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네이버 블로그 구름의 남쪽>
명나라 말에 사조제라는 관리가 벼슬살이를 하러 운남에 왔습니다.
그리고 <전략>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차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운남에는 차가 없는 셈이다.
차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만드는 법을 모른다.
간혹 어찌어찌 차를 만들어내도 제대로 마실 줄을 모른다.
사대부와 백성들이 마시는 것은 普茶라는 것인데 끓이면 풀냄새가 난다.
냉수보다 조금 나은 것이 보차이다.>
그는 보이차에 대해 대단히 낮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면 당시에 중원에서는 보이차가 전혀 환영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조제가 이 책을 쓴 것이 1620년이고 그후 24년이 지난 1644년에 명나라는 멸망합니다.
중국 역사상 마지막 한족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것은 청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청나라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양상이 크게 달라집니다.
철권정치로 유명한 옹정황제 때에는 보이차가 황실에 진상하는 차로 지정되는데
그것이 1729년의 일입니다.
사조제가 <보이차는 차도 아니다>라고 폄하한 글을 쓴 지 겨우 100년이 지난 후입니다.
황실 공차가 되었으니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보이차는 상종가를 달립니다.
단췌라는 사람이 <전해우형지>라는 저서에서 <보이차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청나라 가경연간(1796-1820)에 지어졌습니다.
사조제로부터 이백년 사이에 보이차의 위상이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완복은 1825년에 쓴 <보이차기>에서 <보이차가 천하에 두루 유명한데 맛이 매우 진하다.
수도에서 특히 인기가 높다>라고 말하고 황제께 진상하는 보이차가 몇월달에 잎을 따고
어떤 모양으로 만드는지 등등에 대해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변방을 돌며 말등에 얹혀 티베트로 팔려가거나
운남에서만 환영을 받던 차가 왜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갑자기 환영을 받게 된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청나라 사람들의 식습관에서 찾고 있습니다.
한 가지 문화현상이 나타나는 데 배경이 하나뿐일 수는 없겠지만
보이차의 대흥행을 설명할 만한 그럴듯한 이유 중 한 가지는 되는 듯 싶습니다.
그들은 유목민으로 초원에서 말을 타고 이동하며 지냈고
농사를 짓지 못하여 육고기를 주식으로 해왔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의 상황과 아주 흡사하네요.
이들은 육고기를 실컷 먹고 소화시키는 데 보이차만한 것이 없다 하여 즐겨 찾았다 하는군요.
다시 완복의 <보이차기>로 돌아가보면 그는 여기서 보이차가
<소화를 시켜주고, 기를 다스리고, 체를 내리고, 추위를 몰아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라고도 썼는데,
역시 티베트 사람들이 차를 마셨던 이유와 몹시 흡사하지요?
사실 청나라 사람이라고 늘 양이나 소만 뜯어먹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역대 황실 가운데 가장 화려한 식탁을 꾸몄던 것이 바로 청나라 황실이었습니다.
물론 중원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변변찮은 식사를 했겠지만 자금성의 주인이 된 후부터는
적극적으로 한족의 문화를 흡수하고 받아들였는데 식문화도 그중의 일부였습니다.
한족식과 만주족식의 메뉴로 꾸며진 滿漢席이라는 것입니다.
한족과 만주족의 진미만을 엄선하고 중국 남부와 북부의 풍미를 혼합하여 차린 것인데
음식의 가짓수가 자그만치 300개가 넘는다는군요...
당연히 황실에서나 가능한 일었겠지요.
청나라 때의 황실요리를 선보이고 있는 식당이 있다는데요, <방선반장>이라고요.
전에 TV에 몇번 나오는 것은 보았는데, 종업원들이 황실복장을 입고 서빙을 하고
음식도 대단히 다채롭고 화려하더군요...
멋있게는 보이지만 몇년 생활비를 털어야 하지 않을까 싶게 생겨서 꿈도 못 꿨습니다.
그 <방선반장>에서 무슨 음식박람회에 출품한 생일상이랍니다.
앞쪽에 복숭아 모양의 음식에 壽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생일을 맞은 분께 오래오래 사시라고 기원하는 것이네요.
청나라 황궁에서 궁녀를 했던 사람이 후에 회고록을 출간했는데 여기에
자희태후가 보이차를 즐겨 마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이든 태후께서 방에 들어와 앉으면 차를 대령하는 이가 먼저 보이차를 바쳤는데
보이차를 마시면 몸을 데워주고 기름진 음식을 먹은 후의 느끼함을 가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위의 만한석이라는 것을 보니 소화시키기 위해서 보이차를 마셨다는 것,,, 이해됩니다.
북경의 자금성에 가보신 분이라면 겨울에 그곳이 얼마나 추웠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여러 난방장치가 고안되어 있었을 테지만 태후까지도 몸을 데우기 위해 따뜻한 보이차를 마셨는가 봅니다.
보이차의 성질이 따뜻하여 몸을 데울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도 마시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옛날 청나라 강희황제 때의 <원강부지>라는 책에도 <보이차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향기롭다>라고 쓰여 있네요.
저는 일년 사계절 보이차를 마시고 있습니다만, 자희태후는 매니아는 아니었던 듯,
겨울에는 보이차를 마시고, 여름에는 용정차를 즐겼다 합니다.
겨울에 성질이 따뜻한 보이차를, 여름에는 찬 성질의 녹차를 마셨다니
기호에만 치우지지 않고 섭생에 신경썼나 봅니다.
반성하는 차원에서 당분간 ***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대홍포를 마셔야겠습니다.
청나라 황실복장을 하고 차를 우리는 모습입니다.
이런 복장은 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청나라 말 민국 초기에 쓰였던 자사호입니다.
원숭이가 두 마리 놀고 있습니다.
중국어에서 원숭이를 가리키는 글자는 제후를 가리키는 侯와 발음이 같습니다.
그래서 원숭이가 있는 자사호는 대대로 높은 작위를 받기를 원하는 염원이 들어있습니다.
지금 가격은 자그마치 인민폐 25만위안에서 35만위안이나 한다고 하는군요...
북경에서 어지간한 아파트 한 채가 70만위안 정도이니 가격이 상당합니다.
(07년 1월 자료라 현재 중국 부동산 가치와 차이가 꽤 크네요.
지금은 중국의 시골인 운남성 곤명에서도 70만위안으로는 아파트 사기 힘듭니다. ㅎㅎ)
청나라 때의 자사호 하나 더 올립니다.
용문양이 새겨져 있고 가장자리를 은으로 마무리한 것으로 대단히 화려합니다.
사진 속의 아저씨가 소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격은 비싸겠지만 제 취향에는 지나치게 화려합니다..
저에게 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왠 걱정을 한다지요??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구름의 남쪽>
첫댓글 참좋은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샘플로 주신 차도 잘 먹고있습니다.
별말씀을요, 좋은 하루 되세요~ 화성거사님~!
잼나요~~^^
보이차도, 자사호도 마시는데 초점을 맞추기가 어렵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