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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아래 잠들다
한숙희 作
등장인물
옥순
시어머니
친정엄마
아낙
박씨
무대
전형적인 시골 방이다. 이불이 얹어진 낡은 문갑과 요강이 있다. 무대 왼 쪽에는 자그마한 창이 있고, 오른쪽에는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마 당에는 작은 평상이 놓여져 있다. 무대 뒤쪽에는 반원의 언덕이 보이고, 언덕 위에는 영물스럽게 보이는 웅크린 소나무가 있다. 언덕은 바깥으로 나가려면 꼭 거쳐야만 하는 통로이다.
1.
앉아 있는 시어머니, 잠꼬대를 하며 졸고 있다.
시어머니를 주시하는 친정엄마, 문갑을 열고서 색이 바랜 꽃분홍 한복을 꺼내어 눈 깜짝할 새 입는다.
친정엄마, 거울을 보며 머리와 눈썹을 매만진다.
사이.
친정엄마, 부리나케 속바지를 내리고서 요강에 앉는다.
엉덩이에 힘주는 친정엄마, 이내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졸던 시어머니, 뒤로 벌렁 자빠진다.
놀라 벌떡 일어나 앉는 시어머니, 친정엄마 똥 누는 모양새를 보고서는 코를 막으며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다.
시어머니: 아따! 뭘 처묵었는지 냄새 한번 고약스럽네.
옥순, 머리에 쓰던 수건으로 먼지를 털며 방으로 들어온다.
시어머니: 이년아, 느 엄니 똥 싼다.
친정엄마, 부리나케 속바지를 올리며 방에 앉으려 한다.
옥순, 화장지를 뜯어 닦아준다.
옥 순: 엄니는, 밑은 닦아야지. (속바지를 올려주며) 노인네가 하루에 똥을 몇 번 을 싸는지 모르겄네.
시어머니: (치마를 들치며) 옷에 똥이 묻었냐? 어쩠냐?
옥 순: (한복을 벗기며) 이 옷은 왜 또 입고 있어요. 엄니, 여그다 똥 묻히면 갖 다 버릴 텐께 알아서 혀요.
시어머니: (벗긴 한복 냄새를 맡으며) 어찌 냄새가 난 것도 같고, 안 난 것도 같고.
시어머니, 한복을 입으려 한다.
친정엄마, 빠른 손놀림으로 한복을 빼앗는다.
친정엄마: 이거, 나 것이요.
시어머니: 아따! 힘이 장사네. 당장 모래판으로 가도 쓰겄소.
다시 한복을 빼앗으려는 시어머니.
시어머니 : 이리 주쇼.
옥순, 친정엄니와 시어머니에게서 한복을 빼앗는다.
옥 순: 이리 줘요. 냄새 빠지게 밖에다 좀 널어놓게.
친정엄마: (옥순을 밀어내며) 냄새 안나. (얼른 문갑에 넣으며) 냄새 안 난다, 옥순 아.
시어머니: 니 엄니는 뭐 맛난 거 혀줘싸서 힘이 그러고 장사다냐? 나도 맛난 것 쪼 까 혀줘봐라.
옥순, 요강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시어머니: 저년, 저거 시에미가 얘기허는디 듣는 척도 안허네. (친정엄마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솔직히 말해보소 사돈. 딸이 나 몰래 뭐 맛난 거 먹입디요?
친정엄마: 아녀요. 지는 물 말아서 딱 한 숟가락 밖에 안 먹었어요.
시어머니: 아따메! 그놈에 숟가락 크기도 헌갑네.
옥순, 빈 요강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다.
옥 순: 어머니는, 지가 언제 친정엄니만 맛난 거 줬다고 그런데요.
시어머니: 그러면 나는 왜 똥을 쌀라고 똥구녁이 찢어져라 힘을 줘도 나올라고 생 각을 안 허는디, 니 엄니는 어찌 된 것이 요강에 앉었다 허면 바지기로 싸대냐 싸대길.
옥 순: 어머니, 저녁 드려요?
시어머니: 밥? 그려. 맨 나물때기만 상에 놓지 말고, 장에서 애비 줄려고 사온 조기 새끼 한 마리 바싹허니 좀 구워 와라. (머리를 만지며) 어째 어질어 질험서 니 낯판때기가 둘 서이로 보이는 것이 생선 쪼가리라도 묵어야 쓰겄다.
옥 순: 어머니는, 언제 장에 댕겨 오셨다고 그런데요. (한숨을 내쉬며) 내일 밭일 혀준 거 돈 받으면, 읍내 가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돼지고기 한 근 끊 어다가 고추장 넣고 맛나게 볶아 드릴께요.
시어머니: (침을 꿀떡 삼키며) 그려. 그러면 나가 사온 조기새끼는 있다가 애비 오 면 구워줘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근디 애비는 어딜 가고 여적 안 온 다냐?
옥 순: 어머니, 애비 여기사람 아니잖어요. 정말 왜 이러셔요?
옥순,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간다.
시어머니, 눈물을 글썽거린다.
사이.
시어머니: 뭣이가 그렇게 급하다고 그라고 휑허니 갔다냐…. 나는 어찌 살라고.
살포시 다가오는 친정엄마, 시어머니 손을 잡아준다.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운다.
사이.
옥순,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옥 순: 어머니, 드셔요.
울음을 뚝 그치는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밥상 앞으로 다가서려는 친정엄마와 이를 붙잡는 시어머니.
시어머니, 밥상 앞에 먼저 다가앉는다.
그러고는, 힐끗 밥상을 쳐다보고서 돌아앉는다.
시어머니: 나, 안 묵을란다.
친정엄마, 숟가락을 들다가 얼른 놓는다.
옥 순: 어머니, 왜 그러셔요. 내일 돼지고기 볶아 드린다고 혔잖아요. 앞으로 고 기 반찬 많이 혀드릴 테니, 어서 드셔요.
시어머니: 내일은 내일이고, 나가 소새끼, 염소새끼도 아닌디 어째 풀만 먹고서 산 다냐. 밥 안 먹을란다. (누우며) 내일 돼지고기 사오면 그때나 불러라.
옥 순: 안 잡수시면 어질헌 거 더혀요. 오늘 잘 잡수시면요, 내일 풀빵도 사다 드릴께요.
옥순, 시어머니를 일으켜 세운다.
옥 순: 어서 드셔요.
시어머니: 볕이 뜨건디, 여적 있을라나?
옥 순: 그럼요.
친정엄마, 숟가락을 만지작거린다.
시어머니, 숟가락을 들다가 친정엄니를 힐끗 쳐다본다.
