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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일국 경전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 효 정
(P17~20) 그날, 독립 만세를 외쳤던 한 여인
그날은 절기상 봄으로 접어든 3월의 첫날이었지만, 새벽이면 찬서리가 내릴 정도로 아직 추위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내내 평안도 안주의 하늘은 희미한 안개로 뒤덮였습니다. 옷깃을 서늘하게 파고드는 차가운 봄바람이 일렁일렁 불어올 때 한 여인이 새벽 일찍이 부엌으로 나가 아침밥을 지었습니다. 장작불을 때서 식구들이 먹을 밥을 지어 놓고 찬장 깊숙이에서 무명 헝겁으로 싼 무언가를 조심스레 꺼냈습니다.
부엌 문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한줄기 비쳤습니다.무명 헝겁을 풀자 하얀 천 위에 그려진 파랗고 빨간 동그라미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활짝 펼치니 그 동그라미의 모습이 비로소 완전해졌습니다.
그것은 꿈에서조차 한번도 잊지 못한 태극기였습니다. 슬픈 마음과 함께 벅찬 감정이 몰려왔습니다. 다시 돌돌 말아 무명 헝겁으로 감싼 다음 찬장에 넣었습니다. 남편이 새벽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여인은 딸아이를 안고 함께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부엌과 안방, 토방과 마당을 정결하게 청소했습니다. 정오가 조금 지나자 평온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등에는 여섯살 딸을 업고, 가슴에는 태극기를 품었습니다. 안주 시장까지 가려면 마을 사이로 뻗은 좁고 삐뚤삐뚤한 자갈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 길을 지나자 큰길이 나왔습니다.
어떤 농부는 소를 끌고, 어떤 청년은 지게를 지고, 또 어떤 여인은 보따리를 이고······ 많은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기니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여인은 시장 한가운데 채소 노점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그곳은 시장에서 목이 좋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등에 업은 딸이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돌려 사랑스러운 딸을 그윽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딸에게 그 미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습니다. 그 순간, 함성이 터졌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품에서 태극기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세차게 흔들면서 온 힘을 다해 외쳤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사람들이 일제히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었습니다. 사방에서 '대한 독립 만세' 함성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여인은 그 누구보다 크게 외쳤습니다. 갑작스러운 만세 소리와 태극기 물결에 미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당황했고, 뒷걸음치다 슬며시 사라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한의 사람이라면 누구든 만세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여인은 그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며칠 전부터 밤을 새워가며 떨리는 손길로 어린 딸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호롱불 아래에서 딸에게 우리 민족이 어떠한 민족이며, 왜 독립 만세 운동을 해야 하는지도 들려주었습니다. 딸은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의미를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엄마의 등에서 만세 소리를 들었습니다. 흰옷을 입은 대한의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않고 침략자 일본에 저항하는 순수한 정의를 보았습니다. 그 정의는 순수할 뿐만 아니라 한민족이 길이 간직해야 할 아름다운 비폭력과 평화의 상징이었습니다.
곧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귓전을 때렸습니다. 일본 순사들이 손에 몽둥이와 장총을 들고 시장에 난입했습니다. 무자비하게 휘둘러 대는 몽둥이에 맞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일본 순사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속에는 의기가 충천했으나 피 흘리는 희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평화를 원하셨습니다. 여인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훗날 우주의 어머니 독생녀가 태어나 사랑과 평화의 참다운 어머니가 되어 한반도와 아시아, 세계를 진정한 평화로 넘치게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를 위해 잠시의 굴욕은 참아야 했습니다. 여인의 믿음처럼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 퍼지고 24년 후 이 땅에 하늘 섭리에 따라, 민족을 넘어 인류의 햇불로 독생녀가 태어났습니다.
