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滴天髓闡微
袁序(袁樹珊 序文)
袁序
壬申孟冬. 句章蘅園主人. 偕其哲嗣簠齋. 及老友陳君莘莊. 林君茹香. 因事來鎭. 乃蒙謬採虛聲. 引爲知命. 召余讌飮於李氏挹江樓上. 一見傾心. 知爲豪傑之士. 余贈詩有句云. 相逢邂逅渾如舊. 閑話陰陽共樂天. 簠齋工詩能文. 其酬詩有云. 媿我十年初學易. 心欣康節樂追陪. 虛懷若谷. 令人心折.
임신맹동. 구장형원주인. 해기철사보재. 급노우진군신장. 임군여향. 인사래진. 내몽류채허성. 인위지명. 소여연음어이씨읍강루상. 일견경심. 지위호걸지사. 여증시유구운. 상봉해후혼여구. 한화음양공락천. 보재공시능문. 기수시유운. 괴아십년초학역. 심흔강절락추배. 허회약곡. 영인심절.
원수산(袁樹珊)의 서문(序文)
壬申년 음력 10월에 구장(句章) 형원(蘅園) 주인(主人)이 그의 현명(賢明)한 아들 보재(簠齋) 및 오랜 친구(親舊)인 진신장(陳莘莊)군, 임여향(林茹香)군과 함께 일이 있어 변방(邊方)에 왔다가, 이에 덮어씌워 잘못된 헛소문을 캐어 듣고는 命을 알고자 하여 나를 불러 이씨(李氏)의 읍강루(挹江樓) 위에서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한 번 만나보고는 마음이 기울었고 호걸지사(豪傑之士)임을 알았다. 내가 구(句)가 있는 시(詩)를 읊어 바치니, 서로 만나 해후(邂逅)하며 어울린 친구(親舊) 같았다. 음양(陰陽)에 관한 대화(對話)를 한가로이 하며 함께 자연(自然)을 즐겼는데, 보재(簠齋)는 시(時)를 잘 짓고 문장(文章)에 능(能)한지라 그가 시(時)를 지어 갚으며 말했다.
“제가 역(易)을 10년이나 공부해도 초학(初學)이라 부끄러우며, 마음은 소강절(邵康節)을 좋아하여 즐거이 좇고 따랐지만, 허망(虛妄)한 마음은 골짜기와 같고 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좌절(挫折)하게 되었습니다.”
翌日. 孫君偶以精鈔本. 任鐵樵先生增註之滴天髓闡微見示. 余披閱至再. 知其以古本滴天髓正文爲綱. 古註爲目. 古註外. 復增新註. 闡發要旨. 並於逐條. 排列命造. 以資佐證. 學宗陳沈. 筆有鑪錘. 理必求精. 語無泛設. 誠命學中罕見之孤本也.
익일. 손군우이정초본. 임철초선생증주지적천수천미견시. 여피열지재. 지기이고본적천수정문위강. 고주위목. 고주외. 부증신주. 천발요지. 병어축조. 배열명조. 이자좌증. 학종진심. 필유로추. 이필구정. 어무범설. 성명학중한견지고본야.
다음날, 손군(孫君, 형원 주인)이 뜻하지 않게 임철초(任鐵樵) 선생(先生)이 증주(增註)한 적천수천미(滴天髓闡微) 정초본(精鈔本)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내가 여러 번 읽어보니, 그것이 고본(古本) 적천수(滴天髓)의 정문(正文)을 벼리로 삼았음을 알 수 있었다. 고주(古註)가 조목(條目)이 되고, 고주(古註) 외(外)에 신주(新註)를 다시 더하여 요지(要旨)를 밝히고 발전(發展)시켰으며 아울러 조목(條目)을 좇아 명조(命造)를 배열(配列)하여 증거(證據)를 돕기 위한 바탕으로 삼았다. 학리(學理)는 진심(陳素庵과 沈孝瞻)을 근본(根本)으로 삼았고, 필치(筆致)는 화로(火爐)와 저울추 같았으며 논리(論理)는 반드시 정교(精巧)함을 추구(追求)하였고, 어구(語句)에 범설(泛設, 물에 띄워놓은 것 같이 진열함)함이 없었으니 진실(眞實)로 명학서(命學書) 중 드물게 보는 고본(孤本, 외본)이었다.
