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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1908∼1953, 서울)
임화는 서울 동숭동 낙산 아래에서 1908년에 태어났다. 청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그의 가정은 파산 상태에 있었다. 특히 어머니의 이른 죽음은 그에게 정신적 상흔을 깊이 남긴다. 그의 시에 두드러지는 여성 화자의 목소리는 모성성에 굶주린 인간 내면에 가득 쌓여 있는 균열된 말이며, 그 말이 여성화자의 탈을 쓰고 나온 것이다. 그는 보성고보를 2학년에 중퇴하면서 평생 정신적 유목민으로서 살아갈 계기를 얻는다. 당시 보성고에는 동기로 이상, 이강국, 이헌구 등이 있었고, 조중군, 윤기정, 김기림 등과는 선후배 사이였다. 이강국은 임화가 숙청당했을 당시에 남로당파로 몰려 같이 숙청을 당하였고, 조중곤과 윤기정은 카프 시절의 동지였다. 특히 윤기정은 함께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김남천은 "보성고보 학모에 반들반들하게 면도를 하고 휘파람을 불며 다니던" 임화의 이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임화에게 책은 일종은 `존재의 집`과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인, 영화인, 평론가, 혁명가의 다중적인 얼굴을 하면서도 시대의 한가운데를 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접한 책과 독서 지식 때문이었다. 빅토르 위고, 베를렌, 칼 부세를 읽었고, 아리시마 다케오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탐미적 소설에도 접근했다. 크로포트킨의 『지식청년에게 고함』,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등의 사회서적과 철학서도 읽었다. 그 무렵 고아나 다름없는 임화를 받아들인 것은, 그보다 7년 연상이며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박영희였고, 나중에는 박헌영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박영희의 집에 기식하면서도 그 방자함과 방탕함을 거리낌없이 드러내었다. 임화는 박영희를 `좋은 스승`으로 따랐다고 하지만, 실제로 박영희의 집에 기식하면서 그가 보인 행태는 분명 불량끼 가득한 소년의 그것이었다. 밥상에다 담뱃재를 털어놓거나 담배꽁초를 버리는 것은 예사였고, 하루 종일 방에서 뒹굴거리면서 밥상 한 번 들고 나오는 법이 없었다. 박영희는 이 불량한 소년 임화 때문에 식솔들로부터 끝없이 불평을 들었다. 끝내는 사람 좋은 박영희도 어쩔 수 없었던지, 어떻게 하면 이 불량 소년을 쫓아내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지우인 김기진에게 7원을 빌리고 거기에 자신의 돈을 보태 도쿄까지 가는 노자를 임화 손에 쥐어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열심히 사숙하고 돌아온 그는 곧바로 박영희, 김기진 등 문학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구카프계를 처단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06.23. 21:12
임화 지음, 이형권 엮음 -『임화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저자 : 임화
저자 임화(林和, 1908∼1953)는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다. 그가 사용한 필명은 임화 외에 성아(星兒), 철부(鐵夫), 김철우(金鐵友), 임유(林唯), 청로(靑爐), 쌍수대인(雙樹臺人), 다임다(DA林DA), 임다다(林DADA) 등이 있다. 1926년에 시 작품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고, 카프(KAPF)에 가입해 이후 우리나라 프롤레타리아문학 활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1927년에는 ‘임화’라는 대표적인 필명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다이즘적인 성격의 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1929년에 동경으로 가서 김남천, 안막 등을 만나 훗날 카프를 장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이른바 제3전선파로 불리는 일본 유학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카프 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도일을 전후해 단편 서사시 양식을 개척하는데, 서사성(사건적 소재)ㆍ일상성(소박한 시어)ㆍ대중성(낭독의 용이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단편 서사시는 당시 뚜렷한 양식적 특성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던 카프 시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 이 무렵 임화는 영화에도 관심을 보여 <유랑>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한편 <혼가>를 직접 제작하여 개봉하기도 한다. 그는 계급주의 이념과 서정성이 절실하게 조화를 이룬 수준 높은 시 세계를 보여준 첫 시집 《현해탄(玄海灘)》(1938)을 발간하고, 《개설 신문학사》(1939)를 집필해 우리나라 최초로 체계적인 방법론을 갖춘 근대문학사를 탄생시킨다. 일제 치하에서 가장 방대하고 수준 높은 평론집인 《문학의 논리》(1940), 영화 관련 저서인 《조선영화연감》(1944)과 《조선영화발달사》(1944) 등을 집필하기도 한다. 그 외에 제2시집 《찬가(讚歌)》(1947)와 시선집 《회상시집(回想詩集)》(1947), 네 번째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 등을 발간했다. 1953년 8월 6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부에서 미제의 고정간첩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역자 : 이형권 (엮음)
이형권(李亨權)은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 현대시의 이념과 서정》, 《현대시와 비평정신》,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 《사고와 논증》(공저), 《좋은 논문 쓰기》(공저) 등이 있다. 문학비평가로서 문예지 《시작》의 편집 주간, 시 전문지 《애지》와 《시인시각》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무엇 찾니
지구(地球)와 ‘빡테리아’
담(曇) ― 1927(一九二七)
네거리의 순이(順伊)
우리 옵바와 화로(火爐)
우산(雨傘) 밧은 ‘요꼬하마’의 부두(埠頭)
양말(洋襪) 속의 편지
제비
암흑(暗黑)의 정신(精神)
다시 네거리에서
꼴프장(場)
야행차(夜行車) 속
옛 책(冊)
일 년(一年)
적(敵)
해협(海峽)의 로맨티시즘
하늘
지상(地上)의 시(詩)
안개 속
바다의 찬가(讚歌)
내 청춘(靑春)에 바치노라
새 옷을 가라입으며
지도(地圖)
구름은 나의 종복(從僕)이다
너는 아직 어리고
다시 인젠 천공(天空)에 성좌(星座)가 있을 필요(必要)가 없다
밤 갑판(甲板) 위
상륙(上陸)
현해탄(玄海灘)
해상(海上)에서
행복(幸福)은 어디 있었느냐?
