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무스 집안의 이상한 아이들
―오이디푸스, 또는 스핑크스를 찾아가는 길목
도정일
1. 여자의 실종
유명한 집안의 내력과 계보의 시말을 이야기로 들려주는 이른바 계도(系圖) 서사(saga)의 형식을 일찍 출발시킨 것은 그리스 신화이다. 신화의 계도 서사들은 상당수에 달하지만 사회질서나 권력 구조의 문제와 관련시켰을 때 단연 꼽아야 할 것으로는 두 왕가(거지 집안은 신화의 관심사가 아니다)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트로이 전쟁 때 헬레네 연합군을 이끈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집안인 아트레우스 가(家) 이야기이고 또하나는 우리의 오이디푸스를 출생시키는 테베 왕가 카드무스(Cadmus) 집안의 이야기이다. 이들 두 집안은 헬레네 신화 서사를 풍요롭게 하는 수많은 남녀들을 배출한다는 점에서 우선 흥미롭지만 그 남녀들의 행동에 신화적 인과관계와 내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더 흥미롭고 중요하다. 두 집안 출신의 남자와 여자들은 가문의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가문의 과거는 그들에게 운명이다. 그들의 기이한 개인적 행동, 성공과 실패, 사랑과 죽음은 가문의 전통과 연결되고 한 세대의 운명은 이전 세대의 업보에 결박된다. 영웅 아가멤논이 마누라 클리템네스트라에게 맞아 죽는 것은 우연한 돌발적 사건이 아니다. 이런 운명적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집안 이야기’는 개별 주인공들의 특이한 행태를 전체적 문맥 속에서 이해하게 하는 배경 서사를, 또는 개별화한 파편적 이야기들을 이어주는 일종의 총제적 집단 서사를 구성한다. 집단 서사는 개인들을 포함하면서 그러나 개인들을 넘어서는 집단적 운명과 욕망, 성공과 실패의 비밀들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카드무스 집안의 이야기는 오이디푸스를 향한 우리의 여행이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배경 서사이고 집단 서사이다.
우리가 오이디푸스를 알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은 상당히 이상하다. 운명을 피하기 위해 운명을 만나러 가는 기이한 여행자, 수수께끼를 풀고 스스로 수수께끼가 되는 어둠의 기술자―신화세계의 이 가장 유명한, 그러므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오이디푸스가 아직도 우리에게 미지의 인물인가? 아직도 그가 문제인가? ‘어둠의 기술자’라는 것은 장 콕토가 오이디푸스에게 붙여준 이름이지만 오이디푸스는 어둠의 기술자가 아니라 어둠 그 자체이다. 그는 어둠에서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어둠 속에 있다. 만약 어둠이 우리에게 친숙하다면 오이디푸스도 친숙하다. 그러나 어둠은 우리에게 친숙한가? 어둠은 측량할 수 없고 정의되지 않으며 따라서 재현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깊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우리의 깊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라는 스타로빈스키의 말은 흥미롭다. 어둠과 마찬가지로 ‘깊이(depth)’도 재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재현을 가능하게 할 어떤 위치, 바닥,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재현 가능한 깊이는 이미 깊이가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여전히 우리에게 어둡고 깊은 ‘질문’으로 남아 있다. 그는 우리에게 스핑크스이다. 그 스핑크스의 질문은 계속된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는 집안의 기원 지점에 한 여자의 실종이 있다는 것은 집단 서사적 관점에서 그냥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오이디푸스의 조상 카드무스가 테베를 창건하게 된 데는 이 여자의 실종이 직접적 사단이기 때문이다. 그 사라진 여자는 카드무스의 누이동생 에우로파(Europa)이다. 티티안(Titian)의 그림 〈에우로파의 겁탈〉에 역동적으로 묘사된 이 실종 사건의 중심인물은 황소와 에우로파이다. 납치 사건에는 언제나 변신과 유혹의 대가 제우스가 있다. 지상의 처녀 에우로파에게 반한 제우스는 유순한 황소 모습으로 변신하여 여자를 유혹한 다음 그녀를 등에 태우고 바다 건너 크레타 섬으로 달아난다. 납치된 에우로파는 티레의 왕 아게노르의 딸이다. 딸을 잃어버린 왕은 다섯 아들들에게 명령을 내리는데, 그 명령은 보통의 명령이 아니다. “가서 에우로파를 찾아오라.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 누이를 찾아 뿔뿔이 흩어져 길 떠나는 다섯 형제의 맏이가 카드무스이다. 제우스가 업고 달아난 누이를 그들이 찾을 길은 없다. 카드무스가 델피의 신전에 도움을 청하자 이런 신탁이 떨어진다. “너는 누이를 찾을 수 없다. 가서 네 자신의 나라를 세우라. 신전 바깥의 흰 암소가 너를 안내할 것이다. 그 암소를 따라가라. 암소가 지쳐 주저앉는 곳, 거기가 새 도시를 세울 곳이니라.” 카드무스는 암소를 따라가고, 그 암소가 지쳐 쓰러지는 곳에 새 나라를 세운다. 그것이 카드메이아, 곧 테베 왕국의 시초이다.
