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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천 강 문화센타 원문보기 글쓴이: 김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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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60권 / 잡저(雜著) 7
1. 정단(正壇) 32인
2. 별단(別壇) 236인
3. 배향할 여러 신하를 취사할 적의 수의(收議)에 대한 비답 수의(收議) 내용도 붙임
4. 단종(端宗) 때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의 배향에 대한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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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단(正壇) 32인
사판(祠版)에는 ‘충신지신(忠臣之神)’이라고 쓰고, 제사의 의식은 축문이 있으며 - 축문은 본릉의 한식절 수향(受香) 때 같이 싸 가지고 감 -, 제품(祭品)은 밥 한 주발, 소탕(素湯) 한 대접, 나물과 과일 각 한 소반, 술 한 잔이고, 제관은 부근의 찰방이나 수령으로 한다.
축문상례로 씀
내가 즉위한 몇년 세차 간지 모월 모일에 신(臣) 무슨 벼슬 아무개를 보내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장소공(章昭公) 이용(李瑢), 금성대군(錦城大君) 정민공(貞愍公) 이유(李瑜), 화의군(和義君) 충경공(忠景公) 이영(李瓔), 한남군(漢南君) 정도공(貞悼公) 이어(李𤥽), 영풍군(永豐君) 정렬공(貞烈公) 이천(李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양(李穰), 예조 판서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행 병조 판서 삼군도진무사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효전(鄭孝全), 증 의정부 영의정 영양위(寧陽尉)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 증 영돈녕부사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행 판돈녕부사 정민공(貞愍公) 송현수(宋玹壽), 돈녕부 판관 권완(權完), 의정부 영의정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 의정부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 이조 판서 충정공(忠貞公) 민신(閔伸),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 판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증 의정부 좌찬성 행 도총부 도총관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증 병조 판서 별운검 충강공(忠剛公) 박정(朴崝), 증 의정부 좌찬성 행 형조 판서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 증 이조 판서 행 승정원 우승지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증 이조 판서 행 형조 참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증 이조 판서 행 집현전 직제학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증 이조 판서 행 예조 참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증 이조 판서 행 성균관 사예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증 병조 판서 행 도총부 도총관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증 사헌부 지평 하박(河珀), 의정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 증 홍문관 부제학 행 집현전 부수찬 허조(許慥), 증 이조 참판 박계우(朴季愚), 증 이조 판서 행 순흥 부사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 증 공조 참판 영월군 호장 엄흥도(嚴興道)의 신위(神位)에 고하나이다.
예로는 함께 제향되어야 하고 / 禮䙡與享
의로는 묘정(廟庭)에 배향되어야 하니 / 義取配庭
서른 명 남짓한 사람이 / 餘三十人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나도다 / 炳烺日星
갈사가 먼 것을 꺼려서 / 嫌遠葛祠
가까이 있는 모옥으로 나아가니 / 就近茅屋
서로 돌아보며 흠향함이 / 相將顧歆
매년 한식 때일세 / 每年寒食
임금과 신하를 일체로 제향하여 / 一體君臣
위에는 각이고 아래는 단이니 / 上閣下壇
천추만세에 이르도록 / 萬歲千秋
길이 옥란을 보호하소서 / 長護玉欄
계유년(1453, 단종1), 병자년(1456, 세조2), 정축년(1457, 세조3)에 죽음으로 섬긴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趙遂良) 등 236명의 종사(從祀)하는 신위와 함께 흠향하소서.
안평대군(安平大君) 장소공(章昭公) 이용(李瑢)
세종의 셋째 아들로 자는 청지(淸之)이고, 자호는 낭간거사(琅玕居士)이며, 세종께서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당호를 내려 주셨다. 학문을 좋아하고 시에 뛰어났으며, 무엇보다도 서화에 솜씨가 있었다. 계유정난 때 용(瑢)이 딴 뜻이 있어서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김종서(金宗瑞) 등과 서로 왕래하였다는 이유로 강화도(江華雁)에 귀양 보내졌는데, 양사(兩司)가 용을 주범으로 논죄하여 법에 따라 다스릴 것을 청하여, 드디어 사사(賜死)되었다. 아들 의춘군(宜春君) 우직(友直)과 덕양정(德陽正) 우량(友諒)도 함께 연루되어 죽었다. 영종 정묘년(1747, 영조23)에 복관되고 기묘년(1759, 영조35)에 장소(章昭)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금성대군(錦城大君) 정민공(貞愍公) 이유(李瑜)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다. 을해년(1455, 세조1)에 빈청(賓廳)이 유(瑜)가 지난 일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몰래 무사(武士)와 결탁하고 사당(私黨)들에게 많은 자금을 뿌리고 있으므로 그 죄를 다스려야 된다고 의논드려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는데, 또다시 유의 죄는 무거운데 벌은 가볍다고 아뢰니, 세조가 전교하기를, “유는 본래 죄가 없고, 다만 자신의 보신책을 쓰느라 경미한 과실이 있었을 뿐이므로, 지금 유배를 보내어 반성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얼마 안 되어 광주(廣州)로 배소를 옮겨 주고서 매번 친서로 안부를 묻고 하사물을 연이어 보냈다. 병자년(1456, 세조2) 성삼문(成三問) 등이 죽자, 순흥(順興)에 안치시켰는데, 정축년(1457, 세조3) 6월 상왕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寧越)로 안치되자, 유가 순흥에 있으면서 군사를 모집한 다음 죽령(竹嶺) 초점(草站)을 넘어 계립령(雞立嶺)에서 상왕을 받들어 옮겨다 모시고 죽령 이남을 호령할 모의를 하고서,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에게 격문을 띄워 금정자(金頂子)와 산호영(珊瑚纓)을 뇌물로 주다가, 일이 발각되어 안동(安東)의 감옥으로 이송 수감되었는데, 어느 날 알몸으로 도망쳐 부중(府中)이 깜짝 놀라서 그를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바깥에서 갑자기 나타나 웃으면서, “내가 참으로 도망쳤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옷을 여미고 승상(繩床)에 기대었다. 이에 진무사(鎭撫使)가 말하기를, “전패(殿牌)에 절을 올려야 하오.” 하고 전패를 모실 자리를 설치하고 서쪽을 향하게 하자, 유가 “우리 임금님은 영월에 계신다.” 하고는 북쪽으로 향하여 슬피 운 다음, 네 번 절하고 드디어 죽었다. 영종 무오년(1738, 영조14)에 복관(復官)되고 정사년(1737, 영조13)에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임술년(1742, 영조18)에 경상도 관찰사 심성희(沈聖希)가 순흥(順興)에 성인단(成仁壇)을 쌓고 제사 지냈다. 또 영천(永川) 송곡서원(松谷書院)과 청안(淸安) 죽계서원(竹溪書院)에도 배향되었다.
화의군(和義君) 충경공(忠景公) 이영(李瓔)
세종의 첫째 왕자(王子)이다. 어머니는 영빈(令嬪) 강씨(姜氏)이며, 자는 양지(良之)이다. 을해년(1455, 세조1)에 빈청이 아뢰기를, “영이 최영손(崔永孫), 김옥겸(金玉謙) 등과 유(瑜)의 집에 모여 잔치를 벌이고 활쏘기를 하고 나서 이를 숨겼다.”고 하므로, 유는 고신(告身)을 회수하고 영은 청산(靑山)에 부처(付處)하였다가 이윽고 연안(延安)으로 옮겼는데, 상왕이 왕위를 내놓자 영이 늘 혼자 있으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병자년(1456, 세조2)에 금산(錦山)으로 안치되어 죽었다. 중종 때 복관되고 영종 갑인년(1734, 영조10)에 충경(忠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죽계서원(竹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이덕수(李德壽)가 지은 시장(諡狀)을 상고하여 본바, 육신의 사건이 발각되고 나서 상이 성삼문 등을 법으로 다스려야 옳지 않은가 하고 묻는 말에 공이 대답하지 않았고, 정인지(鄭麟趾) 등이 또 상왕이 모의를 알고 있었다고 하니, 소를 올려 극력 따지므로, 익산(益山)에 금고되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록(實錄)에는, 을해년(1455, 세조1)에 부처(付處) 되고부터 풀려 돌아온 적이 없고, 육신의 옥사가 일어나자 영(瓔), 유(瑜), 어(𤥽), 천(瑔), 정종(鄭悰)이 유배된 고을에 파발을 띄워 타일러서 놀라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고 보면, 상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거나 소를 올려 극력 따진다는 것은 절로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금산을 또 익산으로 잘못 기록한 것도 다 시장을 쓸 적에 제대로 상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남군(漢南君) 정도공(貞悼公) 이어(李𤥽), 영풍군(永豐君) 정렬공(貞烈公) 이천(李瑔)
어는 세종의 넷째 왕자이고, 천은 여덟째 왕자인데, 모두 양빈(楊嬪)의 소생이며, 천은 또 박팽년의 사위이다. 양빈이 늘 단종에게 젖을 먹였던바, 의정부가 빈의 신분으로서 궁중의 일을 마음대로 하였다 하여 바깥으로 내쫓았는데, 을해년(1455, 세조1)에 빈청에서 양빈이 아들 어와 천 및 금성대군 이유 등과 반란을 모의하였다고 의죄(議罪)하여, 양빈은 청풍(淸風)으로, 어는 금산(錦山)으로, 천은 예안(禮安)으로 유배하였다. 얼마 안 되어 어는 아산(牙山)으로, 천은 안성(安城)으로 유배지를 옮겼으며, 또다시 어는 양지(陽智)로, 천은 수원(水原)으로 옮겼다가, 병자년(1456, 세조2)에 어는 함양(咸陽)에, 천은 임실(任實)에 안치시켰는데, 금성대군이 패한 뒤 양빈 및 어와 천도 그 사건으로 죽었다. 중종 때 모두 복위되고 숙종 때 예장(禮葬)을 명하였으며, 영종 임술년(1742, 영조18)에 어에게는 정도(貞悼)라는 시호를, 천에게는 정렬(貞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내가 경술년(1790, 정조14)에 영풍군의 묘가 고양(高陽)에 있기는 하나 그 위치를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그 근처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신해년에 한남군의 후손에게 명하여 양빈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는 동시에 특별히 민정(愍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양(李穰)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이다. 김종서(金宗瑞)가 죽자, 김종서가 이양ㆍ황보인(皇甫仁)ㆍ민신(閔伸)ㆍ조극관(趙克寬)ㆍ윤처공(尹處恭)ㆍ이명민(李命敏)ㆍ원구(元矩)ㆍ조번(趙藩) 등과 함께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趙遂良), 충청도 관찰사 안완경(安完慶)과 결탁하여 종묘사직을 위해할 음모를 꾸몄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황보인ㆍ조극관과 함께 같은 날에 죽고, 아들 승윤(承胤)과 조카 승로(承老) 등도 연좌되었다.
예조 판서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아우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경혜공(景惠公) 이전(李專)의 아들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병자년(1456, 세조2) 옥사 때 박팽년(朴彭年) 등을 국문하면서 역당(逆黨)에 가담한 사람들을 묻자, 권자신ㆍ김문기(金文起), 박정(朴崝), 송석동(宋石仝)이라고 대답하고, 또 권자신이 일찍이 팽년 등과 모의하고서 그의 어머니 화산부인 최씨(崔氏)에게 고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이에 그의 어머니와 함께 죽고 아버지 전도 관작을 추탈당하여 서인이 되었으며, 아들 구지(仇之) 역시 연좌되었다. 숙종 기묘년(1699, 숙종25)에 전과 자신은 함께 복관되고 영종 기축년(1769, 영조45)에 자신에게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내가 유사에게 명하여 그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모든 사람들을 제단을 설치하여 배향할 것을 의논하도록 한바, 성 충문(成忠文 성삼문(成三問)), 박 충정(朴忠正 박팽년(朴彭年)), 허 정간(許貞簡) 부자(정간은 허후(許詡)의 시호. 아들은 허조(許慥)임)는 모두 배향하였으나, 화산부인은 부인을 함께 배향하는 예법은 보지 못하여서 참여시키지 않은 것이다.
행 병조판서 삼군도진무사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효전(鄭孝全)
오천부원군(烏川府院君) 정진(鄭鎭)의 아들인데, 태종의 넷째 딸 숙정옹주(淑貞翁主)에게 장가들어 일성위(日城尉)에 봉해졌다. 갑술년(1454, 단종2)에 의금부가 아뢰기를, “효전이 도진무(都鎭撫)로서 집이 시좌소(時座所)의 위내(衛內)에 있었는데도 정난(靖難 계유정난)을 하던 날 궁궐에 시위하러 나오지 않았고 이튿날에도 병을 핑계로 집에 있었습니다. 효전은 이미 죽었으니, 부관참시하고 가산을 몰수하며, 자녀들을 연좌시키소서.” 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연일 정씨(延日鄭氏)의 족보를 상고하면, 효전이 홍치(弘治 명 나라 효종의 연호) 경술(1490, 성종21)에 죽었는데, 원석(元碩)과 극창(克昌) 두 아들을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단종실록》에 의거하면, 효전의 죽음이 벌써 경태(景泰 명 나라 경제의 연호) 갑술년(1454, 단종2)에 있었는데, 아들 원석도 연좌되어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태 갑술년에서 홍치 경술년까지는 37년의 차이가 나니, 족보의 오류가 너무 심하다 하겠다. 또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에는 효전의 두 아들은 원창(元昌)과 극창(克昌)으로, 원석은 없고 원창만 있다. 이것이 비록 의심스럽기는 하나 족보의 원석이 실록과 합치되니, 《선원계보기략》의 원창은 틀린 이름인 듯하여 이제 실록에 따라 원석으로 수사(收司)에 열록한다.
