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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무 리
허 남 석
8월말 늦여름인데 장대비가 내린다.
곧 멎으려니 했는데 오히려 빗줄기가 더 굵고 세차진다.
“오늘 중으로 담당마을에 일제히 나가서 새마을사업을 세세히 점검하고 앞으로 대책을 숙의하고 오라”는 면장님의 말씀이 아직 귓전에 쟁쟁하다.
‘빗속을 뚫고 가자’는 결심이 서자 비닐로 된 비옷을 챙기고 비료포대 한 장을 구했다.
비료포대를 깨끗이 털어내고 닦은 다음 출장서류와 민원서류 몇 점을 맨 안에 넣고 비가 스며들지 않게 비료포대를 정성껏 감아서 자전거 짐받이에 꽁꽁 묶었다.
마지막으로 비닐 비옷을 몸에 걸치고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무섭게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담당마을인 두무리를 향해 오르막 신작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비를 고스란히 이마로 맞으며 달리다 보니 두 달 전 몹시 긴장된 마음으로 초임 발령장을 받던 날이 떠오른다.
때는 1976년 6월. 몇 달째 가뭄이 계속되어 그야말로 전국 방방곡곡이 심하게 타들어가던 때.
내가 예의 초임 발령장을 받고 간 곳이 면사무소가 아닌 남면 죽리라는 마을의 큰 교량 밑이었다.
안내를 받아 가면서도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고 도착한 다리 밑에서 런닝셔츠 차림의 여러 어른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 주시는 게 아닌가!
어리둥절한 내게 자리를 권해주시는 대로 앉아서 주변을 살펴보니 그 분들이 하는 일이 다름 아닌 바짝 말라붙은 개울을 깊이 파내고 그 속에서 물줄기를 찾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중 알고 보니 그렇게 찾아낸 물줄기를 한 곳으로 연결해서 물을 한 곳에 가두어 놓았다가 인근의 주민들 논으로 물을 보내주는 일을 벌써 열흘 넘게 하고 있었다.
물론 노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수량, 그래서 무모하리만큼 힘든 일이었지만 그 일은 면내 이곳저곳에서 계속 이어졌고 그분들이 모두 면사무소 직원들이라는 사실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나도 스무살 젊은 혈기로 곡괭이와 삽을 번갈아 들고 이른바‘한해대책’사업에 뛰어들었다.하루도 안 돼 손에 물집이 들고 터져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런 내색 않고 열심히 개울을 팠다.
다리 밑에서 숙식을 하고, 밤이면 선배님들의 말씀을 경청하면서‘아하 공직이란 것이 주민이 힘들고 어려울 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야 하는 직업’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일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하늘은 무슨 일로 그렇게 화가 났는지 한낮의 열기는 뜨거움을 더해만 갔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심술궂은 태양의 열기로 온 강토가 쩍쩍 갈라져 갔고 농심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그렇게 열흘이 지난 일요일 오후 선배 한 분이 “내일은 이리 오지 말고 면사무소로 출근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발령장을 받고 꼬박 열하루 동안 개울을 파다가 면사무소에 첫 출근을 한 날이다.
면사무소 입구에서 들어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선배 한 분이 면장실로 나를 안내했다.
들어가니 발령 동기 둘이 먼저 와 있었다.
세 명이 자리에 앉자 면장님이 큰소리로 “최 주사, 준비한 거 도착 했나?”하시니 “네 곧 들어갑니다.”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상차림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상 위에는 큰 주전자 하나에 대접 네 개가 놓여있고, 한 모 정도 되는 두부와 간장이 주전자를 호위하고 있었다, 면장님이 상 옆으로 와 대접 네 개에 막걸리를 따르기 시작했다.
막걸리가 잔에 그득해 지자 “자 한 잔씩 들게”하셨다.
엉거주춤 잔을 든 우리에게 면장님이 한 말씀 하셨다.
“이 막걸리는 농촌과 농심을 이해하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준비한 것”이라며 건배를 제의하며 면사무소 첫발의 서먹함을 덜어 주셨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새로 발령받은 세 명에게 담당마을이 지정되었다.
