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남서부에 있는 군. 면적 624.80㎢. 인구 8만 6800(2003). 동쪽은 논산시(論山市), 서쪽은 서천군(舒川郡)·보령시(保寧市), 남쪽은 금강을 경계로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 북쪽은 공주시(公州市)·청양군(靑陽郡)과 닿아 있다. 군청소재지는 부여읍 동남리(東南里).
백제의 7백년 역사 중 123년간 가장 화려한 문화를 피웠던 곳이 사비성 부여이다.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는 그 첫 도읍지로 한성시대(BC 18 ~ AD 475 ) 몽촌토성이 있는 현 강동구 일대에 도읍지를 정했다가 웅진시대( AD 475~ 538) 공주시 공산성을 거처 사비시대(AD 538 ~ 660) 현 부여에 도읍지로 천도를 했다.
<연혁>
1975년 청동기 문화인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538년(성왕 16)에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후 120여 년 간 백제의 수도가 되었다.
686년(신라 신문왕 6) 웅주(熊州)의 속군이 되었고 1376년(고려 우왕 2)에 최영(崔瑩)이 홍산면(鴻山面) 일대에서 왜구를 크게 토벌하였다. 1895년(조선 고종 32) 공주부 관하의 부여군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홍산·임천(林川) 전지역과 공주의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부여군이 되었다. 1읍 15면 191리로 되어 있다.
<자연>
금남정맥의 여맥이 지나 산지를 이루며 남동쪽은 높이가 낮아져 금강유역에서는 평야가 발달되었다. 북서쪽에 성대산(星臺山)·아미산(峨嵋山)·월명산(月明山) 등이 솟아 있고, 금강이 군의 동부에서 곡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금강유역에는 넓은 범람원이 발달되었고, 특히 금강의 서쪽에는 구룡평야가 발달되어 군내 최대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암석은 주로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연평균기온 12℃, 1월 평균기온 -3℃, 8월 평균기온 26.3℃, 연 강수량 1239㎜이다.
<산업>
농업이 발달하였는데 논이 밭의 2배 가량이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야채·인삼 등이다. 서천군과 인접한 지역에서는 모시가 많이 생산되며 인삼은 환금작물(換金作物)로 군내 각지에서 재배된다. 백마강가에는 까막조개가 서식하고 있어 관광객의 인기를 끌고 있다.
군에는 124개의 광산이 있으나 가동 광구는 비금속광구 한 군데뿐이다. 부여읍에 한국담배인삼공사 홍삼제조소와 민간경영의 성냥공장이 있다. 시장으로는 식료·의료와 생활필수품을 거래하는 부여장과 쇠전[牛市場]으로 기능이 바뀐 홍산장 등이 있다.
도로망은 길이 812.72m의 백제대교를 비롯하여 공주·서천·청양 등지로 도로가 정비되어 있다. 부여읍 동쪽 20㎞ 지점에 논산역이 있어 호남선 및 호남고속도로와 연결된다.
<사회. 문화>
교육기관은 조선시대의 향교와 서원이 있었고, 근대교육기관으로 지방유지들이 설립한 동창학교(東彰學校) 등의 사립학교들이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다. 2003년 현재 초등학교 30개교, 중학교 14개교, 고등학교 5개교, 전문대학 1개교가 있다. 사회교육기관으로 군립도서관·부여문화원 등이 있다. 문화제로는 격년으로 3∼4월에 열리는 별신제와 공주시와 격년으로 주관하는 백제문화제가 있다. 백제문화제는 경주의 신라문화제, 진주의 개천예술제와 함께 전국 3대 문화제의 하나이다.
<유물. 유적>
선사시대 유적으로 충청남도기념물 제40호인 부여산직리고인돌과 사적 제249호인 부여송국리선사취락지 등이 있고 백제시대의 것 으로는 사적 제135호인 궁남지(宮南池), 사적 제99호인 부여쌍북리요지, 사적 제14호인 부여 능산리고분군, 사적 제34호이며 백제산성으로 는 최대규모인 부여 청마산성(扶餘靑馬山城) 등 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국보 제 9호인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 보물 제356호인 무량사 극락전, 보물 제217호인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 사적 제44호인 부여 군수리사지 등이 있고 군수리사지에서 보물 제329호·제1330호인 군수리 석조여래좌상·군수리금동미륵보살입상이 출토되었다.
유교문화재로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5호인 부여향교 대성전을 비롯하여 김시습을 배향한 청일사(淸逸祠),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을 향사(享祀)하는 삼충사(三忠祠) 등이 있다. 이 밖에 중요민속자료 제30호인 보부상 유품, 천연기념물 제320호인 내산면의 은행나무 등이 있다.
2. 부소산성(사적 제5호)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부여의 북족인 쌍북리에 있는 해발 106m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야산으로 이곳에는 백제 여인들의 절개를 느낄 수 있는 낙화암, 백화정, 고란약수로 유명한 고란사, 사자후, 영일루, 궁녀사, 반월루, 군창지, 삼충사, 서복사지 등 백제인의 역사와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백제문화의 요람이다.
북으로 강을 두르고 바로 산이 막아선 형상이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있는 점이 공주의 공산성과 흡사하다.
그래서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경기도 하남 위례성터와 함께 백제식 도성 방식을 보여준다. 이 부소산에는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의 부소산성이 있다.
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이 538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500년쯤에 이미 그 선왕인 동성왕이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고 후대에 무왕이 605년에 고쳐 다시 쌓았다. 성곽은 산정에 테뫼식(머리띠식)으로 산성을 쌓고, 그 주위에 다시 포곡식(성의 내부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둘렀으며 축조 방식은 흙과 돌을 섞어 다진 토석혼축식이다. 경사면에 흙을 다진 축대를 쌓아 더욱 가파른 효과를 낸 성곽이 2,500m에 걸쳐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이 부소산성은 평상시 궁궐의 후원으로 이용되었으며, 유사시에는 황궁을 방어하는 최후의 성곽 역할을 한다.
<삼충사(三忠祠)> - 문화재자료 제115호
이 사우는 백제말엽 의자왕(641-660)에게 충성을 바친 삼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워졌다. 외삼문·내삼문·사우로 구성된 삼충사는 깨끗하게 잘 단장되어 있다. 삼충사의 제향일은 매년 백제문화제 기간 중에 실시되고 있다. 사내에는 삼충사기가 있다
성충(?∼656)은 좌평으로 있으면서 의자왕(641-660)이 주색에 빠져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국왕의 자만과 주색이 국운을 위태롭게 하니 삼가라고 국왕에게 건의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 그는 옥중에서도 왕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하여 단식을 하고, 죽을 때 글을 올려 왕에게 간곡히 부탁하였다. 적병이 침입하면 육군은 탄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그 험난한 지형을 의지하여 막으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았다.
홍수는 성충이 죽은 후 성충과 마찬가지로 왕은 주색을 삼가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으라고 충언을 하였다가 유배를 당하였다.
