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원놀음’ 옛 관아 재판 풍자 전통극
1976년 원놀음 문화 복원 ‘대본집’ 발간
영양여고 학생들 재현…20년간 명맥 유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연극의 하나로 알려진 영양 ‘원놀음’은 옛 관아의 재판을 모방 풍자한 경북지역의 특이한 민간연회다.
가면극이 평민들의 놀이라면 ‘원놀음’은 양반의 놀이로 양반 청장년들이 고을 원을 위시해 육방관속으로 분장해 동헌에서 죄인을 다스리는 즉흥적인 연극이다. 원놀음이 성행했던 곳은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로 봉화와 영주, 울진 등지와 강원도 일부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00년경까지 전승되다가 중단되었던 ‘원놀음’은 지난 1976년경 당시 안동교육대학 민속학과 성병희 교수가 영양 원놀음 문화 복원을 위해 발간한 대본집을 근거로 영양문화원에서 영양여고 학생들에 의해 재현하면서 20여년간 명맥을 유지해 왔다.
이후 2006년 한국종합예술학교에 용역을 의뢰해 영양고추문화축제 시에 화려하게 부활시켰으며 이듬해 3월 지역의 뜻있는 젊은이 20여명으로 영양 원놀음 보존회(회장 조동구)를 구성하고 그해 5월 산나물축제를 통해 성황리에 공연을 마무리함으로써 전통 문화공연인 영양 원놀음은 비로써 그 빛을 발하게 됐다.
원놀음은 주로 음력 정월초순에 상연됐는데 정월 다례도 끝나고 대소가와 인근 어른들께 새배도 마쳐 세찬세주(歲饌歲酒)도 풍성한 정초에는 신년 희망과 더불어 자못 한가해 마을 청년들이 삼삼오오 한자리에 모여 거행한 놀이다.
우리나라 민간풍습은 주로 정월에 다양한 놀이가 베풀어지고 원놀음도 농한기임으로 농사에 관련되는 내용이 많았다.
순수오락으로 연행되었던 당시에는 농업에 관계되는 것이 중심내용이었으나 차츰 확대 발전해 후일에는 일종의 사회비판적 의미로 변해 사회의 물의를 야기 시킨듯하다.
지역 노인들에 의하면 영양군 100여개의 산재부락에서 원놀음이 상연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대대적으로 연행한 곳은 일월면 주곡리와 영양읍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놀음’은 봉화일대와 문경까지도 전파됐으며 강원 남부와 삼척인근의 평야지역보다 산림이 많은 지역의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교통이 불편해 수령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서 많이 상연되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수령방백이 백성의 생사여탈을 전행하는 재제 따위는 설화로 들은 사람이 훨씬 많았으며 더구나 영양은 장구한 세월동안 현으로 승격하지 못했던 사실로 미루어 더욱 성행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원놀음’은 죄인으로 문초받은 사람이 전곡을 바침으로써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 상례인데 이렇게 모은 전곡으로 부락의 공동기금을 마련하고 건물을 세우기도 했다.
무대는 주로 부농의 대청이나 완로(頑老)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행랑방을 이용했고 달 밝은 밤에는 부락광장이나 구릉에서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에 연희되기도 했다. 그러나 야간보다는 낮에 많이 연행된 듯하며 부락단위를 벗어나서 여러부락의 공동조직일 때는 자못 큰 놀이가 되어 부락을 순화하면서 각 호마다 들어가서 모금·모곡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후대의 원놀음은 소박한 유오(遊娛)에서 일탈되고 무대도 일정하지 않았으며 오늘날의 ‘걸립(乞粒)’과 같은 내용의 것으로 변모했다.
소박하고 단순한 부락단위의 원놀음이 상연되던 옛날에는 과년한 처녀들도 여럿이 모여 원놀음을 행하였으나 일반인이나 남자들에게 공개됨이 없이 희학적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가 중심이 된 원놀음은 20대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동년배끼리 마주앉아 하루를 즐기며 주안상에 기백을 쏟았기에 ‘원놀음 한다’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몰려들어 방청하고 관람했다고 한다.
등장인물은 조선조 하위 관아의 소속원인 원(수령, 군수, 현감) 이하 향리를 적당히 배역하돼 참가인원에 따라 원과 육방관속만 배치하거나 원과 이방·형방·나졸·사령 정도로 진행하기도 했는데 무대가 되는 집 주인은 범법자 또는 피의자로 하는 것이 보통 관례다.
원놀음의 완전구성은 군수 이하 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과 통인 2명 그리고 여러명의 사령관노·관비·일수·수청기생(여장)에 이르기까지 문란하고 타락한 조선조 후기 관사를 그대로 모방하기 위해 단위부락 청장년 모두가 총 동원됐다.
