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사진은 실제가 아니고 필자의 고향과 비슷하여 옮긴 사진)
1).고향
필자는 1942년 7월 8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대산동에서 출생했다.
정주는 백두산을 기원으로 강남 산맥이 압록강을 옆에 끼고 황해 바다를 향해 흐르다가
대해를 바라보고 멈춘 곳이다.
평양으로부터 북쪽의 신의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다. 고려시대에 이 곳의 사람들은
몽골의 침공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그 공적으로 1231년에 정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정주 목이었고, 19세기 초에는 조선 후기 최초의 대규모 반란 사건인
홍경래의 난이 정주성에서 종결되었다.
정주군은1996년 평안북도 내 3개 시 가운데 가장 늦게 시로 승격되었다.
주요 특산물로는 알곡 특히 벼 생산이 높은 지역이며, 도내에서 과일생산이 제일 많은 지역이다.
정주지방의 왕밤은
예로부터 유명한데 알이 크고 수확이 높은 늦 품종으로 한 알이 17~20g정도이다..
명소로는 조선 말기
중앙조정의 서북인 차별을 성토하며 난을 일으킨 홍경래의 마지막 결전장소로
알려진 정주읍 성이 있다.
1907년 - 오산학교가 설립되었다
2).가족
좌측으로 부터 형수님의 남동생의 부인.필자의 아내. 큰 조카 며느리 그 다음이 형수님 중앙 김창주 목사 우측 앞이 어머니. 우측 큰 누님(우측 큰 매부. 최지영장로)어머니 뒤는 형수님 남 동생. 누님 뒤는 사촌 형. 형님 뒤는 작은 누님.어머니 우측이 큰 누님. 우측 큰 매부(오석희 목사), 그 뒤 남자 두분은 형수님의 남 동생. 사촌 형.맨 앞줄 우측 끝의 두 어린이는 필자의 두 아들
중앙에서 뒤를 돌아보는 분이 아버지다.
아버지 사진은 이것 한장 밖에 없다(월남 당시 짐꾼 6명에게 전재산을 운반시켰는데
밤 중에 짐을 몽땅 가지고 도망갔다.그래서 빈털털이로 월남했고 고향에서 찍은 사잔이 하나도 없다.
이 사진은 어느 친척 분이 주신 것이다)
아버지
金允昇 씨와 어머니 朴禮建 씨의 5남 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님
두분 누님 두 분이 계신다.
아버지는
오산학교를 나오시고 중국에 유학 가서 임학을 전공하시고 교육계에
투신하였으나
후에 증조부의 농토를 물려받아 농사를 지으셨고
한 때는
고읍이라는 곳에서 백화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어머님은
무학으로 곽산 출신으로 김씨 집에 시집오셨다.
어머님은
농사밖에 모르시는 분이셨으며.
하도
부지런해서 김씨 집에서는 복덩이라고 불리셨다고 한다.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이셔서 교회에 다니시며 한글을 깨우치셨다.
후일에
권사 직분을 맡기도 하셨다.
그래서
필자는 자연적으로 모태 신앙이 되었다.
어머니는 40세에 필자를 낳으셨고 맡 형(김창주 목사)과 20년 차이가 난다.
.그래서 대광학교 시절엔 아버지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누님들과
형님들하고 교회 다니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집 뒤쪽에는
밤 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고
가을에는
밤을 가마니에 넣어 두고 밤송이를 까먹던 기억이 난다.
집 앞에는
넓은 논이 있어서 겨울엔 여기에서 썰매를 타던 기억도 난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버지가 술집에서 기생들과 술 파티를 하는 현장에 달려가셔서
술상을
뒤엎기도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산학교 재학시절엔 야구와 축구에 일류 급 선수였다고 한다(정주 덕언지 p 279).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아서인지 본인은 여러 가지 운동을 좋아했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중학교(대구 피난시절 중
2학년을 마치고 대광 중 3으로 편입)
시절엔 럭비, 야구, 핸드볼, 배구, 싸이클 등을 했다.
장남인
김창주목사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가서
상과를
졸업하시고 귀국하여 영어교사로 교육계에서 일하셨다.
형님은
월남하여 미군 부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셨고
후에
신학을 하시고 목사가 되어 부산신학교에서 히브리어 교수로 봉사하는 중
대광학교에서
교목으로 청빙하여 대광학교에서 20년 근속하시고
은퇴하셨다.
은퇴
후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던 장남의 초청으로 이민 와서 목회를 하였고
9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형수님은
이북 서문여고(북에서는 서울 경기여고라고 불렀다고 함)
출신으로 두뇌가 명석하였고 목사 사모로서 역할을 잘하셨다.
큰 누님은
순교자의 가정으로 시집을 갔고 미국에서 두 내외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3년 연상인 작은 형은 영암교회 안수집사로 형수는 권사로 봉사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작은
누님은 목사(오석희)와 결혼하여
사모로서 일생을 바쳤다.