성충이 왕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투옥되어 감옥에서 죽었음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충언을 한 것이다. 그가 유배 생활하는 동안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니 왕은 당황하여 충신 홍수가 생각나 유배지로 홍수의 의견을 물어왔다. 그때 홍수는 신라군은 탄현에서 막고, 당의 수군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조정 간신들의 모략으로 이 의견은 행동에 옮겨지지 아니하고 김유신의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들어왔고, 소정방의 당 수군은 백강을 거쳐 사비성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계백(?∼660)은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결사대 5천명을 뽑아 거느리고, 자기의 처자들을 손수 칼을 뽑아 죽여 나라를 위해 굳게 목숨 바칠 것을 굳게 맹세하고 황산벌 싸움터로 나갔다. 그의 결사대는 김유신의 5만 군사와 4차례나 용감히 싸워 이겼으나, 신라의 나이 어린 화랑 관창의 전사에 흥분되어 노도처럼 밀려드는 신라군에게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그의 5천 결사대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영일루(迎日樓)> - 문화재자료 제 101호
당호가 원래 집홍정(集鴻停)이었던 이 문루는 고종 8년 (1871)에 당시 홍산군수 정몽화가 건축한 것을 1964년에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여 영일대가 서 있던 부소산성 내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후 그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迎日樓) 라고 불렀다
영일루는 정면 3칸,측면 2칸으로 구획된 2층 누각건물인데 다른 아문에 비해서 그 규모가 비교적 크다. 구조는 1벌대로 쌓은 장대석 기단위에 높이 78㎝의 팔각주형장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2구씩의 주간포를 배치한 다포양식이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건물정면에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군창지>
부소산성 내의 동남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 곳 땅 속에는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 백제시대 군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쳐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건물의 배치는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 남북에 창고를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시대초기에는 이곳에 건물을 세워 백제시대부터 자리잡은 군창지를 다시 이용한 것으
로 보인다.
지금은 잔디를 심어 놓았지만 땅속을 파면 불에 검게 탄 쌀이나 보리, 콩이 나온다고 하는데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저항하던 백제군이 군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1915년에 한 초등학생이 칡뿌리를 캐다가 처음으로 발견 했다니 땅속에 묻힌지 1,250년만의 일이다. 군창터 옆에 움집 두채가 있어 이채로운데 이것은 백제때 군인들의 움막을 발굴 복원해 놓은 것이다. 1m가 채 못되게 움을 파고 사방에 벽을 두룬뒤 지붕을 얹은 모습인데 가운데 화덕에서 나는 연기를 빼려고 환기창을 달아 놓은 것이 재미있다. 바로 옆에 본래 움집터를 발굴한 곳은 현대식 건물을 지어놓고 볼 수 있게 했다.
<반월루(半月樓)>
반월루는 백마강(白馬江)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 남쪽 마루에 있으며 부여 시가지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궁녀사>
백제 의자왕 20년(660)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날 삼천궁녀들은 적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졌다. 이러한 삼천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세운 사당이다. 이 사당에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여성의 귀감이 되고 있는 백제여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사자루(泗疵樓)>
사비루(泗比樓) 역시 이층 누각으로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자리는 원래 달 구경을 했다는 망월대(송월루)가 있던 자리인데, 1919년 임천면의 문루였던 개산루(皆山樓)를 이곳으로 옮겨 사비루라 고쳐 불렀다. 사비루의 현판은 조선의 마지막 황세자인 의친왕이 쓴 글씨라 한다.
한편, “백마장강”(백마장강)의 시원하고 힘찬 글씨는 근대 서예의 한 봉우리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쓴 것이다.
<백화정 및 낙화암>
부소산 서쪽 또는 사자루 바로 아래쪽으로 가면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육모지붕의 백화정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백마강 강바람에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백화정 바로 아래쪽에 낙화암이 있는데 사비가 나당 연합군의 발 아래 유린될 때에 3천 궁녀가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삼국유사》백제 고기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를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 즉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 패망의 멍에때문에 이렇게라도 최후를 미화하고 싶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고란사(皐蘭寺)>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부소산의 낙화암 아래 백마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하며, 백제 시대에는 왕이 노닐던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절은 고려 시대 때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벼랑에 위치한지라, 절의 규모는 크지 않다. 하지만 낙화암의 전설과 절 뒤편의 암벽에 고란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서 나오는 약수와 그 암벽에서 자란다는 희귀한 고란초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절 이름도 고란이라는 난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곳 약수는 백제의 왕실에서 길어다 마셨다는 어용수라고 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660년) 수많은 궁녀들이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년)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부소산성 북측에 위치해 있는 고란사(皐蘭寺)는 창건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삼천궁녀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절 이름은 뒤편 암벽에서 자라고 있는 고란초에서 따왔다. 고란사 법당 건물은 조선 후기인 1797년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초석에 새겨진 연화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3. 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금부터 65년 전인 1929년 우리의 옛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부여지방의 사람들이 "부여고적보존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백제문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부여의 여러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려고 힘썼다. 그 뒤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백제의 유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를 하나 둘씩 모아, 부소산 남쪽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관청자리에 전시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국립부여박물관의 처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1939년부터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분관"이라 하여 비로소 「부여박물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1945년 해방이 되자 "국립박물관부여분관"으로 이름을 고쳐 쓰게 되었다.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백제유물의 보존과 전시를 보다 새롭게 하기 위하여, 1970년에는 부소산 남쪽 기슭에 새 박물관을 지어 부여지역을 비롯하여 백제권역에 흩어진 백제문화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전시유물이 늘어나게 되고 사회교육시설 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박물관이 제구실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아서 지금의 박물관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립부여박물관은 금성산 기슭으로 자리를 옮겨 1993년 8월 6일 새로운 모습으로 개관하였다. 새 박물관은 약 19,084평의 면적에 4개의 전시실과 야외유물전시장을 마련하고 약 1,000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현대식 시설을 고루 갖춘 사회교육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박물관은 선사실, 역사실, 불교미술실로 꾸며진 3개의 상설전시실과 하나의 기획전시실을 갖추고 있고. 중정과 앞. 뒤뜰에는 석조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체 전시유물은 약 1,000점에 이른다.
선사실에는 청동기시대의 생활모습을 이해할 수 있도록 부여 송국리유적의 문화 내용과 충남지역의 청동기문화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다른 박물관에 견주어 청동기유물을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역사실에는 원삼국시대와 백제시대의 유물을 전시하되, 특히 사비백제시대의 생활상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꾸몄다. 주로 사비 백제 추정 왕궁터와 부소산성을 비롯한 생활유적과 부여 능산리와 논산지역 등의 무덤에서 나온 토기, 금속공예품, 나무제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불교미술실에는 사비백제시대의 여러 절터와 가마터 등에서 나온 불상, 기와, 전돌을 비롯한 불교공예유물을 주로 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여러 가지 공예품도 전시하고 있다.
현재 기획전시실에는 박만식교수가 지난 30여 년간 수집한 백제토기를 국립부여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전시하고 있다. 이들 토기는 거의 대부분이 충남 논산군 연산면 일대에서 출토된 것이다.
야외전시유물로는 중정에 있는 부여석조(보물194호)를 비롯하여, 탑, 불상, 비석, 석조, 주춧돌 등 많은 석조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가. 박물관전시유물
전시유물은 부여가 백제의 옛 왕도였던 관계로, 백제의 유물이 중점적으로 전시되고 있다. 부소산 사비루 부근에서 발견되었던 것으로 보물 제196호인 금동삼존불입상, 군수리 사지에서 출토된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 외리 청료사지 출토인 금동미륵상, 그리고 건물지 고분에서 수습된 각종 토기들이 있다. 근년에 와서는 충청남도를 중심으로 분포된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빈번이 발견되고 등지에서 선사 주거지 및 분묘들이 집중 분포되고 있어 그 방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 정지원명 금동삼존불
사자루를 세우려고 땅을 고르던 중에 발견되었다. 손바닥 한 뼘도 안되는 8.5cm의 작은 금동불이지만 광배 뒤쪽에 정지원(鄭智遠)이라는 사람이 죽은 부인을 위해 만들었다는 뜻으로 3행 16자가 새겨져 있어 백제 때 불상 조성의 한 면모를 보여 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하나의 광배에 본존과 협시보살이 나란히 있는데 오른쪽 보살은 좀 깨져 나갔다. 대좌의 연꽃무늬를 음각으로 살짝 파는 등 형식적으로는 다소 간략한 편으로 6세기 때의 것으로 본다. 보물 제196호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다.
