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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열린시학회(열린시학사) 원문보기 글쓴이: 열린시학
■제2회 열린시학상 | 본심 심사평-
시조부문 본심
나무는 낙엽들을 버리기 시작할 때부터 이듬해 봄에 잎과 꽃을 피우기 위한 신진대사를 시작한다고 한다.
가을과 겨울의 교차점, “그러므로 어머니가 안 계신 달”이라는 어느 시인의 11월, 올해 우리 시조단이 거둔 결실을 설렘으로 만져본다.
제2회 열린시학상 시조부문 수상자를 가리기 위해 선자들은 예심에서 올라온 열네 분의 후보작품들을 윤독했다.
그 결과 <봄날 저녁> <중심에 닿는다는 것은> <속천항> <유곡란> <벌통생각> 등 다섯 편의 작품이 최종심에 올라왔는데, 이들의 시세계가 다양하다는 점이 앞으로의 시조단에 밝은 기약을 던져준다. 이러한 다양성은 한 때의 유행들을 단축시키고 시대정신을 이끄는 촉수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줄 것이다.
선자들은 수차례의 토론을 거쳐 서숙희의 <중심에 닿는다는 것은>을 제2회 열린시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서숙희 시인은 1989년 『현대시조』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래 최근 두 번째 시집 『손이 작은 그 여자』를 통해 서정성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식물적인 상상력과 생명성을 펼쳐보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편들은 활달한 언어의 구사와 삶에 투영되는 정서적 일체감, 그리고 정제되고 압축된 시세계로 깊은 공명(共鳴)을 자아낸다.
수상작 <중심에 닿는다는 것은>에서도 중심이라는 한 곳을 향해 질주하는 욕망의 세계를 표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얻은 상처는 “과녁에 뽑힌 화살”로, “제 몸에 깊숙이 꽂은” 삶의 뜨거운 몸부림으로 형상화된다. 이렇듯 서숙희 시인이 운명과 같은 도시적 삶의 영역에서 드러내고자 한 사유는 “운명이 입 속을 향해/ 자신을 쏘는 것”처럼 현실적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진지한 삶의 태도로 귀결된다. 더구나 그는 올해 또 다른 작품 <활>에서도 등 굽은 어머니를 ‘활’로 자신을 그 어머니가 쏘아올린 ‘화살’로 인식하고 있는데, “내 아득한 중심” 즉 “그대”라는 “먼 과녁”을 향한 여정에 정형미학의 진경이 펼쳐지기를 소망한다.
열린시학상 수상을 축하드리며, 대성을 빈다.
본심 심사위원: 이승은, 오승철(글), 이지엽
■제2회 열린시학상 | 예심 심사평-
시조부문 예심
2009년 가을호부터 2010년 여름호까지 열린시학회 회원을 중심으로 작품을 살펴보았다. 지난 1회보다는 많은 시인들을 선정하였는데, 우열을 가리기가 정말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해 동안 치열하게 고군분투해온 시인들의 피땀 어린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참신한 표현뿐만 아니라 세상을 읽는 새로운 방식에 주목하였다. ‘현대시조’라는 명칭에 걸맞게 작금의 시대 속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엿볼 수 있었으며, 개인 주관적 감정보다는 사회 참여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시의 윤리와 정치 사이를 오가는 작품들을 보며 앞으로 현대시조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작들 중에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작품의 완성도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
전학춘 「갈대들의 극락」 외 1편(≪시조시학≫ 2009 가을호)
강현수 「벌통생각」 외 1편(시조시학 2009 가을호)
홍준경 「순종」 외 4편(시조시학 2009 겨울호)
최오균 「유곡란」 외 4편(시조시학 2009 겨울호)
이상호 「메주를 쑤다가」 외 1편(시조시학 2010 봄호)
김신자 「아홉굿 마을1」 외 1편(시조시학 2010 여름호)
허열웅 「사라진 풍경」 외 1편(시조시학 2010 여름호)
강현수 「아버지의 가을」 외 1편(시조시학 2010 여름호)
황인원 「방부제가 된 몸」 외 1편(열린시학 2010 봄호)
서숙희 「중심에 닿는다는 것은」(시조21 2010 하반기호)
김세진 「봄날 저녁」(유심 2010 05/06호)
박두화 「딸에게」 외 1편(둥근 것들은 따뜻하다 열린시학회 동인지 1집)
손영희 「속천항」 외 1편(둥근 것들은 따뜻하다 열린시학회 동인지 1집)
양점숙 「달맞이꽃」(둥근 것들은 따뜻하다 열린시학회 동인지 1집)
임유행 「백제의 눈」 외 1편(둥근 것들은 따뜻하다 열린시학회 동인지 1집)
장기숙 「베인 풀냄새가 더 진하다」 외 1편(둥근 것들은 따뜻하다 열린시학회 동인지 1집)
시조 예심 심사위원: 박지현 시인(글), 김남규 시인
■제2회 열린시학상 | 시조부문 수상자 서숙희-수상소감
뜻밖의 수상소식을 듣게 되었다.
