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여행기
변희우
가수 이용이 부르는 10월의 마지막 밤이 연상되는 기다림은 어린 아이 소풍 기다리듯 그렇게 설레지 않아도 좋았다. 그만해도 해외여행 이력이 붙어 준비물에만 집착해야 하는 것이 나이 들어 건망증이 갈수록 심해졌기 때문이다. 만년필을 귀에 걸치고는 찾아서 온 방안을 뒤지는 그렇게 늙었다는 증명을 해야만 했다.
비행기 탑승 시간이 11시라 미팅 시간이 9시 5분, 여기서 출발해서 당일에 갈수가 없어 부득이 대구에서 하룻밤을 자고 출발을 하기로 정했다. 김해 비행장 근처에서 자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모르는 곳에서 모텔 찾아다니는 것도 별로 탐탁지 않아서 대구에서 자고 리무진으로 간다는 결정을 했다.
D-dey 이틀을 앞두고 탑승 시간이 12시 5분으로 늦춰져 대구에서의 숙박이 줄어들었다.
10월 31일 아침 6시 예약 해 둔 김기사 택시를 타고 거창으로 갔다. 굳이 괜찮다는 팁까지 건네주고 우리는 대구행 첫차에 몸을 실었다. 대구에 와서 지하철을 타고 동대구역에서 내려 건너 편 한진 고속 자리에 김해공항 리무진을 타고 공항 국제선 타는 곳에서 내려 공항에 들어갔다.
미팅 시간까지 약 한 시간이 남아 여기서 밥을 먹었다. 해물 순두부 참 이름이 좋아서 시켰더니 새우 한 마리에 오징어 손가락 한 마디 되는 두 개를 넣고 해물 순두부라 했다. 하여간에 밥을 먹고 미팅시간을 맞추어 갔다. 친절과는 거리가 까마득해 보이는 앙칼지게 생긴 여자가 호명을 하고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면서 B13~B17에 가서 짐을 붙이고 표를 받아서 4 번 게이트로 들어가면 된다고 했다.
지난번 호주갈 때는 짐에다 하나투어라는 표시도 붙여주고 하더니 이건 그냥 가라니 왠지 좀 씁쓸하다. 그곳에 가서 캐리어를 기내로 가져가겠노라고 했더니 무게를 달아본다. 9kg이라 7kg으로 줄여라 했다. 옷가지 몇 개를 주섬주섬 챙긴 후 달아보니 5.5kg이다. 너무 줄였는가 해도 그대로 딱지를 붙여 주어서 기내로 가지고 들어갔다.
내가 이렇게 낑낑대며 하는 것도 이유가 있어서다. 도착해서 짐 찾는 데만 무려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그 시간을 벌자는 속셈이다. 나중에 상세히 기술 하겠지만 되도록 짐을 가볍게 해서 화물을 맡기지 않았다.
잠시 틈을 내어 아내의 여권에 자동 출입국 심사 도장을 받았다. 나는 필리핀 갈 때 그걸 해놔서 아내만 받았다. 마침 한산해서 바로 도장을 받고 벅적대지 않고 쉽게 통과를 했다. 이것도 한번 받으면 몇 년이 가는지는 몰라도 줄이 많지 않아서 쉽게 통과하는 관문이라 생각했다.
10월31일 12시5분 CI(중화항공)0189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을 했다. 시차를 자동으로 계산해서 1시45분에 도착을 했다. 다른 사람들 짐을 찾느라 우르르 몰려가고 우리는 쉽게 나왔다. 하나투어 팻말을 들고 서 있는 작고 단단해 보이는 여자에게 손을 번쩍 들어 하나투어라고 말하자 금새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가이드 초미미 여사와 첫 만남이다. 다가서니 1번으로 나왔다고 환전을 하지 않았으면 저쪽 은행에 가서 하라고 가르쳐 주면서 많이 하지 말고 미화 50달러 정도만 하라고 고맙게 알려 주었다.
환전소에서 쪽지를 주며 쓰라고 하는데 도통 몰라 멍하니 있었더니 자기가 알아서 처리를 해준다. 그 돈을 받아서 넣고 모인 곳으로 가니 아직도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어 기다리고 있으니 가이드가 물을 사라고 했다. 편의점에 들러 물을 한 병 들고 계산대에서 대만 신타이달러 천 원짜리는 넣어두고 백 원짜리와 동전을 내밀었더니 동전만 가지고 간다.
대만에서의 계산은 1원이면 40원으로 계산을 했다. 그게 편하지 37원이니 하는 것 보다는 편했다.
