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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銅雀區)
동작구(銅雀區)의 구명칭(區名稱)은 조선시대 서울 용산에서 수원으로 통하는 「동재기나루터(銅雀津)」가 있었으므로 이 명칭을 따서 제정되었다.
노량진동(鷺梁津洞)
상도동(上道洞)
본동(本洞)
흑석동(黑石洞)
동작동(銅雀洞)
사당동(舍堂洞)
대방동(大方洞)
신대방동(新大方洞)
노량진동(鷺梁津洞)의 동명은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용산구 이촌동(二村洞)에서 수원, 인천방면으로 가려면 노들나루를 이용하였으며, 또한 도성수어(都城守禦)를 위해 군사를 주둔시킨 노량진(鷺梁鎭)을 설치하여 널리 알려진 이름으로 1914년에 시흥군(始興郡)에 편입될 때 마을 이름을 노량진리(鷺梁津里)라고 정한 것이다.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과천군(果川郡) 하북면(下北面) 신촌분리(新村分里), 옹점리(甕店里), 옹막리(甕幕里), 고등리(高等里) 지역이었다가 1914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로 불리어졌다.
1936년 경성부구역을 확장할 때 경성부에 편입되어 노량진정(鷺梁津町)으로 영등포출장소 관내에 있다가, 1943년 경성부의 구제(區制) 실시로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다. 광복후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없애고 우리말로 동명을 고칠 때 노량진은 영등포구 노량진동(鷺梁津洞)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영등포구에서 관악구를 분구(分區)하자 노량진동은 관악구에 속하게 되었고 1980년 관악구에서 동작구가 분구되면서 노량진동은 동작구에 속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노량진동은 옛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하여 노들나루라고도 불리운 도선장(渡船場)으로 인해 형성되기 시작한 도진촌락(渡津村落)으로 상류의 한강진(漢江鎭), 하류의 양화진(楊花鎭)과 함께 서울로 통하는 한강 나루터 중에서도 중요한 길목이므로 조선시대에는 군대가 유진(留陣)하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이전부터 행인들의 왕래가 많았지만 노량진은 조선초기에 이르러 관에서 이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즉 처음에는 개인 소유의 나룻배가 10척이 있어서 도선료(導船料)를 받고 행인을 건네주었는데, 태종(太宗) 4년(1414) 광진(廣津)과 더불어 이곳의 관리자로서 별감(別監 ; 곧 도승(渡丞)으로 바뀜)을 처음으로 파견하고 아울러 관선 15척을 비치하여 진에 소속된 진부(津夫)들로 하여금 선가(船價)를 받지 않고 건네주게 하였다.
노들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라는 여관이 있어서 도성을 오가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쉬어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루 북쪽 강변에는 넓은 백사장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새남터라 하여 일찍부터 사형장으로 이용되었다. 이는 나루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처형과정을 보임으로써 경계심을 갖도록 한 조처였다. 일찍이 세조(世祖) 즉위에 반대한 사육신(死六臣)이 여기에서 처형되었고 근세에는 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노들나루는 조선초기에는 주로 민간인들이 왕래하였지만 조선후기에는 국왕의 행차가 빈번하여 그 도강(渡江) 방법이 모색되었다. 특히 정조(正祖)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에다 마련하고 수시로 능행길에 올랐는데 그 통로에 위치한 것이 노들나루였다. 그리하여 노들나루에도 한강나루, 삼전도에서와 같이 배다리(舟橋)가 놓이게 되었으니 정조는 이를 위하여 주교사(舟橋司)라는 전담 관청을 설치하고 주교절목(舟橋節目)을 마련하였다.
옛부터 서울 명승지의 하나로 손꼽아 온 노량진 강가 서남쪽 봉우리에는 단종조(端宗朝)의 충신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의 묘가 있고, 그 동편 기슭 아래에는 사육신을 제사드리는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있었으며, 또 숙종조(肅宗朝)의 정직한 대신(大臣) 박태보(朴泰輔)와 경종조(景宗朝)의 4충신을 제사드리는 노강서원(鷺江書院)과 사충서원(四忠書院)도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세조(世祖)의 왕위찬탈(王位簒奪)에 반대하고 어린 임금 단종(端宗)을 위하여 일편단심 신명을 바쳐 후세의 추앙을 받아온 사육신의 묘소는 노량진동 185번지의 2호, 그 아래로 한강이 흐르고 강건너 북쪽으로 멀리 서울의 도심가와 북한산 영봉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나지막한 동산 위에 자리하고 있다.
