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계서원은 처음에는 1928년 옥봉(玉峰) 권위(權暐, 1552~1630)가 거처하던 만대헌 옛 터에 있었으나 서원으로 승격하여 다시 세웠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현재 도계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만대헌(晩對軒) 터이다. 만대헌은 옥봉 선생이 강학하던 곳이다. 이 정자는 선생이 36세 되던 해인 1587년에 건립되었다. 마루 상단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주원조와 화답한 시문이 걸려 있으며, ‘만대헌’이란 편액은 명필인 아우 연어정(鳶魚亭) 권오(權晤)의 필적이다. 좌측에 온돌방을 꾸미고, 우측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 앞에 반 칸의 퇴를 돌출시켜 전체적으로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구조 수법이나 가운데 설주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 후 여러 번 중수를 거쳐 1991년 후손들에 의해서 묘우인 모현사와 강당인 명륜당을 새로이 수리하고, 동재인 상의재와 홍도문, 주사 등을 새로이 지었다. 사당 모현사(慕賢祠)와 강당으로 쓰이는 명륜당(明倫堂) 모두 옛 제도 그대로 수리되었고, 재실 상의재(尙毅齋)와 문간 홍도문은 모두 고쳐 지은 것이다
서원내 만대헌(晩對軒)은 1992년 7월 18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7호로 지정되었다.
건축 배경
1687년(숙종 13) 옥봉(玉峰) 권위(權暐, 1552~1630)를 제향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웠다.
건축 특징
모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옥봉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다.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며, 동쪽 방은 헌관실로 서쪽 방은 재석 및 별유사의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에 도계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동재인 상의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의 형식은 팔작지붕이다. 이곳은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강학하던 곳이다.
건축 구성
모현사(慕賢祠), 명륜당, 신문, 동재, 주사
현판
도계서원(道溪書院)
만대헌(晩對軒)
양괴정(兩槐亭)
명륜당(明倫堂)
상의재(尙義齋)
홍도문(弘道門)
도계서원중수기(道溪書院重修記)
관련인물
주향자
- 권위(權暐, 1552~163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회(叔晦), 호는 옥산야옹(玉山野翁) 혹은 옥봉(玉峯)이다.
권위의 부 심행(審行)의 자는 가립(可立)이요, 호는 취규재(聚奎齋)이다.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훈육에 힘입어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장남 희(?)는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셋째 오(晤)와 넷째 호(?)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권위는 어려서부터 침중 근후하여 기쁘고 성냄을 외면에 표현하지 않았으며, 독서와 문사에 힘써 약관 21세에 동당별시(東堂別試)에 나아가 한꺼번에 삼장(三場)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예시(禮試)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하삼도(下三道)의 호우(豪右:세력가)들을 적발하여 다스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에 정이주(鄭以周)가 어사로 영남에 내려왔다. 1576년(선조 9) 안동은 시모(弑母)의 변(變)이 있었던 관계로 현(縣)으로 강등되어 있었으며, 현감은 호서지방에서 온 서익(徐益)이 맡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경상병사(慶尙兵使)로 있던 예안(禮安) 출신의 김부인(金富仁)이 근무 평정을 할 때, 서익이 탐학하다고 감사 박소립(朴素立)에게 말하였으나 감사가 이를 바로잡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말을 서익에게 누설하고 말았다.
