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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보리떡, 그리고 美人의 눈물
하늘은 내내 흐려 있었다.
잿빛구름은 낮게 깔려 있었고, 음산한 바람이 몰아치는 것이
꼭 한바탕 눈이라도 퍼부을 기세였다.
천애령의 서북쪽으로 흑계(黑界)라고 불리는 협곡에 자리잡고 있는
푸른 번개족의 산채는 지극히 고요하기만 했다.
겨울은 상인들의 움직임이 가장 뜸한 계절이다.
그래서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이곳은 조용하기만 했다.
"악노붕이 보내온 은자 삼만 오천 냥과 몇 건의 소소한 상납으로
이번달 수입은 모두 사만 칠천 냥과 양가죽 삼백 장입니다."
제법 넓은 방(房)이었다.
바닥에는 푹신하게 양털가죽이 깔려 있고,
벽에는 은(銀)으로 만든 촛대 위에 열 개의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방의 기물은 간단한 팔선탁이 전부였다.
단조로운 느낌이 들긴 했지만 확 트인 것이 시원스러운 기분도 느끼게 했다.
팔선탁 앞에는 호피가 깔린 태사의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푸른 번개족의 대두령 냉검상이 보였다.
냉검상의 옆에는 애첩 가화가 그의 털옷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적은 숫자군."
"대상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앞으로 이 개월 정도는 상인(商人)들의 행동이 뜸할 것 같습니다."
냉검상에게 한달 간의 수입을 보고하는 인물은 율차(律車)라는 초로인이었다.
말이 초로인이지 그는 구 척에 가까운 장대한 체구를 지닌 거인이었다.
언제나 반쯤 풀어헤친 가슴팍에는 갈색털이 무성했고,
핏빛의 미륵불(彌勒佛)의 문신이 새겨져 있어 보기만 해도 왠지 공포감을 조성하는 인물이었다.
뿐인가?
산발한 머리에 부릅뜬 고리눈, 우락부락한 얼굴은
마치 지옥문을 지키는 흉신악살(兇神惡殺)을 보는 것 같았다.
생긴 것처럼 성격도 폭급하고 성정(性情)이 잔인한 인물이었다.
이미 사십대 중반부터
냉검상의 양부였던 붉은 눈 소찰력의 눈에 들어 부두령이란 직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지옥의 불이라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율차였지만 냉검상 앞에서는 언제나 공손했다.
냉검상은 바로그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율차는 냉검상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찰맹족(察盟族)의 양떼 수천 마리가 전염병으로 몰살한지라 이번 달 찰맹족에서 상납한 양가죽이
겨우 삼백 장에 불과한 것도 수입에 차질이 있었습니다."
냉검상은 콧등을 매만졌다.
"찰맹족장 우람부의 고민이 크겠군...... 어려울 때는 상납량을 많이 감해 주도록 해."
"우람부는 늙은 여우입니다. 그 동안 모아놓은 재산이 꽤 될 것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그들을 다그칠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냉검상은 털옷을 손질하는 가화를 흘깃 보더니 조금 무료한 듯 태사의에 깊숙이 등을 기대었다.
"참! 소타족의 새 족장 호파(胡巴)가 두령님께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지난 번 사건의 사죄와 충성의 뜻으로 보낸 것같습니다."
"선물?"
율차는 미묘하게 웃었다.
그러나 워낙 인상이 인상인지라 그것은 오히려 어색한 것이었다.
"매우 흡족하실 선물입니다."
소타족은 한 달 전 냉검상을 고립시키기 위해 모종의 음모를 꾸몄던
천산북로 동단에 위치한 토족(土族)이었다.
그러나 그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고
, 핵심인물인 장로 오인(五人)이 가이샤 강림의 축제날에 참수를 당했다.
소타족의 족장은 냉검상의 뜻으로 족장의 직위에서 밀려났고,
그의 조카인 호파가 새로운 족장으로 오른 것이었다.
냉검상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선물인가?"
"호파의 누이동생입니다."
"......?"
"소타의 여신(女神)이라 불리는 소타 제일의 미녀입니다."
냉검상은 싱긋웃으며 습관처럼 콧등을 매만졌다.
"미인이라.."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가화는 하던 일을 멈추고 율차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질투였다.
꽃중의 꽃(花中花), 미인 중에 미인
설청하는 요 며칠 간 자신이 지독한 악몽(惡夢)에 시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완벽하며, 완벽한 것보다는 결벽성이 있고, 그 결벽성과 함께 가장 화려한 인생을 즐기던 설청화.
