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이 름 : 동음사 소재지 : 이동면 연곡리 735 문의처 : 031)538-2063 문화예술담당 지정일 : 1986.04.09 지정현황 : 향토유적 제34호
동음사는 안산김씨(安山金氏) 선조 촌로(村老) 김성대(金聲大)선생과 아우 성재(省齋) 김성발(金聲發), 동구(東邱) 김성옥(金聲玉) 선생,
그리고 청풍김씨(淸風金氏)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선생 등 네분을 배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1907년 왜인에 의해 반소되어 1914년에 보수하였으나 1952년 6.25때 전소되었다. 김성대선생은 자는 이원, 호는 율강, 촌로, 본관은 안산이다.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였으며 72세때 진사시에 응시하였을때 숙종이 보시고 제릉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연로하여 취임하지 못 하였다.
사후에 자헌대부에 추증되었고 영조때에는 대사헌에 재차 추증되었다.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1961년 11월에 포천의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사당 건립이 발기되고 이듬해 9월에 비로소 준공되었으며 1988년 9월에 군비와 후손들의 성금으로 중건하였다. 제향일은 매년3월 중해일이다.
촌로공 김성대(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배향 동음사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연곡리
안산김씨 촌로공 김성대 선생
청풍김씨 중암 김평묵 선생
1819(순조 19)∼1891(고종 28).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장(穉章), 호는 중암(重菴). 세거지는 경기도 포천. 아버지는 성양(聖養)이고,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5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십구사략 十九史略≫ 및 ≪소학≫을 읽고, 13세에 경서를 대략 이해하였다. 24세에 이항로를 찾아가 배우고, 또 홍직필(洪直弼)을 찾아 배우는 등 학업에 매우 전념하였다. 두 선생을 동시에 따른 관계로 학설은 넓고 온건하였다.
1852년(철종 3) 홍직필이 죽은 뒤로는 다시 이항로의 학설을 따라 심즉리(心卽理)의 설에 기울여졌다. 또한 같은 문하의 유중교(柳重敎)와는 대학의 명덕(明德)을 이로 보느냐, 기로 보느냐의 견해 차이로 당시에 큰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74년에 스승의 ≪화서아언 華西雅言≫을 편집, 간행했으며, 1880년에 선공감가감(繕工監假監)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881년 이만손(李晩孫)을 비롯한 1만여 명의 영남 유생들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상소문을 보고 감탄, 이를 후원하였다. 그 해 7월 다시 척양(斥洋) ·척왜(斥倭)의 소(疏)를 초안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고 유배되었으나, 다음해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풀려났다.
저서로는 ≪중암선생문집≫ 및 별집·≪중암고 重菴稿≫·≪근사록부주 近思錄附註≫·≪학통고 學統考≫·≪천군편 天君編≫·≪대곡문답 大谷問答≫·≪치도사의 治道私議≫·≪해상필어 海上筆語≫·≪경장문답 更張問答≫·≪붕사잡록 鵬舍雜錄≫·≪해상록 海上錄≫·≪삼강문답 三江問答≫·≪구곡문답 龜谷問答≫·≪벽산심설연원 壁山心說淵源≫·≪척양대의 斥洋大義≫·≪남정기문 南征記聞≫·≪우촌수담 雨村手談≫·≪노강수록 鷺江隨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참고문헌≫ 重菴文集(金平默)
2009. 3. 22
2010년 가을 임시총회 (동음사 앞 단체사진)
김성대묘비
해석문 김성대묘비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통덕랑 제릉참봉 김공성대묘 배 증정부인수원백씨부좌 공의 휘는 성대이고 자는 이원이며, 본관은 안산으로 고려시대 좌복야를 지낸 김긍필의 후손이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정경이 계셨는데 태종 때 좌명공신으로 숭정대부 이조전서를 지내고 연성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위정공이시다.
위정공께 막내아들 휘 개가 계셨는데 숭정대부 이조판서로 시호가 평호공인데, 이분이 공의 6대조이시다. 부호군 휘 언량과 사복시정으로 증직된 휘 태록과 좌승지로 증직된 휘 찬은, 바로 공의 증조와 조부와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김정삼의 따님이다. 공은 천계 임술년(광해군 14, 1622년) 정월 22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행의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었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에 어버이를 모시고 오랑캐를 피하여 산중으로 들어갔는데 그때에 공은 15,6세의 소년이었지만 날마다 한 가마의 쌀을 등에 짊어지시고 험한 길을 넘어 운반하셨다. 비록 난리 속이었지만 부모 공양에 빠뜨림이 없었던 것이다.
신묘년(효종 2, 1651년)에 아버지 승지공의 상을 당했는데, 병환에 계실 때부터 탕제 다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고, 손수 분뇨를 맛보아 달고 쓴 것을 징험하였으며, 위독하시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올려드려 상당 기간 효험을 얻었었다. 갑인년(현종 15, 1674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자제들이 늙은 아버지께서 몹시 슬피 우셔 몸 상하심을 걱정하여 권변을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니, 그 지성스런 효성이 이와 같았다. 이 정성을 미루어 여러 누이와 아우 및 조카에 이르기까지 공경과 사랑이 지극히 독실하였으니, 향당에서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공이 일찍부터 과거시험장에 출입하여 성대히 문장에 대한 명성이 있었으므로 일시의 선비들이 모두 먼저 등제하라고 사양하였다. 공도 이에 이르기를, “시험 하나도 취할만 하지 못하는데 여러 차례 향시에 입격하는군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성시에는 낙제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나이 72세에 비로소 진사에 급제하여 방목이 보고되니, 주상께서 관직을 제수하라는 특명이 있어 즉시 제릉참봉에 제수되니 특이한 은전이었다. 이에 공께서 감격하여 주상의 은혜를 사례하였으나 얼마 뒤에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을해년(숙종 21, 1695년)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2월 4일이었다. 후에 아들 절도사 석명의 추은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내 백씨는 정부인에 추봉되었는데 부사 대진의 따님으로, 착하고 어질어 부인의 덕이 있었고 공보다 5년 후에 돌아가셨다.
