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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4.
17세기 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
박인호 금오공과대학교 교수
목차
1. 머리말
2. 김중청의 생애
3. 17세기 퇴계학파의 분화와 월천계의 동향
4. 김중청의 학문 연원과 교유관계
5. 김중청의 활동과 월천계 내 위상
6. 맺음말
1.머리말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1567{명종22}~1629{인조7)은 퇴계학파의 재전 제자로,
월천 조목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월천의 일부 후학들이 광해군대 대북정권에 참여하였다가 대북정권의 몰락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배척되면서
오늘날 당시 월천계의 동향에 대해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여기서는 17세기 초 분기되던 퇴계학파 내의 월천계 동향과 함께 월천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김중청의 활동과 위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의 김중청에 대한 연구는 그 사상사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천록(朝天錄)]을 통해 북경으로의 사행 당시 허균과의 갈등 양상을 소개한 논문1)과 임진왜란 때의
의병활동에 대한 발표2)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김중청의 생애를 볼 수 있는 자료로는 문집과 [조천록(朝天錄)],그리고 [강원일록]을 들 수 있다.3)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17세기 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이에 따른 구전 김중청의 활동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김중청(金中淸)의 생애 4)
김중청(金中淸)의 자(字)는 이화(而和),호(號)는 구전(苟全) 혹은 만퇴(晩退)이다.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이다.
1566년(명종21) 12월 22일 봉화현(奉化縣) 만퇴리(晩退里)에서 태어났다.
안동김씨의 시조는 김선평(金宣平)으로 고려 때 벽상삼중대광 태사(壁上三重大匡 太師)를 지냈으며,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은 공의 5대조이다.5)
보백당은 현재 안동의 묵계서원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공의 선대 집안은 대대로 안동부 풍산현에 세거하여 왔다.
영해 교수를 지낸 승의랑(承議郞) 김세은(金世殷)에 이르러 군위(軍威)응곡리(凝谷里)에서
봉화현(奉化縣) 만퇴리(晩退里)로 옮겨와 자리잡았다.
조부 눌암(訥巖) 김정헌(金廷憲)은 성균관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퇴계 문인이었다.
아버지 김몽호(金夢虎)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어머니 반남박씨(潘南朴氏)는 좌의정(左議政) 박은(朴訔)의 현손(玄孫)인 충의위(忠義衛) 박승인(朴承仁)의
딸이었는데,박승인은 스승인 소고 박승임의 형이었다.
형제로는 김득청(金得淸)과 김수청(金守淸)이 있었다.
서인계의 대표적인 척화론자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는 12寸이 된다.
첫째 부인은 장수황 씨(長水黃氏)로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현손(玄孫)이었으며,
둘째 부인은 영천이 씨(永川李氏)로 봉사(奉事) 이영승(李永承)의 딸이었다.
아들은 주민(柱旻), 주국(柱國), 주우(柱宇), 주한(柱漢), 주연(柱衍, 주미(柱美) 6형제를 두었다.
여기서는 연보를 통해 김중청의 일대기를 연도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1566년(명종 21)
8세(1573) 외조부(外祖父)의 동생인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에게서 글을 배웠다.
12세(1577) 봉화(奉化)의 현아로 나아가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였던 월천(月川) 조목(趙穆)에게
수업(受業)하였다.
14세(1579) 월천 조목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므로 월천서당으로 나아가 글을 배웠다.
15세(1580) 모부인(母夫人) 박 씨(朴氏)의 상(喪)을 당하였다.
17세(1582) 장수황 씨(長水黃氏) 부인(夫人)에게 장가들었다.
부인은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현손(玄孫) 이자 사과 하(賀)의 따님이다.
19세(1584) 장남 주민(柱旻)이 태어났다.
20세(1585)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이 근무하였던 창원부에 가서 관아에서 한서(漢書)를 배웠다.
21세(1586) 정월 소고 선생이 돌아가셨다. 차남 주국(柱國)이 태어났다.
26세(1591) 4월 부인 황 씨(黃氏)의 상(喪)을 당하였다.
27세(1592)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류종개(柳宗介)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참모(參謀)로
종군하셨다. 유종개가 전투 중 전사하자 봉화의 진은 재정비되어 임흘(任屹)이 의병대장,
김용(金涌)이 의병부장, 선생이 참모와 서기를 담당하였다.
선생이 군무를 담당하면서 의병대장과 관찰사에게 편지를 올리고 일을 기미에 맞게 처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의 재능과
기국에 탄복하였다.
28세(1593) 영천이 씨(永川李氏) 부인에게 장가들었다. 부인은 봉사(奉事) 이영승(李永承)의 딸님이었다.
31세(1596) 책을 상자에 넣어 천상의 월천서당에 가서 공부하였다.
32세(1597) 5월 월천을 모시고 영지산(靈芝山)을 유람하였다.
33세(1598) 3남 주우(柱宇)가 태어났다.
35세(1600) 봄 월천 선생에게 나아가 문안을 드렸다. 월천은 제자의 방문에 대해
“온 봄의 소식을 매화 가지에 세 보는 듯하다.”라고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36세(1601) 11월 월천선생을 모시고 청량산(淸凉山)을 유람하였다.
37세(1602) 4남 주한(柱漢)이 태어났다.
38세(1603) 부인 이 씨(李氏)의 상(喪)을 당하였다.
40세(1605) 정월 천상으로 가서 월천의 병을 간호하였다. 얼마 후 월천의 병이 나았다.
2월 과거 응시를 위해 서울을 다녀왔다.
41세(1606) 집에서 1리쯤 떨어진 반은동(槃隱洞)에 서재(書齋)를 지었다.
고요한 곳에 은거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실을 짓고 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수호토록 하였다. 독서(讀書)를 하면서 생도들을 가르쳤다. 반천자(槃泉子)로 자호 하였다.
10월 월천 선생이 돌아가셨다.
42세(1607) 4월 안동부로 한강 정구를 찾아가 뵈었다. 한강은 안동부사로 부임하면서 선비들을 모아
심경(心經)을 강독하였으므로 찾아가 뵙고 머물면서 강독하였다. 8월에는 다시 안동으로 가서 더
배우기를 청하였다. 유형경의 아들 유흔(柳忻)을 대신한 봉화현감 임혁(任 奕)과 김이화
집안과의 갈등으로 봉화현감 임혁은 부친을 체포하여 형틀에 씌우고,
수령을 모함하였다는 이유로 김중청을 잡아오도록 하면서 선생의 두 아들을 구금하였다. 6)
임혁은 김중청의 죄목을 8가지를 들면서 감사 이상신에게 보고하였으나 감사는 관대하게
처분하였다. 7) 11월 봉화현감을 피해 부친은 온계(溫溪)로, 김중청은 외천(外川)의 영천이 씨
집으로 피신하였다. 8)
43세(1608) 예안현(禮安縣) 남양리(南陽里)로 이사하였다.
마을 이름을 따라 호를 초려(草廬)라고 하였다가 구전거사(苟全居士)로 고쳐 불렀다.
44세(1609) 풍기(豊基) 동당(東堂)의 종장(終場)에서 장원을 하였다.
45세(1610) 문과 시험인 명경과(明經科) 복시(覆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正7品)에
임명되었다.
46세(1611)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正6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권신(權臣)의 무함(誣陷)으로
파직(罷職)되었다.
47세(1612) 가을 아들 주우가 15살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의 회시에 합격하였다.
48세(1613)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正6品)과 예조좌랑(禮曹佐郞),
예조정랑 겸지제교(禮曹正郞兼知製敎:正5品)에 임명되었다.
49세(1614) 북경으로 가는 천추사 겸사은사(千秋使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4월 21일 출발하였다.
