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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산행기--天池眺光
(2004.7.12~7.15)
12일 새벽 4시, 예수 동생 "해수"동문이 흑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모닝콜이었다.
빨리 가자는 구 총무 등쌀에 못 이겨 현해수동문은 5시도 안 돼 차를 갖고 집을 나섰다. 구 총무를 싣고 김숭자 동문 댁에 가니 장변호사님이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현 동문께 간곡한 부탁을 하시더란다. 아내를 혼자 보내 걱정인데 24시간 책임지고 보호해달라고. 한방에 자는 것만 빼고란 단서가 있었음은 나중에 구 총무에게서 들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5시 45분. 7시 반에 도착한 동문들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나왔다고 현 동문이 툴툴 거린다. 새벽 3시, 4시에 잠이 깬 것은 다른 동문들도 마찬가지. 어찌 잠을 설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낯익은 슈바이처 모자의 윤봉용 동문, 어깨에 난데없이 무비카메라가 얹혀있다. 디카도 없이 무카로 사진회 따라다니더니 거금 천만 원을 투자해 SONY 비카를 장만하셨단다. 성능이 뛰어나 방송PD들도 쓰는 것이라고 큰소리치는데, 장비 아깝다는 소리가 안 나올지 두고 볼 일이다. 650만 화소 디카를 새로 마련한 김종남 회장, 삼발이 찍새 구 총무, 자타가 공인하는 사진작가 이영구 동문, 최근 디카를 들고 미주대륙을 휩쓸고 온 한영구 동문, 왕년의 명기 아사히 펜탁스를 끝까지 고집하는 김명용 사진회 사무총장까지 총동원된 사진기자단--- 17산우회의 역사적인 행사를 기록하겠다는 뜨거운 사명감으로 인천공항 출국장은 새벽부터 달아올랐다.
2004년 7월 12일, 우리는 이렇게 백두산 등반길에 올랐다. 참가인원 46명 (18 커플, 싱글 10명), 17동기회 행사 중 연말송년회를 제외하고는 최다인원이 참가한 행사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종범 동문이 갖고 온 포도주, 소주, 위스키를 배급받아 각자 배낭에 넣었다. 여권과 귀중품을 잘 챙기라는 17산악회 구총무의 당부에, 귀중품을 집에 두고 왔더니 아무 걱정이 없다고 큰소리치는 임종수 동문. 부인 김경자 여사가 사정이 있어 함께 오지 못한 서운함을 달래려는 투정이다.
9시 15분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 반 만에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도문에 있는 이건산업 공장 직원 두 분이 공항까지 영접을 나왔다. 최고로 모시라는 박영주회장의 특별지시가 있었다는 전언이다. 두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연변관광이 시작되었다. 인구의 60%가 조선족이고 길거리 간판도 한글이 한자보다 우선이니 외국에 왔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데 그렇다고 딱히 반가운 기분도 아니었다.
연길 시내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식도 아닌, 중식도 아닌 이 어정쩡한 음식은 이후 4일간 우리의 화두였다. 조선족의 이 황폐한 음식문화를 어찌할 것인가로 같은 민족인 우리는 모두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첫 식사 때부터 빠지지 않은 포도주와 소주, 위스키는 여행 끝나는 날까지 동이 나지 않았다. 충분한 물량을 공급해주신 이종범 동문께 감사드릴 뿐이다.
연길에서 용정은 버스로 한 시간. 이곳이 한 세기 전 비운의 선구자들이 말 타고 달렸던 길인가. 일송정의 푸른 솔과 한줄기 해란 강이 부슬비 속에서 비감을 자아낸다. 대성중학교는 이제 용정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려던 윤동주 시인의 시비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숙연해졌다. 기념관에 약소한 장학금을 내는 것이 이 시대의 소인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용정에서 서백두산 지역인 二道白河까지는 네 시간 거리. 장백산 아래 첫 동네라는 이도백하가 오늘 우리가 묵을 곳이다. 도로표지판에 장백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광활한 논밭에는 벼와 옥수수, 콩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농가도 드물고 일하는 농부도 보이지 않는데 누가 저 농사를 다 지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몇 시간을 달려도 한국에서는 그렇게 흔한 파크, 가든, 교회가 하나도 안 보인다. 초록빛 평원만 이어지는 거대한 스케일이 대륙임을 실감케 한다. 산중턱에 늘어선 파란색 비닐하우스 같은 것은 인삼밭이라는데 중국 인삼은 우리 고려인삼에 비해 사포닌 함량이 20분의 1도 안 되는 하급 품이란다.
