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보물 | |
지정번호 | 보물 283호 |
소재지 | 서울시 성북구 간송미술관 |
소유자 | 전형필 소장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
1963년 1월 21일 지정 |
금보(琴譜)는 조선 선조 5년 안상(安瑺)이 편찬한 1책의 악보로 일명 〈안상금보(安瑺琴譜)〉, <금합자보(琴合字譜)>라고도 한다. 편장 안상이 명종 16년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 되어 악사 홍선종(洪善終)·악공 허억봉(許億鳳)·이무금(李無金)과 함께 이 악보를 편찬하고 선조 5년에 책을 낸 것이다. 거문고의 오음약보·합자보 및 육보(肉譜)와 노래와 사설을 적고 피리의 오음약보 및 육보·장고악보를 곁들여서 총보(總譜)를 만들었다. 이 악보에는 <만대엽(慢大葉)>, <정석가(鄭石歌)>, <북전(北殿)>, <사모곡(思母曲)> 같은 고가요(古歌謠)가 실렸는데, 조선 후기에 크게 성했던 가곡의 실마리가 되는 <만대엽>, <북전>의 최고 악보로서 조선 전기음악과 후기음악을 비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전형필 소장으로 보물 제28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금보(琴譜)
조선시대의 국악악보. 보물 제283호. 1책.
《금합자보(琴合字譜)》라고도 하고, 서문에 안상(安瑺)의 글이 실려 있어 《안상금보(安常琴譜)》라고도 한다. 장악첨정(掌樂僉正)이던 안상이 1561년(명종 16)에 허억봉(許億鳳)의 적보(笛譜), 이무금(李無金)의 부고지보(缻鼓之譜)와 가사· 육보(肉譜) 등을 종합하여 간행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의 복간본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판식(版式)· 자체(字體)· 각법(刻法)이 모두 우수한 것으로 보아, 융경임신본(隆慶壬申本)으로 본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종신미(中宗辛未)1511년生~1572년卒(61壽)
판결사(判決事)
계자(系子) 안현(安玹)ㅡㅡ>안광선(安光善)ㅡㅡ>안준(安準)
1 安子美
2 安永儒 安永麟 安永和
3 安孚
4 安珦
5 安于器
6 安牧 安愼
7 安瑗崇
8 安瑗 安祖同 安垂
9 安從約 安從禮 安從義 安從廉 安從信 安從儉
10 安玖 安璟 安琇 安理
11 安敦厚 安重厚 安謹厚 安寬厚 安仁厚
12 安珹 ------------------ 安珙 --------- 安嗣全 --------- 安山石
ㅣ
13 安舜弼 ---------------------- 安舜佐
ㅣ ㅣ
14 安瑋 -- 安玹 ----------- 安瑺안상 安玠 --------- 安玘 ----- 安珅
ㅣ ㅣ ㅣ ㅣ ㅣ
15安宗善 安繼善 安光善 安宗善 安孝善안효선 安好善 安兼善 安復善 安擇善 安承善
ㅣ
16 安準안집
ㅣ
17 安斗元안두원
ㅣ
18 安王卞안변
ㅣ
19 安希仁안희인
ㅣ
20 安宗爀안종혁
報慶尙觀察使狀,嘉靖乙卯,知郡安瑺 (報慶尙觀察使狀,嘉靖乙卯,知郡安瑺)
故吏曹判書,贈諡文節公,金先生諱某卽, 世宗,文宗朝儒臣也,道德節行不但爲, 當世之所推服,凡國家大經大法咸與之,
弼成以至田賦上下之制,雲觀測候之度,皆因先生而定焉,則其有功於國家生靈矣,允爲百世不遷之主,而廟在本邑,奉香大面
城底里,不可無庇護之舉
무송헌선생문집 (撫松軒先生文集) 김담
추봉추밀원부사 안영유 묘갈명(追封樞密院副使 安永儒 墓碣銘)
後孫嘉善大夫兵曹參判瑋撰 生員琴軸書 嘉靖三十八年十月日
後孫通訓大夫行榮川郡守 瑺立石
후손이며 가선대부로 병조참판인 위(瑋)가 글을 짓고, 생원 금축(琴軸)이 글씨를 쓰다.
