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반도 여행기
해남반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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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7. 19 (수) 보충수업과 긴박한 몇 건의 업무로 미루어 오던 휴가를 드디어 떠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모처럼 가뿐한 마음과 간편한 복장으로 약간은 들뜬 기분이 되어 생전 처음인 해남 반도 여행길에 나섰다. 해마다 3,4일씩 여름방학에 가는 휴가로 금년에는 마음 맞은 친구와 같이 갔으면 하던 차에 마침 신곡중학교 서성준 선생 내외와 떠나게 된 것이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감기 몸살로 고생을 하던 중이었는데 여행 예정일인 19일을 하루 앞둔 18일 까지도 몸이 쾌하지 않아 하루 밤을 자 봐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19일 날이 밝았다. 아내는 아주 상쾌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서 선생 댁에 전화를 돌렸다. 그런데 정작 서 선생 사모님께서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나 서 선생이 약간 우겨서(?) 우리 두 부부는 10:30경에 전라도를 향하여 출발했다. 차는 서 선생의 Leganza 승용차. 좋은 차, 좋은 친구, 좋은 날씨에 만사를 잊고 떠나는 정말 좋은 여행길이었다. 출발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 좋은 여행을 허락해 주심을 감사했으며 돌아올 때까지 같이 해 주실 것과 안전 운전을 기원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렸다. 황령산 터널을 지나 동서고가도로, 남해고속을 연달아 내달려 광양 순천을 거쳐 전라도를 향해 신나게 질주했다. 순천에서 돌솥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은 다음, 가는 도중에 낙안 읍성에 들렸다. 출발할 때는 예정에도 없었고 생각도 못한 곳이었으나 기다리는 곳도 정해진 목적지도 없는 여행이라 무작정 이정표를 보며 찾아 갔다. 낙안 읍성은 내가 전에 한 번 가 본 곳이었는데 언제 누구와 갔는지는 확실한 기억이 없는 곳이었다. 조선 시대의 전통적 마을이 고스란히 그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고 성이 마을 주위를 에워싸 있는 보기 드문 민속촌이었다. 초가집들에는 사람들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옛날 고을 사또가 행정을 하던 동헌에 가 보니 마루에 앉아 죄인을 문초하던 나무 의자며 곤장을 치던 형틀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사또가 앉던 나무 의자에 앉아 사또가 된 기분으로 사진을 찍었다. 순간이지만 “여봐라! 저 놈을 매우 쳐라”를 외치던 사또의 기분으로 말이다. 잘 보존된 초가집과 골목을 거닐 때 돌담에서 기어 나와 다니는 뱀을 보았다. 아내는 굉장히 놀라는 기색이었다. 관광지로서는 좀 어수룩한 곳이었고 집집마다 골목마다 상혼이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어 기분이 별로였다. 좀 더 정성들여 정비하고 관광객 유치에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싶었다. 다음 목적지는 강진이었다. 강진은 실학파의 거목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이며, 그곳에 다산이 학문에 전념하면서 제자를 가르쳤던 다산초당이 있다. 역사 시간에 배운 지식 외에는 다산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이 마을로 들어섰다. 다산초당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있었으며 키가 큰 나무들과 대나무로 둘러싸여 습기가 많고 음침하였다. 서편과 동편에 조그만 건물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동편 저쪽에는 바다를 멀리 바라보고 있는 정자, 천일각이 있었다. 그런데 이 건물들 모두가 본래의 모습이 아니고 최근에 본래의 것보다 크고 번듯하게 지은 것이라 한다. 본래 이 곳에는 정말 초라하고 조그만 초당이 있었고 천일각은 없었다고 한다. 다산이 독서와 집필로 지루할 때면 동쪽 등배기에 앉아 자신처럼 멀리 유배 와 있는 형을 생각하며 그리워하곤 했다 한다. 각 건물 마다 조그만 간판에 기록해 둔 것 외에는 별로 설명해 둔 곳이 없어 몹시 아쉬웠다. 