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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정李世正과 비밀결사 「영우회靈友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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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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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현대사 사건과 인물
이세정李世正과 비밀결사 「영우회靈友會」
심국보_ 편집주간
천도교청우당북조선당부 설치에 대한 의정서(천도교청우당제2차 확대 중앙위원회, 포덕 87년 5월 21), 이 의정서에 의거 북조선청우당은 독자적인 별도의 조직을 설치하게 된다.
이세정(본명, 이효준)은 여섯 형제 중 첫째였으며, 형제 모두 천도교를 신앙하였고 셋째인 이효묵은 아들 인수만 남기고 일찍 병사하였다. 이세정의 처는 김도순金道淳이며 맏아들 인덕을 포함 9남매를 두었으며, 영우회의거로 도피 중이던 조카 인수와 맏아들 인덕은 6·25 발발 후 곧바로 남하하여 그 실상을 증언하였다. 아들 인덕과 조카 인수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이인덕李仁德, 德菴 1931년, 평양시 창전리 출신, 2016년 5월 환원, 청년당 순안부 활동, 부 이세정李世正, 처 박정혜, 자 경춘, 명희, 선희
이인수李仁洙, 秀菴 1931년 1월 3일생, 2001년 11월 환원, 청년회 감찰위원(1965. 7. 25), 처 석혜숙石惠淑, 자 경일敬一, 성희誠姬, 신옥信玉, 선미仙美 [ 편집실 ]
8·15 광복은 도둑처럼 왔다고 하지만, 도둑과 함께 왔다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눈 밝은 이들은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며 해방을 맞을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슬그머니 찾아온 도둑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둑들을 몰아내기보다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는 물론 8·15 이후 악질 모리배’들은 도둑들과 야합하니 ‘남에서는 남대로 미 군정에 아부하며 북에서는 북대로 소 군정에 아부하여 국토가 양단되든 민족이 분열되든 내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망조亡兆가 들게 된다. “우리는 단일민족이니까 이남에서는 미국을 내보내고, 소련도 이북에서 내보낸 후 남북통일 이룩하자!”
3·1 재현운동의 밀서를 가지고 38선을 넘었던 밀사 박현화가 북의 보안서에 잡혀 며칠 동안 구류생활을 하며 내무서원들과 토론 중 한 말이다. 박현화(당시 48세)의 이 말에 대해 북한의 보안서원들도 ‘할머니 1등’이라며 크게 호응하였다. 1948년 남북분단이 굳어져 갈 때도 남북한 이천만 민족의 간절한 희망은 여전히 “남북통일의 임시 정부 수립과 민생 문제 해결”이었다. 이 무렵 남북의 천도교의 지도자들은 “북은 북대로 공산정권을 세우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남은 남대로 단정 수립을 서두를 수도 없다.”며 ‘남북통일 정권의 수립’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는 북한지역에서는 3·1 재현운동과 영우회 의거로 나타났다. 당시 평양시 천도교종리원장으로 3·1 재현운동과 영우회 의거에 헌신했던 이세정 주간도정(시원포)의 활동을 정리하여 보았다.
이세정李世正으로 개명하다
이세정은 1945년 8·15 광복 당시 천도교평양시종리원장으로, 1927년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 도호는 중암中菴이다. 1932년 포경시조직布更始組織(기존의 연원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 당시 시원포 종정宗正이 되었다. 시원포侍源布가 처음으로 조직된 것은 포덕 65(1924)년 포제가 시행 될 때이며 처음 포명은 시성포侍誠布였고, 주간포덕사는 김명희金明熺였다. 시원포는 평양을 중심으로 평남 강서군江西郡, 대동군大同郡, 강동군江東郡, 성천군成川郡, 중화군中和郡, 순안군順安郡,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그리고 만주 봉성현鳳城縣에 교인이 분포하고 있었다.
이세정은 천도교청년당평양부 노동부위원(1934. 1. 28), 청년당평양부 집행위원(1934. 5), 청년당 평양부대표(1936. 4) 청년당평양부 수도부장(1937.7)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평양부 종리원 부령(1937. 7), 평양부종리원 종리사(1939. 4), 평양교구경리원(1940. 4) 등을 역임하였고, 1945년 8·15 광복 당시 평양시종리원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고, 시원포 제2대 주간도정을 역임하였다.