〔먼 후일, 유럽 통합의 아이디어가 한창 논의되던 1960년대 중반, 데니스 드 루즈몽이 유럽을 하나로 묶어줄 ‘공통의 과거’를 이 티레의 공주 에우로파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유럽 통합의 욕망이 어떻게 신화로부터 유용한 과거를 공급받으려 했던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종전과 함께 유럽은 식민지 경영으로부터 철수를 강요받고 ‘유럽으로의 복귀’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 복귀할 ‘하나의 유럽’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럽이 국제 무대에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분할된 유럽을 통합해야 하며, 이 통합 유럽은 ‘공동체’의 아이디어 위에 기초해야 하고,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유럽을 한데 묶어줄 모종의 공통 유산이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통합론자들은 생각한다. “통합된 하나의 유럽은 유럽을 대표하는 최상의 정신들, ‘멀리 보는 자’들이 수천 년간 생각해온 이상(理想)이다. 호메로스는 이미 제우스를 ‘에우로포스’(europos, ‘멀리 보는 자’의 뜻을 가진 형용사)로 묘사하지 않았는가”라고 『유럽의 의미』(1965)에서 루즈몽은 쓰고 있다. 루즈몽이 적극적으로 천거한 것은 에우로파의 신화이다. 통합 유럽은 이상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실현되어야 한다. 에우로파를 찾지 못한 카드무스가 새 나라를 세우듯 “우리는 유럽을 새로 만듦으로서 유럽을 찾아야 한다”.〕
블라디미르 프로프적 서사론을 다소 가공해서 말하면 에우로파의 납치 대목에서 제우스가 수행하는 서사적 기능은 ‘결핍(lack)’의 도입이다. 결핍은 추구 행위를 발동시킨다. 이를테면 공주 설화에서 용은 공주를 납치하고 이 납치는 한 집안에 문득 결핍을 일으켜 그 없어진 것의 회복을 위한 다음 단계 행동들을 촉발시킨다. 아이의 실종, 어떤 귀한 것(반지나 목걸이)의 분실, 갑작스런 시력(눈=권력) 상실 등은 결핍의 도입에 해당한다. 없어진 것을 찾아 주인공이 모험길에 나서는 모든 추구 서사(quest narrative)에는 이런저런 종류의 결핍 모티프들이 등장하여 다음 단계 사건들을 발전시키는 핵심 사건(바르트의 ‘핵사건’)의 기능을 담당한다. 카드무스 서사를 설화적 구도 속에 넣어보면 제우스는 공주 설화의 용처럼 여자를 납치하는 ‘악당역’에 배치되어 있고, 이 악당의 행동은 카드무스에 의한 추구 행위를 시간적으로 선행하고 논리적으로 합리화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설화적 분석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하나의 중요한 소득은 그런 분석이 추구 행위의 주체들에게 약속되는 ‘보상’의 문제에 주목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공주 설화에서, 사라진 공주를 찾아나서는 추구 주체(대개 타국에서 온 왕자)에게는 성공할 경우 공주와의 결혼이 모험의 보상으로 약속된다. 이 경우 결혼은 단순한 남녀 결합이 아니다. 거기에는 권력(왕권) 승계라는 판돈이 함께 걸려 있다. 카드무스 서사에서 극히 흥미로운 것은 부왕 아게노르가 아들들에게 내리는 명령(“가서 에우로파를 찾아오라.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이다.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이 명령은 심각하다. 에우로파를 찾는가 못 찾는가에 왕권 승계의 가능성 여부가 달려 있는 것이다. 찾아오는 자에게는 권력 승계가 암시적 보상으로, 찾지 못하는 자에게는 ‘추방’이 명시적 보상으로 약속된다.