2) 납석제여래좌상
화강암으로 만든 대부분의 석조불과는 달리 이 부처님은 골돌(납석)을 깍은 점이 이채롭다. 바라보아서 고개가 오른족으로 살짝 기울어 있어서 정면으로 꼿꼿한 부처에 견주어 인간적인 느낌을 주며 볼부분이 둥그스럼하여 넉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하여 부처라기보다는 백제의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를 보는 듯하다.
이 부처님은 7세기 초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 시대에 조성된 많은 부처가 대개 서 있는 모습인 데에 견주어 가부좌로 앉은 모습이다. 무릎위로 다소곳하게 두손을 맞잡고 있으며, 대좌에 앉은 아래로 옷자락이 늘어져 있는데 이런 것을 상현좌라고 한다. 높이가 13.5cm로 아담하여, 호신불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보물 제329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다.
3) 금동보살입상
역시 통통하고 원만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보살입상이다. 연꽃대좌 위에 다소 두꺼운 천의를 걸치고 있는데 옷자락이 X자로 겹쳤으며 다리부분에서는 몸에 달라붙은 듯이 표현하였다. 머리에 단순한 삼산관을 쓴 이 보살은 머리카락이 옆으로 휘날리며 눈을 슬며시 내리깔고 있고 입가에는 미소가 살짝 맺혀, 수줍어하는 젊은 백제 아낙네를 보는 듯하다.
대좌의 절반이 잘려 있어 일광삼존불의 협시보살일 가능성이 높다. 높이는 11,2cm이며 보물 제330호로 지정되어있다.
4)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우리나라 불상조각을 대표하는 명품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란 왼쪽 무릎 위에 오른다리를 걸치고 살짝 고개를 숙인 얼굴의 뺨에 오른손을 대어 명상에 잠겨 있는 상을 이르는데, 이런 상은 본디 출가하기전의 싯다르타가 태자 시절에 인생의 네가지 고통인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고뇌하는 상에서 시작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 모습을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 무렵에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하나의 독립된 상으로서 널리 숭앙되었다.
국보 제83호인 이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앉은키가 93.5cm로 7세기 무렵의 신앙형태와 조형방식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이다. 꽃잎이 신앙형태와 조형방식을 잘 드러내 보여 주는 대표적인 상이다. 꽃잎이 세장인 화관을 쓴 얼굴은 약간 숙인 채인데 부드로운 반원을 그리듯 한 눈썹 아래 지그시 내리깐 눈, 오뚝한 코와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먹은 모습이 아주 온화하며 얼굴 형태는 볼이 통통하면서도 적당한 긴장감을 지니고 있어 매우 젊은 미소년상을 그려내고 있다.
늘씬한 목 아래에 삼도를 둘렀으나 옷 표현은 거의 하지 않아 매우 얇은 옷을 밀착되게 입은 몸은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 젊은 몸을 과시하는 듯하다. 미끈하게 뻗은 오른쪽 팔의 팔꿈치가 오른쪽 무릎을 경쾌하게 짚고 올라가 둘째손가락으로 오른쪽 뺨을 살짝 받쳤는데 손가락을 질서 있게 구부린 모습이 매우 율동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왼쪽손은 발목을 가볍게 감싸는 표현으로 둘째손가락을 조금 구부려서 사실감을 더했다. 무릎 아래 늘어진 옷 주름은 다소 도안화된 느낌을 주며 연꽃대좌가 받치고 있는 왼쪽 발도 다소 딱딱하다. 그러나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얹은 오른쪽 발은 발가락을 구부린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이 보살상의 사실감을 한층 복돋워 주는 백미라고 할만하다.
7세기 무렵에는 왕실 중심이 널리 퍼졌던 듯한데, 이처럼 완벽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그 무렵의 반가사유상은 퍽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이 시대의 미륵사상은 백제라는 현실 국토에 미륵이 와서 극락을 이루기를 그리워하는 뜻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왕실과 국왕이 자신을 미륵과 동일시하는 왕즉불(王則佛)개념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백제의 미륵신앙은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코류지에는 이 불상과 거의 비슷한 아스카 하쿠호 시대의 반가사유상이 남았다.
5) 청양 본의리 도제불상받침
1986년에 청양군 목면 본의리 백제시대 가마터에서 발견되었다. 파편상태로 묻혀 있던 것을 수습하여 맞추어 복원해 보니 이처럼 높이 1m안팎, 앞면에서 본 폭이 2.8m나 되는 거대한 모양이 되었다. 군데군데 황토빛 나는 곳이 없는 부분을 복원하여 모양이 제대로 되도록 맞추어 놓은 것이다.
7세기 무렵의 불상이 한두 마애불 외에는 주로 소형 금동불로나 남아 있는 지금, 이러한 보기는 백제 불교문화의 알려지지 않은 한 양상을 이해하는 데에 큰 전기가 된다. 623년에 만든 당시 백제의 영향력과 국제 교류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불상받침은 옷자락이 앉은자리 위로 늘어지게 한 상현좌로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군수리 출토 납속제여래상과 그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 전체 모양은 네모진 편이고 좌우대칭을 이루면서도 꽃잎이 두꺼운 연꽃이 한창피어오르는 위로 좌우 대칭되었으나 옷주름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모습이다.
부처는 따로 조성하여 올려놓았겠으나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결가부좌한 좌상으로서 그 키는 비례로 보아 적어도 3m는 넘었을 터이니 온화하면서도 당당한 부처였을 것이다. 제작시기는 백제말인 7세기 초중반으로 짐작된다.
6) 산경문전과 무늬전돌들
이 전돌은 규암면 외리 백제시대 건물터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건물터는 동서로 약 27m, 남북길이가 약 75m로 근처에서 백제금동보살이 발견되어 거의 절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모두 여덟종류가 발견되었는데 산경문(山景紋)2종, 귀형문(鬼形紋)2종, 반룡문(蟠龍紋), 봉화문 연화문, 연화와운문(蓮花渦雲紋)이 각 1종씩이다. 모두 정사각형으로 한변이 29cm이고 두께는 4cm이다.
전돌들이 발견될 때는 남북으로 길게 일렬로 깔려 있는 상태여서 바닥에 까는 것으로도 여겨지지만 의장의 화려함으로 미루어 벽을 장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룡문, 봉화문, 연화문 등 무늬가 둥근 테두리 안에든 전돌들은 네 귀퉁이에 4분의 1쪽짜리 꽃무늬가 있어 서로 죽 잇대면 사이사이마다 꽃 한 송이씩이 피어나도록 고안되었으니 그 치밀한 설계에 감탄할 따름이다.(서울국립중앙박물관 백제실에는 한쪽벽에 이처럼 복원하여 장식해 놓았다.)
유명한 산경무늬 전돌은 둥글둥글한 산모양의 도안이 더없이 부드러우며 살짝 두드러진 양각에 한 겹 얇은 테두리를 둘러 매우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마저 느껴진다. 신선경 또는 도원을 지향하는 백제인의 마음을 존해주는 듯하다. 자세히보면 아래 가운데 산에 절같은 집이, 오른쪽아래 산에 절로 가는 스님 모습이 음각되어 있다. 탁본으로 닳아져서 모습이 많이 희미해졌다. 반룡무늬 전돌은 우주를 하나의 구슬로 표현하여 그 안에 꿈틀거리는 용을 표현했고 봉황무늬 전돌은 연화대좌위에 있는 것과 바위, 물위에 있는 것 해서 두가지인데,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입을 벌려 이빨도 날카롭게 솟았고 눈도 매우 부리부리하지만 두려운 형상이기보다는 도깨비마저도 매우 부드럽고 유려한 것이 백제 사람들의 특성이 여기에도 잘 살아나고 있다.