그런 그녀의 생활은 거짓말처럼 하루 아침에 싹 변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이처럼 비참해질 수 있다고 상상해 보지 않은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도 믿어지지 않게 비참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즐기던 목욕, 향료가 들어가 황홀한 향기를 풍기고 약재가 들어가
피부를 탄력있게 꾸며주는 그런 목욕이 아니라도 좋다.
단지 알맞게 데워진 온수로 몸이라도 담그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못해
애절하기까지 했지만 목욕은 커녕 세수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도 좋다.
결벽증이 유난히 강한 그녀인지라 옷이라도 좀 갈아입어야 할 것이 아닌가?
천애령으로 잡혀온 이래 겉옷은 물론이요, 속옷조차 한 번도 갈아입지 못해
몸에서는 마치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화려함과 부친덕분에 누리는 부(富)의 혜택으로 세상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미각을 가진 그녀.
한 번 식사에 열 여덟 가지 이상 요리를 놓고 맛을 보는 것으로 식도락을 즐기던 그녀에게 제공되는 식사란
차디찬 보리떡과 냄새나는 물 뿐이었다.
비참해져도 이렇게 철저하게 비참해질 수 없었다.
그녀가 누리던안락함.
그녀가 누리던화려함과 행복함.
이런 것들은 천애령의 산채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간절히 갈구한다 해도 얻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단 며칠 사이에 자신은 이 세상이 아닌 지옥에 와 있다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녀는오만했고, 자존심이 있었다.
그녀는 도저히보리떡과 물을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사흘을굶었다.
뱃 속에서는 밥벌레들이 밥을 달라고 요동을 치고 눈 앞이 어릿어릿한 게 현기증이 일어났다.
한 번도 눈물을 흘려 보지 않았던 눈에서는 눈물마저 날 정도였다.
배고픔이란 본능 중에서도 생리작용 다음으로 참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간간이 보리떡이라도 먹고 싶은 불 같은 충동을 수백 번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자존심은 본능과 충동을 능가할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설청하는 식사가 오는 대로 모두 집어던졌다.
그리고 냉검상에게 세상에 저주란 저주는 다 모아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만이 이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도망을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녀의 거처에는 항상 늑대 같은 흉악한 인간들이
눈을 번뜩이며 지키고 있기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하루하루가 설청하에게는 지옥이었다.
"......"
차갑고 딱딱한나무침상에 걸터앉은 채 설청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은 썰렁했고, 그나마 채광도 잘 안돼 어두컴컴했다.
어찌보면 탈진해 보였고, 어찌보면 백치라도 된 듯한 설청하는 초췌하고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보석처럼 아름답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갇혀 있는 이 방은 짙은 소나무 냄새가 풍기는 통나무 집으로
우측 벽에 손바닥만한 창문 하나만 달랑 달려 있는 곳이었다.
창을 통해 밀려오는 어스름한 빛이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방 안이 환해졌다.
열린 문을 통해 두 사람이 들어왔다.
냉검상과 앳된 모습의 금루였다.
금루는 나무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저녁 식사로 역시 보리떤 하나와 물그릇이 있었다.
"......!"
냉검상을 발견한 설청하의 눈빛이 갑자기 매서워졌다.
무서운 적의를 담고 있는 눈빛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탈진하고 무력해 있던 눈빛이 아니었다.
"쯧쯧.. 무척이나 초췌한 모습이군."
"흥!"
"왜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냐?"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 지금의 설청하 눈빛이 그럴 것이다.
"이 모욕은 죽어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그대로 넘어갈 것 같으냐?"
냉검상은 싱긋웃었다.
그녀의 악에 받친 소리는 한 귀로 흘려 버리는 듯한 태도였다.
"왜? 식사가 마음에 안 드나?"
설청하는 냉검상을 쏘아보며 이빨을 갈아붙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을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내가 이곳을 빠져 나가기만 한다면 십만(十萬)의 관군을 동원해서라도
이곳의 비적단을 모두 토벌할 것이고 네놈을 효수(梟首) 시키고야 말 것이다."
냉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생각이군. 하지만 우선 배고픔을 면해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금루 식사를 주거라."
금루는 내내 불안한 기색이었다.