이 분석에서 드러나는 것은 카드무스 신화가 적어도 가부장제 질서를 확립시킨 사회의 서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권력을 아들들에게로 승계시키는 가부장제 질서에서라면 권력 승계 과정에서의 여성(공주)의 역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카드무스가 추방되는 대목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정적이다. 그 결정적 비중은 여성이 권력을 승계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여자를 ‘매개’로 승계된다는 사실에 있다. 서사의 문자적 표층 차원을 넘어서서 보면 카드무스에게 에우로파라는 존재는 결혼 대상이기보다는 ‘권력 승계의 결정적 매개자로서의 여성’을 보여주는 알레고리이다. 그러므로 카드무스가 추방되는 이야기는 여성이 아직도 권력 승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 다시 말해 권력 구조가 남성 중심 구조로 완전히 이행하기 이전 단계의 사회질서를 신화의 초기 문맥으로 하고 있다는 관찰을 가능하게 한다. 아들을 추방할 정도의 어떤 불화가 부왕 아게노르와 아들 카드무스 사이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신화 텍스트상 드러난 것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에우로파(여성)의 부재 상태에서는 카드무스가 권력을 승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승계 부정은 카드무스 혼자의 운명이 아니라 다섯 아들 전체의 운명이다. 여성의 매개 없이 남자들은 누구도 권력을 이어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쫓겨난 카드무스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그를 추방한 사회의 그것과는 다른 질서의 도입을 시도한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것은 여성의 매개를 필요로 하는 권력질서가 아니라 거꾸로 여성을 공백화하는 질서, 여성에게 어떤 의미 있는 지위도 부여하지 않는 새로운 질서이다. 카드무스 신화가 이 신질서를 서사화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이야기’다운 것이어서 분석적 읽기의 절차 없이는 그 대목의 상징적 의미 차원이 포착되지 않는다. 그 상징적 대목은 카드무스 신화의 가장 어이없고 까닭 없어 보이는 ‘땅에서 솟아난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그 황당한 대목은 이러하다. 암소가 지쳐 쓰러진 곳에 발길을 멈춘 카드무스는 거기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하는데 나라를 세우자면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백성이 필요하다. 카드무스를 수행했던 시종들은 이 대목에서 모두 죽고 없다. 계곡에 물을 뜨러 갔던 시종들은 거기서 만난 어떤 거대한 뱀에 물려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카드무스는 그 뱀과 싸워 이기고 아테나 신의 권고에 따라 그 죽은 뱀의 이빨들을 뽑아 땅에 심는다. 그 땅에서 투구를 쓰고 창과 칼을 든 일단의 ‘사나이’들이 솟아나오는데, 이들은 나오자마자 저희들끼리 치고 받으며 일대 살육전을 벌인다. 마침내 그중의 한 남자가 칼을 버리고 화해를 선언함으로써 싸움은 끝난다. 살아남은 남자는 모두 다섯이다. 이들이 ‘스파르토이’(땅에 심어진 인간)이고, 화해를 선언한 사내에게 붙여진 이름은 ‘크토니우스’(Chthonius, ‘땅에서 난 자’의 의미)이다. 카드무스는 이들과 함께 테베를 창건한다. 땅에서 솟은 그 스파르토이들은 물론 테베의 지배계급이 된다.