가정38년(1559) 10월 후손이며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영천군수(榮川郡守)인 상(瑺)이 비석을 세움.
비문에는 따르면 후손인 안상(安瑺)이 영천군수(榮川郡守)로 부임하여 안영유의 묘소에 참배하였다가,
묘역을 개수하면서 영모암(永慕菴)이라는 12칸의 재사(齋舍)를 세워 관리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 慶尙道 榮川 壇廟
社稷壇 在郡西三里 文廟 在鄕校 城隍祠 在郡北七里新增移設于郡南五里 厲壇 在郡北三里 新增伊山書院 嘉靖戊午郡守 安瑺建書堂于郡東山伊里隆慶壬申享文純公 李滉萬曆甲戌賜額後以院基狹隘移建于郡東十五里許院號則仍舊齋扁學規皆書堂時李滉所定而院有觀物堂文純公 李滉詩曰觀物須從觀我生昜中微旨邵能明若敎舍已惟觀物俯仰鳶魚亦累情○李滉記曰榮郡據小白之南地靈而風美號稱
<하권0400-4>
여지도서(輿地圖書) > 慶尙道 > 榮川 名宦
有治績 李賢輔 在任一年節補積年逋糴取券焚之民稱之 安瑺 嘉靖乙卯到任治六年創建伊山書院定立學規奬育人材 郭越 隆慶丙寅到任治四年吏畏民懷有善政碑 趙纉韓 萬曆乙卯到任治三年爲政嚴明擒捕獷賊李景起近邑賴以安息
이산서원(伊山書院)
처음에는 사당이 없이 강학을 위한 기구로만 설치되었는데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1572년(선조 5)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면서 제사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1574년에 ‘이산(伊山)’이라고 사액되었다. 이 해는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이 창건된 해이다. 이산서원은 옛 영천(榮川) 지방의 첫 서원이자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1554년(명종 9) 안상(安瑺)이 순흥부사로 부임하여 학문을 진흥시키고 인재를 격려하는 것을 급무로 삼았다. 이에 영주의 선비들이 부사는 안향의 후손으로 다스림의 근본을 아는 사람이니 학사를 세워주도록 요청하면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안상에게 건의하게 되었다. 명종 13년(1558) 영천(榮川)군수 안상(安瑺)이 창건.
영주의 문예 숭상 영주 지방은 문예를 숭상하는 풍속에 있으며 특히 여럿이 함께 모여 공부하는 것을 좋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모여 공부하는 것을 거접(居接)이라고 하였는데 영주 지방의 선비는 물론 다른 지방의 선비들도 모여 들었으며 관에서는 매년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일정한 장소가 없어 모임이 있을 때에만 군에 있는 의원을 빌려 사용하고 모임이 끝나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원의 건립 향중 인사들의 건의를 들은 안상은 이는 본래 자기의 뜻이기도 한데 이같이 건의하니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군의 동쪽 번고개에 터를 잡았다. 이를 본 향중 인사들이 안상의 뜻에 감복하여 곡물을 출연하여 공사를 돕고 전응벽(全應璧)·빈수검(賓守檢)·안팽수(安彭壽) 등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공사는 1558년 7월에 시작하여 4개월 후에 마쳤는데 건물 규모는 33칸이었다.