권위의 부친 권심행(權審行)은 병사 김부인(金富仁)과 종반간인 후조당 김부필(金富弼)과 두터운 사이였다. 그래서 서익은 옥봉의 부친이 김부인에게 사주했다고 의심하고 앙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해서 어사인 정이주에게 부탁하여 죄안(罪案)을 만들어 조정에 알리게 되었다. 마침내 그의 부친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옥(獄)에 갇히게 되었다. 다행히 부친은 혐의가 풀리기는 하였으나 전염병에 걸려 그만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권위는 3년간 외부 출입을 끊고 시묘하였으며, 이 같은 변고를 겪고 나서는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 군사가 안동에 진주하게 되었는데,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의 막부에서 참모로 있던 주원조(朱元兆)가 그를 한번 만나보고, 마음으로 열복하여 교유를 맺었다. 그러자 주원조 휘하에 있는 군사들이 그를 보면 깍듯이 ‘재상(宰相)’이라 부르며 인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뒤늦게 50세의 나이로 모친을 위해 과거에 응시하여 1601년(선조 34) 문과에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으며 겨울에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다. 이 때 마침 중국에서 사신으로 고천준(顧天俊)이 우리나라에 왔다. 당시에 심희수(沈喜壽)가 공조판서로 반관(館伴: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겸하게 되었는데, 옥봉의 도움에 힘입어 예법에 이지러짐이 없이 사신을 접대하였다. 이에 심희수는 그를 매우 아껴주었으며, 늘 그 지위가 그의 덕에 맞지 않음을 아쉽게 여겼다고 한다.
이후 권위는 해미현감(海美縣監:현 충남 서산시 해미읍), 강진현감(康津縣監:전남 강진읍), 형조(刑曹)·호조(戶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54세에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어 별시과장(別試科場)에 남입(濫入)한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범인들이 모두 당로(當路)에 있는 권력가들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 않고 법대로 집행하였다. 58세에는 수성찰방(輸城察訪:현 함북 청진 소재)에 임명되었으나 질병으로 사임하였다. 그 뒤 광해군의 혼정이 시작되고부터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향리로 돌아와 집 곁에 작은 서재를 짓고 산수를 벗하고 독서로 자오(自娛)하며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1616년(광해군 8) 65세에 동도(東都:경주)교수에 임명되자, 벼슬이 하찮다 여기지 않고 부임하여 열심히 후진을 양성하였고, 틈나는 대로 산에 오르고 바다를 바라보며 회포를 풀었다. 이 때 남긴 것이 곧 『동도일록(東京日錄)』이다. 체직되어 돌아온 뒤, 다시 예조·형조의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편허증(偏虛症)이 있어 근신하며 조양하다가 75세 여름, 날씨가 매우 더운데도 불구하고 종가에 가서 기제사를 올리고 돌아오다 가마에서 넘어져 몇 년 동안 병을 앓다가, 1630년(인조 8) 2월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권위 사후 50여 년이 흐른 1687년(숙종 13) 사림에서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워 제향 하였다. 처음에는 이사(里社)로서 권위의 향리인 도촌마을 서쪽으로 얼마쯤 떨어져 있었는데 대원군 때 훼철되어 사림의 의론을 모아 1928년 복설되고 1990년 후손들이 힘을 합쳐 중수하였다.
권위는 일찍이 월천(月川) 조목(趙穆),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그리고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를 사사하여 군자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하여 배웠고, 송소(松巢) 권우(權宇)와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등과는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서로 절차탁마하였다. 그가 사사했거나 교유했던 인사들은 모두 퇴계의 문도들이거나 재전제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들을 통해 퇴계의 유풍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권위는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선비란 자기 본분에 맞는 공부가 있으니 과거는 단지 말사(末事)에 불과할 뿐이니 한갓 외물에 이끌리어서는 안 된다.”라 하여, 위기지학에 힘 쓸 것을 강조하였으며, 글을 함에 평담간아(平淡簡雅)하여 조탁(雕琢)을 일삼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럽게 문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문집 『옥봉집(玉峰集)』은 비록 성리학과 관련한 논문을 찾아 볼 수 없으나, 문과를 거쳐 관료 생활을 한 안동 선비의 정치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시편들을 통하여 당시 선비들의 사상과 삶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안동 > 서후북후권 > 도촌리
- 500년 전 권사빈이 개척한 마을
도촌리는 천등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천등산의 연봉(連峰)인 대곡산(大谷山)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나지막이 휘어 두른 구릉에 기대어 섰으며, 마을 앞 반월산(半月山)을 안산(案山)으로 하고 있다. 마을 뒤로는 수려한 봉우리와 천석(泉石) 좋은 계곡이 있고, 마을 앞으로 천등산의 여러 골짜기에서 흐르는 실개천이 도계천으로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남향 마을이다.