이제까지 냉검상 앞에서 감히 이렇듯 욕을 하는 사람을 그녀는 본 적이 없었고,
욕을 하는 설청하에게 냉검상이 웃기만 하는 것도 불안했다.
금루는 조심스럽게 나무 쟁반을 설청하에게 내밀었다.
"이따위 것을 내가 먹을 줄 아느냐?"
금루가 내미는쟁반을 받아 설청하는 냅다 바닥에 내팽개쳤다.
냉검상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아직 배가 덜 고픈 것인가?"
"흥!"
설청하는 고소하다는 듯이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냉검상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배고픈 것은 전혀 관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네 아름다움을 해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지.
이곳에 있는 한 네 아름다움은 너의 소유가 아니다. 나의 소유일 뿐이다."
"미친놈! 엉터리 같은 궤변만 늘어놓는군!"
순간 냉검상의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냉검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늘한 눈으로 한동안 설창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조용히 허리를 굽혀 보리떡을 집어들고 설청하에게 내밀었다.
"먹어라!"
"흥!"
냉검상은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그대로 설청하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설청하는 턱이 부서지는 듯한 아픔에 비명을 내질렀다.
"악!"
"입을 벌려."
"아악... 아.."
그녀는 비명을내지르면서도 악착같이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했다.
"먹어라! 먹어서 네 아름다움을 해치지 말아라!"
"읍! 으읍.."
설청하는 지독하게 버티었다.
한동안 보리떡을 먹이려고 애를 썼지만 냉검상도 어쩔 수는 없었다.
냉검상은 돌연 그녀의 턱을 놓아 주면서 손에 든 보리떡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기름진 음식이 그리우냐? 입에서 감미로우며 향기로운 음식들이 그리우냐?
푹신한 잠자리와 안락한 생활들이 그리우냐?
후후.. 네가 나의 손님이었다면 그런 것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알고 있어라. 너는 나의 적이다
. 나의 수하를 헤친 죄인이기에 이런 것도 과분하다는 것을 알아라."
설청하는 갑자기 악을 쓰며 대들었다.
"차라리 굶어죽어도 이런 음식은 먹지 않아!"
"후후후.. 대단한 계집이군."
냉검상의 표정은 섬뜩하리만치 무표정해졌다.
냉검상은 바닥에 팽개쳐진 보리떡을 가리켰다.
"네가 지금 이 떡을 주워서 먹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방법을 택할 것이다."
설청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날카롭고 매서운 눈길로 냉검상을 쏘아볼 뿐이었다.
냉검상은 냉소를 치며 손뼉을 쳤다.
그러나 문이 열리면서 통나무집을 지키는 수하가 빠르게 나타났다.
"두령님, 부르셨습니까."
냉검상은 설청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돼지 축사 빈 곳이 있느냐?"
구레나룻을 기르고, 왼쪽 눈 옆에 검은 사마귀가 달려 있어
어쩐지 음침한 인상을 풍기는 수하가 공손히 대답했다.
"있습니다. 너무 지저분하고 오물이 가득 차서 반 년쯤 방치해 둔 곳이 있긴 한데 너무 낡아서......"
냉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미녀를 볼 때 모든 남자들은 당연히 미녀의 육체에도 관심을 갖는 법이지."
대답을 한 수하는 냉검상의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냉검상은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여인은 참으로 아름답다. 내 생각에는 그 육체는 더욱 아름다울 것 같다.
저 고귀한 미녀의 옷을 모두 벗겨 빈 돼지 축사에 가둔다면
우리 푸른 번개족의 모든 형제들이 그야말로 멋진 구경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냉검상의 말뜻을 알아들은 수하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예에?"
"돼지 몇 마리와 함께 넣어두고 식사도 돼지와 똑같은 것으로 한다면
아마 며칠이 지나지 않아 보리떡도 얼마나 맛있는 음식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설청하는 그만낯빛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너...너..."
무슨 말인가를하려고 했지만 너무도 질렸는지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냉검상은 수하에게 명령했다.
"저 고귀한 미녀의 옷을 하나도 남김없이 벗겨 돼지축사로 끌고 가라."
"아, 알겠습니다."
엉거주춤 대답한 수하는 침상에 밀린 채 창백하게 질려 있는 설청하를 흘깃 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다.
어쩐지 이 세상의 여인이 아닌 것 같았다.
인간의 피육이 아닌, 성스러운 그 무엇인가로 뭉쳐진 듯한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손을 댄다는 것이 마치 하늘을 거역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두, 두령님..."
