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의 매화시를 읽기 전에 李東耈
● 선생의 생애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에서 출생하셨다. 출생 후 7개월 때 부친별세, 모친(母親) 춘천박씨 貞敬夫人朴氏(1470-1537) : 先祖는 春川府의 사람이나 부인의 高祖부터 경상도 용궁현 대죽리에 거주하며 덕망이 있으나 벼슬을 하지 않는 緇의 따님으로 시부모님의 섬김과 봉제사에 정성을 다하시고 家事治産에 勤儉하시며 아랫사람에게 慈愛로우셨다.<출처 ; 貞敬夫人春川朴氏墓識, 李滉 撰> 께서 농사와 누에치기로 가계를 운영, 모친 박씨는 자녀에게 “문예에만 힘쓰지 말고 몸가짐과 행실을 더욱 조심하고, 과부자식이라고 업신여기지 않도록 남보다 백 배 더 힘 쓰라”고 훈계하시었고 “비록 문자는 익히지 않았어도 그 의리를 가르쳐주고 식견과 사려는 군자와 같았다”고 퇴계선생께서 모부인의 묘비명에 회고하셨음을 미루어보면 학문과 인격형성에 모부인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6세 때 이웃노인에게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하여 12세부터 숙부(叔父) 송재공(松齋公) 이우 [ 李堣 , 1469~1517 ] :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 진보(眞寶). 자 명중(明仲). 호 송재(松齋).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고 정언(正言)․이조좌랑․헌납 등을 지냈으며, 1506년 승지로 있다가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분의정국(奮義靖國)공신에 책록되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으나 녹권(錄卷)이 박탈되었다가 뒤에 안동부사가 되어 청근수령(請謹守令)으로 1계급이 특진되었으며, 시문에도 이름이 높았다. 문집에 《송재집(松齋集)》이 있다. 께 논어(論語)를 배우고 유학공부에 전념하여 20세에 무리한 공부로 속병을 얻어 평생 고생을 고생하셨다.
21세에 허씨부인 貞敬夫人許氏(1501 - 1527) : 成均進士 璨의 따님으로 영주 추실[草谷]에서 태어나 20세에 퇴계선생과 결혼하셨다. 성품이 곧고 맑고 단정하고 깊고 고요하여 부부가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 하여 금실에 의심할 정도였으나 슬하에 아들 형제들 두시고 27세에 돌아가셨다<출처 ; 貞敬夫人金海許氏墓碣銘,吳澐 撰> 과 결혼하고 23세에 성균관에 유학하여 27세부터 각종과거에 응시하시다가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아가신다. 이후 10년간 벼슬길이 순탄하여 성균관 사성(종3품)이르러 야인생활의 뜻을 품고 52세까지 3차례나 소환 당하시며 야인생활로 접어드는 과도기를 맞이하신다. 이시기의 주목되는 사건으로 ① 43세 사헌부 장령을 병환으로 사임하셨으나 계속 승차하여도 병환으로 부임하시지 못하기도 하였음에도 성균관 사성이 되고 말미를 얻어 귀향하여 예빈시 부정에 제수되셨으나 부임하지 않으셨다. 이때 조식 조식 [ 曺植 , 1501~1572 ]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건중(楗仲).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에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만큼 사화가 자주 일어난 시기로서 훈척(勳戚)정치의 폐해가 극심했던 때였다. 그는 성년기에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에게 벼슬길에 나간 것을 후회하시고 고향에서 공부에 열중할 뜻이 있다는 편지를 보내셨다.② 46세때 퇴계 동암에 학문의 처소로 할 암자인 양진암을 짓으셨음.③ 48,49세때 스스로 외직을 구하여 단양과 풍기군수 역임. ④ 군수를 세 번 사직하여도 수락되지 않아 무단귀향으로 임소이탈의 죄목으로 직첩박탈(50세). ⑤ 27세때 허씨부인 별세와 30세에 재혼 권씨부인 貞敬夫人權氏( ? - 1546) ; 奉使 礩의 따님으로 선생 30세에 결혼하셨다. 奉使公께서 격조높은 선비로 오랫동안 禮安에 귀양와 있으며, 선생의 행실을 보아오다가 혼인을 시켰다.<출처 ; 貞敬夫人安東權氏墓識, 李守貞 撰> 이 46세때 별세, 48세떄 둘째 아들(치)까지 잃음.⑥ 50세때 형 온계공 사화의 격동 속에 간신배의 모함으로 장류되다가 도중에서 별세
52세때 홍문관교리에 제수되어 다시 조정에 거셔서 성균관 대사성까지 오르셨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여 이후부터 반복되는 임명과 사직으로 형식적으로는 70세(판중추부사)의 연세로 별세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끊임없이 은퇴하려는 본인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퇴계선생의 노년기이다.
