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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 계보도
(두산백과)
고려왕들의 약사(略史)
제1대 태조 (太祖 877∼943(헌강왕 3∼태조 26))
고려 제1대 왕(918∼943).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嶽) 출생. 아버지는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895년(신라 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부하가 된 뒤 900년(효공왕 4)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 등의 군현을 평정하였으며 903년(효공왕 7)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우고 913년 파진찬(波珍飡)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 뒤 궁예가 난폭한 행동으로 민심을 잃자 918년 강대해진 세력을 바탕으로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한 뒤 이듬해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935년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 견훤(甄萱)과 아들 신검(神劍)과의 싸움이 벌어진 틈을 타서 견훤을 포섭하고 신검을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건국이념으로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내세워 국가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라와 후백제 유민들을 포섭, 융화·결혼정책을 쓰고 지방 호족들을 회유, 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女眞)을 공략하였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 지역에 절을 세웠다.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政誡)》《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였고 943년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는데 그의 정치사상이 엿보이는 귀중한 자료이다. 능호는 현릉(顯陵), 시호는 신성(神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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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혜종 (惠宗 914∼945(신덕왕 1∼혜종 2))
고려 제2대 왕. 재위 943∼945. 이름은 무(武). 자는 승건(承乾). 태조의 맏아들이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의 통일에 큰 공을 세웠으나, 재위기간 호족세력에 억눌려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특히 왕규(王規)의 시해음모와, 지방 호족 세력 및 이복형제들의 도전을 제압할 만한 독자적 세력기반이 없었으므로 항상 신변에 위협을 느꼈고, 재위 2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능은 개성(開城) 순릉(順陵)이다. 시호는 의공(義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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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정종 (定宗 923∼949(태조 6∼정종 4))
고려 제3대 왕(946∼949). 이름은 요(堯), 자는 의천(義天). 태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명왕후(神明王后)이다.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 그해 왕규(王規)의 난을 평정하여 호족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잔존하고 있던 개경(開京) 호족들의 반발과 도참설의 영향으로 서경천도(西京遷都)를 단행하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불교를 깊이 믿었다고 전해진다. 시호는 문명(文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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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광종 (光宗 925∼975(태조 8∼광종 26))
고려 제4대 왕(949∼975). 이름은 소(昭), 자는 일화(日華). 태조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연호를 광덕(光德)이라 했다가 이듬해 후주(後周)의 연호를 사용했다. 권신·부호의 세력을 누르고, 근친결혼을 장려하여 외척의 폐해를 없애려 했다.
956년(광종 7)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만들어 주인과 노비와의 분쟁을 해결해 많은 노비를 풀어주었으며, 958년(광종 9)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초로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했다. 963년(광종 14)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와 재회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폈으며, 관리의 복제(服制)를 정하였다.
또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라 했다. 국토개척에도 주력하여 변경인 동북계(東北界)·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는 등 왕권확립과 국력증강에 치적을 남겼으나 재위기간 동안 무고한 살육이 많았다. 시호는 대성(大成), 능은 헌릉(憲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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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경종 (景宗 955∼981(광종 6∼경종 6))
고려 제5대 왕(975∼981). 이름은 주,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장남. 어머니는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 비(妃)는 대종(戴宗) 욱(旭)의 딸 헌애왕후(獻哀王后)와 헌정왕후(獻貞王后) 자매이다.
955년(광종 6) 태자에 책봉되고, 즉위하자 고려 전기 토지제도의 시초가 되는 전시과(田柴科)를 제정하였다. 977년 진사시를 주관하여 고응(高凝) 등의 급제자를 뽑았으며 송나라와 교류하였다. 979년에는 발해의 침입으로 청새진(淸塞鎭;지금의 희천)에 성을 쌓기도 하였다. 뒤에 정치를 멀리하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 현신(賢臣)을 멀리하였다. 능은 영릉(榮陵;개성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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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성종 (成宗 960∼997(광종 11∼성종 16))
고려 제6대 왕(981∼997). 이름은 치(治), 자는 온고(溫古). 태조의 손자이고, 대종(戴宗) 욱(旭)의 둘째 아들이다. 981년 경종의 내선(內禪)으로 왕위에 올라 최승로(崔承老)의 시무28조(時務二八條) 등의 정책 건의와 보좌를 받고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지방제도의 정비에 있어서는 983년(성종2) 12목(牧)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12목사와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搏士) 각 1명씩을 보내어 지방교육을 맡아보게 하였고, 993년에는 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여 물가조절 기능을 맡게 하였다. 995년 12목을 12절도사(節度使)로 개편하여 지방행정에서 군사적인 면을 강화하여 호족세력을 통제함으로써 중앙집권을 꾀하였다.