시어머니: 겨우 서너 개 사오지 말고, 넉넉허니 사와라. 니 엄니가 묵고 나면 나 몫 은 없은께.
옥 순: 예.
시어머니, 아직 숟가락을 안 들고 있는 친정어머니에게 숟가락을 쥐어준 다.
친정엄마, 숟가락을 쥐자마자 밥을 막 몰아넣는다.
옥 순: 엄니, 천천히 들어요.
이가 부실한 시어머니, 음식을 씹지 않고 꿀떡 삼키며 식사를 한다.
시어머니: 죽은 영감이 뒤쫒아오는갑다. 어젯밤에도 누구 아부지, 누구 아부지 혀싸 서 나가 잠까정 설쳤다. 긍께 옆구리 쿡쿡 쑤실 때 나한테 오지는. 니 아부지는 아들도 못난 여편네가 뭣이 좋다고 꿈속에까정 나타나는지 모 르겄다. 나봐, 믿음직스런 아들 딱허니 낳고 잘 살잖어.
옥 순: (큰소리로) 다 지난 얘길 왜 자꾸 허셔요.
시어머니: (숟가락으로 상을 세게 두드리며) 이년이, 어디 시엄니헌티 눈구녁을 똑 바로 뜨고 큰소리여, 큰소리길. 사실적으로 얘길 혀서 날 놔두고 니 친정 아부지가 니 엄니랑 혼인혀서 니 집이 그렇게 풍비 박산 된 것이여.
옥 순: 지발이지 그 말 좀 고만 허셔요.
시어머니: 내가 뭐 없는 말혔냐. 사람은 말이여, 자고로 하늘이 점지 해준 짝하고 혼인혀야 허는 뱁이여. (반쯤 풀이 꺾여서는) 금시라도 나랑 혼인 헐 것 같이 혀놓고서는, 도시 물 쪼까 먹은 니 엄니가 뭣이 좋다고…. (문갑을 가리키며) 저 놈의 한복땜시… 꽃분홍 한복을 입고 나타난 니 엄니헌티 눈이 뒤집혀서 나 같은 것은 뵈지도 않는가, 아주 깨까시 잊어버리고…. 옥 순: 이젠 지겹지도 않으셔요?
시어머니: 지겹긴 뭐가 지겹냐?
밥상을 뒤엎는 시어머니.
시어머니: 그 일만 떠올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여 나가. 니 아부지가 뭐, 니 엄니가 좋아서 혼인헌 줄 아냐? 천만에 말씀이여. 암 천만에 말씀 이지. 나도 그 꽃분홍 한복 입었으면… 니 엄니는 쳐다도 안 봤어. (친정 엄마에게) 남의 남자 뺏은 기분이 어떱디요?
친정엄마: 내가 미안하요, 사돈. 사돈 볼 낯이 없네요. 지가 박복해서 딸년 신세나 지고 있고. 에미 고만 나무라셔요.
시어머니: 아따, 옳은 말허는 거 본께 정신이 돌아왔는갑네! 입에 곰팡이 쓸라 싶 으면 정신이 돌아오고, 복 많은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니께. 불꺼 라. (누우며) 나 밥 다 묵었으니께 인자 잘란다.
옥 순: (일으켜 세우며) 어머니, 지금 누우시면 체허셔요. 앉아 계시다 소화 좀 시키고 주무셔요.
시어머니: (배를 만지며) 야야, 어찌 여그가 쿡쿡 쑤신다. 파스 갖다 여기 좀 붙여 봐라. 이가 없은께 씹을 수도 없고, 씹을 수 없은께 음식 맛도 모르겄고. 늙으면 죽어야 허는디.
옥 순: 어머니, 등 좀 내밀어 보셔요. 지가 두드려 드릴께요.
친정엄마, 문갑에서 파스를 꺼내려 한다.
옥순, 꺼내지 말라 눈치를 준다.
시어머니: (신경질적으로) 파스 안 갖고 오고 뭐허냐.
옥 순: 어머니, 이 밤에 파스를 어디서 사온데요.
시어머니: 저번에 사온 것은 다 어쩌고. 그것도 나 몰래 니 엄니 다 붙여 줬다냐? 좋은 건 다 지 엄니 혀주고. 나가 애비 오면 다 말헐란다. 애비야, 애비 야?
친정엄마, 파스를 들고 시어머니의 움직임을 따라 쫓아다닌다.
시어머니, 파스를 보자 다시 엄살을 피우며 앉는다.
친정엄마, 파스를 시어머니 배에 붙여준다.
시어머니: 거봐라. 느엄니가 붙이다, 붙이다 남은께 나 붙여 주는 거. 불 꺼라 나 이 제 잘란다.
시어머니, 눕는다.
옥순, 깊은 한숨을 내쉰다.
친정엄마, 눈치를 살피며 이불을 깐다.
시어머니, 그 이불 위에 냉큼 눕는다.
옥순 밥상을 들고 나가려한다.
시어머니: 시엄니 말이 개 콧구녁으로 들리냐. 얼른 불 안 끄고 뭐 허냐?
옥 순: 예, 어머니.
2.
동네 밭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인 옥순과 아낙, 개울가를 건넌다.
머리 위에는 수건을 두르고 있다.
관절염을 앓고 있는 옥순, 다리가 아픈지 연신 문지른다.
또한 이마에서는 비지땀이 흐른다.
아 낙: 얼굴에 웬 열꽃이여? 워메! 얼굴뿐이 아닌디. 온 몸이 왜 그려?
옥 순: 심장에 열이 있어서 그런 다네요.
아 낙: 심장도 열이 있어? 아따! 별놈의 소릴 다 듣것네. 어서 그려?
옥 순: 보건소서요.
아 낙: 아까 점심도 거르고 어딜 댕겨오더니 보건소 간 것이여? 심장에 열 있다 는건... 그거 아니여? 홧병? 저기, 서울 큰 병원에 한번 가보지 그려.
옥 순: 지는 암시랑 않어요.
아 낙: 요즘 시상이 어떤 시상인디 참고 문대? 참는다고 좋은 거 하나도 없어. 내 몸 어쩐지는 나뿐이 모르는디 그걸 모른 척허면 얼마나 서운해 허겄 어. 큰 병 만들지 말고 얼른 가봐.
옥 순: ...
아 낙: 땀은 왜 그라고 흘러싸?
옥순, 머리 위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옥 순: ... 힘이 드네요.
아 낙: 허기사 오늘 일헌디가 힘이 들긴 혀. 잠깐 쉬는 꼴을 못보고 눈치를 주니 께. 그나저나 땀내 나는 옷 갈아입고 얼른 읍내 좀 댕겨 와야는디. 그냥 이대로 후딱 댕겨 왔으면 쓰겄고만. 차림새가 뭐라고. 김말순이가 박 말순이 되는 것도 아닌디. 안 그려?