우리의 접근법을 유지할 때, 이 ‘땅에서 솟아오른 인간’의 이야기는 신질서의 도입을 암시한다는 읽기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테베의 창건자들이 ‘여자 없이’ 또는 여자의 ‘매개 없이’ 태어났다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그것이 암시하는 것은 여성을 배제하는 신질서의 도입이다.(카드무스를 따라갔던 원래의 시종들이 모두 뱀에 물려 죽는다는 이야기도 이 문맥에서 보면 아주 정교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나라의 신질서를 위해서는 구질서의 존재들을 퇴장시켜야 하는 서사의 내적 요청을 이야기 차원에서 기술적으로 처리한다.) 스파르토이들은 인간 여성의 몸에서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다. 땅에 심어진 뱀의 이빨들로부터 솟아오른 그 스파르토이들은 어머니 없는 존재, 혹은 적어도 인간 여성을 어머니로 갖지 않는 존재이다. 땅에서 솟은 남자들로 세워진 테베―그 나라에서 ‘인간 여성’의 자리, 여자의 지위는 무엇인가? 인간 어머니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그 남자들에게 인간 ‘아내’는 의미 있고 중요할까? 남자가 여자의 매개 없이 태어날 수 있다면 인간 여성은 그 남자들에게 별의미 없는 존재, 잉여이거나 과잉(excess)이다. 실제로, 테베 서사의 전개 과정에서 아내들은 많은 경우 언급조차 되지 않는 무존재로 공백 처리된다. 그들이 무존재인 것은 그들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정치적 지위가 거의 공백이기 때문이다. 창건자 카드무스 이후 테베 왕가의 마지막 존재인 라오다마스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집안에서 여성(딸, 아내, 어머니)이 차지하는 지위와 그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미미한 것이거나 아니면 지나친 ‘과잉’의 것이다. 역할의 미미함과 마찬가지로 역할의 과잉도 여성의 지위를 문제적인 것이게 한다.
카드무스의 아내 헤르모니아부터가 인간계의 여자 아닌 신들의 딸이다. 헤르모니아는 미모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남편(헤파에스투스) 몰래 정부 아레스(전쟁의 신)와 간통하고 얻은 딸이다. 카드무스헤르모니아 사이에 아들 하나와 딸 넷이 태어난다. 카드무스는 아들 폴리도루스를 ‘땅에서 솟은 자’인 크토니우스의 딸 닉테이스(‘밤’의 의미)와 결혼시키고, 딸 아가베는 역시 땅에서 솟은 자의 하나인 에키온에게 보낸다. 이후 테베의 권력은 이들 두 출토인(出土人, 스파르토이)들의 집안 사이를 오가며 승계된다. 출토인들은 어머니 없는 존재들일 뿐 아니라 많은 경우 그들의 ‘아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에키온은 아내 아가베를 얻지만, 같은 출토인인 크토니우스의 경우 딸(닉테우스)은 있지만 그 딸의 어머니, 곧 크토니우스의 아내가 누구인지는 언급되지 않고 후대의 집안에서도 남자들의 이름은 등장하는 반면 여자들은 이름 없는 존재로 생략된다.
여성 역할의 과잉 사례도 수없이 많다. 테베 왕가의 여자들이 무슨 역할을 수행할 경우 그 역할은 거의 언제나 후손들(특히 남자들)에게 죽음, 파탄, 사고를 안겨다 주는 문제적 과잉 양상을 보여준다. 카드무스의 아내 헤르모니아부터가 그러하다. 그녀에게는 결혼 때 선물로 받은 목걸이가 하나 있는데, 후일 이 목걸이는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 반드시 재앙을 안겨다 준다.(저주가 담긴 이 유명한 ‘헤르모니아의 목걸이’는 아내 아프로디테의 간통으로 오쟁이 진 헤파에스투스가 그 간통의 소산인 헤르모니아에게 결혼 선물로 만들어준 것이다.) ‘카드무스의 딸들’은 모두가 이런저런 재앙을 만나거나 재앙의 요인이 된다. 첫째딸 아우토노이의 아들 악타이온은 사냥길에 숲에서 발가벗고 목욕하는 여신 아르테미스(다이아나)의 알몸을 본 것이 화근이 되어 사슴으로 몸이 바뀌고 자기 사냥개들에게 물려 죽는다. 셋째딸 아가베는 디오니소스의 술에 취해 키타에론 산(후일, 버려진 오이디푸스가 이웃나라 양치기에게로 넘겨지는 바로 그 산)에서 아들 펜테우스를 찢어 죽이고, 둘째딸 이노는 동생 아가베가 아들을 찢어 죽일 때 거기 동참하여 마치 밭에서 무 뽑듯 조카의 두 팔을 뽑아낸다. 넷째딸 시멜레는 제우스와 간통 끝에 디오니소스를 잉태하지만 헤라의 간계에 빠져 제우스의 불길에 타 죽는다. 여신 레토(태양신 아폴로와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의 어머니)를 상대로 아들딸 자랑(“당신은 오누이만 두었지만 난 일곱 아들딸을 두었어! 그러니 내가 당신보다 잘났지.”)을 하다가 일곱 명의 자녀들을 모두 비명횡사하게 하는 비운의 여자 니오베도 카드무스 집안의 후대 여성이다. 카드무스의 증손자이고 오이디푸스의 아비인 라이우스(Laius)는 젊은 남자를 사랑한 동성애자이며, 여성과의 관계에 문제적인 존재이다.(인간계에 남성 동성애를 처음 도입한 것은 이 라이우스라 한다.) 그는 아내 이오카스타와의 사이에 어떤 아이도 원치 않지만 신들의 응징을 받아 아들 오이디푸스를 낳는다. 아가베와 니오베가 자녀들에게 죽음을 안기는 과잉의 어머니라면, 이오카스타는 그 아들 오이디푸스에게 어머니이자 아내라는 형식의 재앙을 안기는 과잉 여성이 된다.