공께서는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절도사요, 2남 석범은 무과로 절충을 지냈고, 3남 석규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으며, 4남 석구는 문학에 종사하고 있고, 5남 석보는 무과 중시에 급제하여 도총부 경력을 지냈고, 딸은 사인 이제안에게 출가하였다.
상규는 석명의 소생이요, 상두 · 상진과 감찰 서명신, 사인 이탁, 이환의 처는 석범의 소생이요, 이세무의 처는 석규의 소생이요, 상태 · 상정 · 상복과 조윤적의 처는 석구의 소생이요, 상기 · 상익 · 상벽 · 상성은 석보의 소생이요, 담석과 김요경 · 정운길의 처는 이제안의 소생인데 아들은 어리다. 상규는 1남 양오를 두었고, 상두는 4남을 두었으며, 상태는 1남을 두었고, 양오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사람됨이 질박하고 입이 무겁고 말이 적어,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진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였고, 이미 늙어서도 여전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집이 영평 백운산 밑에 있어 자못 전원으로 숲과 시내의 경치가 좋았고, 자손들이 그 집 근처에 둘러 살면서 각자 농사짓고 뽕과 삼을 심고, 혹은 출사하여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가볍고 따뜻한 옷이며 맛있는 반찬을 두루 갖추어 공을 봉양하였다.
공께서 좌우로 봉양을 받으면서 조용히 문묵을 스스로 즐기고 생산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았다. 혹 흥이 나면 자손들을 거느리고 이웃사람들을 불러 함께 산수 사이를 거닐면서 소일하니, 사람들이 그의 청한한 복은 누구도 미치기 어렵다고 일컬었다.
아들의 고을로부터 무슨 선물이 들어오면 문득 얼굴을 찡그리고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 하시고 매양 청렴결백과 절제근검을 당부하여 경계하였다. 절도사가 여러 지방을 역임하며 간소하다는 것으로 칭찬받았으니, 그 법도를 얻음이 이와 같아서이다. 공을 집에서 남쪽의 도성산 아래 정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고 백부인을 그 왼쪽에 부장하였다. 절도군의 형제가 장차 묘 앞에다 비석을 세우고자 나 창집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진실로 글을 못하는데 어찌 영원히 전할 글의 부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해보니, 옛날에 나의 선군께서 백운산의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고 이곳에 사실 뜻이 있었다. 선군께서 일찍이 혼자 말을 타시고 이 산중으로 오시어 공을 만나 머무르셨으며, 시를 지어 산을 나누는 약속을 증거로 삼았었다.
내가 때때로 따라가서 가만히 보니 공은 용모가 헌걸차고 순박하여, 마음속으로 덕의가 훌륭한 분임을 알았었다. 그 후 선군께서 나에게 명하여 이씨의 낚시터 위에다 자그마한 집을 짓게 하여 후일에 거처할 계교를 삼았는데, 이곳에서 공의 집과의 거리는 몇 리였다.
내가 이로 말미암아 공의 집을 드나들면서 더욱 친하여졌다. 그러나 선군께서 마침내 그곳으로 가시지 못하고 기사년(숙종 15, 1689년)의 사화에 돌아가셨다. 공께서 이에 우리 모자와 형제의 궁박하고 의지할 곳이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맞아 자기 집 아래 집을 마련하고 또 힘을 다하여 옛 집을 수리하고 거처를 정하여 주셨다. 무릇 어루만져 주시고 도와주심에 극진한 은의가 있어 비록 가슴속이 불처럼 타올랐으나, 돌아보지 않으셨다.
지난날 그 어진 마음과 옳은 기개가 아니었다면, 쇠퇴한 세속에 멀리 생각하심이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었겠는가? 내가 공에게 실로 종신토록 감격함이 있어 그 여러 아들들과 모두 서로 대하길 골육과 같이 지내었다.
이제 이 묘문의 부탁이 또한 이 때문이라. 어찌 차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겠는가? 드디어 감히 참람하고 망녕됨을 헤아리지 못하고 본말을 간략히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아아! 이 어찌 공의 사행을 영원히 전하는데 족하다 하겠는가?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창집 지음. 제 4남 석 달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글씨를 쓰다. 비문이 이루어진 뒤 5년 을미년(숙종 41, 1715년)에 백운산 아래 구정천 기방을 뒤로 한 언덕에 이장을 하였고, 다시 그 뒤 13년만에 비로소 비석을 갖추게 되었다. 모든 자손들의 현달한 자와 어리거나 성인이 된 사람 중 미처 기록되지 못한 자를 삼가 다음에 추가로 기록한다.
