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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선생 문집해설
탁영집 (濯纓集)(15-16c) 奎 4033濯纓 金馹孫의 문집. 6권 2책.
註) : 서울대학교 규장각 청구기호 奎 4033-v.1-2, 奎 7111-v.1-2 문집해설을 인용하였음.
- 2014. 9. 21 죽산 -
□간략해제
김일손의 문집은 저자의 조카인 大有가 遺文을 수집하고 編次를 정하여 1512년 淸道에서 처음 간행하였다. 이 책은 1668년에 증보하여 간행한 중간본이다. 그 후 1827년에 후손 再玉 등이 주도하여 遺文과 附錄을 증보하여 紫溪書院에서 세 번째로 간행하였고‚ 1838년에는 延諡기록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1903년 후손 榮灝가 연보와 家藏草本으로 속집을 덧붙여 재차 펴냈고‚ 1925년 연보를 제외하고 재편하여 간행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보충 간행되었다. 규장각에 소장된 <奎 4033>本과 <奎 7111>本은 동일한 책판으로 찍어낸 것인데 지질 등으로 볼 때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나 선후는 알 수 없다. <奎 4033>本의 글자가 중간중간 흐려져 있어 본 해설은 <奎 7111> 本을 중심으로 하였다.
□해제
濯纓 金馹孫(1464·1498)의 詩文集으로 그가 죽은 후 1668년(顯宗 9)에 후배 학자들에 의하여 다시 간행된 중간본으로 보인다. 저자가 戊午士禍로 寃死했으나 中宗反正(1506)으로 洗寃된 후에 당시 학자들이 그의 遺文을 모아 文集 1편을 간행하였다고 하나 그 刊年은 미상이며 그 후 이 初刊本이 剜缺되었으므로 여러 후배 학자들이 의논하여 重刊하게 되었다고 한다(1668년 宋時烈의 重刊 序文). ≪韓國圖書解題≫ (高大刊)에는 本集이 1책으로 되어 있으며 "印刻年代는 미상이나 조선 전기의 板本으로 추측된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것이 初刊本인 것으로 추측된다. 金馹孫의 자는 季雲이오 호는 濯纓이며 본관은 金海이다. 金宗直의 門人으로 동문인 金宏弼, 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86년(成宗 17) 生員이 되고, 같은해 式年文科에 甲科로 급제, 藝文館에 등용된 후 淸宦職을 거쳐 1491년 賜暇讀書를 했고, 뒤에 吏曹正郞이 되었다. 그 후 1498년(燕山 4) ≪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金宗直이 쓴 <吊義帝文>을 史草에 실은 것이 李克墩을 通하여 燕山君에 알려져 死刑되고 다른 많은 士類들도 화를 입었다(戊午士禍). 이를 계기로 새로 등장하였던 新進 士類들은 집권층인 勳舊派에 의하여 거세되었다가 中宗反正 후 伸寃되었다. 卷頭에 1668년에 宋時烈이 쓴 序文이 있다. 卷1:賦 6편(秋懷賦 등)과 雜著 8편(非𪜐人對, 政堂梅詩文後, 聚散贈李師聖別, 敎化送權子汎, 書仲鉤盡, 題士浩跋朴訥書後, 書六絃背, 書五絃背). 卷2:移文 1편(如海院重創移文), 書 1편(代人上巡察使書), 跋 1편(四十八詠跋), 序 8편(贈上人序, 送柳評事序, 送崔玉果序 등). 卷3:記 10편(癡軒記, 涵虛亭記 등). 卷4:哀辭 2편(朴希仁哀辭, 趙伯玉哀辭), 祭文 9편(祭仲雲文, 祭首露王文, 祭佔畢齋文 등), 墓碣銘 1편(趙興叔墓碣), 墓誌銘(管處士墓誌銘), 銘 6편(書案銘 등). 卷5 拾遺:策, 錄, 誌銘, 後, 詩 등 12편(中興對策, 續頭流錄 등). 이 拾遺편은 初刊本에는 실려 있지 않았던 것을 重刊할 때 모아서 실은 것으로 보아진다. 이어서 <贈都承旨濯纓金先生世系圖>라 하여 節孝公 克一로부터 濯纓을 거쳐 濯纓의 兄 駿孫의 아들인 三足堂 大有까지 四世의 世系圖, 紫溪書院에 賜額하고 三賢(節孝公, 濯纓, 三足堂)을 竝享하고 이에 祭를 지낸 諭祭三賢文, 寒岡 鄭逑가 쓴 春秋常享祝文이 실려 있고, 卷尾에 1649년(仁祖 27)에 趙絅이 쓴 節孝金先生孝門銘跋文이 附記되어 있다.