잠시 들른 휴게소의 화장실은 듣던 대로 문이 없어 여성회원들 모두 아연실색했다. 김종남 회장이 이과두주 한 병을 우리 돈 천원 주고 사왔다. 중국엔 가짜 천지지만 싼 물건에는 가짜가 없어 샀다며, 좋아할 사람이 한사람 있다고 한다. 모두들 누군지 알겠단다. 첫잔을 선사받은 김명용동문, "내가 빼주 시음기냐" 대갈일성했지만 전혀 싫은 눈치가 아니다.
몇몇 동문들 사이에 최근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이 화제가 됐다. 윤봉용 동문이 통일 후 조선족이 독립하고 우리가 만주를 회복하려면 중국을 여러 개로 쪼개놓아야 한다고 기염을 토한다.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 숲길을 달려 美人松이 명물인 이도백하에 도달했다. 미인송은 이도백하에 밖에 없는 멋쟁이 소나무인데 피부가 하얗고 곧게 뻗은 줄기가 미인의 다리처럼 늘씬하다.
6시 신달 호텔에 체크인하고 호텔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박근준동문과 김명용 동문 사이에 잠시 송사리 공방이 벌어졌다. 내일 백두산 산행 후 온천욕을 한다는 안내가 있자 박 동문이 자기 경험에 의하건대 온천물이 너무 더러워 결코 권장할 것이 못되니 취소하자는 의견을 낸 것이다. 약간 과장하자면 물속에 때가 떠다녀 송사리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 소리에 모두 그럼 취소하자고 동의하니 갑자기 김명용 동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호령을 했다. 장인이 배천에서 온천호텔을 경영했다는 가족역사까지 배경으로 제시하면서, 김 동문은 백두산 온천은 82도나 되는 뛰어난 온천수인데 그걸 안하고 간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온천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팽팽하게 맞서 조금도 양보할 기색이 없으니 일단 내일 가서 보기로 하고 온천논쟁을 마무리 지었다.
13일, 아침에 일어나니 다행히 비는 그쳤는데 안개가 자욱하다. 8시 40분 호텔을 출발, 이국적인 자작나무 숲길을 달려 9시 30분 山門에 도착했다.
<장백산(백두산) 산문 앞에서>
<장백산(백두산) 산문 앞에서-구총무와 함께>
일단 하차해 단체증명사진 찍고 산문을 통과하여 10분쯤 걸어가니 지프차들이 기다리고 있다. 한 대에 6명씩 타고 줄이어 구절양장(九折羊腸)의 산길을 달린다. 급커브에서 대만관광객을 태우고 내려오던 버스가 전복해 2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를 목격했다. 아찔하다.
서서히 고도가 높아지며 거대한 백두산의 위용이 드러난다. 트리 라인을 넘어서자 야생화로 뒤덮인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다. 그 사이로 난 포장도로를 달리는 수십 대의 지프차 모터케이드는 실로 장관이다.
10시 35분, 기상대에 도착한 후 걸어서 10분 만에 고도 2670m의 천문봉(天文峰)에 도달했다. 여기가 중국 쪽에서 오를 수 있는 백두산. 너무 싱겁게 백두산에 올라 어리둥절했다. 안타깝게도 천지는 안개에 가려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관광객의 상당수가 한국인이나 조선족이었지만 중국인들도 놀랄 정도로 많다.
11시 30분, 天池로 내려가기 위해 천문 봉을 출발했다. 단숨에 2600m에서 2000m 고도로 내려가는 이 길은 쏟아질 듯 가파르다. 중간에 만난 야생화 사진작가들 덕분에 두메 양귀비, 두메 자운, 범 꼬리, 매 발톱 같은 야생화 이름들을 알게 되었다.