또한 982년부터 시작된 정치체제의 개혁은 태조 이래의 정치기구를 중국식으로 개편한 것으로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어사도성(御事都省)을 중심으로 하고, 어사도성 밑에 선관(選官)·병관(兵官)·민관(民官)·형관(刑官)·예관(禮官)·공관(工官)의 6관(六官)을 예속시켰다.
이와 같은 중앙관제는 995년에 다시 3성 6부로 개정되어 고려 중앙관제의 기본을 이루게 되었다. 재위기간 중에 유학을 숭상·장려하고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고려왕조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993년 거란족이 침입하였을 때 서희(徐熙)의 외교적 성과로 거란을 물리쳤고 강동6주를 얻어 영토를 넓혔다. 능은 강릉(康陵)이며 황해북도 개풍군(開豊郡)에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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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목종 (穆宗 980∼1009(경종 5∼목종 12))
고려 제7대 왕(997∼1009). 이름은 송(訟), 자는 효신(孝伸), 시호(諡號)는 선녕(宣寧)·선양(宣讓). 제5대 왕인 경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천추태후(千秋太后)이다. 990년(성종 9) 개녕군(開寧君)에 책봉되었고, 997년(성종 16)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업적이 많았다.
그러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모후(母后) 천추태후는 외족(外族)인 김치양(金致陽)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고 그를 왕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후계자인 왕의 당숙 대량군(大良君;현종) 순(詢)을 승려로 만들어 해치려 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대량군을 보호하고자 서경도순검사(西京都巡檢使) 강조(康兆)에게 그 호위를 명하였으나, 강조는 도리어 목종을 폐위시킨 후 대량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김치양 일당을 살해하였다. 왕은 쫓겨나 충주로 가는 도중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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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현종 (顯宗 992∼1031(성종 11∼현종 22))
고려 제8대 왕(1010∼31). 이름은 순(詢). 자는 안세(安世). 태조의 여덟째아들인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이며, 왕이 되기 전에는 대량원군(大良院君)이었다. 모후는 헌정왕후(獻貞王后), 비는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이다. 천추태후(千秋太后;경종의 비)와 김치양(金致陽)을 제거하기 위한 강조(康兆)의 변으로 왕이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초기의 호족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군현제를 정비하여 1018년(현종 9) 4도호부 8목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과 북방에 양계(兩界)를 두는 이른바 5도 양계 체제를 완성하였다.
또한 군현제의 유지를 위하여 각 군현의 호장(戶長)을 비롯한 향리들의 액수(額數) 규정, 공복(公服) 제정 등을 실현하였다. 승려의 횡포를 방지하고 기민(飢民)을 구제하였으며, 연등회·팔관회를 부활하고, 설총·최치원(崔致遠)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단행, 한국 선유(先儒)를 문묘에 종사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1010(현종 1)년 거란의 제2차침입 때 개경(開京)의 함락으로 나주(羅州)로 피란한 뒤 불력(佛力)으로 거란을 물리치고자 대장경(大藏經) 제작에 착수, 문종(文宗) 때 완성되었다. 거란의 입조(入朝)요구를 거절하여 일어난 거란의 제3차 침입에 강감찬을 파견하고 귀주(龜州)에서 거란군을 대파하였다. 1019년 거란과 강화하여 평화적인 외교관계로 몽고의 침입이 있기까지 약 2세기 동안 대외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재위 기간 거란의 침입 등이 있었으나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능은 개성(開城) 선릉(宣陵)이다. 시호는 원문(元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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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덕종 (德宗 1016∼1034(현종 7∼덕종 3))
고려 제9대 왕(1032∼1034). 휘는 흠(欽), 자는 원량(元良), 현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1022년(현종 13) 태자로 책봉되어 현종을 계승, 31년에 즉위한 뒤 거란[契丹(계단)]에 억류된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란의 반대로 하정사(賀正使)를 중지하였다.
삭주(朔州)·영인진(寧仁鎭)·파천(派川)에 성을 쌓고, 이듬해 8월에는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압록강구(鴨綠江口)로부터 영원(寧遠)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지금의 廣浦)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다. 동여진인(東女眞人)과 거란인들의 투항자가 많았으며,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 사업도 완성하였다. 능은 개성의 숙릉(肅陵)이다. 시호는 경강(敬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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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정종 (靖宗 1018∼1046(현종 9∼정종 12))
고려 제10대 왕(1035∼1046). 이름은 형(亨), 자는 신조(申照). 현종의 둘째 아들이며 덕종의 아우이다. 1022년(현종 13) 내사령평양군에 봉해졌고 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년 12월 팔관회를 열어 외국상인들에게도 예식을 관람시키는 상례를 만들고, 1036년 제위군(諸衛軍)에게 토지의 지급을 늘려 변경의 방비를 굳게 하였으며,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수리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침식을 제공해 주었다.
