시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선언
1992.4 :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수도 사라예보 장악, 서방 보스니아 승인
1993.4 : 유엔안보리 사라예보 제파 비하치 등 6개도시 회교도를 위한 안전지대 선포
1994.3 : 보스니아 회교 정부와 크로아티아계 유엔중재로 종전
1995.1 : 보스니아 4개월간 잠정휴전
1995.5 : 휴전 만료. 크로아티아 영내 세르바아계 기습. 세르비아계 자그레브 보복 폭격
1995.7 :세르비아계 안전지대 스레브니차 제파 점령
1995.8 : 크로아티아, 영내 세르비아계 자치지역 크라이나 전면공격
1995.12: 미국의 중재로 보스니아 평화안 성사
※ 코소보 사태!
코소보 지역은 본래 세르비아지역이었으나 1389년 세르비아가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 패배하면서 코소보지역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이곳을 지배하면서 이슬람계인 자국내 알바니아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지금은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 인구의 90%(1백80만명)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이 지역에는 세르비아계가 일구어 놓은 수많은 유적지와 교회들이 밀집해 있어 세르비아로서는 성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20세기 초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코소보에서 물러나면서 코소보는 세르비아에 통합되면서부터 이 지역의 민족분규는 시작된다. 세르비아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코소보에 세르비아와 오랜 원한 관계에 있었던 이슬람인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은 세르비아인에게는 역사적인 자존심문제에 관련되는 일이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의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1989년 '대 세르미아 민족주의'를 제창하면서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알바니아어의 사용을 금지하며서부터 코소보문제는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책은 알바니아인들의 저항을 가져와 지하 무장단체인 코소보해방군(UCK)을 중심으로 강력한 독립운동을 펴게 만들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종식으로 한동한 잠잠했던 발칸반도가 다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 것은 신유고연방의 자치주 코소보사태가 벌어지면서였다.
코소보는 알바니아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면서 영토는 신유고연방에 속해 있는 자치주로서 늘 분리독립을 꿈꿔왔다. 종교적이라든지, 민족자체도 다른 코소보인들은 중앙정부로부터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해서 항상 불만이 가득차 있었다. 실제로 구유고연방국가중에서 가장 가난했던 자치주가 코소보였다는 사실은 유고연방으로 묶였던 시기에도 코소보는 항상 차별과 감시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코소보 사태는 1998년 3월 초 알바니아 분리주의 반군들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세르비아 경찰은 즉각 반격에 나서 반군은 물론 반군 거점 지역의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했다. 이에 맞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코소보해방군(UCK)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사태 발생 3개월 사이 세르비아 당국은 이른바 코소보 무장반군 소탕작전을 전개해 2백여 명의 주민을 살해했다.
세르비아는 5월 3일 대규모 소탕작전을 전개해 수십명의 알바니아계 반군을 사살했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의 인종청소를 피해 탈출 러시를 이뤘다.
미국과 EU는 6월 들어 코소보 사태에 대한 개입을 선언하고 나토 병력을 주변에 배치, 세르비아 병력철수 및 잔혹한 인종청소의 중단을 촉구했다.
세르비아는 서방에 화전 양면 작전을 병행하면서 알바니아계 집단 학살을 끊이지 않고 있으며, 코소보 해방군도 세르비아에 대응하여 게릴라식 응전에 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나토는 세르비아 공습을 경고하면서 시한내 평화협상을 이루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서방 6국의 중재 아래 협상 내용을 조율하고 있다. 주요 쟁점은 89년 박탈됐던 자치권을 3년간 한시적으로 코소보에 돌려주고 정부, 의회, 사법권을 갖게 하는 대신 외교 및 국방은 현재처럼 유고의 관할 하에 두는 방안이다.
알바니아계의 코소보 주민은 가장 원하는 평화안은 유고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이다. 그러나 유고입장에서 세르비아의 성지에 해당하는 코소보를 잃는다는 것은 강력한 세르비아 국가를 꿈꾸고 있는 세르비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만일 독립한다고 할 때 인구의 90%가 알바니아인인데 그들이 알바니아와의 합병을 시도한다면 그야말로 세르비아인으로서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알바니아와의 합병이 이뤄질 경우 발칸반도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나 다름없는 곳으로 남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거기다 나토역시 코소보 독립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독립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도 따르고 유럽내에 또다른 이슬람 세력이 생긴다는 것 자체도 그리 반갑지는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일단 나토는 양자간의 협상을 통해서 평화적인 해결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나토는 코소보의 자치를 허용하고, 세르비아군은 코소보 지역에서 철수하고, 이를 감시하기 위해서 나토군과 미군이 코소보에 주둔하자는 것이다. 독립보다는 자치를 인정하고 발칸의 뜨거운 감자 코소보를 EU의 영향력에 두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안은 세르비아와 코소보 모두에게 받아들이기는 그리 쉽지 않은 협상안이다. 알바니아는 알바니아대로, 세르비아는 코소보 문제가 국내문제이기에 외국군대의 주둔을 반대하고 있다.