증 의정부 영의정 영양위(寧陽尉)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참판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이며, 문종의 맏딸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었다. 단종이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종(悰)에게 크게 의지하고 그의 집에 거둥하여 거처하기도 하였다. 을해년(1455, 세조1)에 빈청(賓廳)이 그가 몰래 양빈(楊嬪)을 섬기고 또 유(瑜)와 결탁하였다고 논죄(論罪)하여 영월로 귀양 보냈다. 공주가 병이 나서 상왕이 상에게 고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상왕께서 사자를 보내어 ‘영양위의 공주가 병이 났다’고 하시니, 이는 아마 종을 돌려보내라는 뜻인 듯하다. 내가 듣고 보니 황공하구나. 의금부는 놓아 보내라.” 하였다. 종은 병자년(1456, 세조2)에 광주(光州)에 안치되었다가 신사년(1461, 세조7)에 승려들과 결탁한 혐의를 받고 끝내 죽고 말았다. 공주는 종을 따라 귀양을 가서 몸소 극도의 고생을 겪었지만 조금의 원망도 하지 않았는데, 종이 죽자 곧바로 불려 왔다. 아들 미수(眉壽)는 당시 7세의 나이로 공주를 따라 대내(大內)로 들어왔는데, 광묘(光廟 세조)께서 측은히 여기시어 “문종의 외손이 너 한 사람뿐이라는 말인가.” 하고 불러서 무릎에 앉히고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리시더니, 이어 미수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성종의 잠저에 모시라고 명하였다. 예종 원년에 하유하기를, “지난날 내가 광묘를 모셨을 적에 광묘께서 하교하시기를, ‘경혜공주의 아들은 난신의 아들로 논죄하면 안 된다’ 하기에, 내가 곧장 그 하교를 받아 썼다. 미수를 서용(敍用)하라.” 하여, 미수가 우찬성의 벼슬을 지냈다. 영종 기묘년(1759, 영조35) 종에게 영의정이 추증되고 헌민(獻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윤근수(尹根壽)의 《월정만록(月汀漫錄)》을 상고해 보면, 종이 죽고 나서 공주가 순천(順天) 고을의 노비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세조실록》에 의거하면, 기묘년(1459, 세조5)에 광주(光州)에 안치된 정종과 그의 아내에게 의복을 내려 주었을 뿐, 그 뒤 순천으로 유배한 사실은 없다. 실록의 초본(抄本)에만 경진, 임오, 을유, 병술 4년이 빠져 있으니, 이는 아마 참고될 만한 사실이 없어서 생략한 것이겠고, 《월정만록》은 당연히 오류이다. 그러나 지금 신사년(1461, 세조7)에 소환한 것으로 적으면서 특별히 영양위(寧陽尉)의 묘지문을 증거로 삼았으니, 당시에 이미 영양위가 죽었다는 사실 역시 믿을 만하다. 또 《해평가전(海平家傳)》에는 공주가 유배지에서 아들을 낳은 것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대내로 데려다 친히 길렀는데, 예닐곱 살이 되어 궁정에서 장난을 치며 노는 것을 보고 세조가 누구의 아이냐고 묻자 정희왕후가 곧장 전각에서 내려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실록을 상고한 바, 종이 을해년(1455, 세조1)에 유배지로 갔다가 곧바로 풀려나서 병자년에 비로소 광주에 안치되었고, 처첩과 자녀들이 같이 따라가 살기를 자원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공주가 유배지로 따라간 시기는 당연히 병자년일 것이고 병자년에서 신사년까지는 겨우 5년 동안인데, 설령 병자년에 곧바로 아들을 두었다 하더라도 예닐곱 살이 되도록 자랐다면 공주가 소환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까지 대내에 머물러 있지도 못하거니와, 또 과연 유배지에서 낳은 아이를 데려올 리도 없으니, 이 말은 매우 믿을 수 없다. 예종이 일찍이 “종의 아들과 그의 아내를 들여 뵙도록 하니, 세조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나머지 눈물을 훔치며, 나로 하여금 전교를 써 내려서 연좌를 윤허하지 말도록 하셨다. 내가 지금 어찌 감히 법으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한 전교가 국사에 실려 있는데, 하신 말씀이 정녕하고, 영양위의 유사(遺事)에 미수(眉壽)가 공주를 따라 대내로 들어갔다고 한 기록이 실록과 합치되므로 지금 영양위의 유사를 따라 쓴다.
증 영돈녕부사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행 판돈녕부사 정민공(貞愍公) 송현수(宋玹壽),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권완(權完)
송현수는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아버지이고, 권완은 정순왕후의 잉첩의 아버지이다. 현수는 언젠가 윤대(輪對)에서 광묘(光廟)가, “경은 마땅히 날마다 상왕께 문안을 드리고 성심껏 보좌하여야 되오.”라고 전교를 내린 적이 있는데, 정축년(1457, 세조3) 6월에 김정수(金正水)라는 남자가 현수와 완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여, 완은 능지처참되고 현수도 죽었다. 기묘년(1699, 숙종25)에 영돈녕부사 여량부원군의 벼슬이 추증되고, 내가 신해년(1791, 정조15)에 정민(貞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의정부 영의정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
자(字)는 사겸(四謙) 또는 춘경(春卿)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임(琳)의 아들이다. 태종 갑오년(1414, 태종14)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임신년(1452, 문종2)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정분(鄭苯)과 같이 고명(顧命)을 받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고 나서 황보인도 아들 석(錫)ㆍ흠(欽)과 함께 죽었다. 영종 병인년(1746, 영조22)에 복관되고, 무인년(1758, 영조34)에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영천(永川) 임고서원(臨皐書院)과 종성(鍾城) 행영사(行營祠)에 배향되었다.
의정부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자는 국정(國禎)이고, 호는 절재(節齋)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태종 을유년(1405, 태종5)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일찍이 함길도 도절제사로 나가서 육진(六鎭)을 개척하였다. 지략이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대호(大虎)’로 지목하더니, 계유정난 때 맨 먼저 죽음을 당하였다. 아들 승벽(承璧) 등도 연좌되었다. 영종 병인년(1746, 영조22)에 복관되고, 무인년(1758, 영조34)에 충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내가 병오년(1786, 정조10)에 어떤 사람이 백악(白嶽)에서 김종서의 신주를 얻었는데 그 집에 명하여 조천(祧遷)하지 말고 대대로 제사를 받들라고 하였다. 행영사(行營祠)에 배향되었다.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
자는 자유(子㽕)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찬성 이오(以吾)의 아들이다. 태종 병신년(1416, 태종1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계유정난 때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조상의 신주를 모시더니, 어느 날은 종자(從者)를 보고, “정갈한 밥을 한 상 차려라. 내가 제사를 지내련다.” 하여 제사를 지내고서는 신주를 불살랐는데, 그러고 나자 사자(使者)가 도착하여 죽었다. 아들 원(遠)은 거짓으로 미쳐서 스스로 호를 광노(狂奴)라 하고 이어 광로(光露)로 이름을 바꾸어 도망쳐 버렸다. 영종 병인년(1746, 영조22)에 복관되고 무인년(1758, 영조34)에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임고서원(臨皐書院)과 장흥(長興)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이조 판서 충정공(忠貞公) 민신(閔伸)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문종 말년에 병조 판서가 되었고, 계유년(1453, 단종1)에 현릉(顯陵)의 비석을 감독하던 중, 세조가 정난(靖難)을 감행하여 김종서를 베고 삼군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를 보내어 신을 죽이니, 아들 보창(甫昌) 등도 연좌되었다. 내가 신축년(1781, 정조5)에 복관을 명하고 이듬해인 임인년에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정평공(靖平公) 계생(啓生)의 아들이다. 태종 갑오년(1414, 태종14)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계유정난 때 이양(李穰), 황보인(皇甫仁)과 같은 날에 죽었는데, 아우 수량(遂良)과 종제(從弟) 번(藩)도 연좌되었다. 영종 정축년(1757, 영조33)에 복관되었다.
이조 판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세종 병오년(1426, 세종8)에 생원이 되고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삼문(成三問)ㆍ권자신(權自愼) 등과 함께 죽었는데, 아들 현석(玄錫)도 연좌되었다. 숙종조에 복관을 명하였고, 내가 무술년(1778, 정조2)에 충의라는 시호를 내렸다. 강령(康翎)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증(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행 도총부 도총관(行都摠府都摠管)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증(贈) 병조 판서(兵曹判書) 별운검(別雲劍) 충강공(忠剛公) 박정(朴崝)
승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석용(石瑢)의 손자이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달생(達生)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랐는데,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을 때 승이 도총관으로서 도총부에 당직을 서고 있던 중, 종을 승정원에 보내어 성삼문(成三問)에게 자꾸 물어보니, 삼문이 대답은 하지 않고 일어나 뒷간으로 가서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만 크게 내쉬었다. 그 종이 돌아와서 승에게 이 말을 아뢰자, 승도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가서는 곧장 병가를 내고 방 안에 드러누워 집안 식구들도 만나 주지 않으며, 오직 삼문이 찾아올 때만 사람을 물리치고 이야기를 나누곤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삼문 등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숙종 임신년(1692, 숙종18)에 복관되고, 아들 삼빙(三聘)ㆍ삼고(三顧)ㆍ삼성(三省)도 연좌되어 죽었다. 녹운서원(綠雲書院)의 별사(別祠)에 배향되었다.
정은 무과에 올랐는데, 병자년(1456, 세조2) 박팽년을 국문할 적에 무엇을 하려 하였는가 하는 심문에, 팽년이 답하기를, “성승ㆍ유응부ㆍ박정과 별운검(別雲劍)이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하였습니다.” 하여, 그만 능지처참을 당하였으며, 정의 아들 숭문(崇文) 등도 연좌되었다. 내가 갑진년(1784, 정조8)에 승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하고 신해년(1791, 정조15)에 충숙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정에게는 병조 판서를 추증하고 충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증 의정부 좌찬성 행 형조 판서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
호는 한석당(閒碩堂)이고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목사(牧使) 안생(安生)의 아들이다. 태종 정유년(1417, 태종17)에 생원이 되어 세종 계묘년(1423, 세종5)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미년(1427, 세종9)에 중시에 합격하였다. 단종 계유년(1453, 단종1)에 상이 황보인, 김종서, 정분을 불러 대사헌을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군인가를 묻자, 황보인 등이 대답하기를, “의당 생각이 깊고 요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박중림이 제격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고 드디어 대사헌을 삼았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아들 팽년(彭年)과 함께 죽었는데, 아들 수찬 기년(耆年), 교리 인년(引年), 박사 대년(大年), 정랑 영년(永年)도 연좌되어 죽었다. 처형되기 직전에 여러 아들들이 울며, “임금에게 충성을 하려다가 효도를 저버렸습니다.” 하니, 중림이 웃으며,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스럽지 않은 것이 불효이니라.” 하였다.
중림은 어릴 적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워서 어머니의 질병에 손가락의 피를 내어 드리고 하늘에 빌었으며, 자라서는 경전(經典)에 정통하여 성삼문ㆍ하위지 등이 다 그의 문인이다. 세조가 언젠가 전교하기를, “문종이 세자가 되었을 적에 서연관 최만리(崔萬里)ㆍ박중림이 옆에서 보필하면서 한 가지의 과실만 있어도 그때마다 간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그 두 신하는 제 직분을 다하였다 할 만하다.” 하였다. 영종 기미년(1739, 영조15)에 복관되고, 내가 갑진년(1784, 정조8)에 좌찬성에 추증하였으며, 무신년(1788, 정조12)에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증 이조 판서 행 승정원 우승지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도총관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자는 근보(謹甫)이고,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태어날 적에 공중에서 어떤 묻는 소리가 세 번 들렸기 때문에 삼문이라 이름 지었다. 을묘년(1435, 세종17)에 생원이 되어 무오년(1438, 세종20)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 세종29)에는 중시에 장원을 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박팽년ㆍ신숙주와 함께 양조(兩朝 세종과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았다. 계유년(1453, 단종1)에 김종서 등을 주살(誅殺)하고 나서 집현전(集賢殿)의 관원에게 정난 공신(靖難功臣)의 호를 내리는데, 모든 공신들이 다 연회에 참석하였으나 삼문만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때 단종이 갓 즉위하였는데, 삼문이 우사간으로서 아뢰기를, “예전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諸侯)들에게 조회를 받은 것은 천하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자는 저의였습니다. 주상께서 어리신 나이로 궁중에 깊이 거처하시어, 군신들이 접견하지 못하고 있으니 인심이 안정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매월 1일과 16일에 흰옷을 입고 근정문에 납시어 군신의 조참(朝參)을 받으심으로써 군신들로 하여금 우러러볼 수 있도록 하소서.” 하였다.
을해년(1455, 단종3) 선위(禪位)할 때 삼문이 승지로서 옥새를 전하게 되자 목 놓아 울었다. 이날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투신하려는 것을 삼문이 만류하였는데, 마침내 상왕의 복위를 함께 모의하게 되었다. 급기야 일이 발각되어 광묘(光廟 세조)가 전교하기를, “너희들이 나의 녹을 먹고 있으면서 나를 배반한다면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자, 삼문이 대답하기를, “실로 나리의 녹은 먹지 않았습니다. 상왕이 계시는데 나리께서 어떻게 우리들을 신하로 삼으려 하십니까.” 하였다. 가산을 몰수하고 보니 을해년 이후의 녹봉은 어느 한 방에 따로 저장하여 두고서 ‘모년 모월의 녹봉’이라고 써 놓았다. 처형되기 직전에 좌우를 돌아보며, “너희들은 훌륭하신 임금님 잘 보좌하여 태평 세대를 이루어라. 삼문은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님을 뵈오리라.” 하였다. 아들 맹첨(孟詹) 등도 함께 죽었다.