이효준은 광복 이후 1945년 12월 말 평남 강동군 출신의 장래승과 함께 상경하여 이듬해 1월 3일부터 3개월 과정의 제1회 종학원 교육을 받게 된다. 전국의 청년교역자 약 70여 명이 참가한 제1회 종학원 교육은 공진항의 재정적 후원 아래 이루어졌다. 종학원장은 공진항이었고, 교리교사(이돈화), 수운심법강의(정광조), 천도교정치이념(김병제), 정치(정인관), 교사(백세명), 수련(김기전), 체육(김현국), 역사(김상기), 경제(최호진), 한글강의(이희승) 등의 강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한다는 소식(1946. 3. 5)이 전해지자, 북한 지역 수강생들이 서둘러 귀가하게 됨에 따라 예정을 앞당겨 3월 중순에 종학원 교육은 끝난다. 당시 공진항 종학원장은 “천도교가 통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데 너무나 힘이 약하고 벅차서 안타깝다. 앞으로 천도교가 바라는 방향으로 통일이 되기보다는 남북 간에 미국의 남북전쟁을 방불케 하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다시 이곳 중앙총부에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될지 의문이다.”라고 하여 귀향하는 수강생들의심금을 울리기도 하였다. 이효준은 종학원 강습을 중단하고 평양으로 귀향하기 전 1946년 2월, 장래승과 함께 여암 최린 앞에서 결의형제의 서천맹세를 하고 그 자리에서 이효준은 이세정으로, 장래승張來昇은 장세덕 張世德이란 이름을 받고 개명한다.
북한 지역 천도교 조직의 정비
종학원 강습을 서둘러 마치고 고향 평양으로 돌아온 이세정은 평양시천도교종리원장으로 누구보다 분주하게 움직였다. 해방 후 천도교단은 교단을 정비하고 천도교청우당을 재결성하여 교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38선 경계의 강화로 남북 간 연락이 어려워지자 북한 지역의 천도교는 자체적인 조직정비에 나선다. 먼저 천도교청우당에서 발 빠르게 움직인다.
1946년 2월 23일 북한지역 180여 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북조선청우당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위원장단과 당 운영의 주축인 33명의 중앙위원도 선출하였다. 여기에서 선임된 임원은 위원장 김달현, 부위원장 박윤길, 김정주, 총무국장 김진연, 조직국장 임창호, 정치국장 김윤걸, 선전국장 승관하, 문화국장 이성빈, 재정국장 이춘배, 감찰위원장 김상보 등이었다. 북조선청우당이 빠르게 중앙조직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중앙당이 결성되기 전, 먼저 각 시, 군의 지역당 조직이 먼저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강점기 때부터 북한지역은 천도교 세력이 많았고, 일제하의 청우당 활동이나 조선농민사 등 지역 조직활동의 경험이 풍부했기에 북한 지역의 청우당 조직은 지방조직이 먼저 활성화되었고, 중앙당이 결성되는 민주주의의 경로를 제대로 밟았다.
1946년 말 북한지역의 45개 연원 대표들로 북조선천도교연원회를 조직한다. 북조선 연원회는 의장에 이돈화, 부의장에 김광호와 이근섭, 상무에 김덕린을 선출하였고 사무실은 평양시에 두었다. 당시 천도교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소춘 김기전과 야뢰 이돈화는 1946년 봄에서 여름 사이 북한의 교인들을 지도하기 위해 월북하여, 11월 평양으로 이주하여 평양의 조선여관에 거주하고 있었고, 소춘 김기전은 12월 고향 평북 구성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야뢰와 소춘은 조속한 시일 안에 통일이 될 것 같지 않으니 북한에도 총부와 같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단일 중앙기관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1947년 2월 1일 천도교북조선종무원이 설립되었다. 북조선종무원은 38선 이북의 천도교를 관장하며 서울의 총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북한 천도교의 조직정비로 북한에서의 천도교의 교세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북한의 천도교인 숫자는 1947년 6월에 약 169만 명이었고 1950년 3월에는 약 288만 명으로 당시 전체 북한 인구의 1/3에 육박할 정도였다. 이러한 조직 확대는 천도교 청우당의 올바른 ‘정치 노선’과 열성적인 활동의 결과였다. 당시 북조선청우당은 중앙당부터 지역 면당에 이르기까지 ‘천도교 정치이념’의 확산을 도모하였고, 1947년도 중앙당 학원에서 600여 명, 도당학원에서 약 2,500여 명의 강습생들이 수학하도록 하였다. 1947년 한해 동안 북조선청우당의 교양 사업에 참여한 지도강사가 연인원 2,172명이었고 총 764회의 강습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남북분열 저지투쟁, 3·1 재현운동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실상 정부의 구실을 하였다. 임시인민위원회 구성 후 한 달 뒤인 3월 5일 단행된 무상분배 토지개혁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라는 것을 확인하여 준다. 남북한 모두 별개의 정부 수립을 서둘렀고 남북분단은 기정사실로 되고 있었다. 1947년 두 차례의 미·소공위가 완전히 실패하고 남북한은 거의 같은 속도로 외세에 의존하여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하려는 경향의 세력이 크게 득세하고 있었다. 천도교 지도자들은 민족의 영구분열이라는 비극의 전개를 목전에 두고 속수무책으로 방관할 수 없었다. 아래 이응진(당시 천도교청우당 부위원장)의 회고는 해방정국에 대한 천도교인들의 인식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때 항상 말하기를 좌左면 좌, 우右면 우이지 기본노선이 다 무엇이냐 친소면 친소, 친미면 친미 어느 편에 붙어야지, 민족자주노선이 무엇이냐? 하면서 정의정론을 무시하고 마구 날뛰었다. 이때 북한에서는 점점 공산당 독재가 강화되어 그 밖의 정당 사회단체는 공산정부수립을 무조건 지지 찬동하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무렵 북한 천도교 간부들은 이에 추종할 수 없어서 그 대책을 동시 남북지도층(천도교중앙총부)에 여러 차례 적의한 방안을 지시하여 달라고 요청했었다.”