황무지(荒蕪地)
한 잔 포도주를
자고 새면
학병(學兵) 도라오다
3월 1일이 온다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
제사(祭詞)
기(旗)ㅅ발을 내리자
9월 12일
계관시인(桂冠詩人)
밤의 찬가(讚歌)
우리들의 전구(戰區)
통곡(慟哭)
너 어느 곳에 있느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 <해협(海峽)의 로맨티시즘>
藝術, 學問, 움직일 수 없는 眞理…
그의 꿈꾸는 思想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東京,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았을 때,
나의 슬픈 故鄕의 한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靑年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래었다.
● <학병(學兵) 도라오다>
외로움이
주검보다 무서운 밤
그대들은 敵과
敵의 敵이 널린
망망한 들 가에
奇蹟처럼
위테로이 서서
絶望 가운데
勇氣를 깨닷는
祖國의 속삭임을
들었으리라
출판사 서평
임화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계급주의 이데올로기만을 앞세우던 당시의 카프 시단에서, 서정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시를 창작해 카프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만큼이나 그의 작품 또한 다양하게 변모한다. 여기에 실린 시들을 통해 임화의 폭 넓은 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1926년부터 발표된 임화의 시는 신경향파 시가 간직했던 관념적 폭로성과 구호조의 수사를 극복하고, 계급주의 사상을 기조로 한 정치적 신념을 감동적인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식민화와 현대화가 중첩되는 한국적 특수성에 대한 성찰,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비판, 인민 대중을 사회주의 사상으로 계몽하려는 목적의식 등은 임화 시가 지향한 도드라진 업적이다. 이를 통해 임화는 한국시의 현대성을 제고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당시는 전통적 정서를 현대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 현대시의 정신사적 획을 그은 《님의 침묵》(1926), 정지용의 모더니즘 시가 발표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임화 시의 리얼리즘적 현대성은 김소월의 전통 정서의 현대성, 정지용의 모더니즘적 현대성, 한용운의 정신사적 현대성 등과 함께 한국 시의 현대성을 확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임화 시는 세 단계의 변모 과정을 겪는다. 첫째, 초기 시(카프 해산 이전까지의 시)는 내면적 자기 성찰과 다다이즘적 실험 정신을 보여준다. 전자는 <서정소시>, <향수> 등에, 후자는 <설(雪)>, <화가의 시>, <지구(地球)와 ‘빡테리아’> 등에 드러난다. 하지만 임화는 곧바로 일제 치하의 폭압적 시대 현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시편들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담(曇) ― 1927(一九二七)>에서 비롯된 계급주의 시학은 <네거리의 순이(順伊)>, <우리 옵바와 화로(火爐)>, <우산(雨傘) 밧은 요꼬하마의 부두(埠頭)> 등의 단편 서사시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서사성을 기반으로 일상성과 인민성을 지향하면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았던 단편 서사시 양식은, 관념적 서술 시로서의 무미건조성을 보여주는 데 급급했던 당시의 다른 카프 시인들의 시에 비해 방법론적 우위성을 확보했다.
중기 시(카프 해산 이후 광복 이전까지의 시)는 초기 시에 드러났던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완전히 일탈하지는 않은 채 두 방향으로의 변화를 겪는다. 하나는 <세월>, <해협(海峽)의 로맨티시즘>, <홍수 뒤> 등에서처럼 낭만적 세계관이나 향수 의식 쪽으로, 다른 하나는 <바다의 찬가(讚歌)>, <통곡(慟哭)>, <자고 새면> 등에서와 같이 역사적 암흑기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자각으로 나아간다. 이에 따라서 이 시기의 시편들은 초기 시에 비해 현실 비판의 강도가 현격히 약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두 차례에 걸친 카프 맹원들에 대한 검거 선풍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집요한 문화적 탄압과 깊이 관계된다. 임화는 세계문학사에서도 흔치 않은 복자(伏字)의 시대에 시적 화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즉 일제의 철저한 검열과 탄압 아래서 최소한의 문학 행위를 유지하기 위해 주제적 변모를 시도했던 것이다.
후기 시(광복 이후의 시)는 광복과 전쟁의 시대를 맞이해 시대 현실에 다시 밀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제 치하의 기나긴 질곡의 시대를 밀고 나와 맞이했던 광복과, 곧이어 벌어진 동족상잔의 육이오전쟁이 후기 시의 바탕이 된다. 이 시기 임화의 시는 두 방향으로의 시적 지향점을 갖는다. 하나는 <9월 12일>, <계관시인(桂冠詩人)> 등에서처럼 광복 직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자유 의지나 혼란스런 시대에 대한 비판 정신으로, 다른 하나는 <서울>,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등에서 보이듯이 6·25전쟁과 관련된 비극적 정서나 당파적 승전욕망으로 드러난다.
시대적 상상력과 이데올로기 외에도 임화 시는 문학성을 제고하기 위한 시적 표현이나 형상화 방법도 다양하게 활용했다. 그 구체적 양상으로 우선 주목해 볼 것은 소통 구조와 미적 거리 등의 형상화 기법이다. 소통 구조에서 임화 시에는 표면적 화자와 표면적 청자의 양상이 가장 많이 나타나면서 화자만 등장하는 형태인 본격적 독백 시나 화자와 청자가 모두 등장하지 않는 사물 시(이미지 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점은 임화가 시의 창작 과정에서 일련의 대화적 ·서술적 담화 구조를 선호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미적 거리는 ‘부족한 거리(대상의 주관화)’, ‘지나친 거리(극적 이야기의 제시)’, ‘적절한 거리(사건의 내면화)’ 등이 다양하게 활용된다. 또한 이미지, 비유, 상징 등의 표현 기법도 빈도 높게 활용했다. 비유는 비교적 간단한 형태인 직유를 자주 사용했으며, 은유는 기본형인 계사형과 조사 활용형인 동·속격 ‘의’형, 그리고 용언 활용형인 동사형을 빈도 높게 활용했다. 이들은 임화 시의 표현미를 고양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으며, 그의 사상 편향의 시 내용에 시성(詩性)을 부여하는 데에 일조를 했다.