전에 문종이 오랫동안 동궁에 있으면서 달 밝은 밤 인적이 고요할 때마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집현전의 숙직소로 걸어와서 집현전 학사들과 문난(問難)을 하므로, 이때 삼문 등이 밤에도 감히 관디[冠帶]를 벗지 못하기가 일쑤였다. 하루는 밤이 이미 깊어서야 옷을 벗고 누우려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신발 소리가 터벅터벅 나면서 ‘근보(謹甫 성삼문)’ 하고 부르자 삼문이 놀라 일어나 절하고 맞아들였으니, 그 은우(恩遇)가 이와 같았다.
숙종 기미년(1679, 숙종5)에 노량(露梁)에서 열무(閱武)를 하고 나서 육신묘를 증축하도록 명하고 얼마 후에 ‘민절사(愍節祠)’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을축년(1685, 숙종11)에 강원도 관찰사 홍만종(洪萬鍾)이 장릉(莊陵) 옆에 사당을 세워 육신을 배향하였는데, 뒤에 ‘창절사(彰節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신미년(1691, 숙종17)에 다시 육신의 관직을 복원하고, 전교하기를, “저 육신이야말로 어찌 천명과 인심을 거역할 수 없음을 몰랐으랴. 그러나 진심으로 섬기던 임금이었기에 죽어도 후회가 없었던 것이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서는 덮어 두어야 하는 그 의리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내가 포장하려는 것은 그의 절의 때문만이 아니라,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 하신 전교의 성의(聖意)가 여기에 담겨 있는 만큼, 이번의 일은 세조의 유의(遺意)를 이어받아 세조의 성덕(盛德)을 빛내자는 것이다.” 하였다.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홍주(洪州) 녹운서원(綠雲書院),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창녕(昌寧) 물계서원(勿溪書院)과 의성(義城) 충렬사(忠烈祠), 노량(露梁) 민절사(愍節祠),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증 이조 판서 행 형조 참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판서 중림(仲林)의 아들이며, 자는 인수(仁叟)이다. 임자년(1432, 세종14)에 생원이 되고, 갑인년(1434, 세종1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정묘년(1447, 세종29)에는 중시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문종이 언젠가 몸이 편찮아서 밤에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들여 어린 세자를 부탁하고 이어 어탑 밑으로 내려와 앉아 친히 술을 따라 권하자, 팽년 및 성삼문ㆍ신숙주가 모두 술에 취하여 쓰러졌는데, 내관에게 명하여 문짝을 떼어 내고 교자에 태워 숙직청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여러 사람이 아침에 깨어 보니 색다른 향내가 방 안 가득히 풍기며 몸이 초금(貂衾)에 누워 있었으니, 바로 주상이 손수 덮어 준 것이었다. 그래서 서로 쳐다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단종이 언젠가 칭찬하기를, “팽년은 학문을 정밀히 연구하여 경연에서 진강(進講)을 할 적마다 이치를 밝히는 것이 많으니 당상관이 될 수 있도다.” 하더니, 얼마 안 되어 부제학으로 발탁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이숭지(李崇之)가 비파를 진상하는 것을 팽년이 물리칠 것을 청하자 상이 그 말을 좋게 받아들였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삼문 등과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수감되었을 적에,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여 몰래 타이르기를, “네가 나를 섬기면 마땅히 너를 사면하리라.” 하니, 팽년이 웃으며 대답도 않고, 상을 부를 적이면 그때마다 ‘나리(進賜)’라고 하여, 상이 “그대가 일찍이 나에게 신하라고 하고서 감히 그럴 수 있는가.” 하자, 답하기를, “내가 어떻게 나리의 신하라는 말이오. 저번에 관찰사로 있을 적의 장독(狀牘)에도 신(臣)이라 일컬은 적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장독을 비교하여 보니 모두 ‘거(巨)’ 자였다. 옥중에서 죽자 광묘가 일컫기를, “팽년 등은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 하였다. 아들 생원 헌(憲)ㆍ순(珣)ㆍ분(奮) 등도 함께 죽었다. 순의 아내 이씨(李氏)는 막 임신을 하였는데, 아들을 낳을 경우 연좌되게 되어 있었다. 여종 역시 임신을 하였는데, 여종이 이씨에게 말하기를,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으나, 아들이라면 쇤네가 낳은 아기로 죽음을 대신하겠습니다.” 하였다. 출산을 하니 과연 아들이어서 여종이 맞바꿔 기르며,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는데, 성장한 뒤 자수하자 성종이 특별히 용서하고 일산(壹珊)으로 이름을 고쳤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었으며,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을미년(1775, 영조51)에 정려(旌閭)되었으며, 회덕(懷德) 정절서원(靖節書院), 연산(連山) 충곡서원(忠谷書院), 녹운서원(綠雲書院), 낙빈서원(洛濱書院)과 노량 민절사, 영월 창절사,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증 이조 판서 행 집현전 직제학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이고, 호는 백옥(白玉)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고려 시중(侍中) 이색(李穡)의 증손자이다. 세종 병진년(1436, 세종18)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 세종29)에 중시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삼문 등과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는데, 처형되기에 앞서, “우임금의 솥이 무게 있을 때에야 삶이 역시 의미가 크지만, 생명이 기러기 털보다 가벼운 곳에서는 죽음이 오히려 영광이로다.[禹鼎重時生亦大 鴻毛輕處死猶榮]”라는 시를 남겼다. 아들 공회(公澮)도 연좌되었다. 광묘가 수양대군으로 사저에 있을 적에 개의 숙부 계전(季甸)이 드나들며 비밀 모의를 하므로 개가 경계한 적도 있었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고,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간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한산(韓山) 문헌서원(文獻書院), 녹운서원, 낙빈서원과 민절사, 창절사,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증 이조 판서 행 예조 참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자는 중장(仲章)이고, 호는 단계(丹溪)이며, 본관은 진주(晉州)로, 지군사(知郡事) 하담(河澹)의 아들이다. 세종 을묘년(1435, 세종17)에 생원이 되고 무오년(1438, 세종20)에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일찍이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세조가 총재관(摠裁官)으로 있을 적에 여러 유신(儒臣)의 관질을 올려 줄 것을 청하여, 위지가 당시 집의로 있으면서 중직대부에 승급되었으나 혼자만 끝까지 극력 사양하였다. 그러고 나서 질병을 핑계로 조복(朝服)을 모두 팔아 버리고 선산(善山)으로 돌아갔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자, 위지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개혁을 한 초기에는 마땅히 널리 꾀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혹시라도 너무 느슨히 하여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혹시라도 너무 관대히 하여 기강을 해이하게 하지 마시며, 혹시라도 군주의 위세가 신하를 제약하여 언로가 막히게 하지 마소서. 다시금 이상견빙(履霜堅氷)의 경계와 포상(苞桑)의 경계를 생각하시어 공실(公室)을 보다 더 공고히 하고 내치(內治)를 보다 더 엄격히 하며, 권문(權門)의 농간을 보다 더 철저히 막고 붕당의 흐름을 보다 더 확실히 끊으시어 항간이나 초야에서 몰래 불순한 논의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신은 강호(江湖)에서 질병을 안고서 멀리 대궐을 바라보며, 밤낮으로 오열하고 눈물 흘리며 천지와 귀신에게 부르짖고 말없이 빌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오늘날 보필을 맡은 사람들이 보필의 도리를 다하여 성체(聖體)가 날로 더 강녕하시어 하루빨리 모든 정무를 친히 살피심으로써 해동 백만억 적자(赤子)들의 우러름과 기대에 부응하시고, 안으로 궁내에서부터 밖으로 사경(四境)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평하여 조금의 동요도 없으며, 태조ㆍ태종ㆍ세종ㆍ문종께서 물려주신 왕통이 영원히 반석 위에 올려놓아질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전하께서도 마땅히 귀와 눈을 활짝 여시고 정직한 의논을 잘 받아들이시어 지사(志士)의 기량을 크게 넓혀 주고 미맹(未萌)의 사욕을 엄격히 막아 버리시며, 일심을 밝히시어 간교한 행위를 살피고 일심을 바로잡으시어 삿된 생각을 막으소서. 강경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여 어려운 운세를 잘 이겨 내어 문종 황고(文宗皇考)의 희망에 뒷받침하셔야 하지, ‘나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하고 한갓 겸양만 내세우셔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광묘가 상에게 아뢰어 좌사간으로 불러들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을해년(1455, 세조1)에는 예조 참의를 제배하였으나 받은 녹봉을 먹지 않고 모두 다른 곳간에 쌓아 두었다. 병자년(1456, 세조2)에 거사가 발각되자 광묘가 그의 재주를 아껴서 비밀리에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고 스스로 변명만 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자, 위지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남들이 반역으로 지목한 이상 그 죄는 응당 죽어야 하오. 무엇 하러 물어보는 거요.” 하였는데, 성삼문과 함께 같은 날에 죽었다. 형 학유(學諭) 기지(紀地)와 생원 소지(紹地), 아들 호(琥)와 박(珀)도 함께 죽었다.
이에 앞서 위지가 무슨 사안을 말하다가 세조의 비위를 거슬렀는데, 광묘가 국문할 것을 명하였다가 이윽고 하교하기를, “이 사람은 정직하기로 이름이 나 있어서 내가 나의 과실을 들어 보려는 것이었으니 놓아주라.” 하고는 이어 타이르기를, “오늘의 일로 해서 나의 과실을 말하지 않지는 말라.” 하였다. 천순황제(天順皇帝)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위지가 감개하여 말하기를, “천자의 몽진(蒙塵)은 천하가 다 같이 분개할 일이다. 우리들이 비록 해외의 배신(陪臣)이기는 하지만 어찌 근심을 같이 나누지 않고 태연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늘 외랑(外廊)에 거처하며 침실에 들지 않았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고 을유년(1705, 숙종31)에 위지의 조카 원(源)의 자손으로 위지의 후계를 세우도록 명하였고,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를 추증하면서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내가 정유년(1777, 정조1)에 정려(旌閭)하였다. 선산(善山) 월암서원(月巖書院), 녹운서원, 낙빈서원, 그리고 민절사, 창절사, 충렬사 등에 배향되었다.
상고하건대, 위지가 외랑에 거처하며 침실에 들지 않은 사실은 《무인기문(戊寅記聞)》에 보이는데, 그의 충의의 근성은 평소에 온축된 것으로써 하도 우뚝하여 공경을 자아낼 만하기에 여기에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무인기문》은 기준(奇遵)이 지은 것이고, 홍인우(洪仁佑)의 《치재일기(恥齋日記)》에는 이것이 박팽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홍인우는 기대항(奇大恒)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대항은 곧 준의 아들인데, 부자간에 들은 말이 서로 다를 수는 없을 것이고 보면 인우의 기록이 오류인 듯하다.
증 이조 판서 행 성균관 사예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자는 태초(太初)이고,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세종 갑자년(1444, 세종26)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 세종29)에 중시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김종서 등이 주살되고 나서 성원이 집현전에 숙직하면서 교지를 기초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숙부께서는 주공(周公)과 같은 훌륭한 재주를 지닌 데다 주공과 같은 큰 공로까지 겸하였고, 과궁(寡躬 단종 자신을 가리킴)은 성왕(成王)과 같이 어린 나이에다 또 성왕과 같이 어려운 때를 만났다. 과궁은 성왕이 주공에게 지우던 책무로 숙부에게 책무를 지우고자 하니 숙부 역시 주공이 성왕을 보필하던 도리로 과궁을 보필하여 주오.” 병자년(1456, 세조2)에 사예로서 성균관에 당직을 서고 있던 중 제생이 성삼문의 사건을 알려 주자, 곧장 말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내를 시켜 술을 따르게 하여 마시고 조복을 갈아입은 다음 가묘(家廟)로 들어갔는데, 오래되어도 나오지 않아서 아내가 사당으로 가 보니 벌써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한 뒤였다. 아들 귀련(貴連)과 송련(松連)도 함께 연루되어 죽었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고,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녹운서원과 낙빈서원, 민절사, 창절사, 충렬사 등에 배향되었다.
증 병조 판서 행 도총부 도총관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자는 선장(善長)이고, 본관은 천녕(川寧)이며, 무과에 급제하였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승(成勝)ㆍ박정(朴崝)과 별운검이 되었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 응부는 성격이 강직하고 과격하여 처음에 모사를 결정하고 나서 곧장 여러 사람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권남(權擥)과 한명회(韓明澮)를 죽이는 데는 이 주먹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어디에다 대검을 쓰겠는가.” 하였다. 아들 사수(思守)도 연좌되었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고,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병조 판서에 추증되면서 충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녹운서원과 낙빈서원, 민절사, 창절사, 충렬사 등에 배향되었다.
