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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
동학소설
고요히 흐르는 금강
이상면_작가, 전 서울대 교수
제3화 두 소년이 만났다
이종만의 전설은 곳곳에 남아있다. 당진 송악읍 석포리에 사는 이석구(李晳求,1932- ) 옹은 2009년 『당진시대』에 송악산(松岳山)에는 동학전란 시 이종만 별동대장이 전봉준 대장의 지시로 2천여 동학군을 이끌고 와서 왜군을 격퇴한 성터가 있는데, 수천 군사가 마시던 우물터도 있고 이종만 대장이 옮겨다 놓았다는 ‘장수바위’에 그의 손자국이 박혀있다고 적었다.
이종만은 타고난 천하장사였다. 그의 주먹은 보통 사람의 두세 배나 되었고 팔은 여느 장정의 다리 같았다. 누구든지 그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헤어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전라도 능주 토포사(討捕使) 자제로 유복하게 자란 탓인지, 청소년기에 충청도 백두대간에서 무술을 연마한 탓인지, 열댓 산적들이 덤벼도 거뜬히 해치웠다. 높은 담도 훌훌 넘어 다니며 신출귀몰한 무술을 구사했다.
일제도 이종만을 두려워했다. 대륙침략의 포석으로 경부선 철도를 놓을 때, 청주 문의를 거쳐 보은 상주로 가는 안을 최단거리로 검토했는데, 그 일대가 ‘난폭한(亂暴漢)’ 이종만과 오일상의 동학군 소굴이라 그 대신 갈대가 무성한 허허벌판에 대전역을 만들어 우회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안대로 경부선을 청주-보은-상주 노선으로 확정했더라면 여정은 지금보다 훨씬 단축이 되었을 것이고, 대청호 수몰지역에는 어엿한 반도의 중심도시가 들어섰을 것이다.
이종만의 풍모는 독특했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얼굴, 해맑은 회색 눈동자에 누릇누릇한 수염은 혹시 선대에 무슨 혼혈이 있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가령 당나라 때 서역을 정벌한 고구려 후예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서역에서 데리고 온 자손 같다고나 할까...
이종만은 지장이었지만 덕장이기도 했다. 큰 눈으로 상대방을 응시하며 경청하다가 ‘옳지, 옳지’하며 무릎을 친다. 밝은 낯으로 몇 마디로 핵심을 찔러 상대 의견을 일단 끌어들이고, 자신의 의견을 슬쩍 첨가하여 수정안을 내 이의 없이 동의를 이끌어낸다. 만일 상대가 온당치 않게 맞서거나 버티면 목침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제압에 들어간다.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릴 적부터 벼슬하는 부친을 따라, 바다가 가까운 능주, 수구파와 개화파가 다투는 서울, 산적이 출몰하는 백두대간 등 색다른 환경에서 옹골차게 자라며 다양한 경험 속에 남다른 식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양반가문에 부잣집 독자로 태어난 그가 동학혁명운동에 뛰어든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하기야, 그 시절 동학지도자는 교주 최시형을 비롯하여 남접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도, 북접의 손병희 손천민 오일상도 지방의 양반인 향반, 아니면 그들의 서자인 중인이었다. 대다수 상인(平民,農民)은 그저 따랐을 뿐 지도자가 된 예는 거의 없다.
이종만은 남 앞에 나서거나 이름을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선친도 조부도 그랬다. 동학과 의병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그의 전반기 40여년은, 1915년 그가 이름을 종찬(鍾瓚)으로 바꾸고 환국하여 제2의 인생을 침묵 속에 산 탓에, 아무도 그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의 전반기 행적이 조금씩 드러나게 된 것은 1953년 초가을 상배시 찾아온 조문객의 입을 통해서였다. 특히 반세기만에 찾아온 최시형의 딸 최윤(崔潤)으로 인해 베일에 싸인 그 전모가 드러났다. 그녀가 가으내 이종만 가에서 살면서 저녁마다 나눈 이야기는 총기 좋은 자부와 외동 손자 상면이에 의해 고스란히 살아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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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의 부친 이규성(李圭誠,1843-1900)은 13세에 생원 진사과에 합격한 신동이었다. 성균관에서 문과를 준비를 하던 중 14세에 대제학의 사위가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고령박씨 신부는 석 달 만에 역병으로 사망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철석같이 믿던 배경이 없어진 탓에 문과에 급제할 기연이 멀어만 갔다.