모두 신임이라 원거리 마을이 지정 되었는데, 내가 지정받은 담당 마을은 남면에서는 가장 오지인 두무리라는 마을이었다.
처음 배치된 재무부서에서 업무연찬을 시작했는데, 그런 중에도 면사무소 전 직원들은 6월 내내 크고 작은 계곡을 다니며 한해대책 사업을 계속했고, 심지어 쩍쩍 갈라진 논에 소방차로 물을 뿌리고 모내기 하는 고통스런 진풍경도 연출되었으니 그해 유월은 정말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런 끔직한 가뭄을 겪은 내 머리 위로 늦여름 빗줄기는 점점 거칠게 내린다.
어느덧 자전거는 10여리를 달려 두무동 고개 초입새다.
여기서부터는 가파른 고개인데다 온통 돌과 물웅덩이로 된 길이라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한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리지, 길은 울퉁불퉁하지, 구비가 심한 길은 점점 가팔라 오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도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지난 달 그러니까 7월25일은‘반상회’날이었다.
6월에는 한해대책을 하느라 열리지 않았던 반상회가 7월에는 열렸던 것이다.
매월 25일 반상회에서는 나라와 도·군정 주요 정책이나 면사무소 소식과 각종 생활정보를 마을담당 공무원이 주민들을 직접 만나 소개하고 설명하며 마을 주민들의 애로나 건의사항을 수렴하는 아주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말하자하면, 그 반상회를 위해 남면에서 가장 오지 마을인 두무리에 첫 출장을 가야 했다.
다행히 초행 길이라 선배 한 분이 면사무소에 단 두 대 밖에 없는 오토바이 중 한 대로 나를 마을까지 데려다 주셨다.
해질녘 두무동 고개를 넘는데 길이 얼마나 험한지 밀고 끌고 하며 천신만고 끝에 고갯마루에 올라 한 숨 몰아쉰 다음 고개를 내려가는데, 어느새 어둠이 깔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워오는 데 오토바이 불빛사이로 산짐승들이 휙휙 하며 지나가는 게 아닌가!
그럴 때마다 선배의 허리춤을 나도 모르게 움켜쥐자“사람, 겁은”하시며 태연하게 운전을 한다.
긴 운전 끝에 반상회가 열리는 반장 댁 앞에 도착해서 나를 내려 주자마자 그 선배는 면사무소로 돌아갔다.
나는 그날의 반상회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진한 감동으로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반장 댁에는 이미 반상회를 위해 마을 이장님과 새마을지도자 등 몇 분이 와 계셨고, 반장님 내외분은 참석하시는 분들에게 옥수수와 감자를 쪄 드린 다고 분주하셨다.
지금이야 반이나 통 주민들이 반상회를 자율적으로 운영을 하지만, 그때는 마을담당 면서기가 직접 반상회를 진행하였다.
처음 진행하는 반상회라 떨리기도 하고, 처음 뵙는 마을 어르신들이라 서먹한 데 그 마음을 아시는지 마을 어르신들은 마치 귀한 자식을 대하듯이 예외 없이 반갑고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다소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이 거의 모인 것 같아 회의를 진행해도 좋은지 반장님께 여쭈니 아직 몇 분이 더 오셔야 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창문 밖을 가리키며 “저기 내려들 오네”하시는 게 아닌가!
벌떡 일어나 내다보니 마치 병품처럼 둘러쌓인 높은 산 중턱에 불빛이 보였다.
대여섯은 더해 보이는 불빛이었다.
“월남촌 사람들이야” 이장님이 말씀 끝에 알게 되었지만, 월남촌이라는 곳이 반장 댁까지는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데 지금 내려오는 불빛 거슬러 산 넘어 분지에 마을 주민 여섯 세대가 살고 있는데 바로 그 주민 분들이 불빛을 의지해 반상회에 오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 불빛을 보고 그분들에게 반상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또 한 달에 한번 만나는 동네 분들과의 재회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지금도 그때 그 모습이 뇌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런 모습에 충격이 섞인 감동을 받아 소식 하나라도 더 전해드리려 무척 애를 썼지만,
그렇게 첫 반상회는 끝이 나고, 한 분 두 분 마을주민들이 귀가를 하고, 예의 그 월남촌 주민 분들도 다시 높은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반장 댁에는 높은 산을 되짚어 가시는 그 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나와 반장 내외분만 남게 되었다.
