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 제기
예전에, 자중자애 님께서는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오는 진주 소씨 족보에 대한 정보를 언급하셨다. 이 자리에 그 중 앞부분을 인용해둔다.
본관은 진주(晉州) 단본이다. BC 4241년 동구이(東九夷:견이·우이·방이·황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로 배달 겨레의 옛이름)의 하나인 풍이(風夷)의 후손인 적제축융(赤帝祝融)이 풍주(風州) 배곡(倍谷)에 도읍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蘇]를 심어 성을 소(蘇),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소씨의 시초라고 한다. BC 2392년 복해의 61세손인 풍(豊)이 소성(蘇城:길림성)의 하백에 봉하여졌고, BC 209년 풍의 69세손 백손(蘇伯孫)이 진한(辰韓)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백손의 29세손 알천(閼川)은 신라 진덕여왕 때 최고 관직인 상대등(上大等) 등을 지낸 뒤 660년(태종무열왕 7) 진주 구시동(九枾洞:지금의 상대동)으로 낙향하여 이름을 경(慶)으로 바꾸고 진주소씨(晋州蘇氏)의 시조가 되었다.
- 네이버 백과사전, 소[蘇]
자중자애 님은 이 이야기가 국가가 아닌 가문에서 기록하여 보존해온 문서에 나온 내용이며, 그만큼 거짓말이 적고 '완벽한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진주 소씨 족보의 존재는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보았을 때 네이버 백과사전 '소' 항목 하단에 있는 이의제기 반영내용을 통해 사용자ID sts8169가 이의제기를 함으로써 백과사전의 내용이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자중자애 님께 문의하니, 자중자애 님은 아마 진주 소씨의 전승이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수정요구를 하여 반영되었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하지만 궁금증은 그것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우선, 정말로 이의제기를 한 사람의 말처럼 진주 소씨 족보에는 그러한 내용이 들어있을까? 그리고 소씨 족보에 그런 내용이 실제로 들어있다고 해서 과연 족보는 옳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할 수 있는가? 본 포스팅은 그러한 의문을 풀고자 노력하다가 얻게 된 결과물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작성되는 글이다.
2. 사실 확인
우선 진주 소씨 족보를 찾아서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더불어서, 그 족보가 최근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환단고기나 단기고사 등의 책이 나타나기 이전의 족보에도 그러한 내용이 등장하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나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검색에서 '진주소씨'를 검색하였고, 그 결과 진주소씨전국종친회에서 발간한 <진주 소씨 대동보> 1981년판(신유 대동보) 4권을 찾아냈다. 1984년의 신유 대동보 부보(附譜)와 1998년의 대동보 9권도 발견했지만 1981년보다 연대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들이므로 검토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신유 대동보는 신유년, 즉 1981년에 간행된 진주 소씨의 족보이다. 족보를 살펴보니 정말 풍이의 후손 적제축융이니, 백손의 진한 건국이니 하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이하 인용문의 출전은 <진주 소씨 대동보>(1981)이며 본문을 그대로 옮겼으며 오탈자나 맞춤법, 띄어쓰기 오류 또한 수정하지 않았다)