□저자개요
김일손(金馹孫)1464-1498 (세조10-연산군4)字: 季雲‚ 號: 濯纓·少微山人‚ 本貫: 金海‚ 父: 孟‚ 母: 龍仁 李氏
□저자내용
조선초기의 학자·문신. 慶尙道 淸道郡 上北面 雲溪里 小微洞에서 태어났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金克一로부터 ≪小學≫‚ 四書‚ ≪통감강목≫ 등을 배웠으며 18세에 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후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찾아가 뵈며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1486년(성종 17)에 進士가 되고‚ 같은 해 11월에 식년문과에 갑과 2등으로 급제하고 承文院 權知副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승문원 정자로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곧 홍문관 정자로 옮겼는데 부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진주의 교수로 나갔다. 1488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雲溪精舍를 열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 문하의 鄭汝昌·姜渾 등과 활발하게 교유하였다. 1489년에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注書를 거쳐 弘文館의 博士·副修撰·成均館 典籍·司憲府 掌令·司諫院 正言을 지냈다. 1490년 진하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고‚ 1491년에는 홍문관의 修撰을 거쳐 兵曹와 吏曹의 佐郞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副校理·校理 및 사간원 獻納·吏曹正郞 등을 지냈는데‚ 관료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賜暇讀書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주로 언관에 재직하였는데‚ 1496년에는 문종의 비 顯德王后의 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을 뿐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 부패 및 權貴化를 공격하는 한편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498년(연산군 4)에 柳子光·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戊午士禍에서 弔義帝文의 史草化 및 昭陵復位 상소 등 일련의 사실로 말미암아 능지처참의 형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었다. 중종 때 홍문관 直提學‚ 현종 때 都承旨‚ 순조때 이조판서에 추층되었고‚ 紫溪書院(雲溪精舍의 後身)과 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文愍이다.
□濯纓集 내용개요
1668. 송시열이 지은 ≪탁영집≫의 重刊 序文. 문장에 뛰어나 중국인들이 ‘동국의 昌黎(韓愈)’라고 칭하였으나 程朱보다 후세에 태어나 金宏弼‚ 鄭汝昌 등과 학문을 연마하고 道義를 함양하여 그 택함이 精一하고 잡되지 않아 漢唐의 시대보다 더욱 뛰어났다고 칭송하였다. 1498년(연산 4)에 弔義帝文을 史草로 만든 일 등으로 능지처참의 형을 받게 되자‚ 불태워지고 없어졌던 선생의 글을 중종 대에 신원된 후 수습하여 1책으로 만든 사실과 重刊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였다.
□卷之一
(1) 秋懷賦 1493. 한 해가 창망히 지나가는데 세월만 허송하고 있는 것을 슬퍼하며 읊은 부. 서당에 앉아 수심에 잠겨 있는데 친구인 姜運이 곁에 있다가 김일손이 홍문관에 등용되어 영화가 그지없는데 근심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추측하다가‚ 책을 통해 정주의 가르침을 받고 고인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세월만 부질없이 보내고 미인(임금)을 생각하며 나이만 점점 많아지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리라고 하였다. 이어서 사람이 천지에 태어나면 一元의 운행과 함께 하며 節序에 따라 마음이 풀렸다 조였다 하는 것인데 군자는 中正으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고 하며 산책을 나가자고 하였으나 자신은 아무 대답 없이 거문고를 퉁기며 가을의 감회 속으로 잠기기만 하였다는 내용.
(2) 感舊遊賦送李仲雍
1494. 1490년에 陳賀使의 일원으로 중국에 갔을 때 느꼈던 감회를 회상하는 賦로서 李穆(1471-1498)을 송별한 글. 송도‚ 평양‚ 안시성터 등에서 지난 날의 역사를 생각하고‚ 醫巫閭山‚ 山海關 등을 거쳐 연경에 이르러 國子監‚ 文天祥의 사당‚ 저자 등을 돌아다니며 옛 사람의 자취를 찾았으나 풍속과 교화가 변하여 사람들의 격이 떨어지고 함께 수작할 사람을 찾을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겼음을 회상하며‚ 이제 새로이 사신으로 중국에 가는 李穆을 송별한 내용이다.
(3) 擬別知賦送姜士浩 1493. 歸覲하러 가는 姜渾(1464-1519)을 송별하며 지은 부. 어릴 때부터 벗으로서 함께 공부하였고 강혼이 태학에 들어가 있을 때‚ 1486년 함께 급제한 후 내직과 외직으로 갈려 임명되었을 때 등을 제외하고‚ 늘 함께 지내며 도학은 程子와 朱子를 배우고 문장은 黃庭堅과 韓愈를 배웠다. 학문으로 세상에 아첨하고자 하지도 않았고 높은 벼슬에 급급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치지를 바라지도 않았는데 별로 하는 일이 없이 봉록만 받으며 편히 지내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이제 먼저 임금의 곁을 떠나는 그대를 보내고 홀로 외로이 한강 구비에서 서성인다는 내용이다.
(4) 遊月宮賦 1498. 도교에 미혹되어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宋의 운명을 노래한 부. 송나라의 徽宗이 도교에 빠져 權奸은 忠賢을 배척하고 환관이 믿음을 얻었으며‚ 토목공사를 일으켜 화분과 怪石을 진열하였고‚ 변방 오랑캐와 싸움을 일으켜 중원을 피로 물들였다. 당의 현종과 송의 휘종은 백년의 차이가 있으나 도교에 미혹되어 수백년 간 닦아온 나라의 기틀을 무너뜨린 것과 난을 당하여 쫒기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애처로운 마음이 그지없다는 내용이다.