옥 순: 인생이 달라질지도 모르죠.
아 낙: 다 늙은 아짐씨 누가 쫓아오기라도 헐까봐?
옥 순: …
아 낙: 내일이 우리 집 양반 기일이여. 사는 동안은 지지고 볶음서 사네 못사네 혔어도, 가고 난께 한동안 마음이 쫌 거시기 허고 그러드만. 그려서 있을 때 잘 허라는 말이 나왔나벼. 그건 그렇고 제삿밥 챙겨 줄라믄 장에 댕겨 와야는디, 나이든께 만사가 귀찮고만.
옥 순: 저기, 읍내 가시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건네며) 돼지고기 한 근 허고, 풀빵 쪼까 사다 주셔요.
아 낙: (돈을 주머니에 넣으며) 노인네들 혀 줄라고 그러는구만. 효부가 따로 없다니께. 그나저나 친정엄니는 좀 어쩌? 시엄니 심통 부리는 건 여전허 지? 그 두 양반은 인연도 참 깊어. 처녀시절 거기 아버지랑 거시기 그 삼 각관곈가 뭔가 그렸다면서? (힐끗 쳐다보며) 사돈관계에다 지금은 한 이 불 덮고 사는 거 보면 인연은 인연이여.
옥 순: (헛기침을 하며) 저기...언덕배기 우리 집 밭 말여요. 팔면 얼마나 받을까 요?
아 낙: 고 코딱지 만헌 땅 얼마 허겄어? 그건 뭣 땀시 물어?
옥 순: 틀니하나 혀드릴까 혀서요.
아 낙: 친정엄니 혀줄라고?
옥 순: 시어머니 혀 드릴려고요.
아 낙: 몇 개 빠지긴 혔어도 시엄닌 음식 먹을 정도는 되지 않어?
옥 순: 몇 개 안 남았어요. 요즘은 자꾸 소화가 안 된다고 허신께, 잘 씹지 못허 셔서 그런가 혀서요. 뭐만 잡수기만허면 배가 아프다고 파스 갖다 달라 고 허시니. 엄살 같기도 허고... 자주 정신을 놓으셔서 더 걱정이고만요.
아 낙: 누가, 시엄니가? 두 분이 다 정신을 놓으시면 어쩐대. 자네 속이 말이 아 니겄고만. 아이고, 사는 게 왜 그런지!
옥순의 처한 사정이 안쓰럽고 답답한 아낙, 깊은 한숨을 내쉬다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다 웅크린 소나무를 보고서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한 표정을 짓는 다.
아 낙: 저기… 저번 달 상치룬 순천댁 얘기 들었어?
옥 순: 뭐요?
아 낙: 거시기, 구십이 넘어도 갈 생각 안 허는 시엄니 얼른 데려가라고 몇 날 며칠을 저 소나무서 빌어댔다는 소문 말이여. 정말 모르는 것이여?
옥 순: 누가 듣겄어요. 괜한 사람 잡지 마셔요.
아 낙: 아녀, 봤다는 사람이 여럿이여.
옥 순: (일어서며) 그만 가요.
아 낙: (앉히며) 저 소나무가 참말로 영물이긴 영물인가벼.
옥 순: 마을서 쉬쉬허는 얘기 뭐허러 허셔요.
아 낙: 왜 쉬쉬허는지는 알어?
옥 순: (알고는 있지만 모른다는 표정) 지는 몰라요. 그러고 알고 싶지도 않고만 요.
아 낙: 뭔 말이 그리 복잡혀. 아무튼 지간에 저 소나무에 얽힌 세세헌 얘긴 모르 지? 하두 쉬쉬거려싸서 대충만 알고 있을 것이여. 하하하! 우리 엄니가 말이여. 나 시집 보내 놓고선 걱정 됐는지 (흉내내며) “시엄씨가 시집살 이 되게 시키면 무조건 가서 빌어불어.” 험서 알려 줬잖어.
주위를 살피는 아낙.
아 낙: 글씨 옛날에 누구처럼 시집살이 고되게 허던 며느리가 있었는디 말이여. 어찌나 그 시엄니가 트집을 잡아 못살게 굴든지 잘허면 잘허는대로, 못허면 못허는대로 아무튼 마을사람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드만.
옥 순: 우리 어머니는 그 정도는 아니셔요. 말씀만 그렇게 허시지.
아 낙: 아니긴 뭐가 아녀. 거기 결혼 헐 때부터 요란한 거 동네가 다 알잖어. 거기 친정엄니는 남자 뺏어가고, 거기는 아들 뺏어갔다고 동네가 다 들 썩이게 반대 혔잖어. 거기 시집살이 옴팡지게 헌 거 우리 동네 사람들이 다 증인이여.
옥 순: 지는... 괜찮어요.
아 낙: (힐끗 쳐다보고서) 으이그! 그러겄지.
박씨, 나온다.
박 씨: 누가 증인이라고요?
아 낙: 워메! 깜짝이여. 누구... 복덕방 박씨 아녀?
박 씨: 뭔 얘길 그렇게 긴요허게들 허신대요?
아 낙: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여?
옥순, 일어서 가려 한다.
박 씨: 어딜 가셔요? 그치 않어도 뵈러 집에 갔다가 오던 중여요.
아 낙: 뭣 땀시?
옥 순: 난 볼일 없은께 가던 길 마저 가요.
박 씨: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허게 허신데요? 어제 제가 드린 말씀 생각 쪼까 허셨어요?
아 낙: 무슨 생각, 무슨 말씀?
옥 순: 난 헐 생각도 없고, 헐 말도 없고만요.
옥순, 집으로 향한다.
박씨, 붙잡는다.
박 씨: 성사 됐다고 벌써 말혀 버렸는디, 내 사정 쪼까 봐줘요.
아 낙: 지금 내가 본 형상이 뭔 그림이여?
박 씨: (얼른 놓으며) 봄이 왔나 싶더니 여름이네. 아이고, 덥다.
아 낙: 수상헌것이 내 심줄을 타고 올라오는디.
아낙의 의심스러운 눈초리.
박 씨: 이짝 저짝 아무리 봐도 근사 허다니께.
아낙, 자신의 엉덩이를 흘낏 쳐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아 낙: 뭣이가? 아따! 근사 헐 것도 없는 갑네.
박 씨: (옥순에게) 내일은 꼭 답변혀 주셔요. 전화 주셔요. 아따! 저 소나무는 백 번을 봐도 백번 다 근사허다니께.