1037년 압록강 일원에서 거란의 침입을 받은 후 북방경비에 주력하여, 1044년 덕종의 유업인 천리장성을 완성하였다. 1039년에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1046년에 장자상속법을 각각 제정하였다. 문치(文治)에도 힘써, 1045년 비서성(秘書省)으로 하여금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간행하여 문신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거란과 다시 화친하여 나라가 태평하도록 하였으며 농정(農政)에도 주력했다. 능은 주릉(周陵), 시호는 용혜(容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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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문종 (文宗 1019∼1083(현종 10∼순종 1))
고려의 제11대 왕(1046∼83).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현종(顯宗)의 셋째아들. 어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 김(金)씨. 1022년 낙랑군(樂浪君)의 봉군을 받고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즉위하자 최충(崔沖)에게 명하여 법률 개정에 착수, 양반의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연재면역법(捐災免役法)·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국자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孝校法) 등을 제정했고, 1069년에는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하여 전세(田稅)의 세율을 정했으며, 계속하여 녹봉제(祿俸制)·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등을 제정하여 내치(內治)의 중요한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불교를 독실히 믿어 흥왕사(興王寺)를 비롯한 사찰을 건립하고, 왕자 후(煦)를 출가(出家)시켰는데, 그가 뒷날의 대각국사(大覺國師;義天)이다. 한편으로 유학(儒學)도 장려하여 최충의 9재(齋)를 비롯하여 12도(徒)의 사학(私學)을 진흥시키는 등 문운의 융성시대를 일으켰다.
외교와 국방정책에서는 동여진(東女眞)이 자주 북변(北邊)을 침입했으나 이를 토벌하는 한편 회유책을 쓰기도 했으며, 특히 송나라와 국교를 열어 친선관계를 맺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서도(書道)에 능했으며, 양주(楊州) 삼천사(三川寺)의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의 비문은 왕의 친필이다. 경릉(景陵)에 묻혔다. 시호는 인효(仁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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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순종 (順宗 1047∼1083)
고려 제12대 왕. 자는 의공(義恭), 초명은 휴(烋), 이름은 훈(勳). 문종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이며, 비는 평양공(平壤公) 기(基)의 딸 정의왕후(貞懿王后), 김양검(金良儉)의 딸 선희왕후(宣禧王后), 이호(李顥)의 딸 장경궁주(長慶宮主)이다. 1054년(문종 8) 왕태자에 책립되어 1083년에 즉위하였으나, 어려서부터 병약하였고, 여막(廬幕)에서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3개월 만에 죽었다. 능은 개성(開城)에 있는 성릉(成陵)이다. 시호는 선혜(宣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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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선종 (宣宗 1049∼1094)
고려 제13대 왕(1084∼94). 이름은 운(運), 초명은 증(蒸) 또는 기(祈), 자는 계천(繼天). 비(妃)는 사숙태후(思肅太后)이다. 1084년 (선종 1)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왕의 아우 의천(義天)이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세울 것을 건의하여 송(宋)나라·요(遼)나라·일본 등지에서 4000여 권의 서적을 사들이고 간행하게 하였다.
1089년 회경전(會慶殿)에 13층 금탑(金塔)을 세우고,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청에 따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사찰인 국청사(國淸寺)를 짓게 하였다. 1091년 예부의 주장으로 국학(國學)에 72현의 상을 벽에 그려 붙였는데, 차례는 송나라 국자감의 예를 따르고, 복장은 10철(十哲)을 모방하게 하였다. 1094년 2월 열병(閱兵)하고, 5월에 연영전(延英殿)에서 죽었다. 사탑을 많이 세워, 백성들이 과중한 노역에 대하여 원망이 많았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仁陵). 시호는 사효(思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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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헌종 (獻宗 1084∼1097(선종 1∼숙종 2))
고려 제14대왕(1094∼1095). 이름은 욱(昱). 선종(宣宗)의 원자(元子)로 어머니는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이다. 즉위초에는 어린 나이에 병약하여 사숙태후가 섭정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특히 서화(書畵)를 좋아하였다. 1095년 이자의(李資義)의 난이 일어난 다음해 신병으로 왕위를 숙부 계림공(鷄林公) 희(熙;肅宗)에게 양위하였다. 능은 개성(開城) 온릉(穩陵)이다. 시호는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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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숙종 (肅宗 1054∼1105(문종 8∼숙종 10))
고려 제15대 왕(1095∼1105). 초명은 희(熙), 이름은 옹, 자는 천상(天常). 문종(文宗)의 셋째아들이며, 선종(宣宗)의 친동생으로서, 비는 유홍(柳洪)의 딸인 명의태후(明懿太后)이다. 문종 때 계림공(鷄林公)으로 봉하여졌는데,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여 1095년 즉위하였다.