2. 남자의 도시―실패하는 질서
카드무스 집안 이야기들에 잠복해 있는 것이 여성 배제의 동기뿐일까? 그렇지 않다. 테베 왕가의 이야기를 매혹적이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굴곡, 반전, 역설 등의 복합적 서사 구조 속에 구현되는 복잡성이다. 복잡성은 사건의 단순 진행과 결말을 거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전―곧 성공이 기대되는 곳에 실패가 발생하는 전환 구조이다. 권력질서와 연결지을 때, 카드무스 집안의 이야기는 특징적으로 실패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여성 공백화라는 새로운 사회질서의 확립보다는 이상하게도 그 확립의 실패를 더 많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성 배제가 신질서를 도입하려는 카드무스의, 혹은 테베 왕국의 기획이었다면 그 가부장제적 기획의 결과는 실패이다. 카드무스의 기획이 ‘남자의 도시’를 세우는 데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 두 비극 작가들(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손에서 아주 명료하게 언급된다. 이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펜테우스와 에테오클레스(오이디푸스의 아들)는 여자들을 매도하고 테베가 남자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창건되었다고 공공연히 자랑한다. 그러나 테베 왕가의 남자들이 여성을 배제한 나라를 세우려 했다면, 이 왕가의 전설적 서사들은 그 남자들의 기획이 실패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서사세계의 테베 왕국은 어떤 정연한 가부장제 질서도 확립하지 못하고 그 질서를 정당화할 이데올로기를 강화하지도 못한다.
우선 카드무스 자신의 권력부터가 아들 폴리도루스에게로 직접 승계되지 않고 딸 아가베의 아들인 펜테우스에게로 넘어간다. 그 펜테우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여자(어머니)의 손에 찢겨 죽는다. 여기서 권력은 펜테우스의 아들(오엘라수스)에게로 이어지지 않고 세대의 시간을 역 행해서 다시 카드무스에게로 되돌아간다. 카드무스 사후 왕권은 그의 아들을 건너뛰어 손자 랍다쿠스에게로 넘겨지고 그 랍다쿠스가 어린 아들 라이우스를 남기고 죽자 권력은 다시 지그재그로 시간을 거슬러 라이우스보다 한참 윗세대인 리쿠스의 손에 들어간다. 리쿠스는 카드무스를 도와 테베를 창건했던 출토인 크토니우스의 아들이며, 라이우스에게는 증조 세대의 아저씨이다. 그 다음은? 그 다음에도 ‘이하 동문’이랄 수 있을 만큼 테베의 권력은 친족 살해, 찬탈, 추방을 포함한 기이한 비정상적 승계 과정을 되풀이한다.