아 낙: 쳇! 저것이 얼매나 거시헌 것인디. 저 소나무에 대해서 모르는 갑네.
박 씨: 저도 알어요.
아 낙: 뭣 인디?
박 씨: (옥순에게) 내일도 답변 없으면 (소곤거리며) 땅주인 김순실할머니헌티 직접 도장을 콱 받으러 (큰 목소리로) 집으로 갈 텐께 알어서 허셔요.
아 낙: 무슨 답변? 왜 집에 가는디?
박 씨: (혼잣말로) 한번 걸리면 옴짝달싹 못 허게 헌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아 낙: 뭣이여?
박 씨: 오늘 본께 더 멋있네요?
아 낙: (소나무를 보며) 진짜로 모르는 갑네.
박 씨: 알어요.
아 낙: 모른께 멋있단 소리가 나오지.
박 씨: 그거 잖어요. 가서 빌면 멀쩡헌 노인네들 죽는다는. (입을 막으며) 오메! 내가 지금 뭔 얘길 헌 것이여?
옥순과 아낙, 놀란다.
박씨와 아낙과 옥순, 주위를 살핀다.
아 낙: 이봐, 그 말을 고렇게 크게 허면 어쩌.
박 씨: 아줌니 때문에. 하도 정신없게 굴어서. 들은 사람 없겄죠?
아 낙: 이 사람허고 내가 들었잖어.
박 씨: 안 들은 걸로... (혼잣말로) 퍼트리기 시작허면 속도가 고속도론디.
옥 순: 여그 계속 있다가는...
옥순, 가려하자 아낙 붙잡는다.
아낙, 옥순이 가려 몸을 빼자 얼른 가방을 빼앗는다.
아 낙: 그냥 가면 어쩌? 거기헌티 허던 얘기가 있잖어. 마저 듣고 가.
박 씨: 저는 그냥...
아 낙: 아이구! 어딜 가. 거기도 듣고 가. 어차피 시작은 거기, 아니지 내가 시작 혔지만. 아무튼 간에 거기도 한몫 혔잖어. 본께 다 아는 것 같고만. 이 사 람은 모르는 가벼.
박 씨: 설마요. 쉬쉬혀서 그렇지 아는 사람은 다 아는디. (일어서며) 전 이만.
아 낙: 앉어. (안거)
박씨, 가려 발걸음을 뗀다.
아 낙: 그냥 가면 마을 비밀 누설 혔다고 동네방네 얘기허고 다닐 텐께 알아서 혀.
박씨, 제자리로 돌아온다.
박 씨: 지가 언제 비밀을 누설 혔다고...
아 낙: 확! 내 귀 아직 건제혀.
박씨, 어쩔 수 없이 주저앉는다.
옥 순: ...
아 낙: (박씨에게) 눈치를 본께 수박 겉핥기로 알고 있는 것 같어. 우리만 자세 허게 알고 있으면 미안허잖어.
박 씨: 진짜요?
아 낙: 진짜고, 가짜고 간에 (옥순에게) 아까 내가 어디까정 얘기혔지? 아! 맞어. 그 며느리가 글씨 호된 시집살이에 힘들어 잠깐 골방에 가서 울기만 혀도 곡소리를 내서 집안 망허게 헌다고 문 걸어놓고 잡드리허고 그렸디아. 그 려서 이 며느리가 울 때도 없고 혀서 저 소나무에 기대고 앉아 울곤 혔는 디, 글씨 그 짱짱허던 시엄니가 시름시름 앓더니 얼마 안 가서 죽었다는 것이여.
박 씨: 나도 고런 얘기까정은 모르는디. 그 얘긴 어서 들으셨어요?
옥순, 자신도 모르게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아낙의 말솜씨에 빠져든다.
아 낙: 말 끊지 말고 가만있어봐. 그려 가지고 그 후론 저 소나무에 가서 빌면 즉빵이라잖여. (옥순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고! 나 같으면 가서는 우는 시늉이라도 한번 혀보겠네. 저 소나무가 몇 백 년이 넘은 것인께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빌어 댔겄어. (옥순 귀에 대고 손을 꼽아가며) 내 가 알기로도 순천댁 말고도 여럿 있다지 아마.
박 씨: 그려서 저 나무가 꼽추 마냥 굽었다고 그러대요.
아 낙: 맞어. 박씨가 지대로 알고 있고만. 그러고 보면 우리 마을도 참말로 웃겨. 무시라, 무시라 혀서 쉬쉬거릴게 아니라 베어버리면 될 일을 그대로 둠 서 소나무에 소자도 못 꺼내게 허는 이윤 또 뭐여. 여차 허면 지들도 가 서 빌겄다 이거 잖어.
박 씨: 듣고 본께 그러네요.
옥순, 박씨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멀리서 옥순을 부르는 시어머니 목소리 들린다.
시어머니: 에미야? 이년아?
옥순, 벌떡 일어나 들리는 곳으로 향해 급히 달린다.
아 낙: ... 노친네 잠시도 앉아 있는 꼴을 못 보고 불러대싸니...
아낙, 옥순이 놓고 간 손가방을 발견한다.
열어보는 아낙.
약봉지가 가득이다.
박씨, 아낙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나간다.
아 낙: 뭔 놈의 약 가지 수가 요렇게 많어? 관절염 있다는 건 알고... 어찌 된 것 이 더 먹은 나보다 부실허니 원.
어둑해지는 하늘.
아 낙: 아이고! 클났네. 장에 댕겨와야는디 벌써 어둑혀지네.
아낙, 나간다.
시어머니, 옥순을 부르며 뛰어나온다.
시어머니, 숨차 헐떡거린다.
시어머니: 니네 엄니 옷에 똥 싸서 냄새가 방안에 한 가득이다. 나가 참을라고 (코 를 막으며) 요러고 참을라고 혔는디 애지간 혀야지.
옥순, 나온다.
시어머니: 야,야. 니 엄니 똥 쌌다. 얼른 가서 니네 엄니 똥 치워라.
옥 순: 가요, 어머니.
시어머니: (주저앉으며) 아이고! 나는 다리가 아퍼서 더는 못 걷겄다. 여기다 놓고 가든 업고 가든 니 맘대로 혀라.
시어머니를 업은 옥순.
더욱더 어둑해지는 하늘.
시어머니: 그놈의 복이란 놈은 말이여. 왜 나헌티는 안 오는가 모르겄다. 언제가 복 이란 놈을 찾아서는 나가 물어 볼라 그런다. 받은 사람만 또 주고 주고 허지 말고, 이젠 나도 쪼까 달라고.