처음 가는 곳. 예정에는 중정기념관으로 적혀있으나 오늘이 장개석 총통의 생일이라 문을 닫을 관계로 마지막 날에 일정과 바꾸어 충렬사부터 가보기로 했다. 충렬사는 위패를 모셔두고 봄가을에 한 차례씩 제사를 올리는 곳이라 했다.
하여간에 제사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위병 교대식 하나는 볼만한 거리가 되었다. 반짝이는 화이바에 대만사람들은 작은데 그중에서 최고로 키 큰 병사들을 뽑아 걸음걸이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움직이는 것이며 서있는 동안에는 마네킹이 된다는 것이다.
짓궂은 관광객이 가까이 다가가서 만지려 하니 총으로 쾅하고 바닥을 치는 바람에 혼비백산해서 도망가는 모습에 또 한 번의 에피소드를 장만하게 되었다.
위병 교대식은 매시간 정시에 이루어진다는데 한번 교대하는데 반시간이 거의 다 잡아먹어 교대하다 볼일 다본 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간곳이 고궁 박물관이다. 박물관 별로 탐탁지 않은 것이 캄보디아 박물관에는 토기밖에는 구경을 하지 못해 너무 지루했다. 그래서 나는 박물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별반 흥미를 갖지 못하고 들어갔다.
‘아니다.’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시된 유물들이 문외한의 눈길에도 예사롭지가 않다. 청동기, 자기, 옥기, 서화, 유물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진열되어 있다.
가이드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대는 비취배추는 별로 심드렁해보였지만, 하여간 전시품들이 입이 절로 벌어지게 만든다. 산호는 식물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의미심장한 소리에 귀기울이기전에 어쩌면 이토록 화려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둑발이 들어 어딘가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기내식으로 점심을 때우기는 애매했지만 몽골식 바비큐라는 저녁 식사는 내가 먹을 고기와 야채를 담아서 가면 커다란 원판의 철판에서 기다란 집게를 뒤적여 구워 주는데 먹어보니 이것 참 뚝배기보다 장맛이다.
잡채와 족발 다른 음식들도 꽤 푸짐해서 아내와 나는 몇 접시를 해치웠다. 후식으로 좋아하는 망고쥬스가 나와 이것 또한 일품이다. 나중에 타이루거 협곡에서 300원을 주고 두 잔을 먹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고 나는 배가 부른데도 두 잔을 더 마셨다.
아내도 열심히 들락거리며 잡채며 유명한 취 두부까지 갖다 놓고 환하게 웃으며 잘도 해치운다. 나는 호주에서의 일을 연상하며 아내에게 그만 먹으라고 넌지시 사인을 보냈지만 아내는 먹는데 푹 빠져 전혀 눈치를 긁지 못하는 듯하다.
하여간 실컷 먹었다. 가이드가 소화 시키러 가자고 하며 간곳이 101 전망대다. 현대인이 가는 곳마다 전망대는 빼놓지 않음이 사람은 자꾸만 높이 오르고 싶은 욕망을 달고 살기 때문이다. 가면서 101 빌딩에 대한 설명이 침이 마르도록 해대고 서툰 한국어 실력으로도 잘 소화해 낸다고 생각했다.
매표를 하고 줄을 서서 오르는데 엘리베터 순식간에 오른다. 91층을 단 10초 만에 올라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했다. 과연 쓩 하는 순간에 올라 보통 5층 정도의 속도에 어느새 91층에서 내렸다.
지진 많고 태풍 많은 대만 땅에서 어떻게 유지 하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풀러 89층에 거서 추라는 커다란 원판 같은 것을 봤다. 실지로 추가 흔들리는 사진을 보고 그 추 두 개가 양쪽에 되어있어 흔들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여간 기이한 현상임에는 틀림없다.
별로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여기서는 얼마를 찍었는지 모른다. 아내는 그저 싱글벙글이고 나는 그런 아내가 보기 좋아 또한 싱글벙글이다.
착 갈아않는 몸무게를 지탱하며 숙소로 가는 시간, 시내에서 뚝 떨어진 Suzhou plaza Hotel에 도착했다. 타이페이 시내를 벗어나 1시간가량 이동을 해야 했지만 새로 지은 집에 비교적 좋은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지만 하룻밤을 푹 잘 시간이 없었다. 이튿날 일정에 쫓겨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5시 모닝콜을 듣고 5시50분에 식사를 하고 6시 30분에 버스로 출발, 타이페이 역에서 7시30분 열차로 화련을 간다는 것이다. 화련을 가보지 않았으면 대만을 봤다고 말하지 말라. 누가 말했던가? 우리는 화련 행 열차를 탔다.