인민항쟁가(人民抗爭歌) - 글 : 임화, 곡 : 김순남, 노래 : 제주 놀이패 '한라산',
혁명같은 삶을 살았던 시인 - 임화(林和)
김외곤(서원대 미디어창작과 교수, 문화와 나 2004 가을호)
도시의 가출아, 문학과 운명처럼 마주치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임화(1908~1953년) 처럼 문제적인 인물은 흔치 않다. 그는 열정적 낭만주의 시인이자 날카로운 안목을 소유한 문학 비평가였고, 독자적 문학론을 정립하고 우리 근대문학사를 정리한 이론가이자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 문학 운동 을 지휘한 실천가이기도 했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민족 문학론을 소리 높이 외친 문학 운동가였고 북한에 가서는 현실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만큼 문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임화는 1908년에 서울 낙산 아래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정 형편이나 가족 상황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다만 13세 때인 1921년에 보성중학에 입학한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해방이후 정치적 운명을 같이하는 이강국(李康國, 19061955년)을 비롯하여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주자 이상(李箱, 1910~1937년), 해외 문학파의 일원인 이헌구(李軒求, 19051982년), 친구로서 카프 (KAPF) 가입을 권유한 윤기정(尹基鼎, 1903~1955년)등과 선후배 사이였지만,
17세 때인 1925년에 이르면 보성중학마저 중도에 그만 두고 가출을 감행한다.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가정의 파산이 중요한 이유였다.
가출 소년인 임화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근대화정책에 따라 한창 근대 도시로 성장하던 경성(서울)을 무대로 자신의 젊음을 불태웠다.
그는 교과서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당시 유행하던 조타모(鳥打帽)를 사 쓰고 일본인 거주지인 본정 본정(本町)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곳의 서점에서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잡지『개조(改造)』와 크로포트킨(P. A. Kropotkin, 18421921년)의 저작 등을 구입해서 읽는데, 이것이 임화가 문학 청년으로서 내디딘 첫 걸음이었다.
이후 그는 리카도, 마르크스, 니체, 괴테 등의 저작을 섭렵하기도 하고 미래파나 표현파에 빠져 그림습작을 하기도 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다이즘(dadaism)에 경도되어 실험적 시를 창작하는시인이 되기에이른다.
이러한 임화의 성장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과거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전통적 문학에는 관심이 없었고 처음부터 서구의 근대적 문학에 심취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근대화되어 가던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부모의 품을 떠나 거리를 배회하는 스트리트 보이(street boy)가 되었기 때문에 가부장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과거의 유산 따위를 우습게 여기면서 근대적 유행에 민감한 인간으로 성장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가출 이후 별다른 거부감없이 당시 유행하던 전위적 문학에 기울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문학 진영의 젊은 맹장
▶ 첫번째 아내 이귀례. 이귀례는 카프 도쿄 지부를 이끌던 이북만의 여동생이다.
임화는 도쿄에서 식객노릇을 하다가 이귀례를 만났다
얼마 동안 다다 풍의 실험적 시를 쓰던 임화의 의식 속에 새로이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은 사람은 사회주의 문학단체인 카프를 이끌 던 박영희(朴英熙, 1901~?)이다.
어린 시절부터 길러온 예민한 감각으로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의 등장을 알아차린 임화는 1927년 무렵 박영희의 영향 아래 문학 활동의 일대 방향 전환을 도모한다.
다다이즘 계열의 전위 시인에서 사회주의 혁명 시인이자 문학 비평가로 거듭난 것이다. 얼마 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북만(李北滿, ?~?)이라는 또 다른 지도자를 만나 사회주의 연극 운동을 시작하는데,
그러는 동안에 조직 활동도 익히면서 점차 강경론자가 되어 갔다. 한편 길지 않았던 동경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귀국선에 올랐을 때, 그의 곁에는 극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북만의 누이동생 이귀례(李貴禮)가 서 있었다.
▶ 카프의 김유영이 감독한 영화 '혼가'(昏街)에 주연으로 출연한 임화.카프에 가입한 무렵
그는 조산영화예술협회에 참가하면서 '유랑'(流浪)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에 대한 임화의 관심은
현대 전위예술에 대한 연장이었다.
귀국 후에 임화가 살았던 삶은 그야말로 치열한 투쟁과도 같았다.
그는 영화〈유랑〉과〈혼가(昏街)〉(1928년)의 주연 배우로서 활약하였고「우리 오빠와 화로」나「네 거리의 순이」(1929년)
등을 통해 ‘단편 서사시’ 라는 새로운 시 형식을 창조해 내었으며, 김기진(金基鎭, 1903~1985년) 등과 벌인 대 중화 논쟁을
통해서는 비평가로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카프를 책임지는 서기장의 직책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와중에 사랑하는 딸 혜란을 얻었지만 동시에 폐병이라는 지병도 얻었고, 카프 제1차 검거 사건(1931년)으로 일본 제국주의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두 번에 걸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카프의 활동이 침체기에 접어들던 1930년대 초반에 그는 조직의 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했는데,
김남천(金南天, 1911~1953년)과 벌인‘「물!」논쟁’등 창작 방법 논쟁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논쟁의 과정에서 그는 일본과
소련의 이론을 직수입하지 않고, 그 대신 조선의 현실을 문제 삼으면서 자생적 리얼리즘 문학 이론을 수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불꽃 튀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상황은 그가 바라는 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사상 탄압이 더욱 강화되어 스승이었던 박영희를 비롯한 많은 동료들이 전향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개인적으로는 이귀례와 헤어지고 폐병이 도져 마산으로 요양을 떠나야만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식민지 지식인의 좌절과 오욕
▶ 임화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소설가 지하련(池河連)
마산에서 문학 소녀인 이현욱(필명 지하련)과 함께 돌아온 임화는 카프 제2차 검거 사건(1934년)으로 거의 전 동맹원이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듬해에 김기진, 김남천과 합의하여 마침내 카프 해산계를 종로 경찰서에 제출하게 된다.
카프 해산 이후에도 그는 시인으로서, 문학사가로서, 비평가로서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이 시기에 남긴 문학적 성과는
오늘날까지도 그 평가를 둘러싸고논란이일고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식민지 문학자인 임화에게 주어진 가장 커다란 임무는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방도를 찾는
것이었는데, 처음부터 일본을 통해 ‘근대성’개념을 수용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했던 그에게 그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근대적 문물로써 일본을 넘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일본 열도의 긴 그림자를 바라보는 게다.
흰 얼굴에는 분명히
가슴의‘로맨티시즘’이 물결치고 있다.
예술, 학문, 움직일 수 없는 진리 …
그의 꿈꾸는 사상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동경(東京),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 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청년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레이었다.