이 계보 추적은 따분한 일이지만 오이디푸스의 비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서 인내의 발휘가 필수적이다. 테베 왕가의 혼란은 오이디푸스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리쿠스 왕에게는 안티오페라는 질녀가 있었는데 이 여자가 제우스와의 간통으로 아들 쌍둥이를 낳자 리쿠스는 그녀를 감금하고 그녀가 낳은 쌍둥이들을 벌판에 내다 버린다. 그러나 쌍둥이 형제(암피온과 제투스)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때가 되자 그들은 테베로 돌아와 그들을 내다 버리고 어머니를 감금한 리쿠스 왕 부부를 무참히 죽인 뒤 왕가의 적손 라이우스를 귀양보내고 왕권을 장악한다. 암피온은 테베에 새로 성벽을 쌓고 백성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등의 치적을 이루지만 그에게도 재앙은 닥친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 그의 아내 니오베는 여신 레토를 능멸했다가 일곱 자녀를 차례로 잃어버린다. 암피온이 죽자 라이우스가 망명지에서 돌아와 왕이 된다. 권력은 실로 오랜만에 카드무스의 직계 남성 후손에게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 라이우스는 망명 기간 동안 그를 환대해주었던 엘리스의 왕 펠롭스에게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 전비를 안고 있고 그 때문에 승계의 시간질서는 또 한 차례 교란될 위기에 놓인다. 그 라이우스의 배은망덕이란 그가 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푸스를 사랑하여 그를 무단 납치한 사건이다. 신화에 따르면, 라이우스가 아들 오이디푸스의 손에 죽게 될 운명을 신들로부터 점지받은 것은 그가 망명지에서 저지른 이 비행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는 동안 독자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라고 묻는 짜증의 여신에게 머리를 시달렸을 가능성이 있다. 카드무스의 아이들에 관한 이상한 이야기는 오이디푸스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지만 그 모든 이야기를 여기 한꺼번에 풀어놓는 것은 아무래도 우둔한 일이다. 대신,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라는 짜증의 여신을 달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몇 가지 ‘문제’부터 정돈해보기로 하자. 우선 정돈할 것은 서사에 제시된 테베 왕가와 그 친족들 사이의 권력 승계 관계가 극히 혼란스럽고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이다. 테베 왕가의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질서도 도입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의 질서를 확립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안정된 권력 구조를 만들지 못한다. 권력은 끊임없이 요동하고 지그재그로 이동하며 질서보다는 질서의 실패가 더 많이 발생한다. 테베 왕가의 이야기는 안정된 사회질서와 권력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사회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서사인가? 그 실패는 무엇에 연유하는가? 그것은 권력의 여계(女系) 승계 사회로부터 남계(男系) 승계 사회로 미끈하게 이행하지 못하는 사회의 실패이고 그 이행 과정의 혼란인가? 아니면 여성에게 적법한 지위와 역할을 부정하는 사회가 그 부정 때문에 겪게 되는 곤혹과 실패인가? 카드무스 가의 아이들은 사실상 그 누구도 아비로부터 직접 권력을 이양받는 가부장제적 질서를 누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든 경우에 반드시 여성을 ‘매개’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도 아니다. 가부장제 질서도 정처(正妻)의 지위를 보장함으로써 여성 매개의 형식을 밟는다. 그러나 테베 서사에서 정처의 지위는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적법성’은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 테베의 이야기는 권력의 적법성 그 자체를 부정하고, 적법 질서의 확립 가능성보다는 그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서사인가? 그것은 비정상성(anomaly) 자체가 인간세계의 정상성이라 말하려는 것인가?
솜방망이 속에 감춰진 바늘처럼, 이 비정상성의 문제는 이야기의 표층 아래에서 여러 상징적 형태로 그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고 있다. 권력 승계 방식의 혼란이 그 비정상성을 보여주는 한 형태라면 ‘시간질서의 교란’은 주목할 만한 두번째 비정상성의 형태이다. 시간관계를 수직축으로 놓았을 때 테베의 권력 승계는 그 수직축의 아래위를 무시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혼란상을 보인다. 시간 진행을 수평축으로 놓고 보아도 각 세대의 시간적 선후관계는 확립되지 않는다. 진행과 퇴행이 반복되고 교차됨으로써 시간의 선후관계는 뒤죽박죽이 된다. 외손자 펜테우스에게로 승계됐던 권력이 시간질서를 거슬러 다시 카드무스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은 이 교란을 ‘패턴’화하는 원초적 사건이다. 이 패턴은 여러 차례 반복된다. 라이우스에게로 이어질 법하던 권력은 그의 증조부 세대인 리쿠스에게로 역승계되었다가 암피온을 거쳐 라이우스에게로 돌아간다. 권력이 이처럼 선후 세대를 오감으로써 세대 구별은 무너진다. 누가 선행 세대이고 누가 후계 세대인가? 누가 조상이고 누가 후손인가?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의 남편이 되어 아비가 있었던 자리에 들어 앉음으로써 아비와 동세대적 시간대에 놓인다. 그는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아비이다. 누가 아비이고 누가 아들인가? 오이디푸스의 실권 이후 권력은 다시 세대를 거슬러 그의 외삼촌 크레온에게로 이관된다. 그 크레온은 오이디푸스에게 외삼촌이자 동시에 처남이다. 시간은 구별되지 않고 원환으로 뭉쳐 있다.