『영가지(永嘉誌)』에 “도계촌(道溪村)은 부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좌랑 정약(鄭若)의 별서(別墅)가 있다. 생원 오선정(五先亭) 권사빈(權士彬)이 와서 살았다. 그의 둘째 아들 충재(?齋) 권벌(權?)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맏아들 권의(權?)가 눌러 살았다.”고 적고 있다.
도촌리는 1리와 2리로 되어 있다. 도촌 1리는 도계촌, 모살미, 도촌 2리는 서당골, 부루골, 옥산골, 장골 등 4개 마을이다.
도계촌은 약 500년 전 안동인(安東人) 권사빈이 서후 송파(松坡)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네 형제가 모두 출중하여 맏아들 권의가 현감, 둘째 권벌이 우찬성, 셋째가 찰방인 권예(權?), 넷째가 부제학을 지낸 제촌(霽村) 권장(權檣)이다. 둘째 충재가 봉화로 옮겨 닭실[酉谷]파를 이루고, 넷째 제촌이 예천 은풍에 옮겨 살았다. 권의의 둘째 아들 권심언(權審言)은 예천 맛질[渚谷]파를 이루고, 넷째 아들 권심사(權審思)가 감천(甘泉)파를 이루었으며 맏이 권심기(權審己)와 여섯째 권심행(權審行)이 도촌을 지켜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마을을 중심으로 남쪽은 광포천(廣浦川)과 광포들이 있고, 서쪽은 천등산과 대곡산·사곡산(寺谷山)이 병풍과 같이 둘러 있다. 또 이 산들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옥계천(玉溪川)이 어울려 가히 도(道)를 닦을 만한 좋은 곳이라 하여 도계촌이라 하였다고 한다.
갓방우·삼관석(三冠石)은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북 3곳에 관을 쓴 것과 같은 커다란 바위가 있어 삼관석이라 하였다. 이 삼관석은 천관(天冠)·인관(人冠)·지관(地冠)이라 하고, 이 바위로 인해 도촌을 명당이며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도계서원은 처음에는 1928년 옥봉(玉峰) 권위(權暐, 1552~1630)가 거처하던 만대헌 옛 터에 있었으나 서원으로 승격하여 다시 세웠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현재 도계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만대헌(晩對軒) 터이다. 만대헌은 옥봉 선생이 강학하던 곳이다. 이 정자는 선생이 36세 되던 해인 1587년에 건립되었다. 마루 상단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주원조와 화답한 시문이 걸려 있으며, ‘만대헌’이란 편액은 명필인 아우 연어정(鳶魚亭) 권오(權晤)의 필적이다. 좌측에 온돌방을 꾸미고, 우측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 앞에 반 칸의 퇴를 돌출시켜 전체적으로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구조 수법이나 가운데 설주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 후 여러 번 중수를 거쳐 1991년 후손들에 의해서 묘우인 모현사와 강당인 명륜당을 새로이 수리하고, 동재인 상의재와 홍도문, 주사 등을 새로이 지었다. 사당 모현사(慕賢祠)와 강당으로 쓰이는 명륜당(明倫堂) 모두 옛 제도 그대로 수리되었고, 재실 상의재(尙毅齋)와 문간 홍도문은 모두 고쳐 지은 것이다
서원내 만대헌(晩對軒)은 1992년 7월 18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7호로 지정되었다.
건축 배경
1687년(숙종 13) 옥봉(玉峰) 권위(權暐, 1552~1630)를 제향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웠다.
건축 특징
모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옥봉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다.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며, 동쪽 방은 헌관실로 서쪽 방은 재석 및 별유사의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에 도계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동재인 상의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의 형식은 팔작지붕이다. 이곳은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강학하던 곳이다.
건축 구성
모현사(慕賢祠), 명륜당, 신문, 동재, 주사
현판
도계서원(道溪書院)
만대헌(晩對軒)
양괴정(兩槐亭)
명륜당(明倫堂)
상의재(尙義齋)
홍도문(弘道門)
도계서원중수기(道溪書院重修記)
관련인물
주향자
- 권위(權暐, 1552~163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회(叔晦), 호는 옥산야옹(玉山野翁) 혹은 옥봉(玉峯)이다.
