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옹동 작소(鵲巢) 백천제 답사(2017.7.16.)기록☚
나는 1950년 김제시 용지면 와룡리 김제조씨 가문에서 태어나 韓國鐵道公社에서 指導팀장으로 停年 退職하고 남은 시간 自由人으로 살면서 나의 뿌리가 누구이며 나의 조상이 어떻게 세계를 이루고 살아왔는가를 宗寶와 族譜를 뒤적이며 살펴본후 祖上의 근거지 정읍옹동을 방문하여 답사한 내용을 몇글자 적고자 한다.
金堤趙氏는 本貫을 金堤로 시조 趙連璧 할아버지의 자손이 번창, 약 800년의 역사를 통해 약5만여명의 씨족으로 번성하였으나, 현대사회는 서구사회를 본떠 조상들이 지켜온 충효와 승조사상은 희박해지고, 현대학문에는 능할지언정 자신에 대한 祖上에 대하여는 거의 백지이며 자기조부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인 현세태라고 한다.........지금부터라도 조상의 얼을 기리고 복받는 後孫이 되고자 다짐해 본다.
2017.7.16 내아우 정권이와 여동생 월선이 셋이서 승용차로 익산에서 약 30km
떨어진 정읍옹동작소로 1시간을 운행하여 백천재를 방문하고 인근 조상들이 묻혀있는 山所를 둘러보았다.
⇒백천재주소: 전북 정읍군 옹동면 오성리126-1(산소위치 백천재주소와 동일, 마을이름 작소부락)
약2만여평의 산에 조상의 묘소들이 서너군데에 나누어져 후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재 이곳 산 한쪽은 개간하여 건설회사에 흙을 팔아 宗中 收益金을 올려 宗中 基金으로 활용하고 있답니다.
이곳을 안식처로 잠들고 있었던 나의 선대 조상들 9세손 조윤침이 제일 어른으로 자리잡고, 봉분 10여기가 東向을 바라보며 자손을 지키고 있었다.
백천제 시제일은 음력 시월15일 백천재관리는 조동식 宗親이 하고 있으며 현재는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있으며 사위와 딸이 농사를 지으며 墓를 관리하고 있다.
백천당공파종중은 총42,000평의 땅이 있으며, 토지에서 세를 받아 기금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시제일에 타지에서 오는 종친은 10만원의 교통비, 가까운곳은 5만원의 교통비를 지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아버지(炳玉)때는 종친 병희 아저씨와 시제일에 참석하여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였으나 현대에 이르러 단절되었음을 고백하고 조상의 충효사상을 깊이 세기며 세월을 살아가리라고 다짐해 봅니다.
백천재 뒷산에는 서너군데에 나누어져 9세손 백천당 윤침, 10세손 형륜, 십일세손 잠, 12세손 응직, 응립, 14세손 상주 15세손 태정의 봉분이 있으며 신도비 비석이 여러개 있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백천재와 백천당 조상묘소 추모 답사후 옹동 작소마을 뒷산에 있는 13세손 必泰 호 호계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나섰는데, 대나무밭에 쳐 박혀 있는 필태 할아버지의 묘를 찾고 수천의 후손들이 도리를 못한 죄를 되씹으며 야박한 현대사회의 개인주의가 도덕과 윤리가 파괴된 것을 목격하고 가슴이 쓰러져 내렸다.
옹동 작소에 상석과 봉분묘가 있으며 대나무속에 햇볕을 못보고 수년전부터 찾아오는 후손이 없고 무관심으로 방치되어 있다.
12세손 조응헌의 셋째 아들 필태(13대손)는 천성의 효성이 지극하여 묘려에서 삼년을 마치니 원근사람들이 찬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께서 특별히 인견하시어 태학반에서 누락된 것을 아깝게 여기시고 특별히 호계라는 호를 주시었다.
나의 중시조 12세손 죽서공파 응헌할아버지는 이곳에 묘소가 없고 정읍시옹동면용호리(호동)에 있어 차후에 일정을 잡아 둘러볼 생각이다.
☛9세손 趙潤琛 백천당(1476-1545)의 생애
1476년 (成宗7년)에 공조참판(工曹參判) 원우(元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일흔살이 되는 1545년 (仁祖원년)에 별세했다.
부는 원우(8세손), 조부는 이지(7세손), 자녀는 장자 亨倫(10세손) 차자 貞倫(10세손) 5녀2남을 낳아 자손이 번창하고 벼슬이 끊이지 아니하니 이것이 후손에 넉넉한 복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조윤침(趙潤琛)[1476~1545]은 어려서부터 글을 즐겨 읽고, 효성 또한 극진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사람을 대하는 데 성(誠)과 예(禮)를 다했고, 생활은 한 치도 예의범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중종 때에 조윤침을 등용하고자 한성서윤(漢城庶尹)에 명하였으나 사색당쟁(四色黨爭)이 한창인 조정의 형태에 염증을 느껴 부임하지 않고 오직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통한 유학의 구현과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강학(講學)을 열어 여생을 바쳤다.
후학들이 조윤침을 흠모하고 추배하여 김제시 교동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배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