(5) 疾風知勁草賦 1495. 사나운 바람이 불고 난 이후에 굳센 풀을 알 수 있다는 고사에 빗대어 역대의 지조를 지킨 인물을 노래한 부. 周公이 어려움 속에서도 조카인 成王을 도와 선정을 베풀었던 일‚ 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던 張巡과 許遠‚ 원나라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3년동안 구류당하다가 결국 피살되었던 송의 文天祥‚ 송에 대한 절개를 변치않고 자신의 충성을 굶어죽음으로서 보여주었던 謝枋得 등은 거센 바람에 꿋꿋한 초목이며 겨울철의 松柏과 같은 이들이다. 평화시에는 높은 관직을 누리고 후한 녹봉을 받으며 현신과 소인이 한 반열에 서서 의관을 차려입고 홀기를 꽂고 있지만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면 변절을 하고 세속을 따르지 않는 자가 드문데‚ 세속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름다운 명예를 고금에 떨치는 것이니‚ 거센 바람에 버티지 못하고 꺾여버린 자들의 약함을 한탄한 내용이다.
(6) 聚星亭賦 1498. 後漢代에 荀彧과 陳寔을 위하여 지은 聚星亭의 유래와 아쉬움을 읊은 부. 김일손은 이 부를 지어 鄭汝昌에게 보였다. 두 사람이 한마을에서 태어나 같은 뜻과 도로서 세상에 기여하기를 맹세하였고 나라에서 才士의 만남을 기려 정자를 지어주었다. 군자가 道가 있으면 조정에 이름을 떨치며 백성의 생명을 위하고 나라의 경제를 위해야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초야에 묻혔는가. 登禹‚ 楊朱‚ 李白‚ 杜甫 등 나라의 혼란에 손을 쓰지 않고 할 일 없이 놀다가 세상을 마친 이들을 돌아보면 시대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면 본받을 것이 많지만 오직 한스러운 것은 荀彧이 曹操의 막하에 들어가 자기 집의 風節을 떨어뜨린 것이라는 내용이다.
雜著
(1) 非鄠人對 鄠人을 그르다고 하는 비난을 반박한 글. 당나라 때 호현의 어떤 이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다리의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먹여 병을 낳게 하였고 임금은 그 효성을 치하하여 旌閭를 내리고 세금과 잡역을 부과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유는 몸을 훼상하여 어버이를 봉양한 것이 크나큰 불효라고 비난하였으나 자신이 생각하기에 신체를 훼상하면서까지 부모를 살리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자식으로서의 진정한 도리이며 효의 큰 것이라는 내용이다.
(2) 政堂梅詩文後 지리산에 유람할 때 斷俗寺 경내의 政堂梅花를 칭송하는 시문축을 본 후 쓴 後序. 政堂文學 姜淮伯(1357-1402)이 벼슬을 버리고 斷俗寺에서 여생을 보낼 때 매화를 한 그루 심어두었는데 그 후 100여년이 지나 증손 姜用休가 유적을 찾아보니 쇠락하였다. 강개한 그는 다시 매화 한 그루를 옆에 심어두었으니 인간만 자식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매화도 옆에 자식을 기르게 된 것이다. 강회백이 원래 야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으니 조물주 역시 이를 사랑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유훈을 잊지 않게 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3) 聚散贈李師聖別 1493. 李師聖을 이별하면서 인생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쓴 글. 이해 가을 사가독서하던 김일손·申用漑(1463-1519)·姜渾·李師聖 등 네 사람이 나이도 같고 관직의 업무도 유사하여 서로 우정이 매우 돈독하였다. 그런데 가을이 지나 얼마 후 이사성·姜渾는 부모공양차‚ 申用漑는 이조낭관 취임 등으로 서로 헤어지기 되었으니 슬픔이 극에 달하였다. 인생의 이합집산이 이렇게 무궁하니 허무하다는 내용이다.
(4) 敎化送權子汎 堤川에 현감으로 부임한 權景裕에게 ‘敎化’의 의미를 일깨운 글. 권경유가 부인을 잃은 슬픔에 校理를 버리고 제천과 같은 작은 고을에 현감으로 부임하자 그를 찾아가 어려서 공부한 바를 펼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이니 작은 고을이라 우습게 여기지 말고 백성들을 자신의 부인과 아이들처럼 생각하여 교화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5) 書仲鈞畵
(6) 題士浩跋朴訥書後 명필 朴訥의 글씨에 감동한 姜渾의 발문을 읽고 쓴 후서. 김일손이 綱目校讐廳에 재직할 때 寫手 朴耕의 사람됨에 항상 감탄하였는데 그의 아들 朴訥은 더욱 훌륭하였다. 용모와 예절이 뛰어나며 글씨 또한 생동감이 있었으나 한미한 집안 출신이므로 그의 이름이 드날리지 못하므로 이를 안타까이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강혼이 그의 글씨를 감상하고 칭송하는 글을 쓴 후 박눌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이는 벼슬을 하는 것보다 더 명예롭다는 내용이다.