구룡포 바다가 늦가을 햇살에 천천히 몸을 뒤척이던 아침나절이었다. 갑자기 바다가 크게 한번 허리를 비트는 것 같았다.
상을 받다, 상, 상! 상?
상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컴퓨터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했다. 검색결과가 28개나 되었다. 그런데 내가 찾는 ‘상’은 한참을 내리 훑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무려 세 번째 화면을 클릭한, 25번째에 가서야 “「명사」 「1」 뛰어난 업적이나 잘한 행위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증서나 돈이나 값어치 있는 물건”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적이 놀랐다. 누구나 받기를 바라고 받는 것을 좋아하는 상, 주는 사람도 좋고 받는 사람도 좋은 ‘상’이 당연히 맨 앞에 나와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첫 화면에는 나와야 하지 않은가.
‘음식을 차려 내거나 걸터앉거나 책을 올려놓고 볼 수 있게 만든 가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 소반, 책상, 평상 따위가 있다.’ 와 ‘친족이 죽었을 때 그를 추도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활동을 자제하고 몸가짐을 삼가는 일’보다 뒤에 있었다. 심지어 ‘象자를 새긴 장기짝’보다 뒤에 있다니!
어쩌면 상이란 것은 밥상보다 책상보다 못한, 장기짝 하나 보다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을 받기를 원한다. 상을 받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물론 당연히 아니지만 나 또한 이러한 데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것이 밥상도 아니고 소반도 아니고 장기짝은 더더욱 아닌 ‘뛰어난 업적이나 잘한 행위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증서’임에랴!
오늘 받는 이 상, 열린시학상이 진정 ‘뛰어난 업적이나 잘한 행위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증서’임이 증명이 되도록 더욱 부지런히 정진하겠다.
귀한 상을 부족한 사람에게 안겨주신 심사위원님과 열린시학사에 감사드린다.
■제2회 열린시학상 | 시조부문 수상작
중심에 닿는다는 것은
과녁에 박힌 화살을 뽑으며 알았네
섬뜩하도록 탱탱한 손끝에 닿는 전율은
제 몸에 깊숙이 꽂은
뜨거운 비명임을
중심에 닿는다는 건
스스로를 관통하여
운명의 입속을 향해
자신을 쏘는 것
아, 그대
먼 과녁이여
내 아득한 중심이여
―≪시조 21≫ 2010년 하반기호
■제2회 열린시학상 | 시조부문 수상자 신작시조 - 서숙희
휴일, 新적석총 403호
박제된 한 시대의 접혀진 관절 같은
낡은 공간 속에 누운 질기고 긴 하루
고전과 원시쯤에서 시간이 멈추었다
적막은 제 몸에 천천히 좀을 슬고
온종일 도굴도 발굴도 없는 이 무덤
푸르게, 생각 하나가 곡옥처럼 울었다
손톱을 깎다
톱은 자르기 위해
날카로운 날을 가졌다
본능적으로 움켜쥐려는 속성을 지닌
두 손의 맨 끝에 박힌
손톱은 손의 날이다
끝끝내 놓지 않은
가파른 손아귀에서
필사적으로 반항하던
날것의 살점을
손톱은 능숙하고도 매끄럽게 숨기고 있다
며칠마다 어느새
손의 톱은 자라서
허기진 욕심의 벼랑을 또 할퀸다
따악 딱!