다산의 명저 목민심서도 자세히 읽어 보지 않은 나로선 다산이 이 곳에 유배되어 제자들을 기르며 학문에 전념하여 실학파의 대가가 되었다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었으나, 다산의 생존 연대가 나에겐 매우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고전파 음악의 완성자, L.V.Beethoven(1770~1827)보다 5,6년 먼저 태어나 5,6년 더 살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은 다산이 Beethoven의 존재를 알 턱이 없었을 것이며, 그 삶은 너무나 다른 것이었을 것이란 데에 이르러서는 웅장한 베토벤의 심포니가 한 폭의 난초화를 배경으로 울려 나오지 않는가! 두 사람이 분야는 다르지만 개척자 선구자적 삶이란 데는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편은 아니지만 간간히 찾아드는 관광객들이 무슨 생각들을 하면서 이 훌륭한 선각자의 유배지를 거쳐 가는지 궁금해 하면서 다산초당을 떠났다. 날은 저물고 있었다. 오늘밤 투숙 예정지인 완도를 향해 출발할 즈음 오늘 하루해도 저물고 있었다. 완도는 제법 큰 섬이었다. 완도에 들어서서는 어두워서 바깥 경치를 볼 수 없었다. 아주 어렴풋이 밖이 바다란 느낌만 가지고 상당히 달려서야 완도읍에 도착했다. 모두 배가 고픈 상태라 저녁 식사부터 하고 여관을 찾기로 하였다. 시간이 20:15경이었다. MBC 인기 드라마 “보고 또 보고”를 볼 시간이 다 되었다. 식사도 좋고 TV도 볼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어느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들이 TV를 보다가 우리에게 양보하고 방을 내어 주었다. 방에 들어섰을 때 이미 드라마는 시작하고 있었다. 자매가 한 집안의 형제와 교제를 하는데 서로가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으며 양쪽 집안도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으나 묘하게도 사귀는 남녀의 서열이 뒤바뀐 그런 내용의 드라마이다. 본인들 외에는 양가 어른들이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가운데에서 작가가 드라마를 끌고 가느라 무척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애청자들은 모두가 양가 어른들이 빨리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난감해 하는 그 모습을 기대하며 열심히 보지만, 기껏해야 자매끼리 서로에게 양보하라는 협상 정도에서 드라마는 막을 내리기를 며칠 계속하고 있었다.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예쁘장하고 나이가 50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정작 알고 보니 67세란다. 젊어서 혼자되어 아들 딸 공부 다 시키고 했단다. 매우 친절하고 음식도 맛깔스러웠다. 전라도 사람들이 모두 친절하고 음식 맛도 있었다. 그리고 예술성이 있고 감수성이 풍부한 것 같았다. 지명들도 모두 아름다웠다. 순천, 벌교, 보성, 장흥, 강진, 완도 ... 얼마나 어감이 부드럽고 아름다운가! 연달아 말해보면 그대로 노래가 된다. 이런 아름다운 강산, 친절하고 순박한 민족이 왜 이리 서로 헐뜯고 으르렁거리며 살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정말 풍요로운 고장이다. 끝없이 펼쳐진 벼논, 낮으막한 정감어린 야산들, 이곳이 대한민국 전라남도 우리의 조국이다. 우리 땅이다. 이제 하루의 피로를 풀 잠자리를 정할 차례다. 밤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 길이 없다. 물어보니 매축지로 가라 한다. 매축지를 찾아 한참 헤매다가 겨우 한 곳을 찾아들어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다. 7. 20(목) 오늘은 보길도다. 차를 배에 싣고 아름다운 다도해를 지나 보길도로 갔다. 너무나 아름다운 섬이었다.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이다. 어부사시사를 지은 정자도 있고 그 정자 주변이 또 그것으로 해서 목숨 부지하고 있는 상혼들이 너저리한 것 말고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마냥 새롭고 즐거웠다. 차로 보길도를 한바퀴 돌면서 구석구석 그 체취를 만끽했다. 평상에 앉아서 어촌의 아낙들과 미역을 흥정하기도 하고 해변의 몽돌을 주워들고 억겁 세월의 흔적을 손바닥으로 체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변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아름다운 시상을 다듬으며 인생무상을 노래한 고산을 떠 올리곤 했다. 아름다운 우리의 섬, 보길도를 뒤로하고 우리는 또 육지의 끝, 땅끝마을로(土末) 향했다. 삼천리 금수강산의 제일 끝, 땅끝마을.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수많은 섬들이 멀리 점점이 바둑알같이 수놓고 있는 다도해. 한 폭의 그림이다. 만감이 교차한다. 