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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재 란 (서명 또는 인) | ||||
이장 |
노인회장 |
새마을지도자 |
개발위원장 |
부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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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을 기본현황
인 구 수(명) |
가 구 수(호수) |
토 지 면 적(ha) |
일반작물 |
겨울배추 7ha | ||||||||
총 |
남 |
여 |
총 |
농가 |
비농가 |
총 |
전 |
답 |
임야 |
기타 |
특작물 |
시설하우스 0.5ha 버섯재배사 |
94 |
41 |
53 |
40 |
31 |
9 |
180 |
11 |
32 |
125 |
12 |
주소득원 |
미맥 |
2. 마을 성씨분포
성 씨 |
세 대 수 |
성 씨 |
세 대 수 |
성 씨 |
세대수 |
원주 이씨 |
36 |
무안 박씨 |
2 |
영흥 민씨 |
1 |
광산 김씨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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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행정조직
이 장 |
이 승 관 |
새마을이지도자 |
이 훈 재 |
개발위원장 |
이 연 하 |
부 녀 회 장 |
오 숙 자 |
노인 회장 |
이 안 동 |
청 년 회 장 |
이 정 곤 |
4. 마을회관
<마산면 맹진리 마을회관>
• 위 치 :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 (505-4번지 407m², 505-5번지 620m²)
맹진리는 해남읍으로부터는 12Km 떨어진 북쪽에 위치하고, 마산면소재지로부터는 6Km떨어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총면적은 405㎢에 41가구가 거주하며 인구는 94명(남자41명, 여자53명)이다.
특작물은 배추와 마늘이 주로 생산되며 주소득으로는 쌀·보리이다. 본래 해남군 마포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적구역 폐합에 따라 대월리·평촌리·북창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맹진리에 편입되었다. 현재 맹진과 북창의 2개 잔여마을로 형성되어 있는데 맹진은 원주이씨가 동쪽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이지역의 유적은 맹진리 성지, 매향비, 지성묘등이 대표되고 있다.
• 설립일 : 1985년 건평 83m²
5. 주요시설물
①. 맹진리 477-2번지 임야(맹진정자) 면적 1596m²
②. 노인정 면적28m² 해남군 마산면 맹지리 505-4번지
③. 마을창고 66m²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 505-3번지
④. 연자방아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 477-2 번지
6. 민간조직
구 분 |
조 직 연 도 |
계 원 수 |
중 요 내 용 |
비 고 |
맹진동계 |
1965 |
65 |
답 맹진 220-1 220-2 |
1988m² 869m² |
마을부녀회 |
1970 |
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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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회 |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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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 이장
연 도 |
이 름 | ||
1960년도 |
이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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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도 |
이연하 |
이병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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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도 |
이규식 |
이홍석 |
이병국 |
1990년도 |
이승관 |
이정곤 |
이규종 |
2000년도 |
이홍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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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도 |
이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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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을형성 및 입향
맹진마을은 해남3대명지중 하나로 전해오며 학의 형국으로 만대산 큰 줄기인 서당골 밑에 위치하고 있다.
- 맹진마을 형성은 유적 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맹진리 산80-3번지에 남방식 지석묘(고인돌) 7기가 있으므로 오랜 옛날에도 대부족 마을이 형성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그이후로는 맹진리 성지(城地)-토성(土城)-퇴뫼봉과 매향비(埋香碑)-1406년(조선조 태종 6년)에 매향을 하고 향도 58명과 상당주민 1백인이 장군바위에 그 사실을 새겼다는 글로 보았을 때 많은 인구가 거주 했으리라 추측된다.
그 후 원주 이씨 이영화(李英華)와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의 다섯째 아들 이예건(李禮健)이 1489년에 마산면 산막리에서 이곳으로 분가 정착하고 오형제를 낳아 그 후손이 오늘에 이르러 원주이씨 동족 마을성을 이루고 있다.