이러한 무늬 전돌들은 하나하나는 그렇게 두드러지게 화려하지 않지만 여럿이 모여서 어울리면 또 다른 조화미를 이루어 내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백제 사람들의 단아하면서도 은근히 화려한 취향과 그를 뒷받침하는 섬세한 기술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7) 부여 석조
박물관 가운데뜰에 놓여 있는 이 거대한 석조는 부소산 기슭의 옛 국립부여박물관 동쪽 우물자리 아래쪽에 있던 것을 박물관이 이사하면서 따라서 옮긴 것이다. 본래 그 자리가 왕궁터로 추정되므로 이석조도 궁에서 연꽃을 띄어 놓던 석련지(石蓮池)로 쓰던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한다.
전체적으로 사발모양으로 오므라들어 소담하다는 인상을 주며 아무런 장식이 없어 매우 단아하다. 그러면서도 이토록 거대한 돌덩이를 부드럽게 공들여 다듬어 조금도 차갑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은 직사각형이 기본인 통일신라 석조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백제 사람들의 정서이다. 그런데 석조 옆면에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백제의 슬픈 종말을 가슴 저리게 증언하고 있다. 이는 정림사터 오층석탑에도 새겨져 있는 것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장수 소정방의 군대가 자신들이 백제를 평정했음을 기념하려고 새겨놓은 글자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전시실에는 능산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제품의 여러 유물이 있고, 벽화 고분으로 유명한 동하총의 사신도(四神圖)가 있다. 능산리 고분군은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 평면의 현실과 현실로 들어오는 연도가 달린 횡렬식 석실분으로 그 위치와 규모로 미루어 왕릉으로 전해져 왔으며 1993년 백제금동대향로(국보287호)가 출토된 고분군 서편 백제시대 절터에서 1995년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288호)이 발견됨에 따라 백제 성왕과 관련된 왕릉임이 입증되었다. 사리감에는" 백제창왕(위덕왕)13년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부왕인 성왕을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또한 이곳에는 백제의 묘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옛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여러형태의 고분군 모형을 실물 또는 축소모형으로 전시하고 있다. 야외의 정원에는 당(唐)의 유인원 기공비(보물제21호)를 비롯하여, 보광사 중창비(보물 제107호), 부여 석조(보물 제194호)가 있다. 이밖에 각종 기석(磯石), 판석, 백제의 큰항아리 등이 있으며, 석탑, 부도, 석등, 석불상, 돌매, 백제고분, 칠지도(모조품), 도용(陶傭) 등이 있다.
4. 정림사지
정림사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사찰 정림사의 터를 말한다. 백제의 유구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부여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거의 유일한 절터로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이다. 이 터의 지정면적은 3만 4155㎡이며, 현재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때 창건되었으며,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있어 그 자세한 유래 등이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다만, 1942년 절터 발굴 조사시 이곳에서 발견된 와명(瓦銘)에 "太平八年戊申定林寺大藏堂草"라고 씌어 있어 정림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대평 8년은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으로 그때에는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으며 그때까지는 이 절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나「삼국유사」와 같은 문헌 기록에도 "정림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아, 백제 때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 9 호)과 고려시의 사찰 중수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5.62㎝의 석불인 부여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 때 백제시대·고려시대의 막새 기와편을 비롯하여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 등 생활용구와 소조불상편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현재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지금 현재는 금당자리에 복원해 놓은 건물 한 동만 덩그라니 남아있고, 이곳을 이름나게 한 오층석탑이 절터 한 가운데, 석불좌상이 강당자리의 전각에 보관되어있다.
가. 정림사지의 가람배치
1979 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절터의 전면 발굴을 실시하여 절의 전체적인 배치를 밝혀냈다.
정림사의 가람배치는 금당(金堂)과 강당(講堂)과 중문(中門)이 일직선상으로 놓여 있고, 강당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廻廊)이 있으며, 금당과 중문 사이에 1기의 탑을 배치한 일탑식가람(一塔式伽藍)으로 추정되어 전형적인 백제시대의 가람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1) 금당지(金堂址)
석탑에서 북으로 26.27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면서 백제 건축사에서 특징으로 지적되는 2층 기단을 지난 건물로 조성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크지 않은 건물로 보인다. 그리고 서북 모퉁이에 있던 적심석(積心石) 주변에 붉게 탄 소토층(燒土層)이 발견됨으로서 이 건물이 화재로 인하여 소실된 것으로 판명된다.
2) 강당지(講堂址)
금당지의 중심에서 북으로 31.7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나, 석탑의 중심을 양분해서 통과되는 가람남북 기준선과는 동편으로 20cm 벗어나 위치한다. 이 강당지에서는 유일하게 5개의 초석이 발견되었으며, 건물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추정된다.
3) 중문과 연못
중문지는 석탑을 중심으로 남으로 19.98m 거리를 두고 남쪽에 문의 중심을 두고 있으며, 특이한 것은 중문과 탑 사이에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지나가게 한 점이다. 지금은 금당 자리에 최근에 복원한 건물만이 덩그렇게 서 있지만 절 전체가 회랑으로 빙 둘러 있는 가운데 긴 네모꼴의 못에 연꽃을 기르고 잉어라도 몇 마리 놓아길렀다면,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매우 운치 있는 공간이었을 듯하다. 기둥자리로 보아 중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담한 구조였다고 밝혀졌다.
4) 회랑지(廻廊址)
회랑은 장방형에 가까우나 북쪽으로 갈수록 동회랑의 폭이 약간씩 넓어지는 형태 곧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나. 정림사지의 유물
1)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답사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절터 한가운데 의젓하게 자리한 이 오층석탑은 백제가 멸망해 간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채 1400년을 버텨 왔다. 어느 나라보다도 불교가 융성했을 백제의 불교 문화 가운데 자리로만 남아 있는 목탑은 다 쓰러지고 없지만, 지금 남아 있는 탑은 익산 미륵사터 탑과 이 정림사터 오층석탑 2기뿐이다. 특히 이 정림사터의 탑은 백제 석탑의 완성된 형태로 손꼽는 것이다. 미륵사터 탑이 작은 부재들을 엮은 흔적이 보이는 점에서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한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것에 비해, 이 정림사터 탑은 부재들이 한결 단순해지고 정돈되어 비로소 석탑으로서의 완성미를 보여준다. 국보 제 9호로서 손색없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석탑은 그 양식에 의하여 미륵사지 석탑의 뒤를 이어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나 발굴 조사에서는 정림사의 창건과 더불어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석탑의 그 연대는 미륵사지 석탑보다 빠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정림사에 대한 기록이 역사 서적에 없어 그 창건 연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미륵사지에서 출토되는 것보다 연대가 오랜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륵사지와 정리사지의 금당은 모두 2중 기단이며 정림사지의 하층기단에는 초석이 있으나 미륵사지의 그것은 없다. 초석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시기적으로 빠를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그 유물의 형식에 의하여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며 석탑도 그 때 같이 만들었다고 본다면, 무왕대 만들어진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연대가 앞서는 석탑임에는 틀림없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논의 중이다.
일명 백제탑으로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탑은 높이 8.33m이며, 특징은 기단이 단층으로 1층 지붕돌의 비례에 견주어 훨씬 좁고, 면석의 모서리 기둥은 위로 갈수록 좁아져 목조 기둥의 배흘림수법이 남아 있으며, 지붕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이 지붕돌과는 다른 돌로서 두공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마무리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지붕돌이 경사지지 않은 얇은 판석이면서 처마는 살짝 반전시켜 경쾌한 상승감을 주는 점들을 꼽는다. 또 전체적으로 키가 늘씬해 상승감을 보이는데 그것은 1층 몸돌이 훌쩍 솟고 2층부터의 몸돌은 높이가 1층의 반으로 줄어들면서 지붕돌의 너비는 차차 줄어져 가파른 기울기를 보이기 때문이다.
