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live/tQQbsK1Q3HU?si=wr6CU9C0l8wIgIQ3
시편 강론 3
시편 3:1-8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시편 3편은 흔히 ‘애가’, ‘탄식시’ 혹은 ‘애통의 시’로 분류하는 첫 번째 시이다. 애통, 슬픔을 토로하고 그 결국은 하나님을 찬양한 시의 전형적인 형태라는 것이다. 시편은 분명히 시(詩)라는 문학적 장르를 빌려 고백과 찬양을 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시의 특성상 짧은 표현 안에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기에 시편을 이해할 때는 엄청난 시간과 공간적 간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기법에만 초점을 맞추어 해석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시편도 성경의 한 부분이고 폭넓게 말하자면 성경은 66권이 아니라 한 권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자기 계시의 말씀을 기록된 책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시인의 단순한 고백이나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고백과 찬양으로 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를 언약으로 말씀하셨는데 그 언약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것이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
처음으로 표제가 붙은 시편으로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는데 이 표제를 누가 언제 붙였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표제를 그대로 인정하여 1절로 구분하였기에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도 굳이 다르게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 성경은 번역하면서 1절 앞으로 빼놓았다는 것의 차이가 있다.
본 시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사무엘하 15-19장에 기록되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왕이 되고자 하였을 때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압살롬의 군대는 다윗의 군대보다 훨씬 많았기에(삼하 15:13, 17:11) 다윗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대적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고백한다(1절). 대적들은 악한 말들을 쏟아 내며 다윗을 에워싸는 상황이었다(2, 6절). 시므이도 다윗을 저주하여 “7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삼하 16:7-8)라고 하였다.
그때 다윗의 상황을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삼하 15:30)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의 친구 후새가 압살롬에게 전향한 척하여 계략으로 다윗을 구하는 일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수의 뺨을 치시며 치아를 꺾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다고 고백한다(7절).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1-2절). “대적”이란 히브리어로 ‘차르’인데 ‘차라르’(묶다, 좁다, 속박하다, ~을 향해 적의를 보이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좁은, 단단한, 고통, 대적, 재난, 곤란, 원수’라는 뜻이다. 본 시를 노래한 사람이 다윗이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면 “나의 대적”이란 표현이 단순히 다윗 개인의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다윗 언약 안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 13:21-23)
바울 사도가 안디옥 회당에서 강론한 것인데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삼상 13:14)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신 것은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드러내기에 합당한 자로 선택하셨다는 의미이다. 그 뜻(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일련의 일들을 통해 계시하신 것은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나의 대적”이라고 하였을 때 그 의미는 ‘언약의 대적’, 곧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을 의미한다. 그래서 2편에 보면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2:2)라고 말씀하였다. 여기서 “대적”이라는 표현은 ‘차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알’(~위에, ~곁에, ~에 대하여, ~을 넘어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하여 마주 선다’라는 의미로 표현하였다. 이 대적은 “원수”이며 곧 “악인”(7절)이다.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이라고 하여 왕은 대적들이 많다고 세 번이나 강조한다. 대적, 원수, 악인들은 하나님께 구원이 없다고 한다. 환언하자면 하나님 안에 구원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대적자이고 원수이며 악인들이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를 읽는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나의 대적들이 나를 공격한다는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다윗의 대적,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요 원수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가해자의 입장에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원수는 마귀”(마 13:39, 눅 8:12)요 곧 “사탄”(막 4:15)이라고 하셨고 그 원수요 마귀, 사탄은 곧 ‘나 자신’이고 ‘우리’이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단순히 하나님을 향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만나기만 하면 죽이고 싶어 하는 원수이다. 자기 의를 믿었기에 하나님의 의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살해하였다. 내가, 우리가 유대인들이 되고 빌라도가 되고 로마 병사들이 되어 예수님을 처단한 것이다.
“셀라”는 구약에서 74회 사용되었는데 하박국 3:3, 9, 13 외에 나머지는 다 시편에 나온다. 그 의미가 불확실한데 ‘살랄’(들어 올리다, 높이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보고 음악 용어로 ‘목소리를 높이거나 악기의 리듬을 올리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소리를 높여서 찬양하라’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3절). 우리 성경에는 번역하지 않았는데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방패”란 히브리어로 ‘마겐’인데 ‘가난’(덮다, 에워싸다, 방어하다, 수호하다)에서 유래하여 ‘방패, 방어물’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확인시켜 주실 때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라고 하셨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라고 말씀하셨다. 바울 사도는 이런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믿음의 방패”(엡 6:16)를 말하였는데 한마디로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신 방패라는 뜻이다.
“영광”(히, ‘카보드’)이란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남으로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왕에게 주어져 영광이 된다는 것은 다윗 언약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온전히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머리를 드시는 자”란 성경에서 어떤 자리에 회복되는 것에 대한 상징어이다(창 40:20-21).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쫓겨나 감람산 길을 갈 때 머리를 가리는, 즉 자신의 머리가 없는 상태로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머리를 들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진짜 언약의 왕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머리를 드시는 자”란 언약의 왕이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머리가 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나타낸 말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의 자리에 그 머리를 두셨다(요 19:30).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2-23)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4절). “부르짖으니”라는 말의 ‘카라’는 ‘부르다, 선포하다’라는 뜻으로 표현이 미완료로 되었으니 계속 부른다 또는 선포한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응답하시도다”라는 말은 이미 응답하셨다는 뜻이다. “그의 성산”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주어지는 응답인데 곧 골고다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성취되는 구원을 가리킨다. 즉 다윗이 계속 선포한 것에 대한 응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다. 그래서 시편 2편에서 “내가 나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2:6)라고 선언하였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절). “붙드심이로다”라는 말의 ‘사마크’는 ‘의지하다, 기대다, 두다, 얹다, 지지하다, 지원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왕을 죽음의 자리에 두셨다가 다시 회복시키시는 살리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자리에 두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의 고난, 슬픔, 애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본래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두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6-7절).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행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왕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어나 구원을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표현은 실제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는 말이 아니라 대적들이 일어나는 것(1절)과 대조된 표현이다.
“뺨”의 히브리어 ‘레히’는 ‘턱, 뺨’이라는 뜻으로 심판 용어이다(삿 15:15, 욥 41:1, 겔 29:4, 38:4, 사 30:28, 호 11:4). “이를 꺾으셨나이다”라는 표현은 율법에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레 24:20)이라고 규정하여 말씀대로 심판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왕으로서 심판하실 것을 계시한 것이다. 마태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였다(마 2:5-6).
1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1-2)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8절). “구원”이란 ‘예슈아’는 ‘구원, 구출, 승리’라는 뜻이다. 구원이 여호와께 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시는 승리이다. “내리소서”는 히브리어 ‘알’(~위에, ~곁에, ~에 대하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대적의 반대 의미로 표현하였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자기 백성 곁에 오심으로 이루시는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구원, 이김을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이 복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 된 교회요 성도가 그 복을 은혜로 누리는 자들이다(202405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