서원 운영의 전범 이산서원은 조선시대의 서원이 정립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서원이다. 퇴계는 서원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보이는 수학(受學)ㆍ거재(居齋) 규칙, 교수 실천요강, 독서법 등을 규정한 원규를 만들어 당시의 서원 운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가운데도 퇴계가 1559년 찬(撰)한 「이산서원원규」는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퇴계 이황의 배향 이산서원은 처음에는 사당이 없이 강학을 위한 기구로만 설치되었는데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1572년(선조 5)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면서 제사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1574년에 ‘이산(伊山)’이라고 사액되었다. 이 해는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이 창건된 해이다. 이산서원은 옛 영천(榮川) 지방의 첫 서원이자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
서계(西溪)이득윤(李得胤)
저자는 孤靑 徐起와 守庵 朴枝華의 문인으로, 易學에 밝았으며 그가 남겼다는 〈西溪李先生家藏訣〉은 「鄭鑑錄」의 일부로 되어 있다. 음악에 정통하여 1620년에는 명현들의 거문고에 대한 銘, 賦, 記, 詩, 書와 安瑺, 趙晟, 許嗣宗 등이 지은 악보를 모은 〈古今琴譜見聞錄〉을 수록한 「玄琴東文類記」를 編述하여 역대 琴譜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擬與榮川守論紹修書院事 丙辰○郡守安瑺卽文成公之後
滉再拜。滉聞書院諸生。自春散去。至今歲盡。而猶未復聚。心竊嘆恨。不知所以爲計也。國家之許立書院。何爲也哉。將非尊賢養士樂育人材之地也乎。金仲文爲其有司。所當遵國家之美意。敬謹其職。使多士樂就之。可也。乃反倨傲鮮腆。視諸生如小兒。至發鄙賤之語。則諸生之激怒。空院而去。豈可謂諸生之過也哉。不請於朝。而徑遞仲文之任。韓守琦則固爲非也。然仲文之仍在其任。實亦難矣。爲仲文計。於此尤當慚悔自責。屈己謝過。至誠至懇。則諸生之意。釋然自解。仲文猶爲善人。而書院無一事矣。仲文則不然。懷忿懟挾猜憾。敵난001諸生而必欲納之於罪罟。因是而致有朝廷之推問。則非唯儒冠被捉而庭詰。其身亦未免於縲絏。此則仲文之失。至再愈大。而亦不善爲身謀者也。滉聞之。過而不改。是謂過矣。又聞之。過而能改則無過。仲文雖有再過。能改則猶爲無過人矣。近聞。仲文尙不知悔。乃攘臂大言曰。我見某某。必不擇梃刃而辱之。又曰。此事終必有士林之禍。嗚呼。仲文其信有此言乎。其或不然。而傳之者過也。傳之者過。則仲文幸矣。使誠有是言。則其能改過而從善。可必乎。夫以仲文之鴟張如是。彼爲士者。前見儒冠之辱。後聞恐嚇之言。以懷恥之心。兼畏禍之慮。其不肯復入書院。亦何足怪哉。城主初爲榮郡。士林相賀。以爲文成公之後。來守旁邑。必有力於書院。今則大失望矣。然而士林非謂城主不力於書院。謂盡力而反有害也。何者。仲文之爲人。滉亦初甚款待。以其有功於書院也。今則不能不以爲非。以其失待士之道而壞院事也。伏想城主之厚於仲文。亦以爲書院故也。然則其失待士壞院事之過。城主何不以爲非而反護之乎。有功則以爲功。公也。有過則以爲過。亦公也。何容心哉。一於公而已。何患士心之不服也。且彼仲文。本一鄕里之人耳。非有文行學識之異。特以幹院之勞。爲周景遊所許。爲諸相所念。又爲城主所厚。凡若是者。豈欲使彼終至於逐士空院。假勢逞臆。以陵脅列郡之縫掖哉。仲文他過。不必問其有無。而只此一事。城主試平心而熟察之。寧不洞知其非也。孔子曰。愛之。能勿勞乎。忠焉。能勿誨乎。城主若知仲文之非。而不誨而改之。是厚仲文。適所以薄仲文也。奉書院。乃所以棄書院也。城主何不反而思之曰。彼書院。爲尊賢養士而設也。仲文失待士之道。吾右仲文而非諸生。吾亦過矣。又推此心而曉仲文曰。彼書院。爲尊賢養士而設也。汝侮諸生而致空院。汝之前功安在。諸相所以許汝之意。又何如哉。於是而反覆深惟之曰。吾不改此過。無以告吾先祖之靈。而負國家立院之意也。則仲文亦必觀感而幡然悟曰。吾不改此過。無以見周先生於地下。而負諸相厚我之意也。以是深陳旣往之悔。顯示能改之道。君子之過也。如日月之食。過也。人皆見之。更也。人皆仰之。