나의 고향 안주는 본래 애국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며 일찍이 기독교가 전래된 지역입니다. 3 ᆞ1 독립 만세 운동 당시 서울과 더불어 안주에서도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조원모 외할머니의 독립만세 운동은 계속 되었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에 이어 나도 함께 했습니다. 1919년 외할머니가 독립 만세를 외치고 24년 후 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 살이 되던 1945년 8 · 15 광복을 맞았습니다. 이번에는 외할머니가 나를 업고 다시 거리로 나섰습니다.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해방된 기쁨에 겨워 목청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렇게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중심에 하늘은 '우주의 어머니' '평화의 어머니'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기미년 독립 만세 운동에 뛰어 들었던 그 여인, 조원모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되어 절대 믿음을 지닌 홍순애 어머니, 그리고 나에 이르기까지 3대 외동으로 이어진 가문을 선택하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준비해 왔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어진 집안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인류를 찾기 위해 하늘이 특별히 찾아 세운 가문을 통해 하나님의 독생녀인 나는 핍박받는 한반도 땅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 100년, 하늘이 예비하신 평화의 어머니 독생녀의 인류 구원을 향한 섭리의 발자취는 온 지구촌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P21~25) "엄마, 고마워요! 엄마, 잘 부탁해!"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 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천년만년 살고 지고
한편으로는 애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울림과 깨우침을 주는 노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겠다는 구절은 효의 도리를 다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고 천애고아로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하여도 하나님과 본향을 찾아 가야 합니다. 화려한 구중궁궐이 아닌 오막살이 초가삼간일지라도 그리운 부모를 모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해 만물은 태양을 좋아합니다. 태양이 있어야만 생명체가 탄생하고 만물이 번성합니다. 그런데 달은 느낌이 다릅니다. 태양이 화려함이라면 달은 고요함입니다. 집을 떠난 사람은 태양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하기보다는 달빛 아래에서 고향을 떠올리고 부모를 그리워합니다. 나는 남편과 달에 대한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추석이나 정월대보름에는 많은 식구와 함께 달맞이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달을 보며 마냥 상념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일을 끝내고······."
남편은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남편뿐만 아니라 나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이 일을 끝내고 한가해지면 그때 조금 쉴 수 있겠지요."
급한 이 일을 끝내고 나면 조금이라도 쉴 틈이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여유로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00년 전 외할머니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인류를 구원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평생 젊음과 정열을 남김없이 불태웠습니다. 비폭력과 평화를 부르짖는 3 · 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나는 늘 평화를 모든 일의 앞자리에 놓았습니다.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는 마음으로 살면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일구월심 한마음과 한뜻으로 오직 '위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육신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휴식을 한번도 누려 본 적이 없습니다. 밥을 먹거나 잠자는 일도 잊고 지낼 때가 많았지만 몸이 아픈 것도 마치 사치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남편 문선명 총재는 워낙 튼튼한 체질로 태어났기에 건강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좀 더 많은 시간 일할 수 있었으련만, 하늘의 뜻 앞에서는 자신을 조금도 돌보지 않은 탓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건강을 해쳤습니다. 성화(聖和)하기 전 4~5년 동안은 마치 천년을 하루처럼 바쁘게 살았습니다.
특히 외국을 다닐 때 남북보다 동서를 횡단하는 것이 건강에는 더욱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나이를 생각하면 장거리 여행은 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굳이 해외에 나가야 했다면 2~3년에 한 번 정도 외유를 해야 했음에도 성화하기 1년 전 90세를 훌쩍 넘긴 연세에도 여덟차례 넘게 미국을 왕래했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전혀 돌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일했습니다.
교회 식구들은 물론 청년들에게 인내심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을 길러 주기 위해 거친 바다에서 며칠 동안 밤을 새우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훈독회를 할 때면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너무 많아 열 시간을 넘기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다른 급한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하여 급히 거문도와 여수를 다녀오다가 급기야는 감기가 들었습니다.
즉각 병원에 갔어야 했지만 "이 일을 끝내고 가자"며 차일피일 미뤘습니다. 마지못해 병원에 들러 진료를 받았을 때는 이미 건강이 무척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조금 더 계셔야 한다고 만류했지만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병원에서 시간만 보내면 어떡하나!"
오히려 입원을 권유하는 사람들을 나무랐습니다. 어쩔 수 없이 퇴원을 했습니다. 그해 8월 12일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문득 말씀했습니다.
"내가 오늘은 엄마하고 겸상을 하고 싶다."
그 말을 들은 우리 식구들은 참으로 의아했습니다. 항상 내가 옆에 앉아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늦은 아침상을 앞에 두고 남편은 숟가락을 들 생각은 하지 않고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아마 마음속에 아내 얼굴을 새기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남편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고 반찬을 올렸습니다.
"이 나물이 맛있으니 천천히 드세요."