지난해 12월 사은사 서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출발이 늦어졌다가 천추사 겸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출발하였다. 7월 북경에 도착하여 8월에 명나라 황제에게 하례하였는데 당시
명은 태후의 장례가 있었으나 천추 사는 길례에 해당한다고 특별히 연회를 베풀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중청은 과군의 슬픔은 우리들 배신의 슬픔이라고 하면서 연회를 베풀어주는 것을
사양하였다.
이 건의는 예보의 허락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문장의 논리가 정연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50세(1615) 1월 11일 복명하였다. 명으로의 사행 길에 정사는 허균(許筠)이었는데 일을 행하거나 비밀리
조사하는 과정에 선생과 언제나 반대가 되었다. 약 9개월간의 사행 기록으로 [조천록]이 문집의
별집에 남아 있다. 원래 조천 사적으로는 일록과 문견사건 두 종류가 있었는데 두 가지를 함께
편집하면 중복되는 것 같아 [조천록]으로 하나의 기록으로 만들었다.
이 일은 주관한 이는 이광정(李光庭)이었다. 중국국경 안에 들어간 이후에는 사건에서 상세히 기술하였으며, 일록에서는
단순히 상세하게 나타난 사건만을 기록하고 있어 두 가지를 모두
참고하여야 그 상세한 전말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이광정은 의주 이전은 전적으로 일록을
위주로 하고 중국 국경에 들어간 이후에는 사건의 기술 내용을 중심으로 재편집하였다. 9)
특히 사건은 보고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용된 신(臣) 자는 여(余) 자로 바꾸거나,
선배의 휘는 별호로 고쳐 썼다. [조천록]의 끝에는 문견사건 중에 수록되었던 사행과정에서
목도하였던 10가지의 문제점의 시정을 요청한 글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10)
4월에는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正5品)에 임명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수에 참여하였으며, 원종 2등 공신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가자되어 겸필선(兼弼善)에 임명되었다.
당시 광해군 하에 집권 북인계 관료들은 월천 문인들을 시험하기 위해 선생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正6品)에 임명하여 폐모론에 반대했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선생은 이익(李翼)과 함께 정계(停啓)하자는 논의를 발의하여 집권층으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에 부친 봉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병조(兵曹)의 사과 겸 춘추관기사관(司果兼春秋館記事官:正6品)에 보임되었다가
9월 경상우도(慶尙右道) 시관(試官)으로 차출되었다.
이때 고향 근처로 오게 되면서 한강 정구, 회곡 권춘란, 백암 김륵, 여헌 장현광 등을 방문하였다.
복명하기도 전에 고령현감에, 복명 후에는 신안(新安:성주(星州) 현감에 임명되었다.
51세(1616) 정월 11일 하직 인사 후 12일 부임하였다. 매일 정청(正廳)에 앉아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으시고 하루 종일 일을 처리하여 비뚤어지고 잘못된 행정이 바로 잡아지고,
외롭고 고달파 의지할 곳이 없는 백성들의 생활이 되살아났다.
옥사의 처결은 분명히 하여 원통한 옥사가 없게 하였다.
정인홍이 한강에게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는데
김중청은 그 사이에서 주선하여 무사하게 되었다. 2월에는 석 차례, 사직단 제사를 지냈으며,
천곡서원을 참배하였다. 한강 선생과 회곡 선생을 찾아뵙기도 하였다.
5월에는 주연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봄과 가을의 석 차례와 이어지는 행사에서 선생이 관아에
있을 때는 반드시 정갈하게 받들었다. 고향에는 창해서원을 건립하여 퇴계와 월천을 모셨다.
52세(1617) 5월 월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지나는 길에 여헌 장현광을 방문하였다.
월천의 연보 초고를 만들기도 하였다. 6월에는 사수에 가서 한강을 뵈었다.
9월에는 회곡 선생을 조문하였다. 10월 사수로 가서 한강을 뵙고,
또 지나는 길에 여헌을 방문하였다. 이때 김집, 장흥효, 이윤우 등과 같이 잤다.
11월에는 성주의 회동(檜洞)에 있는 외선조인 야성 군 송공의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
12월에도 한강 선생을 찾아뵈었다.
53세(1618) 둘째 아들 주국(柱國)이 지난겨울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므로 부친에게 데리고 가서 주연을
열었다.
3월에는 한강 선생이 와서 함께 유숙하였다. 소고 박승임 선생의 언행록 초를 작성하였다.
4월에는 순영에 갔다가 한강을 찾아뵈었으며 최현과도 만났다.
윤달에는 여현 선생을 길에서 만나서 회포를 풀었다. 5월에는 회곡 선생의 제사에 참석하였다.
6월에는 파직되어 돌아가는 관찰사 윤훤(尹暄)을 상주(尙州)까지 전송하고 지나는 길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를 방문하였다.
9월 전문차사원(箋文差使員)으로 서울에 가서 허균이 가져왔다는 [임거만록]에 대한 변론이
있었다. 10월에서 12월에는 네 번이나 사수를 방문하였다.
54세(1619) 이해에도 여러 번 한강을 찾아뵈었다. 이때 최현, 이윤우 등과 같이 유숙하였다.
정월에는 통정대부로 승급하여 고향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6월 16일 한강 선생을 모시고 부강정(浮江亭) 아래에서 뱃놀이하였다.
한강 선생이 봉래(蓬萊)로 목욕하러 떠날 때 병이 있어 따르지 못하고 우암(牛巖)에서
이윤우(李潤雨), 이언영(李彦英), 이탁(李濯), 그리고 아들 김주우(金柱宇)를 전송하였다.
8월. 대간의
마을 주민들은 성문에 늘어서서 고을을 벗어나지 못하거 하였다.
만 퇴리 옛 집으로 왔다가 계장동(桂場洞) 셋집으로 옮겼다.
계장동은 옛 집에서 북쪽으로 2리쯤 떨어졌고 봉화현에도 가까웠는데 그윽한 절경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경치를 아껴서 집을 세내어 거쳐하였다.
11월 큰 아들인 주민(柱旻)이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55세(1620) 정월 한강 선생의 부음을 듣고 곡하였다.
2월에는 창해서원의 위판이 바르지 않음을 보고 아들 주우를 시켜 고쳐 쓰게 하였다.
56세(1621) 봄 구미당(九未堂)이 완성되어 은거할 집을 마련하였다. 11)
구미당이 완성되자 아들 주우로 하여금 귀거래사를 써서 벽에다 붙이고 완상 하다가 그 운에
차운하였다.
8월에는 용산서원(龍山書院)에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을 봉안하는 글과 상향문을 초하였다.
용산서원은 후에 주계서원(周溪書院)이 되었다. 9월에는 삼전실(三全室) 12)이 완성되었다.
12월에는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57세(1622) 3월에는 분승정원승지(分承政院承旨)에 임명되었으며, 4월에는 선유사(宣諭使)에 차출되어
영남(嶺南) 지역을 안찰 하였다. 13) 선유사는 군량 부족을 염려하여 각도의 곡식을 모집하였는데 이름을 모속사로 하였다가
선유사로 고쳐 부른 것이다.
성주를 지나다가 한강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58세(1623) 3월 복명(復命)하면서 각 고을의 폐단을 진달 하다.
당시 집권세력은 선생이 여러 고을 순행하면서 이이첨(李爾瞻)을 배척하는 여러 선비들과 함께 비밀리 도모하려고 하였다고
죄를 얽매려고 하였다.
연이어 11일 반정이 일어나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59세(1624) 2월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란하였다.
영남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고을의 의병장이 되어 행재소로 가다가 이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대궐로 나아가 하례를 드리고 소를 올렸다.
소에 대해 인조는 충성과 의리가 가상하며 소의 내용은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때를 당하여 경상감사 민성징(閔聖徵)이 도내 인심이 머뭇거리고 관망하는 기색이 있으므로 왜관의 왜인들을 적지에
나아가게 하도록 하자고 주청 하였는데 선생이 우복 정경세와 함께
이에 대해 변명하는 소의 초를 작성하였다.