- 임화, 「해협의 로맨티시즘」
▶1938년에 나온 임화의 시집 '현해탄'. 화가
구본웅이 표지그림을 그렸다. 거친 붓터치로
묘사된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과 사나운 물결
이 임화를 휩쓸었던 시대를 상징하는 듯 하다.
이 시에 등장하는 청년처럼 임화를 포함한 식민지 조선의 많은 젊은이들이 현해탄을 건너가 근대적인 모든 것을 배워 오고자 했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임화는 그의 대표작「현해탄」(1936년) 에서“어떤 사람은 건너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 어떤 사람은 돌아오자 죽어갔다 / 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 / 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에 울었다”고 읊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보다 먼저 근대 국가를 형성한 일본에 대하여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가진 정신적 열등감을 오늘날‘현해탄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실 현재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임화가 추구하던 근대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그 콤플렉스가 쉽게 비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한편 임화는 개화기 이래의 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근대 문학이 근대 조선 사회를 토대로 하고 있지만 서구의 근대적 문학 장르를 이식하였다는 점을 밝혀낸다.
그리고 우리가 서구 문학을 직접 수입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경유하여 간접적으로 수입하였기 때문에 일본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문학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조선의 근대 문학이 일본을 통해 서구 문학을 받아들이면서 성립 되었다는 주장은 흔히‘이식 문학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이론적 비주체성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임화가 문학을 수입하는 주체로서 조선인이 보여준 능동적 역할을 언급하기는 하였지만, 궁극적으로서 구문학의 수입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에 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시 창작과 문학사 서술뿐만 아니라 비평 영역에서도 임화는 중요한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그의이론적 활동은 ‘주체재건론’으로 요약된다.
더 이상 사회주의적 문학 활동을 계속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전향마저 강요당했을 때 많은 수의 작가들은 자신의 신념을 잃어버린 채 이른바‘주체 상실’의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임화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 문학을 되살리기위해서는‘본격 소설’을 확립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서구적 의미의 완미(完美)한 개성을 지닌 인간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시대적 상황과 문단의 상황은 그로 하여금 본격 소설을 확립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세태 소설론, 통속 소설론, 생산 소설론 등을 내세우며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을 이어 간다.
파시즘의 물결이 더욱 높아져만 가던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임화는 고려영화사와 학예사에 깊이 관여 하면서 영화와 출판에 종사하였고, 어느 정도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에 부응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결국 자신이 모델로 생각해 왔던 근대적시민 문화를 식민지 조선에서 성취하려는 희망마저 포기하는 단계에까지 가게 된다. 그의 눈에는 서구 문명 전체가 히틀러의 파시즘에 굴복한 것으로 보였던것이다.
▲ 임화의 학예사에서 발행한 조선민요선으로 편저자가 임화로 되어있음.
열정의 불꽃이 다시 타올라 시들기 까지
해방이 되었을 때 임화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새나라만들기에 앞장섰다. 식민지시대에 거의 해체되다시피 한 문학 단체를 재정비하기 위해 해방된 지 이틀만에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했으며,
이어서 조선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에 임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식민지 시대에 변절 해버린 친 일 부르주아 계급으로는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진보적 지식인등을 아우르는 ‘인민’을 민족의 주축으로 삼아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일종의 계급 연합적 성격을 띤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그는 문학 활동에 못지 않게 정치 활동도 활발하게 펼치는데, 구체적으로 보성중학동창인 이강국이 사무국장으로 있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기획차장으로 활동하면서 박헌영(朴憲永, 1900~1955년)이 이끄는 남로당의 문화 정책 수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남로당의 활동이 불법화되자 박헌 영 등의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월북을 하게 된다. 그는 평양으로 가지 않고 해주에 머무르면서 제일 인쇄소를 거점으로 대남 활동에 종사하였다.
얼마 뒤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임화는 다시 고향인 서울로 내려와서 문화 공작을 하였다. 그 기간에그는 전선시를 묶어 마지막 시집『너 어느 곳에 있느냐』(전선문고, 1951년)를 출간하였는데,
바로 이 시집에 실린 시 때문에 그의 운명은 최후를 맞게된다. 주지하다시피전쟁이소강상태에이르렀을때북한에서는남로당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거니와, 임화가 창작한 전선시는 엄호석(嚴浩奭, 1912~1975년)으로부터 전쟁터에 나가있는 군인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비판을 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승엽(李承燁, 1905 1953년) 등과 함께 체포되었고, 북한정권전복음모와 간첩 행위 등의 혐의로 심문을 받았다. 안경알로 동맥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53년 8월 6일 임화는 이승엽 등과 함께 북한 최고 재판소 군사 재판부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월남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시체는 묻어주는 사람이없어 방치되었다고 하며, 처 지하련과 슬하의 자녀들도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임화가 살다간 삶의 역정은 격동기의 한국 근대사를 압축시켜 놓은 것처럼 굴곡 많고 험난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이루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삶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그가 고민했던 문제, 즉‘어떻게 하면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인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우리 앞에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 보다도 우리의 삶이 여전히 근대적 기반 위에 서 있고, 우리가 아직도 통일된 민족 국가를 이룩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김외곤 : 서원대 미디어창작과 교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현대 문학으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 근대 리얼리즘 문학 비판』, <한국 현대 소설 탐구>, <문학과 문화의 경계선에서>등이 있다.
임화 문학연구
김용직(임화문학연구, 세계사, 1991)
우리 현대사와 문학사에서 임화(林和)처럼 아픈 상채기로 열린 이름도 드물 것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갓 근대적 차원을 구축하기 시작한 1920년대 중반기에 시인으로 우리 문단에 등장했다.
이후 그는 외곬으로 좌파이데올로기에 매달린 가운데 전 문단을 제패한 듯 보인 카프에 관계하여 그 핵심적인 활동분자가 되었다.
