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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동학 설화소설)
제4화 예산 홍의소년 이야기
채길순(소설가)
곡식을 거둬들인 들판 가운데로 길이 나 있었다.
텅 빈 길을 터벅터벅 걷는 말 발걸음이 힘겨워 보였다.
말 잔등에는 몸피가 작은 소년이 타고 있어서
무거워서 지친 것은 아닌 듯 했다. 먼 들판 끝으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주막은 역말을 지나 시장 어귀에 있었다.
“어서 오시유.”
주인 사내가 말고삐를 받아들며 말했다.
“말 좀 먹일 수 있겄시유?”
“말보다 사람이 더 먼저 숨이 넘어가겄시유. 어디서 오는 길이유?”
“광천서 오는 길이유?”
“그려유?”
주막 사내가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왜 놀랐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탱구가 주막 안으로 들어서자 장꾼 몇이 어울려 왁자지껄 술을 마시고 앉았고, 좀 떨어진 자리에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곁에 활과 화살 통이 바람벽에 기대었고, 곁에 까투리 장끼 몇 마리가 놓여 있어서 첫눈에 사냥에서 돌아온 한량이 분명해 보였다. 장꾼들은 술에 취해 동학난리 얘기에 한창이었다.
“지난 10월 초하룻날에는 태안 동학농민군이 들고 일어나 태안부사 신백희와 별유사 김경제를 경이정 아래에서 참수하고 옥에 갇혀 있던 동학쟁이들을 구출했대유. 이와 때를 맞춰서 서산에서도 관아로 쳐들어가 군수 박정기와 이방 송봉훈을 참수하고 인부까지 압수했다잖유.”
“난다, 난다 하더니 참말로 난리가 났시유.”
“이제 동학 난리가 나서 양반 상민이 없는 새 세상이 온다잖유.”
“맞어유! 거기가 어디냐, 홍주 갈산 김 대감댁에 살던 문천소 이승범이라는 두 종이 이번 난리에 상전인 김 대감을 묶어놓고 불알을 깠대유. 그래서 홍주서는 ‘양반 불알 깐다’는 소문이 바람같이 떠돌아댕긴다잖유.”
“히히히, 이제 갑오 난리에 양반들 씨가 마르겄네유.”
“맞어! 그래서 이제 양반 상놈 층하가 없는 세상이 온다잖아유.”
말문이 터져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 국밥을 차린 밥상이 들어왔다. 주모가 탱구 앞에 밥상을 내려놓고 말했다.
“탁배기 한 잔 할끼유? 매가리 없을 때 한 잔 허믄 기운이 펄펄 나지.”
앞에 말은 높였다가 가까이서 보니 아이인 줄 알고 얼른 말을 낮췄다.
“뭐 어뗘? 정월 대보름날 귀밝이술도 하는디.”
주모가 아예 말을 내려놓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져온 술병은 도로 가져갔다. 이때였다.
“아따 쌍놈들, 거 되게 시끄럽네!”
한쪽에 떨어져 술을 마시던 한량 한기경韓基慶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들짝 놀란 장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주막을 빠져나갔다. 주막 안에는 탱구와 한기경 둘이 남았다.
탱구는 갈 길이 급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서둘러 일어서야할 것 같아서 수저를 빠르게 놀렸다. 혼자 술을 마시고 앉아 있던 한기경이 이번에는 탱구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이애, 넌 어디를 가느냐? 어린 것에게 파발 심부름시킨 것을 보니 필시 동학쟁이들이 보낸 파발이 틀림없으렷다?”
탱구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귀신같이 맞춘 것이다. 오늘 이승우가 이끄는 홍주 관군이 광천에 출동하여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여 수명이 죽고 체포됐다는 다급한 소식을 예산 덕산 박인호 대접주에게 전하려고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돕고 있었다.
“파발이 뭣이간이유? 저는 예산 역말 큰집에 부고를 전하러 가는 참이유.”
이는 탱구가 미리 준비해뒀던 말이었다.
“흥! 부고가 아니라 전령(傳令)이겠지?”
“전령이 뭣이대유?”
“네 행색이 천민인데, 전령이 아니라면 어찌 말을 타느냐?”
“지는 그런 거 몰라유. 급한 부고를 전하러 간당께유.”
다행히 한기경의 시비 말이 더 건너오지 않았다. 탱구는 갈 길이 급하기도 했지만 여기서 더 머뭇거릴 수 없다는 생각에 밥을 국에 말아 급히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와 때를 맞추듯 한기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에 취했는지 잠깐 비틀했다. 그러자 어느 구석에 박혀 있던 하인이 뛰쳐나와 제 상전의 옆구리에 팔을 감아 부축했다. 한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서 보니 키가 훤칠하고, 탱구보다 나이는 몇 살 위로 보였지만 앳되어 보였다. 그래서 주모가 탱구에게는 술병을 도로 가져갔고, 한기경에게는 술이 취하도록 준 모양이었다.