옛날 소풍(蘇豊)이 소씨의 시조가 되었으니 호는 곤오(昆吾) 또는 태하공(太夏公)이라 했으며 갑진년(甲辰年)에 태어났으니 풍이(風夷)의 후손이다 옛날 고신씨(高辛氏)가 정치를 매우 포악하게 하였기 때문에 불함산(弗咸山)으로 이사하였다 북숙신홍제(北肅愼洪帝) 八년에 고신씨가 쳐들어올 때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유동(綏東)(원래는 '수동'- 필자 주)이란 들에서 격퇴 시켰다 홍제(洪帝)가 그 공적을 치하하고 소성(蘇城)에 봉(封)하였다
- 소씨상상계 번역문 中
우리 소씨는 적제(赤帝)의 후손이다 五천一백四십八년전 기묘년(己卯年) 여름 축융씨(祝融氏)가 갈천씨(葛天氏)를 대신하여 제(帝)가 되어 환국(桓國)의 영토에 소(蘇)를 심었다 또한 새 울음소리를 듣고 음악을 만들었으며 소(蘇)의 기강(紀綱)과 덕(德)의 교화(敎化)로 백성들에게 풍도(風道)를 숭상케 한것이 소로 성(姓)을 삼게 된 까닭이다 (중략) 적제의 六十一세손 태하공(太夏公)은 호는 곤오(昆吾)요 휘는 풍(豊)이니 본성(本姓)을 이미 소(蘇)로 고쳤다 (중략) 三천三백三십九년전에 태하공(太夏公)이 서숙신(西肅愼)으로부터 나와동숙신(東肅愼)으로 들어가 소(蘇)에 봉해져 하백(河伯)이 되였다 하백(夏伯)이라고도 하며 성을 소(蘇)로 고쳤다 (중략) 태하공의 七十세손 휘 백손(伯孫)이 천하가 크게 혼란하기 때문에 임진년(壬辰年) 봄에 조선(朝鮮)에서 나와 진지(辰地)로 이사하여 후진한주(後辰韓主)가 되었다 경주에 도읍하여 육대족(六大族)을 통솔하였으니 그 하나가 육촌(六村)이요 그밖에 여러 읍과 북락이 있었다 휘 백손(伯孫)의 임금이름(王名)은 도리(都利)요 그 뒤에 진공(辰公)이라 했다
- 동근구보서 번역문 中
우리 소씨는 구두씨(九頭氏)의 후손인 적제(赤帝)에서 나왔다 상대등공(上大等公)이 먼저 말하기를 옛날 적제(赤帝)가 있었으니 휘는 복해(復解)요 호는 축융(祝融)이다 환국(桓國)의 제(帝)가 되어 기묘년(己卯年)에 개국(開國)하여 풍주(風州)의 배곡(倍谷)에 도읍을 정하였었다 (중략) 一천三백여년 뒤에 태하공(太夏公)이 나왔으니 축융의 六十一세손이요 그가 곧 풍이인(風夷人)이다 태하공이 처음엔 난하(灤河)에 살다가 숙신(肅愼)의 홍제(洪帝) 때에 불함산(弗咸山 現白頭山) 북쪽으로 들어가 그곳에 그대로 봉해졌으니 나라의 이름은 유소(有蘇)이다 (중략) 유소국(有蘇國)이 三개가 있으니 (중략) 삼소란 풍도(風道)의 기강(紀綱)과 같고 삼한(三韓)이란 삼소와 근원이 같다 (중략) 그 二천一백여년 뒤에 태하공(太夏公)의 七十세손 진공(辰公) 휘 백손(伯孫)이 남쪽 경주(慶州)로 옮겨 후진한주(後辰韓主)가 되였으며 그 뒤 二十八대 동안 살았었다 진공의 二十九세손 휘 경(慶)이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경신년(庚申年) 봄 三월 三일에 진주(晉州)의 도사곡(塗斯谷)으로 이사하여 진주 소씨의 시조가되었고
- 부소보서 번역문 中
이상의 내용을 보건대 <진주 소씨 대동보> 1981년 간행본에 네이버 백과사전의 글과 동일한 내용이 적혀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의문점 발견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은 언제부터 진주 소씨 족보에 적히게 된 것이었을까? 과연 1981년 이전에도 이러한 내용이 줄곧 족보에 전해왔던 것일까? 아무래도 '환국'이란 표현이 노골적으로 나오는 것도 이상하고 뭔가 미심쩍은 나머지, 필자는 최초의 족보, 그리고 그 이후 출간된 족보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로 하였다. 진주 소씨 가문에 어떤 대동보가 있었으며 어떤 수정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1981년 대동보가 완성되었는가 하는 설명은 발간사와 서문, 발문 등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蘇氏의 大同譜刊行은 西紀一六七○年 庚戌譜를 始初로 一七四七年의 丁卯譜 一八五二年의 壬子譜 一九○六年의 丙午譜 一九三五年의 乙亥譜 一九六○年의 庚子譜로 이어져서 이번의 대동수보는 일곱번 째가 되는 歷史的 大修譜事業이다
- 신유 대동보 발간사 中
우리 晉州蘇氏는 朝鮮朝 顯宗 十一年 庚戌(檀紀四○○三年~西紀一六七○年)에 族譜를 비로소 創刊하였으며 以後로 至今까지 總合하여 七次에 걸쳐 修譜케 되었다
- 신유 대동보 서 中
정리해보자면, 1670년 경술보를 시작으로 1747년 정묘보, 1852년 임자보, 1906년 병오보, 1935년 을해보, 1960년 경자보의 여섯 차례 족보 대수 작업이 이루어졌고, 1981년은 1670년을 기점으로 하여 7번째 편수 작업을 하는 해가 된다. 그러면 1981년 이전에 나온 여섯 개의 족보들을 살펴보아 적제축융, 하백, 후진한주에 관한 내용이 있는지 살필 일이다. 하지만 글을 더 읽다보니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발간사와 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蘇氏의 族譜를 文獻的으로 보면 六七○의 南塗家乘 九四七年의 東槿譜 一一○三年의 瑞風譜 一三一六年의 秋桐公家乘과 九將誌 一三二○年의 扶蘇譜 一五二○年의 庚辰譜 一六○○年 의四隱公家乘 一六二四年의 天啓譜로 이어지니 文獻的族譜로서도 斷然 우리蘇氏의 記錄이 가장 으뜸이 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되며