지금
대전 근처의 요양원에서 노후를 지내고 있다.
필자는 2남
1년의 자녀를 두었고 장남은 1남 2녀,
차남은 남매를 두고 있으며.
장남은 JC PENY란 백화점 안에서 요쿠르트 가계를 운영하고 있고 1남 2녀를 두고 작은 아들은 LG의 중견 사원이며 남매를 두었다.
딸은 1남
4녀를 두었고 남편과 함께 보험회사를 운영하며 필자 집에서 약 1시간 30분 걸리는 얼바인에서 살고 있다. 손주들이 모두 10 명이다.
두 아들은 필자가 살고 있는 샌디에고서 살고 있으며 큰 아들은 차로 10 분 거리 작은 아들은 5분 거리에 살고 있다.
수시로 손주들 학교 긑난 후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여 바쁘게 지내고 있다.
둘 때 아들의 고등학교 2학년 짜리는
축구 선수가 되어 매주 금요일 축구 경기를 하는데 난 매번 응원을 간다. 경기가 끝나면 5 불을 주고 골을 넣으면 10불을 준다. 그의 여동생은
응원을 가면 5불 씩 준다.
필자는 4살 때 고향의 시냇가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오른 쪽 귀에 물이 들어간 것을 모르고 지내다가
가끔 고름이 나와서 닦아 내곤 했다.
월남과 6.25를 거치면서 치료를 제대로 못하여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오른
쪽 귀를 전혀 듣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은
보청기를 사용하여 별로 불편함 없이 생활하고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고향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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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회고록) 내 평생에 가는 길(1) 길 위의 인생
(회고록) 내 평생에 가는 길(2) 인생은 나그네와 순례자
(회고록) 내 평생에 가는 길(3) 고향과 가족
(회고록) 내 평생에 가는 길(4) 월남
(회고록) 내 평생에 가는 길(5) 6.25
첫댓글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에 남는구나.
작은 형은 안보이고?
내가 형이네, 나는 네가 나보다 형뻘 되는줄 알았는데,
하는 행동이 그렇다는 이야기.
2남1녀 아니가?
미국 가서 아들 하나 더 낳았나?
언제 찍은 사진인지 나도 모르고 사진 속에는 기억이 안나는 사람도 있다.
가족 모두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 보았는데 없어 할 수 없이 이 사진을 올렸다.
2남 1년인데 사진 올리는데 신경을 쓰다보니 착각을 했나보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는데는 많은 노략을 했고 힘들었다.
지그도 사진 문제는 쉽게 해결이 안되는 형편이다.
그래서 세상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무슨 쓸데없짓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네 사진은 포맷이 png 사진이 많더라.
이 사진은 안 올려지고 jpg로 바뀌어야 올려진다.
바꾸는 방법도 손자에게 물어봐라.
네 인생은 기록에 남길만 하다.
설교문을 PC로 하길레 잘 하는줄 알있지.
카톡 이외는 PC로 하는것이 좋다.
PC에 사진 저장 하는 방법. 사진 올리는 방법만 알면 간단 한데.
Thank You !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은 거의 모두 부유하고 종교가 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라는 말이 돌아다니는데
맞는 말인거 같다. 재산이 많아 피난길에 6명의 짐꾼에게 재산을 맡길 정도면 갑부였구먼.
놈들이 전 재산을 짊어지고 도망을 쳤다?
놈들에게 탈탈 털리고 알거지로 내려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짐꾼 한 명은 나를 업고 내려 오던 중이었는데 나는 내버려 두고 도망갔기 때문에
나는 오늘 이렇게 건재하다. 그놈에게 감사해야 할지 ?
창기까지 업고 튀었으면, 어찌할번했나? 고마운짐꾼!
용천군 선천읍 이 아닌가요 ?
저의 원적이
'용천군 양하면 입암리 893번지'
라서요 .
태어나기는
선천읍 안국동 이고요 .
용천군 이 사라졌나 ?
용천군수 도 여기 있는데 ?
사진을 조금 조정해서 2/18 사진에 올렸다. 참고바람
고맙다.
이 가족 사진은 우리 집 가보와 같은 것이며
선명한 아버지 사진을 보니 아버지가 그리워지고 보고 싶어진다.
명홍아 !
회고록 3회를 다시 한번 보면 좋겠다.
사진 설명, 우측이 아니고 죄측.
노래는 첫째건 안되고,
두번째는 되는데 시원치 않구나.
노래 삽입은 재고?
이제야 책을 출간 할 때 교정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는구나.
네가 그 역할 잘해주어 고맙다.
혹 후일에 회고록이 발간되면 그때 교정 부탁한다.
책 교정은 출판사 전문가가 있다.
네가 아버님을 닮은것 같구나.
생김도, 운동 신경도.
손주가 10명이라..
제일 부럽군요.
다복한 가정 ! 행복한 가정 !
주님의 크신은혜...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