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만난 ‘고흐’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회색빛 하늘이다.
한달 전, 그날 남프랑스의 하늘도 그랬다. 가끔씩 보여주던 햇빛이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조그만 시골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온통 회색이었다. 오베르 성당을 지날 때에도, 밀밭으로 난 작은 오솔길에서도, 그의 마지막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처럼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영혼과 생명을 다 쏟아 버린 고흐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이곳에서 나는 까닭모를 연민을 느꼈고, 인간 고흐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잘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답답함 때문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곧 바로 고흐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사서 단숨에 읽었다. 37년이란 짧은 생애동안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늘 고독했던 고흐는, 그와 네 살 차이였던 동생 테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시련을 극복해 왔다. 자신의 병이 회복되려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끝까지 손을 놓지 못한 그였지만, 결국 무거운 삶의 굴레를 견뎌내지 못하고 쓸쓸히 죽음과 맞닥뜨렸던 고독한 천재화가. 어쩌면 그림에 대한 그의 무서운 광기가 오늘 우리로 하여금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속에 깊이 빠져들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올 가을 이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났더라면 그곳에서 만난 고흐를 좀 더 깊이 이해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우리는 길었던 지난 추석연휴를 겸하여 열흘 동안 프랑스 여행을 떠났고, 첫 여행지를 <니스>에서 보냈다. 친정 여동생과 맏딸 은비와 함께 떠난 오붓한 여행- 딸이 결혼을 하게 되면 이런 기회가 결코 없을 것 같아서 추석제사는 남편에게 맡기고 기분 좋게 여행을 계획할 수 있었다.
비행기 티켓에서부터 숙소 대중교통편 등을 딸이 꼼꼼히 예약해 두었기에 걱정은 덜 되었지만 열흘 동안의 자유여행이란 설렘이 <코트다쥐르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묘한 떨림으로 다가왔다. 남프랑스 여행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 서적도 여러 권 읽어보고 메모까지 해왔지만, 타국에서의 처음은 언제나 그렇듯 낯설기만 했다.
니스 해변 근처에 숙소를 마련한 우리는 현지인처럼 편안한 원피스 차림으로 남프랑스의 강렬한 뜨거움과 마주쳤다. 파란 하늘이 좋다. 그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그윽하다. 넘실거리는 하얀색 파라솔 지붕이 지중해의 멋을 한층 더 높여 주었다.
몽돌해변 위에서 상의를 훌러덩 벗은 채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노파의 거침없는 자연스러움에 웃음이 나왔다. 태양이 그리워 이곳에 왔노라고 영국인의 하소연을 듣는 듯 했다.
문득, 세련된 휴양의 도시 니스 해변에 내가 서 있다는 현실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득하게 동경만 해왔던 예술의 도시, 남불 니스에서의 첫날밤은 격해진 기쁨의 감정을 다독이느라 자는 둥 마는 둥 잠을 설치고 말았다.
‘ 내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니스에서 닷새를 머무는 동안 주변도시들을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다.
피카소 뮤지엄이 있는 <앙티브>- 아담하게 지어진 붉은 역사가 반가웠다. 그리말디성의 ‘피카소 미술관’은 지중해의 푸르름과 부드러운 햇살이 가득한, 마치 미지의 동화 속 그림나라처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기분 좋은 관람과는 달리 그날의 오찬은 최악이었다. 우리나라 육회에다 올리브유를 뿌려 놓은 것 같은 스테이크를 포크로 깨작거리다 결국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육회 스테이크, 생각만 해도 느끼하다.
이탈리아 국경에 접해 있는 작은 마을 <망통>은 레몬의 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축제를 막 끝낸 터라 시장 곳곳에는 레몬향으로 가득했다. 해변에 위치한 ‘장콕토 미술관’에 전시 되어있는 인물화와 똑같은 포즈를 요구했던 딸의 장난기로 우리 모두 깔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던 유쾌한 도시다.
열대 선인장으로 가득했던 <에즈> - 에즈 빌리지는 언덕에 형성된 새의 둥지를 닮은 예쁜 도시로 하늘과 맞닿은 요새마을이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들이 반가웠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왁자지껄한 모국어를 대하니 참으로 친근했고 덕분에 집 생각이 났다.
미국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사랑한 <모나코>- 바티칸 시국에 이어 두 번째로 영토가 작은 나라다. 모나코 빌에서 바라본 퐁비에유 항구에 정박해 놓은 요트가 코발트빛 바다에 옹기종기 누워 한가롭게 졸고 있다. 대공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을 볼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생폴 드 방스>- 갤러리와 아뜰리에가 골목골목으로 이어져 있는 소담스런 분위기는 나의 어설픈 손길에도 그림 같은 사진이 되어 감동을 주었다. 맨 아래쪽 <샤갈>이 잠들어 있는 소박한 무덤위에 그의 안부를 묻는 돌멩이들이 동그랗게 수놓아져 있었다. 소나무 숲속에 위치한 마그재단 미술관과 로자리오 예배당을 보기위해 바삐 걸으면서도 움직이는 사진을 찍느라 차로에서 폴짝 폴짝 뛰었던 그 순간은 지금도 아찔하다.
화려한 도시 <칸>- 칸영화제에서 배우들이 걸었던 레드 카펫을 밟으며 반바지 차림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내 모습이 쑥스러웠다. 하지만 꼬마기차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 구경하며 감동했던 소중한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였다.
이렇듯 여러 도시들의 소소한 거리풍경과 거장들의 살아있는 숨결 그리고 독특한 그들만의 맛을 내 기억 속에 가득 담아서 남프랑스와의 긴 이별을 뒤로하고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에 여장을 풀었다.