옥순에게 업힌 시어머니 스르르 잠이 든다.
옥순, 집으로 가기 위해 발을 뗀다.
순간.
시어머니: (눈을 반쯤 뜬 채) 니 엄니 뱃속에 든 똥은 참 착허기도 허다. 때 되면 척허니 알아서 나오니. 원허는 건 뚝딱 해결되는 니 엄닌 이래저래 참 복도 많다.
3.
방안.
친정엄마, 요강 안에 든 똥을 손으로 퍼내서 바닥에 문지른다.
옥순, 얼른 달려가 친정엄니 똥 묻은 손을 닦아준다.
시어머니: 아이고! 똥 썩는 냄새가 진동허네. 얼른 니 엄니 씻기고 문이랑 열어 냄 새 좀 빼라. 냄새가 쩔었네, 쩔었어.
친정엄마: 옥순아, 느 아부지 오셨냐? (머리를 매만지며)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 니지.
시어머니: 니 엄니 안 씻기고 뭐 허냐? (창을 열며) 하루라도 똥 냄새 안 맡고 살면 내가 아주 낼 죽어도 여한이 없겄다.
옥 순: 그럼, 우리 엄닌 어쩌라고요. 정신 온전치 않은 분을 어쩌라고 그런 말씀 을 허셔요?
친정엄마: (옥순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에미야, 그러지 마라. (시어머니를 보며) 미 안하요, 사돈. 내가 얼른 갈 것인 게 쪼금만 참아주셔요.
시어머니: 옷에다 똥 쌀땐 언제고. 니 엄니 정신 들었는갑다. 근디 사돈, 얼른 어딜 간다고요?
친정엄마, 문갑으로 다가가 꽃분홍 한복을 챙긴다.
시어머니: 어디를 간다고 그러요. 나도 데려가소. 집에만 있은께 깝깝혀 죽겄소.
친정엄마, 시어머니를 밀쳐내고 혼자 나가려 하자 시어머니 약이 올라 삐친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옥순, 몸에서 힘이 쫙 빠진다.
아낙, 돼지고기와 풀빵이 든 봉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온다.
아 낙: 아이고! 이게 뭔 냄새여?
시어머니: 뭔 냄새긴 뭔 냄새여, 지 엄니가 싼 똥 냄새지.
아 낙: 그러면 얼른 씻겨드리지 뭐 허고 있어?
시어머니: 그 손에 든 건 뭐여?
아 낙: 이거요? 할머니는 눈도 좋으셔. (봉지를 건네며) 이 사람이 할머니 혀드 린다고 읍내 가는 길에 돼지고기랑, 풀빵이랑 사다 달래서 사왔어요.
나가려던 친정엄마, “풀빵” 소리에 고픈 듯 배를 움켜잡으며 시어머니 뒤 를 졸졸 따라다닌다.
시어머니: 풀빵? (꺼내어 먹으면서) 니 엄니는 이따가 씻기고 나 배고픈께 얼른 돼 지 고기나 볶아라.
아 낙: 아이고! 할머니는. 친정엄니 먼저 씻겨야지요.
시어머니: 똥 냄새는 맨날 맡고 사는디, 쬐끔 더 맡는다 혀서 죽을 것도 아니고. 참! (소곤대며) 그거 모르지? 저것이 지 엄니만 맛난 거 혀주고 나는 순 풀 나부랭이만 줘.
아 낙: 할머니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허신데요.
시어머니: 아녀, 봐. 얼마나 지 엄니만 먹여 놨으면 저래 똥을 싸댈 것이여. 나는 먹 은게 없어서 똥도 안 나와. 배고파서 배고픈 거 참을라고 (옷을 걷으며) 이러고 파스를 붙이고 있잖어.
아 낙: 할머니는. 그거 배 아프시다고 혀서 붙인 거라면서요?
시어머니: (버럭 화를 내며) 누가 그려, 저년이 그려? 응, 응.
옥 순: 아주머니, 이리 주셔요. (목멘 목소리로) 어머니, 저녁부터 혀드릴게요.
아 낙: 고추장이랑 양념 다 어디 있어. 나가 혀주고 갈 텐께, 얼른 친정엄니나 씻겨드려. (나가며) 부엌에 가면 다 있지?
친정엄마, 시어머니에게 풀빵을 달라며 한 손을 내민다.
좀처럼 주지 않고 약을 올리는 시어머니, 친정엄마가 두 손을 내밀자 풀 빵을 건넨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사이좋게 풀빵을 나눠먹는다.
친정엄마, 시어머니 손에든 풀빵 봉지를 자연스레 손에 쥔다.
시어머니, 뺏긴 풀빵 봉지를 다시금 손에 쥐려 애쓰나 좀처럼 쉽지 않다.
4.
평상시와 달리 양복을 말끔히 차려 입은 박씨, 옥순의 집 앞에서 서성거 린다.
좀처럼 옥순이 나오지 않자 평상에 앉아 기다린다.
방안에 있던 시어머니, 주전자를 들고 마당으로 나온다.
시어머니: 저놈의 할망구는 뭔 놈에 낮잠을 밤잠 자듯이 자는지 몰라. 고놈에 꽃분 홍 한복까지 입고서는. 그나저나 입이 마르고 닳도록 얘길혀도 소양이 없다니께. 그때 그때 확인혀서 떠 놓으라고 혀도. (박씨를 보고서는) 누 군디 남에 평상에 주인마냥 앉아 있는 것이여?
박씨, 그냥 가려다 시어머니에게 인사를 한다.
시어머니: 누구여?
박 씨: 읍내서...
시어머니: (다가가 얼굴을 살피고는) 거 뭐시기 복덕방 헌다는 박영감 아들이고만. 어쩐 일이여?
박 씨: 며느님헌티 볼 일이 있어서요.
시어머니: 뭣 땀시?
박 씨: 그건... 만나서 직접...
시어머니: 뭔 얘긴디 나헌티 못 허고 직접헌다는 거여?
박 씨: 아니... 별건 아니고요.
시어머니: ... 혹시... 울 며느리헌티 딴 맘 갖고 있는 거여?
박 씨: 아녀요. 그건 절대로 아녀요.
시어머니: 당황허는 것이 요상헌디.
옥순, 먼지를 털며 나온다.
옥 순: 뭐가 요상허다고...
옥순, 박씨를 보고는 물이 담아 있는 대야를 쏟아 붓는다.
박 씨: 오메! 아, 차거.
옥 순: 한번만 더 오면 아주 똥물을 끼얹을 텐께 그냥.
도망가던 박씨, 가지 않고 시어머니가 방안으로 들어가길 바라며 몰래 옥 순을 기다린다.