증(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하박(河珀)
위지의 아들이다. 수감될 적에 아직 어린 나이였는데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의금부 도사를 돌아보며, “잠깐만 짬을 주어라. 어머니와 작별하고 오련다.” 하여 도사가 허락하여 주었는데, 박이 문 안으로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여쭈기를, “아버지께서 이미 죽음을 당하셨으니 아들이 혼자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만, 곧 시집을 가게 될 누님이 염려됩니다. 비록 관비(官婢)로 들어가더라도 부인의 의리란 오직 한 사람을 좇아 생을 마쳐야 합니다.” 하고는 두 번 절하고 물러 나와 조용히 죽으니, 사람들이 위지는 아들다운 아들을 두었다고 하였다. 내가 신해년(1791, 정조15)에 특별히 사헌부 지평을 추증하였다.
의정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 증 홍문관 부제학 행 집현전 부수찬 허조(許慥)
후는 본관은 하양(河陽)이며, 좌의정 허조(許稠)의 아들이다. 세종 병오년(1426, 세종8)에 문과에 급제하고, 병진년(1436, 세종18)에 중시에 합격하였다. 문종이 승하할 적에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고명(顧命)을 받들었다. 계유정난 때 정난 공신을 녹훈하면서 광묘가 영의정이 되어 뭇 신하들이 들어가서 축하하는데, 후도 불러들여서 참여시켰다. 술잔을 돌리고 풍악을 울리니 재상 정인지(鄭麟趾)와 한확(韓確) 등이 손뼉을 치며 마냥 웃어 대는데도, 후만은 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나는 살아남은 것만도 족하다. 어찌 차마 고기를 먹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렸다. 거제도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는데, 육신들이 죽게 되자 세조가 전교하기를, “허후가 살아 있었더라면 칠신(七臣)이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영종 정묘년(1747, 영조23)에 복관되고 병자년(1756, 영조32)에 정간(貞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아들 조는 그의 아내가 이개(李塏)의 누이동생이다. 세종 정묘년(1447, 세종29)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병자년(1456, 세조2)에 이개 등과 모의를 하다가 목을 찔러 자살하였는데, 아들 연령(延齡)과 구령(九齡)도 함께 연좌되어 죽었다. 내가 경술년(1790, 정조14)에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하였다.
증 이조 참판 박계우(朴季愚)
계우의 아버지는 대제학 문헌공(文獻公) 연(堧)인데, 허후의 아버지 영의정 문경공(文敬公) 조(稠)와 함께 세종을 보좌하였다. 조는 예(禮)를 제정하고 연은 악(樂)을 제작하여 그 공로가 백중지간이었다. 계유정난 초에 후와 계우도 죽었는데, 후는 벼슬이 참찬이었으므로 시호가 있으나, 계우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에 선발되었다고는 하여도, 벼슬을 상고할 길이 없었다. 내가 신해년(1791, 정조15)에 특별히 아경(亞卿)을 추증하여 함께 정단(正壇)에 배향하되, 서열은 후의 다음으로 하였다. 세조가 연은 삼조(三朝)의 원로라 하여 연좌시키지 말 것을 명하였으나 연이 안치되기를 자원하였다.
증 이조 판서 행 순흥 부사 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부사직(副司直) 현실(玄實)의 아들이다. 세종 기유년(1429, 세종1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금성대군이 순흥에 귀양 가 있을 적에 보흠이 순흥 부사로 있었는데, 서로 만날 적마다 눈물을 흘리고 몰래 영남 지방 인사들과 결탁하여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였다. 보흠이 격문을 기초하는 것을 관노(官奴)가 벽 뒤에서 엿듣고서 금성대군의 시녀를 통하여 그 격문을 훔쳐 내어 상변(上變)하려는데, 어떤 사람이 빼앗아 앞질러 고변하여, 보흠은 곤장을 맞고 박천(博川)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죽었다. 보흠이 어릴 적에 유방선(柳方善)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문장에 능하였다. 일찍이 집현전 박사에 선발되어, 성삼문 등 여러 사람들과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서호십경시(西湖十景詩)를 화창하였고, 또 길재(吉再)의 묘문(墓文)도 지은 것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영종 무오년(1738, 영조14)에 복관되면서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기미년(1739, 영조15)에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송곡서원(松谷書院)과 성인단(成仁壇)에 배향되었다.
증 공조 참판 영월군 호장(寧越郡戶長) 엄흥도(嚴興道)
영월군 사람으로서 본군의 호장이 되었다.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정축년(1457, 세조3) 10월 갑인일에 단종이 영월에서 승하하자, 흥도가 혼자서 임곡(臨哭)하고는 이튿날 을묘일에, 어머니를 위하여 마련하여 놓았던 옻칠한 관(棺)을 가져다 본군 북쪽 5리 밖 동을지(冬乙旨)로 모시고 가서 서둘러 매장하였다. 가족들이 화가 두려워서 다투어 만류하자, 흥도가, “좋은 일을 할 따름이다.” 하고 매장을 하고 나서는 도망쳐 버렸다. 현종 기유년(1669, 현종10)에 그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고, 숙종 무인년(1698, 숙종24)에 공조 좌랑에 추증되었으며, 영종 병오년(1726, 영조2)에 옛 마을에 정려(旌閭)하였다. 또 계해년(1743, 영조19)에 공조 참의를 더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무인년(1758, 영조34)에 공조 참판을 더 추증하고 창절사(彰節祠)에 배향하였다. 내가 을사년(1785, 정조9)에 지방관에게 명하여 그의 분묘를 증축하고, 무신년(1788, 정조12)에 또 제문을 지어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주-D001] 정순왕후의 잉첩의 아버지이다 : 권완의 딸이 정순왕후의 시녀로서 후에 숙의(淑儀)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2] 이상견빙(履霜堅氷) : 서리를 밟고 나면 곧 얼음이 꽁꽁 언다는 뜻으로, 사태가 점차 위기의 상황으로 악화되어 가고 있다는 경계의 말이다. 《周易 坤卦》 [주-D003] 포상(苞桑) : 뽕나무 밑둥치에다 꼭 붙잡아 매라는 뜻으로, 처음부터 기반을 굳건히 다져 놓으라는 경계의 말이다. 《周易 否卦》
ⓒ 한국고전번역원 | 김능하 (역)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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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별단(別壇) 236인
지방(紙榜)은 ‘계유년, 병자년, 정축년에 죽은 사람의 신위’라고 쓴다. - 계유년에서 무인년까지 사건으로 죽은 자가 해마다 있었는데도 계유년, 병자년, 정축년의 사람만을 열거하는 것은 대개 안평대군의 사건은 계유년에 시작되었고, 육신의 사건은 병자년에 시작되었으며, 금성대군의 사건은 정축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시발점을 들어서 개괄한 것이다.
조사(朝士)를 한 지방(紙牓)으로 묶고, -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12인의 지방은 두 층으로 배열하여 쓰되, 상층과 하층의 열서(列書)하는 원칙은 대개 사망한 연조대로 차례를 정한다. 먼저 정단(正壇)에 배향한 사람과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을 사망의 선후(先後)에 따라 유별하고, 자식으로서 연좌된 자는 또 연좌된 사람대로 족련(族聯)에 따라 서열을 정하되, 연조는 상관하지 말아서, 아우가 형의 위에 올라 있고 아저씨가 조카의 아래에 배열되는 일을 면하게 한다. 또 이 기록의 원래 차례와 간혹 조금씩 다른데도 있는데, 이를테면 이 기록에는 이양(李穰)의 아들 승윤(承胤) 밑에 승윤의 아들이 연이어서 배열되어 있으나, 지방에는 양의 종제(從弟) 보인(保仁)을 먼저 쓰고 그 밑에 보인의 종제 의산(義山)을 쓴 다음에 승윤을 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이 기록은 수좌(收坐)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아들을 먼저 쓰고 나서 아우를 써서 가쇄(加殺)의 분간을 나타낸 것이고, 지방은 서향(序享)에 의리가 있기 때문에 아우를 먼저 쓰고 아들을 뒤에 써서 소목(昭穆)의 차례를 정한 것이다. - 산원(散員)ㆍ환관(宦官)ㆍ맹인(盲人)ㆍ군노(軍奴)를 한 지방으로 묶으며, 여인을 한 지방으로 묶는다. 조사의 지방은 조금 앞으로 내어다 붙이고, 산원ㆍ환관ㆍ맹인ㆍ군노의 지방은 조금 내려다 붙이며, 여인의 지방은 오른쪽에 붙인다. 제품(祭品)은 정단과 똑같이 하되 나물과 과일이 없다.
사실 미상의 사람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趙遂良), 충청도 관찰사 안완경(安完慶), 경성 부사(鏡城府使) 이경유(李耕㽥), 진무(鎭撫) 원구(元矩), 집현전 교리 이현로(李賢老), 군기감 판사 윤처공(尹處恭), 선공감 부정 이명민(李命敏)
조수량은 관극(克寬)의 아우인데, 세종 경자년(1420, 세종2)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안완경은 세종 계묘년(1423, 세종5)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진년(1436, 세종18)에 중시에 합격하였고, 이현로는 세종 무오년(1438, 세종2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계유정난 때 윤처공, 원구, 이명민이 안평대군과 무리를 짓고서 수량, 완경, 경유와 연결시킴으로 해서 모두 죽고, 현로도 안평대군에게 붙어서 화복(禍福)을 이야기하였다가 죽었다.
안악 군사(安岳郡事) 황의헌(黃義軒), 고양 현감(高陽縣監) 고덕칭(高德稱) - 칭(稱)은 칭(偁)으로도 씀 -
황의헌은 세종 임술년(1442, 세종24)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덕칭은 세종 정묘년(1447, 세종2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갑술년(1454, 단종2)에 의금부가 아뢰기를, “황의헌이 용(瑢 안평대군의 이름)과 친분을 맺어서 언젠가 사냥을 핑계로 군사 974명을 모았는가 하면, 용이 죽게 되자 서울에 사람을 보내어 정탐하였고, 고덕칭은 기관(記官) 중은(仲銀)과 일찍이 총패(摠牌)에게 체지(帖紙)를 내려 군마(軍馬)를 정비시켰는가 하면, 또 민호(民戶)의 군기(軍器)를 대량 거두어들여서 여러 차례 용을 찾아갔으므로 죄상을 보아 죽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여, 모두 능지처참되었다.
장신(將臣) 송석동(宋石仝) - 동(仝)은 동(童)으로도 씀 -, 형조 정랑 윤영손(尹令孫) - 영(令)은 영(鈴) 또는 영(寧)으로도 씀 -, 이조 좌랑 심신(沈愼)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삼문 등과 같이 죽었는데, 그 반사문(頒赦文)에 “용(瑢)을 지원하던 무리들이 하도 많아서 남은 싹을 다 자르지 못하였던바, 이개ㆍ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박중림ㆍ김문기ㆍ심신이 앞장서서 반란을 모의하고 남몰래 장신(將臣) 성승ㆍ유응부ㆍ박정ㆍ송석동 등과 결탁하여 우익을 삼은 다음, 몰래 권자신ㆍ윤영손과 연결하여 궁금(宮禁)으로 숨어 들어가서 안팎에서 서로 응수하였으니, 삼족을 멸하여 마땅하다.” 하였다.
바야흐로 삼문 등이 상왕의 복위를 모의할 적에 집현전에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삼문이, “신숙주(申叔舟)는 나와 좋은 사이이기는 하지만 죄가 무거워서 죽이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모두들 그렇다고 하고 여러 사람이 각자 죽일 사람을 나누어 맡았다. 그때 영손이 숙주를 죽이게 되었는데, 명(明) 나라 조사(詔使)에게 연회를 베풀던 날 별운검(別雲劍)을 없애므로 그 계획이 무산되었고, 영손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여 숙주를 엿보고 편방(便房)으로 가서 칼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삼문이 만류하여 그만 물러났다.