정림사 오층석탑의 구조를 정확히 실측한사람은 석굴암을 측량한 요네다미요지이고, 그 구조의 미학과 양식적 전후관계를 밝힌 것은 『조선탑파연구』를 저술한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우현 선생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인 익산 미륵사탑은 목조타파를 충실히 모방한 것으로 다만 재료를 돌로 한 목탑이라고 할 수 있음에 반하여 정림사탑은 이제 목조탑파의 모습에서 떠나 석탑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획득하는 단계로 들어선 기념비적 유물로 평가하였다.
석굴암을 측정하면서 통일신라 때 사용한 자가 곡척(曲尺, 30.3cm)이 아니라 당척(唐尺, 29.7cm)이었음을 밝힌 요네다는 백제 때 사용한 자는 곡척이 아니라 고려척임을 밝혀냈다.
고려척으로 측량한 결과 요네다는 이 탑의 설계에서 기본 단위는 7척에 있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1층 탑신 폭은 7척, 1층 총높이는 7척, 기단의 높이는 7척의 반인 3.5척이고 기단 지대석(址臺石)폭은 7척의 한 배 반인 10.5척이다. 그런 식으로 연관되는 수치를 요네다는 기하학적 도면으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요네다는 정림사탑의 아름다움의 요체는 체감률(體感律)에 있는데 그것은 등비(等比) 급수 또는 등차(等差)급수적 체감이 아니라 기저부 크기의 기본 되는 길이에서 발전하는 등할적(等割的)구성으로 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예를 들어 1층부터 5층까지 각층의 높이를 보면 층마다 10분의 1씩 줄어들어 결국 1층은 6.9척, 2층과 5층을 더한 것이 7척, 3층과 4층을 더한 것이 6.9척이 되므로 대략 7척과 맞아 떨어진다. 또 1층부터 5층까지 탑신의 폭을 보아도 1층이 7척이고, 2층과 3층을 더한 것이 7척, 2층과 5층을 더한 것이 7.2척이므로 이 또한 대충 7척과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요네다는 모든 수치관계가 대략만 맞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용인하고 그 정도의 차이는 여러 돌을 쌓기 때문에 수평고름을 하기 위하여 시공 때 상하면을 약간씩 다듬은 데서 생긴 오차로 보았다. 그러나 백제의 건축가들이 그렇게 대충 설계했을 리가 없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와 깊은 뜻이 따로 있을 것이다.
요네다가 제시한 측량에 의하면 모든 수치에서 5층이 관계되면 반드시 다른 층보다 약간씩 커짐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5층은 4층까지의 체감률을 적용하지 않고 약간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요네다가 제시하는 치수들이 약간씩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5층이 약간 커야만 했던 이유는 도면상의 문제가 아니라 완성된 탑을 절집 마당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실제로 느끼는 체감률 때문이다. 5층이 약간 커야 보는 사람 입장에서 비례가 맞다고 느끼는 것이다. 정림사탑의 설계자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것이다. 즉 우리 선조들은 실제 도면상에서 약간 오차가 생기더라도 실제 체감에 적용될 비례를 위해 슬기롭게 도면상의 비례를 파기한 것이다.
정림사터 탑은 8.33m나 되어 결코 작지 않은 탑인데도 멀리에서 보면 그리 육중한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에 크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다가갈수록 장중하고 위엄 있는 깊이가 느껴진다. 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사방을 빙 둘러보면 보는 자리에 따라서 장중함과 경쾌함이 교차되어 느낌이 새롭다. 아마 단번에 정면승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곱씹는 맛을 느끼게 하는 백제의 맛이 이런 데서도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통일신라시대나 고려 시대에 옛 백제 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방에 세워진 탑 가운데 많은 탑이 정림사터 탑의 문법을 지니고 있어, 이 탑을 본떠 백제 지역 나름의 정서를 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이 정림사터 탑은 이 지역의 조형적인 지주였다는 뜻이겠다.
한동안 이 탑은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어왔다. 그 까닭은 1층 탑신부 한 면에 새겨진 소정방(蘇定方)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 즉 소정에 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그러한 전시 상황에서 예술적으로 손색이 없는 이러한 탑을 만들 수도 없으며, 또한 뚜렷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평제기공문"이라는 그 글자는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그것을 기념하려고 이미 세워져 있던 탑에 새긴 것으로 고증에 의에 입증되었다. 따라서 이 탑은 660년(의자왕20년) 훨씬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아마도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자기의 전공을 오래도록 전할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겠지만, 거세게 저항하던 백제 유민들의 기질과 불심으로 보아 비석보다는 탑에 새기는 것이 오래 보존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당시 백제인들의 처절했을 정경을 그려 본다.
2) 소조부처머리
절터 발굴 조사 때에 절터 여러 곳에서 기와 조각들이 무더기로 파묻혀 있는 것이 밝혀졌는데, 그 중 회랑터 서남쪽 구덩이에서 백제 때의 기와조각들과 함께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 조각과 도용(陶踊) 파편들이 나왔다. 여러 조각이 난 것들이라 완전한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많지 않은 백제 불상의 면모를 보충해 줄 수 있는 유물로 매우 귀중한 것이다. 특히 부처 머리와 도용의 머리 부분들이 모두 볼에 다보록하게 살이 붙고 입가에는 엷고 부드러운 미소를 따뜻하게 머금고 있다. 진흙을 빚어 구운 소조불에서는 금동불보다 훨씬 부드러운 질감을 느낄 수도 있어 백제 사람들의 온화한 마음씨를 물씬 느끼게 한다.
3) 석불좌상
석불좌상은 창건 가람의 강당지에 다시 35cm 정도의 두께로 흙을 덮은 위에 부처의 좌대가 놓여져 있으며 보물 318호로 지정되었다. 이 자리에 근래에 전각을 복원해 놓아 석불좌상은 현재에는 집 안에 모셔져 있다.
얼굴이나 몸체가 모두 몹시 비바람에 씻겨 형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래쪽의 대좌를 보면 안상이며 연꽃 조각이 분명하고도 당당해서 이 불상도 본래는 매우 단정한 고려 때의 불상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정림사 이름이 새겨진 기와대로 고려 현종대인 1028년에 이 절을 크게 중수할 때 모신 듯하니 11세기 불상으로 볼 수 있다. 전체 높이는 5.62m이고 보물 제 108호이다.
5.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
부여 근방에는 백제 고분 수백 기가 수십 군데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대개 세월에 씻겨 형체가 제대로 남은 것은 드물고 또 일찍부터 도굴되어 온전한 것도 많지 않다. 능산리 고분군은 그 많은 고분들 가운데 부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잘 남아 있고, 규모면에서도 큰 축에 드는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사적 제14호로 해발 121m의 나지막한 능산리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부여 시가지에서 논산쪽으로 약 2Km의 거리에 위치하는데 고분군은 모두 총 7기의 고분이 3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 열에 3기, 뒷 열에 3기가 전후 좌우로 정열되어 있고 맨 뒷편에는 보다 작은 고분 한 기가 위치하고 있다. 이제까지 이 고분들을 일러 전하기를 왕능이라 하며 옛지명은 "능뫼 부락"이라 하였다.
이 고분들은 1915년 여름에 일본 학자인 구로이다(黑板)씨가 2호(중하총)·3호(서하총) 2기를, 세키노(關野)씨가 5호(중상총) 1기를 발굴 조사하였는데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그 후 1917년 노모리(野守建)씨가 1호(동하총)·4호(서상총)·6호(동상총) 3기를 추가 조사하였고, 같은 해 이 고분군에서 서쪽으로 소계곡을 건너 서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4기 가운데 2기를 발굴하였다. 한편 1937년이 고분들은 1915년 여름에 일본인 구로이다(黑板)가 2호(중하총)·3호(서하총) 2기를, 세키노(關野)가 5호(중상총) 1기를 발굴 조사하였으나 조사전 이미 도굴이 된 상태가 확인되었다. 그 후 1917년 노모리(野守建)이 1호(동하총)·4호(서상총)·6호(동상총) 3기를 추가 조사하였고, 같은해 이 고분군에서 서쪽으로 소계곡을 건너 서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4기 가운데 2기를 발굴하였다. 한편 1937년 우메하라(梅原末治)에 의해 전왕릉군(傳王陵群)의 동쪽 마을뒤에서 동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5기가 조사되었다. 이와 같이 능산리 고분군은 동·서와 중앙에 각각 1군을 이루어 3군으로 총 16기가 분포되어 있는데 그들 가운데 중앙부에 일군을 이루고 있는 전왕릉군 7기만이 현재 사적 1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사적지 지정 면적은 233.35㎡이다.
