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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미명, 채 밝지 않은 사위는 고요 속의 고요다. 고요를 깨워내는 아침은 하루를 위해 준비하는 자연의 순응이다. 자연에 비해 인생이란 시간은 짧다. 그 짧다는 생각에 앞서 세 번째 시집을 상재했다. 응어리진 그 무엇인가 풀어 내고자 했지만 마음은 개운하지 않다. 그 빠져나간자리에 또 무언가가 차고 들어온 것 같다.
숲속을 들어간 적이 있었다. 걸음 옮길 때마다 삭정이와 낙엽이 바스라지는 소리, 자연이 들려주는 숲의 소리, 지금에야 깨닫는다. 숲속에 들어서면 시작과 끝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 숲을 이룬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 무한한 사유들로 그려내는 창작도 시작과 끝은 없다.생각만으로 쏟아내었던 문장이 여백을 채우고 구슬 꿰듯 줄줄이 자리한 단어들이 고스란히 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숲속을 걷다 느낀 질책의 힘, 자만감을 자책하면서 여백에 밀려난 시와의 침묵. 꺼져가는 불꽃을 살리려 하는 간절한 주술, 주문한다. 나의 시들아 용서하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한다.
그 힘으로 시를 쓴다. 다시 펜을 든다.
계사년 시월, 어느 볕 좋은 날
정석교
차례- 딸 셋 애인 넷
시인의 말⋅10
발문 | 박문구⋅110
딸 셋 애인 넷의 시인
제1부 딸 셋 애인 넷
신사년 12월⋅18
초경⋅19
초경, 이후⋅20
초경, 그 이후⋅21
에필렙시⋅22
딸 셋 애인 넷⋅23
설거지⋅24
스팀다리미⋅25
침묵의 말⋅26
사랑 한限⋅27
고백⋅28
외가별곡⋅29
아버지의 아침⋅30
자줏빛 구두 한 짝⋅31
엄마의 행복⋅32
나를 부르시는 소리⋅33
제2부 월계이발관
36⋅입춘에 만나는 장터
38⋅입동
39⋅춘설
40⋅봄내 공지천에서
41⋅청평호수
42⋅유월 왜가리
43⋅나비
44⋅가을
45⋅다산초당
46⋅청령포
47⋅춘포역
48⋅소머리 국밥집
49⋅월계이발관
52⋅성하
53⋅딱쇠 손씨
54⋅빵의 얼굴
제3부 집으로 가는 길
나의 옛집 앞 돌우물⋅56
시계, 뻐꾹새⋅57
골목길⋅58
자화상⋅59
집을 짓는 방식⋅60
이사⋅61
노숙⋅62
대추나무 시집보내는 날⋅63
북촌, 열려있는 대문⋅64
집으로 가는 길⋅66
마지막 버스⋅67
민달팽이⋅68
매미⋅69
퇴근길 달을 안고⋅70
성내집, 그곳에는⋅71
제4부 건조주의보
74⋅건조주의보
75⋅양은 냄비
76⋅서설
77⋅하품
78⋅나이테
79⋅여름바람
80⋅맑은 눈
81⋅내가 살아 있음을 느낄 때
82⋅방뇨
83⋅기울기 23.5°
84⋅세치 혓바닥
85⋅흐르지 않는 강
86⋅착각은 각이 없다는데
87⋅노점거리
88⋅내안에 내가 그립다
89⋅겨울광야에서
제5부 사람의 섬
혀의 깊이⋅92
취중⋅93
막걸리⋅94
낙조⋅95
소의 눈⋅96
하이 힐⋅97
노래팡 도우미⋅98
핸드백⋅99
간이역⋅100
사람의 섬⋅101
여자의 마음⋅102
복들임 날⋅103
노을, 황홀함에 대한 예우⋅104
신호등⋅105
세월이⋅106
♂&♀⋅107
제1부 딸 셋 애인 넷
신사년 12월
품안에서 어리광만 부리다
미운 나이 키워 가는 막내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 입학시키려