학문적 업적은 청장년기의 저술은 별로 없고 50대에 성균관 대사성을 사직하고 연구업적이 시작된다. 개정천명도(53세)부터 답 기명언 기대승 [ 奇大升 , 1527~1572 ] ;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 행주(幸州). 자 명언(明彦). 호 고봉(高峰) ․존재(存齋). 시호 문헌(文憲). 전남 나주(羅州) 출생.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이 되었다. 1572년 다시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하는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으며,호남의 석유(碩儒)들을 찾아가 토론하는 동안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바가 많았다. 특히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사후 1590년(선조 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光國功臣三等)에 추록(追錄)되었고 덕원군(德原君)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요저서에는 《고봉집(高峰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등이 있다. 서개치지격물설(70세)까지 22편과 기타의 저술을 내 놓으셨다. 2번째 귀향하여 한서암을 지으실때(50세)부터 따르는 선비가 많을 뿐 아니라 공부할 수 있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 상계, 죽동, 하동 등지를 옮기시다가 도산서당을 지으시고(60세) 이 곳을 중심으로 스스로 학문을 키우는 동시에 후진을 인도하심이 별세하시기 전날까지 계속하시었다.
별세하시기 4일전(1570년12월4일) 조카(甯) 이영 [ 李甯 , 1527~1588 ] 본관 진성(眞城), 자 노경(魯卿), 호 만랑(漫浪) 예안 온혜(溫惠)에서 살았다. 온계(溫溪) 해(瀣)의 차자(次子)로 숙부(叔父) 퇴계(退溪)에게 수학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현감(縣監)이 되어 청신(淸愼)으로 직무(職務)하였다. 퇴계(退溪)로부터 특별한 총애(寵愛)로 요도(要道)의 방법 등 23번의 편지를 받아 도산전서(陶山全書)에 남겼으며 매죽유헌(梅竹幽軒)의 호(號)와 자경잠(自警箴)을 수사(手寫)하여 학문을 면진토록 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묘갈명(墓碣銘)에 『전래(傳來)된 덕행(德行)으로 정훈(庭訓)을 입어 한 가정에 참교육이 있다』고 하였다. 유고(遺稿)가 전한다. <출처 : 嶺南先儒墨蹟, 大邱畵廊, 1996> 에게 유계(遺誡)를 쓰게 하시니 “첫째 예장(禮葬)을 사양하고, 둘째 비(碑)는 세우지 말고 작은 돌에다 전면에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하고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鄕里)와 세계(世系)와 지행(志行)과 출처(出處)를 진술하기를 가례(家禮)중에 있는 바와 같이 하라.” 별세하시던 날(1570년 12월 8일) 아침에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하시고 유시(酉時)에 자리를 바르게 하라고 하시고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 엄연(儼然)히 돌아가시었다.