탱구가 마당으로 나와 셈을 할 때 주막 사내가 나직이 말했다.
“서운혀두 갋지 마시유. 근동에서 성깔 고약하기로 소문이 났으니께유.”
주막 사내가 마구간으로 말을 끌러 간 사이에 뒤따라 나온 한기경과 맞닥뜨렸다. 한기경이 버들패랭이를 쓰는 탱구의 아래위를 훑어 보고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흥! 세상이 어지러우니 사방에서 동학 역적 놈들이 날뛰는구나!”
하지만 탱구에게 더 시비하지 않았다. 탱구는 말고삐를 받자마자 말 등에 올라 말을 몰았다. 주막을 서둘러서 나오긴 했지만 그동안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탱구가 동구 밖을 막 벗어났을 때였다. 탱구의 버들 벙거지 꼭지에 ‘턱!’ 소리와 함께 화살이 박혔다. 한기경이 쏜 화살이 틀림없었다. 탱구의 머리카락이 다시 한 번 곤두섰다.
탱구가 예산 목시에 도착한 것은 10월 초아흐렛날 늦은 밤이었다. 도소에 남은 동학도인은 많지 않았고, 주문을 마치고 막 잠이 들려던 참이었다. 탱구가 박인호 대접주와 아버지를 만나 홍주목사 이승우가 이끄는 관병이 광천시장에서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급하다! 싸게 징을 쳐서 도인들을 불러 모으시오! 오는 대로 창과 칼로 무장하게 하시오!”
박인호의 명에 따라 징을 쳐서 동학농민군을 소집했다. 연달아 치는 징소리가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얼마 아니 되어 인근에 흩어져 잠을 자던 동학농민군이 도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어둠속에서 총포소리가 들리고 관군의 함성이 하늘을 찢었다. 미리 매복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동학농민군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탱구 아버지도 어둠 속에서 불을 뿜는 관군을 향해 총포를 쏘아대고 있었다. 이때 탱구 옆에서 아버지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아버지!”
탱구가 달려들어 쓰러진 아버지를 부축했다. 이때 관군이 대도소 마당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후퇴하라!”
등 뒤에서 박인호의 다급한 말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탱구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어서 피해라!”
“아버지! 으흐흐흐!”
탱구가 울면서 박인호를 따라 뛰었다. 도소 마을을 벗어났을 때 박인호를 놓치고 말았다. 어디를 향해 얼마나 뛰었을까, 탱구가 당도한 곳은 예산 역말이었다. 어느새 동녘이 자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마치 꿈결에서 데려다 놓은 것처럼, 지난 날 아버지를 따라왔을 때 묵었던 역말 월화할멈의 주막집이었다.
“어서 오너라.”
새벽 푸른 어둠 속에 월화할멈이 서 있었다. 다른 날 같으면 우스갯말부터 나왔겠지만 오늘은 입이 무거웠다.
“어여 안으로 들어가 봐라.”
주막 뒤꼍에 헛간에 이어 붙은 토굴 방에 박인호와 함께 동학교도들이 모여 있었다.
그날 밤에야 어젯밤에 일어난 목시 대도소 난리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홍주성에서 들어온 중군 김병돈이 뽑은 5백 명의 군사가 내포 동학대도소를 들이쳐서 동학농민군이 여럿이 죽었으며, 그간 관아에서 탈취했던 모든 병장기를 거두어 갔다는 것이다. 지금은 홍주에서 넘어온 이승우가 이끄는 본대가 역말로 옮겨와서 어제 전투에서 승리한 김병돈이 이끄는 관군과 합류하여 진을 쳤다고 했다. 적이 바로 턱밑에 진을 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다행히 서산 태안 쪽으로 도피한 박덕칠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근동의 동학농민군의 세 규합에 나섰다는 것이다.
“어찌하면 한시라도 빨리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겠소?”
박인호의 말에 월화할멈이 잠깐 헤아린 끝에 말했다.
“이승우는 지략이 있는 장수여서 빈틈없이 진을 쳤고, 좀 허술한 데는 쇠갈퀴를 숨겨뒀어. 그런데 오늘 밤에는 동학농민군이 멀리 달아난 줄 알고 초저녁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으니 좀 있으면 곯아떨어질 것이네. 그때를 맞춰서 여기를 빠져나가면 될 것이야.”
저녁을 먹고 토굴에서 군호가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이윽고 부엌에서 솥뚜껑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를 군호 삼아 동학주문 외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동학주문을 외면서 큰길로 나섰다. 이때 관군 진지 쪽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동학쟁이들이 도술을 부린다! 대포와 총포에서 물이 나온다!”
동학농민군이 진지 앞으로 지나가도 감히 대포도 총도 쏘지 못했다. 이렇게, 동학농민군들이 역말을 무사히 빠져나와 동학 세상이 된 태안 서산 광천 쪽으로 들어갔다.