乃觀觀復居士原跋. 乃知此書爲海甯陳氏藏本. 並謂安得有心人. 壽諸梨棗. 以廣流傳. 余遂起謂主人曰. 嘗聞張文襄公云. 立名不朽. 莫如刊布古書. 其書終古不廢則刻書之人. 終古不泯. 且刻書者. 傳先哲之精蘊. 啓後學之顓蒙. 亦利濟之先務. 積善之雅談. 君其留意及之. 語未竟. 主人躍然曰. 此書. 論命有道. 寫作俱佳. 余早 有影印出版. 公諸同好之心. 簠齋又曰. 家大人謨印此書. 籌之熟矣. 陳君林君復謂余曰. 吾等力任校讎. 乞先生以言弁其首. 可乎. 余領之.
내관관복거사원발. 내지차서위해녕진씨장본. 병위안득유심인. 수제이조. 이광류전. 여수기위주인왈. 상문장문양공운. 입명불후. 막여간포고서. 기서종고불폐즉각서지인. 종고불민. 차각서자. 전선철지정온. 계후학지전몽. 역리제지선무. 적선지아담. 군기류의급지. 어미경. 주인약연왈. 차서. 논명유도. 사작구가. 여조 유영인출판. 공제동호지심. 보재우왈. 가대인모인차서. 주지숙의. 진군임군부위여왈. 오등력임교수. 걸선생이언변기수. 가호. 여령지.
그리고 관복거사(觀復居士)가 쓴 원래(原來)의 발문(跋文, 後記)을 보고, 이 책은 해녕(海甯) 진씨(陳氏)의 소장본(所藏本)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아울러,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얻어가니 그 수효(數爻)가 배와 대추처럼 많아서 널리 퍼져 전해지게 되었다고 일러 놓았다. 내가 드디어 일어나 주인(主人)에게 일러 말하길,
“일찍이 들어본 장문양(張文襄) 공(公)의 말씀에 의하면, ‘이름을 세워 썩지 않게 하는 것은 고서(古書)를 간행(刊行)하여 펴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그 책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게 되면 그 책을 새긴 사람도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또한 책을 새길 때는 선철(先哲, 도리나 사리에 밝은 선현)의 정온(精蘊, 精髓를 간직한 것)을 전하여 후학(後學)의 어리석고 몽매(蒙昧)함을 열어 주며 또한 이롭게 구제(救濟)해주는 것이 먼저 힘쓸 일이다.’라고 했으니, 이는 적선(積善)의 올바른 말씀인데, 군(君)은 그것을 유의(留意)하십시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인(主人)이 펄쩍 뛰며 말하기를,
“이 책은, 명(命)을 논(論)함에 도(道)가 있고 베낀 것이 잘 되어 있어 제가 일찍이 복제(複製) 출판(出版)하여 여러 동호인(同好人)들과 함께 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보재(簠齋)가 또 말하기를,
“부친(父親)이 이 책을 인쇄(印刷)하려고 산(算)가지 만큼이나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진군과 임군이 나에게 다시 말하기를,
“우리들은 힘써 바로잡는 것(校訂)을 맡겠습니다. 부탁드리니 선생께서는 머리말을 써주십시오”
“좋다.”
하며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今歲初夏. 簠齋果以是書影印本四卷. 郵寄至鎭. 並函索序言. 以踐前約. 余迴環盥誦. 至卷二第四拾五葉. 載有鐵樵先生命造. 爲癸巳. 戊午. 丙午. 壬辰. 始知先生乃乾隆卄八年四月十八日辰時生. 觀其敍述本命有曰. 上不能繼父志. 以成名. 下不能守田園. 而務本. 始知先生之先德. 必爲名宦. 先生之家産. 必爲中人. 又曰. 至卯運. 壬水絶地. 陽刃逢生. 變生骨肉. 家産蕩然. 又曰. 先嚴逝後. 潛心命學. 計爲餬口. 始知先生學命之年. 已逾三旬矣. 又曰. 予賦性古拙. 無諂態. 多傲骨. 交游往來. 落落寡合. 所凜凜者. 吾祖若父. 忠厚之訓. 不敢失墜. 吾於是知先生之人格. 必爲亮節高風. 安貧樂道也.