● 선생의 詩에 대하여
공자 공자 [ 孔子 , BC 552~BC 479 ] : 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노(魯)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 공자의 ꡐ자(子)ꡑ는 존칭이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며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다. 74세로 자공(子貢) ․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 ․樂 ․射 ․御 ․書 ․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는 ꡐ敎人不倦ꡑ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진다. 맹자 맹자 [ 孟子 , BC 372 ?~BC 289 ? ] :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교 사상가. 성명 맹가(孟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산둥성[山東省] 추(趨)에서 출생하였다. 공자의 유교사상을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 배웠다.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謀)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고, 《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으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를 비롯된 유학자의 문학관은 단순한 인간의 감성을 표현한 문예작품이 아니라 도리와 문학의 일치[道文一致]를 근본으로 삼는 경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유학자들은 시를 통하여 도리를 밝히는[以詩明道] 전통을 이으면서 시를 통해 인간의 의지와 사상 그리고 윤리를 밝히려 하였다. 그러므로 도리가 실려있지 않은 시는 적어도 유학자의 경우에는 시로서 그 품격이 떨어졌다.
퇴계선생의 경우에도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는 사상[天人合一 思想]』을 보여준 시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퇴계학을 연구하는 일본학자 高橋進(다가하시스스무)은 『퇴계는 초월자인 신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간의 생사는 완전히 자기자신에게 있다. 즉 각자 자기의 생사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자기의 운명은 자기의 마음과 성정(性情)에 좌우될 뿐이다. 이것이 퇴계학의 독특한 면이다』고 한바 있다. 이와같은 철학적 사상을 많은 저술에서 밝히셨지만 이를 근본으로 시를 지으시고 실천의 의지를 다짐하셨다는 것이다. 선생의 시를 연구하는 중국학자 왕소(王甦)는 선조께서 시에 관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는 듯하여 지극히 광범위하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나 주로 도연명 도연명 [ 陶淵明 , 365~427 ] : 중국 동진(東晋) ․송대(宋代)의 시인. 자(字) 연명 또는 원량(元亮). 이름 잠(潛). 문 앞에 버드나무 5 그루를 심어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장시성[江西省] 주장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출생.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그는 펑쩌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의 퇴관성명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향리의 전원에서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하였다. 그의 시는 4언체(四言體) 9편과 그때에 유행하던 5언체(五言體) 47편이 전해지고 있지만,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의 감정, 두보 두보 [ 杜甫 , 712~770 ] : 중국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의 품격과 규칙, 소동파 소동파 [ 蘇東坡 , 1036~1101 ] : 중국 북송 때의 시인.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출생. 자 자첨(子瞻),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애칭(愛稱) 파공(坡公) ․파선(坡仙), 이름 식(軾).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송나라 제1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 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귀양살이에서 돌아오던 도중 장쑤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의 아름다운 말씨, 주자 주자 [ 朱子 , 1130~1200 ] :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자 원회(元晦)․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창주병수(滄洲病)․둔옹(遯翁).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의 사상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사람의 감정이란 사랑하는 것[愛之者]이 좋아하는 것[好之者]만 못하고 좋아함이 즐겨하는 것[樂之者]만 같지 못하다. 도연명. 두보. 소동파에 대한 태도는 좋아하고 사랑할 뿐이지만 주자에 대하여는 사랑할 뿐 아니라 좋아하고 즐겨하기에 조금도 권태로움이 없이 평생 한결같으셨다고 한다.
한시는 일반적으로 작품의 문맥이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작품외적 사실에 깊이 그리고 隱微하게 연계되어 있는 일이 많다, 퇴계선생의 시가 특히 그러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께서 스스로 「처음 읽으면 비록 냉담한 것 같지마는 오래 두고 읽어보면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고 하며, 문맥밖의 문맥은 주로 현실의 인간관계와 도학의 논리가 된다고 한다
퇴계선생의 시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意想]은 많으나 그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선계(仙界), 달빛, 매화가 있다. 이 들의 공통점은 “깨끗하고 고요함[淸淨] 또는 맑고 참됨[淸眞]이다. 선계는 깨끗한 공간, 달빛은 고요한 분위기, 매화는 맑은 빛이다. 이 들이 둘 또는 셋이서 서로 얽혀 나타나면서 깨끗하고 고요하고 참된 세계를 바라면서 찾고 즐기는 것이 선생의 도학시의 세계이다. 이것이 곧 주리론(主理論)의 시적(詩的) 대응이라고 한다.