잘라버려라
딱딱하게 굳은 적의(敵意)
■제2회 열린시학상 | 시조부문 수상자 _ 자선 대표시 - 서숙희
손이 작은 그 여자 외 4편
조그만 쪽편지 오래오래 접은 손
그 편지 다 닳도록 차마 건네지 못한 손
가만히 호주머니 속에서 깃털처럼 파닥인 손
그 여자 손이 작아 그 사랑 잡지 못했네
그 여자 손이 작아 그 상처 다 못 가리네
그 여자 손이 너무 작아 그 눈물 다 못 닦네
밥에 대한 명상
뜨겁게 익은 밥을 먹으며 생각한다
밥은 왜 밥일까
하고많은 말들 중에
밥, 하고 말하고 나면
입이 꽉 다물어진다
그렇다, 밥은 삶의 시작이자 끝이므로
모든 밥에는 치열의 냄새가 나므로
어머니 뭉긋한 생이 찐득하게 베어 있으므로
어떤 군말도 수사도 필요 없을 만큼
위대하고 눈물겹고 무궁하고 지순하니
누구도 토달지 말라
한 그릇의 밥! 앞에서는
물소리를 듣다
때론 보이지 않을 때 열려오는 귀가 있다
달 없는 밤 냇가에 앉아 듣는 물소리는
세상의 옹이며 모서리를 둥근 율(律)로 풀어낸다
물과 돌이 빚어내는 저 무구함의 세계는
제 길 막는 돌에게 제 살 깎는 물에게
서로가 길 열어주려 몸 낮추는 소리다
누군가를 향해 세운 익명의 날刃이 있다면
냇가에 앉아 물소리에 귀를 맡길 일이다
무채색 순한 경전이 가슴에 돌아들 것이니
소금꽃
안으로만 감겨오는
한 올 인연의 끈
몸부림칠수록
매듭 붉게 맺혀오고
퍼렇게 일어서 오는
아름드리 파도살
천근 무거운 돌을 달아 이 마음을 앉힙니다
관절을 다 꺾고 꺾어 이 한 몸 뉘입니다
내 가진 마지막 하나 형장에 세웁니다
얼마나 더 앓으면 이 목숨 투명합니까
밤새 나를 때려 방파제에 묻습니다
동여맨 마음의 실밥 하얗게 터집니다
타는 그리움으로
만경창파 다 말린 후
마지막 그대 앞에
단단히 앉고야 말
죽어도 부서지지 않을
이 슬픔의 결정체
처서 무렵
풀벌레 울음소리 옥양목의 가위질 같다
차가운 별빛은 물에 씻어 박은 듯
잊고 산 세상일들이 오린 듯이 또렷하다
서숙희 시인 약력
1959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1989년 ≪현대시조 ≫신인상 당선. 1990년 ≪시조문학≫ 천료. 1992년 매일신문과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각각 당선. 시집 그대 아니라도 꽃은 피어 손이 작은 그 여자가 있음. 제11회 경상북도문학상 수상, 제 6회 한국시조작품상 수상. 현재, 포항시 공무원으로 포항시립도서관 근무.
■제2회 열린시학상 | 시조부문 수상자 서숙희-작품론
도시적 사유와 서정의 조화
― 서숙희 시집 『손이 작은 그 여자』(동학사)
박현덕
시인은 자기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일상을 통해 얻어지는 크고 작은 체험으로 시를 새롭게 펼쳐 보인다. 이 새로움의 텍스트 안에는 기존의 인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하려는 의식과 함께 일상에서 겪는 내면적, 외면적 상처를 극복하여 시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몸부림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을 잘 보여주는 서숙희의 시집 『손이 작은 그 여자』(동학사)는 다양한 삶의 양태 속에 나를 이입시키거나 병치, 환유시킴으로써 실존의 문제들을 제기한다. 시적 주체자의 거대한 시나무에는 도시적 상상력과 삶의 성찰로 올곧게 뻗어 나간 가지들에 열린 탐스런 열매들이 견고한 사유의 무게로 주렁주렁 매달렸다.