그래도 ‘어린 진사’는 15세에 동갑 처녀 한산이씨와 재혼할 수 있었다. 명랑하고 활동적인 여자였다. 이규성은 그녀더러 향리에서 시부모를 모시게 해놓고, 늘 성균관에 가서 과거준비를 했다. 문과 본시에 연이어 낙방하게 되자, 집에서는 보은 향교 부근에 별장을 마련하여 공부에 전념하게 했다. 내세울 배경이 없더라도 혹시 발군의 실력이 있다면 급제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1863년 가을 보은 향교에서 공부하던 중, 이규성에게 뜻밖에도 놀라운 인연이 생겼다. 장내리 고개 너머 동관리(東觀里)에 갔다가 마침 포덕에 나선 북접도주 최시형(1827-1898)을 만난 것이었다. 이규성과 그의 가족은 곧 동학에 입도하여 초기동학 제1세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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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은 과거 초시에는 번번이 합격해, 전처럼 성균관에 가서 공부하곤 했으나, 본시에서는 웬일인지 여전히 낙방에 낙방이었다. 그런 탓에 결혼한 지 10년 만에 딸 하나를 낳았고, 이어서 4년 후인 1870(庚午)년에 비로소 아들 종만을 두었다. 부친은 보은에서 자식의 과거 뒷바라지를 하다 1874년 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객지에서 몰아닥친 비극이었다. 부친 장례 후 상심해 있던 이규성에게 나주 경주이씨 문중에서 능주목(綾州牧) 책방직(冊房職)으로 천거하겠다는 소식이 왔다. 부친의 삼년상을 현지에서 치러야 했지만, 30이 갓 넘은 그는 부친의 묘소에 눈물로 하직을 고하고, 남도 능주에 가서 처자와 함께 세상을 잊고 살기로 했다.
능주(綾州)는 ‘비단고을’, 전주에 이어 전라도 제2의 읍성이었다. 듣던 대로 풍광이 수려하고 인심이 좋은 곳이었다. 세상을 잊은 묵객들이 찾아드는 예향이었다. 책방직은 일종의 자문역으로 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능주 목사(牧使)는 명필에 올곧고 박식한 그를 총애해, 이태 후 토포사(討捕使)에 임명했다.
이규성이 4-5년을 능주에 사는 동안, 외동딸이 훌쩍 커서 혼처를 찾게 되었다. 독자 종만도 무럭무럭 자라나 소년티가 났다. 다부진 체격에 성격이 활달하고 총명했지만, 공부를 잘 안 하는 것이 탈이었다. 독선생을 집에 두고 공부를 시켜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친 예하의 무사들을 보고 자란 탓인지, 날마다 동무들과 산과 들에서 병정놀이를 하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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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봄에 딸을 여읜 후, 시름시름 앓던 부인 한산이씨가 추석을 앞두고 세상을 떴다. 다시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토포사로서 기세가 등등하다고 했지만, 이제 식구라곤 9살 먹은 종만 하나뿐. 실의에 잠겨 있던 이규성에게 대궐에서 참의(參議)로 있는 종친 이용우(李龍雨)한테서 서신이 날아들었다.
“대부께서 명필에 문장가이시니, 사대교린 문서업무에 적임이시라 생각되어, 승문원(承文院) 교리관(校理官)에 천거하고자 하온대, 청허하여 주심이 어떠하오리까?”