주민등록등본 한 통을 발급받았다
해맑은 동심 채 가시지 않은
막내 어리광 표정 뒤로
저무는 한 해 나이를 키워간다
겨울 지나는 나무 가지
움트기를 고대해 보던 기다림으로
막내둥이 유치원 입학원서 쓰던 날
조용한 하늘 반쯤 잠긴 낮달
떨어져 나간 가슴 한켠 실려온다
마흔 넘어 부푼 나이테 풀어보는
신사년 12월, 바람 불던 날
초경
아빠는 몰랐었다
몸이 아픈지 그리고 짜증이 났는지
아빠로서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다는 것
모르는 남자였다는,
엄마가 알려주지 않은 것
그래서 공유하지는 못한 것
아빠는 다르다는 이유일 뿐
축하의 메시지를 전해주어도
달갑게 받지 않은 모습
행복한 웃음으로
문을 잠근 딸에게 사랑을 전한다
방안 가득 무지개가 피었구나
초경, 이후
아내는 아내대로 아이를 제 몸처럼
마음도 정갈히
눈길도 다정스레
말도 상냥하게 찰떡 호흡 같은
마음도 다가갈 수 없는
눈길도 전할 수 없는
말도 함부로 건넬 수 없는
슬퍼지고 멀어져도 잴 수 없는 거리
나는 아버지였습니다
초경, 그 이후
꿈도 많아
봉긋 솟은
막내 녀석
아니 숙녀
슬슬 꼬여
달래 봐도
나는 따알
아빤 변태
그럼 엄만
엄만 친구
에필렙시*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기진한 아이 체온 허하게 전해온다. 무거운 세상 안고 살아가야 하는 두려움보다 먼저 눈물이 앞선다. 병상 앞에서 울컥 미어지는 범람하는 해일처럼 아득한 마음 여린 얼굴을 들여다 본다. 차마 눈 떼지 못하고 입술만 지그시 깨물은 채 하얀 시트 눈시울 삼킬 뿐이다
오염된 척수를 늘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 하얀 시트 들추다 마주친 얼굴, 아버지로서 지켜주지 못한 사랑 알았다는 듯 입가에 미소가 핀다. 가슴에 담는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링거액 혈관 깊숙이 아픔을 세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 이겨내야 할 세상 귓바퀴 맴도는 아이의 청명한 웃음소리 또 언제 병상에 누워 단절된 어지럼증을 느껴야 하는지 병실 밖 스산한 들녘 풍경 추스른 옷깃 사이 마음 시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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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lepsy, 뇌전증
딸 셋 애인 넷
나의 집에는
딸, 공주 그리고 애인이 함께
한 이불 덮고 산다
투정 반 응석 반 커가는
그녀들의 모습
제 엄마보다 요란스레 심한 잔소리
딸인지 애인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곧잘 삐친 헛 속임에도
번번이 들킨 사랑의 마음
파랗고 노랗고 빠알간 꽃 같은
딸 셋 애인 넷이나 두고 있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 남자다
일상의 틀 깨알 같은 나날
퍼즐조각 매일매일 새로 맞추며
분주한 기쁨 풀며 깁고 사는
딸 셋 애인 넷, 나의 집
빈 곳도 허한 곳도 없는
딸 셋 애인 넷이 펼치는 질투
나의 집은 늘 햇살이다
설거지
할까, 말까
하는 망설임 끝에
