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종교개혁의 급진적 개혁운동인 재세례파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 교회.
개요 메노파라는 이름은 온건한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시작한 일을 강화하고 조직화한 네덜란드 사제 메노 시몬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메노 시몬스). 오늘날 메노파는 세계 여러 나라에 퍼져 있으며,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에 집중되어 있다. 종교개혁의 기원 메노파의 기원은 여러 재세례파 집단 가운데 특히 스위스 형제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형제단은 종교개혁 신학자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국가 교회의 요구에 따르지 않아 곧 박해를 받을 상황이었던 1525년 1월 21일 최초로 교회를 구성했다. 츠빙글리가 제시한 요구사항은 재세례파 지도자 콘라트 그레벨, 펠릭스 만츠 등이 성서 연구를 바탕으로 의문을 제기한 유아세례문제였지만 실제 쟁점은 교회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재세례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主)이며, 그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참된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은 국가 행정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서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가 직접 인도한다고 했다. 스위스 형제단은 곧 박해를 받고 유럽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이들의 교리적 입장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고, 이 운동은 한동안 커갔다.메노파는 16세기 재세례파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두 운동은 서로 다르다. 1536년 재세례파 운동에 가담한 네덜란드 사제 메노 시몬스는 북유럽에 흩어져 있는 재세례파교도들을 모아 생동감 넘치는 교회를 구성했으며, 이 집단은 그의 이름(메노)을 따서 불렸다. 메노 시몬스가 이끈 모임은 1530년 멜키오르 호프만이 스트라스부르에서 조직한 재세례파와 관련된 또 하나의 집단과 비슷했다. 처음에 그는 스위스 형제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농민전쟁(1525) 때 토마스 뮌처(1490경~1525) 같은 급진 재세례파적이고 혁명적인 지도자들이 이끈 농민군이 패배하고, 스위스 및 독일 남부의 재세례파 초기 지도자들이 죽자 시몬스는 유럽의 온건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시작해놓은 일을 강화하고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전통으로 기본적인 신앙과 교리를 확정한 2세대 지도자들을 대표한다. 또 하나의 재세례파 운동이 독일 중부에서 한스 후트(1527 죽음), 한스 뎅크(1500경~27), 초기 평신도 신학자 필그람 마르페크(1492경~1556)의 인도로 발전했다. 그밖에 야콥 후터(1536 죽음)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후터파 형제단으로 알려진 또다른 재세례파 운동도 있었다. 후터파는 공동생활과 선교열정으로 곧 유명해졌는데, 이것은 다른 모든 재세례파 집단이 지리적·사회적으로 유럽인들의 삶의 본류에서 물러나 상대적으로 신체적인 안전을 누리게 된 후에도 17세기까지 계속되었다.재세례파와 메노파의 사상은 종교와 세상을 분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16세기에 심한 박해를 받은 충격 때문에 재세례파는 살아 남기 위해서 사회로부터 멀어지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메노파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메노파는 외적으로는 은둔을 통해, 내적으로는 엄격한 집단규율을 통해 강한 문화적 응집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세상과의 격리로 인해 검소·근면·경건·상호부조 등과 같은 소종파적인 미덕을 가지게 되었지만 분열도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는 주변의 사회·교육·경제 문제에 깊이 개입해 이 종파의 삶과 사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자기 교단 역사에 대한 연구와 사회학적 분석, 다른 집단과의 신학적 교류 등을 통해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추구했다. 메노파는 삼위일체론자들(성부·성자·성령의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고, 성서(특히 신약과 예수의 가르침)를 삶과 신앙의 최종권위로 인정하며, 초대 교회의 형태를 모범으로 삼는다. 신앙고백과 관련해 세례를 중요시하며, 성찬에 대한 상징적 이해를 강조한다. 일부 메노파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에 근거해 세족식(洗足式)을 행한다.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맹세하지 않으며, 군 입대를 거부하며, 교회훈련을 대체로 인정하지만 이를 보편적으로 시행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