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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회복 : 정체성
1부 정체성을 새로 읽는다.
1-2 용서하는 그리스도인
복음의 핵심이자 생명은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없으면 복음이 성립될 수 없고 십자가가 빠지면 교회는 교회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알기 전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사함의 은혜를 주셨다. 이것이 인간에게 하신 하나님 용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용서로 인하여 삶의 기준이 세상과 달라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의 개념은 우리가 먼저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나님도 우리 잘못과 죄를 용서하신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감정적 일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그 용서 그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용서 즉, 십자가의 용서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야하며 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 십자가와 용서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용서이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새로운 인류가 되었고 그 신인류가 드러내야 하는 특징이 용서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며 십자가는 새로운 인류탄생의 유일한 통로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서 새로운 인류가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류탄생의 유일한 통로인 십자가를 한 단어로 말하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용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용서를 통하여 모든 가치를 단 한번에 실현하셨다.
십자가에는 인내와 희생과 사랑이 들어있고 버림도 비움도 공평도 정의도 다 포함되어 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가치가 인간에게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용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그럼 인간에게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담이 지은 원제로 인하여 인간은 죄인이며 죄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우리를 공의의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을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는데 그 죄를 용서하시려는 필요충분조건으로 누군가가 그 죄를 대신 감당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 조건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6:6-7)"
이 십자가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키셨고 비로소 용서가 성립되었다.
십자가는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더이상 죄의 노예로 죄의 종노릇을 하지말라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이 십자가의 용서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절대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로 영원토록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화평을 누리는 은혜를 입은 자들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을 용서하기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주셨고 용서받고 용서할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이 신인류 창조의 통로인 것이다.
● 용서의 상관관계
인간의 심리는 용서하느냐 용서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다.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상당 부분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 상처를 대응하는 반응을 두 단어로 설명한다면 원수 갚음과 용서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갚으려 하지말고 당한 것만큼만 똑같이 갚음으로써 상대와 깨끗하게 끝내고더 이상 원수로 살지 말며 내 안에 있는 악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신19:19-21)"
그러나 이 율법은 죄에서 멀어지기위한 차선책일 뿐이므로 상처에 대한 치유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최선책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용서이다.
성경의 인물 중 아브라함도 이삭도 요셉도 용서의 사람이있고 모세도 다윗도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용서했다.
이들은 원수 갚음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했다고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말씀하셨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용서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를 갚아 주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께 그 원수 갚음을 맡길줄 알아야 하며 용서로 상처를 털어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상대방이 되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핏값으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희생, 값진 용서인 것이다. 우리의 용서는 사람의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로 되어야 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과 똑같은 원리로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내 마음속에 끌어당겨서 그 용서로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상처를 입은 사람은 억울함 때문에라도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시는 그 은혜를 잘 받아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상처를 입힌 타인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의 은혜로 부터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한다.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용서로 용서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 용서의 순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회개해도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우리가 용서하지 않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상처를 안고 열심히 부르짖고 울부짖으면서 회개해도 내가 용서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그 회개 기도는 무용지물 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것을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예수님께서는 몇 번이나 형제의 죄를 용서하면 되겠느냐의 베드로의 질문에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말씀하셨다.
즉,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이는 무한용서를 뜻하며 완전한 용서를 말하는 것이다.
완전한 용서는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며 이것을 행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못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이 용서를 청하지 않아도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일은 상대가 용서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죄인지를 몰라서 그렇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를 구할 때 상대도 같은마음으로 회개한다면 그 죄를 용서받기에 상대방의 반응에 관계없이 먼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
●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하고 싶지도 않고 용서할 수도 없는 이 현상에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닐것이며 그리스도인인데 용서하는 그 일 자체를 거부하거나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가장 첫째 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용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용서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용서를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함으로써만이 행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용서한다면 자기주장을 굽혀야만 한다. 또한 비판이나 정죄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 용서하기 어려울때에는 바로 십자가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용서가 세상에 복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
또한 우리가 놓치는 부분 중의 하나는 용서에는 댓가가 따른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시기위해 목숨까지 아낌없이 버리셨다.
이보다 더 큰 대가가 있을까?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린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예수님은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해 생명이라는 값을 지불하셨다.
그러나 상대의 용서를 위해서라지만 아무리해도 우리는 죽을 수 없고 용서에 걸맞는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완전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가 당할 수 있는 온갖 모욕과 수치와 조롱과 마음의 상처들을 모두 짊어지시려고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매달려 계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고통과 희생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고통당하시면서 죽어 가실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매달려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복음의 핵심은 용서이며 그리스도인의 가장 우선되는 정체성이다.
거듭난 백성은 당연히 용서할줄 알아야 하지만 잘 되지않는게 사실이며 이때 남을 용서하려 억지로 애쓰지 말라 용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용서가 잘 안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오면 된다.
그리스도인은 실패하는 경우라도 십자가로 돌아와야 하며 우리는 용서하는 사람들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 용서의 능력
우리가 사람을 용서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용서의 증인이 되어 주신다.
우리가 사람을 용서하면 인간관계에 국한 되는 것 같지만 우리의 용서를 하나님도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상을 의미하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뜻이다. 곧 용서가 바로 능력이요 힘이 된다는 사실이다.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고후2:10)"
하나님의 용서가 이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 변화의 힘은 그리스도의 용서의 힘이다. 용서는 힘이고 능력이기 때문에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직접적인 에너지가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힘과 능력으로 수많은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우리또한 이 땅에서 우리가 용서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용서를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용서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용서의 힘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의인이란 영적으로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이며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인의 믿음의 간구는 능력이 있으며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말과 같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5-16)"
우리는 신분적으로 의인이다.
씻을 수 없는 원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함 받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용서가 어려운 수 많은 상황들이 있겠지만 한결같이 용서하고 용납하고 손해보고 양보하는 것이 원칙이 되어야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우리가 용서하고 용납하고 양보할 때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을 지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이런 참된 용서가 참된 사랑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통하여 거듭난 백성이기에 당연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용서의 능력이 나 스스로 용서받을 수 있는 힘이 되어 세상에 하나님의 용서에 눈을 뜨는 통로다 된다.
용서야말로 내가 먼저 사는 길이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눅3:4-6)"
용서란 단어의 책임과 무게가 이전과 다르게 느껴진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용서하는 삶을 살아내야 함을 깨닫게 하신다.
내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용서를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의 용서로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양보하는 삶을 살아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첫댓글 저는 지금까지 누구를 용서 해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고통 가운데 처했던 기억은 없읍니다 이순간도~~
그런데. 오늘 집사님.올린 글을 보며 용서라는 단어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게 됨을 감사 드립니다
나아기서 나의 죄를 사함 받은 의인을 넘어서 내가 다른 이를 용서 할때 까지가 포함된다는 글에서 눈길이 머물게 됐음다
나는 가짜 성도?
나는 진짜 성도?
의 판가름의 기준대로 삼아도 무색. 하지 않을가. 라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우리 모두가 새로운 종족의식을 가지고. 오늘도 홧팅 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