1097년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 나라의 지형을 본떠 은병(銀甁;闊口)을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다. 1102년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주조하여 통용하게 하였고, 남경(南京)을 양주(楊州)에 세우려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어 궁궐을 조영(造營)하게 하였다.
1103년 여진족 완안부(完顔部)의 우야소[烏雅束(오아속)]가 침입하자 임간(林幹)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였으나 실패, 다시 윤관(尹瓘)을 보내어 화약(和約)을 체결하였다. 1105년 서경(西京)에 행차하다가 병을 얻어 환공 도중에 죽었다. 능은 황해북도 판문군(板門郡)에 있는 영릉(英陵)이다. 시호는 명효(明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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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예종 (睿宗 1079∼1122(고려 문종 33~고려 예종 17))
고려 제16대 왕(1105∼22). 자는 세민(世民), 이름은 우. 숙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의태후(明懿太后) 유씨(柳氏)이다. 1100년(숙종 5) 왕태자로 책봉되었다. 즉위 후 1107년 윤관(尹瓘)에게 여진을 토벌하게 하였고, 1108년에는 9성을 쌓게 하였으나 1년 만에 철폐하고 여진에게 반환하였다.
1112년에 혜민국(惠民局), 1113년에는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였다. 1116년에 요(遼)나라·금(金)나라의 침입을 받은 뒤 1119년 금나라와 사신의 내왕이 이루어졌다. 왕 자신이 학문을 좋아하여 보문각(寶文閣)·청연각 등을 짓고 육경(六經)을 강론하게 함으로써 학자와 문신이 배출되고 유학이 융성하였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김낙(金樂)·신숭겸(申崇謙)을 추도하는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었다. 능은 개성(開城)에 있는 유릉(裕陵)이다. 시호는 문효(文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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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인종 (仁宗 1109∼1146(예종 4∼인종 24))
고려 제17대 왕(1122∼1146). 자는 인표(仁表). 이름은 해(楷), 초명은 구(構). 예종의 맏아들로서 1115년(예종 10) 태자로 책봉, 1122년 이자겸(李資謙) 등에 의해 왕으로 즉위하였다.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최사전(崔思全)·척준경(拓俊京) 등으로 하여금 난을 진압하게 하고 이자겸을 영광(靈光)에 귀양보냈으며 1127년 척준경도 유배시켰다.
또한 중외(中外)에 조서를 발표하여 각 지방의 주현에 향학을 세워 지방 자제들의 교육을 진작시켰고, 1129년 서적소를 설치, 여러 학사들과 학문을 탐구하고 서적을 강독하였으며, 1133년에는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하여 무예로 선비를 뽑는 일을 없앴다.
한편, 1128년부터 시작된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등의 서경천도론(西京遷都論)·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에 찬성하여 서경천도를 실행하려 했으나 김부식(金富軾) 등의 반대로 중지하였고, 이에 따라 1135년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김부식을 평서원수(平西元帥)로 삼아 난을 평정하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예(才藝)가 있어 음률·서화에 능하였으며, 국가재정 절약을 위해 환관을 감축하고 문운(文運)을 일으켜 김부식 등에게 명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능은 개성(開城)의 장릉(長陵). 시호는 효공(孝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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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의종 (毅宗 1127∼1173(인종 5∼명종 3))
고려 제18대 왕(1146∼70).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徹), 자는 일승(日升). 인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林氏)이며, 비는 장경왕후(莊敬王后)와 계비 장선왕후(莊宣王后)이다. 1134년(인종 12) 태자로 책봉되었고 1146년 즉위하였다.
성격이 방종했으나 문학을 좋아하여 문신들과 자주 연회를 열었으며 무신들은 천대했다. 이미 인종 때부터 이자겸(李資謙)의 전횡과 묘청(妙淸)의 난 등으로 왕권의 기반인 서경(西京)세력이 몰락하고 개경(開京)의 문신세력이 득세한 상황 속에서 실추된 왕실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1148년 현릉(顯陵;太祖陵)과 창릉(昌陵;世祖陵)을 참배하였고 1154년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세웠으며, 1157년 아우 익양후(翼陽侯)의 집을 빼앗아 관동이궁을 짓고, 이듬해 백주(白州)에 중흥궐(重興闕)을 창건하였다. 1168년 법령으로 팔관회를 장려하였고, 1170년 서경에 행차하여 신령(新令)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금(金)의 세력팽창으로 고려의 국제적 지위가 더욱 위축된 정세 속에서 1170년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였을 때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이 정변을 일으켜 폐위되고 거제도(巨濟島)로 쫓겨났다. 아우 익양공 호(翼陽公皓)가 즉위한 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이 의종복위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자 계림(鷄林;慶州)의 객사에 유폐되었다가 장군 이의민(李義旼)에게 살해되었다. 능은 희릉(禧陵), 시호는 장효(莊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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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명종 (明宗 1131∼1202(인종 9∼신종 5))
고려 제19대 왕(1170∼97). 이름은 호(皓), 초명은 흔(昕), 자는 지단(之旦). 인종(仁宗)의 세째 아들이며 의종(毅宗)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강릉공(江陵公) 김온(金溫)의 딸인 의정왕후(義靜王后)이다. 1148명(의종 2) 익양후(翼陽侯)가 되었다가 1170년 정중부(鄭仲夫) 등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 자격과 서열을 무시하고, 또 문신직과 무신직에 관계없이 정중부 일파가 바라는 대로 관직을 임명하여 왕은 허수아비가 되고 실권은 무신들에게 돌아갔다.