사육신묘는 조선조 제 6대 단종(斷種)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여섯분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을 모신 묘소이다.
노량진동사무소가 있던 노량진동 156번지 사육신묘 입구 동산에는 사충서원(四忠書院)이 있었다. 이 서원은 영조(英祖) 원년(1725)에 건립된 것으로, 경종(景宗) 원년(1721)에 신축사화(辛丑士禍)로 희생당한 노론(老論) 4대신(大臣)인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이이명(李 命)을 배향(配享)하던 곳이다. 이 서원은 고종(高宗) 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다가 1927년에 용산구 보광동(普光洞) 28번지로 옮겼으나, 일제 때 철폐되었고 지금은 신축사화의 내력을 새긴 묘정비(廟庭碑)만 보광동에 남아 있다.
노량진동의 자연부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높은절이(高寺里) : 현재 노량진동과 대방동, 상도동과의 경계가 되는 노량진동 산10번지의 지대가 높은 곳에 청련암이란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 때 노 정승의 사패지라고 하는데 이에 따라 고사리회(高寺里會)가
있기도 하였다.
장승배기 : 옛날 이정표시를 하던 장승이 섰던 마을로 상도동과의 경계인 노량진파출소 앞에 위치하며, 최근에 서울시에서
이곳에 표석을 세워놓았다.
빨래골 : 원풍산업 뒤편에는 관악산 줄기에서 졸졸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용해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다고 해서
빨래골이라 했다.
꽃말 : 현재 여성개발원 별관(전 부녀직업전도소)이 위치한 서쪽 노량진 1동 50∼54번지 일대는 일제 때 일본인
'후까이'가 이곳에 약 5,000여평의 꽃밭을 만들어 이곳에서 나는 꽃을 서울시내 꽃도매상들에게 판매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꽃밭에서는 꽃가지를 잘라 파는 것이 아니라 뿌리채로 판매하는 것이 특징이었다고 한다.
독막(동이점) : 노량진 2동 45∼46번지 일대로 지금의 동작구 청자리의 마을이름으로 옛날 옹기를 굽던 곳으로 가마가
2군데 있었다 하며, 떡시루, 독 등을 제작하여 노량나루를 이용해서 시내로 반입되었고 지금의 강남일대 주민들과
과천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 말까지 있었으나 그 이 후 자취를 감추었다.
송학대 : 현재 삼거리 못미처 장승배기길 좌우편, 노량진2동 311∼315번지 일대의 마을이름으로 전일에는 수 백년 묵은
소나무가 많았으며 이 소나무에는 학(鶴)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몇 그루의 소나무가 남아 있으며,
일제 때는 일본인 고관들이 이 지역의 경관에 반해 많이 살았으며 한국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지명을 딴 송학대교회가 부근에 있다.
노량진동 남쪽지역은 산을 끼고 있으므로 고개가 적지 않다. 먼저 사육신묘 마루터기의 아차고개라는 고개가 있었다. 이 고개는 조선 초 세조(世祖) 때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육신(六臣)을 처형함은 부당함을 간하기 위하여 도성을 향하여 말을 달려오다가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육신이 이미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하고 한탄하던 고개라 전한다.
노량진동의 유적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벽돌막은 노량진 1동 481번지 노량진초등학교 자리에 일제 때 일본인이 지은 붉은 벽돌공장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서 나온 벽돌로 지금의 서울시청사, 전 국립중앙박물관(조선총독부)을 지었다고 한다. 이 공장은 노량진초등학교가 생기면서 철거되었다.
노량진시장은 지금의 상도터널 남쪽 입구 일대에 있던 시장으로 생선, 나무, 기타 생활필수품들이 주로 거래되었으나 근대화 물결에 밀려 쇠퇴하다가 상도터널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옛날 이 시장은 지금의 강남, 관악, 마포, 용산, 영등포, 수원 사람들까지 이용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수산시장 남쪽의 노량진 1동 15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월파정(月坡亭)은 광복 초기에 수도경찰청장을 지내고 후에 국회의원,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장택상(張澤相)의 별장이었다.