수하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냉검상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는 미라파샤의 명령을 거역할 셈이냐?"
"아,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다, 당장에 옷을 벗겨 끌고 가겠습..."
그에게 하늘보다 더 무섭고 존경스러운 존재는 미라파샤, 즉 냉검상이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수하는 설청하를 향해 어렵게 걸음을 떼어 놓았다.
"서, 설마...진짜로.."
설청하는 까무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배고픔이라면 악착같은 자존심으로 참겠지만...
벌거벗긴 채 반 년 동안 오물이 쌓여 있는 돼지축사에 갇혀 구경거리가 되야 한다니, 오오..
맙소사!
하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말도 안돼는 소리였다.
설청하는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발악처럼 외쳤다.
"그- 만! 차라리 나를 죽여! 나를 죽여! 그런 모욕은 정말 참을 수 없어!"
설청하에게 다가가던 수하는 그만 깜짝 놀라 멈추었다.
냉검상은 잠깐 설청하를 보았다.
절망과 당혹과 수치와 모멸감이 한데 어우러져 그녀는 몸부림치고 있었다.
냉검상은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달극, 물러가거라."
설청하 앞에서마치 죄라도 짓는 기분으로 서 있던 달극은 한숨을 내쉬고는
뒤도 안 돌아 보고 방 안을 빠져나갔다.
설청하는 머리를 감싸쥔 채 침상에 엎어져 오열을 삼키고 있었다.
냉검상은 그런 그녀를 향해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했느냐?"
설청하는 고개를 발딱 치켜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원망스럽게 냉검상을 쏘아보았다.
"나쁜 놈! 치사한 도둑놈! 네가 뭔데..
네가 뭐기에 나를 이처럼 수치스럽게 한단 말이냐?
그래 차라리 나를 죽여라. 더 이상의 모욕은 참을 수 없다. 차라리 죽는 것이 깨끗하다.
이 더러운 도둑놈아 죽여라..흐흐흑!"
냉검상은 냉정했다.
"수치와 모욕이 너를 참을 수 없게 한다면. 보리떡을 먹을 수 없다면, 네 스스로 죽을 용기는 있을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더라도 너는 자결할 수 있을 테니,
네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
설청하는 충격이라도 받은 듯 냉검상을 바라보았다.
사실 죽이라고 한 것은 마지막 발악과 같은 것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기분에 소리친 것이었다.
그러나 냉검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하자 오히려 뭔가 거꾸로 되면서
오히려 자신이 더욱 궁지에 몰려 버린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죽는다는 것, 말로는 쉽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끊는단 말인가?
"스스로 죽을 자신이 없다면.차라리 모욕을 견디어라. 보리떡을 먹고 악착같이 살아라.
그래야 네 예쁜 입에서 나오는 험한 말처럼 나에게 복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
설청하는 갑자기 벙어리라도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느 새 울음조차 그친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보리떡을 바라보았다.
(그래.. 악착같이 살겠어. 그리고 내가 당한 것보다 수십 배 네놈에게 돌려 주겠어.
그 날을 위해 네놈이 나에게 주는 어떤 모욕도 참으면서 악착같이 살겠어.)
설청하는 금루와 냉검상이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허리를 굽혀 보리떡을 집어들었다.
그녀의 손은 천천히 보리떡을 입으로 가져갔다.
마치 모레알을 씹는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차근차근 보리떡을 씹어 삼켰다.
처음으로 보리떡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 그녀의 두 눈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악을 쓰며 삼키던 오열과는 다른 눈물의 의미가 아프게 스민 그런 눈물을 설청하는 흘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하고 완벽하다 해도 설청하는 결국 연약한 여자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냉검상은 조용한 모습으로 보리떡을 먹는 설청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 * *
천애령의 산채흑계를 벗어나 동남방(東南方)으로 십여 리 가면 백사계(白沙界)란 곳이 있다.
백사계는 말 그대로 흰 모래가 여인의 허벅지처럼 부드럽게 깔려 있는 곳이다.
백담하의 물줄기가 흐르면서 끊임없이 모래를 날라와 만들어 놓은 곳이기도 했다.
백사계를 냉검상은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그것은 백사계의 경치가 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절경(絶景)이라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었다.
백사계는 한 마디로 냉검상에게 있어서는 황금창고와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막대한 양의 자수정(紫水晶)이 매장되어 있어 냉검상에게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했다.