9. 지명유래(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옛 지명)
맹진마을은 옥천천과 도암면, 계곡면의 일부물이 마을 앞으로 흘러와서 큰 하천이 흐르고 있다. 또한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바다가 육지로 변했지만 큰 강이 있어 사람과 배들이 오고가는 번잡한 포구였으며 바다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1764년 입 향조 후손들이 조창(漕倉-세곡을 운반하기 위하여 세곡을 보관한 창고)을 지어 운영 해 왔으므로 세곡촌(稅穀村)이라 하였다. 이후 큰 하천이 흐르고 큰 나루가 있었으므로 맏이, 큰(孟)자와 나루(津)자를 사용하여 맹진(孟津)이라 부르게 되었다.
○가막-바우【바위】창앞개 북쪽에 있는 바위. 빛이 검다.
○가장-굴【들】월암 서쪽에 있는 들. 가장 서리가 있었다.
○검다불【산】성죽골 동쪽에 있는 산.
○괴약-실【들】월암리 남쪽에 있는 들.
○괴용-바우〔괸바우〕【바위】맹진 남쪽에 있는 바위. 평평한 ○큰 바윗돌이 괴어있 다.
○괴용바웃-골【골】괴용바우가 있는 골짜기.
○괸-바우【바위】→ 괴용바우.
○구렁-굴【들】독골 동쪽에 있는 들. 구렁졌다.
○귀-배미【논】장구배미 북쪽에 있는 논. 귀났다.
○깃대-배미【논】맹진 동쪽에 있는 논. 측량 깃대를 꽂았었다.
○농-노두【다리】→ 북창교.
○대문안-골【논】월암 서남쪽에 있는 논. 앞에 대문을 단 부잣집이 있었다.
○대생잇-들〔대성들, 대성평〕【들】북창교 동쪽에 있는 들. 죽성산 (군산천) 밑이 됨.
○대성-들【들】→ 대생잇들.
○대성-평【들】→ 대성잇들.
○도리-메【산】→ 머구리.
○독-골【골】 월암리 북쪽에 있는, 외딴 골짜기.
○독-배기【들】 월암리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돌이 박혀 있다.
○독-시앰【우물】 맹진 복판에 있는 돌우물.
○동호-리(東湖里)【들】맹진 동쪽에 있는 들. 마을이 있었다.
○뒷-골【골】월암리 뒤에 있는 골짜기.
○땅-골【골】북창리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당집이 있었다 함.
○만숫-들【들】대성들 북쪽에 있는 들. 만석꾼이 날 명당이 있다함.
○맏-나루【마을】→ 맹진리.
○맏-나리【마을】→ 맹진리.
○말-나리【마을】→ 맹진리.
○말나릿-개〔맹진포〕【개】말나리 북쪽에 있는 큰 개.
○말-매〔선산〕【산】말나릿개 위쪽에 있는 산.
○매주-바우【바우】탕건바우 위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메주덩이처럼 생김.
○맹밧-골【들】월암리 동남쪽에 있는 들. 미영밭(목화밭)이 있었다.
○맹진(孟津)【마을】→ 맹진리.
○맹진-교(孟津橋)【다리】→ 북창교.
○맹진-포(孟津浦)【개】→ 말나릿개.
○머구리〔도리메〕【산】장사추 서쪽에 있는 산. ① 지형이 머구리(개구리)처럼생겼다 함. ②동그랗게 생겼다.
○먹멧-곡【고개】월암리 북쪽, 계곡면 반계리의 먹메로 넘어가는 고개.
○몰-바우【바위】파랑바우 위쪽에 있는 바위. 몰(말)처럼 생겼다.
○배부치-둠벙【둠벙】창앞개 북쪽에 있는 둠벙. 부근에 배를 붙였다(대었다) 함.
○범-바우【바위】파랑바우 위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범과 흡사함.
○보심꼬-배미【논】새언안에 있는 논. 지형이 보심 (버선)코처럼 생겼다.
○섶-바탕 : 맹진 앞에 있는 들. 섶 나무가 많았다.
○수무셋-들 : 맹진 동쪽에 있는 들.
○월천-다루 : 말매 남쪽에 있는 들. 다리가 있었다.
○이무께-배미 : 수무셋들에 있는 논. 흉년에 이무께(쌀겨)와 바꿨다 함.