6월에는 주우가 정시(廷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였다.
60세(1625) 4월 부친상을 당하다. 상복이며 장례와 제사를 한결같이 주자가례대로 하였다.
62세(1627) 정묘년 봄 오랑캐가 침입하여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선생은 상복을 벗고 일어나 달려가려고 하였다.
당시 인조의 기복 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며 우복 정경세와 여헌 장현광이 각기 영남 좌도와
우도의 호소사가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병이 들어서 길을 나서지 못하였다.
6월에는 상복을 벗었다.
64세(1629) 6월 13일 내성(乃城)의 우사(寓舍)에서 사망하였다.
9월 3일 봉화현(奉化縣) 남면(南面) 태자산(太子山)에 장사 지냈다.
3. 17세기 퇴계학파의 분화와 월천계의 동향
1) 서애와 월천의 대립
퇴계(退溪) 이황(李滉)에 의해 창도 된 퇴계학파의 학맥은 다음 세대에 월천(月川) 조목(趙穆),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 학봉(鶴峯) 김성일(金成一),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으로 계승되었다.
특히 월천, 서애, 학봉, 한강계는 가장 많은 제자를 거느리며 그룹화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월천은 1538년 15살 때 퇴계를 스승으로 모신 이후 퇴계 이황이 사망하는 1570년까지
30여 년을
퇴계가 사망한 뒤에는 상을 주재하였으며, 스승을 애도하기 위해 1년 동안 베로 만든 띠를 매었으며,
3년 동안 잔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월천은 퇴계가 사망 후 도산에서 직접 강학을 열기도 하였다.
월천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퇴계를 모시는데 일생을 보내었다.
학문적 자세도 스승을 이어 퇴계학을 심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4)
따라서 월천은 퇴계의 여러 제자 가운데 학통을 잇는 제자로 이미 향촌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말부터 학파가 분기하면서 각 계열마다 갈등이 노정되기 시작하였다.
16세기말과
17세기 초 중반에는 류성용과 김성일의 위치시비로 서애계와 학봉계가 대립하였다.
월천은 스승이었던 퇴계가 사망한 직후인 1571년(선조 4)부터 문집을 편찬 간행하는데 주역을 담당하였다.
서애와 학봉은 모두 사환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집 편찬에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문집은 월천의 주관 하에 진행되었다.
서애의 절삭 주장이 있었으나 월천의 전고 수록 방침에 따라 초간본인 경자본이 1600년(선조 33) 도산에서
간행되었다. 15)
월천은 퇴계집의 판각으로 이제 퇴계의 적전으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비록 수록 원칙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시작되었으나 퇴계집의 편찬 주도권 다툼은 서애와 월천계의 대립
구도 속에서 양 파가 갈등하게 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6)
서애계와 월천계가 문도 간의 대립을 감정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은 주화오국 문제였다.
북인계인 이이첨(李爾瞻)등에 의해 1598년(선조 31)에 시작된 류성용의 온건한 한일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한 비판은 9월 들어
성균관 유생 이호신(李好信), 문홍도(文弘道) 등에 의해 송나라 때 충신 악비(岳飛)를 죽이고 화친을 추구하였던 진회(秦檜)와
같은 간신배로 몰아붙이면서 본격화하였다.
이들은 류성용이 화(和) 자로 국가의 대사를 그르쳤으며,
정인홍이나 조목과 같은 인재 등용도 막았다고 지적하였다.
주화오국(主和誤國)으로 계속 상소가 일어나면서 류성용은 12월 삭탈 관직되었다.
그런데 조목은 이 탄핵 이전인 1597년(선조 30) 이미 류성용에게 상국께서 성현의 책을 읽고 배운 것이
오직‘강화오국(講和誤國)’넉자뿐인가라고 비판하고 있다. 17)
류성용으로서는 동문의 인사로부터의 오국(誤國) 비난을 받은 것은 큰 충격이었다.
월천이 사망하자 문인인 김택용이 [월천언행록]을 지었는데 월천이 서애에게 강화오국(講和誤國)한다고
비판하였던 1597년의 편지를 장황하게 인용하고 있었다.
1660년대 조목의 외손인 김확(金確)이 언행록을 보여주면서 동계 정온(鄭蘊)에게 월천의 신도비문을
청탁하였다. 정온은 신도비문 끝에 이 부분의 내용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서애계에 알려지면서 월천계와 서애계는 본격적으로 대립 구도속에 빠져들었다.
당시 서인의 집정으로 북인과 연계되었던 예안의 월천계는 차츰 향내에서 위축되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서애계는 인조반정 이후의 민낯인 정책에 따라 차츰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도비문의 내용은 두 문도들 사이에서의 갈등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학사 김응조는 이 문제에 대해 주화오국은 이이첨이 당시 류성용을 비롯한 남인 당국자들을 악의적으로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해 이용한 문자인데 이를 월천계인 김택용과 김학이 의도적으로 적어 놓아 논란이
분분해지도록 만들었다고 비판하였다. 18)
2) 월천계의 도산서원 장악
1572년 4월 조목을 비롯한 예안 지역의 동문들이 도산에 서원을 건립하는 문제를 논의하여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세울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서원 건립에 나서 1574년 7월 전교당을 준공하였다.
1575년 8월 서원을 낙성하였으며 선조가 한석봉에게 쓰도록 한 도산(陶山)으로 사액을 받았다.
1576년 2월 네는 묘우인 상덕사를 준공하고 퇴계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조목은 위패를 봉안하는 제문을 지었으며, 춘추 향사에 사용하는 축문을 지었다.
한편 도산서원이 건립되자 초기 원장은 대부분 조목의 문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19)
자연스럽게 원생도 월천계로 채워지게 되었다. 20)
김중청도 1582년 입록하였다. 21)
한편 월천의 사망 후 그의 월천계 문인들에 의해 광범위한 추승사업이 일어났다.
월천의 제자들은 3년 상이 끝난 1608년부터 바로 월천의 문집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은 박수겸(朴守謙), 채간(蔡衎) 등이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시작하였으나 22) 바깥의 여론 때문에
용수사(龍壽寺)로 옮겨서 작업을 진행하였다. 23)
이 작업은 김중청(金中淸)을 비롯하여 김택용, 이덕홍의 아들 6형제, 박수의, 박수겸, 채간 등 월천의 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24)
월천 문집이 어느 정도 정비되자 월천의 도산서원 종양건을 추진하였다. 25)
종양건은 1609년 배용길(裵龍吉)이 처음 제기하였으며, 26)
1610년에는 도산서원 원장에 재임 중이던 금응훈(琴應壎)도 이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27)
1611년에는 김택용이 감사에게 정문을 올리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28)
1612년에는 금경(琴憬)이 도산서원 원장에 취임하자 본격적으로 월천 종양건을 재론하였다.
1612년 1월 5일 도산서원에서 열린 알묘회에서 종향론을 중장 하는 월천계가 회의를 주도하면서 2월 중정일에
월천을 도산서원에 종향하기로 결의하고 영천의 이산서원과 안동의 여강서원에 통문을 보냈다. 29)
이 일은 고향에 내려와 있던 김중청을 비롯하여 김택용, 금경, 박수의, 이립 등이 주도하였다. 30)
이 결정에 대해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의성김 씨, 안동 유곡의 안동권 씨, 온계의 퇴계 후손,
예안 오천의 광산김 씨 계열 인사들이 종양(從享)을 도통(道統)의 계승으로 간주하면서 크게 반발하였다.
각 서원이나 문중에서 보내온 의견도 부정적이었다.
오천의 김령은 일기 기록을 남기면서 종향 당시의 여론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그는 이덕홍의 아들들이 퇴계의 도통이 조목에서 김중청, 그리고 자신들에게 이어진다는 적전 의식에서
이러한 일을 꾸민 것으로 보았다.