승문원 교리관은 종5품으로 능주 토포사에 필적하는 자리였다. 그의 나이가 이제 35세, 그래도 과거에 매달려 청춘을 불태운 서울이 아니었던가---. 개항시대에 남도에 있기보다 중앙에 진출하여 국사에 참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이종만(李鍾萬,1870-1956)은 부친이 서울로 벼슬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 임금님이 계신 궁궐 가까이 살면서 고향동무 이상설(李相卨(1870-1917)과 함께 노는 것을 상상하면 가슴이 설레었다. 봄 가을 시향 때면 만나서 놀곤 하던 갑장 이상설, 그는 원래 진천의 빈한한 선비 이행우(李行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시향에 온 참의(參議) 이용우(李龍雨)가 어린 이상설이 겁 없이 제사상에 가서 괴어놓은 과일을 집는 것을 보고,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아이’라며 양자로 간택했다고 했다.
이규성이 토포사 직을 내놓고 서울로 부임할 채비를 하자, 상처 후 그의 수발을 들어온 22세 소사(召史)가 서울에 가서도 모시고 싶다고 따라 나섰다. 얼굴이 곱고 성격이 좋은 여자였다. 15세 연하로 남들에게 딸 같이 보였지만, 소사는 어머니를 잃은 이종만에게 ‘도련님, 도련님’하며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이종만은 서모 턱인 그녀에게 ‘너’라고 하며 ‘해라’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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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네는 곧 서울로 이사해 북악산 기슭 삼청동에 정착했다. 승문원(承文院)은 화동언덕 너머 창경궁 가는 재동(齋洞) 길목에 있었다. 사대교린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라 화려할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교리관(校理官)은 종5풍이라고 했으나 월급이 백미 한 섬에 황두 반석 밖에 되지 않았다. 부하직원이 별로 없었으니 권세가 있을 턱이 없었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공문을 짓고 상부의 재가를 받아서 정서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개항시대라 날이 갈수록 업무량이 많았다.
이규성은 승문원(承文院)에 부임한 후, 아들 종만을 데리고 그를 천거해준 종친 이용우 댁을 방문했다. 그의 집은 남산 북서쪽 기슭 장박골(長洞,會賢洞)에 있었다. 이용우는 항렬로 보면 손자 벌이었으나 연로한 참의(參議)로 정3품이었다.
“아유, 대부께서 이리 친히 왕림하시다니. 일본공사가 부임해서 승문원에 일이 많다지요?”
“예, 종친께서 천거해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용우는 이상설이 고향동무 이종만을 보고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둘이서 인근 서당에 함께 다니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이회영(李會榮) 등 종친 소년들이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이규성은 배려해주어 감사하다고 말했지만 아들 종만이 그들과 함께 공부할 처지가 아닌 것을 알았다. 능주에서도 독선생을 붙여 아들을 가르쳐보려고 했지만, 공부는 안하고 놀기만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종만은 서울에 와서도 공부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틈만 나면 취운정(翠雲亭)에 가서 무사들이 활을 쏘거나 말 타고 격구(擊毬)하는 것을 보았다. 때로는 뒷산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며 능주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종만은 동네 아이들이 사투리를 쓴다고 ‘전라도치’라고 놀리면, 분한 마음에 주먹을 휘둘렀다. 얻어터진 아이의 부모가 찾아와 항의하면, 이규성은 손바닥이 닳도록 빌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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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이 되자 동북아시아 정세가 급변했다. ‘황발(黃髮)의 색목인(色目人)’이 함경도에 나타나 벌목을 한다는 첩보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동해안에서도 그런 자들이 고래잡이를 하다가 뭍에 올라 부녀자를 겁탈한다는 비보도 들어왔다.
조정에서는 색목인 출몰에 골머리를 앓다가 일본에 김홍집(金弘集) 수신사를 파견해 묘책을 찾게 했다. 정작 일본 정부는 색목인 출몰에 대해 별 대책이 없었으나, 주일 중국공사가 이이제이(以夷制夷)라며 조선이 러시아 남진을 막으려면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여 외교관계를 트라고 조언했다. 조선은 모름지기 “친중국(親中國)하고, 결일본(結日本)하며, 연미국(聯美國)해야” 한다며, 부관에게 그런 내용을 담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이라는 책자를 써주게 했다.
