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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부제: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요한복음 13장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성도 여러분! 혹시 A/S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A/S는 After Service의 약자인데 근데 이 말이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A/S는 이미 팔린 물건에 대해 일정 기간을 정해서 그 기간 안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서비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 일상생활에서 참 많이 사용되는 단어인데요.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영어권에서는 보통 Warranty(품질 보증) 또는 C. S.(Customer Service, 고객 서비스)라고 하지, A/S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래 일본어 アフターサービス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합니다. 어학사전에서는 After-sales Service(구매 후 서비스)로 검색이 되더군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After Service는 콩글리시라는 겁니다. 뭐 어찌되었든 우리 일상에 너무 깊이 들어와 사용되고 있는 용어라 다른 대체용어를 찾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가 왜 이렇게 A/S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이 A/S설교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A/S설교라고 들어보셨나요? 아마 제가 처음 사용하는 것 같은데, 올해 1월 1일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바로 이 자리에서 신년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 제목은 ‘서로서로 사랑하자!’,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인데, 제가 말씀을 전했었지요. 물론 그 내용은 아무도 기억 못하시리라 예상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시는 분 계신가요? 계시면 제가 선물을 준비했는데... 한번 되새김질한다는 차원에서 제가 여러분의 기억을 이끌어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온 성경책은 어디였죠? (아가서였죠!) 그때 교제의 내용은 크게 다섯 부분이었습니다. 첫째가 마태복음 22장을 통해 사랑을 강조한 옛 계명을 살펴봤구요, 요한복음 15장, 마태복음 25장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장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왜 새 계명을 주셨는지, 서로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뭔지, 마지막으로 사랑은 마음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시지요?
‘서로서로 사랑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우리는 어느새 올해의 1/4을 이미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정수기 렌탈을 하면, 필터를 교체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필터마다 교체 주기가 서로 다릅니다. 3개월마다 교체해야 하는 필터가 있고, 6개월 만에 교체해야 하는 것도 있고, 때론 1년에 한번만 교체해도 되는 필터도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오늘 말씀은 3개월이 지났기 때문에 한번은 나누어야 할 말씀, 곧 A/S기간이 되었다고 봤기 때문에 최근창 형제님께 부탁을 드려 시간을 할애받게 되었습니다. A/S설교 들으시니까 좋으시죠? 다 듣고 나면 더 좋은, 더 많은 은혜가 나누어지기를 바라면서 오늘 A/S교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당연히 서로 사랑해야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HOW?, 어떻게?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일까요? 오늘은 바로 이 지점, 사랑의 방법에 대하여 교제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의 말씀을 주실 때의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답은 항상 질문 속에 있다고들 합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 답이 있습니다. 혹시 발견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사랑하셨는지 사례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기록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살펴보려면, 아마도 1년은 걸릴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중요하게 나오는 숫자 3과 7과 10중에서 골라야할텐데요. 그런데 세 가지는 너무 작은 것 같고, 열 가지는 또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시간 관계상 일곱 가지 사례를 찾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입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신 예수님]
마태복음 8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 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절하며 말씀드립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당시 이스라엘 상황을 고려할 때, 저는 이 장면이 잘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문둥병)은 부정한 질병으로 나병환자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사람들과 함께 성 안에 거주하지 못하고, 성 밖에서 생활할 수 밖에 없다고 알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는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서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이었는지 의아합니다. 어찌되었든 그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절하였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절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단순히 인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를 찾아보니까 프로세키네이(προσεκύνει)인데 이는 경배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나님으로 알고 그분께 나아와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간청이 무엇입니까?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찬찬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저를 낫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원하시면”, 즉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고쳐달라고 매달리지 않았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나병환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아니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부정한 나병환자를 만지시다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침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내가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가 그동안 나병 때문에 겪었을 아픔과 사람들로부터의 외면당함, 가족과도 함께 할 수 없었던, 그리고 하늘이 천벌을 내렸다는 자괴감 등 나병환자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나병환자는 뒤로 물러섰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손을 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요. 심지어는 가족들조차도.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에게 대시므로 그의 나병이 아니라 나병으로 인해 문드러진 상처 많은 마음을 쓰다듬었던 것입니다. “내가 원한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 이젠 괜찮다. 이젠 다 끝났다. 너의 아픔, 너의 고통, 너의 슬픔, 너의 외로움, 모두 모두 끝났다. 그러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나병이 나았으니 가서 잘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아직 율법이 지배하는 유대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당시의 율법은 제사장의 확인이 없으면 비록 나병이 나았다 하더라고 그는 그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삶까지도 챙기시는 참으로 자상한 주님이십니다.