8월 13일은 유독 태양 빛이 강했습니다. 문 총재는 한 키가 넘는 커다란 산소통을 대동하고 따가운 햇빛을 받으며 청평호수와 청심중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천원단지를 두루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정궁으로 돌아와 녹음기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모든 것을 하늘 앞에 돌려드리겠다. 완성, 완결, 완료하셨다."
결국 이 기도는 참아버지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이날 기도 내용은 당신이 지나온 한 생애를 종결짓는 자리에서 타락의 역사를 초월해 인류 본연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고 부모님만 따라오면 천국으로 향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종족을 인도하는 사명으로 나라를 복귀하겠다는 선포였습니다. 알파요 오메가이자 시작과 끝이 모두 함축된 기도이자 말씀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고 내 손을 꼭 잡았습니다.
"엄마, 고마워요! 엄마, 잘 부탁해!"
힘겨워하면서도 "너무 미안하고 정말 고맙다"고 연이어 말씀했습니다. 나는 손을 더욱 굳게 잡으며 다정한 말과 눈빛으로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2012년 9월 3일, 문선명 총재는 93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리고 천성산 기슭 본향원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자주 천성산 위로 떠오르는 달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옥도끼로 찍어 내어 금도끼를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천년만년 살고 지고 ········" 그 소망을 한없이 되뇌어 봅니다.
(P26~28) 산길에서 만난 들꽃의 미소
"비가 몹시 내려서 길이 질척거릴 텐데요, 오늘 하루는 쉬시지요."
권하는 사람은 나의 안위를 먼저 염려합니다. 가을이 되면 폭풍이 몰아치고, 겨울이 되면 함박눈이 쏟아져 쉬어야 할 이유와 핑계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도 나는 새벽이면 집을 나서 산에 올랐습니다. 청평 천성산 자락에는 남편의 묘소가 있습니다.
남편이 성화한 후 나는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고, 남편이 잠든 본향원을 오르내리며 마음속으로 남편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남편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었고, 내 생각이 남편의 생각이 되었습니다.
시묘 정성을 지낸 후 1970년대 남편이 걸었던 미국 5,600킬로미터를 횡단했고, 스위스 알프스산맥의 12개 봉우리에 올라 기도와 명상을 하며 남편과 영적으로 더욱 가까이 교감을 했습니다. 나는 남편과 전 세계 식구들에게 약속했습니다.
"초창기 교회로 돌아가 신령과 진리로서 교회를 부흥시키겠습니다."
언제나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보금자리, 따스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교회가 내 꿈입니다. 그 꿈은 문선명 총재가 꾸었던 꿈이기도 합니다. 남편과 나는 한평생 무수히 많은 일을 겪었고, 나만이 간직한 사연은 그보다 더 많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보다 더 하나님과 인류를 위하여 헌신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날 이후 한시도 쉬어 본 적이 없습니다.
작은 오솔길 양편에는 허리 높이의 휘어진 소나무들이 있고, 그 아래에는 들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습니다. 겨울에는 꽃들이 자취를 감췄다가 봄이 되면 경쟁이라도 하듯 여기저기에서 피어납니다. 나는 오르던 발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들풀들과 꽃들을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보아 주는 사람이 없어도 밝아 오는 아침 햇살을 받아 무척이나 아름답게 자태를 뽐냅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꽃들을 쓰다듬어 주고는 다시 오솔길을 걸어 오릅니다. 발걸음이 힘들기는 해도 내 마음은 들꽃처럼 평화롭습니다.
이윽고 묘소에 당도하면 잔디에 섞여 혹 풀이 돋아나지는 않았는지, 산짐승들이 파헤치지는 않았는지 찬찬히 살핍니다. 묘의 잔디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푸르러지고 있습니다. 묘 앞에 앉아 나 홀로 기도를 올립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들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고, 소나무처럼 굳은 심정을 지니기를 바라고, 묘의 잔디처럼 늘 푸르게 살아가기를 간구합니다.
내려오는 길에 들풀들과 소나무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자연의 친구들아, 내일 또 만나자꾸나."