당시 조사된 고분들은 잘 다듬은 판석을 결구하여 석실을 구축하였는데 현실과 연도로 구분되는 두 개의 방으로 된 횡혈식 석실분들이다. 이들 고분은 모두 왕과 왕족들의 분묘라고 생각되는데 백제 후기의 묘제를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석실분들이었다. 외형은 봉토분으로 밑 지름이 20∼30m쯤 되는데 아래쪽에 호석(護石)을 두른 것도 있다. 부장 유물로 5호분에는 관대 위에서 두개골 조각과 칠(漆)한 나무관 조각, 뚫인 모당 금동 금구(金具), 꽃무늬 금동 금구가 있었고 2호분에도 칠기 조각과 금동 둥근머리 못이 있었다. 그중 "동하총"이라고도 하는 1호분에는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분 안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고구려사람들의 문화로서 특히 내세의 수호신으로서 사신도를 중심으로 그리는 것은 7세기 무렵의 일이다. 그러므로 백제 고분에서 사신도 벽화가 나왔다는 것은 이 무렵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으며 백제에서도 도교가 어느정도 수용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자세하게 들어가보면 먼저 1호분인 동하총(東下塚)에 대해 살펴보자. 동하총(東下塚)의 봉토 직경은 27m이었는데 봉토 아래에는 할석을 2·3단 쌓은 호석이 봉토 연변을 따라 돌려져 있었다. 현실은 장방형으로 앞뒤가 길며 네벽과 천정에 벽화가 있다. 현실의 크기는 3.25mⅹ1.51m의 평면에 높이는 1.94m인 상자형 방이다. 각 벽석과 천정석은 각각 한 매의 큰 판석으로 물갈이를 하여 면을 매끄럽게 다듬었는데 북벽과 동벽은 편마암을 썼으며 기타는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였다. 바닥은 전돌을 깔고 그 중앙부에 전돌을 가로 세워 한 단 높여서 관대를 설치하고 관대 아래에는 배수로를 구축하여 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현실 내의 벽화는 주 . 황. 적. 흑색으로 네 벽에는 사신도를, 천정에는 나는 구름과 그 구름 사이에 연화문을 예리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그렸다. 다시 말해서 북벽은 현무(玄武), 남벽은 주작(朱雀), 동벽은 청룡(靑龍), 서벽은 백호(白虎) 등 사신도를 그리고, 천정의 연화비운문(蓮花飛雲文)을 채색하였는데 천장의 연화문만은 아직도 선명한 가운데 서벽의 백호는 머리 부분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고 기타의 벽화는 적외선 사진으로 약간 나타날 뿐이다.
현실 전방의 입구에는 연도를 두었는데 연도의 길이는 3.7m, 폭 1.43m, 높이 1.68m로 현실과 접해서 바깥 쪽에 이르러서는 그 폭이 차츰 벌어지고 있다. 현실은 거대한 1매의 방형판석으로 폐쇄하고 연도는 방형의 전돌을 쌓아서 막았으며, 연도의 좌우 벽은 할석을 쌓고 회를 발라 벽면은 회벽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묘제는 평양 지방에서 발견된 고구려 후기 고분과 통하고 있어 고구려의 문화적인 영향이 백제 후기 묘제에 반영 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중상총의 현실 평면은 약 3.25m, 폭은 1.45m로 장방형을 이루고 높이는 1.7m인데 벽면 형성은 양 귀를 크게 접어서 5각형으로 결구하였다. 좌우 벽과 뒷벽은 잘 다듬은 화강석재 판석으로 조립하고, 상단부의 귀접이 한 벽석은 좌우 수직 벽위에 눌러 얹어서 안으로 기울인 후 천정석을 덮었다. 둥측은 약간 치우쳐 있는 연도는 길이다 약 1.1m에 불과하나 현실과 연도를 각각 판석으로 폐쇄하였다. 이러한 고분 양식은 부여 지방에 대종을 이루어 분포하고 있는데, 주목되는 점은 현실 중앙 바닥에 높이 17cm 의 석상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목관과 관뚜껑의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시신의 머리 쪽에는 장식구로 보이는 금동제 파편들이 집중되어 있는 점이다.
목관 옆과 주위에서는 머리 부분만 도금된 못과 꽃 모양으로 된 크고 작은 도금 장식구 10여 개와 옷에 장식하였던 금실 몇 모라기가 수습되었으며, 기타 송곳 모양으로 된 쇠붙이도 2점이 발견되었다. 또한 부식된 배 모양 조각들고 확인되었는데 이 고분도 도굴된 상태였다. 관장식구에는 다양한 문양을 투각하였는데 이러한 장식적인 요소는 각 장식금구마다 심볼로 나타나고 있다. 중하총은 천정 구조가 터널형으로 되었고, 각 벽은 회를 발라 도장하였으며, 서하총은 중상총과 구조가 거의 같으나 연도가 거의 중앙부에 있으며 동.서 고분군의 구조는 중상총. 서하총과 같은 구조로서 여러 장의 치석된 판석을 결구하여 석실을 구축하였다.
이와 같이 능산리 고분군에는 백제 고분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백제의 무덤은 기본적으로 고구려 계통의 묘제(墓制)에서 출발하여 백제화되는 과정을 밟고 있는데, 평지에서 구릉으로, 돌무지무덤(積石塚)에서 돌방무덤(石室墳)으로, 어울무덤(合葬墓)에서 홑무덤(單葬墓)으로, 네모꼴(方形) 에서 긴네모꼴(長方形)무덤으로 변화하고, 널길의 위치가 남벽의 동쪽에서 가운데, 또는 서쪽으로 옮겨지며 점차 북침(머리를 북으로 둠)으로 통일되어 갔다.
돌무지무덤은냇돌이나 산돌을 쌓아 만든 피라미드 모양의 네모무덤으로 한강 유역에서만 보이는 형식인데, 집안(輯安)이나 독로강 유역의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통하면서 다져쌓기, 돌무지(積石), 구덩(土壙)등의 요소도 섞여 있다. 돌무지무덤은 백제 초기의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인다. 널무덤(土壙墓)은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묘제로 백제의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땅 밑에 긴 네모꼴의 구덩을 파고 주검을 직접 묻거나 널·덧널을 사용하였다. 서울 가락동, 석촌동 일대와 천안 화성리 및 청주 신봉동의 널무덤이 유명하다. 널무덤 가운데는 주검을 땅 위에 올려 석회와 진흙다짐으로 덮은 뒤 네모난 봉토를 만들고 표토(지표면) 가까이에 돌이나 기와를 깐 특수한 형식도 있다.