금세초하. 보재과이시서영인본사권. 우기지진. 병함색서언. 이천전약. 여회환관송. 지권이제사십오엽. 재유철초선생명조. 위계사. 무오. 병오. 임진. 시지선생내건륭입팔년사월십팔일진시생. 관기서술본명유왈. 상불능계부지. 이성명. 하불능수전원. 이무본. 시지선생지선덕. 필위명환. 선생지가산. 필위중인. 우왈. 지묘운. 임수절지. 양인봉생. 변생골육. 가산탕연. 우왈. 선엄서후. 잠심명학. 계위호구. 시지선생학명지년. 이유삼순의. 우왈. 여부성고졸. 무첨태. 다오골. 교유왕래. 낙락과합. 소름름자. 오조약부. 충후지훈. 불감실추. 오어시지선생지인격. 필위량절고풍. 안빈낙도야.
금년 초여름, 보재(簠齋)가 과연 이 책 영인본(影印本) 네 권을 서언(序言)을 부탁(付託)하는 편지(便紙)와 함께 우편(郵便)으로 변방(邊方)까지 보내왔다. 이전의 약속(約束)을 실천(實踐)하기 위해 나는 손을 씻고 돌아와 읽어보았다. 2권 제 45쪽에 이르자 철초(鐵樵) 선생의 명조(命造)가 癸巳, 戊午, 丙午, 壬辰으로 실려 있었다. 비로소 선생이 건륭(乾隆) 28년 4월 18일 진시생(辰時生)임을 알게 되었다. 본명(本命)을 서술(敍述)한 것을 보니 이런 말이 있었다.
“위로는 부친(父親)의 뜻을 이어 이름을 이루지 못하였고, 아래로는 전원(田園)을 지켜 본분(本分)에 힘쓰지 못하였다.”
선생의 선덕(先德, 先祖)은 필시 명환(名宦, 이름 있는 벼슬)이었거나, 선생의 집안 재산(財産)은 필시 중간(中間) 정도였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또 말하기를,
“묘운(卯運)에 이르러, 임수(壬水)가 절지(絶地)가 되고 양인(羊刃)이 생(生)을 만나니 골육(骨肉)의 변화(變化)가 생기고 가산(家産)이 탕진(蕩盡)되었다.”
또 말하기를,
“먼저 엄친(嚴親, 父親)이 돌아가신 뒤에 호구(糊口)를 위한 계책(計策)으로 명학(命學)에 잠심(潛心)하였다.”
라고 기록한 것을 보고 비로소 선생이 명학(命學)을 하신 연도(年度)가 이미 삼십 년을 넘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 말하기를,
“내 타고난 성품(性品)이 고루(固陋)하고 졸렬(拙劣)하며 아첨(阿諂)할 줄을 모르는 태도(態度)에 아주 오만(傲慢)하고 곧으니, 사귀고 왕래(往來)하는 만남이 점점 줄어들었다. 늠름(凜凜)하였던 바는 나의 조부(祖父) 및 부친(父親)의 충후지훈(忠厚之訓, 나라에 충성하고 후덕하라는 가르침)을 감히 실추(失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서 선생의 인격(人格)이 필시 마음이 밝고 절도(節度)가 있으며 고풍(高風)스러워 안빈낙도(安貧樂道)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再證以卷三第十二葉. 某君癸巳命. 有曰. 余造年月日皆同. 換一壬辰時. 弱殺不能相制. 亦有六弟. 得力者. 早亡. 其餘. 皆不肖. 以致受累破家. 吾於是知先生之友于兄弟. 困若不辭也. 再證以卷二第七十四葉. 某餼生壬子命. 有云. 丁巳運. 連遭回祿. 査該生之命. 五拾六歲. 始行丁運. 適在道光二十七年. 歲次丁未. 可以知先生壽已七十有五. 猶垂簾賣卜. 勤勤懇懇. 爲人推命也.