정중부 등 무신이 집권한 다음, 그들의 횡포가 과거의 문신들보다 더 심했으므로, 1173년에는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1174년에는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는 등 사회질서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1196년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명종은 최충헌 형제에 의해서 폐위당했다. 시호는 광효(光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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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신종 (神宗 1144∼1204)
고려 제20대 왕(1197∼1204). 이름은 탁(晫), 초명은 민(旼), 자는 지화(至華). 의종의 다섯째 아들로, 평량공(平凉公)에 봉해진 뒤 최충헌(崔忠獻) 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즉위한 해 5월에 만적(萬積)의 난을 시발로 이듬해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진주(晉州)·금주(金州;지금의 김해)·합천(陜川)·경주(慶州)·광주(廣州) 등지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나는 가운데 국권은 최충헌이 전담하였다. 1204년 등창이 심하여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능은 양릉(陽陵)이며 개성(開城)에 있다. 시호는 정효(靖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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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희종 (熙宗 1181∼1237)
고려 제21대 왕(1204∼1211). 이름은 영, 자는 불피. 1200년(신종 3) 태자로 책봉되어 1204년 신종(神宗)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개국후(晉康君開國侯)·진강후(晉康侯) 등에 봉한 뒤 1211년 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폐위되어 강화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자란도(紫鸞島)로 유배되었다. 1219년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1227년 복위 음모를 꾸몄다는 구실로 최우에 의해 다시 강화로 추방되어 1237년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죽었다. 능은 강화도 석릉(碩陵)이다. 시호는 성효(誠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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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강종 (康宗 1152∼1213(의종 6∼강종 2))
고려의 제22대 왕(1212~13). 이름은 숙(璹)·정(貞)·오, 자는 대수. 시호는 원효(元孝). 명종의 맏아들로서 어머니는 광정태후(光靖太后) 김씨(金氏)이고 비(妃)는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이다. 1171년(명종 1) 관례(冠禮)를 올리고 1173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1197년(명종 27) 최충헌(崔忠獻)에게 쫓기어 부왕(父王)과 함께 강화도로 갔다가 1210년(희종 6)에 소환되었다.
이듬해 수사공상주국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에 봉해지고, 희종을 폐한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지만 최씨의 무단정치로 인해 실권이 없었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지금의 황해북도 개풍군)에 있는 후릉(厚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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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고종 (高宗 1192∼1259(명종 22∼고종 46))
고려 제23대 왕(1213∼1259). 이름은 철, 초명은 진(瞋)·질, 자는 대명(大命)·천우(天祐). 강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덕태후유씨(元德太后柳氏), 비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유씨(安惠太后柳氏)이다. 1212년(강종 1)에 태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46년에 걸친 재위기간 동안 최씨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즉위 초기인 1216년부터 3년간 계속된 거란의 침입, 뒤이은 몽골의 침입으로 최대의 국난을 겪었다. 특히 1231년부터 30여년간에 걸친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도(江都;江華)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를 가져왔다.
고종은 몽골과 강화를 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교섭 끝에 1259년 태자 전(뒤의 元宗)을 몽골에 보냈고, 몽골병으로 하여금 강화(江華)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이와 같은 일들은 몽골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그뒤 고려는 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1236년 몽골항쟁 당시 불교의 힘으로 몽골군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하였으며, 이에 앞서 1227년에는 《명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사관(史館)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고, 유학을 장려하였다. 능은 홍릉(洪陵)이며, 1310년(충선왕 2)에 충헌(忠憲)이 증시되었다. 시호는 안효(安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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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원종 (元宗 1219∼1274(고종 6∼원종 15))
고려 제24대 왕(1259∼74). 이름은 정(禎). 초명은 전, 자는 일신(日新). 1235년(고종 22) 태자로 책봉되었고, 1259년 왕을 대신하여 몽골에 갔다가 그해 고종이 죽자 다음해 즉위하였다. 1268년 환도를 위해 개성(開城)에 출배도감(出排都監)을 설치하였고, 1269년 임연(林衍) 등에 의해 폐위되기도 하였으며, 1270년 출륙(出陸)을 반대하는 배중손(裵仲孫) 등이 삼별초의 난을 일으키는 등 재위기간 중 편안한 날이 없었다.