시어머니: 니 둘이 거 뭐시냐, 요샌 말로 사귀냐?
옥 순: 별 말씀을.
옥순, 시어머니 손에 든 주전자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시어머니: 저거, 날 피허는 것이 진짠가 보네.
옥순, 주전자에 물을 채워 나온다.
옥 순: 피허기는요, 봐요. 어머니 앞에 이러고 서 있잖어요.
시어머니: 말혀 봐. 저 놈이랑 정분났냐?
옥 순: 왜요. 어머니가 엮어 주시게요?
시어머니: 아니, 이년이. 속 시원허게 말 못허냐?
옥 순: 복덕방 허는 사람이 우리 집에 뭣 땀시 왔겄어요. 좋은 땅 있은께 소개시 켜 주겄다는 거지.
시어머니: 우리 형편을 보고 그런 소리를 허라고 혀라. 동태 눈깔을 허고 댕기는 거 보고 내 진작에 알어 봤다. 그 눈으로 뭣 놈에 복덕방을 헌다고. 근디 점 심은 언제 챙겨 줄 거냐?
옥 순: 챙겨 드릴라고 일 허다 말고 왔잖어요.
시어머니: 아우! 뱃속에서 밥 달라고 아우성이여. 얼른 챙겨라.
시어머니, 방 안으로 들어간다.
박씨, 옥순 앞에 나타난다.
옥 순: (소곤거리듯) 내 말 어디 거꾸로 들어요?
박 씨: 그게 아니라...
옥 순: 싫어요. 절대로 안 혀요.
박 씨: 똥값과 다름없는 것을 잘 쳐서 주겠다는 데 왜 안 허겠다는 거여요? 이 금액 받게 해주려고 내가 얼마나 애쓴지 알어요?
옥 순: 애써 달라고 말헌 적도 없으니 다신 찾어오지 말어요.
박 씨: (매달리며) 얼마 만에 만져보는 구전인디. 다른디 보다 솔찬히 쳐 준다잖 어요. 이봐요.
부엌으로 들어가는 옥순.
박 씨: 틀닌가 뭔가 땜에 돈이 급허다고 들었는디.
멈칫하는 옥순.
박씨, 가방에서 계약서와 인주를 꺼낸다.
박 씨: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바로 넘길라고 (돈뭉치를 꺼내어 보이며) 이러고 갖고 왔는디.
옥 순: ...
박 씨: 지금 당장 갈까요? 할머니 얼른 나오라고 해요. 제가 업고 갈게요.
옥 순: ... 안 팔어요. 억만금을 준다고 혀도 절대로 못 팔어요. 절대로. (혼잣 말) 아들 주겄다고 아끼고 아껴서 사놓으신 땅... 못 팔고만요.
옥순,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려 한다.
박씨, 매달린다.
박 씨: 언제 가실지 모를 할머니헌티 식사는 제대로 허게 혀드려야지요.
옥 순: 지가 혀요. 지 일이라고요
박 씨: 아이고! 아줌니, 내 사정 쪼까 봐줘요.
시어머니: 배 골아 죽일 작정이냐?
친정엄마, 시어머니가 지르는 큰 목소리에 잠에서 깬다.
시어머니: 어이구! 밥 얘기 헌께 일어나는 것 봐. 그나저나 (문을 열며) 이년이 시엄 씨 굶겨 죽일려고 작정을... 워메! 저게 뭔 광경이여?
옥순, 멈칫한다.
박씨, 인주와 계약서, 돈을 얼른 챙겨 가방에 넣는다.
시어머니,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빗자루를 찾아 들고서는 박씨에게 달려간 다.
시어머니: 저것들이. 내가 아직도 눈을 똥그랗게 뜨고 살아 있는디 뭔 짓들이여? 내 가 아주 아작을 내주마.
시어머니, 박씨와 옥순을 때리다 빗자루를 놓치자 미처 들지 못하고 평 상에 놓여있던 박씨 가방을 들고서 때린다.
옥 순: 아녀요, 어머니.
시어머니: 아니긴 손을 맞잡고 있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디. 날 버리고 갈 라고 작당중이었냐?
박 씨: 그것이 아녀요. 사실은 말여요.
시어머니: 입까정 맞췄냐? 어찌 변명허는 것까정 궁짝이 맞다냐?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박씨.
옥순 또한 피해 다니다가 뒤에서 시어머니를 옴짝 달싹 못하게 안는다.
실랑이 속에 가방은 시어머니 발에 밟혀있다.
옥 순: 안 가고 뭐 혀요?
박 씨: 내 돈 가방...
시어머니: 저놈이 너헌티 뭐라고 험써 꼬시더냐? 나는 그렇다 쳐도 정신 온전치 못 헌 니엄니는 어쩔라고 연애질이이여, 연애질이.
옥 순: 어머니, 말도 안 되는 얘기 고만 입에 담으셔요. 지는 애비 밖에 없어요.
시어머니: 애비야!
시어머니, 행동을 멈추고 눈물을 글썽인다.
시어머니: (눈물을 훔치고는) 애비 놔두고 니가 그러면 안 된다. 그럼, 니년 저승서 똥통에 빠질 것이여.
사이.
옥순, 가방을 빼내어 박씨에게 던져주며 얼른 가라고 손짓한다.
시어머니: 니년이 딴 맘먹고 샛서방 얻으면 나가 저승 끝까정 쫓아가 뜯어말릴 텐 께.
시어머니, 치맛자락에 눈물을 훔치고는 코를 휑 푼다.
사이.
박씨, 가려 하다가 순식간에 뛰쳐나온 친정엄니 손에 붙들린다.
친정엄마, 감색 양복을 입은 박씨가 남편인줄 착각한다.
시어머니, 눈에 초점을 잃은 채 앉아있다.
친정엄니: 옥순 아부지, 언제 왔어요? (머리를 매만지며) 아이구! 지 몰골이 말이 아 니지요? 왜 이제 왔어요.
박씨를 찬찬히 살펴보는 시어머니.
시어머니: 워메! 어쩐 일이여요?
시어머니, 급히 방안으로 들어간다.
옥 순: 아이고, 엄니? 아녀요. 이 사람은 ...
친정엄마: 우리 옥순이 많이 컸지요?
박 씨: 지는 읍내 복덕방 박씨고만요.
친정엄니: 나예요.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옥순아, 얼른 아부지헌테 절 혀라.
옥순, 친정엄니 힘에 이끌려 절을 한다.
시어머니, 꽃분홍 원피스를 입고서 나온다.
옥 순: 어머니?