두 번째입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
마태복음 8장 후반부에서는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만으로 고치시는 사건과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장면, 그리고 귀신들린 자, 병든 자를 다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을 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시며 거절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폭풍 속에서 바다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 가다라 지방에 가셔서는 귀신 들려 무덤 사이에서 생활하던 두 사람을 고치시는 사건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마태복음 9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태는 세리였는데 오늘날 세무공무원으로서,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매국노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때 백성들의 세금을 수탈하여 일본에 바치는 사람들처럼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서 백성들의 세금을 늑징하는 그야말로 백성들의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는 존경보다는 멸시를 당하였고, 죄인들과 동급으로 취급을 당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는 아무런 생각없이 물끄러미 세관 밖을 바로봤을 겁니다. 그리고 무리들에게 둘러쌓여 걸어오시는 예수님도 보았을 것입니다. 한 때는 그도 꿈 많은 젊은이였고, 열심히 공부해서 세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무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세리가 되고보니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해야 했고, 사람들로부터는 매국노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제사장 가문이었던 레위처럼 거룩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그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의 이름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었고, 외로이 세관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손가락질만 받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제자로까지 부르시는 예수님께 그는 즉시 일어나 따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비난하자,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은 함께 해서는 안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가까이 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밀어내고 경멸해야 할 대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병든 자로 보셨습니다. 병만 나으면 누구보다 아름답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심을 아셨습니다.
다음 세 번째입니다. [무조건 제자들의 편이셨던 예수님]
마태복음 12장으로 가겠습니다. 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 배고프지 않고 멋지게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밀밭 사이로 지나가던 제자들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밀이삭을 잘라 먹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들의 행동을 눈여겨 지켜보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은 것은 왜 남의 밭 곡식을 허락도 없이 먹느냐, 즉 옛날로 말하면 ‘서리’라고 하죠? 오늘은 이것을 절도라고 하더라구요. 어찌되었든 바리새인들이 걸고 넘어진 것은 제자들의 서리, 즉 절도행위가 아니라 그들이 안식일을 어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도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율법의 일점일획, 토시 하나 놓치지 않고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또 지켜왔던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은 눈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잘 섬긴다고 하는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는, 그것도 안식일에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시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안식일에 왜 밀 이삭을 잘라 먹어 스승의 얼굴에 먹칠을 하느냐고 제자들을 혼내셨을까요?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분명히 안식일 율법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변호해주셨습니다. 그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할 때 하나님의 성막에 들어가서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던 진설병을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던 사례를 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제사장들은 안식일이지만 성전 안에서 정말 분주하게 일을 하지 않느냐는 반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우선 다윗의 예에서는 안식일 율법보다 사람의 생명이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제사장을 예로 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제사장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항변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아내에게 취했던 저의 행동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 아내가 저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만은 자기 편을 안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남의 편이라는 것입니다. 결혼생활 26년을 살아오면서 몇 번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피해를 봤던 사건들이었는데, 그 때 아내가 그 상황을 저에게 이야기하면 저는 아내가 처했던 그 상황에서의 아내의 억울함이나 고통을 생각하고 위로하고 그 마음을 보듬어주기보다 그 상황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상대에게도 잘못이 있겠지만 아내인 당신도 잘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태도로 말입니다. 이런 저의 태도는 늘 아내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남편이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라고 서운해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비록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안식일에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제자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제자들을 대신해서 싸워주시는 모습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 시간을 빌어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다고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싶습니다. “여보, 정말 미안했어. 용서해주오.”