퇴계선생께서 남기신 시가 증보퇴계전서(내집 5권, 별집 1권, 외집 1권, 속집 2권)에 2,013수가 수록되어 있다고 하고(왕소 중국담강대 교수), 또 1,200여제에 2,270수가 전한다 하고, 내용은 잃어버고 제목만 전하는 것이 800여제나 돤다 고 이다(이동환 고려대 교수). 수량으로 본다면 중국의 시성 두보의 1,405편보다 많다. 다만 두보는 장편이 많고, 퇴계선생는 절구가 많아 편폭은 두보에 비하여 적다 할 것이다. 사상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주자보다는 배 가까이 많다고 한다.
15세부터[石蟹 : 가제] 70세의 돌아가실 때[而得寓精舍四絶見投今和其三 : 11월에 유응현의 시에 화답한시 임] 까지 시를 지으셨으며, 시를 본격적으로 지으시기는 33세(계사, 1533년)부터인데 37세(정유, 1537년)부터 39세(기해, 1539년)까지 3년간은 한 수도 짓지 않으셨다. 이 때는 모부인 박씨의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어 슬픔이 스미어 시를 지으실 수 없었을 것이다. 또 163수나 지어 일생 중 가장 많은 시를 지으신 해는 61세(신유, 1561년) 때에 이다. 이 해에는 말에서 떨어져 신병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시며 도산서당 앞에 절우사를 꾸미신 해로서 마음이 가장 안정되신 해였다고 한다.
● 선생의 매화시에 대하여
퇴계선생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매화시 91수를 모아 《梅花詩帖 : 매화시첩》이라는 독립된 시집(詩集)을 유묵으로 남기셨다(상계종택 소장 ; 오래동안 영인출판되었음) 매화시는 모두 75제 107수(시첩 62제 91수)로 단일 소재로는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매화는 세속의 티끌 한 점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과 더러운 풍속에 굴하지 않는 절개와 봄날 같은 희망을 상징하는 꽃으로 많은 문인들이 달과 함께 맑고 깨끗한 시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로 인식되어 왔다. 또 매화를 좋아하는 이유로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제일 먼저 꽃망울 틔워 봄이 왔음을 알리는 우주의 기별자로서 사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겨울을 이겼다 라는 경직된 절의만으로 매화를 대하지는 아니하셨다. 우주 유연하게 깊은 안목으로 절의를 해석하여 고상한 인격체의 표상으로 대하셨다.
특히 절우(節友 ; 梅 蘭 松 竹 菊) 중에도 유독 매화를 매우 사랑하시었다. 매화로서 적막함을 달래셨고, 매화를 찾는 것을 신선과 봄과 같이 여기시었으며, 돈독하게 좋아하는 정은 가까운 벗과 같이 친하시었고, 사모하는 마음이 일일이 여삼추 같았으며, 어느 때고 관심이 식은 적이 없고, 조급할 때나 위태로울 때에도 매화를 잊지 않으시 었으며, 매화를 읊음은 심사를 의탁하시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매화분을 딴 곳으로 옮기라 하시고「매형에게 불결하면 내 마음이 미안해서 그렇다(於梅兄不潔 心自未安耳)」하셨으니 본인의 추한 모습으로 인하여 매화도 추해질 것을 걱정하시었고, 운명 직전에 주위사람들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시었으니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까지 매화를 잊지 못하시었다
선생께서 42세(임인, 1542년)때부터[玉堂憶梅] 70세(경오, 1570) 봄까지[都下梅盆好事金而精付安道孫兒船載寄來喜題一絶云] 매화를 주제로 시를 지으셨으나 대부분이 중년 이후에 지으신 것으로 노년에 들어 도학이 무르익을수록 매화시를 많이 지으셨으니 매화시와 도학적 정신세계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할 것이다. 많은 매화시에서 매화를 실로 여러 면으로 묘사하셨다. 그러나 그 여러면의 많은 부분을 아우르는 것은 크게 보아 『깨끗하고 맑음[淸淨] 또는 깨끗하고 참됨[淸眞]』이라고 한다 .