이슥한 밤. 나를 데려다 준 선배는 이미 떠났고, 주변에 오늘날과 같은 여관도 없고, 교통편도 없는 산간 오지라 천상 반장 댁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이 반장 댁에는 방이 여러 칸 있어서‘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내심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반장님이 내가 묵을 방을 알려 주셨다.
그런데 또 황감한 일이 벌어졌다.
방 선반 위에 아주 예쁜 보자기로 쌓여 있는 것을 내려 풀어 놓는데 백옥같이 흰 이불이다.
그러면서 반장님은 “모처럼 새로 마음에 드는 면서기가 왔으니” 하시며 특별히 반장내외분이 신혼 때 딱 한번 쓰셨다는 그 이불을 내 주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극구 사양을 했고, 홑이불에 베게 하나면 된다는 내 완강한 부탁을 짓누르고 그 내외분은
기어이 그 이불을 내어 주셨다.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말을 이때 쓰는구나 생각을 하며 아무리 사양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반상회를 위해 한 시간이 넘는 깊은 산중에서 참석하셨던 주민 분들.
그리고 귀하게 간직하셨던 소중한 이불을 내어 주셨던 그 엄청난 일들을 스무 살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놀랍고 충격적인 감동이었다.
내가 이 마을과 또 이 마을에 사시는 모든 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 최선을 다해 해야겠다는 다짐을 밤새 그리고 이튼 날 어제 밤 오토바이로 왔던 그 길을 걸어 나오며 몇 번이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었다.
빗줄기가 좀 약해진 듯 할 무렵 나는 두무동 고개 정상에 자전거를 세웠다.
뒷좌석에 동여맨 서류들이 걱정이 되어 살폈다.
다행히 서류까지 빗물이 스며든 것 같지는 않았다.
산 정상이라 갑자기 찬 기운이 느껴진다. 우비라고 하지만 코트 모양의 비닐로 된 것이라서 바지는 이미 비에 흥건해 졌고, 머리도 엉망이다.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이다.
출·퇴근하며 갈고 닦은 자전거 실력을 발휘할 때다. 그렇지만 도로사정이 엉망이다.
가장 무서운 적이 돌부리다.
자전거 바퀴가 돌부리에 치이면 영락없이 펑크가 나고야 만다.
내리막길이라 속도가 붙어 연신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돌부리를 비켜나려 안간힘을 쓰며 내리
달렸다. 드디어 두 세대가 살고 있는 마을 초입새에 접어들었다.
거기부터는 그래도 길 사정이 나아서 제법 속도감을 느끼며 달릴 수 있다.
비 때문에 지체한 시간에 다급함이 밀려온다.
멀리 두무분교가 눈에 들어온다. 분교 옆이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 이장 댁이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신 이장님이 눈웃음 가득한 얼굴로 나를 맞아 주신다.
“어휴 이 빗길에”하시며 자전거 뒷자리 비료포대 묶은 줄을 풀어 주신다.
이장님 사모님도 반갑게 인사를 하신다.
이장 댁 방에 앉아 비료포대를 서류가 다칠세라 살살 풀어 속에 있던 서류를 꺼내자
서류 겉을 싼 표지종이에 빗물이 스몄다.
바짝 긴장하고 표지 안 서류를 확인하니 다행이다.
마을 주민들이 요청하셨던 각종 민원서류들이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휴”하는 한숨 끝에 사모님이 내 주신 따끈한 차 한 잔이 비 탓으로 으스스한 몸에
온기가 전해진다.
마을주민들이 신청했던 민원서류들을 이장님께 전해드리고 본격적인 출장업무를 시작했다.
면에서 가장 산간 오지마을인 두무리에 대한 구체적인‘새마을 사업’을 논의했다.
가장 시급한 것이 초가집을 개량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재래식 화장실도 고치고, 담장도 정비해서 깨끗하고 쾌적한 주거환경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이른바 70년대 시작된'새마을운동'이 두무리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그렇게 시작된 두무리의 새마을 운동.