누워 있는 아내 모습을 보니
하루 피곤이 포개져있다
소매 걷고
개수대 안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찬물 흐르는 손끝 냉기가 웅숭그리는데
거품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아내는 무슨 생각 하였을까
마음보다 시린 것 또 있을까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융기하는 거품 속에 담겨있다
아내는, 참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뱉고 싶은 말들도 많았을 것이다
오늘 그 말들,
쏟아지는 물줄기
헹구어지는 깨끗한 그릇처럼
아내의 마음 늘 햇살이었으면 했다
스팀다리미
하오,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
스팀다리미 북북 끓어오르는 소리
바지 밑단 감침질 하는
아내의 속마음
‘마음 씀씀이 주인 빼 닮는다’ 혼잣소리
바짓단 솟은 돌기처럼
자못 날이 선다
바지 주름 다리다 만 아내는
시간째 연락두절인 에어컨 서비스 기사
죄송하다는 입바른 친절에 눌려
스스로 냉매가 된다
북북 끓어오르는 열기
약 오른 타박만 애꿎게 바짓단 위에
여름 소나기 지나가듯 쏟아놓는다
끓어 넘치는 스팀다리미
아내 마음처럼,
거리는 찜통이다
냉매 떨어진 에어컨이 장승처럼 서있다
침묵의 말
참으로 이해 못할 말들
그 말을 가슴에서 털어내고
넉넉하게 웃고 살자며 속마음 건넸지
내내 마주보고 지낸
끝 모를 겉마음
수줍어 전해주지 못한 말
수십 년 뇌이다 마음으로 간직한
‘사랑해’ 라는
침묵의 말
사랑 한限
‘사랑한다’는 말
오랜 당신에게 전하고 싶었지
잊지 않고 기억해 놓은 말
빛을 등지고 펴놓은 시간
고백하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것 모르고 살았듯
숨은 속내 전해주고 싶은
부끄러운 심정 거두어 가소서
저기 저 휘황차게
밑도 끝도 없이 붉디붉게 지져 오는
사랑 한限
하루 내내 지새운 빛
고요처럼 울어 제친다
타들어가며 마지막 휘젓는
고백의 빛
사랑 한限
시간
그대 오소서 눈부신 이 저녁
고백
샐빛 펴지는 창가 예전보다 수척해진 얼굴 훔치며
오래오래 새겨둔 몇 음절 말들
행여 누가 될까 입 안 맴도는 기억 더듬어
정갈한 기도 올립니다
물기 마를 날 없이 분주한 앞치마
한 두 끼 마주한 식탁 앞에서
가득한 정성도 미덥지 못했던 투정
살가운 정으로 받아낸 인내 미처 깨달지 못한
사랑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앞만 보고 달려야 했던 젊은 날
슬픔 지우고 마주한 기쁜 기억 안고
잠이든 당신 얼굴을 보면서, 나는
잡초 무성한 뜨락 일구어 꽃을 키우는
정원사의 마음으로 지켜가겠습니다
변치 않는다는 약속 처음부터 맺어진 것
형식의 기우보다 지켜주고 싶은 맹서
등 기댈 수 있는 가슴에 늘 자리한 사랑 한그루
당신의 안식처가 되겠습니다
외가별곡
어머니가 미우면 외가에 간다 밉살스런 일곱 살, 어머니가 나를 보낸다. 홍씨 문중 청상과수, 외가엔 어머니보다 더 고운 곱절 나이 드신 곰살가운 외할머니가 계신다. 타박타박 나절 지나 고갯마루 올라서면 산울타리 사이 피어오르는 연기 할머니 댁 청솔가지 지피는 냄새 분주한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 일곱 살 마음 달뜨게 한다