조정에서는 『조선책략』을 돌려보며 논의한 끝에 대국의 의중을 따르기로 했다. 중국처럼 의정부(議政府) 아래 통리기문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외무 군무 통상사무를 담당하게 했다. 승문원도 그 산하 외아문(外衙門)의 일부가 되었다.
1881(辛巳)년 2월 김윤식(金允植)을 청국에 가서 신문물을 살피라며 영선사(領選使)로 파견했다. 실은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홍장(李鴻章)이 미국 대표 슈펠트(Shufeldt) 제독과 조선의 개항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나가 소견을 피력하게 한 것이었다. 승문원에서는 회담문건을 만들어 보내느라고 분망했다. 쇄국정책을 일삼다 보니 조정에 양문(洋文)을 아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이 한이었다. 여름에는 부랴부랴 박정양 김옥균 유길준 등 청장년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신문물을 살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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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壬午)년 4월 초 이상설의 양부(養父)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종친들의 도움으로 허겁지겁 장례를 모셨다. 며칠 후, 진천 집에서 친부(親父)가 위독하다는 기별이 왔다. 이상설은 부랴부랴 고향집으로 달려가 가까스로 임종을 할 수가 있었다.
4월 말 이상설이 진천에서 장례를 치르고 왔다는 소식에 이종만은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상설이, 얼마나 망극하신가? 각중에 친부 양부를 그리 모시느라고---.”
“아이고 대부, 이렇게 찾아와 위로를 해주시니---.”
“나도 3년 전 서울에 오기 전에 능주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왔지---.”
긴박하게 돌아가는 시국에 눈물만 흘릴 때가 아니었다. 이상설은 그간 조선이 미국과 개항조약을 체결한 소식을 들었다면서 자세한 내막을 연신 캐물었다.
“조선과 미국과의 조약안을 청국에서 주선한 것이라면서?”
“조선에는 양문(洋文)을 하는 자가 없어서---. 청국대표가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문구를 조약문에 넣자고 했는데, 미국대표가 ‘만국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네. 그런데도 청국이 조선에 압력을 가해서 중국의 속국이라는 편지를 따로 써서 미국 측에 전달하게 했다누만.”
“중국과 미국의 화륜선(火輪船)이 제물포에 못 들어와서 영종도에 나가서 조약을 체결했다면서?”
“화륜선이 어찌나 큰지 대궐 같더라네. 조선대표가 중국대표의 소개로 미국 대표의 화륜선에 예방했더니, 조약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를 가져왔느냐고 묻더라는 거야. 국기를 정해놓은 게 없어 난감해 하니까, 중국대표가 조선은 속국이니까, 중국의 황룡기(黃龍旗)를 사용해도 된다고 하더라누만. 그래서 조선대표가 아무리 속국이라고 해도 내치와 외치는 자주인데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더라네. 임금께 그 문제를 상주하여 밤늦도록 논의한 결과, 조선은 자고로 청구(靑丘)라 하였으니 황룡기를 푸른색으로 쪽물을 드려서 사용하기로 했다네.”
“어이구, 중국은 중화(中華)이고 조선은 소화(小華)라더니 결국 청룡기(靑龍旗)를 내걸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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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단오(端午)에 이상설이 삼청동 이종만 집에 놀러왔다.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 앞에서 새로 생긴 별기군(別技軍)이 훈련받는 것을 구경하기로 했다. 모화관은 영은문(迎恩門) 옆에 있어 중국사신이 오면 머무는 곳이었다.
그 앞 광장에서 일본 호리모토(堀本禮造) 소위가 별기군(別技軍) 80명을 조련하고 있었다. 각 군영에서 선발된 건장한 병사들로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호리모토(堀本) 소위가 일본말로 크게 구령을 하면 통역이 그대로 따라 소리쳤다. 병사들은 그 구령에 따라 열을 지어 행진을 하다가 방향을 전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는 모두 서서 차렷하고 일동경례를 했다. 호리모토(堀本)는 병사들을 앞에서 일제 무라타(村田) 소총을 들고 일장 연설을 했다.
