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사람 이재욱이다. 지금은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소장도 하고 경기농식품유통진흥원의 이사장도 하고 있지만 젊었을 때는 농민운동을 대차게 했고 농사도 지었다. 팔 다리에 장애가 있어서 농사를 짓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농촌 마을에서 살고 있고 마을 활동도 하고 있다. 우리 마을에는 ‘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마을사업단체가 있다. 이 단체의 이사장도 맡고 있다.
신학대학원 강의는 5년 쯤 전에 감신대 대학원생들과 한번 해 봤다. 오랫만에 신학생들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 때문에 직접 만나서 대화하지 못해서 아쉽다. 내 얘기도 전하지만 신학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궁금해서 만나기를 기대했다. 정말 궁금하다. 내가 신학교 다닐 때 같이 다녔던 친구들과 얘기해 보면서 우리는 같은 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 가지고 있는 신의 상이 다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같은 신이라고 믿고 같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심지어는 신의 이름도 달랐다. ‘야훼’라고 아는 친구와 ‘여호와’라고 아는 친구는 서로 그걸 이념적인 차이라고 생각했었다. 부르는 호칭도 달랐다.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친구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친구 역시 이념적 차이가 있어서 그걸 진보와 보수라고 구분했었다. 하여튼 이렇게 믿었든 저렇게 믿었든 그 때는 졸업하면 대부분 일을 할 수 있었다. 월급쟁이 목사로 취업을 하던 개척교회로 창업을 하든 신학교를 나오면 일자리를 찾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학교도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겼다. 목사가 선망의 직업이 되다 보니 목사를 배출하는 신학교가 경쟁처럼 생겼다. 무인가 신학교가 수없이 생겼고 새로운 교단도 우후죽순(이라기 보다는 독버섯처럼) 엄청나게 늘어나고 여기서 목사안수를 쉽게, 도장 찍듯이 나눠줬다.
신생의 성장 가능한 영역이나 직업 혹은 시장을 블루 오션이라고 한다. 이 시기의 신학교와 목사, 개신교는 블루오션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교회없는 동네가 없다. 시골 오지마을에도 교회는 있다. 포화 상태라고 할 정도로 교회가 많다. 우리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돈버는 기도를 해주는 개신교」도 같이 성장하였다. 그런데 우리 경제가 성장을 멈춘 것과 맞추어 교회도 성장이 중단되었다. 신학교를 졸업해도 갈 곳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가 덮치면서 교회가 코로나 전파의 온상이 되었다. 개신교 세계를 잘 아는 우리는 신천지와 사랑제일교회가 이단 혹은 ‘이단성’ 교회라는 걸 알지만 대부분의 비기독교인들은 잘 구분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광화문 집회 등 극우보수 집회를 선도하는 집단이 보수적인 개신교 목사들과 교인들이니 다 ‘그 놈이 그놈이지’ 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8월말 경 김포에 사는 후배가 한 말이다. 김포시청 로비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하는데 옆을 지나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쓴 걸 보고 ‘아차, 마스크 안썼네’ 하며 마스크를 꺼내자 마스크를 안쓰고 있던 상대방도 마스크를 꺼내며 ‘ 교회다니세요?’ 하고 묻더란다. 그래서 ‘아니요. 교회 안다니는데요.’ 라고 하니 ‘그럼, 괜찮아요.’ 하더란다. 이게 우리 사회에 비쳐지는 개신교회의 모습이고 현주소이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블루 오션이었던 개신교가 이제는 레드 오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지난해 기장 농목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때 들은 얘기는 신학교 졸업하는 신학생 중 2천명이 졸업하자마자 바로 실업자가 된다는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해도 교회는 이미 과포화 상태이고 성장이 멈추어 더 이상 월급 목회자를 고용할 수가 없다. 지방이나 농촌에도 이미 교회가 다 들어차 있어 창업을 할 수가 없다. 아주 드물게 신도시나 도시 확장 과정에서 창업의 기회가 생기는데 땅사고 교회 지으려면 최소 십억은 든다. 옛날처럼 조립식 판넬로 비바람만 막아가지고는 아무도 안찾는다. 십억을 들여 지어도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않다.
더 이상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로 나가 하느님을 대역하고 신의 대리인으로 살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도 여기 이렇게 미래도 불투명한 신학도들이 있는게 나로서는 참 궁금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믿는 신이 어떤 길을 보여주었을까? 확신은 있는 걸까? 우리는 최근에 확신에 찬 졸업예정자들을 보았다. 자격증 취득 기회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의대 4학년 들이다. 90%가 넘는 의대생들이 시험을 거부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과감? 건방지게 의사자격을 포기하겠다고 덤빈 데는 의사들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던 거다. 신학도들도 목사 자격고시를 포기하고 있다. 자신감이, 확신이 없어서. 웃픈 현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은 신을 믿는 확신은 있냐고. 목사가 될 거라는 자신감은 있냐고. 이 질문은 모든 신학도 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지만 우리나라 엘리트 신학교인 한신대에 다니는 여러분에게 던지는 건 실례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혹시 유효한 학생이 있다면 내 얘기를 들어보시기 바란다.