돌덧널무덤(石槨墓)은 긴 네모꼴의 구덩이를 파서 돌덩이나 깬돌로 네 벽을 쌓고 그 위에 몇 개의 뚜껑돌〔蓋石〕을 덮은 것인데, 천장을 좁히기 위하여 벽 위에 굄돌을 얹거나 벽을 오므린 것이 많다. 대개 하나의 주검을 묻고 있으며 공주, 금산, 임실, 남원 등에 분포하고 있다. 돌방무덤(石室墳)은 백제 무덤의 주류로써 백제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주로 구릉의 남쪽 비탈이나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땅 위에 깬돌이나 판돌로 돌방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무덤이다. 돌방은 대체로 평면이 네모이면서 널길이 남벽의 동쪽에 붙은 모양과 긴 네모꼴의 남벽 중앙에 널길이 있는 『모』자 모양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벽돌무덤(塼築墳)은 벽돌을 쌓아 만든 긴 네모꼴의 터널식 널방무덤으로 중국 남조로부터 묘제를 받아들였다. 주로 공주지역에서 발견되어 왔으며, 특히 송산리 6호 무덤과 무령왕릉이 유명하다. 송산리 6호 무덤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진 유일한 왕릉이기도 하다. 최근 부여 저석리에서는 돌덧널무덤 모양의 벽돌무덤이 발견되었다. 독무덤(甕棺墓)은 재래식 묘제를 계승한 전통 묘제의 하나로 서울, 공주, 부여, 영산강 유역 등 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는 한 봉토 안에 여러개의 독널이 묻혀 있기도 하다. 즉 영산강 유역은 독무덤이 독립된 묘제로 집중되어 있어 "옹관 특수 지대"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화장묘(火葬墓)는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무덤형식으로서 백제 후기의 부여 지방에서 유행하였다. 풍화 암반에 둥근 구덩이를 파고 그 바닥에 다시 작은 구멍을 파서 화장한 뼈를 담은 단지를 넣고 납작한 돌이나 기와, 벽돌 등으로 덮은 것이 특징이다. 뼈단지란 불교식 장례법으로 주검을 화장한 뒤, 그 뼈를 추려 담아 땅속에 묻는 여러 가지 모양의 용기를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가 전개된 4세기 후반부터 사용되어 널리 쓰이게 되었다. 뼈단지는 주로 토기를 이용하지만 간혹 자기도 사용되었다. 백제의 뼈단지는 사비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주로 부여 지방의 낮은 산기슭에서 발견되고 있다. 대부분 바닥이 납작한 단지나 바리같은 토기에 보주모양 꼭지가 달린 뚜껑이 덮여 있다.
6. 궁남지
현 부여읍에서 남쪽으로 1km 쯤 떨어진 동남리에 위치한 궁남지는 사적 135호로 선화공주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백제 무왕이 만든 정원의 못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이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이 궁녀들과 함께 풍류를 즐겼다는 이 연못은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지금도 바람결 따라 말없이 일렁이고 있다. 연못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방장산의 의미를 담은 작은 섬과 정자가 있고, 물위에 구름다리가 걸려있다. 못 둘레에는 버드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무왕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금성산에서 뻗어내려오는 영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평야 한가운데 못을 팠다고 전한 다. 물론 당시에는 풍수지리설이 없었으므로, 이는 후대에 덧붙여진 전설로 추정된다. 연못 한가운데에 위치한 정자의 이름은 포룡정이다. 이곳에는 서동의 어머니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궁궐 남쪽에 사는 한 여인이 어스 름한 달밤에 잠을 못이루고 연못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때 갑자기 못 에서 물결이 일더니 용이 나타나 여인을 노려보았다. 그 후 태기를 느낀 여인은 열달 뒤 서동을 낳았다. 포룡이라는 이름은 용과 정을 통했다는 기이한 이야기에서 유래됐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무왕35년(634)에 궁의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 들여 주위 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한가운데에는 중국 전설에 나 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선산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조원사(造苑史)에 삼신산을 조성한 최초의 기록이다. 백제는 삼국 가운데 조원기술이 가장 뛰어 나 노자공이라는 사람은 612년 일본 황궁의 정원을 꾸며 아스카시대 정원사의 시조가 되기도 했다. 이 연못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든 것으로 삼국 중에서도 백제가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뛰어 났음 을 알 수 있다. 현재 못 둘레는 1,377m이며 1965년에 못을 정비하고 1971년에 섬 위에 누각과 다리를 건립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이 전설을 하나의 은유로 보고 있다. 용은 곧 임금이고 서동은 임금과 미천한 신분의 여인 사이에서 출생한 서자라는 주장이다. 서동은 왕의 밀명을 받고 서라벌 정탐을 위해 신라에 잠입했다가 미모의 선화공주 에게 반한다. 서동이 적국의 공주를 손에 넣기 위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던 노래가 바로 향가 "서동요"이다. 서동을 밤마다 안고 잔다는 노래 때문에 공주는 궁에서 쫓겨나고, 이에 서동은 공주를 얻는다. 왕위에 오른 서동은 20리 바깥에서 물을 끌어와 어머니가 살았던 궁 남쪽에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은 인공적으로 동그랗게 또는 네모 반듯하게 꾸며진 것이 아니라 물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연못 모양이 자연스럽게 형성 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3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연못이 천년 세월을 거치는 동안 조금씩 흙으로 메워져 크기가 1/3정도로 줄어들었다.
궁남지는 백제 궁성의 한 별궁에 속한 궁실의 원지로서 무왕 35년(서기 634)때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못은 주민들에 의하여 "마래방죽"이라는 이름으로 호칭되어 왔고 자연적인 못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간 백제 문화의 다방면에 걸친 연구 결과로 백제시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궁남지로 명명하였다. 이 후 이 연못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세인이 주시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궁남지는 본래의 면적이 약 3만여 평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이었으나 깊은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매립되어 농경지화 하였다. 이 후 나머지 9,500여 평도 매립될 위기에서 사적지로 지정되어 일부나마 보존된 것이다. 1965년 7월 정부에서 이에 대한 일부 복원 공사를 실시한 결과로 현재의 규모로 보존되고 있는데 13,772평으로 축소되어 있다.
궁남지는 1964년에 사적 135호로 지정되었으며, 정화 공사는 1967년까지 계속되었다. 삼국사기(백제 본기 무왕35년조)에는 "궁성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리 에서 물을 이끌어 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한 바에 따라 수중도서를 두고 무왕 출생 설화와도 관계가 있는 것들로써 삼국유사 무와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화가 전한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며 그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짐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그 아이 이름을 서동이라 하였으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마동이란 이름을 지은 것이다." 또한 이 설화에 따르면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 공주와 서동요를 퍼뜨려 결혼한 후 후사가 없는 법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다. 이와 같은 설화 내용에서 남지변이 별궁지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궁남지가 별궁 원지란 점이 암시되는데 이는 설화적인 한계성이 있음을 살피게 된다.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이 부합되지 않는데, 삼국유사는 무왕의 어머니가 집을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지었다는 것이고, 삼국사기는 무왕 35년 3월에 궁남에 연못을 팠다는 점인데 이는 이미 있던 연못을 확장하였거나 고쳐 수축한 내용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보다 앞선 임류각을 살펴 보면 "동성왕 22년(500년) 봄에 임류각을 궁성 동쪽에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나 되었고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이 있는데 현재 그 유구들이 학술조사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신라의 안압지보다 74년이 앞선 동성왕 때의 일이며, 안압지와 임해전은 문무왕 14년 2월의 일이나 궁남지가 40년 앞서 조성된것이다. 무왕이 연희를 베풀었다는 망해루와 궁남지, 측근의 군수리 폐사지는 임해전과 안압지 및 천주사지와 서로 비교되는 공통적인 유사점이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신라의 안압지는 궁남지의 모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7. 성흥산성과 대조사
<성흥산성> - 사적 제4호
부여읍내에서 금강 위에 놓인 백제교를 건넌 뒤 서천 방면으로 가자면 임천면이 나온다. 그곳에 성흥산과 성흥산성이 있다. 왕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수호할 목적으로 백제 23대 동성왕 21년(501)에 축조한 중요한 산성으로 당시 에는 가림성이라 하였다. 이 산성에서 보면 부여는 물론 멀리 논산, 강경을 비롯한 금강 하류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흥산성 아래에는 대조사라는 사찰이 있고 그 절에는 보물 제217호인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다. 성흥산성은 본래 가림성(加林城)으로서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금강하류의 요새지에 쌓은 석성(石城)으로 옛 지명과 축성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
성흥산성이 위치한 부여군 임천면은 백제시대에는 가림군이었기 때문에 일명 가림성이라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사실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동성왕 23년(서기 501년) 8월에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이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백가는 병이라 핑계하고 나아가 지키고자 하지 않으므로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11월이었는데도 폭설이 내려 환궁이 어렵게 되자 마포촌(馬浦村)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때에 백가는 왕을 시해코자 도모하였다. 왕은 백가에게 화를 입고 그해 12월에 돌아가므로 동성왕이라 시호하였다.그 뒤를 이어 무령왕이 즉위하자 백가가 가림성에 웅거하며 모반하므로 왕은 병마를 거느리고 나아가 한솔, 해명에게 명하여 토벌하니 백가가 나와 항복하므로 왕은 이를 참형하여 백강(백마강)에 던져 버렸다]는 것인데 산성에 관한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성흥산성은 테뫼식 산성으로 머리띠를 두르듯 산봉을 중심으로 산정 외곽부를 돌로 쌓았다. 성벽을 쌓은 방법은 성의 외면만 돌로 쌓고 안쪽은 호를 파서 그 흙으로 석축에 경사지게 붙여서 안벽으로 하였는데 지형이 매우 험준하고 성벽이 견고하다. 성의 둘레는 800m에 이르고 성내의 면적은 15,548평에 달하는 퇴뫼식 산성 가운데 최대급에 속하는 전략적 요새이다. 성벽의 높이는 3~4m로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가장 잘 보존된 남서쪽 성벽보다 약 1.5m정도 앞으로 폭을 넓혀 내쌓서 기초를 만들었고 성벽을 지그재그 식으로 축성하였다. 이 산성은 백제산성의 한 유형을 대표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서 사적 제 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데, 성내에는 3개소의 샘이 있고 군창지로 추정되는 건물지 이외에도 초석 등이 흩어져 있다.