석 달은 곧 석구의 고친 이름이다. 석보는 수사, 상두는 군수, 상태는 감찰, 상정 · 상기 · 상익은 급제, 상벽은 부사이다. 상두는 5남을 두었는데, 양호는 부사, 양일은 선전, 양정 · 양중은 모두 무과 급제하였고, 막내는 양검이다. 상진은 1남 1녀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며, 상태의 아들은 양록, 딸은 아직 어리다. 상정은 2남 2녀를 두었고, 상복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상기의 아들은 양성이다.
상익은 3남 2녀를 두었고, 상벽은 4녀를 두었으며, 상성은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양오는 4남을 두었으니, 처눌 · 처밀 · 처열 · 처필이고, 양일은 3남을 두었으며, 양중은 1녀를 두었다. 처눌은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외손과 증손과 현손이 매우 많으나 생략한다. 숭정기원후 두 번째 정미년(영조 3, 1727년) 3월 일 세움. 판독문 有明朝鮮國 贈嘉善大夫戶曹?判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德郞」 齊陵?奉金公聲大墓」 配 贈貞夫人水原白氏?左」 公諱聲大字而遠安山人高麗左僕射肯弼之後入我 朝有諱定卿爲 太宗佐命功臣崇政吏」 曹典書封蓮城君謚威靖公威靖有季子諱漑崇政吏曹判書謚平胡公寔公六代祖也副護軍諱」 彦樑 贈司僕寺正諱台錄 贈左承 旨諱讚卽公曾祖祖考若考而?安東金氏鼎三之女公」 以天啓壬戌正月二十二日生自少行誼過人丙子奉二尊人?冠山谷中時公甫成童能日負一」 斛米越險輸致以故雖在?攘而供養無乏辛卯遭承 旨公憂目疾時湯劑不委人手嘗糞以驗」 甛苦及其革也?旨進血得以復甦者有間甲寅丁內艱子弟愍其老而毁泣請權變竟不聽其誠」 孝如此推以及於諸姑弟姪敬愛篤至鄕黨爲之歎服公蚤游場屋蔚有文聲一時輩流咸讓其先」 登公亦謂一第不足取而屢捷解額輒困於省試??留落人皆嗟惜?七十二始中進士榜 聞」 特命除職卽授 齊陵?奉盖異數也公感激謝 恩俄而棄不仕越二年乙亥以疾卒二月初四」 日也後以子節度使錫命推 恩贈戶曹?判配白氏貞夫人府使大璡之女淑哲有婦德後公五」 年以卒公凡生五男一女男長卽節度使次錫範武科折衝次錫圭武科早?次錫龜業文次錫保」 武科重試都摠府經歷女適士人李齊顔相奎錫命出相斗相軫監察徐命新士人李濯李?妻錫」 範出李世懋妻錫圭出相兌相鼎相復曹潤迪妻錫龜出相箕相翼相壁相星錫保出聃錫金堯鏡」 鄭運吉妻李出一男幼相奎一男養吾相斗四男相兌一男養吾一男二女竝幼公爲人木訥寡言」 待人遇物眞實無矯飾少好讀書旣老猶手不釋卷家在永平白雲山下頗有田園林澗之勝子姓」 環其宅而居各自理??藝桑麻或出爲州郡具輕?甘?以奉公公則左右受養肅然以文墨自」 娛不復問生産事興至雋子姓呼?竝?佯山水間人謂其淸福不可及然見有物自子邑來輒蹙」 然曰無乃病民乎每申戒以廉白節儉節度君在弁?中以簡素著稱其得於義方者然也公葬于」 宅南道成山下負丁之原白夫人?其左節度君兄弟將樹石墓前屬昌集識其隧昌集誠不文何」 足以當不?之託獨念昔者先君子愛白雲山水有卜居之志嘗匹馬會公於山中留詩證分山之」 約昌集時從行竊公儀度豊偉氣味淳?心知爲長德人矣其後先君子命昌集作小屋於李氏」 釣臺之上以爲異日計去公家盖數里昌集因得與公還往益親然先君子竟未能歸而有己巳之」 禍公於是哀昌集母子兄弟窮無所歸?迎置宇下因又出力葺舊屋以定其居凡所以撫視?救」 曲有恩意雖凶?如火而不顧問焉向非其仁心義氣遠邁衰俗何能及此盖昌集於公實有沒身」 之感而其諸子皆相視如骨肉今?墓文之託亦以此耳又何忍以不文辭遂敢不揆?妄?記其」 本末如右嗚呼此豈足以不朽公也哉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 秋館事 世子傅金昌集述 ?四男錫達泣血謹書 文成後五?乙未移?于白雲山下九政遷」 負己之原又後十三年碑始具凡子姓之顯若冠若?而未及載者謹追識于左錫達卽錫龜改名」 也錫保水使相斗郡守相兌監察相鼎相箕相翼及第相壁府使相斗五男養浩府使養一宣 傳」 養正養中及第皆武次養儉相軫一男一女幼相兌男養祿女幼相鼎二男二女相復一男二女竝」 幼相箕男養性相翼三男二女相壁四女相星二男竝幼養吾四男處訥處謐處說處養一三男」 養中一女處訥一男竝幼外出曾玄甚蕃?略焉 崇禎紀元後再丁未三月 日立」
========================================================================================== 김석보(金錫保)ㆍ1664(현종5)~1774(영조17)
무신으로 자는 여극(汝極),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안산. 참봉 성대(聲大)의 자이다. 1693년(숙종19)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지냈다. 1698년(숙종24)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거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흥덕현감(興德縣監)을 역임했다. 1705년(숙종31)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이 되고 이어서 도청부도사(都廳副都事),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으로 가리포(加里浦)에 출진하였다가 사고가 발생하여 파직되었다. 1710년(숙종36)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이어서 중화부사(中和府使)를 거쳐 순무사(巡撫使)가 되었다. 1712년(숙종38) 안동영장(安東營將)으로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연행(燕行)할 때 수행하였다. 1713년(숙종39) 순천영장(順天營將) 1716년(숙종42) 창성부사(昌城府使)에 이어 삼수부사(三水府使)를 역임했다. 1726년(영조2)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1727년(영조3)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1728년(영조4) 제주목사(濟州牧使)에 배수되었다. 묘는 이동면 연곡리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최익현이 지었다.