● 매화시 가운데 가장 애절한 정을 주고받았다고 하는 시를 음미
-. 69세시(을사, 1569년) 서울에서 낙향하시며 아끼시던 매화분을 남겨두시면서 매화와 나눈 시
漢城寓舍盆梅贈答 서울 집에서 분매와 주고 받다.
頓荷梅仙伴我凉 매선이 정겹게도 외로운 이 몸 벗해주니 客窓蕭灑夢魂香 객창은 쓸쓸해도 꿈속은 향기로 웠네 東歸限未攜君去 그대와 함께 못 가는 귀향길이 한이 되나 京洛塵中好艶藏 서울의 먼지 속에서도 고운 자태 지녀주오.
盆梅答 매화가 답을 하다
聞說陶仙我輩凉 듣자하니 도선도 우리 마냥 외롭다니 待公歸去發天香 임께서 오시기를 기다려 좋은 향기 피우리니 願公相對相思處 바라오니 임이여 마주 앉아 즐길 때 玉雪淸眞共善藏 옥설과 같이 맑고 참됨을 함께 고이 간직해 주오.
-. 70세(경오, 1570년) 봄에 서울의 분매를 도산에서 받아 반가워서 지으신 시
都下梅盆好事金而精付安道孫兒船載寄來喜題一絶云 서울에 있는 분매를 호사자 김이정이 손자 안도 이안도 [ 李安道 , 1541˜1584 ]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요원(遙原), 호는 몽재(蒙齋). 어릴 때는 자를 아몽(阿蒙)이라 하였는데, 이는 조부 이황(李滉)이 직접 지어준 것이라 한다. 아버지는 군기사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낸 준(寯)이고, 어머니는 당시 학덕의 명망이 높던 예안훈도 금재(琴縡)의 딸이었다. 학문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술회한 서정시가 있다. 특히 <야중우음일절(夜中偶吟一絶)>의 ꡒ한밤중 문득 생각나는 나의 평생지(平生志), 공경대부(公卿大夫) 아니고 바로 수신제가(修身齊家)라네ꡓ라는 구절은 이러한 그의 평소 신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서정시다. <출처 : http://www.koreastudy.or.kr> 에게 부탁하여 배에 싣고 보내오니 기뻐서 이를 시제로 삼아 한 절을 읊다.
脫却紅塵一萬重 먼지를 뒤로하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來從物外伴癯翁 속세밖에 찾아와 여윈 늙은이와 짝을 하네 不緣好事君思我 안달하는 그대가 이 몸 생각 없었다면 那見年年冰雪容 빙설같은 그 얼굴 해마다 어찌 볼까.
<참고문헌> 李東翰. 編譯. 梅花詩(2003년 독회용 자료). 안동 悅和齋. 2003. 李東翰. 眞脈 第3號. <以詩明道의 退溪詩>. 서울 진성이씨서울화수회. 2003. 尹絲淳 譯註 退溪選集. <退溪의 生涯와 思想>. 서울 玄岩社. 1993 王甦 著, 李章佑 譯. 退溪詩學(改譯版). 대구 中文出版社. 1997 金光淳 譯. 註解 退溪先生年普. 대구 國際退溪學會大邱慶北支部. 1992 李東歡. 陶山書院. 李佑成 編<퇴계의 시작 개황과 그의 작품세계> 서울 한길사. 2001 李東歡. 退溪學報 第19輯. <退溪의 詩에 對하여> 서울 退溪學硏究院, 1978 鄭錫胎. 退溪學硏究 第5輯. <退溪의 梅花詩에 對하여>. 서울 檀國大 退溪學硏究所. 19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