천천히 내려오는 오솔길은 어제와 똑같은 길이지만 날씨는 매일 변합니다. 햇볕이 따스한 날, 바람이 부는 날, 갑작스레 천둥 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함박눈이 하늘을 회색빛으로 뒤덮은 날·······
그럼에도 나는 문 총재가 성화한 2012년 9월 이래 3년 1095일 동안 한번도 시묘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예례 전통에서 시묘는 돌아가신 부모에게 돌려드리는 효성입니다. 부모의 묘 서쪽에 여막을 짓고 3년을 함께 삽니다. 그 3년은 아들딸이 태어나 부모의 온전한 보살핌과 사랑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간과 같습니다.그러니 시묘는 말하자면 보은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부모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의 친부모에게조차 그럴진대 참부모가 인류의 아픔과 슬픔을 탕감해 주기 위해 눈물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땅에 현현하신 참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희생의 삶을 살아왔는지 알지 못한 채 여전히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청맹과니와 같은 삶을 깨우쳐 주기 위해 아내인 내가 온 인류를 대신해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묘 정성을 드렸습니다.
그 시묘 정성이 끝난 2015년에 나는 세계 인류를 위해 큰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역사 이래 가장 의미 깊은 선학평화상이 오랜 준비 끝에 출범했습니다.
(P29~31)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하늘은 흐릿했습니다. 내일 날씨가 어떨지 궁금했습니다.
"아침에 소나기가 내리겠다고 하네요, 구름도 많고."
어쩌면 그럴 것이다 싶어 빙긋 미소를 지었습니다. 통일교회 행사에는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40년 전 미국 뉴욕의 양키스타디움 대회를 할 때는 돌풍을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잠실에서 36만쌍 국제 합동결혼식과 세계평화여성연합 창립대회를 개최한 날에도 종일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비를 감사의 선물로 받았습니다.
2015년 8월 28일에도 비가 내렸습니다. 마지막 여름비가 촉촉히 내리던 날, 세계 이곳저곳에서 많은 손님이 서울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비는 잠시 멈췄습니다.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하라는 하늘의 배려였습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사람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이유는 '평화'였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그렇게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평화가 시골길의 돌멩이나 산의 나무처럼 흔했다면 인류 역사에 그토록 참혹한 전쟁이나 대립은 한 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평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 때로는 피를 요구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면서도 여간해서는 누리기 어렵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참다운 사랑을 베풀되, 그에 대한 보답을 바라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내가, 우리 부부가 평생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내가 이미 성화하신 남편 문 총재와 인류를 위해 선물로 준비한 것이 '선학평화상'입니다. 첫 번째 시상식이 열리는 날, 비를 맞으며 온 사람들은 마치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어린 아이처럼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람들이 다양하게도 모였네요. 지구상에 인종이 이렇게나 많았던가요?"
"저 옷은 어느 나라 전통의상일까요?"
언어가 다양한 것처럼 이 세상에는 인종도 다양합니다. 그들이 모인 시상식장은 온갖 언어가 뒤섞여 마치 인종과 언어의 박람회장 같았습니다.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과연 한학자가 누구인가 궁금해 고개를 길게 빼고 단상에 앉은 나를 살펴보았습니다. 큰 기대를 갖고 바라보았으나 내가 입은 옷이 자신이 입은 옷보다 더 좋을 것이 없고, 단지 평범한 어머니와 같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눈길에는 인류를 위해 준비한 큰 선물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수년 전 선학평화상을 마련하면서 그 근본 뿌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했습니다.
"평화의 범위를 미래로까지 넓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만나지 못한다 해도 우리 후손들이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한 평화가 무엇인지 열띤 토론과 논란 끝에 그 의미와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단순히 종교와 인종, 나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끝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 중에는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준비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현재의 문제를 풀어 가면서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뜻을 안고 선학평화상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P32~34) '바다'는 보물창고, 첫번째 선학평화상
인류 역사에는 어느 시대에나 큰 아픔이 있습니다. 가장 가슴 아픈 시대는 바로 지난 20세기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져 선량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생명을 잃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은 나는 그 처참함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를 알 수 없는, 미명으로 포장된 전쟁들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잔인한 전쟁과 테러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들도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뿌리 깊은 도덕심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자연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직 오염되지 않은 바다입니다. 지구의 70퍼센트를 덮고 있는 바다는 막대한 자원을 품고 있어 인류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일찍이 나는 바다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으며 활용 방법도 다양하게 제시했습니다.