이상의 사람들의 죽음은 정단(正壇)에 배향된 여러 사람들과 차이가 없으나 사실이 조금 소략하여서 별단(別壇)의 맨 앞에 배향하되, 또 죽음의 선후로 서열을 정하였다. 모두 12인이다.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보면, 조수량과 안완경은 관명(官名)이 모두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쓰여 있는데, 헌납 김계우(金季友)가 장계를 올려, 수량이 대신으로서 용(瑢)의 별장에 가서 밀담을 하였다고 논죄하였다. 그런데 본조의 관찰사를 보면 모두 8원(員)으로 경기 관찰사만이 태종 계사년(1413, 태종13)에 도관찰사로 일컬어지다가 세조 병술년(1466, 세조12)에 관찰사로 고쳤고, 전라도 관찰사는 세종 정사년(1437, 세종19)에 도관찰사로 일컬어지다가 세조 무자년(1468, 세조14)에 관찰사로 고쳤으며, 그 밖에 이를테면 경상도 같은 경우는 태조 임신년(1392, 태조1)에 안렴도관찰사(按廉都觀察使)를 두었다가 태종 신사년(1401, 태종1)에 안렴사(按廉使)로 다시 고쳐서 세조 을유년(1465, 세조11) 이전까지 그대로 일컬었다. 평안도와 충청도의 관찰사는 도관찰사로 불린 적이 없고 보면, 이는 잘못 초록된 것일 수도 있어서 지금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관급(官給)과 표호(標號)도 특진대광대부(特進大匡大夫)만이 대신(大臣)으로 되어 있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이하 비품(卑品)의 산함(散銜)까지는 중신(重臣), 재신(宰臣), 시종(侍從), 참상(參上), 참외(參外)의 명칭이 있다. 지금 수량의 현직인 관찰사가 높은 관질이라 치더라도 보국숭록에 상응하는 데 그칠 것이니, 원계(院啓)에서 갑자기 대신이라고 일컬은 것은 너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사실 미상의 11인 모두가 관함이 있는데도 송석동만 관함이 빠져서 상고할 길이 없으니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이들 여러 사람의 사실은 비록 자세히 알기 어렵다 치더라도 행적이 다 아주 남달라서 생략할 수가 없다. 그 기록 방법에 있어서는 실록에 의거한 바 송석동을 성승ㆍ유응부ㆍ박정과 함께 똑같이 장신(將臣)으로 일컬었고 보면, 그가 관질이 높은 무반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장신 송석동으로 쓰는 것이 막연하고 확실하지 못하다는 의문은 있을지라도 완전히 빼어서 사실을 묻어 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수사(收司)에 연좌된 사람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 덕양정(德陽正) 이우량(李友諒) - 모두 안평대군의 아들임 -, 지부(知部) 김승규(金承珪), 직장(直長) 김승벽(金承璧)ㆍ김목대(金木臺)ㆍ김석대(金石臺) - 모두 종서(宗瑞)의 아들임 -, 김조동(金祖同)ㆍ김수동(金壽同) - 모두 승규(承珪)의 아들임 -, 참판 황보석(皇甫錫)ㆍ직장 황보흠(皇甫欽) - 모두 인(仁)의 아들임 -, 황보가마(皇甫加麽) - 가마(加麽)는 가마이(加亇耳)로 쓰기도 함 - ㆍ황보경근(皇甫京斤) - 모두 석(錫)의 아들임 -, 헌납 이승윤(李承胤) - 양(穰)의 아들임 -, 이계조(李繼祖)ㆍ이소조(李紹祖)ㆍ이장군(李將軍) - 모두 승윤의 아들임 -, 목사 이보인(李保仁) - 양(穰)의 사촌 동생이자 황의헌(黃義軒)의 처형임 -, 호군 이해(李諧)ㆍ이심(李諶)ㆍ이모(李謨)ㆍ이사문(李沙門) - 사문(沙門)은 삼문(三問)으로 쓰기도 함 - ㆍ이주령(李住令) - 모두 보인의 아들임 -, 부령(部令) 이승로(李承老) - 양의 조카임 -, 이의산(李義山) - 보인의 사촌 동생임 -, 이우경(李友敬) - 의산의 아들임 -, 민보창(閔甫昌)ㆍ민보해(閔甫諧)ㆍ민보석(閔甫釋)ㆍ민보흥(閔甫興)ㆍ민석이(閔石伊) - 모두 신(伸)의 아들임 -, 군기감 녹사 조번(趙藩) - 극관(克寬)의 사촌 동생임 -, 조계동(趙季同)ㆍ조귀동(趙貴同), - 모두 번(藩)의 아들임 -, 이물금(李勿金)ㆍ이수동(李秀同)ㆍ이한산(李漢山) - 모두 경유(耕㽥)의 아들임 -, 이건금(李乾金)ㆍ이건옥(李乾玉)ㆍ이건철(李乾鐵) - 모두 현로(賢老)의 아들임 -, 윤경(尹涇)ㆍ윤위(尹渭)ㆍ윤탁(尹濯)ㆍ윤식(尹湜)ㆍ윤개동(尹介同)ㆍ윤효동(尹孝同) - 모두 처공(處恭)의 아들임 -, 감찰 정원석(鄭元碩) - 효전(孝全)의 아들임 -, 참의 정효강(鄭孝康) - 효전(孝全)의 형이자 안평대군 부인의 사촌 형임 -, 정백지(鄭白池) - 효강의 아들임 -, 황석동(黃石仝) - 동(仝)은 동(童)으로도 쓰며 의헌(義軒)의 아들임 -, 권구지(權仇之) - 자신(自愼)의 아들임 -, 현감 김현석(金玄錫) - 문기(文起)의 아들임 -, 부사(府使) 성삼빙(成三聘)ㆍ성삼고(成三顧)ㆍ정랑 성삼성(成三省) - 모두 승(勝)의 아들임 -, 성맹첨(成孟詹)ㆍ성맹평(成孟平)ㆍ성맹종(成孟終)ㆍ성헌(成憲)ㆍ성택(成澤) - 모두 삼문(三問)의 아들임 -, 병사 조숭문(趙崇文) - 승(勝)의 매부임 -, 조철산(趙哲山) - 숭문의 아들임 -, 박숭문(朴崇文) - 정(崝)의 아들임 -, 계남(季男)ㆍ칙동(則同) - 《혼기(魂記)》를 상고하니 숭문의 아래에 배열되어 있으니, 그의 아들 내지 아우인 것 같으나 역시 자세히 알 수가 없어서 지금 《혼기》대로 기록하는데, 《혼기》를 인용한 것은 다 이와 같다. -, 수찬 박기년(朴耆年)ㆍ교리 박인년(朴引年)ㆍ박사 박대년(朴大年)ㆍ정랑 박영년(朴永年) - 모두 중림(仲林)의 아들임 -, 생원 박헌(朴憲)ㆍ생원 박순(朴珣)ㆍ박분(朴奮) - 모두 팽년(彭年)의 아들임 -, 점동(占同)ㆍ개동(丐同)ㆍ파록대(波彔大)ㆍ흔산(欣山) - 《혼기》에는 분(奮)의 아래에 배열되어 있음 -, 사옹원 별좌 봉여해(奉汝諧) - 중림(仲林)의 사위임 -, 봉유(奉紐) - 《혼기》에는 여해 아래에 배열되어 있음 -, 이공회(李公繪) - 개(塏)의 아들임 -, 도진무 이유기(李裕基) - 개의 사촌 동생임 -, 은산(銀山) - 《혼기》에는 유기의 아래에 배열되어 있음 -, 학유 하기지(河紀地) - 위지(緯地)의 형임 -, 생원 하소지(河紹地) - 위지(緯地)의 아우임 -, 하호(河琥) - 위지의 아들임 -, 유귀련(柳貴連)ㆍ유송련(柳松連) - 모두 성원(誠源)의 아들임 -, 유사수(兪思守) - 응부(應孚)의 아들임 -, 허연령(許延齡)ㆍ허구령(許九齡) - 모두 조(慥)의 아들임 -, 송창(宋昌)ㆍ송녕(宋寧)ㆍ송안(宋安)ㆍ송태산(宋太山) - 모두 석동(石同)의 아들임 -, 오을미(吾乙未) - 《혼기》에는 심신(沈愼)의 아래에 배열되어 있음 -
모두 연좌되어 죽었다.
이상은 연좌되어 죽은 자손 및 친인척들이다. 이 밖에도 사실이 인멸되어 전하지 않는 자가 의당 적지 않겠지만, 여러 서책들을 상고하여 보아서 꼭 명확한 증거를 입증하고 나서야 기록하였으며, 또 연좌된 사람의 죽음의 선후를 가지고 그 차례를 정하였다. 그러나 의춘군ㆍ덕양정 같은 이는 대군의 아들인 데다 또 관질이 높아서 대군의 죽음이 비록 삼정승 이하 여러 사람의 뒤였지만, 특별히 첫머리에 배열한 것이다. 모두 93인이다.
《혼기》를 상고하니, 김조동(金祖同) 아래에 만동(萬同)만 있고 수동(壽同)은 없으며, 실록에는 수동만 있고 만동은 없으니, ‘수’와 ‘만’은 아마도 한 사람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것이므로 한 사람 외에 또 한 사람이 있는 것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또 《혼기》에는 조번(趙藩) 아래에 계동(季同)과 막동(莫同)이 배열되어 있고, 실록에는 조번 아래에 계동과 귀동(貴同)이 배열되어 있으며, 《노릉지(魯陵志)》에는 향동(香同)과 귀동이 배열되어 있는데, 《혼기》와 《노릉지》의 모순을 논할 필요 없이 두 아들만을 배열한 점은 똑같으므로, 역시 네 사람으로 오인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실록의 계동ㆍ귀동은 《혼기》ㆍ《노릉지》의 것과 서로 들어맞으나, 《혼기》와 《노릉지》의 막동ㆍ향동이 실록에는 모두 빠졌으니, 이것을 근거로 하여 넣고 빼는 것이 참으로 심핵(審核)의 취지에 맞겠다. 다만 《노릉지》에 실린 것이 곧 《혼기》를 인용하여 증거를 대면서도 계동을 향동으로 한 점은 진실로 오류이겠지만, 막동이 아니고 귀동이라는 점은 도리어 실록과 들어맞으니, 이는 너무도 의심스러운 일이다. 또 이를테면 이승로(李承老)를 승효(承孝)로 하였고 김옥겸(金玉謙)을 김겸(金謙)으로 하였으며, 김종서 아래에는 “승벽ㆍ승규 등 여섯 사람이 모두 죽었다.”라고 주석을 달면서 역시 《혼기》를 인용하여 증거를 댔는데, 지금 《혼기》를 상고하니, 승로이고 승효가 아니며, 옥겸이고 겸이 아니다. 또 승벽ㆍ승규 등은 다섯 사람이지 여섯 사람이 아닌데도 실록에서만은 여섯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혼기》의 인용은 대개 이러한 곳이 많다.
또 《문헌비고(文獻備考)》를 상고하니, 병사(兵使) 조숭문(趙崇文)은 고려 충신 유(瑜)의 아들로서 병자년(1456, 세조2)에 아들 철산(哲山)과 함께 죽어서 모두 순천(順天) 겸천사(謙川祠)에 배향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춘관조두부(春官俎豆簿)》에는 겸천향현사(謙川鄕賢祠)는 고려 부정(副正) 조유(趙瑜)를 주향으로하여 절도사 조숭문과 사인(士人) 조철산을 배향하였고, 창녕 성씨 족보에는 성승(成勝)의 매부 조숭문은 본관이 순창(淳昌)으로, 병자년에 부자가 화를 입었다고 하였으며, 순창 조씨 가보에는 세종 때에 숭문이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상왕이 왕위를 내놓자 질병을 핑계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살며 부자가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리곤 하더니, 병자년에 처형 성승과 성승의 아들 삼문 및 박팽년 등과 함께 화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할 때 숭문과 성승의 관계는 마치 봉여해(奉汝諧)와 박팽년과의 관계와 같이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혼자서만이 모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가 질병을 핑계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살며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린 남다른 행적은 부자가 똑같으나, 다만 실록과 《혼기》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내가 기해년(1779, 정조3)에 일찍이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니, 겸천사의 배향에서 유덕(遺德)을 입증할 수 있고, 정려를 세운 것으로써 표창은 벌써 베풀어졌다. 비록 국승(國乘)의 확실한 고증은 없다 치더라도 여러 서책에 그럴 만한 근거가 있는 이상, 지레 삭제하는 것은 너무 까다로운 선별이 될 듯하고 함께 기록하는 것이 의문대로 남겨 두는 취지에 나쁘지 않을 것이므로 다시 성삼빙(成三聘) 등의 여러 사람 아래에 배열하여 연좌된 이유를 밝혀 두는 바이다. 혹자는 《성종실록》에 보인, “순천에 부처(付處)된 조철산 등을 방면하였다.”를 가지고 그만 철산으로 의심하여 한데 배열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나, 이는 또 한 사람의 철산이 따로 있어서 그러한 것일 뿐이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에, “세조의 7남 익현군(翼峴君) 이운(李璭)이 평양 조씨(平壤趙氏) 소윤(少尹) 철산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하였고, 《세조실록》에, “병자년에 의금부에 전지(傳旨)하여 전농시 소윤 조철산 및 조청로(趙淸老)의 아들 영서(英緖)의 아내 등은 연좌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또 “철산은 청로의 숙부(叔父)이자 익현군 이운의 아버지이고, 영서의 아내는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딸이므로 이러한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는데, 숭문의 아들 철산은 사인(士人)이며 본관은 순창이고, 청로의 숙부인 철산은 소윤이며 본관은 평양이니, 이는 벌써 쉽게 구분되는 일이다. 그리고 소윤 철산은 청로의 사건에 연루되어 익현군 때문에 방면되었으니, 만약 숭문의 아들이라면 마땅히 그의 아버지의 사건에 연좌되었지, 그의 조카의 사건에 연좌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숭문의 부자가 일찍이 순천에 살았기 때문에 그대로 겸천향현사에 배향되었으니, 순천에 부처한 철산을 이 사람으로 지목한다면, 죄를 지어서 귀양 보내는 자를 어떻게 고향의 군으로 보낼 수 있겠는가. 이는 곧 이름이 마침 서로 같아서이지 의심스러운 점은 찾아볼 수 없다. 장현광(張顯光)의 하위지 묘갈문(墓碣文)에, “형 강지(綱地)ㆍ기지(紀地)와 아우 소지(紹地)도 함께 연좌되어 화를 입었다.” 하였고, 《노릉지》에, “하강지ㆍ기지ㆍ소지도 함께 나문하여 형률에 따라 연좌시켰다.” 하였는데, 지금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의거하면, 직제학 정광필(鄭光弼)이 정시(廷試)에서 제술(製述)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추부(中樞府)로 보내지자, 병조가 아뢰기를, “광필이, 시험을 보이던 날에 숙부 난손(蘭孫)의 부인 및 숙부 난무(蘭茂)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궐에 나아가서 제술을 하지 않은 것이므로, 집에 있으면서 제술을 하지 않은 여느 사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문종 때에 하위지가 정시에 들어갔다가 역시 형 강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술을 하지 않았는데, 후인들이 그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고 보면 강지의 죽음은 이미 병자년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묘갈문의 오류일 뿐이다. 《노릉지》에서 그것을 인습하여 나문하여 형률에 따랐다고까지 한 것은 더더욱 오류이다. 그리고 기지와 소지가 만약 강지와 같이 병자년 이전에 죽지 않았다면 의당 연좌되어 죽었을 것인데도, 그런 사적이 실록에도 보이지 않고 이름자 역시 《혼기》에서 빠졌으니, 당시의 사실을 자세히 알 수가 없는데도 묘갈문에서만은 그의 죽음을 쓴 것이다. 다른 서책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 그가 그때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힐 수 없는 이상, 묘갈문에서 강지의 죽음을 잘못 썼다 하여 기지와 소지가 그때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억측할 수는 없으므로, 지금 강지를 기록하지 않을 뿐이다. 또 묘갈문에는 ‘위지의 아들 연(璉) 생원(生員)’으로 되어 있고 《노릉지》에는 《혼기》를 인용하여 ‘연(璉)ㆍ반(班)’으로 되어 있는데, 《혼기》에는 또 ‘지련(池璉)ㆍ지반(池班)’으로 되어 위지의 아래에 배열되어 있으니, 아마도 지(池)와 하(河)의 글자가 서로 비슷하여서 잘못된 것인 듯하다. 또 이기(李墍)의 《송와잡기(松窩雜記)》에 하위지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호(琥)이고 작은아들은 박(珀)이라고 하였으니, 《노릉지》의 연(璉)ㆍ반(班)과 《송와잡기》의 호(琥)ㆍ박(珀)을 막론하고 위지의 아들은 둘뿐이다. 글자는 비록 서로 다르더라도 수효는 서로 맞고 보니, 《하씨가승(河氏家乘)》에서 연(璉), 반(班)을 호(琥)ㆍ박(珀)의 같은 이름으로 의심한 것은 그 설이 근사하다. 넷 중에서 둘은 버리고 둘은 남겨 두는 것이 마땅하다면, 연(璉)을 남겨 두려면 반(班)과 아울러야 하고 박(珀)을 남겨 두려면 호(琥)와 아울러야 한다. 그리고 박은 조용히 사지(死地)로 나간 데다 또 말까지도 완곡 정직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사헌부 지평을 추증하여 정단(正壇)에 배열하였으니, 이는 이기의 《송와잡기》를 취신한 것이므로 지금 호(琥)를 남겨 두고 연(璉)ㆍ반(班)은 기록하지 않았다.