노랫말처럼 초가집을 스레트 지붕으로 바꾸고, 현장에서 벽돌을 찍어 담장도 고치고, 마을 안길도 포장하는 등등 새마을 사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새 39년이란 세월이 자취를 감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39년이면 강산이 네 번은 변하는 긴 세월이다.
'아! 두무리! 그 두무리가 지금은 얼마나 변해있을까' 불현 듯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언제 한번 시간을 내서 두무리를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해서 39년 전 함께 손잡고 새마을 운동과 마을발전을 위해 열정을 쏟으셨던 이장님내외분과 반상회 때 귀한 이불을 내어 주셨던 반장님 내외분께 점심 한 끼라도 대접해 드려야겠다는 조급함이 나를 벌떡 일어나게 한다.
돌이켜보면, 70년대 당시에는‘서정쇄신’이라고 공무원사회의 부조리를 일소하여 국민정신을 진작시키려는 정신개혁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주민들에게 그 어떤 불편이나 피해를 줘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뜻도 담겨있었다.
오죽하면 일주일에 서너 번은 담당마을에 출장을 가야 했던 시절 출장지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해야
했는데 그 마을엔 식당도 없는 형편이어서 이장 댁에다 쌀을 한말 사다드리고 그것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물론 이장님 내외분이 마을을 위해 일하는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난리를 치셨지만 나의 간곡한 부탁에 내외분도 그리 해 주셨다.
지금의 입장에서 정(情)으로 사는 세상인데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반문이 따를 수 있지만, 당시 서정쇄신의 시퍼런 서슬은 그런 부분까지도 세심한 노력과 실천을 요구하였다.
또 어찌 보면 다소 강도와 시각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또 그를 토대로 인간의 존엄성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로 삼을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필요한 부분도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인간의 존엄은 고사하고 생명이 경시되는 혼란한 세상에 ‘新서정쇄신’이라는 이름의 대대적인 국민운동을 펼쳐 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은 너무 멀리 온 생각일까?
또 한 가지 재미?, 지금이야 재미있게 회상이 되지만 그때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가 면사무소와 두무리를 오가는 과정에서 자전거 타이어가 수시로 펑크가 났다는 것이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다 보니 면사무소에서 출발해서 두무동 고개를 넘으면 여지없이 돌부리에
자전거 바퀴가 터졌고, 그때부터는 자전거를 끌고 십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찾아낸 방안이 이장 댁에 자전거 바퀴를 때우는 부품과 도구 일체를 비치해 놓자는 데 뜻을 모았고 바퀴가 펑크날 때마다 이장님과 바퀴를 때우던 기억도 새롭게 솟아난다.
두무리는 지금 예전의 두무리가 아니다.
39년 전 청운의 꿈을 품고 첫 발을 내디딘 사회. 그리고 처음으로 만난 담당마을 두무리.
그 두무리는 두무동 고개와 소양강 상류에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면 소재지인 용하리에서 청리를 거쳐 굽이굽이 이어져 있는 두무동 고개를 넘으면, 35가구 80여명의 주민들이 오손도손 한 가족처럼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정겨움이 넘치는 마을이다.
지난 1973년 소양강댐이 건설되면서 두무리와 붙어있는 인제군 남면 관대리 일원에 물이 차게 됐고, 두무리는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오지 중의 오지가 되었었다.
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서울과 춘천에서 동해안을 오가는 사람들이 양구와 두무리, 인제를 거쳐 진부령을 넘어 다녔다. 고성에서 춘천, 서울을 향하는 지름길의 길목에 위치해 있었는데 댐 건설로 육지속의 고도가 된 셈이다.