권위의 부 심행(審行)의 자는 가립(可立)이요, 호는 취규재(聚奎齋)이다.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훈육에 힘입어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장남 희(?)는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셋째 오(晤)와 넷째 호(?)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권위는 어려서부터 침중 근후하여 기쁘고 성냄을 외면에 표현하지 않았으며, 독서와 문사에 힘써 약관 21세에 동당별시(東堂別試)에 나아가 한꺼번에 삼장(三場)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예시(禮試)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하삼도(下三道)의 호우(豪右:세력가)들을 적발하여 다스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에 정이주(鄭以周)가 어사로 영남에 내려왔다. 1576년(선조 9) 안동은 시모(弑母)의 변(變)이 있었던 관계로 현(縣)으로 강등되어 있었으며, 현감은 호서지방에서 온 서익(徐益)이 맡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경상병사(慶尙兵使)로 있던 예안(禮安) 출신의 김부인(金富仁)이 근무 평정을 할 때, 서익이 탐학하다고 감사 박소립(朴素立)에게 말하였으나 감사가 이를 바로잡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말을 서익에게 누설하고 말았다.
권위의 부친 권심행(權審行)은 병사 김부인(金富仁)과 종반간인 후조당 김부필(金富弼)과 두터운 사이였다. 그래서 서익은 옥봉의 부친이 김부인에게 사주했다고 의심하고 앙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해서 어사인 정이주에게 부탁하여 죄안(罪案)을 만들어 조정에 알리게 되었다. 마침내 그의 부친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옥(獄)에 갇히게 되었다. 다행히 부친은 혐의가 풀리기는 하였으나 전염병에 걸려 그만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권위는 3년간 외부 출입을 끊고 시묘하였으며, 이 같은 변고를 겪고 나서는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 군사가 안동에 진주하게 되었는데,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의 막부에서 참모로 있던 주원조(朱元兆)가 그를 한번 만나보고, 마음으로 열복하여 교유를 맺었다. 그러자 주원조 휘하에 있는 군사들이 그를 보면 깍듯이 ‘재상(宰相)’이라 부르며 인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뒤늦게 50세의 나이로 모친을 위해 과거에 응시하여 1601년(선조 34) 문과에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으며 겨울에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다. 이 때 마침 중국에서 사신으로 고천준(顧天俊)이 우리나라에 왔다. 당시에 심희수(沈喜壽)가 공조판서로 반관(館伴: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겸하게 되었는데, 옥봉의 도움에 힘입어 예법에 이지러짐이 없이 사신을 접대하였다. 이에 심희수는 그를 매우 아껴주었으며, 늘 그 지위가 그의 덕에 맞지 않음을 아쉽게 여겼다고 한다.
이후 권위는 해미현감(海美縣監:현 충남 서산시 해미읍), 강진현감(康津縣監:전남 강진읍), 형조(刑曹)·호조(戶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54세에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어 별시과장(別試科場)에 남입(濫入)한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범인들이 모두 당로(當路)에 있는 권력가들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 않고 법대로 집행하였다. 58세에는 수성찰방(輸城察訪:현 함북 청진 소재)에 임명되었으나 질병으로 사임하였다. 그 뒤 광해군의 혼정이 시작되고부터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향리로 돌아와 집 곁에 작은 서재를 짓고 산수를 벗하고 독서로 자오(自娛)하며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1616년(광해군 8) 65세에 동도(東都:경주)교수에 임명되자, 벼슬이 하찮다 여기지 않고 부임하여 열심히 후진을 양성하였고, 틈나는 대로 산에 오르고 바다를 바라보며 회포를 풀었다. 이 때 남긴 것이 곧 『동도일록(東京日錄)』이다. 체직되어 돌아온 뒤, 다시 예조·형조의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편허증(偏虛症)이 있어 근신하며 조양하다가 75세 여름, 날씨가 매우 더운데도 불구하고 종가에 가서 기제사를 올리고 돌아오다 가마에서 넘어져 몇 년 동안 병을 앓다가, 1630년(인조 8) 2월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권위 사후 50여 년이 흐른 1687년(숙종 13) 사림에서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워 제향 하였다. 처음에는 이사(里社)로서 권위의 향리인 도촌마을 서쪽으로 얼마쯤 떨어져 있었는데 대원군 때 훼철되어 사림의 의론을 모아 1928년 복설되고 1990년 후손들이 힘을 합쳐 중수하였다.