외가는 내가 왕이다. 투정부릴 것도 없는 밉살스런 일곱 살 응석 토닥이듯 이골저골 이어지는 메아리 되어 들려오는 유년의 나는, 부엉새 깊게 우는 밤 관솔불 아래 풀어놓은 할머니 이야기 가물거리는 눈망울을 기억한다. 애면글면 여생 지펴간 고단한 할머니의 음성은 청솔가지 태우는 매운 세월이었다
근산 나무 사이사이 봄이 오는가 보다
햇살 담아내는 푸른 솔비가 아름답다
산행 길 스치는 솔향기 온몸으로 퍼지고
송화 가루 빙빙 도는 옹달샘 그리운 유년
외가에 숨은 나의 숨바꼭질,
아직 다 못 찾은 밉살스런 일곱 살
아버지의 아침
밤이 걷힌 아버지의 아침은
새벽 강물 굽어 도는 긴 여울소리
빛을 물어오는 해오라기 날개 짓
텅 텅 텅 경운기 엔진소리
아우르며 함께 깨어납니다
등 굽은 아버지 세월 담겨져 있는
이슬 젖은 사랫길
튀어 오르는 요란한 울음은
아버지 발걸음으로 입이 열립니다
목숨과 같이한 몇 마지기 다랑논
물꼬를 여는 손길 따라
들녘 곳곳 푸른 춤을 춥니다
굽은 허리 한번 반듯 못 펴신
아버지의 지난 밤
아침 햇살은 부시게 펴고 있습니다
자줏빛 구두 한 짝
신발장을 정리하다
비워둔 기억 끝에서 찾은
자줏빛 구두 한 짝
버릴 수 없는 어머니 마음이
어떤 희망으로 버텼을까
중환자실 호흡기에 의존한 채
끼니때마다 호스 타고 내려가는 곡기
부레 같은 어머니 몸
마른 잎처럼 말라가는 발바닥
자줏빛 외짝 구두 생각나시는지
신발장 한켠 모셔둔
굽 낮은 구두 한 짝
견주어 보아도 유행에 뒤쳐진
구두 밑창에서 세월의 걸음
얼마만큼 지웠을까
한 뼘 남짓 발끝에서
평생 걸어 오신 그 먼 길
찾아 드리지 못한 구두 한 짝
의료원 중환자실 문 앞에 서서
구두 속 내 발가락만 비벼댄다
엄마의 행복
따슨 밥, 기다림으로
물기 묻은 손길 가득 내어 둔
아랫목 밥 한 공기
아침은 꽃잎에 이슬 맺힌 듯
아니 진 듯
나절은 햇빛에 묻어둔 듯
아니 가슴에 담은 듯
잦은 손끝 여미어
모두어 온 그 시간
아랫목 밥 한 공기
종일 기다렸던 마음 아는지
하루 해 저물어 버렸네
나를 부르시는 소리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 목소리 듣고 싶네
이슥한 저녁 집집 굴뚝마다 얼릉얼릉 오라
피어오르는 연기가 손짓하는데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 목소리 없으시네
방구들 덥히고 언 손 녹여주시던
어머니 목소리
지천명 넘어서 야단치시는 그 목소리 듣고 싶네
감자꽃 서로 비벼 피던 밭고랑 저 멀리
기억이라는 세월 흔적없이 흘러 보내고
그렇게 불러내시던 미운 일곱 살 보다
나 오늘 더 미웠던 모습
살아생전 등골 휘어서도 다독이시던
어머니 손길
백년을 살고 천년을 그리워해도
하루 편히 눕힌 적 없는 육신
모든 새벽 깨우며 살아오셨구나
감자꽃 흐드러진 아침에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 목소리 듣고 싶네
제2부 월계이발관
입춘에 만나는 장터
묻어온 들바람 채근질 하는 좌판 곳곳
무리 진, 달래 냉이가 쑥덕거립니다
안 사돈 만난 반가움에 앞서
겨우내 담아 두었던 안부 전하고 나면
팔 것도 없는 무명 보자기 안으로
부끄러운 봄햇살이 담뿍 차지합니다
두터운 외투 속을 비집던 입춘 앞에
꽃무늬 수놓은 원피스 한벌
달뜬 맵시 피워보지만
시린 손길은 샛바람에 걸려
단추 한코 풀지도 못하고 접혀지는
섭섭하게 짧은 하루
씨앗 몇 홉, 고등어 한손, 고무신 한 켤레
봄빛과 맞바꾼 무명 보자기 안으로
옷소매 잡아채는 국밥집 온기