나의 짧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 이래서 어느 위대한 작곡가는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전망대에서 한가락 아리아를 뽑아보고 싶기도 했다. 수채화같은 희뿌연 색감의 오케스트라 음향이 뇌리를 스친다. ‘La Mer’ 드뷔시의 바다가 들리는 듯하다. 플륫의 환상적 스케일이 비상한다. 하프의 물결음이 시야에서 모자이크된다. 바순이 속삭인다. 갑자기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섬과 섬 사이에서 나타나 화염을 내 뿜는다. 팀파니가 포효한다. 바로 교향악이 된다. ‘다도해 환상곡’. 땅끝마을을 뒤로하고 우리는 진도로 갔다. 귀 쫑긋한 진도개가 꼬리를 살랑살랑하며 우리를 반긴다. 진도는 매우 먼 거리였다. 모세의 기적이라고 하는 바다가 갈라지는 곳에 갔다. 바다는 갈라지는 시기가 아니어서 볼 수 없었다. 다만 거기서 나는 가상의 모세 기적을 연상해 봤다. 모세의 기적은 속박에서의 자유, 악에서 선으로의 인도,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 등으로 회자되는,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사실로 인정하는 하나님의 대 역사인 것이다. 오늘을 사는 고달픈 현대인 누구나 기적의 홍해를 건너 영원한 저 천국으로의 소망은 모두가 가지고 있다. 간절한 소망은 기적을 낳는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진도를 뒤로하고 우리는 이틀째 숙박지 해남 대흥사를 찾았다. 먼 거리의 운전이라 몹시 피로하여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다. 7. 21(금) 오늘의 여정은 고산 윤선도의 생가와 유적지이다. 대단한 학자 집안이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고귀하게 성실히 그리고 진하게 살아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그가 남긴 문학의 향기가 오래도록 영원히 풍겨옴은 우리 민족의 저력이요, 문화 민족의 긍지이며, 또 그것이 우리 문학의 토양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산의 할아버지는 우리 미술사에 유명한 화가로서 그가 그린 그의 초상은 너무나 개성적이고 인상적이었다. 가는 붓으로 그린 초상의 섬세한 수염은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로 꼼꼼히 그렸는데 지금도 살아 움직일 듯 생동감이 넘쳤다. 그 할아버지가 그린 우리나라 지도는 그야말로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 했다.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던 시절에 어떻게 그렇게 전국을 누비며 상세히 그렸는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한문과 한글로 쓴 작품들은 짧은 시간에 다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이 곳에는 나 죽기 전에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와서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하나하나 감상해야지 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지리산 자락에 가서 하루 밤 더 자고 온천도 하고 가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그러지 못하여 차머리를 부산으로 돌렸다. 나주평야를 가로 지르는 국도를 한참 달려 보았다. 기름진 옥토였다. 넓은 도화지같이 광활하게 펼쳐져있는 들판을 바라보는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라도 인심이 참 좋았다. 친절하고 음식 맛도 있고 푸짐했다. 넉넉한 시간 넉넉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아낙네들과 정담을 나누며 나주평야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창가에는 한국의 햇살이 끝없이 펼쳐진 녹색 도화지 위에 찬란히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도 분명히 한국의 땅이고 우리의 가슴과 가슴으로 통하는 따뜻한 한국의 체온이 있는 곳임이 틀림없는데 왜 영남이다 호남이다 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지리산을 거쳐 부산으로 질주하였다. 즐거운 2박 3일간의 여행이었다. 우리나라는 정말 아름다운 나라다. 이러한 좋은 국토를 가진 나라에 태어나게 해 주심을 감사한다. 언젠가는 정말 넉넉한 마음으로 한국의 좁은 길들을 구석구석 많이 다녀 볼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의 흙냄새가 나는 우리의 음악을 써 봐야지. 아! 오늘따라 빨리 벗어나서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