권위는 일찍이 월천(月川) 조목(趙穆),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그리고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를 사사하여 군자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하여 배웠고, 송소(松巢) 권우(權宇)와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등과는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서로 절차탁마하였다. 그가 사사했거나 교유했던 인사들은 모두 퇴계의 문도들이거나 재전제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들을 통해 퇴계의 유풍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권위는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선비란 자기 본분에 맞는 공부가 있으니 과거는 단지 말사(末事)에 불과할 뿐이니 한갓 외물에 이끌리어서는 안 된다.”라 하여, 위기지학에 힘 쓸 것을 강조하였으며, 글을 함에 평담간아(平淡簡雅)하여 조탁(雕琢)을 일삼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럽게 문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문집 『옥봉집(玉峰集)』은 비록 성리학과 관련한 논문을 찾아 볼 수 없으나, 문과를 거쳐 관료 생활을 한 안동 선비의 정치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시편들을 통하여 당시 선비들의 사상과 삶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안동 > 서후북후권 > 도촌리
- 500년 전 권사빈이 개척한 마을
도촌리는 천등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천등산의 연봉(連峰)인 대곡산(大谷山)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나지막이 휘어 두른 구릉에 기대어 섰으며, 마을 앞 반월산(半月山)을 안산(案山)으로 하고 있다. 마을 뒤로는 수려한 봉우리와 천석(泉石) 좋은 계곡이 있고, 마을 앞으로 천등산의 여러 골짜기에서 흐르는 실개천이 도계천으로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남향 마을이다.
『영가지(永嘉誌)』에 “도계촌(道溪村)은 부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좌랑 정약(鄭若)의 별서(別墅)가 있다. 생원 오선정(五先亭) 권사빈(權士彬)이 와서 살았다. 그의 둘째 아들 충재(?齋) 권벌(權?)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맏아들 권의(權?)가 눌러 살았다.”고 적고 있다.
도촌리는 1리와 2리로 되어 있다. 도촌 1리는 도계촌, 모살미, 도촌 2리는 서당골, 부루골, 옥산골, 장골 등 4개 마을이다.
도계촌은 약 500년 전 안동인(安東人) 권사빈이 서후 송파(松坡)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네 형제가 모두 출중하여 맏아들 권의가 현감, 둘째 권벌이 우찬성, 셋째가 찰방인 권예(權?), 넷째가 부제학을 지낸 제촌(霽村) 권장(權檣)이다. 둘째 충재가 봉화로 옮겨 닭실[酉谷]파를 이루고, 넷째 제촌이 예천 은풍에 옮겨 살았다. 권의의 둘째 아들 권심언(權審言)은 예천 맛질[渚谷]파를 이루고, 넷째 아들 권심사(權審思)가 감천(甘泉)파를 이루었으며 맏이 권심기(權審己)와 여섯째 권심행(權審行)이 도촌을 지켜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마을을 중심으로 남쪽은 광포천(廣浦川)과 광포들이 있고, 서쪽은 천등산과 대곡산·사곡산(寺谷山)이 병풍과 같이 둘러 있다. 또 이 산들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옥계천(玉溪川)이 어울려 가히 도(道)를 닦을 만한 좋은 곳이라 하여 도계촌이라 하였다고 한다.
갓방우·삼관석(三冠石)은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북 3곳에 관을 쓴 것과 같은 커다란 바위가 있어 삼관석이라 하였다. 이 삼관석은 천관(天冠)·인관(人冠)·지관(地冠)이라 하고, 이 바위로 인해 도촌을 명당이며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