- 신유 대동보 발간사 中
燃黎室記述別集에 依하면 族譜로서 가장 오래 된것이 嘉靖年間의 『文化柳氏嘉靖譜』(一五六二)라고 하며 中國에서도 族譜는 이 무렵부터라고 하거니와 文獻的으로 가장 오래된 族譜는 安東權氏의 『成化丙申譜』(一四七六)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晉州蘇氏 族譜는 『庚戌譜』(一六七○)로부터 비롯하여 (중략) 이번이 일곱 번째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文獻的으로는 六七○年의 南塗家乘을 비롯하여 九四七年의 東槿譜 一一○三年의 瑞風譜 一三一六年의 秋桐公家乘과 九將誌 一三二○年의 扶蘇譜 一五二○年의 庚辰譜 一六○○年의 四隱公家乘 一六二四年의 天啓譜 等이 있으니 譜歷上으로 그 淵源을 考察할 때 果是 우리 蘇氏의 자랑이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 발(跋) 中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1670년 경술보 이전의 문헌적 족보가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진주 소씨의 족보가 제일 오래된 것이라고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남도가승, 동근보를 비롯한 1670년 이전의 족보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발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다음과 같다.
修譜는 一世數三十이니 三十年 만에 譜事를 하는것이 通例이나 『庚子譜』까지에 나타난 事實以外에 上上系譜 發見으로 先代를 熟知하게 되었으니 이를 世上에 널리 알리고자 함이 첫째 理由이요 이 기쁨을 宗親 여러분과 하루빨리 나누고자 하였음이 그 둘째 理由가 된 셈이다
- 발 中
원래 한 세대는 30년이므로 족보를 개정하거나 다듬어 편수할 때도 30년마다 해야할 일이지만, 1981년 신유년 대동보는 전의 1960년 족보 편수 이후 22년만에 편수되었다. 발문을 적은 소명섭(蘇明燮) 씨는 이에 대해 1670년 경자보까지에 나타난 사실 이외에도 상상계보 등을 발견하여 선대의 상세한 계보 등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족보를 대수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즉, 1670년 경자보가 나온 이후 1960년까지 족보가 전해오면서도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1970, 80년대 들어 각종 사서와 옛 족보의 발굴로 새로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를 널리 알리고 또 종친들에게 전하기 위해 급히 족보를 재개정한 것이다. 위에 나오는 남도가승 등등의 서적 또한 최근에 들어서 발굴된 서적이며, 상상계보 또한 이와 연관이 있는 족보 계열의 책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1978년 5월 7일 대전에서 열린 전국 대의원회의 때 대동보 발간 문제가 발의된 뒤 수차례 논의를 거쳐, 마침내 1979년 5월 9일 서울 종친회 본부는 수보 발기 결정을 하였다. 1979년 5월 27일 전국 종친회임원 각지구 수보책임자들과 관계자 백여 명이 익산에 모여 대동보 간행 발기 총회를 전국회장 소중영(蘇重永) 씨의 주재 하에 갖게 되었다. 1980년 대동보 수보 사업이 이루어진 끝에 1981년 결국 그 간행을 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굳이 1981년 이전의 족보 내용을 일일이 살펴볼 것 없이, 1981년 대동보에서 새로이 추가된 내용이 과연 어떤 책을 근거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책들은 어디서 어떻게 발굴되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4. '第上編'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진주 