(7) 題權嚮之關東錄後 김일손이 權五福(1467-1498)의 ≪關東錄≫에 붙인 후서. 죽마고우인 권오복은 1486년부터 동문수학하던 사이인데 권오복은 나이가 어렸지만 재기가 발랄한데다 詩文 또한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후일 김일손은 귀향하고 권오복은 서울에서 벼슬하는 관계로 4-5년간 서로 보지 못하다가 이해 3월에 서울에서 만났다. 근래의 시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자 ≪관동록≫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寄興과 發想이 매우 좋았다. 권오복이 평생 간직한 忠孝의 性情이 발로되어 나타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8) 書六絃背 거문고를 만든 후 지은 명문. 김일손·申用漑·姜渾·李師聖 등과 사가독서할 때 거문고를 배웠는데 이때 거문고를 하나 마련하기로 하고 東華門 밖 어느 노파의 집 대문 기둥을 얻어 거문고를 만들고 후면에 ‘물건은 외롭지 않으니 짝을 만난다. 이 오동나무는 나를 만나고 나는 이 나무를 만났다’는 銘을 적었다는 내용이다.
(9) 書五絃背 六絃琴에서 1현을 덜어 오현금을 만들고 지은 명문.
길이 3척‚ 넓이 6촌의 크기로 오현금을 만들어 부모님의 恩情을 노래한 南風曲을 노래하였다는 내용이다.
(10) 書唐屛 중국에서 사온 그림으로 병풍을 만든 후 붙인 글. 1489년 중국에 質正官으로 갔다가 북경의 烏蠻館에 기거하였는데 그때 옆에 何旺이란 자에게 비단과 옷을 벗어주고 古畵 14폭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매폭마다 馮公‚ 獻公‚ 朱公의 시문이 쓰여져 있었다. 돌아온 후 天嶺郡守로 부임하려던 형과 만나 중국에서의 소득을 이야기하던 중 그림을 보여주자 매우 좋아하며 병풍으로 만들어 가지고 싶다고 하므로 기꺼이 그림을 주면서 글까지 써 보낸다는 내용이다.
(11) 如海院重創移文 如海院을 重創한 후 지은 글. 본 군의 5리쯤 되는 곳에 지은 지 오래된 여해원이라는 野店이 있는데 高閣에 올라 사방을 보면 시야가 확 트이는 곳이었다. 兵士들과 行客들이 모두 쉬어가는 처소로 삼아 매일 천여 명의 손님을 치루었다. 그런데 마을의 못된 소년들이 불을 질러 모두 타버리자 이를 재건하자는 소리가 많았다. 그러나 비용이 많이 들어 엄두를 못내고 있지만‚ 異端의 寺刹에 백성들이 쏟아부은 돈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유익한 야점을 다시 재건하는 일은 斯文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전국의 백성들에게 유익한 일이니 모두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12) 四十八詠跋 임금이 내린 四十八詠詩集을 보고 여기에 붙인 발문. 48가지의 꽃과 식물 등 玩好物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이 올린 칭송의 詩句를 묶어 시집을 만들고 여기에 대한 발문을 부탁하자‚ 敬을 위주로 善政을 베풀어야지 玩物의 감상에 떨어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諫言하였다.
□卷之二
序
(1) 贈上人雲峯序 승려 雲逢의 詩軸에 붙인 서문. 김일손은 어려서부터 불교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승려들의 無慾에 대해서는 배울 바가 있다고 여겼다. 당시 운봉은 道科에 합격하여 속세의 刺史·縣令인 주지 자리를 마다하고 작은 암자를 짓고 기거하며 마을의 學人들을 찾아 詩會를 즐겼으니 그 사람됨이 매우 소탈하였다. 하루는 운봉이 자신의 스승 無本을 비롯한 여러 名士들의 詩軸을 가져와 보여주며 서문을 부탁하므로 이에 쓴다는 내용이다.
(2) 送柳評事序 평안도의 평사로 부임하는 柳順汀을 송별하는 글. 진정한 선비는 訓詁도 아니요‚ 詞章을 전문으로 하는 것도 아니요 射·御·書·數의 實學을 겸비하여야 하는 것이다. 근래 이같은 실학자가 없었는데 유순정은 일찍이 節度使의 幕府에서 일하였으며 武藝 또한 뛰어나니 변방의 일에 적합하였다. 특히 서북방은 동북방에 비하여 더욱 시급하니 평안도 관찰사를 잘 섬기어 서방의 兵務를 안정시켜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3) 送崔玉果序 옥과현감으로 부임하는 崔亨漢을 위로하는 글. 전라도 출신의 최형한은 문장이 좋아 과거에 급제한 후 곧 6년간의 父母喪事를 마쳤다. 이윽고 중국의 사신으로 갔다온 후 반드시 臺閣에서 일할 줄 알았는데‚ 옥과현감으로 부임되자 안타까이 여기며 관직의 고하와 내외를 따지지 말고 善政하여 治積을 바라는 내용이다.
(4) 送李評事子伯序 친구 李胤이 변방의 외직으로 부임하자 송별의 뜻을 적은 서문. 이윤이 아버지의 喪으로 인하여 영남에서 지내다가 다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영남의 직책을 원하였으나 동북방의 변방에 장수로 부임하게 되자‚ 이를 위로하면서 북방의 국경을 오랑캐로부터 지켜 조정과 어머니의 염려가 없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忠孝라는 내용이다.
(5) 感舊遊賦後序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학자들을 만났던 일을 회상하며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에게 도학을 전수받도록 당부한 글. 고래로 중국의 학문이 우리나라에 전해졌지만 근래에 중국의 도학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일전에 나는 북경에서 禮部員外郞 程愈에게서 ≪集注小學≫을 전해받았고 順天府의 學士 周銓을 만나 시문을 나누었다. 중국학자들이 조선을 우습게 알아 잘 만나주지 않더라도 이들을 찾아가 道를 구하는 좋은 기회로 삼도록 충고하는 내용이다.