게다가 그들은 스승을 추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높이려는 술책에서 나왔다고 적고 있다. 31)
정구는 종향위같은 중대사는 예조에 계품해야 하며 독단적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32)
이듬해인 1613년 4월 도산서원 원장 금경(琴憬)과 이립(李苙)등은 경상감사 윤휘(尹暉)가 예안을 방문한
자리에서 예안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한 종향위 정문(呈文)을 예조에 올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33)
당시 예조좌랑에 있던 김중청(金中淸)은 예조를 통해 주상에게 종양을 계품(啓稟) 하였으며,
광해군은 ‘계(啓)’를 적어 수의 할 것을 재가하였다. 34)
김중청(金中淸)은 이광윤(李光胤), 박수의(朴守誼), 박수근(朴守謹) 등과 함께 영남 사람으로 서울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여 다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에게 올렸다.
그러자 영상 및 원임대신들이 모두 하나같이 재가해 줄 것으로 회계하였다. 35)
종향위 건으로 1614년 1월 19일 안동 향교에 모여 가부를 결정하였는데, 36)
참석자 82명 가운데 반대 22명 외는 모두 찬성하였다. 37)
이러한 과정을 거쳐 월천을 도산서원에 종 향하는 것이 최종 결정되었으며, 종양 관문이 9월에 도착하였다. 38)
김령은 중신뿐만 아니라 정인홍, 이이첨 등이 힘을 다하였고 조목의 문인들을 기용하여 이를 도모하였으니
어찌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고 하면서 이강이 이이첨의 치질을 핥음과 이광윤이 석광(碩光)에게
아부함과 김중청이 권세가와 안팎이 된 것과 이 잠의 허장성세는 일일이 거론할 것도 없다고 한탄하였다.
도산서원 원장 김택용은 회문의 도착을 계기로 절목을 상의하기 위한 회의를 9월 13일 개최하였다. 39)
11월 9일 도산서원에서 종양이 거행되었다. 40)
그러나 월천계가 중심이 되어 종양을 이루어내었으나 월천계는 친대북적인 정치 성향으로 인해 향촌에서
차츰 고립되어 갔다.
월천계는 예천에는 이광윤(李光胤), 박수근(朴守謹) 등이 중심이 되어 1611년 퇴계 선생을 모신
정산서원(鼎山書院)을 세웠다가 1615년 3월 25일 조목을 종 향하였다. 41) 1677년 9 숙종 3) 사액되었다.
봉화에는 김중청(金中淸) 등이 중심이 되어 1616년 퇴계 선생을 제사 지내고 월천 선생을 종사하는
창해서원(昌海書院)을 건립하였다가 42) 1617년 9월 봉안제를 지냈다. 43)
1694년(숙종 21)
4. 김중청의 학문 연원과 교유관계
1) 김중청의 학문 연원
김중청(金中淸)은 어릴 때 집안의 문호를 부지할 인물로 촉망받았다. 커서는 퇴계 이황을 사숙하였으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월천(月川) 조목(趙穆),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스승으로 모셨다.
경학(經學)의 정수(精邃)는 조목에게서,
문장(文章)의 오건(奧健)함은 박승임에게서,
예학(禮學)의 순수함은 정구에게서 물려받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44)
먼저 소고 선생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김중청(金中淸)은 8세(1573, 선조 6) 때 부친 첨지공(僉知公)의 명으로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선생(先生:1517~1586)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1585년(선조 18)배웠다. 45)
1586년(선조 19)
1618년(광해 10)
이듬해는 한강 선생에게 소고 선생의 묘갈명을 작성해 주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김중청은 스승을 위해 행장과 제문을 지었다. 46)
김중청은 스승이 3대의 조정에서 두루 벼슬을 하였는데 그동안 여러 사화가 일어났으나 홀로 참화를
면한 것은 일생 동안 청신하고 근칙 하였기 때문이라고 평하였다. 47)
한편 월천 선생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12세(1577, 선조 10) 때 월천(月川) 조목(趙穆)에게 나아가 수업하였다.
당시 월천은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선생은 월천을 관아에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였다.
14세 때인 1579년(선조 12)에는 당시 월천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열었던 월천서당에 나아가
글을 배웠다. 월천서당에서 문하의 여러 학자들과 종유 하게 되었다.
월천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신달도는 선생의 만사에 1596년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병신년 책을 짊어지고 천상에 가서 공부하면서 공을 알게 되었다.
서로 권하고 격려하여 깊이 마음을 합하였다. 나의 어리석음을 충고하고 나의 조급한 행동을 책망하였다.
학문의 연원을 캐어 멀리 이락까지 올랐으며, 시간을 아끼면서 예서를 깊이 탐구하였다. 48)
1597년(선조 30)
1601년(선조 34)
1605년(선조 38)
월천은 “평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 볼 수 없었던 것이 한이 되었는데 이제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아쉬워하였다. 월천이 제자인 구전을 아낌이 지극하였음을 볼 수 있다. 49)
병이 조금 나았다가 이듬해인 1606년(선조 39) 10월 월천 선생이 돌아가셨다. 이에 제문과 만사를 지었다.
1616년(광해군 8)
조목(趙穆)을 종사하는 창해서원(昌海書院)을 세웠다. 50)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에 있던 이 서원은 1694년(숙종 20) 문암서원(文巖書院)으로 사액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었다.
1617년(광해군 9)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1607년(선조 40) 4월 당시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선비들을 모아 [심경]을 강독하였는데,
김중청은 선생을 찾아가 뵙고 머물면서 강독에 참여하였다. 8월 다시 가서 더 배우기를 청하였다.
1615년(광해군 7)부터는
내암 정인홍으로부터 역모 밀고를 받았으나 이를 중간에 무마하기도 하였다.
1620(광해군 12)
선생 사후에도 경로에 있을 때마다 들려 한강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제문에서 김중청은 정구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 나라의 운명이 쇠하려고 할 때에 선생께서 병이 드셨고,
유교의 바른 맥이 장차 떨어지려고 할 때 선생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번 다시 대궐에서 호소할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인륜과 기강을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 의문을 질정할 곳이 없어졌으니 우리 후학은 슬프기가 끝이 없습니다.
이제 사양의 물가는 황폐하고 쓸쓸하며 매원도 적막하게 되었습니다.
공경심을 지니고 의리를 밝히시려고 평생 동안 힘을 쓰셨으며,
유를 나누어 능력을 발휘하고 가르침을 주시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호방하고 의젓하신 자질을 가지고 계셨으며, 영특하고 순수한 모습은 지녔습니다.
소자가 문하에 들어간 것은 많은 사람들보다 나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주의 수령으로 있던 4년 동안 곡진하신 가르침을 배불리 받았습니다. 51)
김중청(金中淸)은 한강의 만년(晩年) 제자이면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제자였다.
한강 선생이 65세 안동대도호부사에 부임하였을 때 42세의 김중청(金中淸)과 처음 만났다.
그 이후 신안현감으로 근무할 때는 고향에 오가면서 반드시 사수에 들러 한강을 뵙고 갔다.
이에 대해 김시찬(金是瓚)은 공자 문하의 자유와 같았다고 적고 있다.
2) 김중청의 교유 관계
김중청(金中淸)의 교유관계는 청년기의 경우 스승인 월천으로부터 이어지는 학맥으로부터 많은 교유관계를
보이고 있다.
장년의 1615년 이후에는 한강 정구 및 여헌 장현광과 그 제자들과 밀접한 교유관계를 보이고 있다.
그 외에도 김중청은 회곡 권춘란을 스승으로 모셨다.
1615년(광해군 7)방문하였다. 53)
회곡이 사망하자 1617년(광해군 9)에는 부친을 뵈려 가는 길에 회곡을 조문하였다.