<백두산 천지 앞 달문(송화강의 발원지)에서 차여사와 함께>
1시간 후 천지 물이 송화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발원지인 달문에 도달했다. 징검다리가 놓인 작은 개울을 건너다 이종범 동문이 물에 빠졌는데 천지 물에 목욕한 사람은 자기 밖에 없을 거라고 오히려 자랑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전기로 후미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온다. 윤재우동문의 부인 권양자여사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며 다쳤다고 한다. 워낙 급경사인 곳이라 모두들 걱정이 컸다. 나중에 천지까지 내려왔을 때 뵈니 다행히 큰 상처는 안 입으신 것 같아 안도했다.
<백두산 천지 앞에서>
12시 30분, 마침내 우리는 천지 앞에 섰다. 호수에는 파도가 거칠었다. 우리들 가슴에도 감격의 파도가 쳤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면서 건너편 북한쪽의 비류(沸流)봉과 북한군 초소로 쓰이는 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광객으로 왁자지껄한 이쪽과는 대조적으로 인적이 없는 북한쪽 풍경이 우리들 가슴에 한줄기 바람을 불러왔다. 우리 반드시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볼 날이 있으리라...모두 침묵 속에 이렇게 다짐했다.
<백두산 천지 앞에서>
조선족 여성 몇 명이 한복으로 갈아입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근처 풀밭에 흩어져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간이매점에서는 커피와 라면을 팔았다. 왕회장께서 우리 모두에게 커피를 쏘셨다. 천지물을 즉석에서 끓여서 한국산 인스탄스 커피를 타서 주는데 한 잔에 한국돈으로 천원을 받는다.
김명용 동문이 아사히 펜탁스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다. 셔터가 눌러지기는 하는데 올라가지를 않는단다. 이것이 기온 탓인가 해서 손으로 데우고 있다는 것이다. 영하도 아닌데 아무래도 '치카(치매카메라)'인 모양이다.
<백두산 천지의 용오름 구름 모습>
2시, 날씨가 심상찮아 전원 장백폭포로 바로 하산하는 것이 좋겠다는 산악회장 말씀에 강경파들이 "강경하게" 반발했다. 여기까지 와서 백두산 등반을 하지않고 천지물만 보고 하산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관광 팀과 산행 팀으로 나뉘어져 관광 팀은 장백폭포로 바로 내려가고 산행 팀은 용문봉을 거쳐 중국 쪽에서 최고봉이라는 차일봉(2,696m)을 등반하고 장백폭포로 하산하기로 하였다.
16명이 산행 팀에 합류하고 나머지는 관광팀으로 나뉘어서 두 팀은 달문에서 쪼개졌다.
용문봉(龍門峰)으로 오르는 길은 급경사의 너덜지대. 돌들이 불안정해 한발자국도 마음 놓고 디딜 수가 없다. 한 사람이 잘못해 돌이 무너지면 대형사고가 날 위험이 있다. 화산지대여서 가끔 미진(微震)이 있는데 몇 년 전에도 다수의 사상자를 낸 큰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초긴장상태에서 앞 뒤간에 서로 위험지역을 큰소리로 알려주면서 한발 한발 올라간다. 고도 600m를 이렇게 기어 올라갔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1시간 만에 용문 봉에 도달,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농담도 나온다. 사지를 함께 돌파한 전우애 같은 뭉클한 감정에 가슴이 더워진다. 현해수동문은 "노순옥이 벌벌 기는 것 처음 봤다"며 두고두고 놀려댔다. 너덜지대를 기어 올라오는 사이 잠시 안개가 걷히고 푸른 천지의 물을 볼 수 있는 행운도 있었다.