처음엔 그저 농촌마을의 전경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창밖으로 바닷물이 철석 대며 출렁인다. 태평양 이란다. 파도가 예사롭지 않았고 바닷물도 깨끗하게 보였다. 타이페이에서 화련까지는 2시간 30분이 소요 되지만 대만 관광이란 게 그 날 그 날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특히나 비가 많이 와서 언제 비가 올지 몰라 항상 우산은 필수로 챙겨 다녀야 한다고 했다. 흔히 말하길 논산을 외상구름이 없다고 친다면 여기는 구름이 끼지 않아도 멀건 하늘에 호랑이 장가가는 소나기가 온다는 것이다.
약 1시간 정도 갔을까? 창밖에는 엄청난 비방울이 차창에 부딪고 금방 물이 불어서 강물로 흐르는 광경을 보고 마음속 기도를 했다. 제발 무사히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터널을 몇 개 지나고 또 산을 지나고 바다를 스치고 3모작 한다는 농촌에는 벼가 익은 모습도 있지만 다시 심으려고 편편하게 물을 잡은 논들도 있다. 농로도 포장을 다했고 경지정리가 잘된 논 자락엔 물이 흥건히 고여 있다.
비속으로 달려 목적지 화련 역이 다가올 즈음 갑자기 환하게 해가 비쳤다. 열차 안에서 와 하는 함성이 동시에 터졌다. 화련역에 내리니 비 한 방울 없고 화창하게 맑았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여기는 원래 바람이 새기로 유명하단다.
역사를 나와 우리는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 일정 중에 네 번이나 들어있는 첫 쇼핑을 갔다. 옥공장이라는데 가서 우리는 옥의 신비를 보고 듣고 기이하게 깎아 논 예술품들을 봤다. 어쩌면 저게 인공으로 저렇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아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들 많이 사는데 나는 별로 흥미 못 느껴 아내 사진을 찍어주는데 주력했다.
부근에서 점심을 일찍 먹고 산을 가야 한다고 해서 별로 맛은 없어도 푸짐한 식사를 했다.
점심을 먹고 타이루거 협곡을 올랐다. 장춘사, 연자구, 그 외는 이름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감탄사만 연발하다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곳곳이 꽃 할배의 촬영으로 인해 명소가 된 곳을 갔고 한참을 차가 막혀 꼼짝을 하지 못했다.
꽃 할배에 나와 나pd가 엉거주춤 하던 모양새를 연상하며 출렁 다리를 차가 막히는 바람에 그곳을 가지 못한다고 했다. 7~8명만 건너야 된다는데 우리는 시간이 너무 걸려 자칫 열차를 놓치면 큰일이기에 그 코스를 취소하는 대신 벼랑과 바다가 만나는 곳을 구경하고 화련으로 돌아왔다.
오늘 본 것에 조금도 후회는 없다. 어디가도 이런 훌륭한 경관을 볼 수가 없으리라 생각하면 이만해도 본전은 다 뽑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의 끝 지점에 원주민이 하는 음식점이 있어 망고 쥬스를 300원을 주고 두 잔을 마셨다.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든다. 호텔에서는 아침 뷔페로 나와 공짜로 많이 마셨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열차를 타고 타이페이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지루하게 느껴졌다. 이미 어둠속에 가린 창밖의 풍경도 새롭지 않았다. 잠을 청해 봤지만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그냥 뒤척대고 있었다.
타이 페이 돌아와 후즐건해진 배를 채우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솜방망이 젖은 듯 고꾸라지자 금방 잠이 들었다.
3일차 아침이 밝았다. 느긋하게 6시에 일어나 호텔뷔페에 서 식사를 했다. 아침이라 고기류는 사양하고 주로 과일을 먹었다. 그 유명하다는 석가란 과일은 없고 대만에는 사철 유명한 과일이 파인애플 이란다. 파인애플, 수박, 구아바, 용과, 외에도 여러 가지 과일이 풍성해서 많이 먹었다. 망고는 철이 아니어서 없지만 제철에는 많이 먹는다고 했고, 망고라면 캄보디아에서 실컷 먹어본 경험이 있어 그리 애닯지 않았다. 주스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양명산 온천을 간다고 수영복 준비에 분주했다. 나는 수영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온천에서 실내 욕으로 하기로 했다. 양명산을 오르는데 비가 온다. 여기는 비가 안 오는 날이 기이한 날이라고 한다. 오죽하면 수도(水都)라 부른단다. 1년 365일 비 오는 날이 289일 이라면 무던하게 비가 온다고 해야 맞을 듯싶다.