후일 용산서원에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을 때 봉안문을 올렸으며, 회곡을 위한 상향 축문에서는
“인은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았고 학문은 오직 도를 구하였을 뿐이었네,
재능을 감추고 뜻을 돈독히 하였으며, 높은 지조는 잘 다듬었네”라고 하였다. 54)
한강 정구와 마찬가지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도 수시로 방문하면서 학문을 구하였다.
1615년 경상우도 경시관으로 내려가면서 방문한 후 1617년(광해군 9)과 1618년(광해군 10)에는 수 차례
여헌을 찾아가 방문하였다.
한강과 여헌을 방문할 때는 그 제자인 김집(金潗), 장흥효(張興孝), 이윤우(李潤雨), 최현(崔晛),
이언영(李彦英), 이탁(李濯) 등과도 교분을 쌓았다.
1618년(광해군 10)에는
이광정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
소암(踈庵) 임숙영(任叔英:1576~1623), 계암(溪巖) 김영(金坽:1577~1641)등 여러 선비들이 선생을 존경하는
벗으로 여기지 않은 이들이 없었으니 선생이 그때에 중히 여김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고 적고 있다. 55)
한편 중앙 관료로 근무할 때의 친우관계는 1614년(광해군 6) 천추사 겸사은사(千秋使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 수도 북경으로 갈 때 조정의 친우들이 적어 준 시장(詩章)을 묶은 [부경별장]을
통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2 책으로 장첩(粧帖)하였다가 나중에 3권으로 분책(分冊) 하였다. 56)
후일 문집(文集)에 수록하면서 23명의 시를 수록하면서 연행증유(燕行贈遺)로 축약하였다.
이에 친구인 임숙영(任叔英)의 서문과 말미에 1788년 이광정(李光庭)이 쓴 발문(跋文)이 추가되어 있다. 57)
지역에서 교분이 있는 이로는 대표적으로 외천의 영천이 씨를 들 수 있다.
특히 봉화현감 임혁과 김중청 집안간의 갈등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1608년 외천의 이 시(李蒔), 이립(李苙)등이
김중청을 구하기 위해 감사에게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58)
다만 이때 가까운 고을의 사람들의 이름까지 모두 적어 연명하여 올렸는데 허락받지 않은 사람의 명단도 있어서 지역에서
문제가 되었다. 59) 외천의 6형제 가운데 막내인 이모(李慕)는 선생의 문인이면서도 사위가 되었다.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김중청의 교유권은 중앙 정계의 요로에 있던 인물에서부터 지역에 교분이 있던
인물과 문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임숙영은 서문에서 김중청을 알고 지낸 지 20년이 되었는데 영남지방에서 배출된 인물 가운데 문장과 행실에
김중청보다 나은 이가 없다고 칭송하고 있다. 60)
김중청은 이 시첩에 대해 “그 내용을 보니 간혹 옹색한 나에게 장황하게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힘쓰게 하고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도하여 나아가게 하고 부끄럽게 여겨 격려하는 것이 나를 힘쓰게 하고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61)라고 적어 중국으로의 사은 기간 동안 자신의 마음을 경계하는 징표로 삼고자 하였다.
<표-1> [부경별장]을 통해 본 교유권
이름(姓名) | 본관(本貫) | 자(字) | 호(號) | 제향처(祭享處) | 비고(備考) |
심희수(沈喜壽) | 청송(靑松) | 백구(伯懼) | 일송(一松) | 상주,봉암서원 | 좌의정, 시호(諡號)문정(文貞) |
이호민(李好閔) | 연안(延安) | 효언(孝彦) | 오봉(五峯) | 지례,도동서원 | 좌찬성, 시호(諡號)문희(文僖) |
류 근(柳 根) | 진주(晋州) | 회부(晦夫) | 서경(西坰) | 괴산(화암서원 | 좌찬성, 시호(諡號)문정(文靖) |
이시발(李詩發) | 경주(慶州) | 양구(養久) | 벽오(碧梧) |
| 형조판서,시호(諡號)충익(忠翼) |
조존세(趙存世) | 양주(楊州) | 선계(善繼) | 청호(聽湖) |
| 공조참판 |
박 록(朴 漉) | 반남(潘南) | 자징(子澄) | 반곡(蟠谷) |
| 의금부도사 |
김 치(金 緻) | 안동(安東) | 사정(士精) | 南峰,深谷 |
| 경상도관찰사 |
김상헌(金尙憲) | 안동(安東) | 숙도(叔度) | 청음(淸陰) | 양주,석실서원 | 영의정, 시호(諡號)문정(文正) |
김 용(金 涌) | 의성(義城) | 도원(道源) | 운천(雲川) | 안동,덕봉서원 | 병조참의 |
차천로(車天輅) | 연안(延安) | 복원(復元) | 오산(五山) |
| 봉상시 첨정 |
배대유(裵大維) | 김해(金海) | 자장(子張) | 모정(慕亭) |
| 병조참의 |
이순민(李舜民) | 전주(全州) | 호여(皞如) | 淸狂,伊峰 |
| 울산부사 |
유 활(柳 活) | 흥양(興陽) | 원숙(源叔) | 태우(泰宇) |
| 이조정랑 |
성이민(成以敏) | 창녕(昌寧) | 퇴보(退甫) | 삼고당(三古堂) |
| 공조정랑 |
이 준(李 埈) | 흥양(興陽) | 숙평(叔平) | 창석(蒼石) | 상주,옥성서원 | 대사간 |
박정길(朴鼎吉) | 밀양(密陽) | 양이(養而) | 응천(凝川) |
| 병조참판 |
송광계(宋光啓) | 야로(冶爐) | 군옥(君沃) |
|
| 사정 |
변응원(邊應垣) |
|
| 구강(九江) |
|
|
김 욱(金 頊) | 안동(安東) | 여신(汝愼) |
|
|
|
조우인(曺友仁) | 창녕(昌寧) | 여익(汝益) | 현남(峴南),매호(梅湖),이재(頤齋) |
| |
금 개(琴 愷) | 봉화(奉化) | 언강(彦康) | 망월헌(望月軒) |
| 헌납 |
이상급(李尙伋) | 성주(星州) | 사언(思彦) | 습재(習齋) |
| 증이조판서,시호(諡號)충강(忠剛) |
이경직(李景稷) | 전주(全州) | 상고(尙古) | 석문(石門) |
| 강화유수, 시호(諡號)효민(孝敏) |
임숙영(任叔英) | 풍천(豊川) | 무숙(茂叔) | 소암(疎庵) |
| 부수찬 |
양만고(楊萬古) | 청주(淸州) | 도일(道一) | 감호(鑑湖),둔호(遯湖) | 군자감정 | |
박수서(朴守緖) | 咸陽) | 경승(景承) | 우계(尤溪) | 순흥,도고서원 | 우승지 |
최정운(崔挺雲) |
|
|
|
|
|
조응휴(曺應休) | 창녕(昌寧) | 덕부(德符) | 한언(漢彦) |
| 현감 |
김정익(金廷益) | 경주(慶州) | 사겸(士謙) | 득지(得地) |
|
|
황중윤(黃中允) | 평해(平海) | 도광(道光) | 동명(東溟) |
| 좌부승지 |
김 영(金 坽) | 광산(光山) | 자준(子峻) | 계암(溪巖) |
| 증도승지, 시호(諡號)문정(文貞) |
전이성(全以性) | 축산(竺山) | 성지(性之) | 운계(雲溪) |
| 합천군수 |
정 준(鄭 遵) | 해주(海州) | 행지(行之) |
|
| 이조정랑 |
안숭검(安崇儉) |
| 백공(伯恭) | 오지(五芝) |
|
|
박선장(朴善長) | 무안(務安) | 여인(汝仁) | 수서(水西) |
| 예안현감,경상도사 |
임 흘(任 屹) | 풍천(豊川) | 탁이(卓爾) | 용담(龍潭) |
| 동몽교관 |
김상용(金尙容) | 안동(安東) | 경택(景擇) | 선원(仙源) | 강화,충렬사 외 | 이조판서, 시호(諡號)문충(文忠) |
오여발(吳汝橃) | 고창(高敞) | 경허(景虛) | 경암(敬菴) |
| 대구도호부사 |
김시주(金是柱) | 의성(義城) | 이립(以立) | 개호(開湖) |
| 병부랑 |
김봉조(金奉祖) | 풍산(豊山) | 효백(孝伯) | 학호(鶴湖) |
| 예조정랑 |
신한용(辛翰龍) | 취성(鷲城) |
| 인백(鱗伯) |
|
|
이경인(李景仁) | 연안(延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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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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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未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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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李 慕) | 영천(永川) | 효사(孝思) | 익양(益陽),소백(小白) |
| |
김형상(金瀅相) | 광산(光山) |
|
|
| 1904년 3책 분책 후 발문 |
김광혁(金光爀) | 안동(安東) | 회경(晦卿) | 동림(東林) |
| 광주목사 |
이경의(李景義) | 연안(延安) | 자방(子方) | 만사(晩沙) |
| 이조참판 |
이명한(李明漢) | 연안(延安) | 천장(天章) | 백주(白洲) |
| 대제학, 시호(諡號)문정(文靖) |
권 점(權 點) |
|
| 철애포의(鐵崖布衣) |
| |
박회무(朴檜茂) | 반남(潘南) | 중식(仲植) | 육우당(六友堂) | 영천,산천서원 | 의금부도사 |
권주(權 黑+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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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계종(金繼宗) |
| 효숙(孝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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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오(安 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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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래(權 來) | 안동(安東) | 락이(樂而) | 진휴자(眞休子),석천(石泉) |