10월 26일, 내포 5만의 동학농민군이 신례원 뒤뜰 관작리에 진을 쳤다. 시오리에 걸쳐 볏짚으로 만든 초막을 세우고 깃발을 세웠다. 이에 맞서 이승우가 이끄는 관 유회군이 어름재에 진을 쳐서 바야흐로 한판 승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전날 예산 역말 주막을 빠져나간 박인호 대접주가 이끄는 동학농민군 대군은 서산을 떠나 운산 여미평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수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24일, 동학농민군이 면천으로 머리를 돌려 승전곡 골짜기로 들어섰을 때, 관 일본군이 뒤따라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히 골짜기에 매복했다가 앞문과 뒷문을 닫아걸고 공격을 퍼부어 크게 이겼다. 일본군은 혼비백산하여 무기를 버리고 홍주성으로 달아났다. 그날 대승을 거둔 동학농민군은 내처 면천성을 점령하고 오가 역탑리에 유숙하고 어제 이곳으로 진을 옮겨왔다. 이에 맞서 홍주성에서 출발한 1천 명의 관군은 예산 대흥 지역에서 미리 모집된 유회군이 합류하여 5천 명의 군진이 되었고, 여기에 전날 목시 대도소를 친 김병돈이 이끄는 부대가 합류했다. 그러나 승전목 전투에서 무기를 잃고 홍주성으로 들어간 일본군은 합류하지 못했다.
얼음재에 대포를 설치한 관 유회군이 먼저 포 사격을 시작했다. 들판에 흩어져 점심을 지어먹던 동학농민군은 일시에 대포 공격을 받고 잠깐 대오가 흩어지는 듯했으나, 곧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에 나섰다. 서로 포를 쏘며 거의 반나절 동안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이때 동학농민군이 함성과 함께 어름재를 향해 하얗게 달라붙었다. 관 유회군의 진지에서 대포 공격이 멎었다. 대포 구멍을 산 아래쪽으로 숙여서 쏠 수 없기도 했지만, 동학농민군 쪽에서 미리 세작을 통해 화약이 떨어져 가는 낌새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의 하얀 물결 앞에는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이 앞장서 있었다. 여기에 맞선 관군 쪽에서도 검정색 군복 맨 앞에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이 앞장섰다. 동학농민군 쪽 홍의소년은 팽구였고, 관 유회군 쪽은 한기경이었다. 잠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지만, 이것이 이승의 마지막 인연이 되었다. 서로 칼을 휘둘러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팽구가 왼손잡이여서 왼쪽으로 치고 들어갔고, 한기경은 바른손잡이라서 동학농민군의 바른쪽으로 파고들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셈이 되었다. 팽구가 휘두르는 칼에 앞에 선 유회군이 짚단처럼 쓰러지자 뒤에 섰던 관군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때 “앞으로! 앞으로!” 독려하던 중군장 김병돈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이놈! 감히 어린놈이 설치느냐?”
김병돈이 단칼에 베어버릴 듯이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팽구의 칼끝이 가슴 복판을 찔러 김병돈의 황소 같은 몸뚱어리가 풀썩 쓰러졌다. 영관 이창욱이 달려 나오다 팽구의 칼끝에 쓰러졌고, 주홍섭 주창섭 형제가 연달아 엎어졌다. 그러자 관 유회군이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유회군 대장 홍경후가 앞으로 달려 나와 팽구의 칼을 맞고 꼬꾸라졌다. 이때 관군 진영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신동이다!”
동학농민군이 짓쳐 들어가니 대장을 잃은 관 유회군은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짚단처럼 쓰러져 갔다. 동학농민군의 함성이 산을 울리고 들판을 질러갔다.
관 유회군이 패주하고 멀리 달아나 팽구가 돌아섰을 때 한기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한기경은 두 눈이 찔려 절명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이 역적 놈들!”
“네 놈이 눈깔을 상것 능멸하는데 썼으니 그 죗값을 받은 게다!”
한기경은 근동에 소문난 활쟁이였다. 그러나 무과에 3년 연달아 낙방하고 나서야 돈을 수레로 바쳐야 급제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어린나이에 반거충이가 되었다. 한기경이 신궁 같은 활솜씨를 여염집 아낙네 물동이를 깨는데 썼으니 두 눈을 먼저 찌른 것이다. 뒷날 사람들이 한기경의 죽음을 두고 말했다.
“활로 대적했으면 많은 동학농민군의 인명이 끊길 뻔했으나 칼로 덤비는 바람에 우리가 살고 지가 죽은 겨.”
팽구가 두 눈이 찔려 죽은 한기경을 내려다보고 서 있을 때, 동학농민군이 팽구를 둘러싸고 있었다.
“팽구 만세! 동학만세!”
누군가가 소리치자 동학농민군의 함성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자! 이제 홍주성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