근대 이후 과학의 발달로 인간은 편리함만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 디지털 환경과 사이버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 자본이 성장하고 소멸하는 무대인 도시에서 생활하는 시인은 기존의 문명비판적인 시에서 벗어나 감성의 밀도를 높임으로써 도시 속에서의 사유와 서정을 조화롭게 그려낸다. 이러한 시인의 시 흐름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도시적 감성을 바탕으로 존재의 자각을 일깨우는 것, 그리고 삶의 깊은 곳으로 천착한 시선이 빚어내는 자아성찰인데, 이 두 가지 흐름은 자연세계와 연결되어 은자나 고행자의 세계관을 함축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하늘 한끝 걸터앉은 옥탑방 앞에 걸린
외줄기 빨랫줄에 바지가 펄럭인다
한사코 바람을 미는 김 씨의 두 다리
쉰 나이 다 되도록 쉼없이 달리고 달린
바지에 밴 관성은 아직도 탄탄하여
제 힘껏 하늘을 당겨 스스로 길이 된다
오늘도 달려간 만큼 또 멀어질지라도
희망이라는 허공, 허공이라는 희망을 향해
소리쳐 달려 나가는 저 눈물겨운 바지 하나
― 「김 씨의 바지는 달린다」 전문
옥탑방은 건물 옥상의 간이주거시설을 뜻하지만, 다른 주거시설보다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반면, 지대가 높고 햇볕 등 외부환경에 노출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옥탑방은 문학의 여러 장르에서 소외와 빈곤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에서도 도시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이 기거하는 옥탑방은 ‘빈곤’을 상징하며, 극빈층이 겪는 현실적 아픔을 그려낸다. 허나 작품「김 씨의 바지는 달린다」를 통해 서숙희 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빈곤과 소외를 벗어나려는 의지력이다. “희망이라는 허공, 허공이라는 희망”같은 역설적 인식은 카이저가 말하는 파격구문(anakoluth) 같은 것으로, 문장 한 가운데서 사고가 다른 방향을 취함으로써 표현의 생기를 넣어주는 수단이 되고 있다.
옥탑방 빨래줄에 “바지가 펄럭이는” 것을 김씨의 두 다리로 의인화하여 “제 힘껏 하늘을 당겨 스스로 길이 된다”고 했다. 이처럼 시인은 자본의 그늘 아래 옥탑방에서 살아가는 한 사내가 현실에 항거하며 일어서려는 내면의 절규를 빨랫줄의 바지로 노래하였다. 결국 바지는 외줄의 빨래줄 이미지와 중첩되어 “소리쳐 달려 나가는 저 눈물겨운” 중년의 사내로 대변되는 것이다. 이 시의 미학은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김씨의 삶을 “쉰 나이 다 되도록 쉼 없이 달리고 달린”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절망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형상화시킨다.
이처럼 도시적 사유를 보인 작품들로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때로 뜨거웠을” (「냉장고」), “예민한 사냥개의 코로 은밀하게 조여 온다” (「안개」), “한 사람이 떠난 집은 사각의 부재다” (「사각의 부재」), “쓸쓸한 사투의 흔적 혹은 생의 통점 같은” (「그곳에 바람이 산다」) 등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해체와 모순, 속도가 공존하는 도시의 일그러짐 속에서 나를 발견해 나가고 있다.