소찰력의 뒤를이어 대두령이 된 이듬 해에 우연히 자수정 광맥을 냉검상이 발견했는데,
이곳은 천산 일대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극비(極秘)의 보고였다.
냉검상은 오래전부터 백사에서 지하동굴을 뚫고 자수정을 채굴하고 있었다.
그곳 광산에서 일하는 인원은 대략 백여 명.
대부분이 비적단의 전쟁으로 생긴 포로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광산에 새로운 인원 이십여 명이 반입되었다.
그들은 바로 운자량을 비롯한 정금산장의 무사들이었다.
정통무예를 수련했다고 자부하던 그들이 비적단의 포로가 되어 자수정을 캐야 하는 신세로 바뀐 것이었다.
거대한 지하광장이었다.
수십 개의 양지유 횃불이 밝혀져 있는 지하광장은 온통 신비하고 황홀한 빛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다.
지하광장은 바닥과 천정, 그리고 벽면이 온통 자수정 광맥으로 되어 있어,
양지유 불빛이 반사되면서 환상과 같은 빛을 반사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거대한 자수정 광맥이었다.
캉! 카캉!
지금 지하광장안에는 허름한 몰골로 곡괭이와 징 등을 사용하여 자수정을 채굴하는 인물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주위에는 늑대 같은 눈빛을 번들거리며 칼과 채찍으로 감시하는 이십여 명의 비적들도 보였다.
자수정을 깨는포로들은 비참했다.
잠시라도 일을멈추면 독사(毒蛇)와 같은 채찍이 살을 찢어내고 피를 빨아내는 것이었다.
더욱이 의젓하게 패검을 허리에 차고 강호의 명가(名家)로 행세하던 정금산장의 무사들에겐
더욱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특히 운자량의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적당한 영양끼로 계집처럼 희고 준수했던 얼굴은 부석부석 부황기마저 보였고,
늘 정갈하던 머리는 까치집처럼 변해 있었다.
의복은 구질구질했으며, 평생 구경조차 해보지 않았던 수정채굴로 손바닥은 갈라지고 굳은 살이 배겼다.
그래도 그 정도는 참을만 했다.
운자량을 더욱괴롭게 하는 것은 시종일관 집요하게 그를 감시하며 따라붙는 비적 한 사람이었다.
턱에 바늘 같은 수염이 빽빽이 났으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성깔깨나 있게 생긴 이 비적은
오직 운자량만을 감시하며 시간나는 대로 괴롭히는 것이었다.
일단 다른 노예들과 달리 수면시간은 하루 열 두 시간 중에서 두 시간만 할당했고,
식사라고 해야 굳은 만두 하나와 냄새나는 물 한 그릇이었다.
그것도 하루에 한 끼씩만..
그러나 운자량은 그 비적이 왜 자신만을 괴롭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 이유를 알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비적이 자신을 괴롭히면 괴롭힐 수록 오히려 이빨을 갈아붙이며 원한을 가슴에 새길 뿐이었다.
(무식한 비적놈.. 내 이곳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네놈의 뼈와 살을 발라놓을 것이다.)
그는 하루 식사로 배당되는 굳은 만두 하나를 씹고 또 씹어 먹었다.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생존의 본능이었다.
(반드시 이 지옥은 탈출한다.)
그러나 시간이지날 수록 부족한 수면과 한 개의 굳은 만두로 버티기에는
운자량의 체력이 너무 탈진해 있었다.
캉! 카캉..
더욱이 맨 손에 곡괭이 하나로 자수정을 채굴하는 작업은 너무도 중노동이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한 번의 휴식도 없이 작업을 하던 운자량은 잠시 곡괭이를 늘어뜨리고
손으로 허리를 두드렸다.
(휴우...정말 죽겠군.)
그때였다.
등줄기가 화끈해지면서 뒷골이 쭈뼛거릴 정도로 극심한 아픔이 느껴졌다.
"아윽... 으..."
운자량은 맥없이 나뒹굴면서 오만상을 찌푸린 채 뒤를 돌아 보았다.
찰거머리처럼 자신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예의 그 비적이 채찍을 든 채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이 자식아! 굼벵이 조상이라도 있냐? 빨리빨리 움직여!"
말을 하면서도그 비적은 독사처럼 매서운 채찍을 연신 휘두르는 것이었다.
찰싹! 찰- 싹!"으윽...윽!"