士林孰不感激而慕城主之高義乎。不但如是而止耳。豐有黃仲擧。榮有朴重甫。先達者。後進之望。而一境之倡也。城主誠能躬駕於此兩人而懇起之。約日而會于書院。兩人又以書各告其邑中之士而招延之。士必雲集。而無敢後之者。二郡之士旣集。則遠近聞風而爭赴之矣。能如是大更張。使書院之規模。增光而益恢。則庶幾副人之始望。不然。以訑訑之聲音顔色。間誘其易動易制者一箇半箇。而遣之入學。以求食於咄啐之餘而曰。如是足以爲書院。則是書院之名雖在。而書院之實已亡矣。且夫屈己而下士。大夫之美事也。卑身而就食。士子之所恥也。今城主不屈於士。而欲士之屈就書院。是城主見美而不取。士子知恥而自蒙。古所謂人喪其寶者。正如是。豈不惜哉。豈不傷哉。又況日月易失。人事難必。諸生之志未遽回。及瓜之期或已至。竹溪之風月凄涼。廈屋之絃誦寂寥。烟沈草沒。見者傷嗟。則雖使如仲文者十輩。能守廟宇。不廢春秋之香火。滉恐文成公之靈。不肯顧享於斯。而周景遊之魂。亦必抆淚於泉下也。滉之欲進此言。久矣。鑑無因之戒。而不敢發也。適聞城主之過縣。而略布之如右。不知城主以滉言爲何如也。嘉靖三十五年十有二月朔日。滉拜。
退溪先生文集卷之十二 書 退溪 이황(李滉)
영천군수(榮川郡守)에게 보내려고 초한 편지에 '중문(仲文 김중문(金仲文)으로 당시 서원의 유사(有司)임)이 비록 두 번 허물이 있었으나 능히 고치면 허물이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였다.
우리들은 허물이 있는 자들이다. 힘써야 할 것 중에 급한 일은 오직 '허물을 고치는 것[改過]' 두 자일 뿐이다. 세상을 오시(傲視)하고 남을 능멸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기예를 자랑하고 재능을 뽐내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영화를 탐내고 이익을 사모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은택(恩澤)을 생각하고 원한을 잊지 않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뜻이 같으면 한패가 되고 뜻이 다르면 배척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잡서(雜書) 보기를 좋아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새로운 견해 내기를 힘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니, 가지가지 결점을 이루 셀 수 없다. 여기에 맞는 약제(藥劑) 하나가 있으니 '고칠 개(改)' 자가 그것일 뿐이다. 진실로 그 허물을 고치면 우리 퇴옹(退翁)도 또한 '아무는 허물이 없는 사람이다.'할 것이다. 아! 어떻게 해야 이를 얻을 수 있겠는가.
[주D-032]영천 군수(榮川郡守)에게……편지 : 퇴계가 명종 11년(1556)에 영천 군수 안상(安瑺)에게 보내기 위해 초한 편지로 소수 서원(紹修書院) 일을 논하고 있다. 원제목은 의여영천수논소수서원사(擬與榮川守論紹修書院事)이다.《退溪集 卷十二》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22권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漢書傳抄 한서전초
저자 安瑋(朝鮮) 編.
2卷 2冊 木版本 33.1×21.2cm
1566년(明宗 21)에 弟 安瑺이 刊行
四周單邊 半郭: 22×16.8cm.有界 10行 17字.版心: 上下黑口‚ 上下黑魚尾.跋: 安瑋.漢書에서 14인의 列傳을 抄錄한 책이다. 安瑋가 拔萃하고 1566년(明宗 21)에 그의 弟 安瑺이 刊行하였다. 列傳의 인물은 上卷에 陳勝 項籍 張耳 陳餘 韓信 吳濞‚ 下卷에 張良 陳平 王陵 酈食其 陵賈 蒯通 伍被 爰央 龜錯 嚴助 등이다. 卷尾에 編者인 中和郡守 安瑺의 跋이 있다. 安瑋(1491-1563)의 字는 伯珍‚ 本은 順興‚ 諡는 文簡이다. 文科를 거쳐 淸洪道觀察使‚ 戶兵·判書 등을 역임하고 鎭을 설치하여 邊方을 지키는데 功이 있었다. 經國大典註釋에도 참여하였다.
맑음.
서문(西門)으로 나가서 앞 시냇물을 건너고 큰 들판 복판으로 갔다. 큰 들판은 둘레가 7, 80리 가량 되었으며, 제법 기름져 보였다. 그러나 홍수가 밀려들어서 온갖 곡식이 제대로 익지 못하였는바, 보기에 아주 참혹하였다.