천도교는 1948년 3·1절을 기하여 3·1 운동 당시와 같이 각계각층을 총망라하여 대대적인 단정 수립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천도교의 원로인 최린을 중심으로 연원 대표 김광호, 이응진, 전의찬, 최단봉, 김지수, 오근 등 극소수 간부들이 1948년 1월 중순쯤부터 모임을 하고 의견을 모았다. 최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친일경력이 문제가 되어 임시전국대회에서 출교 처분을 당하였지만, 여전히 신파의 영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의 친일은 천도교단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점이 천도교인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되어 천도교단 내에서 그에 대한 여론은 나쁘지 않았다.
이리하여 천도교중앙총부는 「통일선언문」과 비밀지령문을 작성하고 북한 천도교에 두 명의 밀사를 파견하였다. 박현화, 유은덕 두 밀사는 1948년 2월 7일 각기 길을 달리하여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였다. 그 중 박현화는 2월 14일 평양에 도착하여 김일대, 김덕린에게 밀서를 전달하였다. 북한의 천도교 지도자들은 3·1 재현운동을 안건으로 회의하였는데 당시 참석자는 북조선종무원장 이근섭, 북조선청우당위원장인 김달현, 연원회 상무 김덕린, 그리고 소춘 김기전이었다. 이들은 회의를 거듭하였지만, 결론이 나지 않자 이돈화가 있던 강동 봉명각 수도원에서 2월 17일 다시 회합했다. 김기전, 이돈화, 이근섭, 김덕린, 김달현, 김명희 등 북한 천도교를 대표하는 6인이 참석한 이 날 회의에서 시일의 촉박, 대중적 궐기를 위한 각계각층의 호응 불가 등을 이유로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김달현 등이 표명하였다.
김달현은 “본 지령은 최린 선생께서 한 일인데 남한의 교회인사들과 여암장(최린)은 북한 실정을 모르고 한 지령이요, 만일 이 지령으로 3·1절에 봉기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다수한 교인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이오, 공산치하에서 성공은 불가능한 것으로 단정할 수 있으니 당을 책임진 나로서는 불가한 지령이 아닐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였다.
김달현의 반대 의견에 이근섭이 동조하였고 이돈화와 김명희, 김기전 등은 거사에 찬성하는 가운데 결국 이날 회의에서는 북한에서 3·1 재현운동은 표면상으로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연원조직을 맡고 있던 김덕린은 비밀리에 3·1 재현운동을 추진하고자 연원회 간부들과 협의하고 2월 18일 평남에 박용완, 평북에 배의찬, 평양 일대와 기타 지역에 지성률을 급파하였다. 연원 조직을 동원해 3·1 재현운동이 전개되자 각 지방의 청우당에서 중앙당으로 문의가 쇄도하였고 이에 김달현이 운동이 진행되는 것을 인지하였고 북한 당국도 이를 탐지하게 된다. 2월 24일부터 천도교 간부 약 1만 7천여 명이 투옥당한다. 당시 북한에서 는 3·1 운동 기념행사가 전면 금지되었으나, 북한 천도교도인들의 시위는 영변, 삭주, 희천, 강계, 박천, 맹산, 양덕, 안주, 덕천, 순천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특히 영변에서는 50리에 걸쳐 시위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1948년 10월의 비공개 재판에서 사건의 주모자로 유은덕, 김일대, 김덕린, 주명득 등 4명은 사형, 김명희, 박용완, 배의찬 등은 4명은 징역 15년 등 모두 87명이 유죄 실형을 선고받았다. 죄명은 김일성 암살 계획이었다.
