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전자산업 성공담
직원들과 신제품 개발에 관해 논의하고 있는 정문식 집사(왼쪽)는 산업자원부가 선정한 올해의 신지식인이다.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내가 대성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하시는 일마다 실패해 세상을 비관하며 술을 자주 드셨다.
어머니도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업문제와 관련해 점을 많이 보러 다니셨다. 나는 어머니를 좇아 점집에 다니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 점을 보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 50대 초로의 무당은 갑자기 어머니를 노려보기 시작했고, 곧이어 “여긴 왜 왔니, 교회에 나가지”라며 어머니를 꾸짖었다. 어머니는 이웃 주민들에게 이 일을 말했다. 그러자 동네 어른들이 교회를 소개하기 시작했고 이 일로 우리 가족은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아버지는 간경화로 결국 세상을 뜨셨다. 가세는 더욱 어려워졌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어차피 하는 고생, 서울에서 해야겠다”며 이사를 하자고 했다.
74년8월 우리는 마포구 염리동 산동네로 집을 옮겼고,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시작하셨다. ‘나도 어머니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생활에 쫓겨 교회에 나가기도 힘들었고 잘 모르는 교회에 선뜻 가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하나님께 “좋은 일자리를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다.
6학년 겨울방학 때 청계천의 앰프공장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방학 동안만의 직장이었지만 참으로 뿌듯했다. 기술자들을 보조하는 일이었어도 전자제품을 만드는 일은 신기하기도 했고 재미있었다. 방학이 끝나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는 새벽과 오후 신문을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렇게 중학교 3년을 학업과 일을 병행했고, 78년3월 나는 한양공고 전자과에 입학했다. 직장도 새로 구했다.
불광동에 있던 헤드폰 생산업체였다. 4만원의 월급을 받았는데 이 돈으로 학비와 식비, 교통비를 해결하고 동생이 볼 참고서를 사주고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보태드렸다. 어머니는 나를 대견스러워했지만 내게 미안한 마음이 컸었다.
밤마다 우리방에 와서 기도해주었는데 하나님께 고생하고 있는 나에 대한 호소와 미래를 인도해 달라는 눈물의 기도를 자주드렸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그동안 생활에 쫓겨 제대로 교회에 나가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확실히 하기로 했다. 79년 봄 어머니와 나, 동생은 함께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가게 됐다.
고등학교 3학년 봄에는 철야예배 도중 성령세례를 받았다. 그후 나는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성실히 학교생활과 직장생활을 했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일감을 챙기고 분배해주는 관리업무도 하게 되었다. 틈틈이 대그룹 경영인들의 전기를 읽으며 꿈을 키워나갔다. 군에서 제대 후 취직을 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간 금식기도를 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려 한 전자업체에 취직이 되었다. 비록 생산직 공원으로 들어간 것이었지만 열심히 일했다. 공원생활을 하던 나는 성실성을 인정받아 4개월 후 주임이 됐고 이듬해인 88년에는 계장으로 승진했다. 90년 봄에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나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집안에 기계를 들여놓고 전선가공 재하청업을 하기 시작했다. 재하청업은 일거리가 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래처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한번 들어온 일은 어김없이 납품기일을 맞추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빚이 점차 늘기 시작했다. 하나님보다는 환경을 바라보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한강 둔치에 나가 물끄러미 강물을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삶의 무게에 눌려 한 발을 강으로 들여놓았다. 그때 갑자기 차의 경적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주일에 뵐 게요”라며 떠들석하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강물에서 발을 뺐다. 금요일 밤이었다.
나는 곧장 교회로 가서 철야예배를 드리며 환경을 바라보고 낙심했던 것을 철저히 회개했다. 그리고 ‘죽을 용기가 있으면 열심히 살자’는 마음으로 일했다.
몇 개월 후 공장을 5평짜리 차고로 옮길 수가 있었다. 가지고 있던 돈 50만원과 선배로부터 빌린 돈 1백만원을 갖고 기계를 구입해 ‘이레전자’를 시작했다. 불량품이 없도록 철저히 품질관리를 했다. 이후 직원이 하나씩 늘기 시작했고 재하청업에서 벗어나 원청업체와 직접 거래하기 시작했다. 전선가공업뿐 아니라 통신용 부품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IMF한파가 닥쳐온 97년에는 오히려 기술개발팀 20여명으로 구성된 부설 정보통신연구소를 설립해 기술개발과 디자인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97년 80억원이던 매출액은 98년에는 240억원으로 그리고 올해는 약 5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야웨이레 하나님은 내게 미래를 준비해 주셨다. 그분의 도우심으로 나는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됐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는 말씀을 바라보며 오늘도 하루를 시작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