<용문 봉 오르는 너덜 길에서-차여사와 함께- 그동안 구름이 좀 벗어져서 천지건너편
북한 땅이 보이기 시작한다.>
<용문 봉 오르는 너덜 길에서-노 기자 부부와 함께.>
용문 봉에서 차일(遮日)봉으로 오르는 길은 짙은 안개로 시계가 5m도 안됐다. 기온도 급격히 떨어져 모두 파카와 장갑으로 무장했다. 이끼와 야생화로 뒤덮인 초원엔 등산로도 없어 자칫하면 길을 잃을 위험이 있었다. 앞뒤 간격을 줄이고 호루라기를 불며 전진했다. 3시45분, 중국 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2696m의 차일봉에 올랐다. 동쪽에 녹명봉(鹿鳴峰)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봉우리가 있다는데 안개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멀리서 사슴의 슬픈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날씨 때문에 하산 길을 서둘렀다. 두터운 이끼가 깔린 초원은 융단 위를 걷는 것처럼 편안했고 만년설과 야생화로 뒤덮인 장대한 능선은 말을 잊게 했다. 1시간쯤 내려오니 오른 쪽 깊은 계곡에 장백폭포가 걸려있다.
<장백폭포와 야생화.>
<장백폭포>
<장백폭포>
<장백폭포 앞에서>
장백폭포를 본 후의 소감은 이제 세상 어느 폭포에도 관심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백두산에서 장백폭포가 가장 근사하게 보이는 지점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6시 10분 하산완료, 관광팀과 재회하고 문제의 온천을 했다. 결론은 역시 김명용동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뜨거운 노천온천후의 그 시원한 맥주 맛!!!
저녁식사가 끝났는데도 술병을 붙들고 일어설 줄 모르는 대원들 때문에 출발담당 현해수동문은 급기야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남은 술병과 팩들을 강제 수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텔에 돌아온 뒤에도 일부 대원들은 이도백하의 칭다오맥주를 동낸 후에야 자러갔다는 후문.
14일, 하늘이 새파랗다. 어제 그럴 것이지... 도문의 이건산업 공장을 방문 할 날이다. 중간에 백두산 특산품인 자연산 꿀을 시식하고 사기도 했다. 조금 후에 현지가이드가 사전 예고도 없이 "묘향산 력사전시관"이라는 이름의 북한상품(우황청심원과 상황버섯)점에 차를 세우고 1시간이나 지체했다. 출발 후 버스 안에서 "우리일행을 도대체 무얼로 알고 이렇게 과감한 행동을 했느냐"고 김숭자 동문이 가이드를 준렬히 꾸짖었다. 가이드 교육 잘 시켰다고 모두 김여사를 칭찬했다.
연길에서 점심을 먹기로 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단고기를 먹겠다는 회원들이 있어 개파와 사람파로 갈렸다. 점심식사 후 연길-도문간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랑데부한 개파들은 "평생에 처음 먹어보는 잊을 수 없는 맛"이라며 X떼같이 왕왕댔다.(표현을 용서해주시길.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더한 표현도 많았습니다.)
연길에서 도문은 고속도로로 40분. 도문은 한반도 최북단의 중국 측, 그러니까 우리나라 땅끝 마을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국경도시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함경북도 남양 시와 마주보고 있다.
도문교 한가운데를 국경선이 지나고 있는데 우리는 한발을 북한쪽에 걸쳐놓고 사진들을 찍었다.
<두만강 - 김정구의 두만강 노래에서 듣고 상상하던 것과는 달리 강폭이 아주 좁다.>
<두만강 다리 - 다리의 한 가운데에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있다.>
<두만강 다리-다리의 한 가운데에 있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 표시.>
남양 시는 인적이 없는 죽은 도시 같았고 중국 측의 짙푸른 자연과 대조적으로 북한의 산들은 산꼭대기까지 밭을 일구어 민둥산인데다 그 밭조차 작물이 자라지 않는지 갈색이었다. 말로만 듣던 북한의 실상을 눈앞에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두만강 푸른 물도 옛말이고 노 젓는 뱃사공 대신 중국 측 유람선 모터보트 소리만 요란했다. 북한 땅을 지척에 두고 보면서 이북출신 동문들은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인구 27만인 도문 시에서는 이건산업이 최대, 최고의 직장이란다.