1947년에 발간된 백성기(白成基)의 『서울案內』에 의하면 노량진동의 특색은 도기 제조 및 무녀(巫女)거주지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이 洞이 과천군 하북면에 속했을 때, 옹막리(甕幕里), 옹점리(甕店里)라는 마을이름이 있었으므로 옹기를 굽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도동(上道洞)의 동명은 전일에 이곳에 상여꾼이 집단으로 거주하여 상투굴이라고 칭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상도리(上道里), 성도화리(成道化里)로 불리우다가 1914년 경기도내 각 면(面)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할 때 이곳을 시흥군 동면 상도리(上道里)라 제정하였다. 1936년 경성부를 서울시로 고친 뒤 정(町)을 동(洞)으로 개정할 때 상도리는 영등포구 상도동(上道洞)으로 개칭되었다.
상도동외에도 법정동명으로 상도1동이 있다. 상도1동은 상도동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1955년 동제(洞制) 실시 때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3년 영등포구로부터 관악구를 분리, 신설할 때 상도동은 신설된 관악구로 이관되었다. 1980년 관악구에서 동작구가 분구 되었고, 이에 상도동은 신설된 동작구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른다.
국사봉(國思峰) 북쪽 산기슭 상동3동 280번지에는 사자암(獅子庵)이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있는데 여기에는 전해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조선 태조(太祖) 5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읍터를 물색하라는 태조의 명을 받고 한양의 지세(地勢)를 살펴보니, 한양의 외백호(外白虎)인 만리현(萬里峴 ; 지금의 만리동)이 백호의 형상으로 그 세력이 급하고 위태하여 분망히 움직이는 기운이 많으므로 백호형인 만리현의 맞은편 관악산에 호압사(虎壓寺)를 지어 백호를 눌렀으며 이곳에 사자암을 지었다고 한다.
상도제2동 영도시장 맞은편 삼거리의 노량진파출소 앞을 장승배기라고 부른다. 흔히 장승이 서 있는 곳을 장승배기라 하는데 우리나라 각지에 이런 이름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장승을 세우게 된 내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중기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부왕(父王)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죽은 뒤 그의 아들 정조(正祖)는 1777년 왕위에 오르자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했다. 그래서 정조는 화산(華山 ; 지금의 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 즉 현륭원(顯隆園)에 참배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찾아가 아버지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애통한 한을 달래며 명복을 빌었다. 당시의 장승배기 일대는 낮에도 맹수가 나타날 것만 같은 울창한 나무숲이었다. 현륭원으로 가는 정조의 어가는 이곳에서 한번쯤 쉬어가야 했으나 아름드리 나무숲이 우거진 이 지점에서 쉬기란 적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비라도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해 질 정도였다. 당시에 이곳은 인가가 없고 통행인마저 시오리 가야 한 두사람 만날까 말까 할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이에 정조는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壯士) 모양을 한 남상(男相)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이(天下大將軍)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상(女相)을 한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으로 하여라」고 명하였다. 어명으로 장승배기에는 곧 두 개의 높다란 장승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는 왕이 안심하고 행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란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 오는 길에 이 장승 앞에서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일본인들이 미신과 무속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이곳의 장승을 없애버리고 지금은 그 언저리에 아카시아 몇 그루가 서있을 뿐이며 장승배기란 통속적인 지명만 남아 있는 것이다.
상도동에는 장승배기 외에도 옛부터 부리어졌던 자연부락과 고개 등의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상도제1동에는 숭실대학교 밑 로터리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살피재라고 한다.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도둑이 많이 출몰하였던지라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펴서 가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고 한다.
상도1동 숭실대학교에서 사당4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사당이고개라 하는데 이는 옛날 이 고개 부근에 큰 사당이 있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한증막은 상동1동 288번지에 한증목욕탕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한증탕은 시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으나 현대화 물결에 밀려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우정목욕탕」이 자리잡고 있다.
빈수골은 현 성대시장 뒤쪽 사자암이 위치한 아래 지역을 가리킨다. 일명 빙수골이라고 하는데 빙수골은 이 지역에 항상 찬물이 나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불려지던 이름이 빈수골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불리어졌던 우리말 지명이 다음과 같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금불암 : 현 76번지 일대 마을로 옛날 금이 났다고 한다.
노들고개 : 노들강께로 가는 고개
노량진고개 : 노량진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이른다.
도당째 : 성대굴 근처의 대방동으로 가는 고개이다.
바깥말(주막거리) : 성대굴 바깥쪽 길가의 마을로 옛날 국도에 주막이 있었다 한다.
