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윤지충 바오로(Blessed Paul Yun Ji-chung)
복자 권상연 야고보(Blessed James Kwon Sang-yeon)
출 생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의 본관은 해남으로 아버지는 윤경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6대조는 고산 윤선도이고, 증조부는 공재 윤두서이다.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삼재로 불렸을 정도로 그이 집안은 명문거족이었다.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그의 동생이다. 그리고 권상연은 내외종간이고, 유항검은 이종사촌이며, 정약전·약종·약용 형제들과는 고종사촌 간이다.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는 진산 장구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권세학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을 지낸 명문세가였지만 고조부 권기를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멀어졌다.
입 교
윤지충은 자신의 입교에 대해 1784년 겨울, 서울 명례방에 사는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와 『칠극』을 보고 빌려 와 교리를 묵상하고 나서 신앙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신앙을 전해 준 사람은 고종사촌인 정약전이었다. 윤지충은 그에게 서적을 빌려 와 묵상하고 부족한 부분은 정약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이승훈으로부터 바오로라는 세레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역시 유학을 하던 권상연은 윤지충을 통해 서적을 접하게 되었고, 윤지충이 세례를 받고 내려왔을 때 그도 당시 전라도 담당 신부였던 유항검에게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활 동
윤지충은 먼저 어머니 권씨 부인과 동생 윤지헌, 그리고 외사촌 형인 권상연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무장의 최여겸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한 홍주의 한덕운도 윤지충의 집에 머물며 주야로 심계 등 교리를 배웠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사람들이 윤지충을 두고 주교로 지목할 정도였으니, 그가 교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 해
1789년 10월 조선 교회의 지도자들은 윤유일을 북경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조선 교회의 상황과 부당하게 저지른 성무 집행의 잘못된 점, 선교사 파견과 교회에 필요한 양식들을 청하는 서한을 가지고 갔다. 윤유일은 이듬해 4월에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을 가지고 왔으며, 이를 통해 교회 지도자들은 오류 없이 구원을 받으려면 선교사를 모셔 오는 것이 최선임을 알고 선교사 청원을 위해 윤유일을 다시 북경에 파견하였다. 이때 보낸 편지에 선교사를 청하고 조상 제사와 미신에 관련된 것들을 문의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선교사 파견을 약속하면서 조상 제사는 우상숭배이므로 지내지 말라고 하였다. 조상제사금지령은 조선 교회에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으며, 상당수의 양반 신자들은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났다. 이러한 소식을 전라도에도 전해졌고, 윤지충은 신주를 불에 태웠으며, 유항검은 사당 옆에 묻어 버렸다.
권상연은 입교 사실이 친척들에게 알려지면서 가문의 박해를 많이 받았다. “제가 천주교를 신봉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모든 친척들이 악감을 가지고 저를 보았고, 갖가지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권상연이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폐기한 사실을 고발한 것도 그의 일가인 권상희였다.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죽으면 천주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윤지충은 어머니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대로 장례를 지냈다. 정중하게 상례(喪禮)를 갖추었지만, 음식을 차리거나 신주를 모시지는 않았다. 당시 진산 지역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인근의 친척과 동네 사람들만 참석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엉뚱하게 조문도 받지 않고 시체를 버렸다고 소문이 났다. 이 소식을 들은 홍낙안은 진산 군수에게 체포하라고 촉구하고 이들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험에 처한 윤지충은 광천으로, 권상연은 한산으로 피신하였지만, 진산 군수는 윤지충의 숙부인 윤증을 볼모로 잡아 가두었다. 그래서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10월 26일 진산군에 자수하였다. 진산 군수는 이글과 같은 남인이었고, 윤지충의 재주와 명예를 생각해서 회유하려고 하였지만 헛수고였다.
10월 29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진산을 출발해서 운주면 산북리·금당리를 거쳐 경천면 가천리에서 처음 쉬며 아침을 먹었다. 고산 어우리(고산·봉동·비봉이 갈리는 삼거리)를 거쳐 용진면 요흥리에서 두 번째 쉬었고, 해 질 무렵 안덕원(우아동)을 지나 동문을 거쳐 전주 중진영(전주 성심학교에서 천변 쪽 지역)에 도착하였다.
전라도 관찰사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심문하였는데, 10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의 내용은 윤지충을 수기에 잘 드러나 있다. 관찰사는 11월 7일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형문을 당할 때,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유생들은 패륜의 천주교를 뿌리째 뽑아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정조와 채제공은 이 문제가 당쟁으로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신속하게 처리하려고 하였다. 11월 8일 채제공은 정조의 위임을 받아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인심을 현혹하는 자들에게 처해지는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순 교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이들의 처형은 남무 밖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싸전다리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형장으로 끌려오면서도 윤지충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장엄하게 하였다. 권상연은 고문으로 몸이 초죽음 상태에서 “예수 마리아”만을 부르며 걸어갔다. 그리고 당당하게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순교의 칼날을 받았다. 윤지충의 나이 33세였고, 권상연은 41세였다.
한편 정조는 사형선고를 후회하며 집행을 유예시키기 위해 전라감영으로 파발을 보내지만, 이미 두 사람은 순교의 영광을 얻은 후였다. 정조는 “윤고산의 후손을 내 손으로 죽였구나.”라고 하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머리는 장대 끝에 높이 매달려 9일 동안 효시되었다. 이후 장례가 허락되어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시체가 상하기는커녕 그때까지 선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 놀라운 상황을 목격한 외교인들은 경탄하며, 재판의 불공정함에 항의하고 두 순교자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이 기적에 감동하여 입교까지 하였다. 교우들은 놀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사람들은 두 순교자의 죽음을 의로운 죽음 곧 절사(節死)라 하여 특별한 존경을 드렸다.
형장에 모인 교우들 중 어떤 이는 의원도 포기한 다 죽게 된 환자인데 순교자의 피가 묻은 명패를 담갔던 물을 마시고 병이 그 자리에서 나았다. 또한 거의 죽게 된 사람들이 순교자들의 피를 적신 수건을 만지고 즉시 병이 나았다. 그래서 그 피를 닦은 수건을 보관하였다가 1793년 북경 교회의 구베아 주교에게 이들의 행적과 함께 보냈다.
이들의 무덤은 찾을 수 없으나 1795년 4월 전라도 교회를 방문하던 주문모 신부는 윤지충의 무덤 아래를 지나가다가 이존창과 유관검이 “이 무덤은 우리나라 신도들 중에서 고명한 사람의 무덤입니다.”라고 하자 “훗날 조선에 천주교가 크게 행해지면 이 두 사람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건립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들이 피를 흘린 곳에 지금 전동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출처 『천주교 전주교구 24위 복자전』 14~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