이 보다 더 대규모일 때는 악공이 동원되고 풍악을 울리며 나아가면 군수행차의 위도가 엄숙했고 벽제소리가 온 부락에 들렸다고 한다.
조선조 관직은 고려의 관직제도를 그대로 답습했으며 특히 고을의 원(사령)은 정직(正職)이었으나 아전이라 불리는 향리는 정직의 보조 또는 서역으로 세습직이어서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지 못했으므로 서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 농민에 대한 횡포는 농촌 청장년들에게는 일대 공포였으며 그 으리으리한 관권(官權)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과거 일종의 야외극적인 민중놀이들이 주로 천민이나 상민층이 주가 돼 연행됐고 양반계층은 관람조차 엄금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원놀음’은 양반출신의 농민이 주최가 됐고 상당한 식자가 없으면 참여할 수 없었으니 배역의 지적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원놀음’은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이를 시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비행을 들춰 과(科)하는 태형이나 책벌이 주된 내용이었고 수형대신 푸짐한 주안상을 배설하기를 요구하고 종말에는 열락으로 끝이 난다.
따라서 관중은 원놀음 공연과정에 있어 구사되는 용어와 언변에 감탄하고 당당한 제스처에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놀이는 호주 포식으로 들어가고 계속해 다음 차례의 집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의례히 암행어사가 출두해 관속은 혼비백산 도망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원래 수령은 직접 백성에 접하는 소위 근민(近民), 목민(牧民)의 관아라 하여 온갖 직능을 다 가졌으며 주된 임무는 공세, 부역 등 국용의 중앙조달 즉 민력수탈의 중앙집중을 실천한 기관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원놀음도 이와 같은 사실을 모방해 각종 비위를 들추어 그때그때 적절한 문구를 써가며 남을 웃기며 진행되므로 무식한 자는 응당할 수 없으며 지식층에서 더욱 괄목할 만한 연희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수령 또는 관아의 묵인이나 협력아래서 연희된 듯하다.
원놀음의 기원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조선 영조 때부터 영양에는 한가한 정초가 되면 부락의 오붓한 방마다 남녀없이 원놀음이 성행했다고 전해오나 야담과 같은 설화로는 기원을 잡을 수 없다.
다만 확실하게 기원을 살필 수 있는 사실은 두 차례의 연행이라고 전해진다.
지난 1899년 정초에 강준(姜準)이란 자가 원으로 분장해 수령의 모방을 어찌나 잘 하는지 칭찬이 자자했고 놀음 목적이 연대암(蓮台庵 : 영양읍 삼지리에 소재한 사월공 조임의 서원)의 보수를 위한 모금놀이였다. 또 그 이듬해인 1900년 봄에는 일월면 주곡리(한양조씨 집성촌)의 유식한 청장년들이 육방관속의 직접 지도를 받아 계획된 상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때는 놀이 목적이 군청청사를 건립하기 위한 전곡(錢穀)을 수집코자 군수와 밀약 끝에 실시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영양군지에 의하면 이미 그 이전에 청사가 건립돼 보수를 위한 모금공연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민속극 대사가 대부분 구전으로 명맥을 이었으며 공연환경에 따라 즉흥적으로 대사를 변경하거나 삽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놀음’ 또한 일정한 각본도 없으며 대부분 즉흥적이었으나 다소 사전준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주요내용은 어디까지나 지방수령이 전제하는 행정·군사·사법·조례·부역 등의 범위 안에서 골자가 채택됐다고 한다.
하례가 끝나면 원이나 아래 이속들은 즉시 현민의 위법사실여부를 묻고 범법자를 출두케 하여 추궁하는 것으로 그 속에는 야유나 유머가 곁들어 폭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조선조 관아의 범죄수사는 고소·고발·규탄·범죄인지도 행했으나 자백강요로서 재판했고 원놀음도 이를 모방했음은 틀림없는 일이며 지난 1899년과 1900년에 상연한 원놀음은 군수의 협력하에 놀이를 준비하면서 군대는 각호가의 비위에 대한 정보를 미리 수집했다 하니 민중의 아름다운 유오적 놀이가 궤에서 상당히 이탈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지난 2007년부터 각종 축제 등을 통해 많게는 120여명이 참가해 년간 5~6차례 공연하고 있는 ‘영양 원놀음 보존회’ 조동구 회장은 오는 5월21일부터 3일간 열리는 영양 산나물축제에서 완숙한 공연을 선보이기 위해 회원들이 연습에 땀을 흘리고 있다”며 “지역민과 함께하는 공연을 통해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영양=임경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