빈집,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혼자 적막을 흩는 뼈만 남은 시계추
아득히 물러난 가구들이 낡은 유물 같은 하루
천천히 열려오는 가지런한 마음귀에
화분 속 하얀 뿌리가 성성하게 자라는 소리
모처럼 살아 있음이 참 가볍다는, 이 느낌
― 「휴일」 전문
수직으로 밤을 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
땡, 하고 멈춘 자리에 부려진 어느 가장의 야근을 끝낸 두 어깨가
하얗게 바래는,
― 「자정에서 새벽 한 시 사이」 전문
「휴일」과 「자정에서 새벽 한 시 사이」에서도 도시가 지닌 이중성을 시인은 들춰 보인다. 모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아파트’에서 휴일을 맞이한 시인은 늘 그랬지만, 이 집이 꼭 빈집 같다고 토로한다. 온종일 적막을 곱씹으면서 “뼈만 남은 시계추”와 “아득히 물러난 가구들”을 보며 외관 없는 삶 속에서 본질이 읽혀진다는 역설적인 상상을 한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시인은 어느덧 마음귀가 열리고 사소한 소리까지 읽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면에서는 서정의 밀도가 적막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적막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며 시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개체들과 하나가 된다. 그래서 “살아 있음이 참 가볍다”고 역설한다. 도시적 상상력으로 빈집과 하루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자정에서 새벽 한 시 사이」는 수직 상승을 꿈꾸는 가장의 쓸쓸한 어깨를 얘기한다. 하루의 휴식기인 밤을 훨씬 넘긴 새벽, 그것도 다시 하루를 여는 한 시에 “수직으로 밤을 밀고” 올라오는 어느 가장을 만난다. 불현듯 야근을 끝낸 그 어깨가 “하얗게 바래는” 모습을 본다. 축 처진 가장에게는 ‘집’이 그저 잠시 머무는 거처일 수도 있다.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은 하얗게 밤을 지새웠던 모양이다. 시인은 가장의 이런 모습에 절망적 탄식을 나타낸다. 자정과 새벽 한 시 사이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도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가장의 모습을 통해 어둔 새벽을 울리는 시인의 조용한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서숙희의 작품들에서 도시적 사유가 두드러지는 이유도 이런 이유일 것 같다. 하지만 도시적 사유 자체가 작품에 일관성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속에서 자연과 교감을 하며 서정의 세계로 빛을 발하는 경우도 있다.
때론 보이지 않을 때 열려오는 귀가 있다
달 없는 밤 냇가에 앉아 듣는 물소리는
세상의 옹이며 모서리를 둥근 율律로 풀어낸다
물과 돌이 빚어내는 저 무구함의 세계는
제 길 막는 돌에게 제 살 깎는 물에게
서로가 길 열어 주려 몸 낮추는 소리다
누군가를 향해 세운 익명의 날이 있다면
냇가에 앉아 물소리에 귀를 맡길 일이다
무채색 순한 경전이 가슴에 돌아들 것이니
― 「물소리를 듣다」 전문
「물소리를 듣다」외 여러 편의 작품들에서 서숙희 시인은 자연에 대한 깨달음으로 원형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도시라는 고통스런 삶의 환경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적 사물을 통해 안식을 갖고자 하는 내면이 읽혀진다. 자연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이루어내는 시적 전개는 서정성이 밑바탕에 깔려있는데, 이러한 서정성은 도시적 사유의 시들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즉 서로 상반된 듯한 이미지들이 연결고리를 형성해가면서 시의 진폭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삶의 성찰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시에서도 그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는 작품「물소리를 듣다」처럼 소리의 이미지를 다룬 시들이 많다. “자르르 물기가 돋아 밑둥은 불긋불긋 어깨는 들썩들썩”(「늙은 사과나무의 회춘」), “꽃씨들 까만 약속이 저 혼자 여무는 소리”(「다시 구월에」), “화분 속 하얀 뿌리가 성성하게 자라는 소리”(「휴일」), “사각사각 나뭇결이/ 밤 저쪽으로 밀려나는 소리”(「다시 연필을 깎으며」)에서 시인은 소리의 이미지로 ‘율’에 긴장과 이완의 가미시킴으로써 울림이 있는 시조로 거듭 변모시키고 있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소멸의 세계인 ‘밤’을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마음의 문을 열고 한밤중 “냇가에 앉아” 물소리를 가슴에 새겨듣는다. 마치 고통 위에 적막이 층층으로 겹쳐지며 덧난 상처들을 풀어내는 것 같다. 이 상처들은 “물과 돌이 빚어내는 저 무구함의 세계”처럼 서로에게 길을 열어주는 융합의 시학으로 다가온다. 결국 “누군가를 향해 세운 익명의 날이 있다면” 시인은 물과 돌이 빚어낸 경전을 떠올린다. 삶의 굴곡을 거치면서 이루어낸 비움, 정갈한 물소리의 경전을 독자에게 펼쳐 보이는 것이다.