| |
오 윤(吳 奫) |
| 경홍(景泓) | 사암(思巖) |
|
|
손 우(孫 祐) | 월성(月城) | 이길(以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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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형(李之馨) | 진성(眞城) | 여훈(汝薰) |
|
| 적성현감 |
이홍중(李弘重) | 진성(眞城) |
| 구암(龜巖) |
|
|
배상익(裵尙益) | 대구(大邱) | 익재(益哉) | 치암(癡巖) | 천곡,봉계서원 | 진주판관 |
서 긍(徐 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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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일(朴惟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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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원(琴 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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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기(權在璣) | 예천(醴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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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선(權在璿) | 예천(醴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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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국(李榮國) | 영천(永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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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未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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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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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未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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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중청의 활동과 월천계 내 위상
1) 김중청의 활동
김중청(金中淸)은 월천의 문집 편집과 예조좌랑 재직 시 월천의 도산서원 종향,
신안현감 재직 시 창해서원 종양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월천의 도산서원 종양에는 서울에서 예조에 근무하면서 정문을 올린다거나 서울에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서명을 받아 올리거나 월천의 종향에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주장에 논박하는 등 62)
논의의 진행과정에서 북인의 집권 당사자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일의 성사를 주도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63)
김령은 김중청을 영남 상도 출신으로 시류에 영합한 자로 거명할 정도였다. 64)
또한 북인정권에 밀착되었던 이덕홍의 자제들과는 혼인 관계로 맺어지고 또한 중앙에 있으면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북인정권 자체는 김중청은 그렇게 지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당시 예안지역에서 대북정권과 밀접하게 관련된 이들은 외천의 영천이 씨, 온계의 고창오 씨,
서촌의 덕산윤 씨 등이었다. 65) 오히려 영천이 씨의 6형제 내에서도 대북정권에 한 걸음 물러선 이도 있었다.
김중청은 월천의 도산서원 종양 과정에서는 친북인계 입장에 강하였으나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는
대북정권에 그렇게 밀착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츰 부포의 봉화금 씨, 한곡의 예안김 씨 등과 함께 차츰 북인정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1615년 정언으로 있으면서 북인정권의 요청을 거부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사직하였다.
1616년 신안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차츰 북인과는 결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66)
1616년(광해군 8)
사귈 수 있다고 대감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문인들에게 선사를 배반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저는 학술도 모르는 귀머거리나 장님과 같아도 청천백일을 청천백일이라고 하는 것은 안다고
하면서 저는 월천을 독실히 믿고 있는데 어찌 선사를 배반할 수 있겠는가고 항의하였다. 67)
예안에서의 친우이었던 김령도 종양 건이나 창해서원 건립 건, 그리고 광해군대각급 재직 시에는 김중청을
비난하였으나 68) 인조반정 후 봉화로 귀향한 후로는 김중청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크게 악화되지 안 핬으며,
김령과 김중청의 아들과 좋은 관계를 지낼 뿐만 아니라 김령의 자제가 김중청의 아들 김주우의 집에
출입하는 등 인조반정 후에는 김중청과 좋은 관계를 이끌고 가고 있다.
김중청이 심한 정신착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가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보이고
있으며, 69)김중청이 죽고 나서 그의 집을 수색하면서 이복동생이던 김득청(金得淸)의 흉한 일이 드러나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일을 겪었는데 70)이에 대해서도 김령은 안타까운 심정을 말하고 이 일을 현명하게
처리한 봉화 수령을 칭찬하고 있다. 71)
김중청은 월천의 종형과 추숭 작업을 강력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앙정계에 있으면서 북인의 힘을 빌리는 등
친북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나 이 일이 마무리된 이후에는 차츰 북인과는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조반정 이후 고향에 있으면서는 사이 벌어졌던 예안의 사족과의 갈등이 봉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김중청의 월천계 내 위상
문집에는 23분이 쓴 만사와 제자들이 만든 제문이 있다.
김중청 사후 이증효(李曾孝), 남형회(南亨會), 박돈(朴燉), 배숙전(裵淑全) 등 문인들이 공동으로 올린
제문에서는 스승인 김중청의 일생을 간략히 소개한 다음다음과 같이 소회를 적고 있다.
뜻밖에도 병에 걸리셔서 마침내 치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시골에서는 모범이 될 만한 분이 없게 되었고, 나라에서는 자문 역할을 할 분을 잃게 되었다.
이런 일은 사람이 주관하는가 귀신이 주관하는 가. 하늘에 물어봐도 알 수가 없다.
아! 슬프도다,
우리 무리의 소자들은 다행히도 선생의 강당에 의탁하였는데 우리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르치고 지도하여 학문의 방향을 알게 하였으니, 이루어지고 만들어진 은혜는 의리가 어버이와 같다.
그런데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학업을 어디다 질정을 하겠습니까?
서로 쳐다보면서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러내립니다. 72)
친구이자 사돈이기도 한 이 시(李蒔)는 구전(苟全)의 학문에 대해
“학문에서 연원이 있어 명망은 동방에 알려졌다.
유림의 마루가 될 만하고, 나라의 기강을 부축할 만하다.”73)고 적도 있다.
한편 주위에 있던 친우들은 선생이 사망하자 만사를 작성하여 보내주었다.
만사 작성자인, 김상용(金尙容), 박정선(朴鼎善), 이호민(李好閔), 박동선(朴東善), 배상익(裵尙益),
돌아요(都汝兪), 권익창(權益昌), 목장흠(睦長欽), 김광현(金光炫), 신달도(申達道), 권굉(權宏), 김령(金坽),
류진(柳袗), 박록(朴漉), 목성선(睦性善), 황호(黃戶+木), 고인 계(高仁繼), 김광혁(金光爀), 류석(柳碩), 류영(柳潁)
김득연(金 得 硏), 김걸(金 杰), 김율(金瑮) 등은 모두 당대 퇴계학파 내 각 계열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 만사에서는 김중청의 학적 위상과 학문적 위상을 보여준다.
만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김상용(金尙容)은
“일가 중에 다행하게도 공같이 어진 분이 있었네”라고 적어 일족의식을 보여준다.