재증이권삼제십이엽. 모군계사명. 유왈. 여조년월일개동. 환일임진시. 약살불능상제. 역유육제. 득력자. 조망. 기여. 개불초. 이치수루파가. 오어시지선생지우우형제. 곤약불사야. 재증이권이제칠십사엽. 모희생임자명. 유운. 정사운. 연조회록. 사해생지명. 오십륙세. 시행정운. 적재도광이십칠년. 세차정미. 가이지선생수이칠십유오. 유수염매복. 근근간간. 위인추명야.
다시 증거(證據)하여 3권 제 12쪽에 계사생(癸巳生) 모군(某君)의 명(命)에 대한 말이 있었다.
“내 명조(命造)와 연월일(年月日)이 모두 같은데, 임진시(壬辰時) 하나만 다르다. 약한 살(殺)이 서로 제어(制御)할 능력(能力)이 없으니, 역시 여섯 아우가 있었으나 힘있는 자는 일찍 죽고 나머지는 모두가 불초(不肖)하여서 누차 파가(破家)함에 이르렀다.”
나는 여기서 선생의 벗인 형제(兄弟)가 말할 수 없을 만큼 곤고(困苦)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2권 제 74쪽에 다시 증거(證據)하기 위해 임자생(壬子生) 쌀집을 하는 모씨(某氏)의 명(命)에 대한 말이 있다.
“丁巳운에 계속하여 회록(回祿, 火災)을 당하였는데, 그 살았던 명(命)을 조사해 보니 56세에 비로소 丁運으로 행하여 마침 도광(道光) 27년 세차(歲次) 정미(丁未)에 와 있었다.”
이로써 선생의 나이가 이미 75세나 되었는데도 오히려 발을 드리우고 점(占)을 치며 부지런히 정성을 다하여 남을 위해 추명(推命)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觀復居士原跋, 爲陳君言, 任先生, 何時人. 吾生也晩, 不及知. 此殆未觀全書, 而不諳命學之故. 至任先生里居, 原書未載. 不敢臆斷, 然觀其書中增註. 大都採自命理約言子平眞詮約言, 爲海甯陳相國素庵著. 眞詮, 爲山陰沈進士孝瞻著. 二公, 皆浙人也. 其書世無刊本間有私家傳鈔. 亦必浙人爲多且陳相國, 謝世於康熙五年沈進士, 通籍於乾隆四年. 以先生乾隆三十八年誕生計之. 其相距, 遠亦不過甫有百年. 近僅數十年耳由是觀之. 先生殆亦爲浙人乎.
관복거사원발, 위진군언, 임선생, 하시인. 오생야만, 불급지. 차태미관전서, 이불암명학지고. 지임선생리거, 원서미재. 불감억단, 연관기서중증주. 대도채자명리약언자평진전약언, 위해녕진상국소암저. 진전, 위산음심진사효첨저. 이공, 개절인야. 기서세무간본간유사가전초. 역필절인위다차진상국, 사세어강희오년심진사, 통적어건륭사년. 이선생건륭삼십팔연탄생계지. 기상거, 원역불과보유백년. 근근수십년이유시관지. 선생태역위절인호.
관복거사(觀復居士)의 원래 발문(跋文)에서 진(陳)군에게 말한 것을 보면,
“임선생(任先生)이 어느 때 사람인지 내가 늦게 태어났으므로 알지 못한다.”