상도소류지(저수지) : 1959년 상도토지개량조합에서 설치한 저수지
서낭당 : 상도제1동의 살피재에 있는 당으로 돌무더기가 있었다.
중등고개 : 소쇠울에서 밤골로 가는 상도제2동에 있는 고개인데 산 중등을 넘는 고개라 한다.
찬우물터 : 안말 뒤의 옛 우물이라 한다.
본동(本洞)의 동명은 조선시대부터 오랫동안 불리어졌던 자연부락 명칭으로 「노량진의 원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과천군(果川郡) 하북면(下北面) 본동(本洞), 상가차산리(上加次山里), 하가차산리(下加次山里)로 불리어 오던 세마을을 1914년 통합하여 시흥군 북면 본동리(本洞里)라 하였다.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확장할 때 본동리는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본동리(本洞里)는 본동정(本洞町)으로 호칭되어 영등포출장소관내에 있다가 1943년 구제도(區制度)를 실시함으로써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 일본식 동명 대신 우리말로 동명을 고치면서 이곳은 영등포구 본동(本洞)으로 되었다. 1973년 영등포구로부터 관악구를 분리, 신설하자 본동은 신설된 관악구에 속하였다. 1980년 관악구에서 동작구가 분구될 때, 본동은 신설된 동작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른다.
본동의 사적으로서는 한강대교를 건너자마자 언덕 중턱인 본동 10-30번지에 용봉정(龍鳳亭)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가 묻힌 화산(現 수원) 현륭원에 참배하러 다닐 때 노들강(現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설치하고 건너가 간시 어가(御駕)를 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곳을 휴식하며 주식(晝食)을 하던 곳이라 하여 일명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는데 이 때에는 주교 가설을 담당하는 주교사(舟橋司)와 주교대장(舟橋大將)도 두었다.
본동에는 자연부락 명칭으로 복궁촌이 있다. 복궁촌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용산구의 새푸리촌(現 이촌동)이 물에 떠내려가자 그곳 주민 60여 세대가 본동 440번지 일대에 정착, 집단거주한 마을을 일컫는데 복궁촌이란 명칭은「복흥촌(復興村)」의 이름이라 한다.
옛날 상가차산리(上加次山里) 마을은 본동207-2 근처의 마을이며, 하가차산리(下加次山里) 마을은 본동 12, 24, 25, 26, 30, 31통의 일대로서 일명 가칠목(架七木)으로 칭한다. 가칠목은 본동에서 가장 오래된 한강 기슭의 마을로 옛날에는 한강물이 불어나면 길이 막힌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옛날 전염병자(호열자, 염병)와 기타 돌림병자들을 이곳에다 격리시켜 가두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고개 이름으로는 매봉재 서쪽에 있는 고개를 서낭당이 고개로 칭한다. 이는 전일에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과 번영을 비는 대동치성(大同致誠)을 제사지내던 서낭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동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매봉재에는 봉산유원지(鳳山遊園地)가 있었다. 이 유원지는 일제때 조성된 것으로 일본인들이 이곳에 벚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으므로 철도국 직원과 기타 각 기관 직원들이 많이 와서 놀았다고 한다.
흑석동(黑石洞)의 동명은 흑석동제1동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의 빛이 검은색을 띠므로「검은돌(黑石)」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과천군(果川郡) 하북면(下北面) 흑석리(黑石里)에 속하던 곳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새로 조정하면서 이곳을 시흥군(始興郡) 북면(北面) 흑석리(黑石里)라 하였다.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대대적으로 확장할 때 흑석리는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경성부에 편입된 흑석리는 일본식 명칭인 흑석정(黑石町)으로 개칭되어 영등포출장소 관내에 있다가 1943년 경성부가 구제도(區制度)를 실시함으로써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흑석동으로 개칭되어 우리 동명을 되찾았다. 1973년 영등포구로부터 관악구가 분리 신설되었는데 흑석동은 관악구에 이관되었다가 1980년 관악구에서 동작구가 분구(分區)될 때 흑석동은 신설된 동작구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수원이나 과천 방향으로 왕래하려면 노량진(露梁津)이나 한강도(漢江渡)를 이용하여야 하는데, 통행량이 많고 기찰(譏察)이 심하여 민간인들은 사선(私船)으로 운행되는 이 곳 흑석나루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태조(太祖) 4년(1395)에는 용산에서 충주에 이르는 사이에 7개소의 수참 (水站)을 설치하여 세곡운송의 편의를 도모하면서 이곳에도 수참 을 설치하여 참선(站船)의 정박소로 하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이곳에 참선 15척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수참이 폐지되고 또한 인근에 동작진(銅雀津)이 개설되면서 이곳은 나루터의 기능을 잃어갔다. 광복 이후 한때 이곳은 조정경기훈련장이기도 하였다.