그 무렵 그의 행동지표는 계급투쟁을 축으로 한 반제(反帝)·사회주의 문학건설 쪽에 놓여 있었다. 이런 임화(林和)의 행동은 당연한 사태의 귀결로 총독부 사찰진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끊임없는 감시 규제의 대상이 되었고 거듭
소환, 구금, 투옥에 처해진 바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임화(林和)는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 가장 핍박받는 예술가 또는 지식인으로 산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된 8·15를 맞고나서도 그런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8·15와 함께 총독정치는 패퇴하고 우리 민족에게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임화(林和)와 그가 신봉한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그것은 표면적인 자유, 해방의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8·15 후 일본의 총독정치를 청산시키기 위해 남쪽에 진주한 것은 미합중국의 군대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체제에 의해 38선 이남의 지배 통치가 이루어짐을 뜻했다. 임화(林和)와 그가 신봉한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그런 것은 투쟁, 격파해야 될 당면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곧바로 그 자신과 그가 규합한 문학, 예술인들을 동원하여 반미·반제투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그의 활동은 시와 비평, 논설을 통한 문예분야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때로 그 틈서리에는 직접적인 파괴행위도 끼어든 듯 보인다. 어떻든 임화(林和)의 이들 활동은 38선 이남의 통치세력인 미군을 격발,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과 그에게는 다시 소환·구금의 명령이 떨어지고 체포영장이 발부되기에 이르렀다.
연보에 따르면 1947년 임화(林和)는 그에게 떨어진 체포령을 피해서 38선을 넘어 월북의 길을 택했다. 북쪽에서 그는 다소간 그쪽 문학예술단체의 활동에도 가담한 바 있다.
그러나 거기서 그가 주로 관계한 것은 박헌영(朴憲永), 이승엽(李承燁)파의 일원으로 남쪽의 혁명투쟁을 지휘, 통솔, 선동, 조직하는 일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월북 후 임화(林和)는 주로 해주에 머물면서 대남공작에 목적을 둔 당기관지 "노력자"를 편집하는 일을 담당했다.
거기에 그는 수많은 선전·선동 논설과 시를 썼고 때로는 강연, 토론회를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말할 것도 없이 임화(林和)가 그 나름의 사명감에 입각해서 시도했을 것이며 거기서 보람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 사정이 감안된다고 해도 월북 후 그의 생활이 순편하고 안정되었다 볼 수는 없다.
한편 그들이 조국전쟁이라고 부른 6·25 동란은 임화(林和)에게 결정적 파국을 몰고 왔다. 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대부분의 북쪽 문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남침한 인민군을 따라 전선에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때 그는 최전방인 낙동강 전선에까지 이르렀고, 그후 인민군이 패주하게 되자 멀리 국경선을 넘어서까지 내쫓겼다. 그리고 1953년 8월 6·25 패전의 책임을 묻는 북쪽의 권력 다툼 틈바구니에서 처형되어버리는 것이다.
처형 당시 그에게 내려진 북쪽 사법당국의 죄목은 국가전복을 위한 테러행위와 미제의 고용간첩 노릇을 했다는 것이었다.
임화(林和)의 인간과 예술, 시를 다소간이라도 살핀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가지 사실에는 명백한 이야기가 성립될 것이다.
그것은 임화(林和)가 30년 가까운 동안 계급주의 유물사관의 신봉자였다는 점이다. 그런 그가 파당의 논리에 따라 북쪽의 집권
세력에 맞서려는 입장을 취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지 않다.
그가 20년대 중반 이래 외곬으로 믿고 추구해 온 것은 다름 아닌 사회주의사회의 찬란한 무지개였던 것이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어쩌면 6·25를 전후해서 북쪽 집권세력이 보여준 작태는 있을 수 없는 추태로 비쳤을 공산이 있다. 이에 그는 그들의 거세, 추방을 시도한 이승엽 일파의 기도에 동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보든 그가 미국의 고용간첩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그 자신이 범한 바 없는 죄목을 목에 차고 그것도 일제치하에서 애타게 외치고 바란 사회주의 조국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쪽에서 임화(林和)는 전혀 복권될 기미가 없다. 북쪽에서 나온 "조선문학사"는 이런 경우의 우리에게 좋은 증거자료가 된다.
이 문학사는 모두가 다섯 권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 셋째권이 일제시대의 문학사다. 그런데 여기서 임화(林和)는 전혀 시인으로 문제된 것이 없다. 다만 한두 곳의 문학론에서 그의 주장이 처음부터 반동패배주의의 본보기로 단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곧바로 얼마간의 물음을 던지도록 만든다. 대체 임화(林和)가 그렇게 믿고 추구하려던 시와 예술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그리고 그가 모든 행동의 구심점으로 삼은 이데올로기는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이었던가. 이제 우리가 시도하는 임화론(林和論)은 이런 각도에서 시작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재봉의 문학풍경 / 임화를 다시 읽는 이유
한겨레 | 입력 2008.04.11 19:16
임화를 다시 읽는다. 정치는 길을 잃고 문학은 다만 무력하기만 할 때, 요망하도록 어지러운 현실을 미학이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방치할 때, 임화의 묵은 글들에서 지침을 얻는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에 태어나 불꽃같은 생애를 살다가 사십대 중반에 허리가 꺾인 사내. '조선의 발렌티노'에서 '미제의 스파이'까지 가파른 운명의 널뛰기 속에서 시종 문학과 비평의 줏대를 세우고자 애썼던 그 사람, 임화.
국문학자 겸 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숙명여대)의 연구서 < 횡단과 경계 > (소명출판)의 전반부에는 임화를 다룬 논문이 넷 실려 있는데, 거기 인용된 임화의 문장들은 흡사 21세기 벽두 지금의 한국 문학과 문단을 겨냥한 듯해 서늘한 독후감을 남긴다.
"문학은 행동의 광장에서 예술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실상은 문단으로 돌아왔음에 불과하였다. 이리하여 신문학사상 드물게 보는 너무나 문학적인 문단의 시대, 실상인즉 문단적인 문학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 문단적으로 되면서 불어 내어던진 것은 이른바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생활도 내어던졌고, 중요한 것은 문학에서도 떠나오기 시작한 것이다."('문단적인 문학의 시대')
"그러나 평단의 최근 추세를 본다면 평론이나 비평이 작품과 작가를 알게 된 대신, 작품과 작가 이외의 아무것도 몰라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작품과 작가에 관한 지식만으로 비평은 과연 건전히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비평의 고도(高度)란 것은 본디 작품과 현실 양자의 위에 있는 것으로, 현대 비평은 결국 양각(兩脚)에서 일각을 버리고 외다리로 걷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현대 비평과 평론의 성격을 논함에 무엇보다도 사회적, 정치적 내지는 사상적 고도의 상실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비평의 고도')
문학이 문단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 버림으로써 이념과 생활은 물론 본디 의미의 문학 자체로부터도 멀어지게 된 사태란 지금의 한국 문학에 대해서도 말해 주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작품과 작가에 매몰되어 그 바깥의 현실을 몰각하고 사회성 및 정치성, 나아가 사상의 차원에 미달하는 평론의 실상에 대한 지적 또한 아프게 들린다. 임화는 다른 글들에서도 "비평이 작품을 분석하는 일련의 기술로 떨어지는 것이 비평의 시대라고 불러 본 현대의 특징"('비평의 시대')이라거나 "조선 신문화의 전설이었던 계몽적 혹은 이상적 성격이 전부 시장 확대의 결과라고는 할 수 없어도 좌우간 점차로 희박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문화기업론')이라는 식으로 권력과 자본의 그늘 아래 얌전하게 순치되어 버린 문학과 비평의 왜소화를 개탄하고 있다.