○탑-골 : 맹진리에 있는 골짜기. 탑이 있었다.
10. 문화유적
①. 맹진리 성지(孟津里城地)
년대미상. 맹진산 68번지에 위치한 토축산성(土築山城), 일명 퇴뫼봉이라 한다. 소규모 산성으로 전쟁시 초소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됨 해발 150m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능선이 길게 뻗어 내려온 끝 부분에 위치하므로 옥천면과 계곡면 바다 쪽을 환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②. 매향비(埋香碑)
맹진리 북서쪽 만대산 능선 장군바위에 상단부 벌어진 암벽 안쪽에 10행 59자를 음각했다. 그 내용은 1406년(조선 태종6년)에 미타향도(彌陀香徒) 58명과 상당(上堂)주민 1백인이 매향을 하고 매향의식은 법각(法覺)의 주관하에 혜관(惠觀)등이 참여 하였고 매향은 그곳으로부터 5백보 지점에 하였다고 적혀 있다. 매향(埋香)은 민간구복적(民間求福的)인 성격이 강한 미륵신앙의 한 형태인데 이 매향의식은 향을 매개로하여 하생(下生)할 미륵과 연결되기를 기원하며 이후 미륵이 하생하면 향을 피우면서 미륵을 맞기 위하여 미리 바닷가 갯뻘에 침향 하였다. 이 향은 향을 피울때 그을음이 없어 특품 향이 된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제대로 해석하면 거기서 5백보이상 걸어가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보물이 있다는 전설이 있어 행여 보물이 있을까 하고 실제로 보물을 찿아 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③.고인돌
맹진리 산 80-3번지에 고인돌 7기가 있다. 이 지역은 오랜 옛날부터 큰 부족이 살았다고 추측된다.
④. 조산(造山)
맹진리 209-14번지 답 부근(경리정리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유실되었다. 대성평을 개답시 잔토를 쌓아둔 곳으로 추측된다.
⑤. 깃대매미(측량기점)
현재는 맹진리답 209-12번지이며 일제때 최초로 측량을 할 때 기를 꽃고 기점을 표시한 측량원점이였다고 한다.
⑥. 월천다리
옥천에서 흘러 내려온 냇물이 휘돌아 흘러 반달 같은 섬을 만들었다. 그래서 월(月)천(川)다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섬에서 한동안 이례장이 개장되었고 그마주하는 언덕에 물방앗간이 있었다.
맹진 뒷산 골짜기인데 중턱에 서당터가 있어 서당골이라 하며 이 서당에서는 많은 인물을 배출 하였는데 특히 이의신(李懿信)이 서당을 다니면서 둠벙샘에서 백년 묵은 여우가 변신한 처녀로부터 여의주를 삼켜서 지리에 능통했다는 전설이 있다.
⑧. 돌샘
돌샘은 3m깊이의 바위틈에서 깨끗하고 맑은 자연수가 용출되어서 이 금방에서 물맛 좋기로 유명했다. 이 물을 마시면 잔병치례가 없고 미네랄성분이 풍부했다. 이 샘이 있어 마을이 형성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맹진, 북창 150여 세대가 식수로 사용했으며 가물 때는 물이 약간 부족하여 새벽이나 밤중에 물을 길러 나르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여인네가 머리를 감으면 머릿결이 부드럽고 윤기가 나며 빨래를 하면 때가 잘 진다.
⑨. 맹진노두(맹진나루의 옛말)
맹진마을의 조창이 있어 세곡선이 드나들었으며 배를 빌려 타고 정유왜란을 피란하였다는 글로 보아 배가 많이 왕래했던 곳으로 추측된다. 물이 빠졌을 때에는 큰 노둣돌을 놓아 건너다니고 바닷물이 들어와 수위가 높아질 때는 나룻배를 이용하였다. 오래전 다리가 놓여 지금은 노둣돌이 거의 유실되고 맹진 정자에 몇 개 남아있다.
11. 주민의 생활상
원주이씨 집성촌으로 상부상조하고 효를 중히 여기며 효자 효부가 많이 탄생되는 인정 넘치는 마을이다.