신달도(申達道)는
“근원을 궁구 하며 멀리 이락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푼과 치를 예서에서 깊이 비교하였다
상대방도 장부이고 나도 장부라 여기며 선진의 자취를 따랐지만 힘이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함이여,
세월이 빨리 지나감이 애석하도다.”라고 학문을 같이 한 동지임을 밝히고 있다.
김율(金瑮)은
“월천 문하에서 함께 학업을 닦을 제, 당시 재주와 학문은 공을 가장 칭송했었지, 문장은 여사로 부질없이 무리에게 친해졌고,
도의는 감화를 이루어 nt 어리석은 이를 깨우치게 하였네”라고
월천 문하에서 공의 재주와 학문이 가장 뛰어났음을 적고 있다.
연보와 행장에서도 선생의 문장과 경술은 동류 75) 가운데 가장 으뜸이었다고 적고 있다.
선생의 문장(文章)과 경술(經術)은 동류들에게 있어 으뜸이었다.
본래부터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할 뜻을 지녔지만,
혼탁한 조장을 만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조가 반정한 뒤에는 또 유언비어에 의해 여러 차례 모함당하는 바가 되었다.
선생이 효상을 관찰하고 점을 쳐보고는 전원에서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며 생도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기며
근심을 잊고 있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매번 함께 경연(經筵)에 오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매번 선생의 예학(禮學)에 미치지 못한다고 탄복하였다. 76)
당시 사우가 월천 선생 문하의 선비들을 품평하면서 번번이 제일 먼저 공을 꽂았다. 77)
류성룡계인 오천의 김령은 비록 종양 논의과정에서 김중청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언급한 것이지만
월천계의 적지 않은 후학들이 월천의 도통을 구전 김중청이 잇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립의 무리들이 퇴계 선생의 도통이 월천에게 전해졌고, 월천은 중청에서 전했다 한다.
대개 그전에도 이미 이런 말이 있었는데 오늘의 이 소행은 이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심하도다. 소인배의 허물이여! 78)
들으니 봉화의 서원에서 9월 5일 퇴계 선생을 봉안하고 월천을 종사한다고 한다.
이는 모두 김중청이 농간을 부린 것이다.
원장 금학고가 통문을 내어 각 읍의 향교와 서원에 경제적 도움을 청하였다고 하니 더욱 무리한 짓이다. 79)
퇴계를 모신 서원은 영천, 안동, 예안 세 고을로서 옛날부터 본디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 뒤따라 세운 것들은 혹 선생과 평소에 인인이 있거나 혹은 흠모하여 정성을 다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창해서원은 김중청의 본 뜻이 선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스승인 월천에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선생을 빙자하지만, 월천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월천이 이름은 비록 종사라고 하지만 사실은 주벽이다. 80)
비판적 언급이지만 이를 통해 보면 월천계나 서애계가 모두 공통적으로 월천의 도통을 김중청이 잇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의 활동에서도 김중청은 월천을 가까이 모시고 학문을 이어갔으며,
영지산과 청량산에 직접 모시고 다녀왔다.
예조좌랑으로 재직 시 월천의 도산서원 종양을 주도하였으며, 봉화에 퇴계와 월천을 모시는 창해서원의
설립을 주도한 명실상부한 월천계의 적전이었다.
한편 말년 구미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활동으로 [구전선생문인록]81)에서 보이듯이 월천의 제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문인을 거느리고 있다.
제자들의 분포를 보면, 봉성금 씨, 영천이 씨, 반남박 씨, 영양남 씨, 안동권 씨, 원주변 씨, 야성송 씨 등
봉화 특정 집안의 인물들이 일괄적으로 문인록에 등제된 경우가 다수이다.
이들의 거주지는 대체로 봉화, 영주, 예안, 안동 등 경상도 동북부 지역에서 분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간재 이덕홍의 육 형제인 시(蒔), 립(苙), 강(茳), 무(茂), 점(蒧), 모(慕)가 모두 김중청에게서
학문에 입문하였다.
<표-2> 구전선생문인록
성명(姓名) | 자(字) | 本貫 | 居住 | 이력(履歷 | 비고(備考) |
금이고(琴以古) | 정여(靜如) | 鳳城 |
| 隆慶辛未生,生員,僉知,應時,子 | 先生妹弟 |
이광흡(李光洽) |
| 永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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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계(李榮係) | 중길(重吉) | 永川 |
| 說書,苙,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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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위(朴 煒) | 명보(明甫) | 潘南 |
| 入格 |
|
남석규(南錫圭) |
| 英陽 |
| 入格 |
|
권 남(權 欖) | 백섭(伯涉) |
|
| 入格 |
|
권경란(權慶蘭) | 자문(子聞) | 安東 | 奉化 | 壬午生,入格 |
|
금 원(琴 援) | 도제(道濟) | 鳳城 |
| 萬曆壬午生,生員 |
|
김익청(金益淸) | 이경(而敬) | 安東 |
| 萬曆壬午生,勵節校尉 |
|
이시위(李時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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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명(金世鳴) | 선숙(善叔) | 英陽 |
| 奉事 介臣 子,萬曆戊午生,入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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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배(李大培) |
| 延安 |
| 入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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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창(李 菖) |
| 永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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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고(琴尙古) | 분여(賁如) | 鳳城 |
| 萬曆癸酉生,將仕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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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검(權 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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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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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준(權在璿) |
| 醴泉 |
| 入格 |
|
권재기(權在璣) |
| 醴泉 |
| 入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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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朴 燧) | 양보(陽甫) | 潘南 |
| 通訓 |
|
금우고(琴友古) | 목여(穆如) | 鳳城 |
| 萬曆甲申生 |
|
금순고(琴純古) | 박여(樸如) | 鳳城 |
| 友古弟,萬曆丁亥生,生員 |
|
황유문(黃有文) | 여욱(如郁) | 平海 | 禮安 | 入格 |
|
황유장(黃有章) | 여정(如貞) | 平海 |
| 有文弟,入格 |
|
금대유(琴大有) |
| 鳳城 |
| 僉知 |
|
금대수(琴大遂) | 형백(亨伯) | 鳳城 |
| 萬曆丙子生,生員 |
|
금신고(琴信古) | 부여(孚如) | 鳳城 |
| 萬曆丙子生,訓導 |
|
박 돈(朴 燉) | 회이(晦而) | 潘南 | 奉化 | 號 梅巖,壬辰生,生員 |
|
이진남(李振南) | 위중(偉仲) | 花山 | 奉化 | 壬辰生,僉知 |
|
금시수(琴是修) | 신지(身之) | 鳳城 |