(6) 晉陽修稧序 1488. 3. 晉陽修稧의 조약과 계원 명단을 정하고 난 후 쓴 서문. 蘭亭과 洛陽의 修禊를 본받아 20여인의 계원들이 진주를 낙양으로 삼고 矗石樓를 난정으로 삼아 모임을 꾸렸다. 牧使 慶大素의 주관하에 서로 돕는 약조를 만들고 성원의 이름을 적은 후 서문을 부탁하므로 쓴다는 내용이다.
(7) 贈山人智楫序 승려 智楫에게 보낸 글. 1489년 김일손이 金寧에 유배되었을 때 친구 河啓卿이 근처의 雲岾寺에서 독서하다가 자주 문안하였는데 이때 승려 지즙을 소개하였다. 지즙을 만난 김일손은 그가 ≪韓昌黎集≫을 보고 있자‚ 가장 불교를 배척하였던 한유의 문집을 보는 이유를 물으면서 토론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권 제3
記
(1) 癡軒記 1495. 제천군수 權景裕가 서당을 짓고 이름과 기문을 부탁하여 지은 글. 권경유가 제천군수로 부임한지 3년만에 客館의 서편에 서당을 짓고 기문을 부탁하자 먼저 이름을 ‘癡軒’이라고 지어주면서 약삭빠른 세상에 무딘 권경유의 자질을 칭송하여 이같은 이름을 지었다는 내용이다.
(2) 涵虛亭記 金海府使 최모가 함허정의 기문을 부탁하므로 쓴 글. 김해부사 최모는 燕子樓를 신축하고 樓臺 북쪽에 연못을 파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만들고 함허정이라고 하였다. 1498년 김일손이 조부의 묘소를 손질하려고 귀향하였다가 최모를 만났는데 그가 함허정을 구경시켜주면서 기문을 부탁하므로 마음은 본래 허함을 본질로 하니 조금의 찌꺼기도 남아서는 안될 것이라는 내용으로 썼다.
(3) 二樂樓記 丹陽의 이요루를 보고 지은 기문. 竹嶺을 거쳐 단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丹丘峽이라는 수려한 계곡이 있으며 더 들어가면 南川이라는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맑은 강물이 있었다. 남천의 左岸에 바로 이요루가 있었는데 丹陽侯 黃璘·권경유 등과 함께 유람한 후 진정 樂山樂水의 仁과 德을 지닌 사람이 되라고 황린에게 당부한 내용이다.
(4) 靈山縣監申澹生祠堂記 신담의 공적을 하늘의 생민(生民)에 비유한 것이다.
(5) 會老堂記 金海府의 회로당에 대한 기문. 일찍이 김해에 거주하였던 金順孫이 본부 북쪽에 세운 회로당은 부로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활을 쏘며 글을 읽는 鄕黨의 장소였다. 그러나 책임자(任擧)가 없어 자주 빈집으로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489년 前義城縣令 金係綿‚ 前靑山縣監 白啓英‚ 前引儀 裵炯‚ 前參軍 宋叔亨 등과 김일손의 從兄 進士 金伯堅등의 5명이 유향소의 향정이 되어 고을의 공사를 이곳에서 의논 처리하면서 유향소로 자리잡았다. 어느 해 겨울에 김일손이 이곳을 지나다가 종형 김백견 등이 招致하여 가보니 유향소의 풍속이 예법에 맞지 않는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회로당의 기문을 청하였다. 이에 심강오륜의 가르침으로 백성들을 깨우치되 惡行이 심한 자는 有司에 고하여 고을의 풍속을 순후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기문을 지었다.
(6) 臨錦堂記 1493. 이해 綸音을 반포하기 위하여 김해부 도착하자 府使 禹某가 새로 지은 집에 숙소를 마련해주었는데 바로 임금당이었다. 친구 李宗準이 지은 이름이었다. 동서로 방이 있어 寒溫을 구비하였으며 벽마다 창문이 있어 아름다웠다. 특히 난간 밑에는 시냇물이 흘러 거문고 퉁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가장 신기로웠다. 禹公과 酬酌하던 중 술이 절반 취하자 김일손에게 기문을 청하므로‚ 일찍이 공의 서울집에 가보니 泉石은 화려한데 집이 협소하여 家産에 소홀한 處士의 집과 같아 균형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금당은 泉石과 집이 모두 규격을 갖추었으니 公私를 구별할 줄 아는 그대의 풍모를 졸렬한 筆力으로 당하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7) 機張縣館記 1490. 7.16. 영남에 있는 機張縣館의 記文. 영남의 67개군의 관사는 소백산을 끼고 있으며 바다를 끼고 있는 읍 또한 20여 곳이 된다. 그중 기장은 가장 잔약하여 볼만한 것이 없는데 1485년 여름 訓練院 習讀官 閔寬이 기장현감으로 부임하여 잔폐한 관사를 부흥하려고 하였으나 흉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88년에야 완공하였다. 1490년 민관이 임기가 만료되어 고을을 떠나면서 김일손에게 기문을 청하므로 일찍이 남들이 하지 못한 館舍를 일으키되 농번기를 피해 공사를 벌여 백성들을 고되게 하지 않은 선정을 칭송하였다.