시어머니: 어때요? 꽃분홍 한복보다 더 이쁘지요? 지가 이거 사놓고, 이거 입은 모 습 뵈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고만요. (부끄러워하며) 이제야 뵈 드리네요.
시어머니와 친정엄니, 박씨 웃옷과 바지자락을 붙잡는다.
시어머니, 다시 눈물을 글썽인다.
치매 증상이 점점 심해지는 시어머니.
박 씨: 워메! 미치겄네. 아니라니께요.
시어머니: 나, 순실여요. 엄청나게 나가 좋다고 그렸잖어요.
친정엄니: 옥순 아부지, 어딜 그렇게 돌아 댕기고 이제 와요. 나도 델꼬 가요.
시어머니: 왜 그려요. 왜 날 안보고 딴 델 자꾸 봐요?
옥순, 시어머니와 친정엄니를 박씨로부터 떼어 놓으려 하지만 혼자는 역 부족이다.
박씨 또한 빠져 나오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시어머니와 친정엄니, 박씨를 움켜잡은 손을 더욱 더 꽉 쥔다.
아낙, 나온다.
아 낙: 이봐, 노인네들 밥 챙겨주고 온다더니 함흥차사라고 복길네가 성화여. 뭣 들혀? 할머니, 뭐 허셔요?
친정엄니, 박씨 품에 안기려 한다.
시어머니, 친정엄니를 박씨 품에서 떼어낸다.
그러고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인다.
아 낙: 노인네들 왜들 저러고 있어?
박 씨: 아줌니, 저 좀 빼줘봐요.
아 낙: 픙경이 쪼까 거시기허네. 홀애비 맘은 과부가 알아준다고. 한꺼번에. (작 은 목소리로) 여그 쬐끔 젊은 과부도 있는디.
박 씨: 나 좀 얼른, 뭐 혀요? 수단 쪼까 부려봐요?
친정엄마: 옥순 아부지, 이젠 날 두고 어디 가지 말어요..
시어머니: 나 쪼께 봐요. 내 얼굴 쫌 봐요.
박씨, 두 노인들 힘에 여전히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옥순, 두 노인을 떼려 애쓴다.
옥 순: 아줌니, 지 좀 도와 주셔요.
아 낙: 노인네들 호사 좀 부리라고 냅둬. 사내 냄시 맡은 지 오래 됐을 텐디. 봐, 노인네들 얼굴에 화색 도는 거.
박 씨: 아줌니들...
옥순, 부엌으로 들어간다.
박 씨: 난 어쩌라고 그냥 들어가 버려요.
아 낙: 부럽네요, 할머니. 남정네 품에 앵겨 본지가 언젠지. (손을 꼽아보다 포기 하며) 지 몫까정 많이 부리셔요.
옥순, 밥상을 들고 나온다.
옥 순: 엄니, 어머니 식사 허셔요.
친정엄마: 먼 길 댕겨 왔으면 시장 헐 텐디 식사 허셔요.
시어머니: (친정엄마를 밀치며) 식사 쪼까 혀요.
시어머니, 밥상이 허술하다 생각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시어머니: 나가 조기새끼를 어디다 뒀더라.
5.
그날 밤.
시어머니와 친정엄마, 낮에 입었던 꽃분홍 한복과 원피스를 입은 채 잠 들어 있다.
몸이 아픈지 여기저기를 주물러대는 옥순,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머리 맡에 앉아 있다.
옥순, 아낙이 말했던 웅크린 소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떠오른다.
떠오르는 이야기를 지우려 머리를 휘젓는다.
사이.
아픈 몸을 달래려 약을 먹는 옥순, 물이 없자 주전자를 들고 나간다.
친정엄마,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울부짖는 목소리로 잠꼬대를 한다.
친정엄마: 옥순 아부지, 옥순 아부지? 천천히 가요. 나예요. 왜 날 못 알아봐요. 내가 너무 늙어 버려서 그래요? (속바지를 붙잡고서) 요거 입을 때가 제 일 이쁘다고 당신이 그랬잖어요. 꽃분홍…. 나랑 같이 가요….
친정엄마,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허상(옥순아버지)을 쫓아 방안 을 휘젓는다.
주전자를 들고 들어오는 옥순, 얼른 친정엄니를 데려다 눕힌다.
시어머니, 잠꼬대를 한다.
시어머니: 이년아? 이거, 막 잡은 것인가 살이 연허니 맛나다. 또 줘, 이년아. 얼른 나 고기 더 주라. 음냐... 더 주라니께.
옥순,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를 바라보며 시름에 잠긴다.
옥 순: (숨죽여 흐느끼며) 엄니...
시어머니: (잠꼬대) 이년아? 시엄씨 굶길 셈이냐?
시어머니, 파스가 붙어 있는 배를 긁어댄다.
옥순, 옷을 내려 배를 가려주고 이불을 덮어준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하고 연신 닦아내던 옥순, 언덕 위 소나무를 향해 아픈 다리를 이끌고 달려간다.
소나무에 당도한 옥순, 유난히도 밝은 달을 한참 바라보더니 굳은 결심 을 한 표정으로 웅크린 소나무를 바라본다.
옥 순: 지도 헐 만큼 혔다고 봐요. 말혀봐요. 전생에 지가 진 죄목이 뭐여요? 난 말여요. 참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이것이 내 운명이다 생각허고 무조건 참었어요. 그리고 애들 아부지 나 두고 먼저 갔을 적도…(목이 매여 겨우 겨우 나오는 목소리) 그땐…너무도 참기 힘들었지만 그려도…나오는 눈 물 틀어막고, 뜯겨져 나가는 이 가슴을 여며가며 참었는디…시어머니 정 신까지는…손이 모자라요. 마음이 모자라요. 그리고…그동안 잘 버텨준 내 정신도 이 몸둥아리도 힘들다고 자꾸만 신호를 보내는디. 이젠….
설움에 복받친 옥순의 목소리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계속 말을 하지만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옥순은 웅크린 소나무를 붙잡고 서 서럽게 울다가 힘이 빠진 손이 미끄러지더니 결국 바닥에 눕게 된다.
6.
장을 보고 온 아낙, 양손에 짐이 많다.
옥순의 집안으로 들어서며 다급하게 옥순을 부르는 아낙.
아 낙: 이봐, 어딨어? 어여 나와서 짐 쪼까 받어 봐.
대답 없는 옥순.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서는 평상에 앉는 아낙, 아픈 팔을 연신 주무른다.
아 낙: 워메! 팔 떨어지는 줄 알었네. 조용헌께 상집 같지도 않고 쪼까 거시기허 네 그려. 쫌 북적북적허고 그려야 허는디 말이여. 근디 이 사람은 어딜 간 것이여.