맹진마을은 돌 사이에서 나오는 식수가 유명하여 150여 온 마을 주민들이 돌샘물을 식수로 사용하였으나 최근에 이르러는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서당골과 원효골에서 식수를 끌어와 상수도로 사용하고 최근에는 지하수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다.
320ha 논과 11ha의 밭을 경작하며 주로 벼농사와 보리를 많이 경작하고 있다. 또한 겨울배추와 마늘 참깨를 많이 심기도하며 주민들의 생활은 대체로 풍족한 편이고 주민들이 근면 성실하여 저축을 많이 하고 있다.
풍수 지리적으로 아들이 흔하고 딸이 귀하여 딸 낳기를 소원하기도 했다. 또한 앞뜰 대성들은 넓고 기름지고 대성보물이 풍부하게 넘어와서 매년 풍년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 마을 뒷산 서당터 모습 >
12. 교육
1611년 400여년전부터 내려온 마을뒷산 서당골에 서당방이 있어 선조와 광해군때 여의주를 득하여 풍수지리학에 능통했던 국풍 이의신(李懿信)을 비롯한 무과에 합격하신 호종장군 회령부사 이숙형(李淑亨) 영조때 첩지중추부사 의술의 대가이신 이진원(李振原)등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1981년 중반까지 서당방이 운영 최근 훈장을 맡으신 이재옥(李濟玉)께서 40-50명까지 천자·학어집·명심보감·소학·사서삼경·논어까지 가르쳤으며 최근에 이르러서는 마을민들의 생활이 윤택한 편이였으므로 자식의 교육은 최우선 이였기에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단국대 전남대 조선대등 95%의 진학률을 보여 학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현재 박사 2명과 석사10명등 수많은 학사를 배출 교육계와 공학계에 근무하고 있으며 각계각층에서 우수인력으로 활동하고 있다.
13. 민속
맹진마을은 마을어르신들이 주축이 되어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기원하며 궁구(농악)놀이가 정월 초부터 대보름을 기해 세시풍속으로 펼쳐졌는데 풍물을 치며 마을샘(돌샘), 당산굿(정자나무) 그리고 가가호호마다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등을 하여 희사받은 쌀과 돈등을 마을 기금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였으며 1970년대는 면에서 주관하는 궁구(농악)놀이 경연대회에서는 입상도 했다. 지금도 노인회 주관으로 온 주민이 참여해 정월 대보름 저녁에는 정자나무에서 금줄을 치고 불을 밝혀 가정마다 축원을 빌며 고사를 마련해 정성껏 당산제를 모시고 하루를 즐기는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추석(팔월대보름)때는 마을 정자나무에 그네를 설치하여 그네뛰기와 강강술래로 젊은 아가씨들과 총각들이 신분향상과 높은 이상 그리고 포부를 펼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하였다. 음력 2월 1일에는 맹진·북창 양리 마을 주관으로 마을 대·소사를 논의하는 대동회의를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매년6월 보름에는 유두행사로 맹진·북창리장 주관으로 양리 화합과 안녕을 기원하며 각자 집에서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해와 농민들을 격려하고 대접하며 마을 어른신들을 봉양하는 풍속이 유지해 오고 있다.
< 마을 풍물패 단원 >
14. 미담
< 마을 표지석 모습 >
< 순천 민속촌 효도관광 >
15. 특기사항
맹진마을의 자랑인 2층의 맹진정이 있다. 맹진정은 맹진리 47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언덕에 서 있다. 뒤로는 서당골이 있고 앞으로는 대성들이 넓게 트여 있으며 옥천의 물과 강진(도암)의 물이 월천(月川)을 감돌아 시원스럽게 흘러간다.
여름이면 쉬엄없이 바람이 일어 속이 서늘할 정도로 시원하다. 이정자는 범죄없는 마을선정 검찰청의 상금과 마을사람과 출향인들 55인의 성금으로 1986년 2월에 준공하였다. 또한 군나무로 지정된 높이 22m 둘레 4.5m 수령 450년된 느티나무가 있고 높이 18m 둘레2.2m 수령 350년된 이팝나무가 있다. 이 이팝나무는 쌀밥나무라고도 하며 이정도의 수령은 흔치않다.