“무라타(村田) 소총은 작년에 일본에서 제작한 것이다. 영제 스나이더(Snyder) 소총이나 미제 레밍턴(Remington) 소총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오히려 가볍고 우리 체격에 맞아 사용하기 편리하다. 지금 조선에서 사용하고 있는 화승총은 총탄이 백보밖에 못 가는데, 무라타(村田) 소총은 사정거리가 천보나 된다.”
별기군 병사들은 ‘아유’하고 탄성을 올렸다. 그러자 호리모토(堀本)는 신이 나서 더 언성을 높여 무라타(村田) 소총의 특성을 설명했다.
“화승총(火繩銃)은 전장식(前裝式)으로 총탄을 쏘려면, 먼저 총신을 위로 세우고 총구에 탄환을 넣은 다음, 다시 총신을 눕혀 화승(火繩)에 불을 붙이고 타들어가게 하여 화약에 점화될 때까지 들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눈앞의 적군은 도망가 버리고 만다. 무라타(村田) 소총은 후장식(後裝式)이어서 지형지물에 몸을 숨기고 총신을 눕힌 채 총탄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된다. 1분에 10발도 쏠 수가 있다.”
병사들은 탄성을 올리며 놀라워했다. 호리모토(堀本) 소위의 말대로 무라타(村田) 소총 하나로 화승총 100정 200정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도 저런 소총을 만들면 좋으련만, ---.”
“중전마마가 세자책봉을 위해 청국관리에게 황금 수 만량을 바쳐 국고가 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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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은 6월 9일 북악산 기슭 취운정(翠雲亭) 앞마당에서 말 타고 격구(擊毬)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창경궁 쪽에서 ‘와와’ 하는 소리가 났다. 화동언덕으로 내려가 보니 수많은 군졸들이 운현궁(雲峴宮)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군졸대표 몇이 대원군(大院君)이 거하는 운현궁(雲峴宮) 안으로 들어갔다. 군졸들은 밖에서 계속 큰 소리고 외쳐댔다.
“굶주리는 군졸에게 1년 군료(軍料) 어서 내라!”
“군료 가마에 모래가 웬 말이냐!”
“물 퍼부어 불린 쌀이 무더위에 썩는구나---.”
얼마 후 군졸대표들이 운현궁에서 나왔다. 대원군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주먹을 번쩍 올리며 운현궁을 나섰다. ‘와’ 소리를 지르며 그곳에서 멀지 않은 민겸호(閔謙鎬) 집으로 몰려갔다. 그는 국고를 관장하는 선혜청(宣惠廳) 당상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었다. 항의하는 군졸대표를 포도청(捕盜廳)에 잡아 가둔 장본인이었다. 군졸들은 그 집 대문을 부수고 쳐들어갔으나 그는 집에 없었다.
군졸들은 포도청을 습격하여 구금된 대표를 구출해냈다. 군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별기군 군영을 습격하고 호리모토(堀本) 소위를 살해했다. 성난 민중들과 합세하여 일본공사관을 습격했다. 경비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했다. 공사관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공사와 직원들은 가까스로 교외로 도망을 쳤다. 마침 남양만에 들어온 영국 배를 잡아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저녁에 군졸들과 군중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창경궁으로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이종만은 이상설과 함께 창덕궁 서쪽 언덕으로 올라가 궁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살폈다. 군졸들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군료를 안주고 군졸대표를 잡아 가둔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보자 그 자리에서 때려죽였다. 민중전(閔中殿)을 찾아보았으나 온데간데없었다. 상황이 위급하게 되자, 국왕은 대원군에게 사태수습 전권을 맡겼다.
대원군은 군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우선 일본식으로 신설된 2군영과 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해체된 구식군대 5군영을 복귀시켰다. 군졸들의 군료도 곧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개화의 상징으로 신설했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도 해체되었다. 그 산하 외아문(外衙門)에서 근무하던 이종만의 부친 이규성도 다시 승문원 교리관으로 복귀했다.