덕원(德源)의 경계에 이르니 수재(水災)가 그다지 심하지 않은 탓에 곡식이 제법 여물어 백성들이 해를 넘길 만하였다. 안변에 있을 때에 들으니, 서울의 장사치들이 금물(禁物)을 많이 가지고 덕원의 원산리(元山里)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으므로, 비밀리에 덕원 부사로 하여금 잡아 가두게 하였다. 그런데 원산에 도착해서 보니, 도장(都將)이 5, 6명을 잡아 놓았으나, 금물이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석방하였다.
오전에 덕원에 도착하였다. 성지(城池)와 기계, 군기 등의 물품이 낱낱이 정돈되어 있는바, 부사 안상(安瑺)이 국사에 온 힘을 다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안상은 일찍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 첫째간다는 이유로 당상(堂上)에 승진되었으며, 또 잉임(仍任)하도록 하여 이미 10년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아전과 백성들이 부모와 같이 여기니, 매우 가상하다.
저녁에 문천(文川)에 도착하였다. 군기를 제대로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색리(色吏)를 치죄(治罪)하였다. 고을 백성들이 목장(牧場)을 옮겨서 방목(放牧)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내용으로 정장(呈狀)하였다. 이날 고을의 관사에서 유숙하였는데, 꿈속에서 퇴계 선생(退溪先生)을 뵈었다.
학봉전집(鶴峯全集) 학봉일고(鶴峯逸稿) 제3권 북정일록(北征日錄) ○ 기묘년(1579, 선조 12) 10월 1일(계유)
학봉(鶴峯) 김성일(金成一1538~1593)
擬與榮川守 丙辰
安瑺 左相玹之弟。創伊山書院。
○倨傲鮮腆 語出蘇文留侯傳。謂倨傲而不厚其禮也。
鴟張 (唐史)乾符四年。詔曰。狐假鴟張。自謂驍雄莫敵。
縫掖 (記)孔子曰。某少居魯。衣縫掖之衣。
咄啐 (孟子註)嘑。咄啐之貌。
人喪其寶 (左)宋人得玉。獻諸子罕。子罕不受曰。我以不貪爲寶。爾以玉爲寶。若以與我。皆喪寶也。
及瓜之期 (左)齊侯使連稱管至父戍葵丘。瓜時而往。及瓜而代。
無因之戒 見一卷奉贈圭庵按劍註。
퇴계집(退溪集) 退溪先生文集攷證卷之四 第十二卷書 退溪 이황(李滉)
陶山書節要 도산서절요
李滉 著
4권 2책(零本)
退溪 李滉이 동료·문인들과 經學·禮制·時事 등에 대하여 논의한 서간문을 정리한 책. ≪退溪先生書節要≫<奎 12397>(10권 5책)와 같은 성격의 책으로서 개별 서간문의 내용은 일치하는 것이 많지만‚ 편차와 권수가 다르며 일부 내용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지 판심에 ‘共三’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원래 6권 3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권별 수록 인물은 다음과 같다. 권1 : 沈通源‚ 朴淳‚ 奇大升‚ 洪暹‚ 閔箕‚ 宋麒壽‚ 李湛‚ 具鳳齡‚ 柳雲龍‚ 白仁傑‚ 柳希春‚ 李賢輔‚ 沈義謙‚ 成渾‚ 李文樑‚ 李文楗‚ 金慶言‚ 安瑺‚ 金就礪‚ 朴承任‚ 朴雲‚ 許篈‚ 白雲書院諸生. 