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콤 달콤 매콤한 맛 집에 얽힌 사람 이야기(9)
시인 권용태와 무교동 <부민옥>
김 승 환
1967년 가을이던가.
소설가 M 씨의 출판기념회가 광화문의 규모 있는 한 그릴에서 열렸을 때 일이다.
작가가 언론계에 종사하고 있는 탓인지 문학계 인사 이외에도 언론인과 정치인도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의 언론계와 정치의 핵심이랄 수 있는 장기영 경제 부총리의 축사가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이때, ‘대한민국 김관식’과 그 일행인 천상병, 이현우, 권용태 시인이 몰려들어 연단을 에워 쌓았다. 장기영의 마이크를 뺏어 잡은 김관식이 술 냄새를 풍기며 왈,
“장 군! 이제 자네의 지루한 이야기는 여기서 끊겠네. 지금부터는 ‘대한민국 시인 김관식’의 청사에 남을 위대한 명연설을 시작하겠네.” 그렇게 시작된 김관식의 연설은 전후 좌우, 앞뒤가 맞을 리 없는 완벽한 횡설수설이었다. 장기영 부총리를 비롯한 저명 인사는 벌써 자리를 떠나고 주최 측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게다가 김관식의 마이크를 낚아 챈 천상병은 그 특유의 가갈대는 높은 음성으로
“문둥이 자석아, 너 보다는 나 천상병이가 한마디 하는 게 낫겠다. 이 문둥이 자석아!”
거지행색인 이현우와 말끔한 차림의 권용태는 “옳소! 잘한다!”라고 추임새를 넣고. 출판기념회는 이들 때문에 난장판이 되었다. 이 난장의 주인공은 물론 김관식이었지만 조연급 천상병의 익살과 단역인 이현우의 철학적 역할 못지 않게 주목할 인물이 안개 같은 바람잡이 권용태다. 그는 이 희한한 자리의 암묵적 연출자(?)였다. 난장판의 빌미를 제공한 1차 술판이 그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다.
권용태의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는 1958년, <자유문학>에 ‘바람에게’ (외 ‘기(旗)’ ‘산’) 로 등단했다. 그리고 그는 박봉우, 강태열, 윤삼하와 함께 <영도(零度)> 동인이기도 했다. 호남출신 시인들 속에 유일한 영남 동인으로 초대된 셈이었다.
얼음이 어는 돗수가 영도가 아닌가. 또한 녹을 수도 있는 도수가 영도다. 그의 인생역정이 이 빙점처럼 얼고 녹고를 오갔다. 초기에는 저항과 반항의 차가운 얼음 속에 몸부림치는가 하면, 이후 33년은 바람은 거세지만 그래도 상온(常溫)이 유지되는 공직(公職)의 온실 속에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본태적으로 바람 속에 있었다.
그의 4권의 시집 중, 첫 시집(<아침의 반가>) 말고는 <남풍에게>(제2 시집), <북풍에게>(제3 시집), 그리고 <바람에게>(제4 시 선집)가 ‘바람’이다. 바람은 그게게 무엇인가?
“나는 평생을 ‘바람’을 소재로 깊게 투시하고 몰두해 왔다. 바람이 갖는 시원과 종말, 감촉, 상징, 색감, 형상, 질감과 은유에 이르기까지 깊은 교감을 통해 절대적 가치를 추구해 왔던 것 같다.”(제4시집 시인의 말)
권용태는 1937년, 경남 김해 평야의 화목에서 태어났다. 권용태의 기억 속의 고향은 온갖
바람소리, 사철 장화가 필요했던 젖은 논배미, 그리고 숲을 이룬 갈대의 몸부림이 전부였다. 그가 평생을 두고 노래했던 ‘바람’은 어쩌면 그런 고향에의 회귀본능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중앙대학 2년생이던 그가 56년 늦가을, 전쟁의 상혼이 채 아물지 않은 암울한 명동에서 시인 천상병, 김관식, 박봉우, 이현우 등 명동 사대기인(四大奇人)과 어울리고 또 이 곳에서 각 대학의 문학지망생은 물론, 김동리, 서정주, 김용호 등 선배 문인들과의 교류도 싹을 키웠다.
