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될 때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는 제외되었다.
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 군(君)으로 강등되어 왕릉(王陵)이 아니라 묘(墓)였기 때문인데 그 광해군묘에서 제376주기 제향이 8월 22일에 봉행되었다.
조선왕릉의 제향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하에 각 왕릉별 지정된 숭모회에서 봉행하는데 광해군묘의 제향은 '광해주 숭모회(光海主 崇慕會)'에서 주관하였는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광해군(光海君)이 아니라 광해주(光海主)라고 부르는 것이 특이했다.
아마도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후 복위되지는 못하였으니 왕(王)으로 부르지는 못하지만, 강등된 계급인 군(君)으로 부르기는 싫으니 주(主)라고 부르는가 싶었지만 평생 알고있던 광해군(光海君)을 광해주(光海主)라고 부르니 제향 내내 어색함을 감출수 없었다.
그렇다면 연산군 제향때는 연산군이 아니라 연산주라 부르는지 급 궁금해졌다.
ㅇ 패륜군주 광해군
광해군은 1575년(선조 8)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후사가 없었으며 8명의 후궁중 공빈 김씨 소생의 임해군과 광해군, 인빈 김씨 소생의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 의창군 등 모두 14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자신이 서자 출신임을 평생의 컴플렉스로 지냈던 선조는 정비로부터 적손으로 대통을 잇기만을 학수고대 할 뿐 서자들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몽진중이던 선조는 전란중에 세자를 비워놓을 수 없다는 여론에 밀려 그다지 탐탁해하지 않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며 전란후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51세의 선조는 세자 광해보다 9살이나 어린 18세 왕비 인목왕후를 맞이하였고 마침내 아들(영창대군)을 얻었으니 그토록 고대하던 적자가 아닌가.
하지만 이미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해 놓은 뒤인지라 조정은 적자 영창대군파(소북)와 서자 세자 광해군파(대북)으로 나뉘어 권력을 향한 암투를 벌이게 되나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광해군이 조선 제15대왕에 즉위하게 된다. 이때 영창대군은 불과 3살짜리 어린아이였다.
이렇듯 파란만장하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즉위후 자신을 반대한 무리들을 온전히 놔둘리가 만무하였다.
아버지 선조에 이어 자신도 서자로 임금이 되었으니 적자인 영창대군은 폐서인 시켜 강화도로 보내 방에 불을 때 쪄 죽였고(증살 : 蒸殺), 인목왕후는 서궁(西宮)이라 불리우는 경운궁(現 덕수궁)에 가둬 유폐시켰다.
뿐만아니라 중국에서 형인 임해군이 있는데 왜 동생인 광해군이 즉위하였는지 조사를 온다는 말도 들리고, 임해군 본인도 내가 왕이 되어야하는데 동생에게 빼앗겻다고 불평을 하고 다닌다는 말에 결국 동복(同腹) 형 임해군 마저도 죽이게 된다.
이렇게 인륜을 저버린 일들은 백성들 원성을 사기에 충분하였고 반정의 명분이 되었으니, 결국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인빈 김씨 소생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배다른 삼촌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셈이다. 이름하여 인조반정이다.
ㅇ 광해군 재평가
그러나 이는 정치적 반대세력이었던 서인들이 구테타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며, 사실 광해군은 임진왜란때 세자로서 난의 수습에 힘써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었으며, 전란동안 함께 하였던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는 광해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또한 즉위후에는 당시 쇠약해져가는 명나라와 교체되어 등장하는 청나라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로서 나라를 전란으로부터 보호한 외교 전략가로 광해군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주장이며 최근 영화등을 통한 광해 평전을 다시 쓰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인조반정으로 용상에서 끌려내려온 광해군은 왕(王)에서 군(君)으로 강등돼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고 그곳에서 아들 폐세자 질과 며느리 박씨는 탈출하다 실패해 자결하고, 이로 인해 부인 유씨도 홧병으로 1623년 10월 8일 강화에서 세상을 뜨고 만다. 그후 다시 광해군은 멀리 제주도로 옮겨져 계속 고독한 유배생활을 하게 되는데 청나라가 군사를 보내 인조를 폐위하고 광해군을 재집권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고 이후 광해군은 끊임없이 서인들로부터 독살,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상궁과 포졸에게까지 '영감'이라는 모욕적인 호칭까지 듣다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 67세의 천수를 다하고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남에 따라 1643년 제주도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광해군의 재위 기간은 15년(1608-1623)이다.
ㅇ 376주기 기신제(忌晨祭)
광해군은 먼저 세상을 뜬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유씨(柳氏) 곁에 쌍분(雙墳)으로 모셔졌는데, 유언에 따라 생모 공빈(恭嬪) 김씨의 묘 성묘(成墓)로 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영락교회 공원묘지 안쪽, 가파르게 경사진 지형에 군묘(君墓)의 형식으로 간소하게 조성되어 있다. 평소에는 펜스철문이 굳게 잠겨있어 답사나 참배를 원하는 경우에는 사릉관리소에 신청해야 한다.