4시, 沿邊利建木制品有限公司에 들어서니 "환영 서울대 상대 17산우회 연변, 백두산 방문"이란 커다란 현수막이 일행을 맞는다. 방문 기념으로 서울서 가져온 벽시계를 김승만 왕회장이 현지 법인대표에게 전달하고 공장견학을 했다. 중국 동북부와 시베리아에서 벌목해온 자작나무(birch)를 가공해 마루를 만드는 곳인데 인천공항의 마루도 이건산업 제품이란다. 목재 가공과정도 흥미로웠거니와 아름다운 결을 드러내며 잘려있는 향기로운 나무판자들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이건산업의 현황브리핑>
江澤民이 묵었다는 백산호텔 영빈관에서 박영주회장이 내는 만찬이 있었다. 박 회장은 자신이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서울에서 만찬장으로 전화까지 했다. 연변에 온 이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음식들을 먹으며 중국 술에 취했다. 구총무가 부부애정도 테스트 사진을 찍는다며 커플들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포즈를 취하라 한다. 김명용 동문이 부인을 끌어안고 입까지 맞추는 화끈한 연출을 해 박수세례를 받았다. 賞주는 거라면 다시 할 용의도 있다고 기염을 토한다.
<연길시내 백산호텔에서의 이건산업 초청만찬>
이건산업에선 식사 후 발마사지 접대도 하고 죽염도 한 병씩 선물했다. 너무 신세를 많이 져서 어쩌냐는 어느 동문의 말에 윤봉용 교수 왈, 모두 자기 집 창문과 마루를 이건제품으로 바꾸면 된다고. 남편은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다 박회장과 각별한 친분을 가진 김종남회장 덕 아니겠느냐고, 수양산 그늘이 강동 삼백 리에 뻗치는 것 아니겠느냐고 아부성 코멘트를 했다.
여행중 드러난 재미있는 부부호칭을 들어보자. 김영길 부부의 "까꿍". 남자가 귀가할 때 마누라한테는 "문열어" 하고 예쁜 첩한테는 "까꿍"한다고 해서 김동문의 부인이 요청한 호칭. 김동문한테 얼마나 어울리는 호칭이냐. 임종수 부부는 "챙". 야호 보다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고 산에서 서로 "챙" "챙" 불러댄다. 김명용동문은 부인을 "장씨"하고 부른다. 역시 본데 있는 집안답다. 늦게 만나 결혼한 윤봉용 부부는 서로 "어떻게 얻은 남편인데" "어떻게 얻은 마누라인데"로 듣는 사람의 닭살을 돋게 만든다.
15일, 어느새 마지막 날이다. 연길 서 시장을 구경하고 공항 가는 길에 반달곰 사육장에 들렀다. 일행이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현지 가이드가 애걸하는 바람에 마음 약해진 김 회장의 권유로 할 수없이 들른 곰 사육장은 역시 웅담판매소였다. 수십 마리의 곰을 가둬놓고 앞가슴을 통해 쓸개에다 주사바늘을 찔러 웅담을 추출하는 야만적인 작태에 비판을 금치 않으면서도 여러 회원이 결국 웅담을 샀다. 산 사람과 사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놓고 재력이냐, 체력이냐, 아니면 철학이냐로 왈가왈부하기도 했다.
12시, 공항 도착. 액체는 일체 들고 탈 수 없으니 화물로 부치라는 안내 방송이 요란하다. "김명용은 몸안에 액체가 너무 많으니 화물칸에 타야한다" 는 누군가의 놀림에 모두들 박장대소.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비행기 안에서도 술 파티는 그치지 않았다.
서울지방에 폭우가 쏟아져서 인천에 착륙하지 못하고 제주에 착륙할 가능성이 높다는 '희망 유언비어'를 유포했던 현해수동문의 바램도 헛되이 우리는 3박4일의 백두산 등정 대장정을 무사히 마치고 6시 서울로 귀환했다. 왕회장, 김회장, 구총무의 지원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사였다. 세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지루한 산행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노순옥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