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님은 모두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4남3녀를 둔 것이다. 차례로 이름을 거명하면, 동인 동신 동희 동장 동수(동림) 동연 동길이다. 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은 여순사건 때 순교했다. 넷째 동장도 병사해서 지금 생존해 있는 형제는 모두 넷이다. 넷 중 손동희 권사님이 맏이이다. 다섯째 동수도 딸인데 남자 이름이라고 해서 동림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막내 동길은 손 목사님이 순교하신 당일 아침에 태어나 유복자를 면했다.
손 목사님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녀가 단연 손동희 권사님이다. 그는 손 목사님에 관한 책도 두 권이나 냈다. 관련 자료에 근거하고 또 비교적 정확한 기억에 의지해서 쓴 책들로 객관성을 인정받고 있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아가페)와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의 옥중 목회>(보이스사)가 그것이다. 앞의 것은 손 목사님 전기에 해당하고 뒤엣것은 손 목사님이 검찰과 경찰의 조사에 답한 심문조서(이것을 체형조서라고 한다)와 사적인 시 수필 일기 등을 싣고 있다.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연구는 안용준 목사의 <사랑의 원자탄>(성광문화사)과 더불어 손 권사의 앞 두 책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년 말 또 두 권의 자료집이 거의 동시에 출판되어 후학들을 기쁘게 하기도 했다.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이사장 홍정길)에서 출간한 <산돌 손양원 목사 자료선집>과 손양원정신문화계승사업회(이사장 이성희)에서 출판한 <손양원의 옥중서신>이 그것이다. 앞의 책은 손 목사님의 일기, 편지, 설교, 체형조서를 모아 엮은 책이고 뒤의 것은 손 목사님이 옥중에서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이다.
<손양원의 옥중서신>에는 손 목사님이 감옥에 있으면서 주고받은 편지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 전반부엔 편지를 현대어로 풀어 실었고 후반부엔 관련 편지를 사진으로 찍어 올리고 그 옆에 해제를 달아 놓았다. 이 책을 정독하다가 새로운 내용이 있어 호기심이 일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부친 손종일 장로가 감옥에 있는 아들 손양원에게 보내는 1944년 5월 3일자 편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대로 인용하자면, "너의 숙부 최권능 씨는 4월 19일에 운명하였다"는 내용이다.
최권능 목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유명한 그 목사가 아닌가. 그의 본명은 최봉석이다. 최권능 목사는 1869년 1월 7일 태어나 해방을 넉 달 남겨 놓은 1944년 4월 15일 세상을 떴다. 손종일 장로가 4월 19일 운명했다고 한 것은 장례식 날짜를 운명한 날짜로 착각한 결과일 것이다. 최권능 목사는 5일장으로 4월 19일 장례를 치렀다. 그러니까 손종일 장로가 지칭한 '숙부 최권능'은 본명 최봉석인 '예수 천당'의 그 최권능이 맞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리 저리 연결해 봐도 최권능이 손양원의 숙부가 될 수 없다. 숙부는 아버지의 형제들을 일컫는 호칭이다. 최 씨 성을 가진 권능 목사는 손 씨 성을 가진 아버지 손종일의 형제일 수 없다. 그렇다고 (외)숙부도 될 수 없는 것이 손 목사님의 어머니는 정 씨이다. 그의 어머니는 본명 정쾌조로 나중에 정양순으로 개명했다. 친가 쪽으로도, 그렇다고 외가 쪽으로도 도저히 숙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부산에 거주하는 손동희 권사님에게 전화를 돌린다. 늘 친절하게 받아주는 전화가 고맙다. 몇 가지를 여쭤봤다. 첫째, 예수 천당의 최권능 목사가 숙부로 나오는데, 어떻게 되느냐는 것. 둘째, 손 목사님의 정확한 자녀의 수가 몇 명인가 하는 것. 셋째, 양자 안재선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했는지 여부. 사실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기록은 책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혼동을 야기하기 십상이다. 자료를 보완해서 통일시켜 나가야 할 몫이 후학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손 권사님은 예의 막힘이 없었다. 최권능 목사님이 손양원 목사님의 숙부가 아니라고 했다. 당시 감옥 생활은 일제의 감시가 심했다. 면회 시 대화하는 것뿐 아니라 발수신의 편지까지 일일이 검열을 당했다는 것이다.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은 비교적 관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친척이 아닌 사람도 친척으로 가장해서 소식을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권능 목사를 '숙부'라고 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고모'로 통했던 정양희를 손양순으로 해 편지를 보낸 것도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손 목사님의 정확한 자녀 수는 일곱 명이라고 했다. 둘째 딸 동수는 남자 이름 같다고 해서 동림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이 자료에 따라 달리 표기되는 바람에 두 사람으로 잘못 인식된다고 했다. 동림은 아직 생존해 있지만 드러나기를 극히 꺼려해서 은둔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의 감옥 생활, 두 오빠의 죽음에 이어 아버지의 순교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에게는 극심한 상처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된 순교자의 뒤에 상처로 얼룩진 가족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셋째, 과연 양자(손 권사에게는 양 오빠가 됨) 안재선이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를 한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손 권사는 안재선이 양자가 된 후 주위의 권유로 부산에 있는 고려고등성경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런 순교로 졸업을 하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졸업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이다. 6.25 때 제주도로 피난 갔을 때 장덕호 목사의 알선으로 군부대 내 작은 교회에 전도사로 잠깐 사역을 한 적은 있다고 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는 손 권사님에게 알고 계시는 것을 주위에 자꾸 알려주시고 더 좋은 방법은 기록으로 남겨 두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겠노라고 대답하면서 한 가지 불만 사항을 말했다.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책을 출판할 때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 사실을 좀 알려주고 출판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손 목사님에 대한 책을 말하면서 궁금한 점을 질문해 오는데 보도 듣고 못한 책들이 너무 많아 혼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관계 되는 분들은 참고하면 좋겠다. 손 목사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을 때 불쑥 전화를 드리는 결례를 수시로 범한다. 하지만 꼭 한 전 찾아 뵙겠다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