소씨 대동보>(이하 <대동보>)는 1670년에 '경술보'가 처음 간행된 이래로 1981년에 일곱 번째 발행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1670년부터 1960년까지 나온 여섯 차례의 족보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시조 윗대의 '상상계보(上上系譜)'를 최근에 발견함으로써 1981년 신유 대동보에 새로이 추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981년의 <대동보>는 약간 특이한 내용 구성을 갖게 되었다. <대동보>를 보면 맨 처음에 족보의 발간사, 서, 발문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고래로 전해오던 1670년 이전의 족보들(동근보, 서풍보, 부소보 등)의 서문과 소씨상상계 원문 등이 실리게 되었으며, 그 다음 각 파(派)의 유래에 관한 글이 나온다. 본문은 여러 편의 족보들이 함께 묶여 있고, 응당 그 시작은 '제1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동보> 본문의 맨 처음은 '제상편(第上編)'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상편 말미에 적힌 글을 통해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晉州蘇氏族譜는 月洲公이 羅州牧使로 在任할 때에 創刊한 檀紀四○○三年(一六七○) 顯宗庚戌譜로 부터 始作되여 檀紀四二九二年(一九六○) 庚子 六刊譜에 이르기까지 文恭公(諱 希哲)으로 始祖를 삼아왔든바 檀紀四二八四年(一九五一) 辛卯에 發見된 陽谷公後孫 昌燁의所藏인世系 (扶蘇譜) 와 檀紀四三○八年(一九七五) 乙卯에 發見된 鍾萬의 所藏인 致善 家乘에 實錄된 文獻史蹟 및 墳墓所在며 또한 全國宗親會의 細心한 探査와 緊密한 考證 등이 모두 相合符節하고 渾然一致한 故로 文恭公의二十二代祖인 上大等 (角干諱 慶) 公을 始祖로 삼아 年年 墓所享祀하고 또 上大等公 以上 二十八代인 辰公 (諱 伯孫)까지 系列과由來가 昭然하다 그러나 遺蹟實錄과墳墓所在가 仔詳치 못함으로 敢히 上大等公의 위에 列記할수 없기로 編首에 上編을 別設 記錄하여 後日의 博考를 기다리기로 한다
요컨대 1981년 이전의 진주 소씨 시조는 바로 문공공 희철이었으며, 부소보와 치선 가승 등의 발견, 그리고 상대등공 등 여러 조상들의 묘소 소재 발견으로 문공공의 윗대 조상들 계보도 확인이 가능해져 상대등공 경(=알천)을 시조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상대등공 이전의 계보는 그 내용이 자세하지 못하므로 거기까지 시조를 끌어올리지는 못하고 일단 '제상편'으로서 적어놓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1951년에 부소보가 발견되었음에도 그것이 1960년의 족보 편찬 사업에 반영되지 않았을까? 그 내용의 진위 여부를 밝히기 어려워서 1960년에는 반영하기 어려웠고, 나중에 1975년 치선 가승의 발견과 종친회의 묘소 소재 조사 등으로 거의 사실임이 확실시되어서 비로소 반영될 수 있었던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1951년 부소보의 발견이 없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로써 적제축융, 진공 백손, 상대등공 경 등의 사적이 그 이전에는 전하는 바가 없었고, 1981년 <대동보>에 비로소 나타났다는 것이다.
5. 부소보서
상고사와 관련된 일련의 내용들이 1970년대에 발견되어서 1981년에 족보에 반영되었다면, <환단고기> <단기고사> 등이 세간에 등장하여 유행했던 당시의 사정과 족보 편찬 사업이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봄직한데, 좀더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제상편 말미에 언급된 '부소보'를 살펴보기로 했다. 부소보의 서문은 <대동보> 앞부분에 실려있으며, 서문을 쓴 사람은 소정(蘇靖)이다.
<대동보>에 따르면 소정은 자는 성원(聖元)이고 호는 추동(秋洞)이며, 1248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원래 진주 소씨의 시조였던 희철 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正堂文學)에 임명되었다고 하며, 1316년 구장지(九將志)를 찬하고 구인사지(九印祠志)를 재간했으며, 1320년에는 부소보를 발행하고 서를 지었다고 한다. 1327년 사망.
그러면 부소보서(扶蘇譜序)를 읽어보도록 하자.
