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기록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국립공문서관,2달간의 끊질긴 요청에 기밀문서 한건을 공개했다. 문서에는 일왕의 옥쇄가 찍혀있다. 문서의 주 골자는 일왕의 측령으로 국가기관인 조선사 편수회를 조직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침탈의 주역인 요시히토와 그의 뒤를이은 히로이토 일왕이 지시한 특별 명령이였다.조선사 편수회 조직,그것은 일제가 총력을 총동원해 수행했던 국가 최고 프로젝트였다.
조선가 편수회는 일제강점기때 우리역사를 송두리채 뒤고 흔들었습니다.지금까지도 조선사 편수회가 남긴 잔재는 우리역사 곳곳에 남아있는 부인할수 없는 사실입니다.우리역사를 올바르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놓은 역사관을 극복하는 것도 아직까지 우리의 과제입니다. 일제는 여기에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했는데, 조선사편수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최대의 프로젝트 였습니다.
국사편찬 위원회 서가의 한 귀퉁이는 지난 수십년동안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않은 한집의 책이있다.일제 강정기때 만들어진 역사서인 조선사 그 원본이다. 이 원본은 편수회 위원들이 일일이 꼼꼼히 손으로 적은것이다. 전체 총 35권, 1만 4천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조선사. 그것은 일본인의 손에의해 일본어로 정리된 조선의 역사다. 내용을 보면 우리역사를 연대순으로 적어 놓았는데 사학관만 나열한 것이 아니다. 방대한 사료를 수집해서 각 사학관마다 연관된 사료를 첨부해 놓았다. 단순한 통사가 아니라 사료집인 것이다.
당시일제는 조선사 편수회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937년에 이르기까지 16년이라는 기간을 필요로 하였고 그동안의 사업비는 무려 100만엔의 거액에 달했다.
일제는 왜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한 것일까?
그 단서를 일본의 정부기록 문서를 보관한 국립공문서관에서 찾았다. 조선사편수회는 일제강점기때 1925년 일왕의 명령으로 조직된 국가기관이다.그 조직의 구성원들은 일본내각에서 직접 임명했다. 관리는 조선 총독이 하게했다.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지 통치기관인 조선 총독부의 직속 기관인 것이다.
[나카미 다츠오 교수]
조선사 편수회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설립한 기관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다면 이와는 전혀다른 방침을 가지고 임할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를 식민지 지배자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조선사편수회 입니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 총독부 역대 총독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식민지 지배자의 시각으로 조선의 역사를 정리한 조선사 편수회! 사업은 본 조선사편수회 총독부의 역대 수뇌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일인데 이사업의 완성으로 조선의 정치, 문화, 사회,역사등 여러 모습들이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
그것은 식민 통치를위한 기초 사업이였던 것이다.
데라우치:조선인에게 일본혼을 심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조선인의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일이므로 영구적이며 근본적인 사업이 필요하다,이것이 곧 조선인의 심리연구이며 역사연구이다.
[조선사편수회] 구성원
학자들만 참여한것이 아니다.총독부의 대거관료들도 대거 참여했다.
조선사 편찬에 조선사 총독부가 깊이 관여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우리역사의 씻지 못할 죄를 지은자들
[마구치 현립대학]
조선사 편수는 철저한 사전 준비와 치밀한 계산이였다.
[데라우치 문고 관계자]94년경에 한국에서 방문했습니다. 경남대학교에서 와서 기증받고자 하는 자료를 선정하여 해당 자료를 기증했습니다.
데라우치가 가져간 귀중한 우리 문헌을 경남대학에 다시 돌려주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10%도 안된다. 데라우치는 조선의 총독으로 부임해 오자마자 사료를 수집했다. 우리의 귀중한 수많은 고서와 희귀본들이 식민지 통치자인 데라우치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된 것이다.[동국통감,퇴계문집,고려사, 여사제강,국조보감]
일본은 사료들을 수집하기 위해 전국 방방곳곳을 찾아다녔다. 선조때 류성룡 종가도 예외는 아니다.일제는 행정력을 동원해 전국에 흩허져있던 사료들을 모았다.
[류영하,서애 류성룡 14대손] 할아버지 때에 왜놈들이 와서 집에있는 유물하고 서책하고 빌려갔습니다. 조선사편수회라 해서 조선사를 쓰기위해 왜놈들이 아마도 그 전통있는 집에 문서를 가져간걸로 그렇게 알고있습니다.
임진왜란 전후에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국보급 징비록!그때 빌려가 일제는 영인본을 만들고 되돌려줬다.
이렇게 빌려간 사료는 필사하거나 영인본으로 제작됐다.조선사 편수를 위한 사상 유래없는 방대한사료수집!그것은 조선 총독부의 제도적인 밑바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조선사 편수회는 수집조사한 사료를 기초 사료로 쓰기위해 꼼꼼하게 목록으로 정리했다.우리 사료뿐 아니라 일본 만주 중국의 사료까지도 정리되어 있다.35권으로 완성된 조선사,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기울인 결정체다.그것을 탄생시킨 조직체가 바로 조선사 편수회인 것이다.
