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6월 29일, 서해 연평도에서 벌어진 우리 해군과 북한군과의 교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아도 용감히 맞선 우리해군 중 한 사람이 안양 시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북측서해도발의 징후 포착과 분석을 둘러싼 국방당국의 축소논란이 다시 언론에 부각되어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시점에서 안양시 출신 부상병인 김승환(22) 병장가족을 찾아 떠나는 마음은 착잡하고 발길마저 무거웠다.
호계동 공구상가 6동121호, 김 병장의 아버지 김안진(51)씨가 운영하는 열쇠점이다. 마침 롯데마트에서 열쇠점을 운영하는 어머니 고애순 (44)씨까지 함께 있어 지난 일을 회상하며 자랑스런 병사의 이모저모를 들을 수 있었다.
김군은 3형제 중 장남으로 2000년 2월, 관악정보산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해군에 지원입대 했다. 평택에 있는 해군 2함대에서 군 생활을 해오다 제대를 7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적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게 되었다.
우리 군의 경비정 1척이 침몰한 것을 포함해 전사 5명 등 모두 25명의 사상자를 낸 서해교전은 아직도 우리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계기이자, 안보의식을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부상자들 중 온 몸에 14군데 파편을 맞고도 끝까지 대응한 김군은 성남 국군수도 통합병원에서 6군데의 파편제거 수술을 받고 7월 29일 퇴원해 자대 (평택 2함대)에 있는 의무대에서 계속 치료를 받았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유머감각을 대물림한 김군은 무대의상을 입고 연예인 흉내를 곧잘 내며 유머시리즈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에 추석 무렵 포상휴가를 받았다. 가족들과 오손도손 정담을 나누던 추석 전날, 함께 서해에서 교전했던 동료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다시 부대로 복귀해야 되었다.
김군은 초등학교 시절에도 어머니가 무거운 것을 들면 깜짝 놀라서 받아들 만큼 어머니라면 끔찍이 생각하는 효자였다. 휴가 길에도 제일 먼저 어머니의 일터로 찾아가서 와락 끌어안고 어머니의 얼굴에 두 볼을 사정없이 비벼대던 사랑스런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평소 엄격했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사랑으로 보듬고 품어왔다.
어머니는 "만약에 네가 잘못 되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웃겠느냐"며 "너는 주운 목숨이니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인생을 헛되게 살지 마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하며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김군은 부모가 일터로 나가면 "어무이 아부지 사랑합니더. 어무이! 운전할 때는 안전벨트 꼭 매고 안전운전 하이소"라며 식탁 위에 쪽지 편지를 남겨두는 자상한 아들이었다. 동생들에게는 종종 충고도 하지만 잘 건사하는 듬직한 맏형이었다.
부대에 복귀하며 생사를 함께 했던 동료의 사망소식은, 죽은 동료의 모습이 꿈에 보이고, 포만 보아도 덜컥 겁이 났던 악몽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어머니! 얼마나 놀라셨어요" 묻는 기자의 말에 "그때를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점심식사 중에 아들 친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어머니! 뉴스 보셨어요. 서해에서 지금 난리가 났어요" 할 때까지만 해도 "내 아들은 평택에 있는데, 설마 아니겠지"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TV를 보는데 이게 웬일인가! 사망자 명단에 윤영하 대위가 나왔다. 가정통신문을 보내왔던 낯익은 이름이었기에 아들이 탄 배가 잘못되었음이 분명해졌다. 아찔해지는 순간, 모든 생각이 정지되고 다리만 후들거릴 뿐이었다.
아들이 탄 배로 아무리 전화를 해도 신호음만 갈 뿐이었다. 소속부대로 전화했을 때는 국가기밀이라서 알려 줄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할 수 없이 형에 이어 해군에 자원 입대한 둘째아들한테 전화를 했다. "형한테 별일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위로할 뿐이었다.
그렇게 믿고 따르던 형이 탄 배가 침몰하고 형이 보이지 않자 동생은 "우리형이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 내무반에 열쇠를 채우고 감금할 정도였다. 그러다가도 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어머니를 위로하던 둘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눈물만 주체할 수 없이 흐르고 앞이 캄캄해졌다.