이것은 거의 책을 다 안 보고 명학(命學)을 외지 않은 까닭이다. 임 선생이 살던 마을도 원서(原書)에 실리지 않아서 감히 억측(臆測)하여 단정(斷定)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책 속의 증주(增註)를 보면, 대부분 명리약언(命理約言)과 자평진전(子平眞詮)에서 채록(採錄)하였는데, 명리약언(命理約言)은 해녕(海甯) 진(陳) 상국(相國) 소암(素庵) 저(著)이고 자평진전(眞詮)은 산음(山陰) 심(沈) 진사(進士) 효첨(孝瞻)의 저(著)로, 두 사람은 모두 절강성(浙江省) 사람이었다. 그 책은 세상에 간행본(刊行本)은 없고 사가(私家)들 사이로 베낀 것만 전해졌는데, 역시 꼭 절강성(浙江省) 사람들이 가장 많다. 그리고 진상국(陳相國)은 강희(康熙) 5년에 세상을 떠났고, 심진사(沈進士, 심효첨)는 호적(戶籍)에 의하면 건륭(乾隆) 4년에 돌아가셨으니, 임철초(任鐵樵) 선생이 건륭(乾隆) 38년에 탄생(誕生)하였음을 계산(計算)해 보면 그 서로 떨어짐이 멀어도 역시 100년을 크게 넘지 않고 가깝게는 겨우 수십 년일 뿐이다. 이로써 보건대, 임선생(任先生) 역시 거의 절강성(浙江省) 사람이 아니겠는가?
約言, 眞詮學說. 余素所服膺曩著命理探原. 採錄不少. 然以鐵樵先生之闡微較之. 又有泰山培塿之判矣. 蓋先生硏精覃思. 匪伊朝夕. 故能綜貫本末. 發爲文章. 其論五行生剋衰旺顚倒之理. 固極玄妙. 而尤以旺者宜剋. 旺極宜洩. 弱者宜生. 弱極宜剋二條. 最爲精湛. 至云, 人有厚薄. 山川不同. 命有貴賤. 世德懸殊. 此又以天命而合地利. 人事言也.
약언, 진전학설. 여소소복응낭저명리탐원. 채록불소. 연이철초선생지천미교지. 우유태산배루지판의. 개선생연정담사. 비이조석. 고능종관본말. 발위문장. 기론오행생극쇠왕전도지리. 고극현묘. 이우이왕자의극. 왕극의설. 약자의생. 약극의극이조. 최위정담. 지운, 인유후박. 산천부동. 명유귀천. 세덕현수. 차우이천명이합지리. 인사언야.
명리약언(命理約言)과 자평진전(子平眞詮) 학설은 내가(袁樹珊) 본디 마음에 생각하고 있던 바를 지난번에 지은 명리탐원(命理探原)에 채록(採錄)한 것이 적지 않다. 그러나 임철초(任鐵樵) 선생의 적천수천미(滴天髓闡微)와 그것을 비교해 보면 또한 태산(泰山)과 작은 언덕 같은 판가름이 있다. 대체로 선생이 연구(硏究)하고 깊이 생각한 것이 오직 아침저녁만이 아니었으니 능히 처음과 끝이 잉아를 꿰듯 문장(文章)을 발휘(發揮)하였다. 그 오행(五行) 생극(生剋) 쇠왕(衰旺) 전도(顚倒)의 이치(理致)를 논(論)한 것이 진실(眞實)로 극히 현묘(玄妙)하였으며 더욱이, ‘왕(旺)한 것은 극(剋)해야 옳고 극왕(極旺)하면 설(洩)하는 것이 마땅하며, 약(弱)한 것은 생(生)해야 옳고 극약(極弱)하면 극(剋)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이 두 조(條)는 가장 정교(精巧)하고 이치(理致)가 깊다. 지극(至極)한 말씀은,
“사람에게 복(福)의 후박(厚薄)함이 있는 것은 산천(山川)의 같지 않음 때문이요, 명(命)에 귀천(貴賤)이 있음은 세덕(世德, 조상 대대로 쌓아 온 덕)의 현격(懸隔)한 차이(差異) 때문이다. 이에 또 천명(天命)과 지리(地利)를 합(合)함으로써 인사(人事)라고 말한다.”
고 하였다.
故其爲人論命. 嘗曰, 某造純粹中和. 太平宰相. 某造仕路淸高. 才華卓越. 某造經營獲利. 勤儉成功. 某造背井離鄕. 潤身富屋. 模造貪婪無厭. 性情乖張. 某造 揮金如土. 破家亡身. 某造不事生産. 必有後災. 某造出身貧寒. 爲人賢淑. 某造靑年守節. 敎子成名. 某造愛富嫌貧. 背夫棄子. 某造若不急流勇退. 能無意外風波. 某造蒲柳望秋而彫. 松柏經霜彌茂. 袞褒斧貶. 莫不各具苦心. 大義微言. 要皆有關世道. 古之君子, 所謂旣沒而言立者. 其在斯人乎. 讀者若徒以命學觀之. 擧一遺二. 見寸昧尺. 其亦有負, 衡園喬梓影印流傳之盛意也已.