조선사 편수회의 실무 책임자인 이나바 이와키치,그역시 식민사관 충실한 대변자다. 일제는 만주침략을 발판으로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를 설치하고 이나바는 그곳에서 이른바 만선사관을 개발했다. 그는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떼어내 하나의 역사로 규정하고 거기에 존제했던 역사상의 여러국가를 만주사에 귀속시켰다.한국사 역시 만주사에 합처버렸다.그것이 바로 만선 사관이다. 한국사의 독자성을 철저히 부정한 것이다. 만선사관의 근거한 그의 저서는 일제식민통치 합리화로 도배되어있다. 한국역사는 그 시작부터 중국의 식민지로 출발했으며 한일 병합될 당시엔 씨족국가로 머문 정체된 사회였다는 것이 한국사를 바라본 이나바 이와키치 시각이었다.
[이나바 이와키치] 한국은 한사군 이래로 중국의 식민지 였으며 가족제도 발달 정도로 볼때 씨족국가에 머문 정체된 사회다.
[조광 교수] 일본보다 천년 떨어진 역사를 조선이 가지고 있고 이렇게 낙후한 조선을 일본이 식민지화 해서 근대화시킬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그 논리를 이끌어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조선사 편수회를 주도한 3인방,그들은 일제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 하기위한 한국사 왜곡의 전도자였다.
그들이 만든 결과물인 조선사는 과연 어떠한 내용들이 닮겨있을까.독립기념관의 박걸순 박사의 도움을 얻어 조선사를 분석해보기로 했다.제 1편 첫장을 보면 신라 통일 이전의 내용을 일본 중국사료를 대비해서 수락했다고 설명해 왔다.우리 고대사를 축소하려는 의도인 것이다.결국 우리역사의 출발을 보면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부터 시작한다.한국조선을 비롯한 고구려이전에 역사가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다.이런 한국사 근대 사료로 가장 중시한 것이 일본측 사료다. 그 다음이 중국측 사료다. 한국측 사료는 그 신빙성이 없어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다.거기에는 숨은 의도가 있다.
[박걸순 수석연구원] 단군을 말살 함으로서 한국사의 주체성,독자성,독립성 이런것을 부정하는 대신에 어떠한 그 중국세력으로 부터의 한국역사가 출발 했다던가 또는 고대국가 시절에 일본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 일제는 상단부의 헐어 철도공사의 기초로 사용했다.일제의 철도 사업으로 인해 신라고분도 순환을 겪어야 했다.다른 고분과 달리 우뚝솓은 거대한 동굴이 사라지고 평평하게 터만 남은 고분이 있다.사라진 고분대신 서봉충이라는 비석이 대신 세워져있다.1926년에 발굴된 서봉총은 일제 최대 발굴이었다.무덤속에서 화려한 신라 금관이 출토 되었다.금제 유물도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뿐만 아니라 당시 성봉총 발굴은 국제적인 것이었다.일본을 방문중인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인 구스타프에게 일제는 성봉총을 발굴할수 있는 기회를 준다.
고분은 무더기로 파헤쳐저 철도공사에 쓰였다.발굴 보고서 한장없이 서봉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일제는 발굴의 궁극적인 목적을 조선사 왜곡에 두고 있었다.그 대표적인 것이 구석기 유적 발굴이다.1933년 일제는 함경북도 동관진에서 구석기 유적 발굴을 했다.
당시 우리의 선사시대를 금속 변형기라고 강변 왜곡하고 있었던 일제는 동관진의 구석기를 인정할수 없었다.결국 발굴과 연구자체를 금지 시켰다.
[조유전 관장]일단 조사를 해서 이것이 그러한 구석기 시대유물일 가능성이 많다고 얘길 한거죠.그러니깐 이게 조선총독부가 그것이 무슨소리냐 여기에 어떡해 그런 구석기가 존재할수 있느냐 그러니 덥어라 한것이죠.
식민사관을 뒤받침 하기위해 이루어진 고적조사,그로인해 우리 유물과 유적의 대한 약탈과 도굴이 합법적으로 자행됐다.전 국토가 일제의 도굴장이 였다.
[조유전 관장]일제시대의 발굴이라는 것은 오늘날 발굴과 다르죠.100%도굴이고,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 국토가 도굴로 유린된거죠.그래서 유물이 다 일본이나 외국으로 나가있는거죠.
일본 교토대학의 박물관 이곳에는 상당량의 보불급 우리문화제가 소장되어있다.조선사 핵심인물이 기증한 것이다.
조선사편수회의 구성원들,그들은 우리 역사를 왜곡시키고 귀한 문화재까지 반출해간 주역들이다.
이 외에도 평양 기생을 발굴한 유물을 두르게 하고,접대를 시키는가하면 백제왕도 부여를 지도를 그려 관광코스로 하는가하면 백제 청마산성을 득이신성이라고 홍보했다.낙화암도 자기멋대로 해석하는가하면 고란사도 왜곡했으며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해 조직한 단체 부여고적 보존회,그들이 수행해야할 임무가 기록되어 있다.내선일체 연원을 밝히는 일이다.왜곡된 역사를 성공화하는 일제! 그 마지막 사업은 신궁 건설이였다.
첫댓글 여기서도 역사가 많이 훼손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