1263년 홍저 등을 일본에 보내 해적이 고려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요구하였고, 1269년 태자 심(諶)을 몽골에 보내 친몽정책을 추진했으며, 1274년 원(元)나라의 일본정벌을 돕기 위해 전함을 만들기도 하였다. 능은 소릉(韶陵)이다. 시호는 순효(順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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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충렬왕 (忠裂王 1236∼1308(고종 23∼충렬왕 34))
고려 제25대 왕(1274∼1308). 이름은 거. 초명은 심(諶)·춘. 원종(元宗)의 맏아들이다. 1260년(원종 1) 태자에 책봉되고 1271년 원(元)나라에 가서 1274년(원종 15)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齋國大長公主)와 결혼, 돌아와 원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10월 원나라의 강요로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을 편성, 일본 정벌을 위한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으나 패퇴하였다. 1280년(충렬왕 6) 원나라의 일본 정벌을 위한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설치와 함께 중서좌승상 행중서성사(中書左丞相行中書省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동행중서성은 원나라의 내정간섭 기구로 변질하였다. 원나라의 지나친 내정간섭과 왕비의 죽음 등으로 정치에 싫증을 느껴 1297년 왕위를 세자 원에게 선위(禪位)하였으나 원나라의 명으로 왕위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그 뒤 음주가무(飮酒歌舞)와 사냥으로 소일하며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죽자 실권은 다시 아들에게 넘어갔다.
재위 동안 관제(官制)는 원나라의 속방(屬邦)처럼 격하되고 6부는 폐합, 변경되었으며 영토의 일부도 원나라의 직속령이 되었다. 또한 몽고 풍습의 유입 등으로 자주성을 잃기도 하였으며, 원나라 공주와 그 일족이 막대한 토지를 점유하여 많은 농민들이 유민(流民)으로 전락하였다. 능은 경릉(慶陵;開城), 시호는 충렬(忠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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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충선왕 (忠宣王 1275∼1325 (충렬왕 1∼충숙왕 12))
고려 제26대 왕(1298, 1308∼1313). 이름은 장(璋), 초명은 원. 자는 중앙(仲昻). 충렬왕의 큰아들이고, 어머니는 원(元)나라 세조의 딸이다. 1277년(충렬왕 3) 세자에 봉해지고 1295년 충렬왕에게서 동첨의사·밀직사·감찰사의 판사직을 맡아 3개월간 왕권대행을 하다가 원나라로 가 이듬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였다.
1297년(충렬왕 23) 충렬왕 측근에서 횡포를 부린 궁인 무비(無比)를 비롯해 궁인과 환관(宦官) 40여 명을 죽이거나 숙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1298년 1월 즉위하자 곧 광범위한 개혁에 관한 교서(敎書)를 발표하고 개혁을 단행,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한림원(翰林院)의 관료들이 그 기능을 대신하도록 하는 등 신진 관료들의 적극적인 보필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간섭과 권문세족 및 권신(權臣)들에 의해 그해 8월에 실각되었다.
1308년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지고 그해 7월 충렬왕이 죽자 다시 복위하여 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등용 개방, 공신 자제 중용, 귀족의 횡포 엄단 등 과감한 혁신정치를 행하였으나 곧 정치에 흥미를 잃고 원나라로 건너갔다. 거기서 각염법을 제정하고 토지개혁을 시도하는 등 국정을 전지(傳旨)로써 지휘하다가 1313년 아들 충숙(忠肅)에게 전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서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고금서적을 수집, 고전을 연구하였으며, 조맹부의 서법·글씨를 고려에 전파시키는 등 문화교류에 큰 영향을 끼쳤다. 1320년(충숙왕 7) 원나라 환관의 모략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지 2년 만에 원나라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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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충숙왕 (忠肅王 1294∼1339 (충렬왕 20∼충숙왕 복위 8))
고려 제27대 왕(1314∼30, 복위 1332∼39). 이름은 만(卍), 초명은 도(燾). 자는 의효(宜孝). 충선왕(忠宣王)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몽고인 의비(懿妃)이다. 1299년(충렬왕 25)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지고 이어 강릉대군으로 있다가 1213년(충선왕 5) 왕으로 즉위하였다.
