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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재 란 (서명 또는 인) | ||||
이장 |
노인회장 |
새마을지도자 |
개발위원장 |
부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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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막마을은 마산면의 중앙부인 면 소재지와 인접해 있으며 동쪽으로 외호리가 위치하고 서쪽으로 노하리가 위치한다. 또한, 마을 뒷산인 무진봉을 사이에 두고 뒤편에는 후동리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은적사 계곡부터 흘러내린 산막천이 지나가고 있으며 마을구성은 면소재지와 인접한 원등과 회관을 중심으로 유목리와 산막리가 위치하며 산막리는 다시 당산이라 불리는 지역과 용호리라 불리는 지역으로 나누어 진다 성씨구성은 원주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58호의 가구중 본 마을과 떨어진 원등에 2가구를 제외하면 타성이 한가구도 없는 특이한 성씨집단을 이루고 있다.
1. 마을기본 현황
인구수(명) |
가구수(호수) |
토지면적(ha) |
일반작물 |
쌀 | ||||||||
총 |
남 |
여 |
총 |
농가 |
비농가 |
총 |
전 |
답 |
임야 |
기타 |
특 작 물 |
|
135 |
65 |
70 |
58 |
58 |
0 |
154 |
25 |
52 |
57 |
20 |
주소득원 |
농업 |
2. 마을 성씨 분포
성 씨 |
세대수 |
성 씨 |
세대수 |
성 씨 |
세대수 |
원주이씨 |
56 |
여흥민씨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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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행정 조직
이 장 |
이 광 채 |
새마을지도자 |
이 명 제 |
개발위원장 |
이 오 성 |
부 녀 회 장 |
박 행 심 |
노 인 회 장 |
이 남 기 |
청 년 회 장 |
이 명 제 |
4. 마을 회관
• 위 치 : 해남군 마산면 산막리 441-1번지
• 설 립 일 : 1991. 4.
• 건립방법 : 마을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회관건립을 위해 마을 주민들이 간척사업 피해보상금 중 일부를 개인별로 모아서 건립하였다.
• 마을 자산 : 해남군 마산면 산막리 441-1 대지 1320㎡
해남군 마산면 산막리 562-1 답 4620㎡
5. 주요 시설물.
마을쉼터 2동, 마을 뒤편 파고라 1식, 원주이씨 산막재실, 이영화 유허비각 1동, 원주이씨 집성촌을 이루면서 조상께 올리는 제각이 있으며 옛날에는 관리인을 두고 관리하였다. 매년 음력 삼월 보름날을 기해 제를 올리고 있으며 마을 전통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6. 민간 조직
구 분 |
조직연도 |
계원수 |
중요내용 |
자산(천원) |
방원회계 |
미 상 |
80명 |
매년 음력 3월보름날 원주 이씨 조상께 제사 |
50,000 |
산막동계 |
1720년 |
45명 |
회원간의 상호부조 및 공동체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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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회 |
19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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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대소사 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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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회 |
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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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 이장
연 도 |
이 름 |
주 요 사 업 |
비 고 |
1960년 ~ |
이병덕 이방주 |
마을 주민 숙원 사업 및 농로 포장 사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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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 |
이무도, 이오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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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 |
이명재, 이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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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 |
이오성,이광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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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
이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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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을 형성 및 입향
산막리는 면소재지로부터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노하와 외호리간의 중간지점이기도 하며 세곡을 저장, 반출하였던 공세포(空稅浦)가 노하와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해남군 마포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목리, 지동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마산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산막 하나의 자연마을로 되어 있는데 지명상의 당산과 용호마을은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행정개편에 따라서 산막에 편입된 마을이다. 한편 마을입구에 군집하여 있는 지석묘군으로 미루어 보아 마을형성시기가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최초로 입향한 사람은 원주이씨(原州李氏) 낙남조 이영화(李英華)로 1457년에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후 그 후손들은 마산면 일대를 비롯하여 해남지역 일원에 분가하였으며, 현재 마을은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다. 1960년대 120여 호의 마을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50여호의 가구만 남아 있다.
9. 전해오는 옛 지명과 유래
◯ 가매바우 : 유목 뒤에 있는 바위. 모양이 가마처럼 생겼다.
◯ 강례당(講禮堂) : 산막에 있는, 원주이씨의 정자.
◯ 고든개 : 당산 북쪽에 있는 곧은 개.
