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 17일 수요일, Lima, Flying Dog Backpackers (Miraflores 지역) (오늘의 경비 US $58: 숙박료 $23, 교통비 6, 입장료 12, 점심 37, 기부금 25, 환율 US $1 = 3.50 sol) 오늘은 Lima에서의 이틀째 날이라서 그런지 마음의 여유가 좀 생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중앙광장 음식점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Lima에 오면 꼭 들려야 한다는 페루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박물관 앞에 도착하니 건물 규모가 제법 컸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가니 영어를 하는 여자 직원이 우리를 맞는다. 박물관을 관람하기 전에 15분 짜리 소개 비디오를 보란다. 그 직원을 따라가서 조그만 모니터에 나오는 페루 문화와 역사 설명을 번개에 콩 볶아먹는 빠른 속도로 들었다. 질문 할 시간도 안주고 끝난 후 비디오 CD 두 장을 내놓더니 사란다. 가격도 싸지 않아서 한 장에 $25이란다. 비디오를 보여준 것은 CD 팔기 위한 목적이었다. 국립박물관에서 할 짓이 아니다. 직원의 기분 상하지 않게 거절하고 박물관 관람을 시작했다. 여러 방이 있어서 우선 잉카 문명관부터 시작했다. 잉카 왕들 초상화가 시대 순서대로 걸려있는데 이름만 있고 연대는 없다. 잉카 문명은 마야 문명과는 달리 달력 문화가 미미했고 문자가 없어서 기록도 제대로 안됐던 모양이다. 마지막 잉카인 (잉카는 나라 이름도 되고 잉카 왕이란 뜻도 된다) Atahualpa와 이복형인 Huascar의 초상화도 있고 Atahualpa의 처형 장면을 그린 그림도 있었다. 이 두 형제가 싸우지만 안았더라도 잉카제국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텐데 아쉽다. Cortez는 멕시코를 정벌할 때 멕시코의 여러 부족들을 갈라놓아서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들이 지칠 때를 기다렸다가 모두 쳐버리는 고도의 수법을 썼다. Cortez의 군대 규모가 수백 명 정도이니 아무리 인디언들이 처음 접하는 총과 쇠로 만든 칼과 창, 말을 가졌다 해도 수만 명의 대군과 어떻게 싸우나. 10여 년 후에 잉카를 정복한 Pizarro도 Cortez의 수법을 그대로 썼다. 당시 총은 전투하는 데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고 발포할 때 생기는 큰 소리로 원주민들이 놀라게 하는데 쓰고 정작 전투는 기마병이 긴 창으로 했다고 한다. 잉카 문명관을 끝내니 점심시간이다. 지하실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했는데 나는 고기 샌드위치를 시켜서 그런 대로 먹을 만 했는데 집사람은 메뉴에 나온 생선요리를 시켰는데 맛이 별로 없었단다. 민어 비슷한 생선을 레몬 즙에 절이고 양파와 고추를 섞은 요리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식사 전에 입가심으로 먹는 애피타이저이고 페루에서 제일 유명한 Ceviche란 음식이었다. Lonely Planet에 의하면 페루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인데 맛을 보았으니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애피타이저의 스페인 단어를 배웠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안 난다). 오후에는 다른 방들을 보았는데 무엇을 봤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빈약했다. 잉카 문명의 본 고장인 페루의 국립박물관이면 올 봄에 가본 멕시코의 국립박물관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비교가 안 되게 빈약하다. 오후 3시경 박물관 정문을 나오니 한 택시기사가 뜨거운 땡볕에 100m도 넘을만한 거리를 뛰어오더니 택시를 타라고 한다. 버스를 탈 것이라 했더니 실망해 하면서도 좋은 오후가 되라는 인사말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돌아간다. 중국 같았으면 싸움을 걸듯이 달라붙었을 텐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나라는 가난해도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만큼은 악착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2001년 중국 베이징 공항에서 나를 억지로 자기 택시에 태우려는 택시기사와 거의 몸싸움까지 했다. 숙소가 있는 Miraflores에 돌아와서 근처 바닷가 공원으로 걸어갔다. 바다 바람이 시원하고 태평양이 넓게 보인다. 바닷가 언덕에는 행글라이더 하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외국에서 원정 온 사람들 같았다. 바닷가 근처에는 호화스런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했다. 