그 뜻에 따라 선학평화상의 첫 주제를 '바다'로 정하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의로운 일꾼들을 선정했습니다. 인도의 굽타(M. Vijay Gupta) 박사와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키리바시의 아노테 통(Anote Tong)대통령이었습니다.
굽타 박사는 식량 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물고기 양식기술을 개발해 '청색혁명'을 이끈 과학자입니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기술을 널리 보급해 빈곤한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데 큰 힘을 보탰습니다. 아노테 통 대통령은 국제사회에 바다 생태계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글로벌 리더입니다. 안타깝게도 키리바시는 30년 이내에 삶의 터전인 영토 전체가 수몰될 심각하고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해양공원을 만들어 해양생태계 보호에 앞장섰습니다. 두 사람은 일찍이 우리 부부가 기술 평준화를 제창하고, 물고기를 어분(漁粉)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이 식량으로 사용함으로써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식량문제와 함께 환경 문제는 우리 부부가 오랫동안 인류 구원과 평화세계를 위해 추구해 온 과제였습니다. 단순한 이론적 탐구와 운동을 넘어, 반세기 넘게 남미에서 이상세계를 세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습니다.
일찍이 문 총재와 나는 심각한 마음으로 우리나라와 정반대 위치인 파라과이와 브라질 판타날에서 직접 시골 농부와 어부가 되어, 인류의 미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뜨거운 뙤약볕 아래 점심도 거르며 일을 했습니다.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연신 손으로 훔치며 고민했던 순간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난 60년 동안 지구촌 곳곳에서 인류를 위해 많은 일을 했음에도 내 이름을 드러낸 적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것을 다 주고서도 돌아서면 까마득히 잊는 것이 나의 천성입니다. 그것은 내가 참어머니이자 평화의 어머니로서 어렵고 힘든 이웃의 눈물을 닦아 주고, 평생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한을 해원하려 노력해 온 독생녀이기 때문입니다.
(P35~37) 뿌리 뽑힌 채 유랑하는 사람들
"교육자라기보다 우리 옆집 아주머니 같은데 ·······."
검은 히잡을 쓴 사키나 야쿠비(Sakena Yacoobi) 박사를 보고 누군가 말합니다. 그녀는 키가 크지 않고 통통합니다. 얼굴에는 험난한 세월을 겪어 온 주름살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시상식장이 아니라면 중동의 어느 골목에서 마주칠 법한 평범한 중년 여자로만 보입니다.
"그 옆에 남자는 박사가 아니라 꼭 회사 세일즈맨 같아."
키가 큰 지노 스트라다(Gino Strada) 박사 역시 유럽에서 흔히 마주치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로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내면에는 강인한 힘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은 추위가 제법 매섭습니다. 그러다가도 입춘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매서움은 저만치 물러가고 대지를 감싸 안는 따뜻함이 찾아옵니다. 2017년 입춘을 하루 앞둔 2월 3일에 나는 무척 바쁜 하루를 보냈습니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80여 나라에서 온 그들은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종교도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생전 처음 보는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금세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친구도 없고 하루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정다운 고향에서 아무런 죄 없이 쫓겨났기 떄문입니다. 전쟁의 참화를 피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나는 인간다운 삶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 난민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인이 참여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또 의인들을 찾아내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선학평화상 수상자인 이탈리아의 지노 스트라다 박사는 25년 동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생명이 위태로운 난민 800만 명 이상에게 의료 구호를 펼친 인도주의자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사키나 야쿠비 박사는 '아프간 교육에 어머니'로 불리는 교육자입니다.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서 20년 넘게 난민과 실향민들의 재정착을 위해 일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가르쳐, 비록 오늘은 고달프지만 내일은 희망이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또박또박 써서 보낸 편지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선학평화상은 노벨평화상에 비할 정도로 정말 훌륭합니다. (중략) 제 인생은 항상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까지 살아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을 수상함으로써 그간의 제 노력이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한학자 총재님이 저의 노고를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정말 큰 의미입니다. (중략) 한국은 전쟁을 겪었음에도 의지와 지혜를 통해 짧은 기간에 많은 것을 성취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 한국을 롤모델로 삼아 발전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녀는 하루의 삶마저 장담할 수 없는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편안하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고 있을때, 많은 사람이 고향에서 뿌리 뽑힌 채 쫓겨나 유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쫓겨난 고통과 서러움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그 안타까운 비극을 우리 시대에 반드시 끝내야 합니다.