(8) 梅月樓記 1490. 5. 김일손이 지은 陜川 梅月樓의 기문. 1489년에 陜川에 부임한 守令 金永錘가 객관의 동북쪽에 3칸의 누각을 지으니 매월루였다. 김일손이 이곳을 한번 가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경상도관찰사 鄭某와 함께 이곳을 찾아 수작하던 중 합천수령 김영추가 기문을 부탁하였다. 이에 매월루의 청아·단박함이 후일에도 김영추를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적었다.
(9) 重修淸道學記 1485. 5. 李勻이 청도군수로 부임하여 學舍를 중건한 후 기문을 청하므로 쓴글. 이균이 청도군수로 보임하여 3년만에 모든 일이 명령대로 진행되었으나 學舍는 기울어지고 祠宇는 기와가 깨지고 담장이 허물어졌다. 그는 짓다가 만 寺刹 건물을 조사하여 기와와 기둥을 수습하여 학교를 정돈하니 이단을 배척하고 儒道를 호위한 공이 몇 배 컸다. 국초에 사찰을 빌어 학교로 사용하던 것을 경상도 도사 朴融이 처음 학사를 기초하고 이후 청도군수 李實이 완성하였는데 지금 60여년이 지나 이균이 중건하니 공경의 뜻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내용이다.
(10) 釣賢堂記
籌邊樓記 중국 唐나라 때 西川節度使를 지낸 李德裕가 지은 주변루기로 김일손이 옮겨 적은 것을 문집에 그대로 실은 것이다. 이덕유가 황제의 곁에 있지 못하고 변방에 오래동안 나와 있으면서 높은 樓臺를 지어 사방을 경계하고 변방을 다스릴 계책을 마련한다는 뜻으로 ‘籌邊’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화공에게 그림을 그려 그곳에 가보지 않고도 누대의 형상을 볼 수 있게 하고 그림조차 보지 못하는 이를 위하여 記文을 지어 영원토록 전하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제4권
哀辭
(1) 朴希仁哀辭 1492. 김일손이 朴增榮(1466-1494)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
(2) 趙伯玉哀辭 1493. 김일손이 나이를 뛰어넘는 교유를 나누었던 趙伯玉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
祭文
(1) 祭仲兄梅軒公文 1492. 김일손이 자신의 중형인 梅軒 金驥孫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2) 梅軒公遣奠祭文 1492. 김일손이 중형 金驥孫을 위하여 제를 지낼 때 지은 제문이다.
(3) 梅仲軒雲小祥祭文 1493. 김일손이 중형 金驥孫의 소상 때 지은 제문이다.
(4) 哭伯魚文 1492. 김일손이 지은 南孝溫(1454-1492)의 제문. 형의 죽음에 이어 친구를 떠나보낸 슬픔을 적고 있는데‚ 1492년 9월 형을 잃은 후 10월에 세상을 떠난 남효온을 위해 지은 것으로 ‘伯魚’는 ‘伯恭(南孝溫의 자)’의 誤記인 듯 하다.
註(죽산) : 탁영선생연보에 「1492년 겨울 10월 계묘(6일) : 호당(湖堂)에서 추강(秋江)의 부음(訃音)을 듣고 곡하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추강(秋江)은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호이다.
또한 본문 내용 중“前年哭吾兄 今年哭吾君”의 내용을 검토하면, 사망일이 형 기손은 1492년 9월 16일, 남효온은 10월2일 로서 연도는 같다. 즉 위 해제가 맞다면, 前月哭吾兄 今月哭吾君 이 되어야하니 伯魚가 伯恭, 즉 남효온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지만 실제 확인은 거의 불가능하다.
(5) 祭太守金良琠文 一 - 二 김일손이 淸道太守 金良典을 위하여 지은 제문 2편이다.
(6) 祭首露王文 김일손이 始祖인 김수로왕에 제문을 지으면서 老母의 장수를 기원하였다.
(7) 祭佔畢齋先生文 一-二 1492. 김일손이 佔畢齋 金宗直을 위하여 지은 제문 2편이다.
墓碣銘
(1) 趙與叔墓碣銘 김일손이 지은 趙廣臨(1463-1493)의 묘갈명. 148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2년 대과에 급제‚ 承文院正字‚ 奉常寺 奉事 등을 역임하였다.
(2) 安東府使趙候墓碣銘 김일손이 지은 安東府使 趙之周(1427-1492)의 묘갈명. 李昌臣이 장인 조지주의 묘갈명을 부탁하므로 쓰게 되었다. 1451년 仁壽府丞‚ 그후 主簿와 直長을 역임한 후 1455년 司憲府監察로 전임되었다. 그후 외직으로 新溪·長湍·延安·豊川·江華·楊州·星州·安東 등지에서 선정을 베풀었다. 풍천에서 내직으로 들어와 僉知中樞府使 兼五衛長이 되었으며‚ 후에 刑曹參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3) 平胡公墓碣銘 1496. 윤3월. 김일손이 지은 平胡公 李亨孫(1418-1496)의 墓碣銘. 김일손의 형들이 서울에 과거시험을 보러갔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이형손이 죽자 그 아들이 墓表를 부탁하므로 쓰게 되었다. 1418년 連山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 吉州判官으로 부임하였으며‚ 그후 軍器寺副正‚ 1457년 함길도찰방으로 전임하였다. 후에 藍浦·沃溝의 兵馬使와 咸吉道 都鎭撫 및 義州牧使등을 역임하던 중 1467년 朴仲善과 함께 李施愛 난을 진압하였으며 그 공으로 2등공신에 봉해졌다. 다시 全羅道節度府使‚ 全州府尹‚ 淸州牧使 등을 역임하다가 1496년 사망하였다는 내용이다.