民國二十二年歲次癸酉夏五月庚寅朔越二十有一日庚戌鎭江袁樹珊撰.
고기위인론명. 상왈, 모조순수중화. 태평재상. 모조사로청고. 재화탁월. 모조경영획리. 근검성공. 모조배정리향. 윤신부옥. 모조탐람무염. 성정괴장. 모조 휘금여토. 파가망신. 모조불사생산. 필유후재. 모조출신빈한. 위인현숙. 모조청년수절. 교자성명. 모조애부혐빈. 배부기자. 모조약불급류용퇴. 능무의외풍파. 모조포류망추이조. 송백경상미무. 곤포부폄. 막불각구고심. 대의미언. 요개유관세도. 고지군자, 소위기몰이언립자. 기재사인호. 독자약도이명학관지. 거일유이. 견촌매척. 기역유부, 형원교재영인유전지성의야이.
민국이십이년세차계유하오월경인삭월이십유일일경술진강원수산찬
그러므로 그가 남을 위해 명(命)을 논(論)할 때 일찍이 말하길,
“모조(某造)는 순수(純粹) 중화(中和)하여서 태평(太平) 세상(世上)에 재상(宰相)이 되었다. 모조(某造)는 벼슬길이 청고(淸高)하고 재주가 화려(華麗)하고 탁월(卓越)하였다. 모조(某造)는 경영(經營)하여 이득(利得)을 얻고 근검(勤儉)하여 성공(成功)하였다. 모조(某造)는 우물을 등지고 고향을 떠나 몸이 윤택(潤澤)하고 부자가 되었다. 모조(某造)는 탐욕(貪慾)이 심하고 염치(廉恥)가 없어 성정(性情)이 크게 어그러졌다. 모조(某造)는 금전(金錢) 쓰기를 흙과 같이 하여 파가망신(破家亡身)하였다. 모조(某造)는 생산(生産)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반드시 후(後)에 재앙(災殃)이 있었다. 모조(某造)는 출신(出身)은 빈한(貧寒)하였으나 사람됨이 현숙(賢淑)하였다. 모조(某造)는 젊은 나이에 수절(守節)하고 자식(子息)을 가르쳐 이름을 이루게 했다. 모조(某造)는 부(富)를 좋아하고 가난함을 싫어하여 남편을 등지고 자식을 버렸다. 모조(某造)는 급류(急流)에도 용감하게 물러서지 않은 것처럼 의외(意外)의 풍파(風波)를 능히 없앴다. 모조(某造)는 부들과 버드나무가 가을을 그리며 시들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리를 견디어 더욱 무성하니, 곤룡포로 칭찬 받고 도끼로 나무람을 받듯 좋고 나빴다.”
각 명조(命造)마다 고심(苦心)하지 않음이 없었다. 대의(大義)는 희미하게 말하였으나 요지(要旨)는 모두 세상의 도리(道理)에 통(通)함이 있었다. 옛날에, 군자(君子)는 이른 바 몸은 이미 죽어도 말은 남는다고 한 것이 아마 이 사람에게 해당될 것이다. 독자(讀者)가 만약 이 책을 다만 명학서(命學書)로만 본다면 하나는 얻으나 둘은 놓칠 것이며, 짧은 것은 볼 수 있으나 긴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다. 그 또한 負擔이 있으나 형원(蘅園)이 키 큰 판목(版木)으로 인쇄(印刷)하고 세상에 널리 전하려 담은 뜻이 있을 따름이다.
중화민국(中華民國) 22년 세차(歲次) 계유(癸酉)년 여름 5월의 초하루 경인일(庚寅日)로부터 스무 하루가 지난 경술일(庚戌日)에 진강(鎭江) 원수산(袁樹珊)이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