"임화의 비평과 산문에는 지금 이 시대 중요한 비평적 쟁점의 대부분이 담겨 있다. 가령, 역사성과 정론성을 상실한 당대 문단에 대한 예리한 성찰, 작품에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밀착한 해설 비평에 대한 비판, 공론성을 상실한 제도화된 비평의 문제, 미디어에 종속된 문학과 비평의 위상, 문화적 획일주의에 대한 저항, 논쟁이 사라진 시대에 대한 문제제기 등등…"
권성우 교수가 밝힌, 임화를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들이다.
임화, 송두율... 경계인의 삶
[바람이여 전하라/임화를 찾아서... 오길영님의 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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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는 카프의 서기장으로 맹활약했고, 일제 말기에는 '애매한' 전향을 하였으며, 해방공간에서는 가장 탁월한 좌파문예이론가이자 서정시인으로 활약했던 사람. 그러나 그가 자신의 '사상의 조국'으로 믿고 올라갔던 저쪽에서 '미제의 간첩'으로 처형되었던 사람.
그 사람 임화를 다룬 소설 <바람이여 전하라>(정영진 지음)은 지금도 저쪽에서나 이쪽에서나 백안시되고 있는 시인이자 평론가 임화의 비극적인 죽음을 추적한 소설이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다시 들추면서 임화의 모습에 송교수의 모습이 겹쳐짐을 자꾸 느낀다. 왜 그럴까?
나는 부끄럽게도 몇년전부터 시든 소설이든 한국문학 작품이나 평론을 거의 읽고 있지 않지만 <바람이여 전하라>는 모신문에 실린 신경림 시인의 서평이 인상적이어서 찾아 읽게 되었다.
뭐든지 조금 '심각해보이는' 말이 나오면 모두들 고개를 돌리는 '경박함의 시대'에 임화라는 이름은 어떻게 들릴까? 그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혹은 아직도 철지난 '좌파'이론가를 들먹이냐는 투정을 할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임화는 그의 작품으로만이 아니라 그의 비극적 삶이 주는 충격으로도 여전히 내게는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다.
이런 마음 끌림은 그가 살았던 1920년대-50년대라는 시대가 한반도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런저런 사상과 운동의 등장과 충돌로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격동의 시대'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시대에 대해 내가 느끼는 어떤 향수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임화는 그 격동의 시대에 자신을 던졌다. 임화가 지금도 내게 어떤 울림을 주는 이름이라면 그건 그가 어느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면 '뜨거운 상징'으로 여전히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지금 송두율 교수의 이름과 그의 이름이 겹쳐서 내게 보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임화의 비극적 죽음의 내막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복원하고 싶었을까? 저자의 답변은 이렇다.
"그의 운명은 비극적이라기엔 너무 희극적이었다. '미제의 간첩'이란 오명을 쓰고 졸지에 '인민의 적'이 되고만 것이었다. 이런 희대의 비극을 보면 누군들 진상에 접근해보고 싶지 않겠는가. ... 이 글의 거의 대부분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며, 스토리 전개상 약간의 허구를 조합했을 뿐임을 밝혀둔다. 그 정도로 '사실'이 '허구' 이상으로 드라마틱한 것임을 자료조사과정에서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허구보다 더 허구적이고 극적인 임화의 삶. 허구보다 더 허구적으로 보이는 사실들. 임화의 삶은 허구보다 더 허구적인 우리 역사의 어떤 시대를 비극적으로 증언한다. 그게 이 소설을 그냥 소설로 읽을 수 없는 이유이고, 내가 무슨 '평론가'티를 내면서 이 소설의 성취가 어떠니 한계가 어떠니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다.
아니, 임화의 삶을 읽으면서 그런 식의 '문학적 접근'을 애초부터 나는 고려하지 않았다. 저자와 더불어 나도 "이런 희대의 비극"의 "진상에 접근해보고" 싶은 욕망이 이 소설을 읽게 된 이유이다.
이 소설은 일제 시대 카프의 결성과 해산을 둘러싼 임화의 행적, 그리고 일제 말기의 전향, 해방후 임화의 정력적인 문예/정치 활동, 그리고 월북 후에 임화가 보인 행적을 치밀한 자료조사를 통해 복원한다. 그리고 '미제의 간첩'으로 처형당한 그의 비극적 죽음이 남로당과 북한당국 사이의 정치투쟁의 결과였음을 밝힌다.
짤막한 요약만으로도 임화의 삶이 허구보다 더 극적이라는 말이 실감된다. 하기야, 허구보다 더 허구적이고, 허구보다 더 희극적이고 비극적인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는게 '재미나는' 한반도의 현실이 아니던가. 송교수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요즘의 우리 현실을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끔찍하게 느껴진다.
임화는 누구인가? 이 소설에서 임화의 비극적 죽음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주인공 주혁은, 일본에서 출판된 "임화에 대한 중립적인 평가"(34)가 인상적인 <조선인물사전>의 임화 항목을 통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임화 (1908-1955?)
프롤레타리아 시인. 문학평론가. 본명은 임인식. 서울에서 태어남. 1920년대 후반 동경에 유학, 귀국 후 1932년에 카프의 서기장을 맡다. 카프의 강제해산 후는 고전의 연구와 조선최초의 근대문학통사(미완)의 서술에 몰입했고, 곁가지 민요 등 민족문화를 발굴했다.