서달산 꼭대기(흑석1동 山37번지)에는 명수대(明水臺)가 있었다. 명수대는 1920년 일본이 부호 木下榮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든 다음 이곳이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광복 후 철거되었다는 것이다.
흑석1동에는 자연부락명으로 흑석동의 동명이 된 검은돌 마을이 있다. 검은돌 마을은 지금의 흑석1동 232 , 243번지 일대를 지칭했다. 명창굴은 흑석1동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중앙대학교 중문 부근의 마을 이름으로 지금도 오래된 한옥이 있다.
안말은 흑석1동 5통(125-133번지)일대의 마을 이름이고, 새말은 흑석1동 221번지 중앙대학교 앞 지역의 마을을 일컫는데, 새말의 유래는 을축년(乙丑年) 큰 장마 때 안말이 침수되자 그곳 주민들이 좀 더 높은 지대이던 지금의 중앙대학교 앞으로 옮겨서 새로 집을 짓고 살게 되면서 붙여진 것이다.
흑석동은 동, 서, 남쪽의 3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관계로 산이름이 적지 않다. 명수대가 있었던 서달산은 달마사(達摩寺 ; 흑석 1동 37번지)가 있는 뒷산으로 돌이 많이 나며, 재강굴산은 붉은 산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앙대학교 뒷산을 일컫는데 중앙대학교를 창시한 임영신의 묘가 있다. 할떡거리는 동양중학교 왼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 이곳 주민들이 이 산을 오르려면 숨이 가빠 헐떡거렸다 하여 그 읾이 붙여졌다.
연못시장(흑석동 101, 102, 182번지)과 주택은행이 위치한 일대에는 연못이 있었다. 이 연못은 일제 때 일본인 木下榮이 이곳에 5,000평 정도의 커다란 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나무를 심어 섬을 만들어 놓은 까닭에 동리사람들의 휴식처와 낚시터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광복후에 이곳을 메우고 시장이 생기자 연못자리에 있는 시장이라 하여 연못시장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흑석시장 입구에서 중앙대부속여자고등학교로 가는 길 양쪽과 골짜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곳에는 옛날 본동, 노량진동, 상도동 그리고 흑석동 주민들이 세상을 떠나면 모두 이곳에 묘를 썼다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묘지 사용이 금지되는 한편 서울시가 기존묘도 이장하도록 공고한 후 이 지역은 개인에게 불하되어 지금의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의 중앙대학교 부속여자고등학교 윗 지역은 70년대 초 공군장교들을 위한 30여채의 집을 지어 불하하였다고 하여 공군주택이라 불리운다.
흑석2동의 자연부락명으로 비개마을이 있다. 흑석2동 26, 28, 33, 38번지 일대를 비개마을이라 칭하는데 이는 한강변 기슭에 비스듬히 비껴있다고 호칭된 것이다.
흑석3동의 자연부락명으로는 솔밭동네가 있다. 이 마을은 흑석3동 7, 8통 일대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옛날 이곳에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약수동은 흑석 3동 69번지 6통 일대의 마을로 옛날 이곳에서 아주 맛있는 약수물이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작동(銅雀洞) 동명에 대한 유래는 조선시대에 이곳이 용산에서 수원으로 통하는 도진(渡津)의 하나였던 동작진(銅雀津) 근처 이남지역을 연결하는 나루로서 그 이름을 동재기나루터라 부른데서 동작동으로 명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과천군(果川郡) 상북면(上北面) 동작리(銅雀里) 포촌리(浦村里)로 불리던 곳이었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 때 동작리와 포촌리를 병합하여 동작리(銅雀里)라고 개칭한 다음 앞서 과천군 소속이었던 것을 시흥군 북면에 편입시켰다.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이 대폭확장됨에 따라 경성부로 편입시킴과 동시에 동작정(銅雀町)으로 개칭하고 영등포출장소를 설치하고 그 관내에 두었다 1943년 출장소를 구제도(區制度)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동작정은 영등포구의 관할하에 있었다. 그 뒤 1946년 정을 동으로 개칭하였는데 이 때 동작정은 동작동(銅雀洞)으로 개칭되어 서울시 영등포구에 소속되었다. 1973년 관악구가 신설됨에 따라 동작동은 신설된 관악구(冠岳區)의 관할하에 있다가 1980년 관악구를 분구하여 동작구(銅雀區)가 신설되자 동작동은 동작구 관할하에 편제되어 현재에 이른다.