◯ 고래개 : 유목 동북쪽에 있는 개. 고래가 많이 밀물에 밀려 들어와서 잡았다 하는데 지금도 그 뼈가 발견됨
◯ 공똑암, 공뚝암, 공뜨암 : 유목리 남쪽에 있는 바위. 공독(공기)처럼 동그랗게 생겼다.
◯ 냉천(冷泉) → 참새미.
◯ 담생잇들 ⇒ 노하리의“ 담생잇들”
◯ 담생잇보 ⇒ 노하리의“ 담생잇보”
◯ 당산(堂山) : 산막 서북쪽에 있는 마을. 당산제를 지냄.
◯ 도리메 : 화내리의 도리봉.
◯ 도채바우 : 사랑바우 서쪽에 있는 바위. 궂은 날에는 도채비(도깨비)가 잘 나타났다 함
◯ 둠벙새앰 : 산막앞에 있는 샘. 둠벙이 있었다.
◯ 마당바우 : 산막 남쪽에 있는 바위. 마당처럼 평평함.
◯ 무덩골 : 산막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 무덤이 있었다.
◯ 무덩꼭폭포수 : 무덩골에 있는 폭포.
◯ 무덩등 : 무덩골 위에 있는 등성이.
◯ 베락바우 : 산막 동남쪽에 있는 바위. 큰 바위가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는데 벼락맞았다 한다.
◯ 불믓등 : 유목리 서남쪽에 있는 등성이.
◯ 빈축골 : 유목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사랑바우 : 산막 서쪽에 있는 바위. 넓고 평평하여 많은 사람들이 앉아놂.
◯ 산성(山城) : 산막 남쪽, 무진봉에 있는 산. 옛 토성이 있다.
◯ 성제둠벙 : 공세폿 들에 잇는 둠벙.
◯ 소랑강 : 고래개 아래쪽에 있는 개. 소랑(소라)이 많이 잡히었다.
◯ 소죽거리 : 산막 앞에 있는 논. 조선 말엽에 이 효승(李孝承)이 선달 벼슬을 하여 소죽(솟대)를 세웠었다.
◯ 솔무랭이 : 참새미 동쪽에 있는 마을. 솔이 울창하던 모롱이 옆이 됨.
◯ 숭어바우 : 산막 동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숭어와 흡사함.
◯ 시게배미 : 산막 동쪽에 있는 논. 땅이 몹시 메말라서 이 논의 소출을 보면, 그 해의 시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함
◯ 약샘터 : 옛서당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약물터가 있다.
◯ 옛서당터 : 산막 남쪽에 있는 골짜기. 서당이 있었다.
◯ 용호리(龍湖里) : 참새미 서쪽에 있는 마을.
◯ 원등 ⇒ 화내리의 “원등”.
◯ 원보 : 원등 북쪽에 있는 보.
◯ 유목(柳木) → 유목리.
◯ 유목리(柳木里)〔유목, 응달〕: 산막 서쪽에 있는 마을. ① 버드나무가있었다. ② 응달짐.
◯ 이산태 : 솔무랭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이 처사(李處士)가 살았다 함.
◯ 자래동개 : 산막 남쪽에 있는 들. 전에는 개였는데, 자라가 많았다.
◯ 자래바우 : 숭어바우 아래에 있는 바위. 자라처럼 생겼다.
◯ 작은새앰 : 용호리 앞에 있는 작은 샘.
◯ 장빠닥재 : 산막 동쪽, 외호리로 넘어가는 고개. 장치던 마당이 있었다.
◯ 잿등 : 산막과 유목 사이에 있는 등성이.
◯ 전에개 : 유목 북쪽에 있는 개. 전어가 많이 잡혔다.
◯ 중보 : 원봉 아래쪽에 있는 보.
◯ 진지릿개 : 산막 서북쪽에 있는, 긴 개.
◯ 참새미 : 산막 동쪽에 있던 마을. 찬 샘이 있다.
◯ 채빈골 : 산막 북쪽에 있는 골짜기. 채빈(초빈)하였다.
◯ 큰새앰 : 용호리 앞에 있는 큰 샘.
◯ 통새앰 : 산막 북쪽에 있는 우물. 통으로 되었다.
◯ 퍼랫강 : 고래개 위쪽에 있는 개. 퍼래(파래)가 많았다.
◯ 한새머리 : 산막 서남쪽에 있는 들.