또 《혼기》에 상고하니, 박흔산(朴欣山) 아래에는 금년생(今年生)을 연서하고 성택(成澤) 아래에는 무명(無名)을 연서하고, 무명 아래에는 금년생을 연서하였는데, 이는 아마 성씨ㆍ박씨 두 집의 자제로서 아직 어려서 이름을 짓지 않은 자인 듯하다. 이를테면 김대정(金大釘)ㆍ하석(河石) 등 열여섯 살 이상의 친아들이 모두 연루되어 함께 죽은 사실이 실록에 실려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 이름을 상고할 수 없기 때문에 추천의 대상에 넣지 못하였고 보면, 하물며 어린아이로서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한 자이겠는가. 비록 《혼기》에는 실려 있더라도 지금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또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에 성삼문은 아들이 다섯으로 큰아들이 원(元)이고, 유응부는 아들은 없고 딸을 둘 두었다고 하였는데, 삼문이 아들 다섯을 둔 것은 사실이나, 실록과 《혼기》에 실린 바로는 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없으며, 응부의 아들은 이름이 사수(思守)인데도, 아들이 없는 것으로 쓰여 있다. 유성룡(柳成龍)이 ‘전해 들은 말을 기록하다 보니 오류를 면치 못하였다’고 말한 것도 대개 이러한 유형일 것이다.
충청도 절제사(忠淸道節制使) 심정(沈淨), 절제사 조석강(趙石岡), 목사 박이령(朴以寧), 고양 현감(高陽縣監) 박하(朴夏), 하석(河石), 양옥(梁玉), 이차(李差), 안막동(安莫同), 최노(崔老), 김정(金晶), - 아들 - 개똥(介叱同), 김말생(金末生), - 아들 - 산(珊)ㆍ호(瑚), 김상충(金尙忠), - 아들 - 득천(得天)ㆍ복천(卜天)
계유정난 때 모두 안평대군의 당에 연좌되어 죽었다. 박하와 김정의 경우는, 안평대군이 언젠가 생일날 마포강 정자에 잔치를 베풀어서, 박하가 술과 고기를 싸 가지고 갔더니, 이때 조정 인사 이현로(李賢老), 이명민(李命敏), 이의산(李義山), 조번(趙藩), 이석정(李石貞), 김정 등 30여 명이 모였는데, 세조가 이를 알고 사람을 시켜 물어보자 안평대군이 놀랐다 한다. 하석은 안평대군의 장수인데, 강화도로 귀양 갈 적에 안평대군이 그의 종 영기(永奇)를 불러 말하기를, “일이 만약 실패한다면 하석이 반드시 먼저 죽음을 당할 것이니 너는 부디 뼈를 거두어 와서 나에게 보이라.” 하였다. 개똥, 산, 호, 득천, 복천은 갑술년(1454, 단종2)에 연좌되었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석정(李石貞), 조완규(趙完珪), 조순생(趙順生), 불련(佛連) - 《혼기》에는 순생 아래에 배열되어 있음 -
갑술년(1454, 단종2) 안평대군의 무리에 연좌되어 죽은 사람들이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조유례(趙由禮), 호군(護軍) 성문치(成文治), 이숭례(李崇禮), 김옥겸(金玉謙), 최영손(崔泳孫), 허축(許逐) - 축(逐)은 수(遂)로도 씀 -, 홍구성(洪九成), 홍옥봉(洪玉峯), 홍적(洪適), 이문(李聞), 진유번(陳有蕃) - 번(蕃)은 번(藩)으로도 씀 -, 최자척(崔自陟) - 척(陟)은 척(滌)으로도 씀 -, 신맹지(申孟之), - 아우 - 중지(仲之)ㆍ근지(近之)ㆍ경지(敬之)
구성과 옥봉은 모두 안평대군의 장사(壯士)이다. 을해년(1455, 세조1)에 우의정 한확(韓確), 좌찬성 이사철(李思哲) 등이 의논드리기를, “양빈(楊嬪), 상궁 박씨, 금성대군 이유,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천이 유례, 문치 등과 반란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들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여, 유례 등이 모두 연좌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별시위(別侍衛) 이정상(李禎祥), 별시위 이의영(李義英), - 아우 - 말생(末生), 중추원 녹사(中樞院錄事) 지영(智英) - 유응부의 사위임 -, 이사이(李思怡) - 《혼기》에는 지영의 아래에 배열되어 있음 -, 최득지(崔得地), 최치지(崔致地), - 아들 - 윤석(閏石)ㆍ계동(季同)ㆍ막동(莫同)ㆍ석동(石同)ㆍ철동(哲同)ㆍ철산(哲山), 조청로(趙淸老), - 아들 - 영서(英緖) - 영(英)은 영(榮)으로도 씀 -, 황선보(黃善寶), 권서(權署), 권저(權著), 최사우(崔斯友), 이호(李昊), 성손(盛孫), 무손(茂孫) - 《혼기》에는 호의 아래에 배열되어 있음 -, 김감(金堪), - 아들 - 한지(漢之), 김선지(金善之), 정관(鄭冠), 장귀남(張貴男), 장충(張冲) - 《혼기》에는 귀남 아래에 배열되어 있음 -, 최면(崔沔), 최시창(崔始昌) - 《혼기》에는 면 아래에 배열되어 있음 -, 심상좌(沈上佐) - 좌(佐)는 좌(左)로도 씀 -, 김구지(金九知)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삼문과 함께 모의를 하다가 모두 죽었다.
관찰사(觀察使) 유귀산(庾龜山), - 아우 - 오산(鰲山)
정축년(1457, 세조3)에, 순흥에 거주하였다는 이유로 온 집안이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이상의 사람들은 역당(逆黨)에 가담한 죄로 죽었기 때문에 연좌되어 죽은 여러 사람보다는 비교적 사실이 조금 자세하다. 만약 죽은 사건의 선후를 따라 그 연조(年條)를 밝히고 벼슬 품계의 존비(尊卑)에 따라 그 위차(位次)를 정한다면, 모두 이상의 준례와 같게 될 것이다. 간혹 자제(子弟)로서 연좌된 자 중, 같은 해에 죽지는 않았더라도 각기 유별로 배열하느라 부형의 아래에 붙인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개똥을 김정의 아래에 붙이고, 산ㆍ호를 김말생의 아래에 붙이고, 중지ㆍ근지ㆍ경지를 신맹지의 아래에 붙인 것이 이러한 유이다. 모두 70인이다.
역당에 가담한 여러 사람의 직급은 반드시 확실한 고증이 있어야만 기록할 수 있다. 실록에 의거하면, 김정(金晶)은 조사(朝士)이고 조순생(趙順生)ㆍ최득지(崔得地)ㆍ최치지(崔致地)는 무관이며, 계유년(1453, 단종1)에 조완규(趙完珪)ㆍ이차(李差)ㆍ안막동(安莫同)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을해년에 김옥겸(金玉謙)ㆍ최영손(崔泳孫)ㆍ허축(許逐)ㆍ홍구성(洪九成)ㆍ홍옥봉(洪玉峯)ㆍ홍적(洪適)ㆍ이문(李聞)ㆍ진유번(陳有蕃)ㆍ최자척(崔自陟)ㆍ이예숭(李禮崇)ㆍ신맹지(申孟之) 등의 고신을 환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고 보면 그들이 모두 조정 관원이었음은 알 수 있으나, 어떤 관직의 어떤 계급이었는지는 모두 상고할 수가 없어서 일률적으로 생략하였다. 이를테면 박이령(朴以寧), 조석강(趙石岡)은 예겸(倪謙)의 《조선기사(朝鮮記事)》에, “의주 병마절제사(義州兵馬節制使) 조석강이 쌀과 술을 보내오고, 안주 목사(安州牧使) 박이령이 연회가 끝나자 작별하고 돌아갔다.”라고 기록했으니, 이들이 곧 그 사람들인데, 예겸이 사명을 받들고 우리나라에 온 때가 경태(景泰 명 나라 경제(景帝)의 연호) 경오년(1450, 세종32)으로 이령과 석강이 죽기 4년 전이고 보면, 그때의 작질(爵秩)이 4년 뒤까지 그대로 있지는 않을 것이나 상고할 수도 없다. 우선 《조선기사》에 기록된 사실을 가지고 그 관함(官銜)이 지정(池淨)ㆍ박하(朴夏)의 예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만 대략 밝혀 둔다. 황귀존(黃貴存)ㆍ이식배(李植培)ㆍ안순손(安順孫) 등은 그들이 사알(司謁)ㆍ기관(記官)ㆍ품관(品官)이었다는 사실이 모두 실록에 보이기 때문에, 조사(朝士)의 지방(紙榜)에 배열하지 않고 환관(宦官)의 위에 배열하였다. 그리고 상고할 수 없는 사람은 그들이 죽은 사건의 선후를 가지고 분류별로 여기에 붙였는데, 이를테면 귀존(貴存) 등과 같이 부당하게 섞여 들어간 경우도 더러 있을 수 있다. 또 《국조방목(國朝榜目)》을 상고하여 본바, 조충손(趙衷孫)은 계유년(1453, 단종1)에 죽음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수록되어야 한다. 그러나 《단종실록》에 보면, 계유년에 정언(正言) 이계손(李繼孫)이 아뢰기를, “조극관(趙克寬), 민신(閔伸), 윤처공(尹處恭), 조충손(趙衷孫), 조번(趙藩)이 모두 용(瑢)의 심복임에도, 극관 등은 죽음을 당하였으나 충손은 안치(安置)만 하도록 하였으니, 죄는 똑같은데도 벌은 서로 달라서 너무도 옳지 못합니다.” 하였는데, 윤허되지 않았다. 《세조실록》에는 무자년(1468, 세조14)에 계유정난 때 연좌된 사람과 조충손을 방면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를 근거로 할 때 그가 죽지 않았음은 확실한데, 《방목》은 어디에 상고하여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인지 모르겠다. 《노릉지》에 정분(鄭苯)을 낙안(樂安)에, 지정(池淨)을 영암(靈巖)에, 조수량(趙遂良)을 고성(固城)에, 이석정(李石貞)을 연일(延日)에, 안완경(安完慶)을 양산(梁山)에 유배하고, 허후(許詡)ㆍ유중문(柳仲門) 등을 거제(巨濟)로 안치하였다가 이윽고 모두 사사(賜死)하였다고 하였는데, 유중문의 단죄가 이미 허후와 똑같은 이상, 유중문이 연좌된 사유 역시 매우 중요하므로 사관(史官)이 반드시 빠뜨리지 않고 함께 썼을 것임에도, 하기지(河紀地)ㆍ소지(紹地) 및 유귀산(庾龜山)ㆍ오산(鰲山) 등의 예와는 달리 어떤 사람은 연좌되어 죽어서 꼭 수록하여야 함에도 경시하여 기록에서 빼어 버리고, 또 어떤 사람은 시골에 섞여 살다가 싸잡혀 죽었음에도 대충 간추려 싣지 않은 것은 그 사례를 하나로 논할 수 없다. 지금 실록을 상고한 바, 이러한 사람은 원래부터 없었으니, 사서(史書)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노릉지》는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노릉지》에 보인 분ㆍ정ㆍ수량ㆍ석정ㆍ완경이 각 군현(郡縣)으로 나뉘어 유배된 사실이 모두 실록의 내용과 합치되기는 하나, 다만 실록에는 허후가 거제도로 안치되었고, 그 아래에 “유형(柳亨)을 고성(高城)에, 이세문(李世門)을 삼척(三陟)에 안치시켰다.”라는 글이 있으니, 이것은 생각건대 전사하는 과정에서 유형과 이세문의 성명이 서로 엇갈려 다시 엉뚱한 유중문을 허후의 아래에 연서하였다가 위의 글에 가려서 그만 거제도로 안치하였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조덕상(趙德常)의 《저호수록(樗湖隨錄)》에도 유세문(柳世門)이 귀양 가서 죽었다고 하였으니, 필시 이로 인하여 부회(附會)한 것인 듯하다. 이를테면 《병자록(丙子錄)》에는 세조가 정보(鄭保)를 국문하다가 정몽주의 손자라는 사실을 물어 알고 나서는 서둘러 국문을 중지하고, “충신의 후예이니 특별히 사형을 감면하여 연일현(延日縣)으로 유배하라.” 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이재(李縡)가 지은 그의 묘표(墓表)에는 뒤에 단성(丹城)으로 이배(移配)되어 죽었다고 하였으니, 이를 근거로 한다면 정보 역시 유배 가서 죽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강개하여 위언(危言)을 하며 성삼문과 박팽년을 칭찬하고 한명회를 꾸짖은 정보 같은 이도 오히려 그 은혜를 미루어 대대로 용서하여 주었으니, 사건은 다른데도 함께 연좌된 경우 역시 취사(取捨)의 과정에서 정중을 기하여야 될 일이다. 그러고 보면 《저호수록》이 과연 오류가 없다 치더라도 마땅히 제쳐 둘 따름인데, 더구나 유배와 죽음에 대하여 이미 확실한 증거가 없고 중문(仲門)의 실존 인물 여부 역시 매우 의심스러운 데이겠는가. 이번에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참의(參議) 이휘(李徽)는 이개(李塏)의 매부로서 병자년(1456, 세조2)에 성삼문 등과 역모를 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정원(政院)으로 나아가 먼저 아뢰어 자신은 면하기를 바랐으나 나중에 역시 국문을 받아 죽었고, 풍산(豐山)의 관노(官奴) 이동(李同)은 정축년(1457, 세조3)에 역시 금성대군과 역모하다가 대궐에 나아가 상변(上變)하고 또 금성대군이 내려 준 명주띠를 올려 사실을 입증하였으나, 뒤에 역시 처형되었다. 그러나 다 같이 그 사건으로 죽었다고 논할 수는 없기 때문에 모두 삭제하였다.