김석명(金錫命)ㆍ1642(인조20)~1717(숙종43)
무신으로 이동면 연곡리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자는 여삼(汝三), 본관은 안산 촌로 성대(村老 聲大)의 자이다. 1670년(효종11) 천거로 선전관(宣傳官), 도사(都事)를 역임하고 강동현감(江東縣監)이 되었다. 1674년(숙종6) 훈련원 부정(訓練院 副正)이 되었다가 순천(順川)과 박천(博川)군수를 역임하고 창주진관첨절제사(昌州縝管僉節制使)로 승임되었다. 1686년(숙종12)에는 홍주영장(洪州營將)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이천부사(伊川府使)로 전직되어 선정을 베풀어 치적이 많았다. 1695년(숙종21) 부친상(촌로)을 당하여 사직 탈상후 다시 죽산부사(竹山府使)에 임명되었다. 1700년(숙종26)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공적이 인정되어 품계가 종이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으며, 훈련도감(訓練都監), 좌별장(左別將)을 역임하고 통진부사(通津府使)에 임명되었다. 1704년(숙종30)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호서병마절도사(湖西兵馬節度使)로 나갔다. 임기가 만료되어 다시 훈국별장(訓局別將)이 되었다. 1708년(숙종34)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이 제수되고 이어서 강계방어사(江界防禦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동지중추부사, 수어사, 중군 등을 역임하고 1717년(숙종44)에 별세하였다. 묘는 이동면 백운산 아래 있으며 묘비명(墓碑銘)은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지었다.
김상두(金相斗)ㆍ1674(숙종15)~1752(영조28)
무신으로 이동면 연곡리에서 출생, 본관은 안산, 자는 산앙(山仰) 1711년(숙종37)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이어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덕흥현감(德興縣監), 서천군수(舒川郡守) 등을 역임하고 1728년(영조4) 성진첨사(城津僉使)에 제수, 이어서 경흥부사(慶興府使)를 거쳐 전라도수사로 임명되었다. 1743년(영조19) 내직으로 들어와서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으로 있다가 여주목사(麗州牧使)로 나갔다. 1752년(영조28) 노환으로 별세하니 향수가 78세이었다. 묘는 이동면 백운산하에 있다. 묘비명(墓碑銘)은 영의정 유척기(領議政 兪拓基)가 찬하였다.
김처곤(金處坤)ㆍ1726(영조2)~1803(순조3)
무신으로 이동면 연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초명은 처관(處觀), 자는 중빈(仲賓), 본관은 안산, 연성군(連城君) 정경(定卿)의 7세 손이다. 1753년(영조29) 무과에 급제하여 1755년(영조31)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이어서 훈련원주부(主簿), 판관(判官), 부정(副正), 도청부도사(都廳副都事), 장원서별제(掌苑暑別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보성군수(寶城郡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활을 잘 쏘아 매년 봄, 가을 전정(殿庭)에서 기사(騎射)할 때 장원하여 동호(動弧-붉은 칠을 한 화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에게 왕이 하사하는 물품)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김성발(金聲發)ㆍ1624(인조2)~1670(현종11) 본관은 안산, 자는 정이(正而), 호는 반성재(反省齋)로 촌로(村老) 김성대(金聲大)의 아우이다. 학자로서 효성과 우애가 투철했다. 동음사(洞陰祠)에 배향 되시었다.
묘비명을 지으신 영의정 김창집에 대하여
1648(인조 26)∼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며, 어머니는 호조좌랑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창협(昌協)·창흡(昌翕)의 형이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린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675년 아버지 수항이 화를 입고 귀양가자 과거 응시를 미루었다. 1681년(숙종 7) 내시교관을 제수받았고, 1684년 공조좌랑으로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귀향해 장례를 치르고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다시 동부승지·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를 제수받았는데, 이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평하였다.
강화유수·예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5년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 해 한성부판윤·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1712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 : 나이어린 왕을 보필하던 재상급의 원로 관료)이 되어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 문제로 노론·소론이 대립하였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해,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후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무고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영조 때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했으며,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몽와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지은이: 이종호 | 브랜드: 역사의 아침 | 출간일: 2008-10-24
너희들은 마땅히 (사형당하는) 나를경계 삼아 항상 겸손하게 물러나려는 뜻을 갖고 벼슬에서는 높이 드러나는 요직을 피하도록 해라. 집에 거처할 때는 공손하고 검소할 것이며, 사람을 사귐에 신중하고 의논하는 말은 간소하게 하여라. (……) 너희들은 여러 자식들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문헌에 전하는 충효의 가르침을 잃지 않도록 하고, 가문을 지키되 반드시 과거를 보아 벼슬할 필요는 없다. 기사년 4월 초7일 문곡文谷(김수항의 호) 늙은이가 아들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에게 주노라. 그리고 여러 자손들이 자라면 역시 이 글을 보여주도록 하여라. (224쪽, ‘죽어서야 깨달은 아버지의 유훈 : 김수항-김창집’ 중에서)
옥병서원 [玉屛書院]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주원리에 있는 서원
이 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박순 이외에 이의건(李義健), 김수항(金壽恒), 김성대(金聲大), 이화보(李和甫), 윤봉양(尹鳳陽) 여섯 분이다.