밤사이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을까
소나무 가지 하나 찢어지듯 부러졌다
아직 채 식지도 않은 생살 붉고도 희다
죽비로 쏟아지는 칼끝 같은 눈을 맞으며
저 소나무, 꼿꼿이 선 채로 구도에 들어
새도록 허공 끝까지 자신을 몰아 세웠으리
눈 속에서 제 팔을 잘라 도를 구한 혜가처럼
새벽녘 팔 하나를 바치고서야 마침내 이룬
고요한 장엄화엄 한 폭, 저 소나무의 열반적정
― 「소나무, 구도에 들다」 전문
작품「소나무, 구도에 들다」의 부제는 ‘폭설’이다. 짧은 시간에 많이 내린 눈, 고립과 혼란, 순백으로 이어지는 폭설의 이미지를 시인은 은자의 시학, 선비의 곧은 심상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사이에 휴지부를 설정해 긴장을 조절하고 ‘소나무’를 차용해 고고한 선비의 정신세계를 담아낸다. 마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는 듯 이 시는 선비의 꼿꼿한 절개를 그려내고 있으며 폭설로 상징되는 현실적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단단한 의지가 읽혀진다.
시인은 눈 내린 날 소나무를 보며, 존재의 근원을 생각한다. 겨울날 살을 파고든 눈바람에 사투를 벌이는 소나무가 “가지 하나 찢어지듯” 생살을 드러내 놓았다. 눈이 줄기차게 퍼붓는 풍경을 “죽비로 쏟아지는” 칼끝처럼 날카로운 말씀으로 치환하였다. 그리하여 하늘 무서운지도 모르고 소나무가 구도에 들었다고 말한다.
「소나무, 구도에 들다」는 상상력의 확장과 시적 인식의 전환은 탁월하다. 왜냐하면 첫째 수의 소나무 부러진 가지를, 셋째 수에서 혜가가 “눈 속에서 제 팔을 잘라 도를 구한” 정신으로 재정립했기 때문이다. 시의 전개부에서 보인 소나무가 혜가의 이미지로 이어져 남성적이고 강인한 어조로 은자의 시학을 노래하고 있다. 더구나 자연현상을 인간과 연관지어 생의 원숙한 아름다움, 성찰로 연결하고 있다는 점은 작자의 빼어난 시적 인식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세계를 담은 시로는 “천천히 다시 돌 하나로 / 돌아가시는 중이다” (「남산골 돌부처님」), “어떤 군말도 수사도 필요 없을 만큼” (「밥에 대한 명상」), “존재에서 소멸로 가는 아름다운 경계다” (「그, 곰팡이」), “쉽게 쓴 내 결핍의 시가 오늘은 부끄럽다” (「고등어를 굽다」)등이 있다. 이 시들이 단순한 감정표현이 아닌, 삶에 대한 깊은 성찰로 결부된다는 점은 서숙희의 시가 갖는 하나의 매력이다.
서숙희 시인의 시집 『손이 작은 그 여자』(동학사)는 도시적 깊은 사유 속에서 삶의 성찰로 이어지는 은자의 정신을 담고 있다. 시인이 추구하는 정형미학의 시세계가 형식의 자유로움 속에 따뜻하게 세상의 상처받은 영혼들을 어루만진다. 좋은 시인은 어두운 밤 가로등이 켜진 길처럼 개인적 사회적 상처를 반성하고 분석해 내며 그것을 감싸 안고 어루만지는 사람이다. 추상이나 감정의 과잉에 빠지지 않고 독자를 시인의 밑그림 속으로 차분하게 안내하는 서숙희 시인의 서정의 ‘율’이 더욱더 무르익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
* 이 평론은 ≪다층≫(2010년 가을호)에 수록된 평론을 재수록함.
1967년 전남 완도 출생. 1987년 ≪시조문학≫ 천료 1988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 중앙시조대상, 한국시조 작품상, 시조시학상 등 수상. 시집 스쿠터 언니 외 다수. 현재, 광주대학교 출강. ‘역류’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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