1945년 8월 16일 해방 이튿날, 임화는 재빨리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서울에서 조직, 이듬해 이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과 합쳐 '조선문학가동맹'을 만들고 기관지 <문학>을 발간, '민주적 민족문학'의 슬로건을 내 걸었음. 1947년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월북. 1953년 8월 북조선의 군사법정에서 미국의 스파이란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음.
진실은 다가올 역사의 판정에 맡길 수밖에 없지만 이슬로 사라진 그의 죽음이 박헌영이 이끌고 있던 남조선 노동당의 투쟁 방침과 북의 공화국 방침과의 엇나감에서 비롯된 것만은 확실함.
시집으로 <현해탄>(1938), <찬가>(1947),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가 있고, 평론집으로 대저인 <문학의 논리>(1941)가 있음. 임화는 1930년대 이래 좌익문학운동의 중심인물의 한 사람이며, 그의 뛰어난 프롤레타리아 서정시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음"
임화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는 국문학계에서 이미 많은 연구가 나온 걸로 안다. 그리고 그런 전공자들이 보기에 이 소설은 다 아는 사실을 그럴듯한 이야기로 꾸민 정도라고 평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임화 연구가 과연 임화의 고통스러웠으나 격정적인 삶과 비극적 죽음을 얼마나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할까? 임화의 죽음의 진실을 알려는 주혁의 추적과정은 임화의 삶과 죽음을 몸으로 느끼려는 표현이다.
"최소한 임화가 사형선고를 받던 순간의 표정만이라도 전해들을 수 있다면 소득일테지. 사형수로서의 시인 임화의 모습 ... 한때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들끓게 했던 그의 '혁명 시 ' 곳곳에서 즐겨 읊조리며 찬양해 마지 않던 '위대한 인민의 나라'의 대역죄인으로 전락한 모습, 그 망연자실해 있을 최후의 모습을 실감있게 전해들을 수 있다면 ... "
역사가는, 혹은 문학사가는 임화가 무슨 이유로 죽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데 만족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그 죽음의 순간에 임화가 보였을 "순간의 표정"과 "망연자실해 있을 최후의 모습"을 실감있게 복원하는데 관심이 있다. 그게 삶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결국 인간의 탐색에 본령이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이 이런 과제에 얼마나 충실한지는 별도로 따져볼 일이지만 적어도 그 시도 자체는 값지다.
가령 임화의 전향에 대한 이 소설의 평가는 그 타당성을 떠나서 인간 임화에 대한 저자/주인공의 애정이 느껴진다.
"임화는 병약한 몸이어서 고문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기 전에 요령껏 자신을 방어하는 기지를 지녔으며, 그의 전향도 다른 카프맹원들과 크게 틀리지 않게 위협적인 정세를 모면하기 위한 일시적 위장전향의 성격이 짙었다. 또 그 '전향행위' 역시 30년대 후반에 가서 조금씩 표출되었다"(89).
신경림이 지적했듯이, 이 소설의 재미는 임화를 둘러싼 사람들, 그가 살았던 시대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한국와 일본, 미국을 배경으로 임화의 행적을 추적하는 주혁의 발걸음과 함께 알게, 혹은 몸으로 느끼는 하는 데서 나온다.
가령 임화의 첫 부인 이귀례와의 만남, 이귀례의 오빠인 이북만의 해방 후 토쿄에서의 생활, 카프의 결성과 해산을 둘러싼 논란과 임화의 조직가로서의 역할, 두 번째 부인인 지하련과의 만남, 딸 혜란에 대한 임화의 애정.
비극적으로 부모를 잃은 뒤 이후 종적을 알 수 없게 된 딸 혜란의 삶의 추적, 월북후 임화의 숙청을 둘러싼 임화와 한설야의 대립 등. 이런 사실들이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이 모든 흥미진진한 사실들은 주혁이 밝히려는 임화의 비극적 죽음 앞에선 서글픔으로 바뀐다. 다 아는 얘기지만, 임화는 시란 세상을 위해 일정한 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프롤레타리아 시인이었다. 그가 쓴 탁월한 프롤레타리아 서정시는 이 잘못된 세상에서 억압받던 사람들을 위한 무기였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이런 올바른 의도는 냉혹한 현실정치의 맥락에서는 뒤틀리게 된다. 거기에 임화의 비극이 있다.
"임화, 김남천, 안막, 이 세사람은 동경시절부터 살찌웠던 남다른 우정과 문학에의 열정을 일제 암흑기, 해방공간, 월북 후까지 장장 20수년간을 간직해왔겠지만 별안간에 멍에를 뒤짚어 쓴 '간첩단 사건'와 종파주의 사건을 계기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파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에서 나란히 운명적인 생사의 궤적을 걸어온 특이한 존재들이었다"
임화를 비롯한 카프 문인들의 "파멸"을 "운명"이라고 밖에 묘사할 수 없다는 데 이들의 비극이 있다. 그들이 걸어온 "생사의 궤적"은 어쩌면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대가 부여한 "운명"이었다. 작가가 아무리 잘난 체 해도 시대의 자식이라는 말은 이들의 운명에서 재삼 확인된다.
해방공간에서는 남로당과 박헌영의 노선을 따르면서 민주적 민족문학의 기치를 들었던 임화. 그러나 "월북해서는 박헌영을 칭송한 같은 목소리로 스탈린을 우러르고 김일성을 찬미하지만, 마침내는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된다.
그의 부분적인 친일행각을 들어 그의 처형은 사필귀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렇다면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지음으로써 오랜 부귀를 보장받은 이찬 역시 임화에 못지않은 친일을 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과연 시인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가,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경림, <한겨레>서평).
과연 임화는 철모르는 부나비였을까? 그가 현실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한 사람 뛰어난 시인으로만 살았더라면,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한 발 물러나 오직 강단에서 일용할 양식이나 구하며 시작에만 전념했더라면, 평필이나 휘둘렀더라면 자신과 그의 가족, 그리고 우리 문학을 위해서 더 값지고 유익했을 것임에 틀림없었을까?
주혁의 이 발언에는 한 천재적 시인의 비극적 삶에 대한 애통함이 깔려 있지만 바로 이렇게 삶과 문학, 정치와 문학을 떼어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임화의 삶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가로막는 것이 아닐까?