조선시대 동작동의 자연마을은 동재기와 정금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재기는 흑석동에서 현재 국립현충원(舊 국립묘지)로 넘어오는 강변 일대에 검붉은 구리빛(銅) 색깔 띤 돌들이 많아 분포되어 있는데 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동재기나루터(銅雀津)는 조선시대서울에서 과천, 수원, 평택을 거쳐 호남으로 내려가든가, 또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였다.
이수(梨水)로터리를 지나 사당동 방면에는 정금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정씨(丁氏) 성을 가진 감사(監司)가 살던마을이라 하여 「정감몰」또는「정가우」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조선후기 이곳에 砲放터(사격장)가 있어 여기서 훈련을 마친 뒤 나루를 건너기 전에 인원과 장비를 점검하였다고 하여 「점검마을」이라 한 것이 「정금마을」로 와전되었다고 한다. 또 서울에서 나루를 건너 호남으로 여행하던 여행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주막이 위치한 산 모퉁이 동네라 하여 「저거머리」동네라고도 불리어졌다고 하는데 현재 동작동 56, 58, 59, 61, 64번지 일대이다.
현 동작동 41, 42, 66, 71번지 일대의 마을을 「배나무굴」이라 하였다. 이 마을에는 광복 전까지만 하여도 아름드리 배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마을 근처에 이수교(梨水橋)라는 다리가 있은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현 동작터널과 국립현충원 군악대가 있는 지역에 「농배」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약 15가구가 나루터에서 고기잡이와 잡역(雜役)으로 생활을 꾸려나갔다고 한다. 일명 능배라고도 불렀다.
또 현충탑과 창빈안씨(昌嬪安氏) 묘가 있는 지역에는 「능마을」이 있었는데 약 10가구가 농업을 주로 했으며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주로 살았다고 한다.
그 밖에 고개, 다리 이름을 보면
동재기고개 : 동작파출소 부근에서 군악대가 위치한 곳으로 넘어가는 길이름으로 일명 동적고개라고도 한다.
아홉고비텡이 : 현 동작터널이 지나는 산으로 옛날 이 산이 매우 급경사여서 빙빙돌아 아홉구비를 올라야 꼭대기에
도착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막재 : 현 동작중학교에서 국립현충원으로 넘어가는 산 11, 12, 22번지 일대이다.
방아다리 : 현 경문고등학교 건너편으로 지금은 방배동에 속하나 옛날 삼각개울이 마주치는 개울에 놓여져 있던
다리이다.
이수교(梨水橋) : 1925년 일제에 의해 설치된 갯말 앞에 있는 다리로 배나무골이 잇고 또 한강물이 앞으로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배물다리」라고도 불렀다.
그 밖에 국립현충원 설치로 지금은 폐동이 된 상지목 티꿀산, 당째(재)등 이름이 남아 있다. 이 마을은 당시 서울에서 남도로 통하는 길목으로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오가던 애환이 깃든 골목이었다. 이 마을은 아득히 먼 고구려시대에는 한 때 율목군(栗木郡)이라 지칭되었으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때에는 율진군(栗津郡)에 속해 있었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때에는 과주(果州)에 소속되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과천(果川)으로 개칭하여 현감(縣監)을 두고 통치하였는데 동작동은 과천에 소속되어 있었다.
국립현충원 경내순환도로를 따라가면 사슴장 위쪽 경찰탑과 박정희대통령묘소 중간지점인 305번지에 사찰이 하나 있는데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이다. 이 절은 신라말 도선국사(道仙國師)가 창건하여 갈궁사(葛宮寺)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공민왕2년(1352)에 보인대사(?)에 의해 화장암(華藏庵)으로 중건되었고, 선조 10년(1577)에 화장암을 화장사(華藏寺)로 승격시켰다. 6.25전쟁 후 국립묘지가 들어서자 많은 유가족들이 이 절에서 호국영령을 위해 기도하였다. 1983년 화장사를 호국지장사로 사명을 개칭하였다.