우리 사회는 과도한 1극 사회가 되고 있다. 전체 국민의 20%가 서울에 살고 있고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은 해마다 지방소멸지수에 따라 지방소멸 위험 지도를 발표하고 있다.
인구소멸지수는 20세부터 39세까지 가임기 여성인구수를 노인 인구수로 나눈 값이다. 지수가 1~1.5명이면 현재의 인구가 유지되는 것을 알려준다. 0.5 이하면 인구 소멸 단계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것을 색으로 표현한 것이 소멸지도인데 빨간색은 인구소멸 고위험 지역이다. 녹색은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 그림 1을 보면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은 대부분 녹색이거나 연두색으로 인구 유지 혹은 인구 증가지역이다. 또 경부축에 있는 지역인 수원, 화성, 평택, 천안과 세종시, 구미·김천시, 대구 일부 지역, 울산과 부산 일부 지역이 인구 안정 지역이고 그 외 지역은 행정복합도시가 있는 나주 외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황토색이거나 인구소멸 고위험지역인 빨간 색으로 표시되고 있다. 2019년에는 빨간색 지역이 더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28년이면 인구정점에 도달하고 그 이후부터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인구절벽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 농촌은 이미 인구 절벽이 시작되었다. 태어나는 아이는 거의 없다. 초고령화 사회이다. 그림 3은 인구소멸 지도를 읍 면 동 단위로 표시한 지도이다.
수도권을 제외하면 전국이 황토색과 빨간 색이다. 늙어가고 죽어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70년대 80년대 경제 성장기에 우리나라는 노동력을 이용한 수출경제를 일으켰다.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서 원료를 외국에서 수입해서 가공하여 수출해서 외화를 벌어들였다. 그런데 비싸면 팔리지 않는다. 기술 수준이 떨어지는데 값조차 비싸면 혹은 비슷하면 사겠는가? 요즘 중국산 제품들을 보면 그 때의 우리나라 제품 수준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수출 시장은 미국이나 일본이었고 낮은 기술력으로 만드는 제품은 주로 가발이나 옷, 신발과 플라스틱 등 화학제품, 외국의 기술을 사들인 전자제품이었다. 가격 경쟁력은 값싼 노동력 밖에 없었다. 그래서 농촌의 젊은이들을 계속 끌어올려 갔다.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까지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다. 한 해에 백만명씩 태어났다. 베이비 부머 세대. 이들이 농촌과 지방에 그득했다. 당시 정부와 수출기업에서는 이들을 산업 예비군이라 했다. 노동 시장에 동원 가능한 예비 인적 자원이라는 말이다. 농촌에서는 자급자족의 농사 외에는 다른 일자리가 별로 없었고 도시와 공업단지에서는 일자리가 늘어났다. 당시 기업들은 추석이나 설이 되면 고향으로 노동자들을 내려보냈는데 이 명절 휴가를 재충전을 위한 쉼의 시간으로 주어졌다기 보다는 고향의 친구들을 끌어오게 하는 노동력 재생산의 기회로 삼았다. 이 때부터 젊은이들이 농촌을 등지고 서울로, 도시로 이전하는 이촌향도(移村向都)가 시작되었다. 또 조금 여유가 있는 집안은 서울이나 지방 대도시로 유학을 보냈고 형제들 중 똑똑한 아이가 있으면 다른 형제들이 희생하며 도시로 보내 대학까지 가르쳤다. 이렇게 농촌의 젊은이는 줄어들어 갔다. 농촌에서 나간 젊은 노동자들을 싼 임금으로 부려먹으려면 먹는 비용의 부담이 적어야 한다. 그래서 농업은 다수확으로 싼 농산물을 공급할 것을 강요받았다.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의 배경에는 이렇게 저농산물 가격정책과 저임금 정책으로 농촌의 이중 희생이 있다. 저농산물 가격 정책으로 생산비 조차 건지지 못하는 농민들은 집안이 통째로 농촌을 떠나기도 하고 농지 면적을 늘려 수확을 늘림으로 농업을 근근히 유지하고 있다.