1214년 민지(閔漬)·권보 등에게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略撰)하게 하였고 1215년에 원나라의 강요로 귀천(貴賤)의 복색(服色)을 정하고, 동당시(東堂試)를 응거시(應擧試)로 고쳤다. 1216년 상왕인 충선왕이 조카 고에게 심양왕(瀋陽王) 지위를 물려주어 원실 대우를 받게 되자 고는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로 충숙왕을 원나라에 무고하였다. 이로 인해 충숙왕은 5년간 연경(燕京)에 머물렀고, 1225년(충숙왕 12) 귀국하여 심양왕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한종유(韓宗愈) 등의 반대로 취소하였다.
1230년(충숙왕 17) 세자 정(禎;忠惠王)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갔다가 충혜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위되자 1232년 다시 복위하였다. 정사(政事)에 심혈을 기울인 때도 있었으나, 뒤에 주색과 사냥으로 정사를 소홀히 하여 권문세가의 토지·노비 강탈이 극심해지고 백성들은 조세·공부(貢賦)에 시달려 많은 유민(流民)이 생겼다. 예서(隷書)에 능했다. 능은 의릉(懿陵;開城). 시호는 의효(懿孝).-------------------------------------------------------------------------------
제28대 충혜왕 (忠惠王 1315∼1344(충숙왕 2∼충혜왕 복위 5))
고려 제28대 왕(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 이름은 정(禎). 충숙왕(忠肅王)의 맏아 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洪氏)이다. 1328년(충숙왕 15) 원(元)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1330년 충숙왕의 전위(傳位)를 받고 귀국, 즉위하였다.
영특하고 슬기로운 인물이었으나 주색잡기에 빠져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다가 원나라에 국새(國塞)를 빼앗겼고, 부왕에게 양위한 뒤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심양왕(瀋陽王) 고를 옹립하려는 조적 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복위하였다. 그러나 방탕함은 여전하여 이담(李湛)·이조년(李兆年) 등의 간청도 듣지 않고 주색과 사냥을 일삼았다.
관제를 개편하고 은병(銀甁) 대신 소(小)은병을 통용토록 하는 한편,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 징수하였으며,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횡포가 잦았다.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의 상소로, 원나라 사신들에 의해 1333년 게양(揭陽:山東省)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죽었다. 능은 영릉(永陵;開城). 시호는 헌효(獻孝).--------------------------------------------------------------------------------
제29대 충목왕 (忠穆王 1337∼1348 (충숙왕 복위 6∼충목왕 4))
고려 제29대 왕(1344∼1348). 이름은 흔(昕). 충혜왕(忠惠王)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덕녕공주(德寧公主)이다. 어려서 원(元)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있다가 1344년 충혜왕이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고, 뒤이어 원의 순제(順帝)에 의해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上柱國高麗國王)에 임명되었다.
보흥고(寶興庫)·덕녕고(德寧庫)·내승(內乘)·응방(鷹坊)을 폐지하여 백성의 원성을 덜고, 권신에게 빼앗겼던 녹과전(祿科田)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다. 1347년 정치도감(整治都監)을 두고 각 도의 토지를 측량하게 하였으나 원의 간섭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348년에는 진휼도감(賑恤都監)을 설치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등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능은 명릉(明陵;開城 소재), 시호는 현효(顯孝).--------------------------------------------------------------------------------
제30대 충정왕 (忠定王 1337∼1352 (충숙왕 복위 6∼공민왕 1))
고려 제30대 왕(1349∼1351). 이름은 저. 충혜왕의 서자(庶子)로 어머니는 찬성(贊成) 윤계종(尹繼宗)의 딸인 희비윤씨(禧妃尹氏)이다. 1348년(충목왕 4)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왕이 후사 없이 죽자 이듬해에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왜구의 기승이 심하였고, 외척 윤시우(尹時遇)와 배전 등의 세도로 국정이 문란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윤택(尹澤)·이승로(李承老) 등이 왕이 어려 국정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을 추대, 공민왕이 즉위하였다. 강화(江華)로 추방된 이듬해 15세의 나이로 독살당하였다. 능호는 개성에 있는 총릉. 시호는 충정(忠定).--------------------------------------------------------------------------------
제31대 공민왕 (恭愍王 1330∼1374 (충숙왕 17∼공민왕 23))
고려 제31대 왕(1351∼1374). 이름은 전,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이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고, 1349년(충정왕 1) 원(元)나라에 갔다가,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비(妃)로 맞았다. 원나라가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케 한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뒤를 잇게 함으로써 공주와 함께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원에 반항할 뜻을 지니고 있었다.
원나라에 다녀온 최영(崔瑩)·유탁(柳濯) 등의 보고로 원의 쇠약해 가는 진상을 파악,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 1) 변발·호복(胡服) 등 몽고풍속 폐지, 1356년(공민왕 5) 몽고의 연호·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날 제도를 복구했다. 또한 내정을 간섭하던 원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세도가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했으며, 100년 동안 존속되어 오던 원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원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하였다.
