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사망
동명성왕(東明聖王). 고구려의 건국 시조(재위 B.C. 37~B.C. 19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알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기원전 33년 부여를 떠나 졸본에 고구려를 세웠다.
최초의 영웅이자 신화가 되다
주몽, 즉 동명성왕은 고구려의 시조이다. 주몽 이외에도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도모(都慕) 등 여러 이름이 전한다. 성은 고(高)씨이다.
수많은 이름 가운데 ‘주몽’으로 주로 불린 이유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에 설명되어 있다.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이 주몽이다. 일곱 살 무렵부터 재주가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그리고 당시 부여 속담에 활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고 했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다. 따라서 주몽을 고조선이 멸망한 후 어수선한 주변국들 사이에서 활로 대표되는 철제 무기를 잘 다루던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전한다.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 시절 북부여의 관리였던 모두루(牟頭婁)의 묘지에는 주몽을 ‘추모왕’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문헌에서는 백제의 시조로 ‘도모’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동명’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이런 혼용은 ‘동명’이라는 한 존재를 각기 다른 글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견해가 있다. 반면 중국 《후한서》의 〈부여전〉이나 《양서》의 〈고구려전〉에는 부여의 시조가 ‘동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위서》 등에서는 고구려의 시조를 ‘주몽’이라고 지칭한다. 즉 동명을 시조로 모신 전통은 부여에서 시작되어 고구려, 백제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때문에 학자들은 동명과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다른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동명왕을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건국자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동명성왕은 주몽과 동명왕이 겹쳐지면서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후예라는 의식이 강했던 고구려인들이 건국자 주몽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부여의 동명왕 신화를 이용했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주몽의 탄생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이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왕이기도 하다. 이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태어났음에도 왕통의 근원이 북부여에 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동부여의 금와왕이 하루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로 놀러 갔다가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저는 하백의 딸 유화입니다. 동생들과 놀러 나왔다가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를 만나 웅신산 밑 압록 강가에서 함께 살았는데 어느 날 그가 떠나 버린 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중매도 없이 남자를 따라간 저를 책망해 이곳에 귀양을 보냈습니다.”라고 말했다.
금와가 이를 이상히 여겨 유화를 궁으로 데리고 돌아가 방에 가두었다. 이후 햇빛이 유화를 따라다니더니 곧 태기가 있었다. 유화는 크기가 다섯 되나 되는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이 알을 버리라고 하여 개, 돼지에게 주었지만 먹지 않았고, 길가에 버리면 소나 말이 피해 지나다녔다. 깨뜨리려 해도 깨지지 않아 결국 금와왕은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유화가 알을 따뜻한 곳에 두니 남자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영특한 데에다 일곱 살에 이미 활을 자유자재로 쏘는 등 재주가 남달랐다. 그가 바로 활을 잘 쏘는 아이, 주몽이었다.
호랑이 사냥
묘사된 벽화에 그려진 사냥 모습. 벽화의 무사가 쏘고 있는 활은 맥궁이라고 하며, 고구려의 시조가 활을 잘 쏘는 주몽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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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와의 일곱 아들은 그의 재능을 불편하게 여겼다. 특히 맏아들 대소는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며 주몽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금와는 대소의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했다. 주몽은 날랜 말에게는 먹이를 조금만 주어 야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이 붙도록 했다. 금와는 이런 줄도 모르고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말을 골라 기르며 때를 노리던 주몽은 어머니 유화의 조언에 따라 대소와 신하들을 피해 부여에서 도주했다. 주몽 곁에는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세 사람이 따랐다. 엄체수라는 큰 강에 도달했을 때 강물이 불어나 강을 건널 수가 없자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이다. 나를 쫓는 군사가 곧 닥치는데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 들이 떠올라 강을 건널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과 세 벗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 들은 다시 흩어져 군사들이 그 뒤를 쫓지 못했다.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은 졸본부여로 남하해 나라를 세웠다. 위치는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지금의 훈장(渾江)] 유역으로 전한다. 기원전 37년의 일이다. 주몽은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스스로 성을 ‘고’라고 지칭했다. 주몽은 기원전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松讓)의 항복을 받아낸 뒤 국호를 ‘옛 땅을 회복했다’는 뜻의 고구려 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하기도 했다. 2년 뒤에는 성곽을 올리고 궁궐을 지었다.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는 기록도 전한다. 다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북부여 출신 주몽이 졸본에 간 뒤 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의 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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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와 달리 실제로 주몽은 금와의 후궁 유화가 낳은 서자였을 것이다. 대소를 비롯한 적통 왕자와의 경쟁에서 밀린 주몽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동부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졸본부여에 도착한 주몽은 그곳의 유력자였던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와 결혼함으로써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전쟁에 유리했다. 고구려는 기동성과 철제 무기를 기반으로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通溝)로 거점을 옮긴 뒤 낙랑군과 임둔군의 교통로를 끊는 등 한족에 맞서고, 변방의 말갈족 부락을 평정해 국경을 정비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쌍영총 벽화의 일부
기마에 능숙했던 고구려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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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4년 음력 8월, 동부여에 남아 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숨을 거두었다. 금와는 태후의 예를 갖춰 정성껏 장례를 지냈다. 이를 계기로 주몽은 동부여에 토산물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고, 두 나라는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와가 죽고 맏아들 대소가 왕위에 오른 뒤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기원전 19년에는 동부여에 남아 있던 주몽의 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類利)가 주몽을 찾아 고구려로 왔다.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고 5개월 후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능은 졸본 근처 용산(龍山)에 삼았다. 시호는 동명성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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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재운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장희흥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윤재운 | 청아출판사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