惟吾蘇史長久如我邦之史 - 부소보서 원문 中
우리 소씨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나라의 역사와 같다 - 부소보서 번역문 中
蘇史라는 표현이 상당히 색다르지만 뭐 일단 넘어가보자. 서문에 따르면 소씨 가문은 일찍부터 집안에 족보가 있어서 후손들이 조상의 계통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상대등공의 말을 빌려서 적제 축융이 환국의 제가 된 일, 조이(鳥夷)의 딸 항영(姮英)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 아홉 명이 구주에 봉해졌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후손인 10대손 화인(和仁)이 조이의 딸 여서(女瑞)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는 것이다. 조이의 정체는 뭔지 모르겠지만, 그 큰아들은 호(昊)이고 작은 아들이 밀유(密由)라고 하는데...
長曰昊後爲赤帝扶統次曰密由桓國史曰赤帝扶統三十一年命弟密由遷于西域仍封其地是爲東莫之祖也東莫一作須美乙則新國之意
큰아들은 호이니 뒤에 적제부통이 되었고 작은 아들은 밀유이다 환국사에는 적제부통 31년에 동생 밀유에게 서역으로 옮기도록 명령하고 곧 그곳에 봉해 주었으니 이분이 동막의 조상이다 동막은 수미을이라고도 하니 새로운 나라라는 뜻이다
화..환국사???? 축융이 환국의 제가 되었다는 부분부터 수상했는데, '환국사'란 명칭이 당당히 등장하니 할 말을 잃게 된다. '서역'은 또 뭔가 ㅠㅠ 서역이란 말 자체가 한나라 때 옥문관과 양관 넘어 서쪽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것인데, 여기에서 이렇게 쓰일 수 있는 말인지 의문이 든다. <대동보>에 따르면 동막은 옛 나라 이름이라고 한다. 수미을이 어떻게 해서 '새로운 나라'라는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동막=수미을은 적제 위홍 때에 4천여리 남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의 신정(新鄭), 즉 축융의 유허지로 옮겨갔다고 한다. 어쩌면 그냥 서쪽 영역이라는 의미로 서역이란 말을 쓴 것일지도... 이후로도 환국사와 신지에 대한 언급이 수차례 등장한다.
이상은 환국사에 자세히 실려 있다 ...
신지(神智)는 말하기를 소(蘇)의 덕(德) 때문에 국가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였으니 나라에 삼소(三蘇)가 있게 된 것은 이런 까닭이다 ...
옛날 신지가 환국사를 지었을 때 역대 사관이 많이 인용하였었다 이 뒤로는 이것을 진주소씨의 역사라하여 훌륭한 사관들이 인용하게 된다 할지라도 족하다 하겠다 - 부소보서 번역문 中
물론 환국사, 신지, 난하, 불함산 등 이러한 용어가 들어간다고 해서 무조건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용되고 있는 용어의 분위기도 전반적으로 뭔가 이상하다. 我邦이라든가 疆域이라든가 文獻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는데 어쩐지 당시의 글에 나올 말은 아닌 듯하다. 또한, 1320년 당시 밀성 혹은 밀주로 불리던 곳을 '밀양'이라고 부른 점(공민왕 대에 이르러서 밀양부라 개칭)이나 조선시대에 비로소 '제천'이라 개명된 제주(堤州)를 벌써부터 제천이라고 적은 점 등이 수상하다. 하남 업서성(鄴西城)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아무래도 서문을 1320년 소정이 지은 글 그대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은 듯하다.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6. 소씨상상계, 동근구보서
환국사 운운하는 말은 소씨상상계에도 나온다. 소씨상상계란 적제축융으로 시작하여 진공 백손으로 이어지는 초창기의 계보를 가리키는 말이며, 소씨상계는 진공 백손으로부터 상대등공 알천까지 내려오는 계보를 말한다.
* (太夏公)墓在蘇城今扶蘇岬事蹟詳載於桓國史檀君古記
* (泰公)唐藏京遷都時有功故賜三百里領地詳見檀君古記
내용 중간중간에 상세한 것은 환국사 단군고기를 보라고 되어 있다. 소씨상상계는 누구의 아들 누구, 누구의 아들 누구 하는 식으로 계보를 죽 서술해가고 있는데, 그 중 재미있었던 것을 여기 적어본다.