무섭게 날아오는 채찍은 순식간에 운자량의 전신을 지렁이 같은 핏줄이 곤두서게 만들어 버렸다.
운자량은 불끈 했지만 억지로 이빨을 깨물며 비굴한 웃음을 흘렸다.
"조, 조금만 쉽시다.."
비적은 코를 벌름거리며 사나운 기세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 자식 어미 뱃 속에서부터 반말을 배워 나왔나
? 좋아..그렇게 쉬고 싶으면 영원히 쉬게 만들어 주겠다."
말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
퍽!
비적의 발길질이 사정없이 운자량의 명치 끝에 쑤셔박혔다.
"끄어어어.."
운자량은 입에거품을 문 채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며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했다.
얼굴색이 파랗게 질린 것이 맞아도 되게 맞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비적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죽어라, 이 자식!"
퍽! 퍼퍽..!
그는 벌레처럼쓰러져 버둥대는 운자량을 마구 때리고 짓밟는 것이었다.
정금산장의 무사들이 안쓰러운 눈빛을 보였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운자량을 도와줄 수 없었다.
운자량은 금시 피투성이의 참혹한 몰골로 변했다.
한동안 구타를 하고 콧김을 씩씩거리는 비적을 올려보면서 운자량은 불 같은 분노를 느꼈다.
(으으.. 단 일장이면 이 자를 죽일 수 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 자는 작정을 하고 날 괴롭히고 있다.
내가, 명가의 후광을 업고 있는 분면노검 운자량이 이런 치욕을 당하고도 참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으으..)
정통무예를 익힌 운자량.
그가 눈 앞의 비적 하나를 처치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나..그렇게 되면 나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운자량 자신이 볼 때 거대한 산악과 같은 존재로 부각되던 단독을 가볍게 제압하던
냉검상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미라파샤란 놈의 무공은 나하고 비교할 수 없다.
내가 저따위 비적놈과 목숨을 맞바꾸는 실수를 해서는 안되지. 으으.. 참자, 참어 내 생명을 위해서 참자!)
이때 비적은 운자량의 눈에서 불길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고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흐...네놈의 눈빛을 보니 대항하는 것 같군.
하기야 배알이 있는 놈이라면 참을 수 없는 노릇이겠지. 흐흐흐.."
고슴도치 수염의 비적은 운자량의 머리를 발로 툭툭 차며 약을 올렸다.
겨우 억눌렀던분노가 운자량의 내부에서 울끈 치밀어 올랐다.
"어디 사내 놈이라면 덤벼봐라! 이 어르신네가 얼마든지 상대를 해줄 테니까."
운자량은 입술을 깨물고 깨물어서 분노를 삭혔다.
그리고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대체 당신은 왜 나만 유난히 못 살게 구는 것이오? 내가 당신에게 유독 밉게 보였단 말이오?"
정말 궁금했던것이다.
순간 비적의 고리눈에 핏발이 곤두서며 으시시한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는 가래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
"알고 싶냐?"
비적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운자량은 억눌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그렇소.."
"좋아, 말해 주지. 네놈이 죽인 우리 동료 세 명 중에 한 명이 바로 내 친동생이다."
"......!"
"나는 네놈만 보면 피가 끓는다. 네놈을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 뿐이다
. 두령님의 명령 때문에 참고 있지만 만약 네놈이 대항한다면 내가 네놈을 죽여도
아무런 문책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놈을 괴롭히는 것이다."
운자량은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 랬었나?)
"자, 덤벼봐라. 이 씨배알도 없는 종자놈아!"
고슴도치의 비적은 채찍을 거세게 움켜쥐며 으르렁거렸다.
운자량이 선뜻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자 그는 발바닥으로 운자량의 얼굴을 비비면서 식식거렸다.
"네놈도 사내라면 오기가 있을 게 아니냐? 덤벼라...... 덤벼보란 말이다, 이 자식아!"
운자량은 결코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억지로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추스렸다.
"나는 결코 대항할 생각이 없소."
고슴도치 수염의 비적은 냅다 가래침을 운자량의 얼굴에 뱉았다.
"에이, 계집년 사타구니만도 못한 놈.
그래.. 얼마나 견딜지 두고 보겠다. 네놈은 반드시 대항하게 될 것이다.
흐흐...그것이 안된다면 나는 네놈을 천천히 말려죽일 것이다.