또 《세조실록》을 상고한 바, 병자년(1456, 세조2)에 박기년(朴耆年)ㆍ심신(沈愼)의 일당을 정문(廷問)할 적에 심신이 대답하기를, “정언(正言) 유계분(柳桂芬) - 성원(誠源)의 형의 아들임 - 의 집에 모여서 활쏘기를 하였는데, 모인 자는 이정상(李禎祥), 종형 정랑(正郞) 정원(禎元), 봉교(奉敎) 최한보(崔漢輔), 대교(待敎) 이문환(李文煥) 등 10여 인이었습니다.” 하고, 또 이정상ㆍ이지영(李智英) 등을 정문하자, 대답하기를, “사경(司經) 정효상(鄭孝祥), 직장(直長) 박시형(朴時衡), 최숙손(崔叔孫), 이효종(李孝宗), 이지영의 형 말생(末生), 처형 정관(鄭冠)이 모두 알았습니다.” 하였다. 대개 계분 등은 병자년(1456, 세조2) 사건의 여러 신하들과 당여(黨與)가 아니면 족친 관계이다. 더구나 심신ㆍ이지영의 대답이 이미 이와 같은 이상, 말생과 정관 역시 함께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의거하면, 경인년(1470, 성종1)에 선산(善山)에 안치된 이정원을 방면하였고, 《국조보감별고(國朝寶鑑別考)》에는 유계분이 예종 기축년(1469, 예종1)에 교리(校理) 벼슬을 하였으나, 이를테면 한보ㆍ문환ㆍ효상ㆍ시형ㆍ숙손ㆍ효종이 말생ㆍ관과의 연좌 여부 및 정원ㆍ계분의 방면은 모두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세조실록》에 보면, 병자년(1456, 세조2)에 김유덕(金有德)의 처제를 붙잡아 들이고 정축년(1457, 세조3)에 이로(李老)와 권책(權策)의 누이동생을 붙잡아 들여 공신의 종을 삼았으며, 또 갑신년에 의금부ㆍ사헌부ㆍ형조에 전교하기를, “김종서(金宗瑞)ㆍ윤처공(尹處恭)ㆍ이명민(李命敏)ㆍ이현로(李賢老)ㆍ이경유(李耕㽥)ㆍ원구(元矩)ㆍ조번(趙蕃)ㆍ김연(金衍)ㆍ고덕칭(高德稱)ㆍ황의헌(黃義軒)ㆍ중은(仲銀)ㆍ정효전(鄭孝全)ㆍ박계우(朴季愚)ㆍ조순생(趙順生)ㆍ정분(鄭苯)ㆍ조완규(趙完珪)ㆍ불련(佛連)ㆍ하위지(河緯地)ㆍ박중림(朴仲林)ㆍ성승(成勝)ㆍ박정(朴崝)ㆍ송석동(宋石同)ㆍ김문기(金文起)ㆍ유성원(柳誠源)ㆍ권저(權著)ㆍ김감(金堪)ㆍ이지영(李智英)ㆍ정관(鄭冠)ㆍ안우(安祐)ㆍ최득지(崔得地)ㆍ최사우(崔斯友)ㆍ이호(李昊)ㆍ장귀남(張貴南)ㆍ봉여해(奉汝諧)ㆍ황선보(黃善寶)ㆍ존자(存者)ㆍ조청로(趙淸老)ㆍ천동(千同)ㆍ정유재(鄭有才)ㆍ선효장(宣孝章)ㆍ탁계(卓繼)ㆍ중산(仲山) 등의 숙질(叔姪)을 모두 외방(外方)으로 가서 편의대로 살도록 하라.” 하였다. 이를테면 김유덕ㆍ이로ㆍ권책의 처제라든가 누이동생은 병자ㆍ정축년에 연좌되었을 것이고, 불련ㆍ안우ㆍ존자ㆍ천동ㆍ선효장ㆍ탁계ㆍ중산의 숙질은 갑신년에 석방되었을 것이나, 형률이 자식을 수감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죽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김유덕과 불련은 그 이름이 《혼기》에 또 보이기 때문에 수록하였지만, 그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상고할 수 없어서 우선 의문 나는 그대로 빼어 놓고 그 이름을 배열하지 않았다. 존자ㆍ천동ㆍ탁계ㆍ중산의 성씨는 또 일탈되었다.
박수량(朴遂良) - 수(遂)는 수(秀)로도 씀 -, 이수정(李守禎), 임진성(任進誠), 이상손(李祥孫), 박양함(朴良諴)
병자년(1456, 세조2)에 의금부가 아뢰기를, “수량ㆍ양함ㆍ진성은 언제나 딴 뜻을 품고 불순한 말을 해 왔고, 상손은 초고를 작성하는 것을 함께 의논하였으며, 수정은 그 초고문을 부연하였으므로, 모두 죄가 주살(誅殺)에 해당합니다.” 하여, 따랐다.
학생(學生) 심희괄(沈希括), 학생 박수명(朴守明)
무인년(1458, 세조4)에 모두 난언(亂言)으로 죽었다.
이상의 사람들은 역당을 붙좇은 자취가 없으므로 사안이 수사(收司)에 수감된 경우와 다른 데다, 수량 등은 최면(崔沔) 등의 여러 사람과 함께 《혼기》에 병렬되어 있고, 희괄과 수명은 또 난언으로 죽었기 때문에 별도로 한 부류를 만들어 여기에 붙이니 모두 7인이다.
김죽(金竹), 김신례(金信禮), 유세(劉世), 강막동(姜莫同)
이상의 사람들은 《혼기》에 수록되어 있기는 하나, 이들이 연좌되어 죽었는지, 역당에 가담하여 죽었는지는 모두 상고할 수 없다. 모두 4인이다.
사알(司謁) 황귀존(黃貴存), - 아들 - 경손(敬孫)ㆍ장손(長孫)
귀존은 계유년(1453, 단종1)에 안평대군의 작당에 가담한 죄에 연좌되어 죽었는데, 경손과 장손은 갑술년에 수감되었다.
고양 기관(高陽記官) 이식배(李植培), 귀진(貴珍) - 《혼기》에는 식배 아래에 배열되어 있음 -, 고양 기관 중은(仲銀) - 성씨는 빠져서 상고할 수 없음 -
식배는 안평대군을 따라 사냥을 하고 또 안평대군의 말을 집에서 길렀으며, 중은은 덕칭(德稱)과 모의하다가 모두 죽었다. 식배가 죽음을 당하고 나서 그의 아들이 또 수감되자, 그 아내가 조밥을 차려 식배의 주검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드디어 목을 매어 죽었다 한다.
순흥 품관(順興品官) 안순손(安順孫), 순흥 품관 김유성(金由性), 순흥 품관 안처강(安處強), 순흥 품관 안효우(安孝友), 순흥 기관(順興記官) 중재(仲才), - 아들 - 호인(好仁) - 성씨는 빠져서 상고할 수 없음 -
정축년(1457, 세조3)에 금성대군의 역당에 연좌되어 모두 죽었는데, 의금부가 아뢰기를, “유(瑜)가 순흥에 안치된 이후 딴 뜻을 품고서 중재ㆍ순손ㆍ유성ㆍ처강ㆍ효우, 군사 황치(黃緻)ㆍ신극장(辛克長)에게 뇌물을 주어, 중재의 아들 호인을 시켜 옛 종 정유재(鄭有才)와 그의 무리 범삼(凡三), 석정(石丁), 석구지(石仇知), 범이(凡伊) 및 풍산(豐山) 관노(官奴) 이동(李同)과 공모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하고는 맹세문을 작성하여 중재와 함께 서명하고 맹세한 사실을 중재 등이 모두 초사(招辭)에서 승복하였으므로, 마땅히 참하여야 됩니다.” 하여, 따랐다.
환관(宦官) 김연(金衍), 환관 한숭(韓崧)
계유정난 때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고 나서, 연과 숭은 주상의 곁에 있음으로 해서 그때는 아뢰지 못하고 있다가, 뒤에 환관 전균(田畇)을 시켜서 아뢴바 연과 숭을 죽이게 되었다.
환관 엄자치(嚴自治), 환관 윤기(尹奇), 환관 김충(金忠), 환관 이귀(李貴), 환관 인평(印平), 환관 유대(柳臺) - 대(臺)는 대(垈)로도 씀 -, 환관 박윤(朴閏) - 윤(閏)은 윤(潤)으로도 씀 -, 환관 길유선(吉由善), 환관 조희(曺煕), 환관 서성대(徐盛代) - 서성(徐盛)으로도 씀 -, 환관 김득성(金得誠), 환관 김득상(金得祥), 환관 최찬(崔粲) - 찬(粲)은 찬(璨)으로도 씀 -
을해년(1455, 단종3)에 빈청이 아뢰기를, “자치 등은 국정에 간여하여 조정을 능멸하였고, 기는 영(瓔)의 환관이므로 궁중에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최찬 등과 같은 하찮은 환관도 다 조정을 업신여기며 횡행한 죄가 있습니다. 모두 축출하소서.” 하였다. 자치, 기 등을 모두 나포하여다 의금부에 내려 보냈는데, 기 등은 모두 곧 사사하고 자치는 고신(告身)을 빼앗고 가산을 적몰한 다음 제주도의 관노로 이속시켰는데, 가는 도중 길에서 죽었다.
맹인(盲人) 지화(池和) - 지신화(池信和)로도 씀 -
계유년(1453, 단종1)에 의정부가 아뢰기를, “화는 용(瑢)을 위하여 운명을 점쳐서 망녕된 말을 하였으므로 목을 베어야 합니다.” 하였다.
맹인 나가을두(羅加乙豆)
병자년(1456, 세조2)에 봉보부인(奉保夫人) 이씨(李氏)를 위하여 상왕의 복위를 점쳤다가 일이 발각되어 기시(棄市)되었다.
이오(李午), - 아들 - 내근(乃斤)ㆍ내철(乃鐵), 김소동(金小童) - 동(童)은 동(同)으로도 씀 -
병자년(1456, 세조2)에 오가 그의 아내 봉보부인 및 여종 아가지(阿加之)와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고 조사(詔使)에 연회를 베풀던 날 내상고(內廂庫)의 칼을 가져다 몰래 돌중(乭中)에게 주어 권자신(權自愼)에게 건네주었다가 일이 발각되어 모두 기시(棄市)되었다.
반인(伴人) 김유덕(金有德), 김대정(金大丁)
유덕은 정효전(鄭孝全)의 반인으로서 효전의 역모를 알고 있은 죄로 죽었고, 대정은 안평대군이 난을 일으키자 성녕대군(成寧大君)의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성녕의 부인 성씨(成氏)가 부인 옷을 입혀 병풍 뒤에 숨겨 둔 것을 붙잡아다 목을 베었다.
전농시(典農寺)의 종 목효지(睦孝智)
을해년(1455, 단종3)에 조유례(趙由禮) 등과 함께 죽었다.