<파리>는 매력적인 곳이다. 도시를 빛내고 있는 에펠탑과 개선문을 중심으로 쭉쭉 뻗은 열두 개의 방사선대로가 시원스럽다. 샹젤리제 거리의 명품상점들은 화려한 조명으로 여행객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다. 세느강 주변의 선이 굵은 건축물들 또한 그 웅장함이 대단하다.
파리에서 사흘을 머물면서 몽마르트르언덕에 올라 시내전체를 배경으로 찍은 멋진 사진도, 노트르담성당 꼭대기에서 바라보이던 에펠탑의 거만한 자태도, 유유히 흐르고 있는 세느강의 푸른 물결도 내 눈에 원 없이 담고 또 담았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만난 쿠르베의 <오르낭의 무덤>은 웅장한 크기에 놀랐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밀레의 <만종> 앞에서는 그 숙연함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오랑주리 뮤지엄 여덟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네의 대작 <수련>은 과연 인간의 힘으로 완성했을까 싶을 정도로 작품의 크기와 신비로운 색채에 감탄했다. 물어 물어서 겨우 찾아간 세잔느의 <피아노 치는 소녀> 앞에서는 다시 그 옛날 소녀시절로 돌아가 순수한 마음의 눈으로 감상하려 애썼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는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70일 전에 머물렀던 곳이자 그가 영면해 있는 작은 도시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고흐에 대한 사전 지식이라고는 자기 귀를 잘라버린 성격 괴팍한 화가로만 치부하고 있던 나는, 영상물에서 본 너무도 가혹했던 그의 생애에 가슴이 아팠고 심장이 먹먹해져 왔다.
이토록 그림에 미치지 않았더라면 그도 누군가의 따뜻한 연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꽃과 별과 태양을 좋아했던 그는 무슨 연유로 그림, 그것을 위해 고귀한 생명까지 내던졌을까.
열흘간의 여행을 마치고 드골국제공항에 도착한 나는 서양미술사의 한 획을 긋고 시대를 풍미한 거장 ‘빈센트 반 고흐’의 쓸쓸했던 삶의 궤적과, 빛의 향연이 가득한 작품세계에 대해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마치 한낮의 뜨거운 폭염에 이글거리는 해바라기 그림처럼.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 한갓 이슬처럼 사라져간 빛의 화가 고흐, 그의 영혼의 울림이 조락하는 이 가을 내게 숙연한 떨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첫댓글 <구인문학 송년의 밤> 에서 발표 못 했던 글입니다.
여행기라서 좀 길어요...힘드시겠지만 읽어주신다면 감사 감사
와우~~ 정말 감동적이다.
글을 읽으면서 내가 설레이는데~~ 아름다운 성숙된 여행 작가님 정말 훌륭한 작품입니다..오늘도 그런회색빛 하늘이네..고마워 고흐에 대한 이야기 들려주어서,,,
아~~세라.
설레이면서 읽어줘서 고마워.
그대와 함께 떠나는 외국여행. 정말 재밌을것 같아. 어서 어서 그날이 오길~~
너무도 생생해 마치 내가 그곳에있는 줄 잠시착각했네요 담백하고 과장됨이 없는 그러나 현실적 표현, 한 작품으로도 충분히 감동이었습니다
지금쯤파티가 무르익었을 우리 월보님
월보님의 칭찬 댓글에 힘이 펄펄 나요.
담백한 칭찬 고맙습니다.
딸 집에서 핸드폰으로 읽었습니다. 요즘같이 국내외 여행이 많고 인터넷 등에 여행기가 난무하지만, 기행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고증과 지나친 설명에 치중한 기존 기행문의 틀에서 벗어나 간결한 스케치의 팔봉님의 글을 읽으며 기행문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는 새로운 교범을 보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행의 감상을 늘 글로 남기시는 초엽님이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휴대폰으로 읽어 주셨다니...작은 글씨에 얼마나 눈이 아팠을까....꾸벅
삼봉님의 댓글에서 처럼 저도 기행문의 그런 부분이 늘 고민이었어요. 나열식 기법에 똑 같은 표현들.
그래서 기행수필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마지막여행지에서 만난 고흐의 회색빛 인생이 눈에 아른거려서
이런식으로 도전해 보았어요...
와우...'새로운 교범' 칭찬 고맙습니다..
참 감동입니다.
여행작가 인정합니다.
글 자체가 아주 담백하고 깔끔하다는
느낌을 읽는 끝까지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봉님. 작은어머님 상중에도 이리 읽어 주시니.
마음 써주심에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깔끔하다고 과분한 칭찬까지 해주시니...감동이여요..
이봉님의 신작 시 도 여기에 올려주시길 당부드립니다.
그날 읽긴 읽었는데요.. 그놈의 술때문에 통 생각이 나질 않아요..
오혜사모님과 손주의 탄신일에 관한 시였던것 같기도 하고....아궁
일취월장하는 초엽님의 필력은, 가히 천의무봉의 경지에 이른듯...
문장이 수려하고 마치 물결따라 바람따라 유영하는 구름처럼 거칠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이젠 여행작가로 활동하셔도 좋을 듯 싶습니다.
또 하나의 명기행수필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쥐구멍 어디 없을까요.
부족함이 많은 글을 이리 극찬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어요.
숙제가 아니었으면 기억속에 머물렀을거에요.
늘 채찍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ㅋㅋ 박사님의 극찬에 몸 둘 바를 몰라하시는 초엽님이 귀엽습니다.(이크 죄송..)
한가지 팁을 드리면, 쥐구멍은 경심원에 더러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