16.인물
①. 참봉공(參奉公) 이주(李柱)
공은 입향조 이예건(李禮健)은 셋째아들로 성동(城東)에서 부모를 따라 맹진 계령(桂嶺)아래 새터를 잡아 자손과 함께 세거하였다. 나루머리 대성평(大成坪)은 갈대밭이었는데 아버지를 도와 함께사는 마을 사람들을 일깨워 원장을 막고 대성보를 쌓고 논두렁을 쳐서 경작을 지도하니 사람들이 대성평이라 이름하였고 나루머리에 공의 큰 덕을 기리어 공덕비를 세웠다(1570년 4월 6일 졸). 미암 유선생(眉岩 柳先生) 희춘(希春)의 문집일기 왕복편(往復編)에 공의사적(事績) 일부가 쓰여 있음.
②. 회령부사 이숙형(李叔亨)
참봉공(參奉公) 이주의 둘째 아들로 1563년생이며 1582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1583년 중시(重試)에 합격하였으나 임진왜란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공신록에 올랐다. 선조가 회령부사를 제수하면서 친히 손을 잡고 술을 내리시고 공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조선신록) 조예 깊은 학문과 탁월한 재기(才氣)가 임금의 총애를 받았고 정치를 말할때는 거의 유류(遺溜)없음에 모두가 경복(敬服)하였다. 영의정 남위(南瑋)가 아끼고 신임하여 첩까지 주었다(1595년졸).
③. 만정처사(萬亭處士) 이희안(李希顔)
참봉공(參奉公) 이주의 손자이며 진사공 이숙기의 아들로 1569년에 해남 마포 맹진에서 생(生)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부모를 섬기는 일과 스승을 존경하는 일이며 형제에 우애하는 도를 수신의 대본으로 삼아 자만하지 않았으며, 학덕이 높아 그때 석학으로 이름높은 시서 김선(市西金璇)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송암 나풍기(松岩 羅豊基), 감사 임덕현(監司 林德顯), 생원 이영(生員 李濚)등과 도의로써 사귀었고 성리지설(性理之設)과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강론하고 상춘풍국(賞春楓菊)에 서로 모여 술을 마시면서 시부풍운(詩賦風韻)으로 흉금을 털어놓았으며 세리나 영달에는 뜻이 없었다.
만대산하에정사(精舍)를 지어 여생을 보내니 그 정사를 만정(萬亭)이라 하였고 공의 유작으로는 정로가(正路歌) 소필가(蔬弼歌)등을 남겼다.
④. 선교랑 예빈시주부(宣敎郞 禮賓侍主簿) 이의신(李懿信)
입향조 이예건(李禮健)의 증손이다. 지리에 정통하여 상지관이 되었다(선조신록 33년 10월 기축일). 이의신(李懿信)은 그 학문이 제법 해박했다. 선조가 말하기를 전부터 국가에서 상지관을 두어 왔으나 이 두 사람에게 각기 동반직(東班職)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고했다.
1575년(선조8년) 대행왕비의 상례(喪禮)때 그 이론이 정연하여 여기에 감복한 여러 대관들 사이에 선산 구하는 일이 한 때 유행하였다.(조선 한학의 사대가로 불리는 택당 이식의 선영을 소점해 주었다는 기록이 택당집에 실림).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 무덤소점 훗날 두명의 황제가 나옴 고종황제 순종황제) 광해군에 이르러 궁내에 흉사가 자주 일어나므로 광해군에게 새 도움터를 구할 것을 명받고 새 도움터를 잡아 경기도 파주 교하(交河)가 적지라고 계진 하였는데 20여차례의 반대상소로 실현하지 못 하였다(광해일기, 연려실 기술).