이날 기신제는 앞서 얘기한 '광해주 숭모회(光海主 崇慕會)'에서 주관하였는데, 부인쪽 문화유씨 종친회에서도 버스를 대절해서 오는 등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지난 5월 사릉 기신제에 비하여 결코 소홀하거나 적은 인원이 아니었다.
<경사지고 옹색한 자리에서 제향준비에 분주한 모습>
<원래 왕릉은 능침아래 정자각에 진설후 제향을 지내야하나, 군묘(君墓)에서는 봉분 앞 상석에 진설하고 제를 올려야 한다.
그러나 주최측이나 후손들의 정성이 지극하여서인지 비록 정자각은 없어서 봉분 앞 좁은공간에 차렸지만 상석에 올리기는 부족하여 별도의 진설상을 차린것이 왕릉 제향에 못지 않게 넉넉하고 그득해보인다.>
<기신제는 향과 축을 대축에게 전하는 전향축례(傳香祝禮)로 시작되는데 홍살문이나 향로(香路)가 따로 없으니 펜스안으로 들어와 경사진 진입로를 따라 조심조심 걸어서 묘 앞으로 전해진다.>
기신제(忌晨祭)는 진행자가 전체적인 진행순서, 즉 홀기(笏記)를 한문으로 읽었지만 옆에서 보조하는 사람이 쉽게 우리 말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고 다시 부연 설명하거나 쉽게 알려줌으로써 어려운 한자용어나 유교의식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도 현재 어떤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지 이해하기 쉽게 진행하였다.
<이날 초헌관은 남양주시 문화원장이, 아헌관은 부인 문화유씨 문중 대종회장이, 종헌관은 광해주(光海主)숭모회 이사 한 분이 나누어 맡아서 진행하였는데, 한쪽에서는 광해군이 유배가서 숨을 거둔 제주도 방송국에서 특집을 제작하는지 분주하게 촬영하였다.>
<제향의 마지막 순서는 망료(望燎), 즉 축을 불사르고 제향을 마치게 되는데 이 역시 왕릉처럼 축을 태우는 장소인 예감이 없으니 곡장 밖 적당한 곳에서 놋대야에 커다란 놋젓가락으로 축을 불태우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망료에 임하는 모습>
<제향을 올리는 제관들은 묘소 앞 좁은 공간에서 어찌어찌 제를 올리고 있었으나, 참배객들은 마땅한 공간이 없어 경사로 아랫쪽에 편치않은 모습으로 올려다보며 서 있거나 배례시 엉거주춤 반 절만 하게 된다.>
모두가 불편한 자리였음에도 한 시간 남짓 진행되는 동안 전부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으며, 패륜 군주로 쫓겨난 광해군에 대한 측은지심인지 후손들의 지극정성인지 준비와 진행 모두가 정규 왕릉에서의 제향 못지않게 엄숙히 이루어졌다.
요 며칠 억수로 퍼붓던 뒤늦은 장맛비도 오늘은 멈추었고 화창한 날씨에 숲그늘 그림자는 무더위도 가려주어 경사진 지형의 불편함도 잊을수 있었으니, 언젠가는 제향을 올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만이라도 정리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뿐만아니라 조선왕조 5백년에 어엿한 15대 임금으로 기록된 군주인데 반정으로 쫓겨났다고 해서, 또 그가 묻힌 곳이 왕릉이 아니고 묘(墓)라고해서 세계유산에서 제외시킨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소 옹색하고 불편하며 역사에서 지워지고 잊혀져가는 임금일지라도 떳떳하게 포함시켜 세계유산 목록에 넣었더라면 좋았을것 같은 생각이다. 더군다나 최근에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ㅇ 주변에 가볼 만 한 곳
광해군 묘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동복형 임해군 묘소와 그들의 생모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가 있고, 더 들어가면 이들의 원찰로 세워졌던 봉인사가 있다. 다시 밖으로 큰 길까지 나오면 6대 임금 단종비 정순왕후의 사릉(思陵)이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의 묘가 있는데 이 모두가 반경 2Km 안에 모여있어 둘러보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
뿐만아니라 10분쯤 떨어진 금곡 시내로 나가면 고종과 순종이 묻힌 홍유릉과 그 뒷쪽으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영친왕비가 묻힌 영원, 의친왕과 덕혜옹주 등이 모셔져 있는 곳이 있는데 경춘선 금곡역은 서울에서 전철로 30분쯤 거리에 있어 하루 나들이로 적격이다.
<광해군과 임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 광해군이 즉위 후 성릉(成陵)이라 부르며 왕릉 규모로 석물을 세웠지만, 광해군이 쫓겨난 후 다시 성묘로 강등되었으며, 인조는 격에 맞지 않는 석물을 허물라고 했다는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어 왕릉급 묘로 꼽히는 곳이다. 쫓겨난 광해군이 어머니 발치에라도 묻어 달라 해서 가까운 곳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남양주 시민문화 포럼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band.us/@4560dap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