발칸반도내 코소보 문제는 일단은 종료됐지만 코소보 문제는 아직도 많은 숙제를 남겨 놓고 있다.
코소보 문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등에 담긴 내용을 큰 줄거리로 단계적으로 처리될 전망이지만 국제평화유지군의 구성을 비롯한 기술적 문제와 함께 전쟁복구 난민복귀 등 보다 장기적인 문제도 산적해 있다.
협정에서 명시화되지 않은 부분 중에는 러시아에서 파견한 병력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중심이 된 평화유지군 사이 역할 분담 및 통합 지휘 문제가 있으며 알바니아계 무장 저항 세력인 코소보해방군(KLA)의 무장해제와 통제도 나토 내부에서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1백만명 가량으로 추정되는 코소보 난민의 안전한 귀환 문제는 유고측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토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부분으로 남아있을 전망이다.마이클 잭슨 마케도니아 주둔 나토군 사령관은 "코소보 난민 귀향 작전은 쉽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전쟁의 와중에 유고측이 난민들의 출생 및 결혼 증명서 등을 없애버린 것도 현실적 어려움이 될 것이다.또 난민들을 위한 국제 단체들의 지원 노력도 필요하다.
이밖에 세르비아계에 대한 보복 등 치안 문제를 둘러싸고 양측간 마찰이 불거질 가능성이 높고 협정에 따라 유적지 보호 명목으로 주둔할 유고 병력 1천명과 국제평화유지군 사이 무력 충돌도 우려된다.
이제 유고내전은 대부분은 종결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분쟁의 불씨가 다 꺼진 것은 아니다.보스니아와 코소보에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아직은 완전한 평화가 온 것은 아니다. 코소보의 경우는 아직도 나토군이 주둔하고 있고 코소보해방군이 아직도 활동중에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랜 세월동안 보스니아와 코소보는 서로 다른 이민족과 그런대로 공존의 법칙을 존중하면서 살아왔으나 지난 유고내전의 과정에서 그들은 당분간은 씻기가 어려운 상처만이 남았고 서로에 대한 증오심이 가라 앉으려면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출처] 유고 내전|작성자 알모
1.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크로아티아 말라카펠라 산과 플리에세비카 산에 있는 최초의 국립공원으로서 매우 아름다운 호수공원이다!
--울창한 숲속에 16개의 에메랄드빛 호수가 계단식으로 펼쳐지고 그 사이로 크고작은 많은 폭포들이 흘러내리는 천혜의 비경에 빠져든다!
-‘호수와 나무 요정들이 사는 숲'이라고도 불리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수많은 폭포로 연결되는 16개의 호수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 16개의 호수는 높이가 503m~636m에 이르며, 수심은 최고 1~47m로 다양한 형태의 호수와 수많은 폭포들, 20 여개의 동굴이 조화를 이룬 세계 최고의 명소중 한곳.
- 1979년 세계 자연 유산으로 등재됨
(아래)입장권에 그려진 안내지도!
(아래) 국립공원 매표소!
(아래)등산로 입구!
(아래)아름다운 호수와 폭포 풍경들~~!
(아래)요정이 살 것 같은 에메랄드빛 호수!
(아래)호수에는 송어와 피래미, 가재, 개구리, 뱀 등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한다!
(아래) 커다란 야생버섯!
(아래)등산로 산책중에 나무 밑에서 잠시 간식을 먹는 중!
(아래)호수 유람선을 타기 위해 공원내 셔틀버스를 타고 선착장으로 이동!
(아래) 또 다른 코스로 트래킹! 다양한 루트가 있어 개인별 체력이나 시간을 고려하여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아래)트래킹을 마치고 유람선을 타기위해 선착장으로 이동 중 소나기를 만나 흠뻑 젖었다! 여름 날씨에도 비를 맞으니 무척 춥다! 여름이라도 이곳을 찾을 때는 날씨에 상관 없이 반드시 우의와 자켓을 꼭 챙기시도록......!!
--유람선을 타고가는 중에도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계속 되었다! 완중님과 개골님은 너무 추워서 덜~덜~덜~몹시 떨어야 했던 곳이다!
(아래) 8. 5일 아침!
--우리가 이틀 동안 묵었던 아름다운 팬션을 떠날 때가 되었다!
(아래)팬션 전경!
(아래)떠나는 날 아침식사 중!
(아래)아침식사 후 식당 앞 풀밭에서 이향민 쌤이 4잎 클로버 여러 개를 발견하였다!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보다~~!!
첫댓글 너무 그립고 예쁜 글 감사!
여행하는 동안 오아시스처럼 희망과 웃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넘 예쁘네요.
가서 보면 더 멋있을 것 같네요..
아름답던.. 플리트 비체.... 비와 함께한 추억 잊을수 없겠죠? 저녁에 먹던 짜디짠 닭고기...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