저농산물 가격 정책과 저임금 정책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국내 농산물 가격을 더 이상 낮출 수가 없어서 외국에서 싼 농산물을 대거 수입하고 있다. 우리나라 식량 자급율은 47%가 안된다. 곡물 자급율은 23% 정도이다. 값싼 외국산 농산물을 대량 수입하면서 우리나라 농민들에게는 경쟁력을 강화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농업은 생산비도 안되는 농사를 강요받고 있고 농촌은 초고령 사회가 되고 있다. 농촌이 무너지면서 농촌 교회도 심각한 위기에 빠져 들고 있다. 주일학교가 없어지고 학생회가 없어지고 청년회는 물론 성가대도 없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농촌은 레드오션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블루오션은 단지 장사 잘되는 곳, 성장하는 영역, 시장이 커지는 곳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발상의 전환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것 역시 블루오션이다. 이제 교회에 목회자들의 일자리를 만드는 건 쉽지 않다. 농촌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시무하는 목사님들이 은퇴할 때까지 목회 자리는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떤 발상의 전환이 가능할까? 신학도가 바른 신앙을 갖고 있다면 꼭 목회가 아니라도 하느님을 증거하고 예수의 삶을 실천함으로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앞의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소멸 고위험 지역은 인구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정책을 세우고 있다. 주거 공간을 제공하기도 하고 공공 일자리를 만들어 취업도 시켜준다. 평일에는 일을 하여 생활비를 벌고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봉사를 하면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일부이기는 하지만 농촌 교회가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이나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활동(사업)을 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런 교회는 그 활동(사업)에 참여할 동반자를 찾고 있다. 그런 교회에서 활동을 할 수도 있다. 이 강좌에 참여하는 목사님들 대부분은 그런 목회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내 뒤에 강의할 전남 해남의 신기교회도 커뮤니티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노인돌봄 사업도 하고 있고 지역아동센타도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지역사회를 유지하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더 많은 사업을 구상하고 있지만 이런 계획을 도와서 함께 할 동역자를 구하지 못해 생각만 하고 있다. 내가 사는 춘천의 마을도 초등학교 아이들의 방과후 활동을 지원하는 지역아동센타. 농촌으로 유학오는 아이들을 돌보는 유학센타, 노인들의 의료와 건강을 지원하는 노인돌봄사업, 마을 노인들의 불편한 생활을 해결해 주는 ‘우리마을 119’ 사업, 말을 매개로 인지, 폭력, 은둔형 외톨이, 정서불안 등 장애를 치유하는 호스 테라피 사업을 하고 있다. 사업체의 이름은 ‘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이다.
우리 마을은 6개 리가 같이 모여 있는 곳이다. 농협을 같이 이용하는 경제생활권이고 하나의 초등학교를 이용하는 교육생활권이고 같은 보건진료소를 이용하는 의료생활권이고 437번 지방도로를 이용하고 3번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교통생활권이다. 이 마을에 교회가 두곳 있다. 원래는 세 곳이었는데 한 곳은 교인들이 없어져 폐쇄 됐다. 이 두 교회는 우리 협동조합이 하는 사업과 협력을 잘하고 있다. 한 곳는 보수교단 소속이지만 목사님의 설교는 절대로 전광훈 스럽지 않다. 나는 우리 마을협동조합에 선하고 신앙심 깊은 신학교 출신이 들어와 마을 사업을 같이하고 주일날은 교회에 가서 목회 조력도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마을 뿐 아니고 전국에 이런 마을과 교회가 많이 있다. 목회만을 염원하지 말고 새로운 발상의 잔환을 통해 하느님의 선함과 예수님의 사랑이 전파되는 히든 선지자의 등장을 기대한다. 농촌은 네오 블루 오션이다.
이재욱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이다. 주일학교를 다니고 교회 중고등부를 거쳐 청년회장도 지냈다. 신학교를 다녔고 대학때는 기독학생회도 하였고 기독청년회(EYC)에서 농촌분과위원장을 하였다. 충남기독교농민회 총무로 농민운동을 시작하였으니 그야말로 기독교 운동의 정통코스를 다 거친 셈이다. 지금은? 교회가지 않는다. 40대 까지는 열심히 교회 다녔지만 내 신앙의 렌즈로 보면 야훼 하느님은 한국 교회에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교회 밖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 자기의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과 더 가까이, 같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주일 성수를 포기했다. 처음에는 일요일만 되면 뭔가 빼먹은 듯 허전했지만 지금은 그런 트라우마를 벗어났다. 요즘 교회를 보면 교회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특히 농촌교회가 지역과 함께 더불어 사는 역할을 하는 걸 보면 흐믓하고 도와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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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오션에서 블루오션으로의 가능성은 없는가
농촌, 절망 속에서 발견하는 역설적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