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1>
인의예지
김붕래
광화문은 임금님만이 드나들 수 있는 경복궁의 정문입니다.
대소 관원은 궁의 좌우로 난 대문을 통해서 궁궐을 드나들었습니다.
莫非王土, 3 천리 강토 어딘들 왕의 땅이 아니겠습니까만
조선 500년 동안 이렇게 문하나 통과하는 데도 원칙과 격식이 있었습니다.
동쪽(삼청동 쪽) 건 춘문은 왕실 종친이 드나들던 로열패밀리를 위한 문이었고,
서쪽 영추 문은 만조백관이 금관조복을 입고 임금님을 알현하던, 관리들의 문이었습니다.
“연추문(영추문) 들이다라 경희남문 바라보며 하직하고 물러나니 옥절이 앞에 섰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관동별곡의 한 구절,
정철도 이 문으로 달려 들어가 강원관찰사의 직함을 받고
아마 경회루 연회에서 임금님이 내리는 술 한 잔에 감격했을 겁니다.
한양 도성의 4대문 중 정문은 남쪽문인 숭례문입니다.
君子南面, 임금님은 남쪽을 향해야 하는 조선 왕조의 법도에 따라
광화문의 연장선상에 숭례문이 남쪽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동서남북으로 난 4대문의 명칭에도 조선 시대의 철학이 내재해 있습니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홍지문(숙정문)의 4대문 명칭은 ‘인의예지’ 돌림입니다.
숭례문의 <예>는 맹자의 사단(四端)으로 볼 때 <사양지심(辭讓之心)>에 속합니다.
형제간의 아름다운 우애를 담은 “형님먼저 아우먼저”하던 옛 이야기 같은 순박한 마음으로
이 나라 백성들은 숭례문을 드나들었던 것입니다.
지금 강북 삼성병원 아래의 고개에 있었던 서대문(돈의문)은 위치가 마땅치 않았던지,
조선 개국 초기부터 한 두 차례 헐었다 다시 지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대문을 새문(新門)이라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구세군 교회 근처가 ‘새로 지은 문’의 뜻인 신문로(새문안길)로 불리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서대문을 나서면 도성 밖 경기도 땅, 바로 경기 감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적십자병원이 그 터입니다.
그 건너편 농협중앙회나, 문화일보 자리쯤에 김종서 장군의 저택이 있었다는 문화재 표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서울에는 4대문과 더불어 또 한 개의 누각이 있습니다.
종로 한 복판에 커다란 종을 매달아 놓은 2층 누각인 보신각입니다.
여기서 울리는 종소리에 따라 4대문이 열리고 닫히고 했습니다.
보신각에서는 1경 3점(오후 8시 12분)에 통금을 알리는 인경[人定]을 쳐 잡인을 금했습니다,
통금 이후에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행인이 있으면 잡아다 곤장을 쳤다고 합니다.
새벽 5경 3점(오전 5시 12분)에 통금 해제[罷漏]의 종을 치면
부지런한 인왕산 나무꾼이 제일 먼저 도성으로 들어와 땔감을 팔았습니다.
4대문의 ‘仁義禮智’와 보신각의 ‘信’을 합치면 유교 사회의 보편적인 진리였던 五常이 됩니다.
저녁에 28번 종을 쳐 일월성신(28宿)에게 백성들의 안녕을 빌고,
아침에는 33번 타종하여 33천(도리천)에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보신각의 종소리는
백성을 근심하던 임금님의 어진 마음[惻隱之心]의 표상이었을 것입니다.
어찌 이 착한 보살핌 없이 조선이 500년을 긴 역사를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