<동재 창옥재> <숭현각> <서재 송월당> 옥병서원 (玉屛書院 : 향토유적 제26호)
소 재 지 :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210
인조27년(1649)에 사림의 건의에 따라 창건되어 사암(思庵) 박순(朴淳)선생을 제향하였고 숙종 24년(1698) 신완(申琓)의 건의로 조정의 지휘를 받아 이의건(李義健) 선생과 김수항(金壽恒) 선생을 배향하고 숙종39년(1713) 이이명(李 命)의 건의로 ‘옥병(玉屛)’이라고 사액된 서원이다.
그후 150여년을 지나 고종원년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자 서원은 없어졌으나 박순, 이의건, 김수항선생의 유업과 덕행을 잊을수 없어 포천유림들의 발의로 서원구지에 설단하고 매년이월망일에 제향만을 거행하여 오다가 1926년에 김성대선생, 이화보선생 윤봉양선생을 단에 추배하였다.
1978년에 이명우(李命雨)를 회장으로 한 포천군의 유림들이 1978년 춘향시서원복원추진위원회(옥병서원복원추진회)를 결성하고 당국에 건의하여 1980년 국비와 도비의 보조로 기공하여 3차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건물은 본당과 동재 서재 삼문 담장을 갖추었는데 본당 숭현각(崇賢閣)은 맞배지붕에 방풍판를 달았다. 숭현각의 규모는 정면7.70m, 측면4.70m이다. 서원 앞에는 1909년에 건립된 옥개와 비좌를 갖춘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신도비의 규모는 높이 1.86m, 폭 0.64m, 두께 0.33m이다.
≪참고문헌≫ 太學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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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터는 사암 박순 선생이 정계에서 은퇴하고 낙향하여 배견와(拜鵑窩)라는 집을 짓고 살던 곳입니다. 공이 죽은 뒤 1649년(인조 27년) 포천유림에 의해 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배견와 자리에 사우(祠宇)를 지었습니다.
옥병서원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는 서원.
조선 중기의 문신 박순(朴淳)을 비롯한 여섯 분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지정번호 : 포천시 향토유적 제26호 지정연도 : 1986년 소 재 지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시 대 : 현대(복원) 종 류 : 서원
1986년 4월 포천시 향토유적 제26호로 지정되었다. 1649년(인조 27) 사림의 건의에 따라 창건된 서원으로, 1713년(숙종 39)에 '옥병'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
1980년에 복원 작업을 시작해 사당, 삼문, 담장, 동·서재, 홍살문 등을 건축,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박순 이외에 이의건(李義健), 김수항(金壽恒), 김성대(金聲大), 이화보(李和甫), 윤봉양(尹鳳陽) 등 여섯분이다.
37번 국도를 따라서 옥병교 다리(청암유원지 반대편)를 건너서 바로 왼쪽 "주원4리 마을회관" 방향으로 직진하면 오른쪽 위에 옥병서원 있음. * 네비나 지도에서 옥병서원 찾기는 하늘에 별따기 (안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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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2일 촌로공파 종회에서
국회의원, 장관, 차관, 국회 원내총무, 노원구청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한국토지공사 사장 등을 역임한 김용채 종인이 붓글씨 작품을 써가지고 오셨네요 (병풍을 설명하는 김기면 종인)
[출처] 2009년 촌로공파 대학 입학생 장학금 전달식 (안산김씨) |작성자 김순진 2009년 촌로공파 대학 입학생 장학금 전달식 우리 안산김씨 촌로공파 화수회 파이팅입니다. 우리 집안처럼 20여 명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 50만원씩을 수여하는 집안은 아마 대한민국에 없을 것입니다. 받은 것 만큼 열심히 공부해서 가문을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행사에 자주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200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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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이후 회식 장면 (2010. 3. 20 풍원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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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선생이 村老 聲大 어르신을 위해
<雪後。村老金公 聲大 騎牛來過。同訪白雲山。宿普門菴。有僧翕然方與其徒開講>라는 시와 < 金參奉 聲大 挽 >이라는 만시 그리고 제문인 <祭金參奉 聲大 文> 이라는 글을 쓰셨다.
農巖集卷之一 雪後。村老金公 聲大 騎牛來過。同訪白雲山。宿普門菴。有僧翕然方與其徒開講。
寒山朝霽好。一望興悠哉。不有騎牛過。那成?馬來。路侵氷澗轉。菴對雪峰開。偶値高僧講。因之宿未廻。
농암집 제29권 제문(祭文) : 農巖集 卷29 祭金參奉文 농암집(農巖集) :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창협(金昌協)의 시문집
김 참봉 성대(聲大) 에게 올리는 제문 을해년 3월 임술삭(壬戌朔) 27일 무자에 안동 김창협은 삼가 근간에 돌아가신 참봉 김공의 영령께 박한 제수로 제사를 올리고 다음과 같이 고합니다.