이 시간 교란은 이미 시간질서의 부재이다. 선후관계가 시간의 질서라면 그런 질서는 테베 서사에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질서의 혼란말고도 이 시간관계 부재 구조를 잘 드러내는 또다른 강력한 예로는 예언자 티레시아스가 있다. 신화뿐아니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도 등장하여 오이디푸스의 화를 돋우는 이 유명한 장님 예언자는 적어도 그가 오이디푸스 신화와 비극의 두 텍스트 세계에 나온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의 틀림없는 동시대인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 티레시아스는 테베의 창건자이고 오이디푸스의 고조 할아비인 카드무스와도 동시대인이며 그 카드무스의 외손자 펜테우스와도 동시대인이다. 펜테우스가 디오니소스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 신을 심문하러 간다고 나설 때 그 펜테우스를 경고하는 예언자는 바로 티레시아스이다. 더 놀랍게, 티레시아스는 테베의 마지막 왕 라오다마스의 동시대인이기도 하다. 이 예언자는 마치 시작과 끝이 하나라는 듯이 테베 왕국의 첫 순간에 있고 중간에도 있고 마지막 순간에도 있다. 어찌된 일인가? 그는 신화세계의 어떤 무시간성을 보여주는 알레고리인가? 하지만 이야기 세계에도 시간의 토막은 있고 세대의 시작과 끝은 있다. 카드무스는 죽고 펜테우스도 죽고 오이디푸스도 죽는다. 『오디세이아』에서는 그 티레시아스가 ‘죽어’ 하데스로 내려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테베 서사에서만은 그는 죽지 않고 모든 세대에 동시적으로 등장하는 무시간적 존재이다. 신이 아니면서 죽지 않는 티레시아스는 이 서사 체계 특유의 존재 같아 보인다. 테베의 이야기는 시간을 꿰뚫어보는 예언력을 가진 자에게 시간의 이빨을 무력화하는 힘까지도 부여하려 한 것인가? 그러나 사실 테베 서사에 관한 한 티레시아스는 특이하지 않다. 권력의 오르락내리락과 마찬가지로 이 예언자 역시 시간관계 부재 구조를 테베 서사의 여기저기에 심고 다니는 반복과 혼동(confusion)의 존재이다. 특이한 것은 티레시아스가 아니라 테베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성의 교란, 세대 범주의 혼동, 시간관계 부재 구조 그 자체이다.
아비 죽이기를 포함한 친족 살해도 테베적 비정상성의 세번째 형태로 꼽을 수 있다. 친족 살해는 반드시 테베 서사 특유의 것이랄 수는 없지만(아르테우스 집안도 친족 살해로 유명하다. 아가멤논은, 비록 자의에 의한 행위는 아니지만, 딸 이피게니아를 죽여 제물로 바치고 자기도 나중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에게 맞아 죽는다. 그 클리템네스트라는 다시 딸 엘렉트라와 아들 오레스테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것이 서사의 초기에서부터 이미 하나의 ‘패턴’을 만들며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이다. 친족 살해를 패턴화하는 대목은 앞서 언급된 스파르토이 이야기에 들어 있다. 땅에서 투구를 쓰고 솟아오른 사내들이 나오자마자 서로 찔러 죽인다는 이야기는 테베 창건 서사 가운데 읽어내기를 좌절시키는 괴상하고 난삽한 사건의 하나이다. 그러나 친족 살해의 관점은 그 난삽성을 해소한다. 아주 간단히, 출토인들은 하나의 동일 모태(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형제’이며 따라서 그들이 서로 죽이는 행위는 형제 죽이기, 곧 친족 살해이다. 이 친족 살해는 후대에서 계속 반복된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만 말해도, 암피온과 제투스는 그 증조부 세대의 친족 리쿠스를 죽이고 리쿠스의 아내까지도 황소뿔에 매달아 죽인다. 아가베는 아들 펜테우스를 죽이고 오이디푸스는 아비를 죽인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세스는 아비 망명 이후 테베의 왕권을 놓고 싸우다가 서로 죽이고, 권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들어선 크레온은 오이디푸스의 맏딸 안티고네를 동굴에 가두어 죽인다. 테베 서사의 첫머리에 발생한 형제 살해는 그 집단 서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형제(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살육으로 되풀이된다. 똬리 튼 뱀의 머리와 꼬리처럼, 혹은 제 꼬리를 물기 위해 뺑뺑이 도는 강아지의 회전에서처럼, 처음과 끝은 서로 만나고 친족 살해의 패턴은 완성된다.