(P38~41) 아프리카의 눈물을 닦아 주는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부탁했을때, 예수님의 첫 응답은 명료했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그 기도를 가르쳐 준 지 벌서 2천 년이 흘렀으나 아직도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특히 아프리카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임에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먹는 것'일 정도로 열악하기만 합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무시되는가 하면 기초 교육을 받을 기회도 막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아프리카에 갈 때마다 그 숙제를 풀기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마침 선학평화상위원회가 2019년 세 번째 의제로 '아프리카의 인권과 개발'을 표방했을 때 숙제 하나가 해결되었다는 마음에 매우 반가웠습니다.
아프리카개발은행의 아킨우미 아데시나 총재와 여성인권운동가 와디스 디리(Waris Dirie)는 내가 늘 생각해 온 '실천의 의인'이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아데시나 박사는 어려서부터 '어떻게 하면 농업을 부흥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장래에 풍요로운 아프리카를 돌아가 30년 동안 농업 혁신을 이끌어 수억 명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2019년 2월 선학평화상을 받기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음식을 제공하고 기아와 영양실조를 없애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굶주림은 인류의 폐단의 흔적입니다. 흰색, 검은색, 분홍색, 황색 그 어떤 피부색의 사람도 굶주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선학평화상의 상금 50만 달러 전액을 월드헝거파이터스(World Hunger Fighters) 재단을 위해 쓰려는 이유입니다."
그의 꿈은 일찍이 내가 주창하고 호소했던 평화의 한 방법이자 실천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언제까지나 뜻을 굽히지 않고 참된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격려했습니다. 또 한 명의 수상자인 와리스 디리는 여자로서 헤쳐 나오기 어려운 길을 극복해 온 의지의 아프리카 여성입니다. 그녀는 소말리아 유목민의 딸로 태어나 다섯 살 때 할례를 당하고 내전과 굶주림, 탄압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꿈이 많았던 그녀는 미래를 향해 도전했고 마침내 세계적인 슈퍼모델이 되었습니다.
1997년 아프리카 여성 수억 명을 대표해 할례 경험을 고백하면서 그녀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인권운동가로서 눈부신 활동을 시작했고 유엔의 '할례 근절을 위한 인권 홍보대사'로 임명되어 아프리카 15개 나라에서 여성 할례금지를 명시한 <마푸토 의정서>의 비준을 이끌어 냈습니다. 또한 2012년 유엔이 여성 할례를 전면 금지하는 결의안을 상정해 만장일치로 통과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의사들과 힘을 합쳐 프랑스,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에 '사막의 꽃 센터'를 만들어 할례 여성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아프리카 여러 곳에서 여성 자립을 돕는 교육기관을 운영합니다.
아프리카 몇몇 곳에서 자행되는 할례는 종교나 민족 고유의 전통이 아닌, 단지 폭력적 관습에 불과합니다. 10대 소녀들의 외부 성기의 일부 혹은 대부분을 제거하는 이 악습은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협합니다. 그럼에도 3천 년 이상 지속돼 온 나쁜 관습을 없애기 위해 와리스 디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세계는 그 헌신에 동참했습니다.그 길이 얼마나 험난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목표는 아프리카 여성을 돕는 것입니다. 나는 여성이 강인해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여성은 일상적인 생활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각 나라에서,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런 아프리카 여성이 어린 나이에 생긴 마음의 상처를 안고 평생 심리적 불구자로 살아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연약한 여성에게 얼마나 커다란 폭력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아프리카는 오늘도 뜨거운 햇빛이 내리쬡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극히 선량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존중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도시 문명이 밀려오면서 삶이 고달파졌습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모두입니다.
이제 선학평화상은 새로운 세기를 향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한가족입니다. 얼굴과 피부색이 다르고, 말이 다른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선학평화상은 미래로 가는 여정에서 단단한 징검다리가 되고 있습니다. 지구촌 어디에서나 참된 마음으로 땀 흘리는 의로운 사람들의 참된 친구입니다. 선학평화상이 뿌린 평화의 씨앗은 지구라는 마을에서 가장 큰 열매를 맺는 평화의 아름드리나무로 자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