다음 네 번째입니다.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는 예수님]
이제 마가복음 3장으로 가보겠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2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넘어뜨릴까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날도 안식일이었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보시면 그를 고쳐주실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숨 죽여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마침내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러나 모두 잠잠하였습니다.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시고 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보시면서 보란 듯이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리고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사랑하셨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위험에 빠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것도 안식일에 말입니다. 왜 굳이 안식일에 고쳐주셨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냥 하루 지난 다음에 만나서 고쳐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고발하려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하셔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만큼 사랑하셨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고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는 예수님, 그래서 어쩌면 죽음의 길도 당당하게 걸어가셨을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다섯 번째입니다. [전통과 관습을 넘어서는 예수님]
이번엔 요한복음 4장으로 가겠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4절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지역적으로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제일 북쪽에 갈릴리 지방, 가운데에 사마리아 지방, 그리고 남쪽에 유대 지방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 지방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유대 지방에서 북쪽 갈릴리 지방으로 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갈 때, 직선코스인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 사마리아 지방을 비켜 빙둘러 갈릴리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역사적 배경이 있는데요, 잘 아시겠지만 짧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 때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가 솔로몬 이후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이방 왕국의 침입을 몇 차례 거치면서 사마리아 지역에 이방민족들이 이주해왔고 사실상 혼혈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입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의 혈통을 잃어버린 그야말로 상종해선 안 될 사람들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지방은 아예 밟지도 않으려는 전통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굳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셨다고 성경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가 반영된 행동이었고, 이에는 인생의 갈급함을 채우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한 여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발동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사마리아 지방으로 들어가셨고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가에 도착하셨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셨는지 우물 곁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는 여섯 시쯤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로 말하면 열 두시로 한낮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낮에는 너무 더워 여행자가 여행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한낮에 무리하게 여행을 강행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는 곧 만나게 될 한 여인 때문이었습니다. 우물가에 앉아 있는 예수님 곁으로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이 여인 또한 사연이 있는 여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당시 여인들은 물을 길으러 올 때, 아침저녁 선선한 때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한낮 작렬하는 태양빛을 받으며 홀로 우물가로 온 것입니다. 이는 분명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혼자 다닐 수 밖에 없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물을 좀 달라.” 그러자 사마리아 여자가 차가운 말투로 대답을 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여인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당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성경기자는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계속 여자에게 말을 걸었고, 그녀가 인생의 갈급함 때문에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면서도 갈급함을 채우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아시고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선물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분이 바로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간 사람들 눈을 피해 홀로 외롭게 살아온 삶을 뒤로한채 사람들에게 달려가 “와서 보라” 하며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의 청함을 받아들여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섯 번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23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그리고 제사장들이 함께 모의하여 예수님을 정죄하고 고소하여 마침내 빌라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로마 군병들에게 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다 너무 지쳐서 쓰러지시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로마 군병들은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불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 형은 그 치욕과 고통이 너무 심하여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집행되지 않던 사형제도로서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삼 년 반이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스승이 붙잡히시자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수제자였던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모습을 지켜보셨던 예수님이셨지만 그들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로 볼 때, 용서는 상대의 어떠함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많이 배반하고 말씀을 불순종하고 때론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갑니까? 또 그렇게 살아왔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모두 아시지만, 하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늘 왕좌 우편에서 아버지께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원수까지 사랑한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찾아온 여인에게 처음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셨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시몬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부활하신 모습을 나타내시는 장면입니다. 장소는 디베랴 호수였고, 때는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 하자 그와 함께 도마, 나다나엘, 요한, 야고보,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제자 둘이 함께 가겠다며 나가서 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지만,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마치 청운의 꿈을 싣고 예수님을 쫓았던 3년 반이란 시간 후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물고기 잡으로 온 자신들의 처지와 똑같았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지친 몸을 이끌고 밝아오는 아침 해를 뒤로 하고 힘없이 노를 저어 오던 제자들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그런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은 힘없이 “없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제자들이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곧 요한이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주님이시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는 벗고 있던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니, 물에 뛰어들려면 옷을 벗고 뛰어들어야지 왜 베드로는 벗고 있던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들었을까요? 그는 예수님께 예의를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배를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고는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수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목이 매여 제대로 아침을 먹지도 못했을 거 같습니다.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런데 이상한 일은, 예수님께서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동일한 질문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허물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허물이 있더라고, 비록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여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 씩이나 부인했을지라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계셨기에 베드로는 마침내 초대교회의 대 사도로서 하나님의 양들을 목양하는 목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몇 가지 사례를 찾아 확인하여 봤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이처럼 우리도 서로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들 각자도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있습니다. 그 모습은 모두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지금까지 살펴봤던 예수님의 그 사랑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바로 그처럼 서로 사랑하는 올 한해가 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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