이세정, 비밀결사 영우회를 조직하다
이세정과 장세덕은 3·1 재현의거에 활약하던 중 검거, 투옥 선풍 속에서 일시 은신하였다가, 며칠 지나 검거 바람이 완화된 기맥을 살피고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평양 시내 칠성문 통 노상에서 우연히 만나 처음으로 무의식중에 울분한 기색이 넘쳐흐르면서 다시 의거를 일으키자는 데 뜻이 일치하였다. 이세정은 평양시종리원장이었고, 장세덕은 서평양 종리원장 겸 청우당평양시서구당부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후 평양종리원을 중심으로 하여 이세정, 장세덕, 김상열金相說 등이 자주 연락을 취하면서 기회 닿는 대로 밀의를 거듭하여 오다가, 1948년 3월 7일 거사 실패 후 첫 시일식을 간단히 거행한 후 이세정, 장세덕, 윤문원尹文元(청년당 자산부 대표를 지냄) 3인이 종리원 숙직실에서 처음으로 회동하여 3·1재현운동을 다시 일으키자는 것과 영우회 조직 결성을 준비하게 된다. 3월 7일 모임에서 이세정은 서울의 지시를 다시 받아 재 거사하자는 의견을 내어 모두 찬동하고 서울로 밀파할 밀사의 선발, 비용갹출 문제는 3월 10일 대신사순도기도식 후 3인이 모란봉 을밀대 동남쪽 고정각古亭閣에서 만나, 밀사는 자산慈山교인 장근영張根榮, 비용은 역시 자산교인 윤병식尹炳道, 윤계성尹桂成 2인이 부담하기로 한다. 3월 28일 장근영이 평양을 출발, 38선 부근에서 천도교인 박세진朴世珍(상업)을 만나 동행하여 3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여 최린을 만나 상경한 이유를 보고하자 최린은 ‘수도호법결의형제守道護法結義兄弟’라는 서천문誓天文을 장근영에게 주었다. 4월 29일 평양에 도착한 장근영은 경위를 설명한다. 그리고 5월 1일 윤문원의 집에서 이세정, 장세덕, 윤문원, 장근영, 장창걸, 김성흔金聖昕, 장기초張基礎 등 7명이 회합하여 최초로 영우회를 조직하였다.
영우회는 비밀 조직의 결성을 위해 1) 대상자의 연원 계통 파악 2) 신앙의 돈독 여부 3) 가족 중 공산당원과의 접근자 유무 4) 내외종형제나 남매간에 공산당원 유무 5) 대상자의 성격, 근기, 언행경중 등을 심사 후 입회시키기로 하고, 조건에 맞는 대상자를 선정한 후 서천식을 거행한 후 조직원으로서 활동을 전개하게 하였다. 당시 동평양 청우당 운영위원이었던 안관성은 아래와 같이 회고하였다.
“어느 날 ‘수도호법’이란 법문과 조직요령, 서천문을 나에게 보내와 서천식을 봉행했는데, 그 자리에서 서천문을 낭독한 다음 그것을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나누어 마심으로써 영우회 회원이 되었고 그로부터 비밀운동을 전개하였다.”
“영우회의거는 동학사상에 기초한 통일운동”
1948년 6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 영우회는 1948년 말에 15,000명의 회원을 구성하였다. 6월에 평양에서 개최된 103개 시군종리원장과 연원 대표 회의에서 비밀리에 활동해 세력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영우회 결성 1주년을 맞는 1949년 5월 1일, 회원 수는 20만 명에 달했다. 유사시에 대비한 무기 입수 방법으로 경찰관서나 공산군부를 습격해 탈취하자고 결의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확대되던 영우회 조직은 결국 북한 당국에 탐지되어1950년 4월부터 본격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1949년 9월에는 장세덕의 집에 정보원이 들이닥쳤는데 장세덕은 사전에 이를 감지하고 월남하지만, 1950년 4월부터 영우회의 주모자 165명이 평양감옥에 갇히고, 9월 초순에 약식 재판을 받고 윤문원, 김성흔, 이성열은 사형에 처했다. 이때 이세정도 희생되었다. 나머지 회원은 5년에서 20년형에 처했지만, 이들은 6·25전쟁 중에 북한군에 의해 대부분 몰살당했다. 이 중에서 이재전, 임시을, 문의삼 등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비밀결사 영우회의 실상이 알려지게 된다.
1948년의 3·1 재현운동과 비밀결사 영우회 활동으로 희생당한 이세정 천도교 평양종리원장을 비롯한 숱한 천도교인들의 넋을 추모하면서, 해방 이후 38선 이북에서 전개되었던 영우회의거의 의미를 새겨본다. 아래는 해방 정국 당시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상임위원으로도 활약하였던 김현국 종법사의 말씀이다.
“영우회의거는 동학사상에 기초한 통일운동이었으며 좌도 아니요, 우도 아니었습니다. 영우회의거가 북한에서 전개되어, 북한의 천도교인이 많이 희생되어 세간에서 마치 반공 운동이었던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본뜻은 그것이 아니라, 분단의 벽을 무너뜨리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동학의 수난사가 외세와의 끊임없는 민족적 저항이었다는 역사적 시각에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민족 근대사에서 끊임없이 추구하여 온 통일 민족국가 형성을 위한 민족운동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김현국, 천도교연원회 의장,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