◯ 황서방개 : 공세풋들 서북쪽에 있는 개. 황서방이 고기잡이하다가 빠져 죽었다함.
◯ 휘메기 : 유목 남쪽에 있는 고개.
10. 문화 유적.
1) 제1 지석묘군 (支石墓群, 청동기시대)
산막마을 입구 버스정류장 맞은편 500여년의 수령을 가진 노송과 함께 15기의 지석묘가 위치한다. 원형의 군집상태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상석이 지면과 밀착하여 지석이 보이지 않는다.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특이한 점은 1기의 상석 윗면에 폭 9㎝의 정교한 원형 구멍이 패였 있다는 점과 다른 1기에서는 상석 중앙부에 반달형의 구멍 2개가 마주보고 있어 동물의 발굽과 같은 형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상석의 규모는 400×210×70㎝이다. 설화에 의하면 옛날 어떤 장군이 산막리 됫산인 무진봉에서 말을 타고 뛰어내려 생긴 말발굽 자국이라고 전하며 주민들은 이곳을 “독배기”라 부른다.
2) 제2 지석묘군 (支石墓群, 청동기시대)
산막마을 회관 앞에 위치한 유자나무 밭 가운데에 3기의 지석묘가 민묘와 함께 산재해 있다. 상석의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며 모두 지석이 확인된다. 상석의 가장 큰 규모는 240×200×160㎝이다. 장축방향은 동~서이며 4개의 지석이 확인된다.
3) 강릉도호부사이영화유허비각(江陵都護府使李英華遺墟碑閣, 1742년)
가. 현황 : 산막마을의 뒷산인 산막산의 산줄기를 의지하고 비각이 자리 한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기와담장으로 둘러 있으 며 一門이 있다. 비는 화강암 석재로 같은 재질의 비갓을 갖추고 있다. 비의 전 면에는 “通政大夫行江楞大都護府使原州李公英華山幕遺墟碑”이라 새겨져 있고, 규모는 높이 230㎝, 너비는 60㎝, 두께 42㎝ 이다. 마산면 일대로 낙향한 원주 이씨의 파시조격인 李英華 선생이 이곳에 낙향하여 山幕을 짓고 살았다하여 이 곳을 산막리라고 전한다. 公은 무과에 등제한 후에 직산현감을 거쳐 강릉부사에 임직했으나 얼마 후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 산막리에 낙향 하였다고 한다. 유허비는 1742년 장흥인 高光善이 撰하여 건립하였다. 비각 옆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의 原州李氏禾祧之廟가 있다.
나. 관련사진가. 현황 : 마산면 일대로 낙향한 원주이씨의 파시조격인 李英華 선생이 이곳에 낙향하여 山幕을 짓고 살았다하여 이곳 을 산막리라고 전한다. 公은 무 과에 등제한 후에 직산현감을 거쳐 강릉부사에 임직했으나 얼마 후 관직에서 물 러나 이곳 산막리에 낙향 하였다고 한다. 비각 옆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 배지붕의 原州李氏禾祧之廟가 있다. 1910년대에 건립된 정면에 1문의 맞배 지 붕과 흙 돌담장에 기와로 둘러져 있다.
나. 관련사진
다. 특이사항 : 관리자 〔방원회(현 문임 이형진) (면적 : 20평)〕
4) 산막리산성지 (山幕里山城址, 고대)
해남만이 만입되는 곳에 자리한 산성으로, 토축과 석축이 혼합되어 있다. 무진봉 정상을 500m의 성벽이 감싸고 있으며, 대부분의 성벽은 토축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길이 20m의 “마장터”는 계단식으로 조성하여 성축을 보완하고 있다. 성내는 평탄한 구릉으로 이곳의 흙을 삭토하여 성벽을 구축하였다. 『문화유적총람』에서는 백제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산 정상에 축조하여 기마병 양성소로 사용하였다고 전하며 현재도 주민들은 이곳을 말달리재 라고 부른다. 가장 양호한 성벽의 높이는 80~100㎝, 폭 530㎝이며, 서남벽은 자연암벽을 주로 이용하였다. 죽산성을 방비하는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공세포 (空稅浦)
이 지역에 바닷물이 들어 올때 포구가 형성되어 선박에 의한 사람 및 물류 운송지역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해남지역의 농산물을 공출하는 통로로 이용되었으며 농산물 저장창고가 있었으나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흔적이 없고 당시 사용했던 작은 우물이 있다.