사당동(舍堂洞) 동명의 유래는 옛날 큰 사당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과천군(果川郡) 상북면(上北面) 사당리(舍堂里)로 불리어오다가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에 따라 당시 자연부락이었던 능마을, 동산마을, 양짓말 등을 병합하여 사당이 있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사당리(舍堂里)라 하고 시흥군(始興郡) 신동면(新東面)에 소속시켰다.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사당동(舍堂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사당동의 자연부락의 명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안말 :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예술인마을 부근인 사당동 1051∼1050번지 일대이다.
군산터 : 옛날 군산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들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 1동 삼성사우촌과 남성중학교
일대이다.
양지촌(陽智村) : 해가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 3동 219번지 일대로서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양지마을이라고 부른다.
능내(陵內) : 조선시대 수죽(水竹) 정창행,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제곡(濟谷) 정광성(鄭廣成)의 묘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현 사당동 239-241번지 묘가 있는 지역이다.
가마니촌 : 가마니를 덮어 놓고 어렵게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동 산22번지에 위치한곳으로 대부분
무허가 거주주민들이었는데 1980년 재개발사업을 시행하여 지금은 우성아파트와 삼익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그밖에 골, 들 등의 지명을 살펴보면
안자리 : 안쪽에 잇는 작은 들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동 1003, 1004번지 남사초등학교 자리이다.
시우전 : 옛날 많은 논밭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동 252-263번지 일대이다.
도당터(都堂터) : 현 사당동 사거리 지하철 사당역 일대로서, 1970년대 초까지도 느티나무를 동신(洞神)으로
받들고 해마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였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느티나무는 뽑히고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화상(畵像)은 남현동의 관음사(觀音寺)로 옮겼다.
구루물 빨래터 : 구름만 기어도 물이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사당동 남사초등학교 윗쪽 즉 소댓물 위쪽으로
1960년대 초가지 빨래터로 이용되었다.
소댓물: 현 사당동 1011번지 남사초등학교 옆 일대로 이곳에 300여평 가까운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물은
겨울이 되어도 얼지 않아 목욕과 발래터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수라간(우물) : 옛날 임금님이 행차할 대 이곳에서 수라를 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 사당동 1041번지
한전건물 뒤로 최초로 장인동이란 사람이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사당동 180-1번지에는 남묘(南廟)가 있다. 이 남묘는 원래 용산구(龍山區) 도동(桃洞) 1街 9번지 (현 남대문 파출소 뒤)에 있었는데 1913년 총독부에서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에게 개인 경매를 붙여 지금의 관성묘(關聖廟)유지재단이사장인 서동진(徐東鎭)의 아버지인 서태성(徐泰成)이 사들여 개인소유로 관리하게 되었다. 이 남묘는 선조(宣祖) 31년 (1598) 에 명(明)의 유격장(遊擊將) 진인(陳寅)이 임진왜란에 관우(關羽)의 영이 나타나 도와주었다고 해서 그가 머물러 있던 남산 기슭에 묘를 세우고 그 안에 관우와 주창(周倉)의 초상을 모시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57년에 재건한 바 있으나 정문이 되는 그 형적(形蹟)만 남기고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대방동(大方洞) 마을이름의 유래는 이곳은 지금부터 약 350년 전인 조선시대에는 높은 절과 번댕이(樊唐里)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진 곳이었는데 일제 때 번대방리(番大方里)라 일컫다가 광복후 대방동(大方洞)으로 명명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하북면(下北面) 번대방리(番大方里)로 불리어 오다가 1914년 하북면이 북면(北面)으로 개칭된 바 있으며, 1936년 경성부 관할구역을 확장할 때 번대방리 중 상도천(上道川) 우안(右岸)의 지역이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번대방정(番大方町)이라 하였다. 1946년 일본식 동명을 우리동명으로 개칭할 때 대방동으로 개칭되었고 1973년 관악구가 신설됨에 따라 대방동은 관악구에 속해있다가 1980년 동작구가 신설됨에 따라 대방동은 동작구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른다.
조선시대 대방동의 자연부락의 명칭을 보면
높은절이 : 청연암(靑蓮庵) 아래에 있는 마을로 높은 절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번댕이(樊塘里) : 예부터 낙천군(洛川君), 연령군(延齡君)의 묘를 모신 계동궁(桂洞宮) 연못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속칭 번댕이라고도 불렀다.