옛날 우리 선친께서 / 昔我先子 백운산에 은거할 제 / 買山白雲 필마로 동쪽 와서 / 一馬東來 공의 집에 들르셨네 / 過公衡門 나는 그때 따라와서 / 我時隨行 공을 처음 알았는데 / 識公云初 키가 크고 중후하여 / 脩幹厚質 경박한 이 아니었네 / 非便?徒 거친 베옷 몸에 감고 / 大布?身 늙어감이 애석하나 / 老矣可惜 산중에서 밭을 갈고 골짝에서 낚시하며 / 巖耕谷釣 유유자적 지내는 그 생활이 부러웠네 / 而羨其適 이웃하여 살자고 약속 맺으며 / 卜?之約 선친께선 시까지 지으셨으니 / 先子有詩 일은 비록 어긋나도 / 事有難偶 뜻은 아니 쇠해서 / 意未或衰 유배지를 떠돌며 / 竄逐流離 누차 시로 읊어내어 / 屢形吟詠 시집 한 권 엮은 것이 / 編爲一集 사영시(思潁詩)에 비길 만해 / 可比思潁 이에 우리 형제들이 / 惟余兄弟 선친 뜻을 이어받아 / 寔承厥志 집을 짓고 와서 사니 / 作室來居 기미년의 일이었네 / 于歲己未 공이 실로 도와주어 / 公實相之 집 짓기를 끝낼 즈음 / ?于有濟 풍경 소리 울리는 집 / 風佩之築 김씨네라 이름했네 / 遂名金氏 이내 몸이 서울 가서 / 逮余赴洛 십 년 동안 못 올 적에 / 十年不歸 공과 산에 대한 생각 / 思公與山 하루인들 잊었을까 / 何日忘之 하늘 내린 큰 재앙이 / 天降大割 설상가상 엄혹하여 / 雪霜震薄 위태로운 목숨을 / 危喘凜然 의지할 곳 없을 적에 / 窮無所託 지난날 살던 집을 돌아다보니 / 乃?舊廬 근본으로 돌아간단 의리가 있어 / 義存反本 엉금엉금 힘없이 기어 들어와 / 扶服來投 위축된 마음으로 숨어 지냈네 / 畏約竄遁 공은 내가 애처로워 / 公惟愍惻 전보다도 잘해주어 / 視遇加前 궁핍함을 돌봐주길 / 恤窮賑乏 한집안 같이 했네 / 如一家然 호시탐탐 노려보는 / 彼眈眈者 저들 화심 여전하고 / 禍心未忘 남몰래 정탐하여 / 側聽潛伺 속속들이 알기에 / 其耳甚長 사람들은 연루될까 두려워하였건만 / 人畏株累 공은야 태연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니 / 公則坦坦 억지로 한 일이랴 / 夫豈强爲 진심에서 나온 게지 / 亮由?款 세도 다시 새로워지매 / 世道更新 억울함이 신원되어 / 覆盆回光 이내 몸이 집으로 돌아올 적에 / 我以家行 공은 마침 병석에 누워 계시어 / 公適臥床 얼굴 뵙지 못하고 떠나오자니 / 不面而別 목멘 듯이 마음이 답답했는데 / 中心如? 그 누가 알았으랴 이번에 와서 / 誰謂此來 공의 방에 들어가 곡하게 될 줄 / 入哭其室 생각하니 공을 다시 뵙는 듯하여 / 俯仰如見 쏟아지는 눈물 콧물 하염없는데 / 涕泗懸泉 문을 나서 사방을 휘둘러 보니 / 出門四顧 봄 경치가 눈앞 가득 펼쳐져 있네 / 春物盈前 산에는 꽃나무요 / 山有榮木 물에는 잔물결 / 水有文? 지난날 공을 따라 / 維昔從公 아이들을 데리고 / 幷其諸兒 나무그늘 아래에서 맑은 바람 쏘이며 / 濯淸蔭? 물고기도 잡아 보고 술잔도 기울였네 / 以漁以觴 허나 지금 어이 다시 그 즐거움 얻으리요 / 今寧復得 옛 자취를 더듬자니 아득할 뿐이로세 / 撫跡茫茫 생각하면 공은 평생 / 念公平生 받은 복이 정말 후해 / 受祉良厚 아내와 해로하고 / 嘉?偕老 자손들이 많은 데다 / 子姓多有 자손이 과거 급제 영광을 안기었고 / 榮以科甲 고을 수령 부임하여 그 녹으로 봉양하니 / 養以郡邑 사람들이 바라는 것 / 人所願欲 한 몸에 갖추었네 / 亦旣具集 다만 공은 자신이 과거에 낙방하여 / 顧厄公車 후배에게 밀려남을 오랫동안 탄식더니 / 久嗟積薪 사마시에 입격할 제 / ?陞周庠 칠순 나이 넘었기에 / 已踰七旬 임금께서 이름을 친히 써 내리시어 / 御筆題名 능 참봉에 특별히 제수하여 주시니 / 特除寢郞 오랜 설움 풀어 주신 / 伸於積? 은총이 각별했네 / 恩出非常 그 일은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할 만 / 事可載傳 사람들이 또다시 복이 많다 이르니 / 人更歸福 무슨 유감 있으리요 / 公其何憾 부족함이 없는 것을 / 蓋無不足 공처럼 훌륭하신 원로를 잃고 나서 / 失此耆舊 온 마을이 똑같이 슬픔에 젖었지만 / 悲均里社 덕의에 감사함은 / 感念德義 누가 나만 하겠는가 / 孰如吾者 장삿날로 잡은 날이 / 宅兆之卜 마침 우리 선친 기일 / 値我先忌 여기 남아 하관을 지켜보지 못하리니 / 不留視? 마음속에 품은 한이 어이 끝이 있으리요 / 含恨何旣 이 봄 술 한 잔 따라 / 爲此春酒 공에게 올리지만 / ?公一杯 덕을 어이 갚으리요 / 曷云報德 이내 슬픔 풀어낼 뿐 / 聊寫我哀 아, 슬픕니다 / 嗚呼哀哉 부디 흠향하소서 / 尙饗 < 한국 고전 번역원 자료 인용>
[주C-001]김 참봉에게 올리는 제문 : 위 작품 〈서숙(庶叔) 진사(進士) 수응(壽應) 에게 올리는 제문〉과 같은 해에 쓴 것이다. 김성대(金聲大)는 자는 이원(而遠),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김찬(金讚)의 아들로 경기 영평(永平)에 살았으며, 작자보다 29년 연상이다. 그의 나이 72세 때인 1693년(숙종19)에 진사시에 3등으로 입격하여 숙종이 어필로 그의 성명을 써서 내리며 특별히 참봉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1695년(숙종21)에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주D-001]사영시(思潁詩)에 비길 만해 :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영주 지사(潁州知事)로 부임하여 그곳의 순박한 백성과 자연을 좋아해서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고 그곳을 떠나게 된 뒤로 영주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써서 10여 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곧 김수항의 경우 또한 그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容齋續筆 卷16 思潁詩》 [주D-002]기미년 : 작자의 나이 29세 때인 1679년(숙종5)을 말한다. [주D-003]풍경 소리 울리는 집 : 원문의 ‘풍패(風佩)’는 패옥이 바람에 흔들린다는 뜻과 처마에 매단 풍경이라는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을 따랐으나 분명치 않다.