해남 강진 염암에 가는 곳마다 수많은 전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해남 윤선도(尹善道)의 묘자리 설화는 유명하다. 이의신(李懿信)은 윤선도(尹善道)의 고숙이며 말년에 낙향하여 윤선도(尹善道)와 교유(交遊)하던 중 이의신(李懿信)이 밤마다 말을 타고 홀로 어디를 다녀왔다. 윤선도(尹善道)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하룻밤은 이의신(李懿信)에게 술을 취하도록 권하여 잠을 자게하고 윤선도(尹善道)는 이의신(李懿信)의 말을 타고 말이 가는 데로 두니 한 지점에 말이 서서 내려 보니 묘자리가 아주 좋아서 썩은 말뚝을 꽃아 놓고 돌아왔다. 다음날 윤선도(尹善道)가 이의신(李懿信)에게 좋은 묘자리를 보아 두었는데 같이 가보자고 하여 가보니 이의신(李懿信)이 잡아놓은 자리였다. 이의신(李懿信)이 놓쳤구나 탄식하고 돌아왔다.
강진군 성전면 금다리 금당의 설화다. 이의신(李懿信) 종증조 이지건(李智健)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터를 잡아주고 못(溏)을 파라는 말을 안했다. 감사의 표시로 이바지 한 짐을 이의신(李懿信)에게 보내면서 주고 오는척하면서 되돌아가 내외간에 하는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 오라고 했다. 저녁에 이의신(李懿信)이 처에게 하는 말이 마을 앞에 못을 파야 되는데 그 말을 안 했다고 했다. 마을 앞에 못을 파고 금당(金溏)이라하고 지금도 후손들이 잘 살고 있다.
영암군 삼호면에는 가제도라는 조그마한 무인도 섬이 있다. 이의신(李懿信)이 본인의 묘 자리로 잡아둔 곳인데(가제도 대암하) 파보니 바위에 관이 들어갈 만큼 파여 있다고 전한다.
맹진리 서당골에는 지금도 서당터가 있는데 옛날 이의신(李懿信)이 이 서당을 다니던 둔범샘옆 빗탈길에서 백년 묵은 백여우가 처녀로 둔갑해서 이의신(李懿信)에게 구슬(여의주)을 입에 넣게 하였다. 그런 후 다시 뺏어 처녀가 자기 입에 다시 넣었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했으며 여러 날을 반복해서 했다. 훈장은 이의신(李懿信) 얼굴이 수척하므로 자초지종을 물으니 사실을 말하므로 구슬을 먹음고 훈장인 자기에게 가져오라고 했다. 다음날 이의신(李懿信)이 백년 묵은 여우가 둔갑한 처녀가 구슬을 주자 구슬을 입에 넣어주자 머금고 훈장에게 달려가려는데 깜짝 놀란 백여우가 구슬을 되찾으려고 떠밀어 삼켜졌다. 이때 땅을 보았기 때문에 지리학에 정통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의신(李懿信)은 5형제의 자손이 있는데 후손은 중국 상해 부군과 국내는 함흥과 경주에서 번연하고 있다
<마을 뒷산 둔범샘 모습>
⑤. 향북당(向北堂)이극수(李克秀)통정대부 군자감정
공은 참봉공(參奉公) 이주의 증손이며 이희민의 자로서 1586년 5월20일생이다. 정유왜란시 공의 아버지 이희민이 공의 조모 광주이씨와 온 가족이 배를 타고 피난을 가다가 면성(지금의 무안군 몽탄) 숭달산에 이르렀을 때 왜적선을 만나 공의 할머니 이씨와 아버지 이희민이 피살되었다(1597년9월19일 졸). 공은 열두살의 어린나이로 공의 어머니와 누이들과 극적으로 살아나 피살된 공의 조모와 아버지 시신을 가매장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왜란이1598년 끝나자 공의 아버지와 할머니 유골을 찾아 선산 손좌에 모시었다. 동산아래 집을 짓고 이름을 향북당(向北堂)이라하고 북쪽을 향하고 살았으니 이는 뼈에 사무친 원수(왜적)가 남쪽에 있으므로 남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유작으로는 경란일기(經難日記) 행록(行錄)이 있으며 46세로 향북당에서 별세하시니 나라에서는 공의 효성을 기려 통정대부 군자감정(通政大夫 軍資監正)을 증하였다.