온천물은 우유 빛깔이 아니라 잿빛으로 탕 안에 모래 같은 가루가 서벅서벅해도 몸에 좋은 것이라지만 나는 별반 내키지 않아서 금방 옷을 입고 나와 버렸다. 비는 오고 마냥 서글퍼 보여 다른 사람 나올 동안 시를 한편 만들고 있으나 사람들이 나와서 온천에 대한 반응이 별로 였다.
일단 점심을 먹고 다음 행선지가 야류 였다.
점심을 깍두기하나 유명하다는 집에서 먹는데 그 시간에도 비가 온다. 가이드가 우의를 준비하라고 해서 20원씩 주고들 사는 모양이다. 웬지 나는 비가 그칠 것 같아서 ‘우리 밥먹고 들어갈 시간에는 비가 안온다.’고 내가 하늘에 메시지를 날렸다고 농담을 했다.
점심을 먹고 해변으로 나오는데 해변의 파도가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비가 뚝 그쳤다. 정말 신기했다. 어쩜 이럴 수가 있는가 그것도 이틀씩이나 비가 피해 도망간 마치 기적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가이드는 왕 오빠가 주문을 외워서 비가 달아났다고 했다.
야류(野柳)는 바다의 침식 작용이 이뤄낸 하나의 작품으로 버섯 모양에서 부터 여왕의 뒷머리라 이름을 짓고 정말 신기하고 기이한 현상을 볼 수가 있어 좋았다. 우스꽝스런 표정인가 하면 슬픈 모양새로 다가오고 있다.
발이 무척 미끄러울 것 같았지만 전혀 그렇지를 아니하다. 사람이 많이 밟아 그런지 경사진 곳도 미끄럽지 않았고 아마 사진을 한곳에서 100장 이상 찍어본 경험이 전무후무할 것이다.
신이 만든 작품이랄까? 침식되어가는 바위들이 어쩌면 저렇게 모습들을 나타내는지 오직 감탄할 따름이다.
굳이 물속에 들어있는 코끼리의 코 형태를 썰물에 밀리는 순간에만 드러나는데 그걸 순간포착을 하기위해서 줄을 서 있고 우리 부부도 파도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찰칵 한 장을 얻을 수 있어 좋았다.
정말 떠나기 싫은데 우리는 장개석 부처가 살았다는 사림관저로 갔다. 우아한 열대림이 우리를 맞아주었고 장개석과 네 번째 여자라는 송미령의 직접 생활한 곳은 보지 않았고 그 주의만 돌다가 송미령의 차라는 캐딜락 한 대를 찍어왔다. 하얀 꽃이 핀 자작나무처럼 생긴 아름드리나무가 향긋한 내음을 은은하게 피운다. 입구에 나무속에 다른 나무가 자란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바쁜 일정을 몰아 저녁을 챙겨먹었다. 그렇게 나쁜 정도는 아닌 저녁을 든든하게 먹었다.
어둠이 확연히 내린 밤에 대만 최고 오래된 사찰, 296년이나 되었다는 용산사를 수박걷핧기 식으로 보고 옆에 있는 야시장을 갔다.
이곳에서 머리가 터져 죽는 줄 알았다. 무슨 냄새가 이리도 고약한지 견디기 힘들었고 특히 쥐 속에 땅콩이 든 것이며 생 비린내 왕창풍기는 생선이며 망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보라 했지만 역겨워 사지 못했다. 내가 산 것은 편의점에서 맥주 캔 하나가 전부였다. 한국 사람들 좋아 한다는 뱀 집이 두 집이나 있어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서둘러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와서 씻지도 않고 퍼져버렸다.
오늘 집에 간다니 또 마음이 설렌다. 아침 8시30분 버스로 출발한 곳이 중정기념관. 장개석의 출생에 관해서부터 역사를 만들기까지의 전시관이다. 7만 5천 평의 대지위에 세운 기념관은 대만사람들의 장개석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반갑게도 아는 얼굴이 김구 선생님과 박정희 대통령 얼굴이 전부였다. 대충문(大忠門)으로 들어가 기념관을 구경하고 대효문 (大孝門)으로 나와 대만의 공식적인 관광은 전부 마치고 마지막 쇼핑 점 잡화점에 들어가 우리는 별로 살 것이 없어서 망설이다 대만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돌아와 돌아오는 일정은 달리기의 연속이었다.
집에 들어오니 자정이 가까웠지만 즐거운 나의 집에 안착함이 편안했다. 비로소 안도감에 짐을 풀지 않은 채 푹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