농암집 제4권 김 참봉(金參奉) 성대(聲大) 에 대한 만사 : 金參奉 聲大 挽
돈후한 자품과 뜻 너무도 진솔하여 / ?資厚意極眞淳 지금 같은 세상에 옛사람을 보았는데 / 今世吾猶見古人 하늘이며 흰 구름만 어울려 지내기에 / 天與白雲供久臥 깊은 산골 앞뒤 막힌 유자로만 알았었네 / 錯疑窮谷滯儒巾
두 번째 과장(科場)에서 칠십 노인 노익장을 과시하니 / 文場老試據鞍雄 이백 명 제생들이 확삭옹을 보았다네 / 二百人看??翁 얼마나 많은 자들 시골 낡은 서책 속에 / 何限兎園殘冊裏 책벌레로 살다가 백발 되어 죽었던고 / 白頭乾死?書蟲
세 번째 어필 내려 선왕 능침 참봉을 제수하여 / 御筆新除漢寢郎 푸른 적삼 오사모(烏紗帽)에 영광이 겹치었네 / 綠衫烏帽疊恩光 가을 밭 익은 곡식 단이슬을 받았으니 / 秋田禾黍還甘澤 일찍 자란 봄싹이 부러울 게 없었다오 / 不向春苗羨早長
네 번째 한 해가 지나도록 정원 아니 거닐더니 / 鳩杖經年懶涉園 마을 방아 노랫소리 갑자기 끊기었네 / ?歌一日不聞村 풍류 모두 사라진 쓸쓸한 마을에서 / 蕭條里社風流盡 사제사(?祭祀) 좨주 어른 어느 누굴 추대할꼬 / ?飮誰推祭酒尊
다섯 번째 칼끝이요 창 머리 살얼음판 여섯 해를 / 劍首矛頭六載餘 우리 어른 의지하여 가까스로 살아왔네 / 偸生得近丈人居 지균이며 분택은 오히려 평범한 일 / 指?分宅猶常事 드높은 그 의리는 광류거를 논할 만 / 高義堪論廣柳車
여섯 번째 팽택이라 남촌 사람 세속 밖의 벗이 되어 / 彭澤南村世外期 그 얼마나 밭두둑을 넘나들며 지냈던고 / 度阡越陌幾多時 작은 수레 다니던 길 이젠 잡초 우거졌고 / 如今草沒巾車路 검은 소 놀려두고 다시 타지 않는다네 / 閒却烏牛不復騎
일곱 번째 늦봄에 날린 꽃이 동음 마을 가득한데 / 春晩飛花滿洞陰 동풍이 꽃잎 불어 휘장 안에 들어오네 / 東風吹入??深 한 잔 술을 평소처럼 권해볼 수 있을까 / 一杯可似平生屬 울먹이며 술병 잡고 권주가를 부르네 / 淚落提壺勸酒吟
여덟 번째 한번 죽은 사람이 살아난 일 못 봤으니 / 未見新封起九原 양산이라 귀로에 가슴이 아프다네 / 楊山歸路獨傷魂 빈손으로 내 무덤 지나가지 말라는 / 他時定不車空過 지난날 교공의 농담이 생각나네 / 尙記橋公舊戱言
[주C-001]김 참봉(金參奉)에 대한 만사 : 작자 45세 때인 1695년(숙종21) 3월 말경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김성대(金聲大)는 자는 이원(而遠),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김찬(金讚)의 아들로 경기 영평(永平)에 살았으며, 작자보다 29년 연상이다. 그의 나이 72세 때인 1693년(숙종19)에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숙종이 어필로 그의 성명을 써서 내리며 특별히 참봉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작자가 29세 때인 1679년(숙종5) 8월에 아버지의 명에 따라 영평 백운산(白雲山) 기슭 응암(鷹巖)에 은거하기 위하여 집을 지을 당시, 나라에서 벌을 받은 죄인의 가족이라 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받았다. 그런데 그곳에 살던 김성대는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의식하지 않고 여러모로 도와주었으므로 평소에 그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農巖集 卷29 祭金參奉文》 [주D-001]확삭옹(??翁) : 눈빛이 반짝거리고 정신력이 강한 노인이란 뜻으로, 본디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때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가리키는데, 김성대를 그에 견주어 한 말이다. [주D-002]마을 …… 끊기었네 : 마을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마을 사람들이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방아를 찧지 않는 풍속이 있어서 한 말로, 김성대가 세상을 떠난 것을 뜻한다. [주D-003]사제사(?祭祀) : 한 해의 농사가 무사히 끝난 것을 팔방의 신에게 감사드리는 뜻에서 음력 12월에 들판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주D-004]칼끝이요 …… 해 : 작자의 아버지 김수항이 노론의 영수로 기사환국 때 조정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6년 동안 정적(政敵)의 감시 아래 위험한 나날을 보냈다는 뜻이다. [주D-005]지균(指?)이며 …… 일 : 지균은, 중국 삼국 시대 오(吳)나라 주유(周瑜)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노숙(魯肅)의 집을 찾아가 식량을 도와달라고 청하자, 쌀 3000곡(斛)씩 저장되어 있는 두 개의 곳간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며 가져가라고 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三國志 卷54 吳書 周瑜傳》 분택(分宅)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 후읍(?