전형적인 농산촌 마을인 두무리는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가 으뜸이고, 그야말로 순수한 자연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순박한 웃음과도 닮아 있다.그렇다보니 이곳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산물과 산채 등도 전국 최고의 맛과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주로 고추, 수박, 곰취, 오이 등이 생산되고 있는데 대부분 수도권 주민들에게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다. 그만큼 맛과 품질이 뛰어나다는 것이고, 일부 주민들은 20년 넘게 소비자들의 얼굴도 모른 채 농산물을 직거래로 판매할 정도로 신뢰가 쌓여 있다. 수박도 워낙 맛이 좋고 당도가 높아서 “역시 두무리 수박이 최고”라는 소비자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전국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며, 곰취도 향이 뛰어나 큰 호평을 얻고 있다.산림이 울창하다보니 주민들은 산림에서도 소득을 올리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특히 지난 2009년부터 ‘송이산가꾸기’사업을 펼쳐 지난해 송이가 흉작을 보이면서 모든 지역에서 생산량이 크게 줄었으나 두무리에서는 다소나마 송이가 생산되면서 송이산 가꾸기 사업에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고, 게다가 매년 봄이 시작되는 시기에는 고로쇠수액을 생산하는데 이 마을 고로쇠수액은 맛이 좋고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 최고 중의 최고라는 찬사도 받고 있다.
거기다 도로 사정도 좋아져서 면소재지에서 두무리까지 말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지난 2009년 10월 소양댐으로 물에 잠겨있던 두무리와 관대리 남전리를 잇는 38대교가 건설되어 교통의 요충지라는 옛 명성도 되찾아 놓았다.
오랜 세월 척박했던 오지마을이 이제‘산촌생태체험마을’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발전한 모습에 39년 전 폭우를 뚫고 두무동 고개를 넘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감회도 새로워진다.
이번 주말엔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두무리를 방문해서 오랫동안 뵙지 못했던 이장님과 마을 주민도 뵙고 정담을 나누고 싶고, 하늘 아래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나뭇잎 풀잎들과 눈인사도 나누고, 시원한 계곡에 삶에 지쳐 가쁜 숨을 몰아쉬는 두 발도 그리고 마음도 담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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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면서기의 애환이 그려진 편안한 글 잘 읽었습니다. 리는 경사님의 모습과 백옥같이 흰 솜이불을 받고 손사레를 치시는 모습 눈에 아른 거립니다.십년후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것만같아요.
자전차를 타고
그때의 지붕개량과 지금의지붕없는 아파트 떠올리며 앞으로
두무리... 시간내어서 한번 찾아보고 싶은 맘 들어요..
울 경사님 ... 두무리회보에라도 게제 해보시면 좋을듯 해요.. 긴글 쓰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고마워요 풀잎님^^ 글의 모습처럼 그렇게 두무리는 제 마음속에 아로새겨 있답니다. 어느 한 좋은 주말을 택해 떠나보는 두무리 Tour! 멋진 여행이 될거예요. 거듭 감사해요.^^
초임 시절의 공직을 회상하며,
지금은 <산촌 생태체험마을>로 발전된 첫 담당마을에 대한 감회가 전반에 걸쳐 짙게 배어 나는 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이 글을 시작으로 공직 40년의 애환을 그리고 에피소드를, 궁극적으로는 지방행정의 역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심정으로 거작을 한편 남기심이 어떠하실지 이글을 읽으며 감히 생각해 봅니다.
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시는 일촌 사부님^^ 고맙습니다. 글을 쓰면서"기록"을 생각했는데 틈틈이 머릿속에 가슴 깊이 간직된 40년간의 수많았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사부님 거듭 감사 드립니다. 경사 올림^^*
초임발령지는 오래도록 고향처럼 가슴속에 있는 법- 일봉에게도 < "북분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소재로 단편소설을 구상해본 적도 있었는데..., 두무리의 기억을 단편으로 구상해 보면 좋은 작품이 될듯 싶구려.^^
네 회장님 잘 구상해 보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이제 글을 남기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하면서 소설을 읽는것 같은 느낌 정말 너무나 좋은 글이여요.. 이제 장편소설 책을 써도 될것 같은데요.. 경사님의 순수했던 모습이 막떠오르는거 같아요.. 혹시 이장님댁에 아가씨는 없었나요.. 그래야 소설이 이루어질거 같은데. ㅎㅎㅎ
답글 감사해요 세라님^^ 제가 스무살 때고 이장님은 서른 조금 넘었던 시절이라 아쉽게도 따님이 아기였었답니다. ㅎㅎ 아무래도 세라님 처럼 예쁜 가상의 주인공을 탄생시켜야 겠어요. ^^ 거듭 감사^^*
네,, 가상의 인물로 소설책 한권 만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