성내 남쪽 느티나무 아래에는 4m의 폭을 가진 남문지가 있어 초석이 현재도 남아 있으며 서문지와 북문지도 있다. 남문지 바로 앞에는 돌로 쌓았던 보루가 있었는데 왜정 때 이 석재를 빼어다가 제방을 쌓는데 사용하였기 때문에 현재는 토성처럼 되어 있다.주서(周書)에 [성 내외에는 서민이 살았고, 남쪽은 작은 성이 나뉘어 예속되었다] 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부합됨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성흥산성 남쪽 구교리에는 관동산성이 있고, 토산성에도 토축된 보루가 있어 모자산성으로 부속된 관계임을 주목하게 된다.따라서 큰 성 주위에는 작은 토성이 딸려 있고 정(亭)자 붙은 소지명(小地名)이 있는데 이는 군대의 주둔과 관련된 지명들이다.
성흥산성은 비정(飛亭), 청마산성은 독정(篤亭)등으로 각 산성과 관련된 정자가 붙은 지명들이 각처에 남아 있다. 성흥산성에서는 금강을 따라 전개된 평야가 주위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의 주변 일대가 한 눈에 관망되는 요충지인데, 백제 부흥운동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유인궤도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다고 감탄하였는 바, 그 내용을 요약하면 "백제 광복 운동이 활발해지자 유인원은 군사를 증파할 것을 당 고종에게 주청하였다. 662년 당 고종이 군사 7천명을 징발하고 좌위장군 손인사(孫仁師)를 원병으로 파견하니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유인원과 합세하였다.
이 때에 복신은 부여풍과 서로 시기하게 되니 복신은 병이라 칭하고 누워서 부여풍이 위문하러 오면 참살하려 계획하였는데 부여풍은 미리 이를 알고 수하의 믿는 사람을 친히 거느리고 복신의 목을 베었다. 이렇게 되자 당의 제장수들은 서로 합세하여 사기가 높은 가운데 서로 의논하기를 "가림성은 수륙의 요충이므로 이를 먼저 격파하자"고 하였으나 유인궤는 말하기를 "병법은 충실함을 피하고 공허함을 공격한다." 고 하는데 가림성은 험하고 굳으므로 이를 공격하다가는 군사만 상하고 지키면 날이 오래 걸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려 때에는 유금필 장군이 이 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 성내에 있다.
<대조사>
대조사는 부여군 임천면 소재지 동쪽에 위치한 성흥 산성의 동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의 연혁은 오래되었으나 사찰이 일시에 폐사되고, 최근에 이르러 다시 개창된 것으로 전한다. 대조사의 시원은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백제 때 도승 겸익이 인도의 상가야 천육자 휘하에서 5년동안 수학하여 범문에 능통하게 됨에 아담장 5부 율문을 가져다가 번역하여 이 번역본을 흥륜사에 두었는데 어느날 꿈에 관음보살이 광명주를 들고 나타나 겸익에게 말하기를 번역본이 꽤나 잘 되었다고 칭찬하더니 이 관음보살이 큰 새(大鳥)로 변하여 날아가 가림성 부근에서 사라졌다. 이에 겸익은 꿈을 깨고 가림성 부근에 가서 새가 앉은 곳을 찾아보니 큰 새 대신에 바위 위에 관음이 앉아 있었다 하는데, 이에 여기에 석불을 조성한 것이 대명사의 뒷편에 있는 석불이며, 이때 지은 절이 대조사라 전하고 있다.
이 대조사의 연혁과 관련된 내용은 <<부여읍지>>와 <<대조사 미륵실기>>에 전해오는 내용인데 이의 신빙성 문제에는 상당한 의심이 있다. 즉 이 사찰의 조성 년대가 성왕 5년이라고 하지만 사찰의 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석불은 고려양식이 분명하고, 더불어 대조사 미륵실기가 고려 원종대에 이루어진 것임을 고려한다면, 연혁 문제는 오히려 후대에 추가로 기술된 것이 아닌가 한다.
대조사는 현재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의 익공 계통의 건물인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전면에 2종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과 전면에 연화좌를 가진 석등이 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더불어 대웅전의 좌측에는 요사의 건물이 있는데 현대식 한옥이다.
대웅전 뒷편에는 명부전, 산령각, 그리고 입석불이 자리하고 있는데, 석불은 입불로 논산의 은진에 있는 미륵불과 거의 비슷한 형태로 동향하고 있다. 석불의 전면에 있는 산령각, 명부전은 건물 자체가 매우 퇴락된 형태인데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산령각은 정·측면 각 1칸의 건물이다. 이 사찰의 건물은 임천의 옛 관아건물을 이건 조성한 것이라 한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보물제217호
10m 높이의 거대한 이 석불은 크게 몸체와 머리, 보관으로 나뉜다. 몸체는 육중한 돌기둥을 모서리는 죽이고 옷자락은 다듬은 모습이다. 가슴께에 올린 양손으로 연꽃 가지를 쥐고 있는 모습도 관촉사 관음보살과 같다. 긴 귀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얼굴 모습은 눈이 부리부리하지 않아서인지 관촉사 관음보살과는 달리 온화한 느낌을 준다. 가까이에서 보면 귓바퀴며 뒷모습이 섬세하다고 할 만큼 잘 조각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지방마다 독특한 불상이 세워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런 거대한 입불은 충청남도 지역의 특성으로 보인다. 논산의 관촉사 불상, 이 대조사 불상과 함께 홍성 상하리에도 이와 비슷하게 거대한 바위를 몸삼아 모신 부처가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석굴암 본존을 모범으로 조화된 이상미를 추구하던 불상들과는 달리 이 불상들은 세련되지도 못하고 우아하지도 못하며 토속적인 분위기를 낸다. 이 지방 사람들의 “괴력”에 대한 갈망과 완벽함이 아닌 데서 오는 친근함을 추구하는 미감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