6) 산막동계 (山幕洞契)
산막동계는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산막리에서 약 30여년 전까지 행하여졌던 동계이다. 자료는 본래 산막리에서 거주하는 이갑배(李甲培) 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영산사에 새로 마련된 유물전시관에 전시중에 있다. 또한 1990년에 해남문화원에서 간행한 『해남문헌집』에는 좌목을 제외한 일부가 수록되어 있으며 보관상태는 1720년의 『계안』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동계는 기본적으로 원주이씨가 동계의 주 구성원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원주이씨의 이성친(異姓親)으로 약간의 타 성씨가 포함되어 있다. 기존의 동계원을 제외하고 새로 동계원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절차가 있으며, 이절차를 거쳐야만 동계원이 될 수가 있었다. 그 절차는 청입(請入)⇒행사(行査)⇒추입례(追入禮)⇒행례(行禮)의 4단계가 기본 절차이다. 청입의 자격, 방법의 자세한 내용은 자료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장자의 경우 부가 생존해 있을 때는 동계의 가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동계의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시된 것은 산막동계원 상호간의 공동부조(共同扶助)였다. 동계에서의 상호부조는 그 내용이 혼인과 상장(喪葬)에 더욱 치우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동계에서의 상장부조는 4상에 한정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산막동계에서는 계력이 미력한 탓으로 그 혜택이 4상 전부에 미치지 못하고 4상중 2상만을 부조의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 2상의 지급 범위도 1상은 계원 본인을 위한 것이며, 나머지 1상은 계원의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산막동계의 경우 자료에 나타나는 계의 직임은 매우 간략하며, 구체적인 직무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우선 자료상으로 보이는 직임은 계장, 공사원, 하유사, 계사령, 정도이며 동임으로 동장과 수집강이 보이고 있다. 또한 판계는 4상에 필요한 경비와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하여 동계와는 별도로 조직된 것이다. 상장에의 상호부조는 대부분의 동계에서 관찰되는 것이지만, 상계는 그것이 특정화된 것이다.
향약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사족들의 계급적 이해를 반영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조선왕조가 개창된 이후 사족들은 향약의 시행을 위하여 수차례 국가적인 시도를 하게 되었고, 이는 조광조의 향약보급운동이나 선조 연간의 향약실시 등으로 표면화되기도 하였다. 동계는 지방의 몇 개 동리를 중심으로한 사족들의 결집체였다. 동계는 군현단위로 실시된 향약이나 향규의 경제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고 향촌지배를 위한 수단의 하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동계는 조선후기의 사회변동에 짝하여서 일정한 변모를 거쳐 상하합계로 등장한다든지, 동계가 공동납의 최하부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지역에 따라서는 하층민들의 의식성장에 따라 분동(혹은 분계)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변하지 않았던 기본적인 논리는 향약이든 동계든 상호부조의 원리가 밑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12. 주민생활상 및 교육.
다른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인구가 갑자기 줄어 노은층이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으며 미맥중심의 영농형태를 보이고 있다. 집성촌 마을로서 각종 문중행사에 참여하고 주민간 학렬이 엄격히 존재하는 편이다. 구정시에는 회관에서 합동세배가 행해지고 있으며 마을공동체를 이루어 마을환경 가구기에도 적극참여 하고 있다. 또한 비교적 교육열이 높은 마을에 속하며 옛부터 서당에서 천자문을 비롯해 여러 가지 교육을 해왔으며 최근 까지도 높은 교육열 때문에 자녀들의 고학력 진학률이 높은 편이다.
13. 특기사항.
마을 입구 노하리와 인접한 지역에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도로가 개설되었으며 최근 간척사업으로 해암교가 설치되면서 해남에서 목포간 도로 교통량이 급격히 증가되었다.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이 강한 편이고 예부터 내려온 전통을 지키고 쇠퇴되어가는 마을을 지켜내기 위해 마을 환경을 정비하고 살기좋은 마을가꾸기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14. 인물
-
15. 자료 문헌 및 작성시 참여자
- 산막통계자료 - 영산사 유물전시관
- 해남문헌집 - 1990년 해남문화원
• 이 오 성 (인) 마산면 산막리 개발위원장 (☎ 011-9432-5416)
• 이 민 석 (인) 마산면 산막리장 (☎ 010-3377-3389)
첫댓글 산막동계 사진 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