TV를 보며 부상병들이 후송되어갔다는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문의했을 때 경상자 명단에 아들이 있었다. 덜컥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쓸어 앉고 경상자란 말에 위안을 삼으며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이를 악물면서도 "많이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아들의 허리에 당시 붙어있던 강낭콩만한 납덩이 파편 하나를 어머니는 거즈에 싸서 지금도 보관중이다. 부모는 어깨 허리 다리 골반 등에 파편이 선명하게 보이는 엑스레이 필름을 보여주며 아직도 14개 파편 중에 8개를 제거하지 못했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어머니는 2번째 수술 후 악몽을 떨칠 수가 없다. 엉덩이 쪽에 깊숙이 박인 3개의 파편을 제거하려다 혈관이 터져서 다시 덮어둔 상태라고 한다. 4시간 수술 끝에 마취에서 깨어난 아들은 "엉덩이~ 내 엉덩이..."하면서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내다가 부모를 확인하는 순간 "왜 오셨어요. 저는 괜찮아요"라고 말해 어머니는 대신 아파 줄 수 없는 고통에 목 울음을 삼켰다.
좀 안정을 찾았을 때 어머니는 "너도 총을 쏘았니?"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밖에 나가보라는 상사의 지시에 갑판 위로 나오는 순간, 북한 배가 집중사격을 하며 지나갔다. 온 몸이 석고상처럼 굳어지며 멍하니 서 있는데 동료가 끌어 당겨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옆에 있던 동료의 옆구리에서 창자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본능적으로 살려고 우그려 넣는 광경은 참혹하기만 했다.
함께 총을 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바로 코앞에서 윤영하 대위의 사망을 지켜보며 의식이 가물가물 해지는데 유독가스 때문에 숨을 못 쉬는 동료(추석 전날 사망)의 목을 들어주는 순간 구조헬기가 도착했다. 총알이 빗발칠 때 "이젠 죽었구나"하는 순간 번득 "부모님은 이 참상을 알고 계실까"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치며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들어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을 때 "국군수도통합병원"이란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상자치고는 중상이어서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게 되었을 때, 부모님께 유독 부하들을 잘 챙기던 이휘환(27) 부기장에게 인사라도 가자고 말했다.
이휘환 중위는 살점이 튀어 나가고 다리가 잘린 상태로 한 순간에 장애자가 되었는데도 의연하게 "지휘를 잘 못해서...부하들을 잘 챙기지 못했다"며 오히려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런 이 중위지만 새벽녘이면 "야, 이 새끼들아! 빨리 방탄복 입으란 말이얏!"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군은 휴가를 나왔을 때도 동료부상자들을 찾아 위문하는 끈끈한 전우애를 보였다. 친구들조차 이구동성으로 "승환이는 착하니까 하늘이 도운 거야"라고 입을 모았다. 관악정보산업고등학교에서 3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방흥용 교사는 "김군은 건강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성적이지만 착실했고 나무랄 데가 없었다"며 "언제나 밝고 명랑했으며 솔직하고 친구간에 신의가 두터웠다"고 말했다.
김군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쁜 길로 빠질 기회가 많았지만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김군의 부모들은 부상당한 아들을 바라보며 신생아 때 심한 탈수로 죽음직전까지도 병원조차 갈 수 없었던 원수 같았던 가난과 방 딸린 가게에서 살며 손님이 오면 돈 몇 푼 쥐어주며 내몰았던 고단한 삶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멍든 가슴을 적셨다.
김군은 4살 무렵 어머니 뒤를 몰래 졸졸 따라오다가 길을 잃었다. 파출소에 신고하고 밤새워 찾아 나섰을 때 동사무소 숙직실에서 자고 있던 모습까지 떠올랐다. 이렇게 자란 아들이 합기도 2단에 태권도 유단자로 늠름하고 올곧게 자란 것이 한없이 대견스럽기만 했다. 내년 2월초면 제대하는 아들에게 기념 목걸이라도 해 주려고 어머니는 매달 적금을 붓고 있다고 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영령들 앞에 삼가 명복을 빌며 부상자들의 빠른 쾌유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