중앙대학에서 백인준(백철 선생의 장남), 최진우(중대신문 주간), 이달순(언론인 최은희 여사의 장남)과 가까이 지내며, 학생회의 학예부장, 중대신문 편집국장이 되어 회오리같은 학창시절을 보낸다. 그런 어느 날, 백철 선생이 권용태를 불렀다. 그리고는 정색을 하고, “ 인준이 하고는 그만 어울리고 공부 좀 하게.”라고 충고를 했다.
공부 안 하는 자기 자식하고 어울리지 말라는 이 충고는 그에게는 쇼크였다. 그는 61년 군에 자원 입대한다. 양구의 군생활은 그야말로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를 위로하는 문우들의 위로의 편지 중에는 내가 끄적거린 엽서도 끼어 있었다.
그는 군생활의 고단함에서 합법적인 출구를 찾고 있었다. 마침 <육군신문>에서 15일간의 특별휴가를 내 걸고 문예현상모집을 했다. 이미 기성 시인이었던 그는 본명을 숨기고 응모, 당선 된다. 서울에 나온 그는 은사 김용호 선생의 소개장 덕에 21사단의 사단장(박남표 소장)을 알게 되고 사단장의 소개로 정훈장교였던 최인훈 중위, 또 그의 소개로 육군참모총장(김용배 대장)의 부관이며 통역장교였던 이준영과 그야말로 뒤늦은 불알친구가 된다. 그는 경우 밝기는 칼 바람이지만 사람 사귀기는 언 땅을 녹여 주는 훈풍이다.
그는 1964년, 예그린 악단(당시 최고의 가무단 / 단장 박용구)의 빼어난 미모의 무용수 김청월과 결혼한다. 실로 사랑이 싹튼 지 7년만의 결실이었다. 예그린 악단의 시공관 공연의 앞 좌석에는 그녀를 연모하는 장안의 댄디들이 많게는 10여 명이나 몰려들고는 했는데, 김청월이 권용태를 낙점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순박한 미소, 때묻지 않은 시골냄새에 빠졌었나 봐요.”가 함흥 태성의 만만치 않은 김청월의 회상이다. 시골의 원형질이 배어나는 미소는 실로 권용태의 자산이다. 그는 결혼 이후 허튼 소문 하나 없이 그녀의 가슴 안에서 망팔(望八)을 맞고 있으니 그녀의 선남력(選男 力)은 가히 입선지경이라고 할만하다.
남 돌보아 주는 능력으로 치면 우리 시대의 첫손에 꼽히는 이가 권용태다. 잊혀져 가는 천재 시인 이현우의 시문집(詩文集)을 도서출판 무수막(대표 강민)에서 내게 한 중개 역할도 심우성과 그였다.
그보다 훨씬 앞선 1962년, 남산 중앙방송국(KBS 전신)에서 임시직으로 있을 때, 하루는 천상병과 이현우가 낮술이 거나해서 그를 찾아 왔다. 천상병이 불쑥 김말봉(이현우의 모친) 작가의 인기 연재 소설(조선일보) <푸른 날개>를 라디오에 연속 방송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당시의 대중적 인기도를 보아 그 제의는 합리적이었고 또 방송국에서도 해봄직한 아이템의 하나여서 이 제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거금의 방송고료는 권용태의 대리 영수 사인으로 이현우와 천상병에게 전달 되었다. 방송 얼마 뒤 작가에게서 항의 겸 경위 해명을 요구해 왔다. 방송국이 발칵 뒤집혔다. 이현우는 어머니와 한마디 상의도 없었고 그 기막힌 발상은 십중팔구 천상병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권용태는 옷을 벗었다.