권2 : 奇大升‚ 李湛‚ 鄭惟一‚ 琴應夾‚ 金富佾‚ 禹性傳‚ 金命元‚ 柳成龍‚ 趙振‚ 韓脩‚ 丁胤禧‚ 李德弘‚ 李咸亨‚ 具贊祿‚ 琴蘭秀‚ 金宇宏‚ 黃俊良‚ 金就礪‚ 趙穆. 권3 : 南孝經‚ 奇大升‚ 金就礪‚ 金守一‚ 金誠一‚ 金克一‚ 李德弘‚ 琴蘭秀‚ 柳仲淹‚ 李咸亨‚ 趙振‚ 韓脩‚ 金隆‚ 申沃‚ 鄭逑‚ 洪胖‚ 李湛‚ 李源‚ 鄭之雲‚ 洪仁祐. 권4 : 曺植‚ 盧守愼‚ 李珥‚ 黃俊良‚ 李叔樑‚ 李文樑‚ 李仲樑‚ 朴光前‚ 尹欽中‚ 金富弼‚ 淸凉山讀書諸君‚ 金富倫‚ 金宇宏‚ 吳仁遠‚ 權好文‚ 朴漸‚ 宋言愼‚ 金箕報‚ 鄭惟一‚ 鄭逑‚ 李德弘‚ 南彦經‚ 具贊祿‚ 金彦琚‚ 李楨‚ 許曄‚ 奇大升. ≪退溪先生書節要≫의 해제는 ≪退溪先生書節要≫
子 -15世
안효선(安孝善)
생년 임인(壬寅)1542年生
字 중우(仲友)
거주지 경(京)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1년 (1568)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三等) 30위
합격연령 27歲
전력 : 유학(幼學)
[부]
성명 : 안상(安瑺)
관직 : 행중화군수(行中和郡守)
관직 : 통훈대부(通訓大夫)
子 -16世
안준(安準)
계자(系子) 안현(安玹)ㅡㅡ>생부(生父) 안광선(安光善)ㅡㅡ>안준(安準)
字 준지(準之) 명종(明宗14)기미(己未) 生 1559年生
관직 : 학생(學生)
子 -17世
안두원(安斗元)
字 백칠(伯七)
무자(戊子) 1588年生
▲조선조
안두원(安斗元) 진사(進士)
사마방목(司馬榜目)
안두원(安斗元) - 인조(仁祖)갑자(甲子)1624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70위
합격연령 37歲
거주지 해주(海州)
전력 : 전찰방(前察訪)
[부]성명 : 안준(安準) 관직 : 학생(學生)
효종(孝宗4)계사(癸巳)1653年卒 66壽
初七日 |
晴, 此朝見奭平書, 卽答. 今日亦極寒. 昨夕文卿, 酒一鉢入甁封送, 此朝湯飮, 稱有二壺共破, 而正郎歸飮將盡, 送此欲有辭於他日也. 平陵察訪 安斗元下直, 吾雖不知, 知正郎之出, 而名銜已入, 故暫出見. 文卿作書邀之甚懇故越去, 李尙中亦來, 醉來, 臂痛今日則稍緩. 正郎食後上來, 臨昏下去. 藏氷始初. |
우곡일기 愚谷日記 愚谷日記戊午日課 崔郞寄慰狀于景奭書
次仲氏韻。示平陵督郵安斗元。
三冬過盡更逢春。幾處登樓望北辰。世事已隨靑歲變。交期不向白頭新。
尊前痛飮那無意。劍外狂歌覺有神。回首故鄕歸計誤。越松亭月又如銀。
다산집(茶山集) > 茶山集卷之二 > 七言律詩 茶山 목대흠(睦大欽)
인경궁의 부지로 빈 집터를 들인 유학 안정·김대윤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유학(幼學) 안정(安瀞)·김대윤(金大胤)·안두원(安斗元)·고인우(高仁友)·이춘형(李春馨)·구숙(具橚)·이용(李溶)·최몽윤(崔夢尹)·이덕홍(李德弘)과 생원 정현세(鄭顯世) 등이 빈 집터를 인경궁(仁慶宮)의 부지로 들였다. 안정은 주부(主簿)에 제수하고 김대윤·안두원·고인우는 직장(直長)에 제수하고, 이춘형·구숙은 봉사(奉事)에 제수하며, 이용·최몽윤·정현세·이덕홍은 직책을 제수하라.”