“그래서?”라고 우리의 여신은, 반쯤은 알아듣고 반쯤은 여전히 무슨 ‘새 까먹은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졸린 눈으로 다시 다그칠 가능성이 있다. 그녀를 위하여, 오로지 그녀를 위하여,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야 할 순간이 오고 있다. 여신이 잠들면 우리의 이 모든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랴?
3. 오이디푸스의 팽창
오이디푸스의 어둠을 이해하기 위한 이 긴 우회 끝에 우리가 마침내 도달하는 지점에는 두 개의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아이구, 그 지점이란 것이 아직도 종착역이 아니라 여전히 질문의 장소인가?) 질문의 하나는 이미 앞에서 제기되었으면서도 해답을 얻지 못한 문제―곧 테베 서사에 그려진 한 사회의 비정상성이 도대체 무엇에 연유하는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테베 왕국의 기획을 실패로 돌리는 서사 자체의 미스터리에 관한 것이다. 첫번째 질문은 다분히 인류학적인 것이지만 그것의 추적으로부터 기대되는 소득은 두번째 질문을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이미 우리가 본 테베의 전설적 왕국은 여자를 공백화하는 남자의 나라를 세우려다 실패하는 나라이다. 실패의 원인은 일단 배제(exclusion)의 정치학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을 공백화하고 잉여로 돌리는 사회는 그 배제의 모든 순간에 남성질서의 과잉을 초래하고 과잉은 실패를 불가피한 것이게 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테베 왕국과 ‘땅’의 관계이다. 잠깐만 회고해보아도 테베 창건 서사에서 땅은 그냥 땅이 아니라 창건 세대를 산출한 생산의 모태―곧 ‘어머니’이다. 이 어머니땅과 인간 여성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문제적’이다. 어머니인 땅의 존재 앞에서 인간 여성은 존재의 잉여성을 면탈받기 어렵고 그 존재의 의미는 위축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어머니땅과 남자들의 관계도 역시 ‘문제적’인 것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남자들에게 무시간적 생산의 모태이고 모든 세대를 통해 공유의 대상이다. 무시간적 존재로서의 어머니땅은 그것과 관계맺는 인간(남자)들에게 세대간 구별의 범주를 불가능하게 하며, 그 관계 양상은 근본적으로 근친상간적인 것이다. 할아비가 씨를 뿌렸던 땅에 아들이 다시 씨를 뿌리고, 그 땅에 손자 세대가 다시 씨를 뿌린다. 이 근친상간적 관계에서 친족관계의 모든 질서와 차이, 그리고 세대간의 구별은 무화되거나 불가능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테베 왕국의 실패가 단순히 남자의 나라를 세우려는 과잉 기획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땅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규정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사회의 깊은 딜레마에 연유한다고 말해야 한다. 여성 존재의 잉여성은 이 딜레마의 곁가지이다. 인간과 땅의 관계를 모든 질서의 기초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테베는 그것을 시도하지만 궁극적으로 실패한다. 어머니땅과 인간 사이의 근친상간적 관계는 이미 그 자체로 모든 사회질서와 구별의 문법들을 무화시키는 반질서이고 혼돈이기 때문이다.
테베 서사는 이 딜레마를 풀지 못한다. 그 집단 서사의 끄트머리에 나오는 것은 테베의 멸망이며 멸망한 나라를 떠나는 긴 유민의 행렬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관심은 테베 왕국의 신화가 왜 그 딜레마 해소에 실패했는가라는 데 있지 않고 어떻게 그 딜레마를 딜레마로 남겨두면서 그것의 크기와 문제를 더욱 팽창시키는가라는 데 있다. 오이디푸스는 그 ‘팽창된’ 딜레마를 대표한다. 테베 서사의, 또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미스터리는 더욱 크게 팽창된 형태로 우리에게 남겨진, 우리가 ‘어둠’이라 부른 그 딜레마와 직결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