몇 달 뒤, 새로 옮긴 직장(시청 옆 국회도서관)으로 두 사람은 권용태를 찾아 왔다. 명동에서 몇 달 동안 술값을 펑펑 쓰고 다닌다는 소문과는 달리 이들의 행색은 그야말로 거지 그것이었다. 게다가 똘만이(?)까지 몇 명을 달고 왔다. 권용태는 그들 일행을 단골 식당 부민옥으로 데리고 가서 우선 요기부터 시켰다. 그는 이런 정(情)의 사나이다.
1966년, 어느 독지가의 후원으로 국내 최초로 문예 전문잡지 <주간 예술>이 창간 되었다. 그 편집인 겸 편집국장이 권용태다. 편집부장 박봉우, 기획부장 이근배, 광고부장 신기선의 면면이었고 사무실은 명동 달러 골목 안이었다. 당시 주간지로는 대중지향의 <주간 한국>이 있었을 뿐 순수 문예지로는 <주간 예술>이 유일 했다. 이들은 혼신의 정열을 다 했다.
언제던가. 박봉우가 취재를 나가야 할 터인데 마땅한 겉옷이 없었다. 그래서 품이 커서 맞지 않았지만 권용태의 윗도리를 걸치고 외출했다. 취재를 마친 그는 청와대 앞에 가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경찰들이 달려오자, 박봉우는 급한 김에 잡힌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 달아났다. 그때는 전부가 맞춤옷이라 안에는 옷 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불시에 ‘권용태’는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 지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박봉우는 주간지가 나오자마자 <은성> 주점으로 달려가 선전에 열을 올렸지만 대폿군이 잡지를 사겠는가. 잡지는 점점 어려움에 빠져, 결국 1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국회도서관에서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수석전문위원(차관보급)으로 정년 퇴직까지 그는 친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도서관의 편의는 물론, 당시 문예진흥원장 문덕수, 공연 윤리위원회 부위원장 신봉승의 국회 출석을 막아 주거나 결정적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정년 퇴직후 2003년부터 전국문화원연합회 회장으로 놀라운 기여를 했다. “권용태 있고 없고가 지방 문화원을 좌우한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문화적 기여가 대단했던 것이다.
지금도 인우회(仁友會)라는 원로 문인들(소설가 박순녀, 이정호, 최미나, 정인영, 남정현, 유금호 시인 강민, 김여정, 권용태, 남구봉, 박정희, 이성교, 이준영, 극작가 신봉승, 수필가 정명숙, 평론가 구인환, 신동한, 잡문가 김승환)의 모임을 이끄는 실세이고 멘토다. 그는 우리 시대가 낳은 바람 같은 사나이고 바람결을 타고 재울 줄 아는 남자다. 그에게서는 가끔씩 들리는 부민옥의 선짓국처럼, 늘 구수하고 칼칼한 담백미가 흐르기 때문이다..
첫댓글 바람을 태우고 바람을 재울 줄 아는 남자... 그런 남정 갈 가기 전에 한번 만나 봤으면...
세월의 바람을 타고 세월을 들려주는 김승환선생님의 名文章은 시리도록 가슴속에 차오릅니다.
ㅎㅎㅎ..아! 옛날이여!
선생님의 글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막힘이 없이 시원하고 재미가 있습니다.
왜 동오재 정모에 등록 안 해요.^^
아,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사실적인 글에 감동을 더하는 작업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기에,
선생님은 정말 더 큰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는 큰 사랑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김작가님 글은 드라마보다 더 재밌고 배울 것도 많고 암튼 명동의 뒤안길로 걸어가는 듯...저도 그 안에 있는 듯 합니다,ㅎㅎ
선배님들의 삶에는 인간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군요.... 요즘 것들은.....ㅎㅎㅎ(저도 포함해서요..) 너무 각박하답니다...
늘 그렇듯,, 김선생의 새콤달콤 맛갈스런 이야기 오늘도 맛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