네놈의 살은 포를 떠서 질근질근 씹고 네놈의 뼈는 들개의 밥으로 던져줄 것이다."
운자량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한 순간의 행동이 한 사람에게 이처럼 집요하고 무서운 복수와 원한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운자량을 바라보는 비적의 눈길은 벌겋게 충혈이 된 채 지옥의 불길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백천분광 단독.
검(劒)의 성지(聖地) 혁련검호각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이며 쾌검의 일인자라는 그가
어이없는 패배와 함께 천애령의 산채로 끌려온 지도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그 동안 그의 상처는 거의 회복단계에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에비해 그에 대한 대우는 괜찮은 편이었다.
일단 산채에서조금 외떨어진 북쪽의 아담한 초옥을 그의 거처로 정했으며,
정갈한 식사와 치료를 위한 단약 등이 그에게 제공되었으며,
부족의 처녀 한 명이 그의 거처를 드나들며 청소와 잔심부름까지 시중드는 것이었다.
포로로 잡혀온상태에서 유난히 대접이 융숭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단독은 그저 의문으로만 접어둘 뿐이었다.
설청하와 운자량을 비롯한 정금산장의 무사들도 자신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창으로 하오의햇살이 비껴들고 있는 시간.
"......"
단독은 여느 때와 같이 침상 위에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몸을 운신할 수 있었던 지난 십일(十日) 동안 식사시간과 수면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수도자처럼 명상에 잠겨 있었던 단독이었다.
단독의 표정은돌처럼 무거웠다.
명상에 잠겨 단독이 생각하는 것은 이제껏 검(劒)에 대하여 인생의 모든 정열과 노력을 쏟았던
자신에 대한 평가였다.
냉검상에게 패한 것은 너무도 허무한 패배였다.
패배는 단독이 이제껏 추구해 왔던 인생의 좌절이었다.
그러나 좌절감에 빠져 자신의 무공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앞서 냉검상의 무공은 너무도 불가사의 했다.
이해 할수도, 패한 지금까지도 믿을 수 없는 무공이었다.
흐르는 빛조차 벤다는 백천분광(百天分光)이라는 자신의 명호가 무색해지는 그 극쾌(極快)의 일검.
수평으로 눕힌 투박한 검에서 얼음처럼 투명한 칼날이 나오고..
그 칼날 속에 미인이 웃고 있다고 느낀 순간 그는 패한 것이다.
대체 어떤 검(劒)의 원류(元流)가 그토록 상상할 수 없는 빠름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그가 가장 존경하는 검의 달인,
대사부 혁련사궁조차 그런 빠름의 경지는 보여줄 수 없는 일이었다.
(검(劒)은 백병지왕(百兵之王)..
입문(入門)은 쉬워도 완성(完成)은 가장 힘든 병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다는 말인가?)
생각할 수록 단독의 마음은 암울해지기만 했다.
그때였다.
단독의 시중을 드는 처녀가 들어와 말했다.
"대두령님께서 오셨습니다."
"미라파샤가?"
단독은 감았던눈을 뜨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예의 신비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물고 있는 냉검상과 앳되고 아름다운 금루의 모습이 있었다.
단독의 표정을보며 냉검상은 기이한 눈빛을 발했다.
"당신은 꽤나 무례하군. 내가 왔는데도 그대로 꼿꼿하게 앉아 있다니,
하지만 나 역시 굳이 예의를 따지는 편은 아니지. 그러나 상처는 좀 어떤지?"
"덕분에 많이 좋아졌소."
"다행이군."
단독은 잠시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냉검상의 내부를 꿰뚫어 볼 듯이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소."
"뭔가?"
"내게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이오?"
냉검상은 조용히 웃었다.
웃는 얼굴에 여러가지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냉검상 뿐이리라.
"당신은 나의 포로..더욱이 나에게 패한 적인데 이런 대우를 하니 마음이 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유는 간단하다. 수하들에게 들었지.
당신이 이 일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그것 뿐이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훌륭한 무사라는데 이유가 있지
. 당신은 내가 보아온 그 누구보다 뛰어난 무사다."
단독은 씁쓸한고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미라파샤 당신보다는 약하오. 그래서 패하지 않았소? 나는 이번 일로 많은 것을 느끼고 있소."
"하하하......"
냉검상은 맑게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단독은 특이한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냉정한 야성(野性) 속에 감추어져 있는 순수성이랄까?