| 以古 子,萬曆壬辰生,虞侯 |
|
송대건(宋大健) |
| 冶城 | 榮州 | 訥翁 碩忠 玄孫,同知 |
|
송대덕(宋大德) |
| 冶城 | 榮州 | 號 屛巖,副護軍 福綏 孫,贈左承旨 |
|
김 집(金執+金) |
| 宣城 | 榮州 | 知事 |
|
이시암(李時馣) | 문약(聞若) | 原州 |
| 號晩聞,生員,澤子,幼學 東溟金世濂,先生孫壻,文都事 | 李光庭祖父 |
이시겸(李時謙) |
| 全州 | 安東 |
|
|
변유한(邊有翰) |
| 原州 | 安東 | 號 鶴皐,副正 鑰 子,癸巳生 |
|
이 점(李 蒧) | 사성(師聖) | 永川 | 榮州 | 號 太白/天遊子,艮齋 德弘 子,翰林 |
|
권 혁(權 赫) |
| 安東 |
| 松巢 孫,入格 |
|
윤희현(尹希賢) | 국보(國輔) | 襄陽 | 安東 |
|
|
이증효(李曾孝) | 학가(學可) | 眞城 | 安東 | 號 磨峯 |
|
권 철(權 喆) |
| 安東 |
| 權赫 弟 |
|
권 즙(權 楫)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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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회(金 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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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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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金 鍌) | 여정(汝精) | 宣城 |
| 號孤山/梅鶴,丙辰生,孝誠出天,天啓乙丑別試,興海郡守 |
|
이 잠(李 埁) |
| 羽溪 | 順興 | 濟用監正 孝鱗 子,文科,郡守 |
|
금시리(琴是理) | 지성(之性) | 鳳城 |
| 是修 弟,萬曆甲申生 |
|
조임도(趙任道) | 치원(致遠) | 咸安 |
| 號 澗松,立巖 埴 子,萬曆乙酉生,師傳,佐郞 |
|
김주명(金柱明) | 광하(光夏) | 安東 |
| 勵節校尉 益淸 子,戊申生,享年八十五歲, 護軍 |
|
금시윤(琴是胤) | 지사(之嗣 | 鳳城 |
| 是理 弟,萬曆己亥生 |
|
변 전(邊 銓) | 자평(字平) | 原州 | 奉化 |
|
|
권 균(權 鈞)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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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화중(權和重) |
| 安東 |
| 慶蘭 子,入格 |
|
신홍망(申弘望) | 망구(望久) | 鵝洲 |
| 號 孤松,贈吏曹參判,之悌 子,萬曆庚子生,同副承旨 |
|
남형회(南亨會) | 이원(貳元) | 英陽 |
| 號 塔窩,錫圭 子,萬曆丁未生,生員 |
|
금세겸(琴世謙) | 휘길(撝吉) | 鳳城 |
| 生員 援 子, 萬曆丁未生,進士 |
|
금시율(琴是律) | 자성(子聲) | 鳳城 |
| 尙古 子,萬曆庚子生,入格 |
|
금시여(琴是呂) | 자행(子行) | 鳳城 |
| 判官 胤古 子,萬曆辛丑生 |
|
조함세(趙咸世) | 오의헌(五宜軒) |
|
|
|
|
조숭주(趙崇周) |
| 全州 |
|
|
|
권 추(權 鎚) |
| 全州 |
|
|
|
유상혐(柳尙馦) |
|
|
|
|
|
이 우(李 鍝) | 익정(益精) | 延安 |
| 大培 子,生員 |
|
유상암(柳尙馣) | 치원(致遠) | 全州 |
| 己酉生 |
|
유상시(柳尙時) | 시재(時裁) | 全州 |
| 己酉生 |
|
남형구(南亨久) |
| 英陽 |
| 亨會 弟,入格 |
|
장 휘(張 徽) |
|
|
|
|
|
유형립(柳亨立) | 시우(時遇) | 全州 |
| 生員 |
|
권 목(權 霂) |
| 安東 | 安東 | 冲齋 權橃 后,參奉 |
|
홍 찬(洪 鑽) |
| 南陽 |
|
|
|
유정립(柳貞立) |
| 全州 |
| 亨立 弟,文科,縣監 |
|
금형달(琴亨達) | 숙하(叔夏) | 鳳城 |
| 萬曆丙辰生 |
|
금치겸(琴致謙) | 광길(光吉) | 鳳城 |
| 是胤 子,,進士萬曆丙辰生 |
|
이 모(李 慕) | 효사(孝思) | 永川 |
| 艮齋 德弘 子,先生 婿,修撰 |
|
이영복(李榮復) |
| 永川 |
| 入格 | 李命弘蒙子 |
배숙전(裵淑全) |
| 興海 |
| 翰林 龍吉 子 |
|
금상협(琴尙協) | 여성(汝成) | 鳳城 |
| 見龍 子,萬曆 丙申生,壽階 嘉善,護軍 |
|
이영국(李榮國) |
| 永川 |
| 入格 | 李福弘衡子 |
금대아(琴大雅) | 정시(正始) | 鳳城 |
| 丁巳生,生員 |
|
금익겸(琴益謙) | 자수(子受) | 鳳城 |
| 司宰監正 夢 祥 子,萬曆 己丑生,入格 | 先生 孫壻 |
금대진(琴大振) |
| 鳳城 |
| 入格 |
|
이신승(李愼承) | 가술(可述) | 永川 |
| 進士 |
|
권상재(權尙載) | 덕여(德汝) | 安東 |
| 進士 |
|
남효각(南孝恪) |
|
|
| 入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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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년(宋大年) |
| 冶城 | 榮州 | 生員 |
|
정승선(鄭承先) |
| 東萊 |
| 入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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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전선생문인록]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와 비고는 필자가 보충한 것이다.
김중청에 대한 추모사업으로는 1669년(헌종 10)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선생이 강학하던
봉성(鳳城)의 반은동(槃隱洞) 서재(書齋) 아래에 있는 골짜기 송추(松楸) 밑에 반천정사(槃泉精舍)를 건립하였다.
묘우(廟宇) 3間, 강당(講堂) 8間이었다.
선생이 북경에 갔을 때 공자의 화상을 구해왔는데 1614년 서재에 봉안하였다가 1669년 정사가 완성되자 강당의
북쪽 벽에다 옮겨 봉안하였다. 1677년에는 사린에서 선생의 위판을 반천정사에 봉안하였다.
1787년 지역
명의로 인근 각 서원으로 승원(陞院) 통문을 돌렸다.
그 후로도 승원을 위한 지역에서 거듭된 요청에 의해 1831년(순조 31) 봄 마침내 반천서원(槃泉書院)을 설립하였다.
이때 각 문중과 서원에서는 서원 건립에 따른 경비를 위해 부조금을 냈었다.
그러나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반천서원(槃泉書院)도 훼철(毁撤) 되었다. 82)
그러나 선생의 후손들과 지방 유림들이 유계(儒楔)를 결성하여 세의를 돈독히 하고 선생의 유지를 받들었다. 83)
2004년 봉화 유림들이 선현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송천서원, 반천서원, 백록리사, 등 3개 원사를 한 곳에 통합
복원하고 그 이름을 송록서원(松麓書院)으로 명명하기를 결의하였다.
이듬해 착공하여 2007년 월 20일 개원하였는데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등 지역출신 10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김중청의 글로 [부경별장(赴京別章)] 3 책과 [강원일록(講院日錄)] 1 책이 남아 있다.
부경별장(赴京別章)은 김중청이 1614년(광해군 6) 천추사 겸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중국 북경에 가게 되자 조야의
지인들이 친히 시를 적어 전별을 표시하였는데 이때 모은 시들을 시첩으로 만든 것이다.
원래는 상하 2첩으로 장정되어 있었으나 후일 상, 중, 하 3 책으로 새로 장정하였다.
일부 내용은 문집의 [연행유증]에 수록되어 있으나 축약되기 전의 원본이다.
강원일록(講院日錄)은 1615년(광해군 7) 3월 10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에 임명되면서부터 이듬해
신안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10월 30일까지의 일기다.
김중청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내밀한 생각이 드러나 김중청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이다.
한편 김중청의 시문은 문인 탑와(塔窩) 남형회(南亨會)가 김중청의 손자(孫子) 김양열(金楊烈)과 함께 편집하여
10여 권으로
이동표의 사망으로 작업이 중지되었는데 김중청의 외현손(外玄孫)인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1674~1756)이
1744년 후손인 김이명(金爾銘), 5대손 김태운(金泰運) 등과 함께 다시 수정하고 행장(行狀)과 연보(年譜) 등을
첨부하여 6권으로 편차하였다. 그럼에도 인쇄에 넘기지 못하다가 후손 김영택(金榮宅) 등이 유고(遺稿)를 바탕으로
김시찬(金是瓚)의 교정(校正)을 거쳐 1829년 김정균(金鼎均:1782~1847)에게 서문을 받아 1831년 경 목활자본
문집을 간행하였다.
인쇄본은 원집(原集) 6권, 연보(年譜), 부록(附錄), 별집(別集)[조천록(朝天錄)] 등 합 4 책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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