* 頭老之子曰音其吾生于辛卯爲太師乙卯伸寃函設置奏請於各州
* 音其吾之長子曰韓阿達爲首相辛巳機工廠設置奏請
* 大亞野號曰有爲子爲國太師太學館建立奏請
* 黔伊之四子曰吉醫術學堂建立奏請
'OOO 건립/설치 주청'이라는 표현에 일단 뒤집어졌다. 일반적인 한문이라면 請置伸寃函 정도로 표현하지 않는가? 너무 현대적인 냄새가 짙다. '수상'이라는 직책은 또 뭔가. '기공창', '의술학당'도 ㅋㅋ
이번에는 동근구보서를 읽어보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1970, 80년대 들어 실제로 발견된 것은 부소보 일부와 소치선이라는 사람이 적은 가승(家乘)이었으며, 그 가승에 전하는 각종 서문과 일문을 통해서 동근보, 서풍보, 남도가승 등의 책이 있음을 고증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고증'이라는 것이 제대로 되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동근구보서의 첫머리를 여기 적어본다.
民族卽氏族也乃氏族卽血統故譜者血統之記錄乃氏族史也國家有國史故其民族永世不滅而門中有族譜故其氏族永世不絶
민족은 즉 씨족이다 씨족은 혈통이기 때문에 족보란 혈통의 기록이요 씨족의 역사이다 국가에는 국가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 민족이 영원불멸하고 문중에는 족보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대가 끊키지 않는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대동보>에 따르면 동근구보는 신라 하대의 사람 소문(蘇汶)이라는 사람이 처음 지었으며, 그 후손이자 시조 희철의 손자이며 부소보를 발행한 소정의 아들인 1276년생 소약우(蘇若雨)가 1320년에 서문을 번역하여 출간했다. 아니 신라 하대의 사람이 지은 동근보의 서를 왜 굳이 번역해야 했을까? 그 의문은 서문을 보면 풀린다.
아! 슬프도다 신라가 망한 뒤에 원수 왕봉규의 만행으로 소씨의 역대문헌이 전화에 타버렸고 대대로 전해오던 신성한 족보가 진흙탕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제 없어진 편을 연속해서 쓰지만 성스러운 조상들의 업적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슬프다 그러나 아직 구보(舊譜)가 있어 현문(玄文)으로 지은 것을 남도가승(南塗家乘)이라 하여 일찍이 이것을 도사곡의 종가에 보관했다 어느 한 종파에서는 향찰로 족보를 만들어 역시 집안에 보관했다 (중략) 조카인 대장군 격달(格達)이 족보 편수를 거론하였으나 그 당시 집안 의논이 동일하지 못하여 지연되고 시작하지 못했다 (중략) 종인인 낭중 강우(康雨)는 한문으로 족보를 편수해야 한다 했다 반면 진주의 종인인 족조(族祖) 좌승 백영(百榮)은 이두로 족보를 편수해야 한다 했다 (중략) 중간에 갑론을박이 많았으나 결국은 현문으로 족보를 편수하기로 의견이 모여졌다
현문. 그렇다. 서문에 따르면 족보 전문은 원래 현문으로 지어졌고, 그중 서문을 고려시대에 와서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현문이 뭔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대동보>에 따르면 '옛날에 있었다는 우리 고유문자'라고 한다. 어쩐지 <단기고사>가 황조복에 의해 발해문자로 지어지고, 후대에 한문으로 번역되었는데, 둘다 전해지지 않는다는 상황과 참 닮아있지 않은가.
일단 현문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을 뿐더러, 신라 말기의 사람이, 굳이 번역한 사람의 활동연대를 따라서 고려시대의 사람이 쓴 것이라고 해도, 어쨌든 옛날 사람이 과연 '민족'이니 '국가'니 '씨족'이니 하는 용어를 썼을까? 서문을 좀더 들여다보면,
사실(史實)은 환국사 조선비사 태백사 태백유기 조대기 태변설지 공기 표훈 천사도증기 신지비사 동천록 지화록 통천록 등의 책에 자세히 실려있다
고 되어 있으니 황망할 따름이다. 가문의 역사 기록이 신라 말기의 호족 왕봉규의 행패, 그리고 고려 후기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많이 일실되고 폐멸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애석해 하는 것도 어쩐지 떨떠름하다. <대동보>에 따르면 왕봉규는 당시 강주 도독이던 소송(蘇淞)을 시기하여 송의 아내를 빼앗고 소씨 일가를 멸망시키는 등의 행패를 부리다가, 송의 아들 격달이 태조(왕건)의 명을 받아 927년에 토벌함으로써 원수를 갚았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왕봉규의 927년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훤 등에 의해 제거되지 않았는가 하고 추측한다. 또, 태하공의 10대손 계(繼)가 후소국주(後蘇國主)가 되어 기주(冀州) 소성(蘇城)에 도읍하였다고 하면서 그 땅을 '지금의 하남 제원현'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당나라 때 하남도(河南道)라는 명칭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행정구역상의 하남(河南), 즉 허난 성의 명칭은 원나라 때로까지밖에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보았을 때 이는 또 하나의 오류이다.