贈都承旨濯纓金先生世系圖 김일손의 가계도. 조부 金克一-金孟-金駿孫·金驥孫·金馹孫-金大有·金大壯의 간단한 字·號와 이력을 기록하였다.
賜額紫溪書院諭祭三賢文 1661. 왕을 대신하여 工曹參議 李殷相이 자계서원에 사액을 하고 제사를 올릴 때 지은 제문. 선비의 행실에 孝가 근원인데 김극일이 근본을 세우고 아들은 이를 받들어 윤리에 돈독하여 그 지극한 효로 旌閭를 세웠으니 三達尊(齒·德·爵: 고을에서는 나이‚ 세상을 보존하고 백성을 기르는데는 덕‚ 조정에서는 관직) 가운데 齒·德을 겸비하였다. 그리고 爵은 후손에게 전해주었으니 김일손이 일찍이 훌륭한 재주로 글짓는 이들의 중망을 받았다가 史筆의 고초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金大有는 水也山 三足堂에서 유유자적하니 이 三賢을 모시고 춘추로 사당에 제향하도록 하고 扁額을 내린다는 내용이다.
三賢祠春秋常享祝文-寒岡鄭先生撰 鄭逑가 金克一·김일손·金大有 세 공의 춘추제향을 위해 지은 제문. 金克一은 敎化의 家庭에 미침을 칭송하고‚ 김일손은 행실이 준엄하고 언어가 엄정하여 道가 높았다고 서술하고‚ 金大有는 經世의 경륜으로 은거생활을 하였음을 칭송하였다.
墓誌
(1) 副司正李公穎墓誌銘 김일손이 지은 副司正 李穎의 墓誌銘. 이영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李繼孟(希醇)이 묘지명을 부탁하여 쓰게 되었다. 이영은 1415년 礪山에서 태어나 軍衛에 들어가 龍驤衛 副司正이 되었으며 1477년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다.
(2) 管處士墓誌銘 김일손이 毛筆을 의인화(管處士)하여 지은 명문. 관처사의 이름은 述‚ 자는 述古이며 본성은 毛氏로 毛刺史·管城侯·毛元銳(모두 붓의 異稱) 등이 그의 선조라면서 중국의 역대 명품을 모두 의인화하여 서술하고‚ 자신의 붓 述古慧는 족제비털로 된 적황색 옷을 입었는데 평소 肺病으로 물을 마시기를 좋아하여 아이들처럼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였는데‚ 옛날 일에 너무 感傷하여 일찍 귀밑털이 빠져 죽어버리니‚ 竹皮冠과 紙衾을 덮어 독서당 북쪽에 관을 묻고 장사지낸 후‚ 管族의 후손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명문을 짓는다는 내용이다.
銘
(1) 書案銘 김일손이 책상에 붙인 명문. 가운데가 비어 물건을 놓을 수도 있고 원목의 4개 다리는 질박하구나. 책상에 놓여있는 經典과 史記는 聖賢의 업적을 기록하였으니 나는 이를 의지한다는 내용이다.
(2) 書架銘 김일손이 書架에 붙인 명문. 서가의 나무가 강하여 무거운 짐을 오래 지탱하여주니 仁에 가깝다는 내용이다.
(3) 琴架銘 김일손이 거문고 匣에 붙인 명문. 자신의 나쁜 마음을 씻어주는 공을 노래하였다.
(4) 短檠銘 김일손이 등잔대에 붙인 명문. 공부하면 밝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어두워지는 등잔은 버려둘 수 없는 물건이라는 내용이다.
(5) 內賜水精盞銘 임금이 내려 준 수정잔에 붙인 명문. 구리를 바탕으로 황금을 칠하였으며 姜士浩의 篆書로 ‘內賜讀書堂’을 새겼다는 내용이다.
(6) 五絃琴銘 김일손이 오현금에 붙인 명문. 좋은 재목에 좋은 장인의 솜씨로 줄을 달아 南風歌를 타니 舜임금의 소리가 남아있는 듯하다는 내용이다.
策
(1) 中興對策文 1486. 中興의 대책을 질문한데 답한 책문. 김일손이 이 글로 文科 覆試에서 장원하였다. ‘옛날 제왕이 일어나 大業을 이루어도 그 후손들이 제대로 守成하지 못하여 쇠퇴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천하의 형세가 離合의 氣數가 있어 사람의 힘으로는 막지 못하는 때문인가 아니면 收復하는 사람의 방법이 잘못된 것인가?’를 물으며 中興의 방법을 강구하자‚ ≪史記≫의 古事를 들어 설명하였다. 천하통일 후에 얼마가 지나면 쇠퇴가 있고 쇠퇴 후에는 중흥이 있으니 여기에는 3가지 조목이 가장 중요하다. 곧 勢와 數와 道이다. 이중 道는 가장 중요한데 道를 얻으면 勢와 數는 따라오는 것이다. 數란 천하가 다스려지기도 하고 亂하기도 하는 것으로 비록 국가가 이합집산의 勢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道를 따르지 않고 數에 맡기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道는 修己와 任人에 다름 아닌데 역사의 中興主는 바로 이를 잘한 것이라면서 군주가 修養에 힘써야 적임자를 등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내용이다.