금성궁(錦城宮)의 종 정유재(鄭有才), 금성궁의 종 범삼(凡三), 금성궁의 종 석정(石丁), 금성궁의 종 석구지(石仇之), 금성궁의 종 범이(凡伊), 순흥(順興)의 군사 황치(黃緻), 순흥의 군사 신극장(辛克長)
정축년(1457, 세조3)에 금성대군의 사건이 발각되어 모두 연좌되어 죽었다
궁녀(宮女) 자개(者介)
성(姓)은 박씨(朴氏)이며 내직(內職)의 상궁(尙宮)이다. 양빈(楊嬪)이 궁중에서 축출되고 나서 단종이 잊지 않고 그리워하며 상궁으로 하여금 찾아가 보게 하였으나, 이때 양빈이 이미 떠날 채비를 다 갖추고 있어서 승지 강맹경(姜孟卿)이 아니 된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을해년(1455, 단종3)에 양빈과 함께 죽었다.
궁비(宮婢) 아가지(阿加之)
병자년(1456, 세조2)에 그의 가장 이오(李午)와 같이 죽었다.
궁비(宮婢) 불덕(佛德), 무녀(巫女) 용안(龍眼), 무녀 내은덕(內隱德), 무녀 덕비(德非)
병자년(1456, 세조2)에 나가을두(羅加乙豆) 등과 같이 죽었다.
이상의 사람들은 산원(散員), 환관(宦官), 맹인(盲人), 군노(軍奴), 여인이다. 사알(司謁), 기관(記官), 품관(品官)을 원래 비원(卑員) 잡직(雜職) 아래에 붙여서 조사(朝士)의 끝 환관의 앞에 배열한 것은 내외(內外)의 분별을 두자는 뜻에서이고, 맹인(盲人), 고사(瞽史), 몽수(朦瞍)는 예전에도 관직이 있었을뿐더러 서운관(書雲觀), 장악원(掌樂院)은 지금도 유품(流品)에 속하므로 또 환관의 아래에 배열하였으며, 액례(掖隷), 반령(伴伶)은 군노(軍奴), 여인(女人)의 아래에 저대로 하나의 지방을 만들었다. 모두 50인이다.
상고한 바, 김대정(金大丁)은 《혼기》에는 김연(金衍)의 아래에 배열되어 있고, 《노릉지》에는 드디어 김연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나라의 풍속에 엄인(奄人)이 아들을 취할 적에는 반드시 엄인으로 취하니, 대정이 만약 과연 연의 아들이라면 대정 역시 엄인일 것이므로, 당연히 환관의 부류에 배열하여야 한다. 그러나 실록에 의거해 보면 대정의 죽음이 안평대군의 무리에 가담하였기 때문이지, 연의 자식으로서 연좌된 것은 아니니, 그가 연의 아들도 아니고 엄인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영인(伶人) 김대정이 거문고를 잘 탔는데, 일찍 죽음을 당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능하 (역)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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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배향할 여러 신하를 취사할 적의 수의(收議)에 대한 비답 수의(收議) 내용도 붙임
지난날 우리 성조(聖祖)의 전교에 육신의 사당을 본릉의 홍살문 안에 그대로 두라고 하셨으니, 어찌 거룩한 일이 아니랴. 이에 배향의 예전(禮典)을 거론하여 삼가 조종(祖宗)의 뜻을 계승하는 일단에 붙이고자 하노라. 대저 제단의 제사와 묘정(廟庭)의 배향은 진실로 차이가 있으나, 제향을 하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두 대신(大臣)의 의계(議啓)에서 어떤 이는 단출한 것이 고귀한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이루 다 시행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데, 다들 정중을 기하자는 뜻에서 나온 주장들이므로, 지금 취사하는 과정에 있어서 당연히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자로서 그 행적이 국승(國乘)과 《능지(陵志)》에 나타난 자로 귀결 지어야 한다. 이를테면 육종영(六宗英)과 오의척(五懿戚)과 삼상신(三相臣)과 삼중신(三重臣)과 양운검(兩雲劍)과 육신(六臣) 및 그들의 아버지 또는 아들 중 아주 뛰어난 자와 허후(許詡) 및 허조(許慥), 박계우(朴季愚), 문경공(文敬公), 문헌공(文獻公)의 아들 및 손자로서 아주 남다른 자와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등이다. 이상 31인을 배향의 대상으로 정하여 제사 의식에 축문을 넣을 것이며, 이 밖에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채 수사(收司)에 연좌된 사람은 다시금 참작하여 따로이 제단을 설치하는 조처가 있어야 옳은바, 대신들의 의견이 참으로 그럴듯하다. 유(壝)는 같이 하고 선(墠)은 따로 한 민충단(愍忠壇) 등의 여러 제단의 사례가 바로 이것이라고 하니, 이를테면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 조수량(趙遂良) 등 12인과 수사에 연좌된 의춘군(宜春君) 등 224인은 별단(別壇)에 제사 지내도록 하라.
아, 죽음을 무릅쓰고 의리를 다하여 송종(送終)의 일에 진력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뿐이다. 절의로 죽은 사람의 대열에 들어 있지 않다 하여 어찌 차마 이 사람만을 배향에서 빠뜨릴 수 있겠는가. 김 문정공(金文正公), 송 문정공(宋文正公)을 묘정(廟庭)에 추가로 올린 것도 바로 확실한 전거를 원용하여서인 만큼, 증 참판 엄흥도(嚴興道)는 31인의 위차(位次) 다음에 넣도록 하라. 또 이를테면 고(故) 처사 김시습(金時習), 태학생 남효온(南孝溫)은 세속을 떠나 자정(自靖)하여 몸을 맑혀 더럽히지 않았으니, 그들의 청표(淸標)와 고수(苦守)는 백세(百世)를 감화시키고 권려할 만한데도, 모두 이 사당의 제향 대상에서 빠졌으니, 이는 미처 생각지 못한 아주 큰 결례이다. 두 신(臣)을 일체로 창절사에 배향할 것을 예조에 알리라.
부(附)원임 제학(原任提學) 판부사(判府事) 이복원(李福源)의 의계(議啓)
단종 때 절의를 지키다 죽은 여러 신하들을 제단을 설치하여 제향하라는 분부는 바로 위로 영혼을 위로하고 아래로 인륜을 부지하려는 거룩하신 성덕(聖德)과 지극하신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므로, 성인(聖人)이 의리를 일으켜 세웠던 그 예(禮)는 백세를 두고 영원히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의 절의 역시 모두 해와 별같이 환히 드러난 이상 그에 대한 취사(取捨)야말로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만, 배향의 예전(禮典)은 지극히 엄격하고 지극히 중대한 것입니다. 이번의 분부가 비록 묘정(廟庭)의 배향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나, 증직과 시호를 내려 사원(祠院)에 배향하는 일과 비교하여 볼 때 그 의의나 일의 성격이 본래부터 같지는 않습니다. 조정에 나온 적도 없고 작명(爵名)도 받은 적이 없는 자는 아무리 그 행적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다시금 더 헤아려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엄흥도 한 사람으로 말한다면 절의를 다하여 매장한 일은 조정에 나온 사람과 다를 것이 없고, 가족을 돌아보지 않고 모험을 한 일은 작명을 받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니, 육신의 대열에 넣는다 하여도 조금의 손색이 없습니다만, 대저 세상에 보기 드문 예전이란 단출한 것이 고귀한 법입니다. 충성을 다하여 절의에 죽는 것이 최상이고, 몸을 맑혀 의리를 지키는 것이 그다음이며, 수사(收司)에 연좌되어 함께 죽은 것이 또 그다음이므로, 단출하면 그것이 더욱 빛나게 되고 확대되면 간혹 근엄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람들을 따로 한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하는 일은 그 의리가 표창이나 다름없고, 은전이 측은히 여김에서 나온 것인 데다 또 이미 배향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사람의 많고 적음은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부(附)원임 제학(原任提學) 좌의정(左議政) 채제공(蔡濟恭)의 의계(議啓)
성상의 마음이 육신의 충절에 흥감하신 나머지 당시 절의를 지킨 여러 신하들에게 인정이 하도 끌리시어 능소(陵所)의 홍살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한식(寒食) 때에 일체로 제사를 올리라고 특별히 분부하신 일은, 그 예전(禮典)으로 본다면 그저 한때 의리를 일으켜 세우는 예라고 하겠으나, 사안으로 본다면 백대의 풍성(風聲)을 심을 수 있어 간책(簡冊)에 실려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어찌 신들의 마음으로만 흠송하며 찬탄하고 말 일이겠습니까. 내려 주신 세 권의 책을 신이 상세히 검토한 바, 그중 배향하기에 합당한 사람은 성상께서 친히 초록하시어 마치 금 저울로 물건을 달아 나눈 것과 같이 조금의 편차도 없어서, 되풀이하여 참고하여 보아도 꼭 들어가야 할 사람으로서 들어가지 않았다거나 들어가지 않아야 할 사람으로서 들어간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어떻게 의견을 내어 가부를 논할 수 있는 문제이겠습니까. 그 밖의 사람들을 하단(下壇)을 따로 설치하는 일의 질문에서는 측은히 여기고 포장을 함에 있어 혹시라도 누락될 것을 두려워하신 성상의 마음을 우러를 수 있을뿐더러, 세 책에 기록된 내용을 보니 여러 사람들이 전왕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죽음도 달게 받아들인 자취가 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백세의 뒤에 그 누가 측은히 여길 만하고 우러를 만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수효는 많고 그 자취는 소략하여 만약 일례로 상항(上項)의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배향한다면 혹시 예(禮)가 번쇄하게 되는 혐의가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일찍이 영남을 오가며 선배의 유적을 대략 알게 되었습니다만, 대개 금성대군이 화를 당한 일이 순흥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당시 인근 고을의 예법을 잘 지킨 사람으로서 종신토록 저절로 금고되어 북으로 대궐을 향할 길이 막히어 동으로만 머리를 돌린 자가 이따금씩 있었습니다. 지금 그 자손들이 만약 조정에서 시행하는 희대의 은전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뒷날 연로(輦路)의 상언(上言)은 갈수록 더 분분하여질 것이고, 시행을 하려 하여도 이루 다 시행할 수가 없게 될 것이 적이 걱정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번에 초록한 것으로 잘라서 한계를 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능하 (역)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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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端宗) 때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의 배향에 대한 교서
육신(六臣)의 일은 감히 소상히 밝히지는 못하겠으나, 세조께서 내리신 교서에서 “후세의 충신이다.” 하였고, 또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봉호) 집의 일을 논하면서, “난신(亂臣)으로 논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장하도다, 그 훈모(訓謨)여. 일성(日星)처럼 환히 빛나 권도(權道)를 달관하고 경법(經法)을 부지한 성인의 깊은 뜻을 우러를 수 있으니, 이것을 선양하고 발휘할 자야말로 어찌 후인인 내가 아니겠는가. 지난번 연로(輦路)에 민절사(愍節祠) 앞을 지나다가 끝없이 감회가 일어나서 예관을 보내어 유제(侑祭)하였다. 이어 금성대군 등 여러 사람을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에 추가 배향하고 싶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명산에 비장하여 둔 사책(史冊)들을 받들어 상고하도록 한바, 사관이 복명하던 날 강원도 관찰사가 자규루(子規樓) 옛터의 형지(形止)를 찾았다고 계문(啓聞)하였다. 공교롭게도 일이 일시에 이루어져서 마치 오늘날을 기다렸던 것처럼 되었으니, 이치에는 거짓이 있지 않구나. 아, 기이하고도 이상하도다. 다시금 생각건대 세상에서 일컫는 생육신(生六臣)과 오종영(五宗英)의 위충(危忠)과 대절(大節)은 모두 백중(伯仲)을 가릴 수 없어 배향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그 취사(取捨)를 쉽사리 할 수 없고 보면, 따로이 예법에 없는 예를 찾아서 예법에 합치시켜 시행하는 것이 역시 좋지 않겠는가. 지난 숙종 무인년(1698, 숙종24) 장릉을 복위할 적에 조정 신하들이 육신의 사당이 정자각(丁字閣)에 너무 가깝다고 말하므로, 두보(杜甫) 시(詩)의, “무후의 사당은 영원히 가까이 있도다.[武侯祠屋長隣近]”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헐지 말라고 명하였으나, 거센 반대 논의로 인하여 마침내 옮기고 말았다. 이것이 어찌 모자라는 처사이자 잘못된 전례(典禮)가 아니었겠는가. 원혼을 기억하는 제사는 동학사(東鶴寺)의 전례를 취하고 제단을 설치하는 제도는 달천(撻川)의 제도를 본떠서, 당시 절의를 다한 사람들을 합쳐 하나의 위판(位版)을 만든 다음, 본릉의 홍살문 밖으로 모시고 가서 땅을 쓸고 자리를 잡아, 매년 한식(寒食)에 제향을 하되, 고을 원으로 하여금 집 한 칸을 세워 위판을 간직하여서 일체로 제사 지내는 이 뜻을 부치도록 하노라.
아, 예가 인정에서 연유하는 이치는 귀신이나 사람이나 차이가 없는 만큼, 이제 저 열렬한 정령(精靈)들의 없어지지 않는 억울한 넋이 영원히 귀의할 곳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삼가 생각건대 장릉의 영혼 역시 오르내리실 적에 반드시 제사 올릴 때의 향내를 맡고 마냥 기뻐하실 것이다. 이번의 일이야말로 대체 누가 근거 없다고 말하겠는가. 본도 및 예조로 하여금 이것에 비추어 거행하도록 하라.
ⓒ 한국고전번역원 | 김능하 (역) |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