과연 임화는 "시인이란 자신의 한계도 모르고 멋모르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겁없는 부나비"에 블과했던 것일까? 한 시대를 불꽃처럼 살아간, 그래서 지금도 적어도 내게는 '뜨거운 상징'으로 남아있는 이 시인에게 이런 평가는 얼마나 온당한가?
이 물음은 임화, 그리고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제2의 임화, 제3의 임화를 여전히 발견하게 되는 이 빌어먹을 한반도의 현실에서 여전히 어떤 울림이 있다.
삶과 문학이 떨어질 수 없음은 바로 탁월하다는 임화의 서정시들, 이야기시들에서도 확인된다.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개입이 있었기에 그의 시가 탄생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임화 시가 보여주는 진정성이 몇 년 전 죽은 어떤 시인, 이 나라 시단의 '거목'(sic!)이라고 칭송되던 어떤 시인의 가짜 서정성과 얼마나 다른지를 새삼 실감한다.
임화 시의 뜨거운 서정성을 알 수 있는 시 중 하나가 '사랑하는 딸 혜란에게'라는 부제가 딸린 '너 어는 곳에 있느냐"란 제목의 시이다.
이 시는 1950년 12월 노동신문에 발표했다가 김남천이 주재하던 문화전선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펴낸 시집에 실렸다. 임화가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한만국경 인접도시인 강계에까지 후퇴해있으면서 이해 여름 인민군의 남진대열을 따라 전라도 쪽으로 종군해간뒤 소식이 끊긴 딸 혜란을 그리며 노래한 시이다.
"물론 임화로선 단순히 딸 혜란만을 그리는 사적인 동기에서 쓴 시라기보다, 전란으로 생사를 모르는 모든 이산가족들의 절절한 아픔을 자신의 가족사에 빗대어 형상화해본 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임화의 가족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시가 딸 혜란의 생사를 걱정하며 재회를 그리는 안타까운 부정이 가득 담긴 노래임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부정"이 곧 이 땅의 모든 딸들과 아들들에 대한 임화의 격정적인 애정으로 표현되었다면 과장일까? 뒤틀린 시대, 임화의 운명은 그가 지닌 애정의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 모르겠다.
임화의 이 시를 읽으면서 차가운 법정에서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던 임화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무엇때문인지 모르겠다.
너 어느곳에 있느냐...(사랑하는 딸 혜란에게)
임 화
아직도 이마를 가려
귀밑머리를 땋기
수집어 얼굴을 붉히던
너는 지금 이
바람 찬 눈보라 속에
무엇을 생각하며
어느 곳에 있느냐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를 생각하여
바람 부는 산정에 있느냐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
항상 마음 아프던
엄마를 생각하여
해 저므는 들길에 섰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침마다 손길 잡고 문을 나서던
너의 어린 동생과
모란꽃 향그럽던
우리 고향집과
이야기 소리 귀에 쟁쟁한
그리운 동무들을 생각하여
어느 먼 곳 하늘을 바라보고 있느냐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벌써 무성하던
나뭇잎은 떨어져
매운 바람은
마른 가지에 울고
낯익은 길들은
모두 다 눈 속에 뭍혀
귀 기우리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얼음장 터지는 소리
아버지는 지금
물소리 맑던 락동강에서
악독한 원쑤들의 손으로
불타고 허물어진
숱한 마을과 도시를 지나
우리들의 사랑하던
서울과 평양을 거쳐
절벽으로 첩첩한 한과
천리 장강이 여울마다 우는
자강도 깊은 산골에 와서
어데메에 있는가 모를
너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부른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
전선으로 가는 길 역에서
우리는 간단 말조차
나눌 사이도 없이
너는 전라도로
나는 경상도로
떠나갔다.
<...>
출 처 : www.Sesk.com(영미문학연구회) 나누고 싶은 글이야기 중에서 발췌
글쓴이 : 오길영 "임화, 송두율, 경계인의 삶"(2003. 10)
[출처] [펌] 임화, 송두율... 경계인의 삶 |작성자 푸른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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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임화/림화
출생일 1908년 10월 13일
한성부
사망일 1953년 8월 6일
직업 평론가,작가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장르 문학평론,시
배우자 지하련
임화(林和, 1908년 10월 13일 ~ 1953년 8월 6일)는 한국의 시인이며 문학 평론가이다.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며, 김철우, 쌍수대인, 성아, 청로 등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생애
한성부의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이상, 이강국과는 보성고보 동기생이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 창작과 비평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무렵 친구인 윤기정과 함께 영화 배우로도 활동했다.
임화라는 필명은 1927년 경부터 계급문학에 관심을 보이며 쓰기 시작했다. 1929년에 시 〈우리 옵바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하여 대표적인 경향파 시인으로 자리를 잡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약 1년 동안 일본 유학을 다녀와 1931년 귀국한 이후로도 참여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카프에서 좌파 문학 이론을 생산하고 김기진, 김화산 등을 공격하는 각종 논쟁에 적극 참여하면서 활발히 활동했다. 카프 활동으로 제1차 카프 검거 사건 때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했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 이후 1935년 자신이 서기장까지 지낸 카프가 강제적으로 해산된 이후 순수 문학으로 전향하는 듯하였으나,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익 문학 단체에 적극 참여하면서 남로당 노선을 걸었다.
1947년 두번째 부인이며 소설가인 지하련과 함께 월북하였고, 1953년 박헌영, 이강국, 리승엽 등 남로당 수뇌부와 함께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해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상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임화는 흰 피부에 수려한 외모로 '조선의 발렌티노'로 불렸다고 하며, 김유영이 연출한 영화 《혼가》(1929)에 주연으로 출연한 적도 있을만큼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1] 초창기에는 '임다다'라는 필명을 쓰면서 다다이즘 성향을 보였고, 카프 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이식문학론’을 내세우는 등 외국의 최신 문화 이론을 수입하여 자생적으로 소화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임화의 첫 부인은 일본 유학 시절에 함께한 동지 이북만의 동생 이귀례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 있었는데, 임화는 그 딸을 생각하며 한국 전쟁 중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라는 시를 썼다. 월북 작곡가인 김순남이 작곡하여 한국 전쟁 시기에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즐겨 부른 노래 〈인민항쟁가〉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있는 소설가 지하련 주택. 2년 전 화재가 난 후 방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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