안말 : 대방동 안쪽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밖에 고개, 당 등의 명칭을 보면
서낭당고개 : 옛날 서낭당이 있었던 고개로 성남중고등학교 후문에서 (구)공군본부 의무실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
덕굴고개 ; 대방동에 있는 고개이름.
용마우물 : 용마가 났다는 우물로 옛부터 물맛이 퍽 좋았다 하며 현재 성남중고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우물
용마산(龍馬山) : 용마우물에서 용이 나와 지금의 성남중고등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하여 그 산을 가리켜 용마산
이라고 불렀다 함
대방동은 조선시대에는 농업과 한강을 중심으로 한 어업과 상업에도 일부 종사하는 서민층들이 사는 순박한 마을이었으며, 일제 때는 공장이 이 마을에 들어서기도 하였다.
대방동에 있는 고적으로는 유일하게 청연암(靑蓮庵)이라는 사원이 있다. 대방동 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청연암은 통일신라시대 원효대사(617∼686)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신대방동(新大方洞) 동명의 유래는 대방동(大方洞) 접경의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하북면(下北面) 번대방리(番大方里)로 불리어 오다가 1914년 경기도 시흥군 북면(北面) 번대방리로 개편되었다.
1936년 번대방리 중 상도천(上道川) 우안지역(右岸地域)이 먼저 경성부(京城府)에 편입되어 나갔고 상도천 좌안지역(左岸地域)은 경성부 편입에서 제외되어 시흥군 동면(東面) 번대방리로 남아 있었다. 1949년 서울의 행정구역이 확장되었는데 경기도 시흥군 동면 번대방리가 구로리(九老里), 도림리(道林里)와 함께 서울시에 편입되었고 뒤이어 1950년 신대방동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973년 관악구가 신설됨에 따라 신대방동은 관악구의 관할 아래 있었다가 1980년 동작구가 신설됨으로써 신대방동은 동작구 관할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대방동의 자연부락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쪽박골: 옛날 이 마을에 우물이 잇었는데 늘 쪽박으로 물을 떠먹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세모골」이라고도
불렀는데 현 신대방동 471-474번지 일대이다.
비선거리 : 옛날 이곳에 비석(碑石)이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 원풍모방 앞 삼거리 (신대방동 584, 586번지) 일대.
안말 : 마을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 문창초등학교 부근 일대이다.
모자원(母子院) : 6.25동란 후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성년 미망인과 자녀를 위하여 64가구의 주택을 마련하여 이곳에 살 게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과부촌」이라고도 불렀으며 신대방동 343번지 일대이다.
현재는 모두 이전하고 남아 있지 않다.
중국촌(中國村) : 광복 직후 5∼6년간 중국인 4가구가 이곳에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신대방동
338번지 일대이다.
그밖에 고개 등의 명칭을 보면
쇠슬목고개 : 소가 누워있는 듯한, 즉 우와피(牛臥皮)지형 중 목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현지 이 마을 607-86번지에
해당된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이 고개에 있어서 신혼부부가 이 고개를 넘어가면 귀신이 질투하여 이
마을에 천연두 및 각종재앙이 발생하였다고 하며, 또 상여가 고개를 넘으려 하면 고개 언저리에서 발이 묶여
고개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우와피(쇠내피) : 소가 누워있는 지형으로, 옛날에는 현재의 도림천(道林川)이 넓고 수십이 깊어 도림천을 강변(江邊)이라
불렀다. 특히 물이 맑아 지금의 도림 4동 파출소 부근을 옥수(玉水)라 불렀다. 현재 문창초등학교 정문 앞
강속에 높이 10여m나 되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에는 직경 2자 가량의 크기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으며, 당시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이 바위가 땅속으로 완전히 묻히면 천지가 개벽한다」라는 구전이
전해졌다. 그 뒤 6.25전쟁을 전후하여 하상(河床)이 높아져 점차 바위는 도림천 땅속으로 묻히기 시작하였으
며, 전철역이 생기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장백에 웅덩이 : 현재 보라매공원 운동장자리로 광복 이전부터 이곳에 만 여평 정도 되는 늪이 있어, 메기, 가물치, 붕어
등이 서식하여 주민들은 사철로 이 늪에서 고기잡이를 하였으나 공군사관학교가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운동장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