⑥. 첨지공(僉知公) 이진원(李振原)
공은 참봉공(參奉公) 이주의 6대손이며 1676 3월 9일생이다. 제중구생(濟衆救生)에 뜻을 품고 동의보감, 방약제편 음양이기 경락지학등을 통달하여 고명한 유의(儒醫)로 일국에 현달하였다 영조때 전의(典医)로 정초(旌招)되었으나 하향하여 후학 교육에 전염 하였고 탁월한 의술로 궁핍한 사람들을 의술로 구휼 하였다. 벼슬은 통정대부 첩지중추부사(1758년 졸).
⑦. 통정대부 이석장(李碩障)
참봉공(參奉公) 이주의 9대손이며 1784년 9월 23일생이다. 지행(志行)이 독실하고 학문에 힘써 가율을 엄이하였다. 1848년에 해남과 강진의 제족을 함께 묶는 해강합보(무신보)를 수보함으로써 제족단합과 발전에 힘썼다.
1860년 (철종 11년) 흉년의 곡간을 열어 가난한 이웃을 구휼하여 인근 주민들로부터 의인(義人)으로 칭송 받았다. 대성보를 수리하고 튼튼히하여 재해방지에 대비하였다.
⑧. 현 각개 각층에서 인재들이 많다. 학계에서는 이선무 군문학박사와 이광호 수학박사가 있으며 재계해서는 선박 계통의 그라스 회장 이종하가있고, 관계에서는 이호경(함평 부군수)이가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인재들이 있다.
성 명 |
출생 년 월 일 사망 년 월 일 |
주요 경력 및 수상내역 |
참 고 문 헌 |
이호경 |
1954. 12. 30 |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전남도청 국장 함평 부군수 녹조 근정 훈장(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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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하 |
194. 11. 9 |
조선대학교 화공학과 졸업 육군 중령 육군사관학교 교수 육본감찰관 맹호부대 파월(월남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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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 |
1948. 11. 15 |
명지고등학교 졸업 해남군 군의회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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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하 |
1945. 6. 6 |
한국해양대학원 수료 (주) 그라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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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기 |
1941. 6. 5 |
동광고등학교 졸업 (주) 성원 코리아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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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석 |
1958. 9. 19 |
한양대학교 전자 공학과 졸업 SK 브로드 밴드 전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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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하 |
1945. 11. 9 |
동성고등학교 졸업 전 마산농협 조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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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환 |
1931. 10. 13 |
국민대학교 정치학과 수료 전 마산농협 조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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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복 |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농협중앙회 장성군 지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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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배 |
1952. 11. 19 |
전남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농협중앙회 해남군 지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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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현 |
1966. 4. 19 |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이백현 신경외과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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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대 |
1962. 7. 6 |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문학교 교수 국문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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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
1968. 12. 28 |
미국오리건주립대학교 졸업 수학교육학 박사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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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진 |
1973. 4. 22 |
일본 히로시마 국립대학 교통공학과 졸업 공학박사 국토연구원 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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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수 |
1977. 8. 25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학과 졸업 잉ㄹ본큐수대학 대기 환경학과 졸업 이학박사 국립수산과학원 재직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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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호 |
1977. 4. 22 |
서울대 물리학과 천문학부 졸업 천문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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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길 |
1944. 7. 22 |
1966년 월남전 참전(맹호부대) 사단장 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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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동 |
1932. 9. 25 |
해병대 병장 국가 유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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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후 |
1933. 4. 21 |
해병대 병장 국가 유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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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조 |
경찰 순경 국가 유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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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배 |
1932. 9. 24 |
헌병 중사 국가 유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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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옥 |
1944. 11. 19 |
1966년 월남전 참전 참전 유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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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술 |
1944. 12. 2 |
육군대령 국방대학(수려) 졸업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30기계화사단 연대장 |
17. 자료 제공자 및 편집인
자료 제공자 이병종(李炳琮) 이연하(李連夏) 이병국(李炳國)
이성만(李成萬) 이승관(李承官) 이정곤(李貞坤)
편집인 이훈재(李燻在) 이주배(李周培)
첫댓글 훌륭한 우리마을의 자료 이렇게 자랑스러울수 없읍니다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이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