어두운 창을 열었을 때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한 무더기의 햇살과 같은 웃음이었다.
"느낀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지. 인간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지.
그러나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모든 인간이 똑같을 수 없을 것이다.
단독...당신이 느끼고 변하듯이 나 미라파샤도 많은 변화를 거친 경험이 있다
. 나는 변하면서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강자를 좋아한다.
강한 것은 내게 있어 곧 아름다움이기 때문이지. 또한 강하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것을 나는 사랑한다."
"......"
냉검상은 자신의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금루를 가리켰다.
"이 아이...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답소."
냉검상은 부드러운 손길로 금루의 뺨을 쓸어내렸다.
금루는 얼굴을살짝 붉히며 기쁜 듯 냉검상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기에 이 아이도 내게는 사랑스러운 것이다."
냉검상은 극히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금루의 가슴에 손을 넣고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극히 무례하고 천박한 행동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단독의 눈에는 거슬려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저렇듯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냉검상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동안 금루의여린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던 냉검상이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있다."
"?"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단독."
"무슨 제안이오?"
"내곁에 있어라. 당신에게 수석 부두령의 자리를 주겠다."
(비적의 부두령이 되라고?)
단독은 어이가없었다.
혁련검호각에서 당당한 검인(劒人)으로 자리잡은 자신에게 비적단의 부두령이 되라니..
단독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라파샤, 나는..."
냉검상은 가볍게 말을 잘랐다.
"싫은가?"
단독은 고소를머금었다.
마땅히 냉검상을 이해시킬 말이 떠오르지 않은 단독은 말꼬리를 흐렸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좋아, 그렇다면 생각할 여유를 주지."
단독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미라파샤, 당신은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오.
무간천사 조비람의 무공을 이어받은 당신이 이런 산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소."
냉검상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두 번째 듣는 말이군. 나는 조비람이 어떤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
단독의 눈빛이흔들렸다.
무간천사(無間天邪) 조비람(趙丕藍)!
이미 역사(歷史)의 한 귀퉁이에 묻혀진 이 인물은 아주 오랜 세월 전에
사(邪)의 절대자(絶對者)로 등장한 공포의 상징이었다.
지옥의 십팔마신(十八魔神)을 거느리고 악마(惡魔)를 추종한다는 그의 적수는
천하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냉검상이 운자량에게 사용했던 철포단비(鐵布鍛批)는 조비람의 삼대절공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조비람이 신비하게 사라지면서 그의 무학도 안개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단독은 나직이숨결을 토해내었다.
(분명 조비람의 철포단비였다. 그러나.조비람은 평생 칼을 사용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럼 미라파샤는 조비람의 후인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철포단비를 익혔단 말인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단독은 다시 말했다.
"무공은 언제부터 익혔소?"
"글쎄..."
"알고 싶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나 혼자 스스로 익혔다는 것 뿐이다.
그 외에는 미안하지만 대답해 줄 수 없다."
(음... 뭔가 무공을 수련했던데 대해서는 비밀이 있구나...)
냉검상에 대해서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단독이 파헤칠 수는 없었다.
"참, 설소저와 운소협은 어찌 되었소?"
"그들은 내 포로다. 내 수하를 해치고 나를 해치려 했던 적이다."
단독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과 달리 정금산장의 인물들은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특히 설청하에 대한 걱정이 갑자기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설소저를 어떻게 할 셈이오?"
"왜, 그녀가 걱정되는가?"
"그녀는 중원에서도 명문세가의 딸이오. 그리고 고귀한 여인이오
. 부탁이니..제발 그녀만은 건들지 말아 주시오."
냉검상은 크게웃었다.
"하하핫...고리타분하군. 아무리 고귀해도 여자는 여자일 뿐이다."
"미라파샤, 그녀는.."
"단독!"
냉검상의 싸늘한 음성에 단독은 움찔했다.
냉검상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그의 표정에서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오만함과 냉정함이 스며 있었다.
"너무 건방지게 내 행동에 개입하려 하지 말라."
냉검상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단독.. 엉뚱한 마음을 품으면 좋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 판단해서 모든 일을 행할 뿐이다."
이어 냉검상은금루와 함께 단독의 초옥을 떠났다.
단독은 오래도록 냉검상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고 었다.
(만약...설소저에게 일이 생기면 나는 사부님 앞에 평생 고개를 들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문득, 단독의 눈빛이 괴이롭게 일렁였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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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
갈수록 재미가 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