1368년(공민왕 17) 명(明)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서 명과 협력하여 요동(遼東)에 있는 원의 잔존(殘存) 세력을 공략, 1370년(공민왕 19)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고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國威)를 떨쳤다. 내정에 있어서는 문무관(文武官)의 전형권을 쥐고 있던 귀족회의 기관인 정방(政房)을 폐지, 신돈을 채용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兼倂)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하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그러나 1360년(공민왕 9)과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紅巾賊)과 왜구가 쳐들어와서 나라의 우환이 끓기 시작했다. 더구나 1365년(공민왕 14) 노국대장공주가 난산(難産)으로 죽자 불사(佛事)에 전념, 왕비만을 추모하며 국정을 신돈에게 맡겼다. 정권을 장악한 신돈은 실정을 거듭하고 왕을 해치려하므로 사사(賜死)했다.
그 뒤 1372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했는데 소년승(少年僧) 홍륜(洪倫)이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까지 하게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왕은 이 사실을 은폐시킬 의도로 밀고자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했으나 오히려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으며, 현존하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1점뿐이다. 능은 현릉(玄陵)으로 황해북도 개풍군(開豊郡)에 있다.--------------------------------------------------------------------------------
제32대 우왕 (禑王 1364∼1389(공민왕 13∼공양왕 1))
고려 제32대 왕(1375∼88). 아명은 모니노(牟尼奴). 신돈(辛旽)의 시비(侍婢) 반야(般若)의 소생으로, 1371년(공민왕 20) 궁중에 들어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백문보(白文寶)·정추(鄭樞)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된 뒤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 옹립되어 10세에 즉위했다. 즉위 초부터 중국 명(明)나라와의 복잡한 외교문제가 발생하고 왜구의 약탈이 극심하여 불안한 정세를 맞았다. 그러나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이나 유희를 즐겼다.
1388년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해 오자 최영(崔瑩)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遼東征伐)을 단행했는데,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은 실현되지 못하고 최영이 실각하자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도(江華島)에 안치되었다. 여흥(驪興;지금의 驪州)을 거쳐 강릉(江陵)으로 이배되었다가 공양왕 때에 서균형(徐均衡)에게 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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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대 창왕 (昌王 1380∼1389(우왕 6∼공양왕 1))
고려 제33대 왕(1388∼89). 이름은 창(昌). 우왕의 아들로,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후 이성계(李成桂)가 우왕을 폐위하고 강화(江華)로 추방하자 조민수(曺敏修)와 이색(李穡)의 추천으로 정비(定妃;공민왕비)의 교지(敎旨)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해 도평의사사·사헌부·판도사(版圖司)로 하여금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방법을 보고하게 하고 뇌물을 금지시켰으며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게 하였다. 또 전왕인 우왕을 강화에서 여흥군(驪興郡;지금의 驪州)으로 옮겼으며 최영(崔瑩)을 충주(忠州)로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한편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하여 문무의 전주(銓注)는 이부와 병부에서 맡게 하였고,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상서사(尙瑞司)를 두었으며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였다. 1389년 사관(史官) 8명을 두되 사초(史草) 2부를 작성하여 뒤에 증거로 삼게 하였고, 주(州)·군(郡)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으며,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 등을 보빙(報聘)을 목적으로 유구국(琉球國)에 보냈다.
또 경기(京畿)땅은 사대부에게 지급하고 그 밖의 땅은 모두 공상(供上)과 제사 용도에 충당하여 녹봉과 군수(軍需)의 비용을 충족하게 하였으며, 산기(散騎) 이상의 처로 명부(命婦)가 된 자는 재가를 금하였다. 또한 전왕인 우왕을 여흥군에서 강릉부로 옮겼다. 그 뒤 이성계 등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로 쫓겨났다가 그해 12월 살해되었다.------------------------------------------------------------------------------
제34대 공양왕 (恭讓王 1345∼1394(충목왕 1∼태조 3))
고려 제34대 왕(1389∼1392). 이름은 요(瑤). 신종(神宗)의 7대손. 관제에 있어서 전리사(典理司)·판도사(判圖司)·예의사(禮儀司)·군부사(軍簿司)·전법사(典法司)·전공사(典工司) 등을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6조로 개편하고, 첨설직을 폐지하였다.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개성의 오부와 동북면과 서북면의 부·주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하였다.
배불숭유론에 의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시행하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을 없애군사에 보충함과 동시에 불사(佛寺)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관사에 분속시켰다. 1390년(공양왕 2) 도선의 비록에 의해 한양을 천도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으로 개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하게 했으나, 이듬해 민심의 동요로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1391년 광흥창(廣興倉)·풍저창(豊儲倉)을 서강(西江)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했으며, 개성 오부에는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조준(趙浚)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하여 녹제와 전제를 개혁,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하였다. 또한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을 두어 노비결송법과 결송법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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