錄
(1) 頭流紀行錄 김일손이 지리산을 여행하면서 지은 기행문. 소원이던 지리산 여행을 天嶺사람 林大仝‚ 進士 鄭伯勛과 함께 떠났다. 14일 천령을 출발하여 蹄閑의 주막을 지나 저녁에 登龜寺에 도착 하룻밤을 머물렀다. 아침에 폭포 등을 지나 金臺菴에 도착하였다. 이어 龍遊潭을 지나 巖川寺에 도착하였다. 山陰縣으로 접어들며 換鵝亭을 지나 丹城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이튿날 斷俗寺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政堂梅를 구경하고 지리산 최고의 절경이라는 黙契寺에 도착하였으나 말보다는 못하였다. 저녁에 上元寺에 도착하여 유숙한 후 아침에 천왕봉을 오르기로 약속하였다. 아침에 世尊菴에 올라 천왕봉을 바라보다가 法界寺로 올라가 잠시 쉰 후 다시 산을 올라 마침내 천왕봉 정상에 오르니 정상에는 석축을 쌓고 작은 板屋이 있으며 그 안에 여인의 石像이 안치되었는데 바로 ‘天王’이었다. 紙錢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1472년 金宗直·兪好仁·曹偉 등이 함께 오르다라는 글귀도 보인다. 아침에 日出을 구경한 후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다. 제사 후 石門을 빠져나와 香積寺에 도착하니 스님이 오늘은 매우 날씨가 좋아 지리산 전경을 다 볼 수 있었음을 축하하였다. 24일에 靈神寺에서 유숙한 후 산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전진 義神寺에 도착하였다. 이윽고 조금 편안한 곳으로 산행하기로 하고 여울을 따라 新興寺에 도착하였다. 26일 花開縣으로 향하다가 <雙溪寺眞鑑禪師碑>를 구경한 후 쌍계사에 머물렀다. 다음날은 비가 너무 내려 떠나지 못하고 28일 아침에 쌍계사의 동쪽으로 전진하여 가니 넓은 땅이 나와 사람들이 살만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전하기를 靑鶴洞이라고 하였다. 청학동을 지나 사다리를 오르니 佛日庵이다. 불일암에서 청학동의 전설을 생각하며 가장 좋은 신선의 지경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생각하였다는 내용이다.
書
(1) 代人上巡察使書 남을 대신하여 慶尙道 巡察使에게 올린 편지. 1484년 三南의 백성들을 함경도·평안도로 徙民시키는 정책으로 白桂英의 후손들도 이주대상이 되었다. 그들을 대신하여 김일손은 고려말 충신이었던 청도군의 白桂英의 공을 들어 후손들을 이주대상자에서 빼달라는 청을 올렸다. 백계영은 그의 동생 白利章과 함께 密城·金州 등지에서 난을 일으킨 朴景純 등을 진압한 공으로 戶長에서 品官이 되었으며 그후 후손들이 淸道郡에 대대로 살면서 그의 遺訓을 이어받았으니 고향을 떠나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詩
(1) 奉和權嚮之睡軒(原韻附)
(2) 送柳牧上洛
(3) 題三嘉縣關水樓
(4) 與睡軒登關水樓
(5) 次睡軒(原韻附)
詞
(1) 送李評事子伯胤侑別 친구 李胤이 변방의 외직으로 부임하자 송별의 뜻을 적은 글. 만리를 從軍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며 성위에 幢巾을 쓰고 있구나. 白山과 黑水를 바라보며 나라의 흥망을 걱정하누나. 한잔의 술로 3년을 이별하니 옛 친구를 밤하늘 구름너머로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제6권 附錄
實記
神道碑銘
紫溪書院重刱文(詠歸樓)
紫溪書院請額疏
禮曹回 答
賜額致祭文
春秋享祝文
祭文
祭墓文
卷之 七
附錄
請諡疏
再訴
吏曹回 啓
議政府領議政獻議
左議政獻議
右議政獻議
吏曹覆 啓
贈職 敎旨
仕版旁註
諡狀
□卷之 八
別附
(1)節孝先生孝門銘跋 1649. 趙絅이 지은 김일손의 조부 절효공 金克一의 孝門銘의 발문. 절효공이 효행이 지극하여 ≪三綱行實≫에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때 손자인 김일손은 어리고 증손자 三足堂 金大有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아 김종직이 지은 절효공의 旌閭銘에 두 선생의 기록이 누락되었다. 이번에 靑道의 유생들에게 김일손과 김대유에게는 절효공과 같은 조부가 있고 절효공에게는 이러한 손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자손에 대한 훈계로 삼고자 세 公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첨가한다는 내용이다.
(2) 三足堂先生遊詩 三首
(3) 三足堂先生遊詩跋
續集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