邑)의 성자(成子)가 그의 절친한 벗인 위(衛)나라 우재(右宰) 곡신(穀臣)이 난리에 죽자, 곡신의 처자를 데려가서는 자기 집 한쪽을 나눠주고 곁에서 살게 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孔叢子 卷中》 [주D-006]드높은 …… 만 : 광류거(廣柳車)는 덮개가 있는 짐수레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과거에 여러 번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항우(項羽)의 장수 계포(季布)에 대해 현상금을 걸고 그를 숨겨주는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이라는 명을 내렸다. 복양(?陽)의 주씨(周氏)는 계포를 숨겨주고 있었는데 결국 발각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계포의 머리를 깎고 목 사슬을 채우고 갈포 옷을 입혀 노예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런 다음 광류거에 실어 협객(俠客)인 노(魯)의 주가(朱家)에게 값을 받고 파는 형식으로 넘겨주어 결국 사면을 받게 만들었다. 《史記 卷100 季布列傳》 곧 김성대가 벗인 김수항이 곤경을 당했을 때 식량과 주거지를 아낌없이 제공하였고 김수항이 나라의 처벌을 받아 죽은 뒤에도 평소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작자를 도와줬다는 뜻이다. [주D-007]팽택(彭澤)이라 …… 되어 : 팽택은 오늘날 중국의 강서성(江西省) 호구현(湖口縣) 동쪽에 있는 곳의 지명으로, 진(晉)나라 도잠(陶潛)이 현령을 지냈던 곳이다. 곧 도잠이 현령을 그만두고 고향인 시상현(柴桑縣)으로 돌아와 살다가 남촌에 순박한 사람이 많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이사하여 마을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수시로 왕래하며 살았다는 데서 인용한 것으로, 작자가 평소에 김성대와 이와 같은 관계를 가졌다는 뜻이다. [주D-008]양산(陽山) : 경기도 양주(楊州)의 다른 이름이다. [주D-009]빈손으로 …… 생각나네 : 교공(橋公)은 후한(後漢) 때 태위(太尉) 교현(橋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김성대를 그에게 빗댄 것이다. 교현이 그의 벗 조조(曹操)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그대가 혹시 내 무덤 앞을 지나갈 때 술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내 무덤에 차려놓지 않으면 그대가 탄 수레가 세 걸음을 굴러가기 전에 배가 아플 것인데, 그렇더라도 원망은 하지 마시오.” 하였는데, 나중에 조조가 교현의 무덤 앞을 지나다가 그의 무덤을 찾아보고 지어 올린 제문에, 그 말을 되뇌이며 “그 말이 비록 어쩌다가 농담으로 한 것이라지만 지극히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소.” 하였다. 《三國志 卷1 魏書 武帝紀注》 김성대도 살았을 당시 교현이 조조에게 했던 농담을 작자에게 하였다는 뜻이다.
=================================================================== 김창협 (金昌協, 1651~1708) 본관 안동. 자 중화(仲和). 호 농암(農巖) ·삼주(三洲). 시호 문간(文簡). 과천(果川) 출생.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 1669년(현종 10)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의(執義) ·헌납(獻納) ·대사간(大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고, 청풍부사(淸風府使)로 있을 때인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아버지 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자 아버지의 죄가 풀리고 그는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받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대제학(大提學) ·예조판서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 등 여러 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는 벼슬보다 문학과 유학(儒學)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고, 당대의 문장가이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학설은 이기설(理氣說)로 이이(李珥)보다는 이황(李滉)에 가까웠으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靈巖)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집에 《농암집》, 저서에《농암잡지(農巖雜識)》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편서에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문곡연보(文谷年譜)》, 작품으로 글씨에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 《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 《김숭겸표(金崇謙表)》 《김명원신도비(金命元神道碑)》의 전액(篆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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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 산 김 씨 원문보기 글쓴이: 희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