○戊午二月十九日己酉, 傳曰: “幼學安瀞・金大胤・安斗元・高仁友・李春馨・具橚・李溶・崔夢尹・李德弘、生員鄭顯世等, 空代入于仁慶宮。 安瀞主簿除授, 金大胤、安斗元、高仁友直長除授, 李春馨、具橚奉事除授, 李溶、崔夢尹、鄭顯世、李德弘除職。
광해124권,10년(1618무오/명 만력(萬曆)46년)2월19일(기유)1번째기사
광해군일기>광해10년(1618년)>광해10년2월>광해군10년2월19일
안정(安瀞) -16世
안위(安瑋)ㅡㅡ>안종선(安宗善)ㅡㅡ>안정(安瀞)
기묘(己卯)1579年生
字 호언(浩彦)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5년 (162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47위
합격연령 49歲
거주지 배천(白川)
전력 : 유학(幼學)
[부]성명 : 안종선(安宗善) 관직 : 승훈랑(承訓郞)
[제] 안주(安澍)
子 -18世
안변(安王卞)
字 변옥(卞玉)
무자(戊子) 生
기축(己丑) 卒
子 -19世
안희인(安希仁)
계자(系子) 생부(生父) 안헌(安獻)ㅡㅡ>안희인(安希仁)
字 여수(汝壽)
정사(丁巳) 生
임오(壬午) 卒
子 -20世
안종혁(安宗爀)
계자(系子) 생부(生父) 안호인(安好仁)ㅡㅡ>안종혁(安宗爀)
字 회숙(晦叔)
무자(戊子) 生 1708年
신미(辛未) 卒
갑자(甲子) 진사(進士)
사마방목(司馬榜目)
안종혁(安宗爀) - - 1708生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55위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20년 (174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55위
합격연령 37
거주지 해주(海州)
전력 : 유학(幼學)
과목 : 이시(二詩)
[부]성명 : 안희인(安希仁) 관직 : 학생(學生)
[생부]성명 : 안호인(安好仁) 관직 : 학생(學生)
[제] 안종집(安宗{火+集})
[제] 안종섭(安宗燮)
申大翼의처 安宗 의 女 順興安氏
仲母順興安氏墓誌
仲母孺人。其先嶺南順興府人。府有竹溪水。諸安氏夾澗而居。李牧隱穡過之曰。山大水遠。安氏無窮乎。故安文成公裕以下子孫曾三世。皆封君顯融。其玄孫留後瑗。逮我朝。授官不起。然冠冕相繼於後。至左議政文簡公玹。與其兄判書瑋。又大著。文簡之子孫曾三世載顯載隱。至玄孫僉知中樞事瓛。生奉事處仁。處仁有弟好仁。是生諱宗 。孺人考也。娶咸陽呂氏女。英宗十六年十月某甲 四日 孺人生。天姿淑愼。貞一徐詳。女師四典。閑於在室。爰曁奉嬪我仲父府君。志行又高潔。令德所同。庶綏胡福。天難匪諶。夙罹凶殃。醮月再期。旣喪所天。無子。舅姑先沒。蓬附之緣絶矣。荼毒之哀極矣。窮塊焭獨。何辜穹蒼。唯其曉達今昔。性通委順。支持歲月。以事我先妣鄭夫人于窮廬。食貧之中。黽俛有亡。篋無私藏。軆不勝裳。足不下堂。積二十餘年。同居共爨。而罔有擇言失德在于厥躬。歲寒苦節。如玉之素。曾不悔禍。春秋四十六。正宗九年歲在乙巳正月四日甲寅。卒海州太公里第。烏呼哀哉。家失義訓。後生安述。其五月壬子。返祔府君墓于沁州鎭江宅東于陵之道藏原。後子姪諸人以廣山先人世葬申氏首丘之地。遂去沁適廣。而顧孺人墳墓孤遠。無所憑依。相與卜定宅兆于王考墓前出數里獐項之阿。然後爲辭昭告于府君。孺人墓祗遷神柩。某年月日同穴。此城神理人情。其永有賴。始孺人以綽逮見仲父。擬托後事。撫摩鞠哀。情願惻怛。先父母憐而欲許之。綽時蒙騃無知。號哭而不肯從。父母亦無以強也。故李父之子綰爲後。烏 。屬稱雖異於呼母。情禮無間於若子。唯銘腑浹髓之愛。至糜粉猶可弭。是爲銘。
석천유고(石泉遺稿) > 石泉遺稿卷之一 > 墓誌 -석천(石泉) 신작(申綽)
申大翼의처 安宗 의 女 順興安氏
부(父)-13世
안순필(安舜弼)
1477 효여(孝汝)화담(花潭) 領議政兼領經筵 觀象監事
|
|
안상(安瑺)
|
|
자(子)
안효선(安孝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