흡사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느 부유한 도시에 온 것 같았다. 공원은 "연애 공원"으로 꾸몄다. 남녀가 껴안고 키스하는 거대한 조각물이 있는가 하면 그 조각물과 비슷한 모습으로 키스하는 남녀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왜 으슥한 공원 숲 속 같은 곳에 가서 안 하고 종로 네거리 한복판 같은 곳에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역시 페루만 해도 서양 물이 많이 들어서인지 우리와는 다르다. 공원에서 두어 시간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려 하는데 신사 차림의 한 사람이 일본인이냐고 말을 건다. 한국인이라 했더니 페루에는 한국 사람들이 투자도 많이 하고 건축사업도 많이 벌린다며 한국 사람들의 페루 활동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흥미가 있어서 들었더니 본론의 얘기가 나온다. 자기는 원래 교사인데 (남미에서는 교사가 존경을 받는 직업이다. 대학에서 강의 한 번하고는 일생 Maestro라는 호칭을 이름 앞에 부처서 쓴다) 불우한 고아들을 모아서 공예품 만드는 기술을 가르친단다. 가방에서 10여세 먹은 아이들의 사진을 꺼내서 보여준다. 또 아이들이 만드는 공예품 사진도 보여주고 자기가 만난 신동영이라는 한국 대학생의 사진과 한글로 쓴 편지를 보여준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 사람은 고아들을 돌보는 참된 교사라는 것과 이 고아들이 만드는 페루 지도를 사서 고아들에게 도움을 주어 달라는 것이었다. 고아들은 대부분 인디안 가출 아이들인데 길가에서 살면서 마약과 도둑질을 하는데 이 사람은 이 애들을 모아서 공예 일을 가르치며 자생의 길을 걷도록 노력하고 있다한다. 그러나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서 자기가 이렇게 길에 나서서 고아들이 만든 지도를 팔면서 고아들의 생활비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서툰 영어로 설명을 한다. 아무리 보아도 진짜 같고 아니면 기가 막힌 연기를 하는 사기꾼이다. 도저히 안 사 줄 수는 없는 처지라 내가 가진 페루 지도를 보여주며 지도는 이미 있으니 못 사겠고 대신 애들이 만든 조그만 인형 몇 개를 $8을 주고 샀다 (나중에 보니 바가지 가격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마음이 찹찹했다. 좋은 일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사기를 당한 것도 같고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중국, 중미, 멕시코를 여행하면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지만 이런 식은 처음이었다. 과연 어느 쪽이었을지 궁금하다. 숙소에 돌아오는 중 바닷가에 접해있는 차도를 건너야 하는데 불과 10m 넓이의 2차선 길인데 신호등도 없고 양방향으로 차가 하도 빨리 달려서 건너기가 힘이 들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 나는 그런 대로 건넜다. 그것도 반대쪽에서 건너오는 사람과 부닥치면서 건넜다. 서로 자기 쪽 차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건너다 부닥친 것이었다. 그렇게 건너고 보니 집사람은 나를 따라서 건너지를 못하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고 있었다. 여유가 있는데도 차들이 너무 빨라 달리니 겁을 먹고 못 건너는 것이었다. 흡사 옛날 서울에 처음 온 시골 사람이 차도를 못 건너고 있는 식이었다. 하다 못해서 내가 차도로 들어서서 한쪽 방향 차들을 손짓을 해가며 막아 버렸다. 그런데도 다른 쪽 방향 차들이 사정을 안 봐주고 달리니 집사람은 계속 못 건넌다. 내가 막은 쪽 의 차들은 금방 10여대가 몰려서서 경적을 울러댄다. 그러던 중 반대 방향에 차들이 뜸해지면서 여유가 생겨서 집사람이 건넜다. 참 애를 먹었다. 나한테 정지당했던 차에 탄 사람들은 우리 모습이 재미가 있던지 웃으면서 지나간다. 저녁식사는 서울에서 가져온 라면으로 했다. 점심이 시원치 않았던 차라 별미였다. 가지고온 라면이 다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긴다. 저녁에는 라면을 들면서 다시 패티김의 노래를 들었다. 언제나 들어도 시원스런 패티김의 노래다. 내일은 버스로 4시간 걸리는 Pisco로 가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움직여야 한다. 저녁식사 전에 숙소의 한 대 뿐인 컴퓨터에 한글을 설치했다. 그런 다음에 고교 동창회 홈페이지에 간단하게 글을 올렸다. 그렇게 해서 이 세계에는 한글 입력을 할 수 있는 컴퓨터가 또 한 대 생겼다. 여행지도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연애 공원", 사랑하는 남녀에 관한 조각과 그림들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