대원군은 민중전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민씨 척족들을 하나하나 권좌에서 몰아내는 조치를 취했다. 며칠이 되도록 민중전이 나타나지 않자, 그녀가 죽은 것으로 치기로 했다. 그녀의 옷가지를 관에 넣고 염을 했다고 발표하고 국장을 선포했다. 승문원에 지시해 청국에 국장을 알리는 국서를 작성하게 했다.
일본으로 돌아갔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가 대원군이 전권을 행사하여 질서가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자 1천여 병력을 이끌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대원군은 그들이 상경하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그대로 현지에 머물러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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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청나라 장수 마건충(馬建忠, Ma Jianzhong) 등이 군함 3척에 4천여 병력을 싣고 와서 월미도에 정박했다. 창덕궁에서 아주 먼 시골로 달아나 숨어있던 민중전이 청국에 파견된 영선사 김윤식(金允植)에게 몰래 보낸 편지를 받아보고 조선으로 출동한 것이었다. 그들은 대원군을 예방하고 접대를 받았다. 이튿날 그들은 군사문제를 논의하자며 대원군을 군막으로 초대했다. 대원군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일단 응해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건충(馬建忠)은 대원군을 보자 두 손으로 황금색 성지(聖旨)를 펼쳐들었다. 대원군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마건충은 황제의 성지를 읽더니 강제로 보교(步轎)에 태워 남양만으로 데리고 갔다. 다시 군함에 태워 천진(天津) 교외에 있는 보정부(保定府, Baodingfu)에 보냈다.
대원군이 사라지자 그 동안 장호원에 숨어있던 민중전이 혜성과 같이 서울로 돌아왔다. 그간 대원군이 벌여놓았던 각종 국장절차는 웃음꺼리가 되고 말았다. 폐지되었던 별기군과 통리기무아문이 부활되었다.
민중전과 민씨척족들은 다시 우르르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 대원군이 등장해 전권을 행사한 33일 동안에, 정권에 빌붙어 아당한 자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이규성은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았으나, 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민중전이 승하해서 국장을 치르게 되었다고 청나라에 보내는 국서를 작성하는데 가담한 혐의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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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군란(軍亂)으로 입은 손해에 대해 책임자 처벌과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공관경비를 구실로 1천여 명 병력을 그대로 주둔시킬 테니 그 경비를 부담하라고 강요했다. 청나라도 속방을 보호한다며 4천여 명 병력을 상주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일단 청국 세력이 커진 상황으로 보였으나 일본도 조선이 자주국이라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규성은 이제 불혹의 나이, 일본과 청국이 조선을 놓고 다투는 와중에, 개화파와 수구파가 일본과 중국을 업고 판치는 어지러운 세상에, 머지않아 제2의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찌감치 속세를 떠나 속리산 용해(龍海,龍華) 솔면이(松面里)로 내려가 도를 닦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이규성이 아들 종만을 불렀다. 시국이 어지러운데 고향에 가서 살면 어떠냐고 물었다. 이종만은 의외로 좋아했다. 고향집에 가서 동무들과 뛰놀 생각을 하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다음 날 이종만은 이상설에게 찾아갔다.
“우리가 청주에 내려가 살 것 같네.”
“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께서 세상이 어지러워 고향에 가서 사는 게 좋겠대. 그래서 나도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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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은 속히 고향집에 돌아가 추석을 맞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삼청동 집을 처분하고 가재도구를 정리하는데 달포나 걸렸다.
이사 준비를 마칠 무렵, 이상설이 놀러왔다. 이제 그의 나이 13세, 30년 전 이규성이 과거 생원과에 합격해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다니던 나이었다. 이상설은 서울에 양자로 와서 주위 시선을 받고 자란 탓에 어른스러운 점이 있었다.
“마침 진천에서 추수했다고 달구지에 쌀과 콩을 싣고 왔어요. 그 편에 이삿짐을 싣고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선친이 타시던 적토마(赤兎馬)도 드리고 싶은데, 타고 가시지요.”
“아이고 고마워라. 그리 하도록 하겠네.”
“종만 대부, 무과 보러 상경하면 우리 집에서 머물도록 해.”
“고마워. 그리함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