상복을 입고 앞치마를 두른 옥순 등장.
많이 울었는지 눈이 부어있다.
아 낙: 어딜 댕겨온... 또 운 것이여? 이젠 고만 울어. 치매 앓으신 지 십 년 가 까이 있다 가셨는디. 연세도 있으시고, 이 정도면 호상이여.
앞치마로 눈물을 훔치는 옥순.
아 낙: ... 있다들 일 마치면 온다고 혔어. 바쁜 농사철이라... 자네가 이해혀.
병풍이 쳐져있는 방안.
병풍 뒤로 가서 콧노래를 부르며 꽃분홍 한복을 입는 시어머니.
아 낙: 뭔 노랫소리여?
방안으로 들어가는 옥순.
꽃분홍 한복을 입고서 병풍 뒤에서 나오는 시어머니.
옥순, 시어머니의 한복 입은 모습을 보고 놀라 주저앉는다.
아낙 또한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놀라 주저앉는다.
사이.
옥 순: 어머니? 그 옷 벗어 이리 주셔요.
시어머니: 이것 참 곱지요?
옥 순: 얼른 주시라니까요.
시어머니: 싫어! 나 이거 입을 거여. 이거 내 옷 헐 거여. 이거 입고서 그 사람 만나 러 갈 것이여.
옥 순: 지가 좋은 걸로 하나 혀 드릴 테니 이리 주셔요. 그건 돌아가신 친정엄니 것인 게 태워야지요.
아 낙: 아이고! 할머니, 돌아가신 분 옷은 왜 입으셨어요? 어서 주셔요.
시어머니: 아녀. 이거 정말 나 것이여. 요 옷 주인이 나 준다고 혔어. 그려서 나가 입은 것이여. 이젠 나 것이여.
아 낙: 할머니는, 거짓말도 참 능청스럽게 잘 허셔.
시어머니: 아녀, 참말이여.
옥 순: 읍내 가서 새것으로 혀 드릴 테니 이리 주셔요.
시어머니: 난, 이것이 좋아. 이것만 입을 거여.
주저앉는 옥순.
그런 옥순을 위로하는 아낙.
시어머니: (한바퀴 돌며) 나가 이거 얼마나 입어보고 싶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 여. 나 생전에 이렇게 고운 옷을 어디 한번 입어 봤어야지. 나는 평생가 야 이런 옷 못 입어보고 죽는 줄 알았다니께. 아짐씨들, 이거 곱지?
아 낙: 예, 곱네요. (작은 목소리로 옥순에게) 그냥 둬. 내일 상여 나가고서 태우 면 된께 주무시면 그때나 벗겨. 여편네들이 밭일 끝나면 온다더니. 아무 리 간단히 상을 치루기로 혔다고 혀도.
옥순과 아낙, 나간다.
옛 연인이었던 옥순의 친정아버지를 찾는 시어머니, 주위를 두리번거린 다.
치매 증세가 점점 더 심해져 가는 시어머니.
시어머니, 거울을 보며 친정엄마가 꽃분홍 한복을 입고 단장할 때마다 했던 머리와 눈썹을 매만진다.
시어머니: 이 사람이 올 때가 됐는디. (관객에게) 어쩌요? 머리랑은 괜찮어요? 허기 사 이 꽃분홍 한복만 입으면 걱정 없고만요.
새색시 마냥 절을 하는 시어머니, 행복해하는 표정이다.
사이.
시어머니: (허공을 향해) 나, 곱소?
시어머니, 한복을 입고 앉은 채 잠이 든다.
전과 달리 잠꼬대 없이 조용하다.
옥순과 아낙, 들어온다.
옥순, 창문으로 언덕 위 소나무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떨군다.
사이.
아낙, 옥순이 안쓰러워 눈물이 나오려 하자 마음을 가다듬고 전보다 더 씩씩하게 행동한다.
아 낙: 참말로 이 옷이 되게 입고 싶으셨던 모양이네. 그려도 안돼요, 할머니. 이 사람 친정엄니가 살아생전에 얼매나 아끼던 옷인디. 가시는 길에 같이 보내야지요. 자, 뭐혀? 얼른 벗기자고.
옥순, 나오는 눈물을 훔치고 시어머니에게 간다.
옥 순: 잠깐만요.
아 낙: 왜?
옥 순: 어머니가 이상혀요.
아낙, 살피려 다가서자 시어머니의 팔이 툭 떨어진다.
시어머니 가슴에 귀를 대어보는 아낙, 엉덩방아를 찧는다.
아 낙: 워메! 이게 뭔 일이다냐. 어쩐 일이여, 별일이 다 있네. 아이고! 심장이 여. 내 나이 오십이 넘도록 부부가 같이 간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이 게 다 뭔 일이당가!
옥 순: 안돼요, 어머니. 이렇게 가실순 없어요. 잘못 혔어요. 지가... 지가 못된 년 이고만요. 지가 천벌 받을 짓을 혔어요. 엄니, 어머니? 지도 데꼬 가요. 지 혼잔 못 살어요. 지도 델꼬 가줘요.
옥순, 몸부림친다.
옥 순: 엄니! 어머니!
아 낙: 이 사람 왜 이려! 누가 천벌 받을 짓을 혔다고, 정신 챙겨. 산 사람은 살 어야지.
옥순, 더욱 몸부림친다.
옥 순: (소나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아줌닌 몰라요. 지가, 죽일 년여요.
사이.
아낙, 옥순이 괴로워하는 이유를 안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 낙: 내가 자네 맘 모를 줄 알어? 거기서 빈다고 노인들 다 죽을 것 같으 면… 똑똑치 못허게 사람이 왜 그려?
옥 순: 지는 어찌 살아요. 이렇게 어찌 살아요.
아 낙: 살아생전에 두 분이 보통 인연은 아녔잖어. 안 그려? 한 분 가니께 누가 끌어 당겼든, 아님 누가 뒤 따라 나섰든 그런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자 고. 그려야 살지.
옥 순: ... 이건 아녀요, 정말 이것은 아녀요. 쬐금만... 아주 쬐금만 이 어깨에 짊 어진 것... 너무 무거워서... 쬐금만 내려 달라는 것뿐이었는디. 다는 싫어 요. 다 내려달라는 것은... 아...니었...어요.
시어머니가 입고 있는 꽃분홍 한복을 어루만지는 옥순, 흐느낀다.
아 낙: 저 세상서도 이 옷 입겄다고 쌈이나 안 헐라나 모르겄네.
옥 순: 엄니, 어머니!
옥순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서서히 막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