7. 정리
<대동보>의 신유 대동보 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우리 진주소씨는 조선조 현종 11년 경술에 족보를 비로소 창간하였으며 이후로 지금까지 총합하여 7차에 거쳐 수보케 되었다 당시는 모두 문공공(휘 희철)으로 시조를 삼았었다 그러나 연전에 발견된 동종인 치선의 가승에 의하면 나대의 상대등공(각간 휘 경)으로 시조를 삼았으며 또한 별도로 상대등공의 29대조인 휘 백손까지의 세계와 일부 조역(兆域)의 위치 및 좌향이 소연하게 나타나 있다 이를 근거로 상대등공과 문공공의 曾 高인 문강공(文康公)(휘 漢公)과 장렬공(莊烈公)(휘 慶遜)의 유택에는 건비 봉사하고있다 더욱 특기할 사항은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오족의 역사와 상계가 실려있다 부소보서 동근보서 서풍보서 구인사기초 낭렬사기초 소씨 상상계 소씨 상계등은 곧 이를 증빙해주는 문적들이다 비록 신빙성이 적은 것도 없지 않지만 이를 참고한다면 종래의 족보에 일대 수정을 가하지 않을수 없다 이상에 말한 바가 금번 수보의 직접적인 동기요 (후략)
- 신유 대동보 서 中
1981년 신유 대동보가 적제축융을 비롯한 상고사에 관한 내용들을 담게 된 것은 '치선 가승'에 기인한 것이었다. 1975년에 발견되었다고 적혀있지만 다른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는 1980년 들어 발견되었다는 서술도 본 바 있다. 어쨌든 이 치선 가승에 나와 있는 각종 문적의 발견으로 소씨 종친회는 시조 희철의 선대에 대한 계보에 확신을 갖게 되었고, 새로이 족보를 수정하면서 그 증빙으로 삼고자 '부소보서 동근보서 서풍보서 소씨 상상계 소씨 상계' 등의 글을 족보에 실은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보았지만 부소보서, 동근보서, 소씨 상상계 등에서는 그것이 당시의 기록이라고 믿기에는 미심쩍은 부분들이 등장하고 있다. 비록 세밀히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서풍보서, 구인사기초, 낭렬사기초, 소씨 상계 등에도 저작 연대를 의심하게 하는 구석이 많이 보였다. 이렇게 되면 치선 가승의 출처와 그 실체에 대해서도 또한 의심을 감추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서문에는 '신빙성이 적은 것도 없지 않지만' 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빙성이 적다면 굳이 그런 위험한 근거자료를 가지고 족보를 성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자중자애 님께서는 지금은 물론 비판적 지지에 대한 견해를 더이상 견지하고 계시지 않다 하시지만, 아직도 <대동보>를 근거로 하여 환국사를 진실이라 믿는 분들이 존재한다. '진주 소씨 족보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라는데 이렇게 증빙이 있다면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같은 것도 어느 정도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에게, 그리고 진주 소씨 족보를 편수하는 데에 힘쓴 많은 분들에게는 참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대동보>에 나타난 상고사 관련 내용은 현대에 들어서 조작된 문헌을 기반으로 했을 가능성이 다소 있다.
첫댓글 '진주 소씨 족보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현대에 들어서 조작된 문헌을 기반으로 했을 가능성'에 너무 무게를 두지 말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즉, 비록 그 근거가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같은 근,현대에 쓰여진 '위사성 사서'라고 할지라도 그 '위사성 사서들'도 전혀 근거없이 쓰여진 것들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와 같은 '위사성 사서'의 저본이 되었던 '古記類'가 처음부터 '위사성 기사'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위사성 기사'가 전혀 터무니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거가 희박한 희망사항이 많이 내포된 내용'이었었던 것으로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