목젖 울리는 막걸리 몇 잔 푸념 섞어서
토끼몰이 하듯 골목 장터 내달리면
저녁노을 익어가는 농가월령가
가로등 아래 좌판마다 비워지는 하루
질펀한 타령가락 촌로 발걸음 채여
개밥바라기 반겨 맞는 고샅길 마루
움트는 줄기에서 해빙의 기록 써 내려갑니다
장돌뱅이 풀어 놓은 젖은 언어들이
장터 곳곳 봄빛을 예약하고 있습니다
입동
청춘을 보낸 발길 돌아서니
마음 울리게 하는 성당 종소리
며칠 새 나무는 홀연히 짐을 풀고
빈 가지마다 입동을 걸어 놓았다
내 안에 숨어있어 찾지 못한
내 젊은 날 못다한 푸른 연정
그 뒤안길에 맞는 아름다운 이별로
눈물 날 것만 같은 시린 저녁답
찬란한 슬픈 빛 찾아온 하늘은
차라리 고이 접어 비운 꽃 대궁 위에
붉디붉은 노을 걸쳐 놓았다
춘설
땅을 열어 들여놓은 남풍
시샘하듯
동백 봉오리 덮어놓은
질투
시린 독백, 봄눈
세상을 무지로 덮어 놓았다
봄내 공지천에서
온 일상의 버거움 털고 자리한 이곳
잠시 그림을 그리고 있네
밤새 술잔 기울이던 모습
사는 맛이 제대로 묻어나고
한 잔 술 앙금 훌훌 털어내다
두 잔 술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
해묵은 감정일랑 새벽바람 타고
공지천 수면 위 스며들고 없네
마음 정하여 둔 곳 없어도
물길 이으며 흐르는 공지천의 정담
미더운 정 마주한 탁자 사이
언제까지나 웃어 보이던 미소
가슴에 오래 남아 있기를 빌었네
갖은 골짜기 모여든 공지천 물길처럼
재회 기쁨으로 마주한 술잔
전해지던 따스한 온기 남아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행복하였었네
청평호수
네가 누웠더니 온 세상이 순결하였다
지천을 감싸 안은 호반
부서져 내리는 냉기의 분신으로 하여
이방인의 가슴을 열리게 하고
하늘 땅 호수가 하나가 되었다
빈 몸으로 떠나려는 겨울의 중심
정박해 시간을 풀 수 없었던
모터 보트 빈 자리는
허무를 달래려 눈발이 채우고 있었다
내가 누웠더니 온 세상이 풍요로웠다
불현듯 동심 속을 걷고 있는 나
잠시 잊혀졌던 진한 고독감에
지척을 알 수 없던 불안감 지워버리고
가슴 적셔 다가온 사랑
건네지 못한 속마음 한켠
눈사람만큼이나 커져 버린 조급증
청평호수 고요한 밤을 던져 버리고
산굽이 도는 기적소리 쫓고 말았다
눈을 감았더니 하얀 눈밭이 당신의 마음이었다
유월 왜가리
깊고 고요하다, 가둔 지池
내내 꺾일 줄 모르는 부동의 적막,
하얀 정물
산허리 찌른 구름 조각조각
태양의 날개가 된다
더 참을 수 없는 날선 허기
허공으로 팽팽한 고요가 깊다
햇빛 숨을 곳도 없는 저격 당한
유월 하오,
홀로선 왜가리
성큼 더 길어진 외다리
깊고 고요하다
나비
꽃과 빛이 서로 입 맞추고 나니
햇살에 전사한 4월 꽃샘
날개의 화려한 부활이다
햇살을 헤쳐가며 반추하는
꽃과의 오랜 밀어
아지랑이 조곤조곤 실어나르는 내내
가슴이 철렁거렸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서서히 다가오는
긴 행렬
화단에 방화된 것들
잊어버렸던 언어들이 한 음절씩 돋아나고
눈부시게 잠을 깨운다
출렁거린 봄의 무게
조용히 닫힌 가슴이 열리고
이 훈훈한 봄날 절실한 해후
어딘가 열심히 날고 있을 나의 날개
가을
소리들이 사방으로 넘쳐납니다
아무도 소리의 출처 알려고 하지 않지만
제각각 화음으로 맺은 사위는
분명 행복함에 몸둘 바 모르는
열락의 들뜬 시간들입니다
조용히 경청의 미덕보다 차라리
입을 열고 마음을 전하고픈
아, 숨소리조차 거들고 싶은
가을입니다
끊겼다 이어지는 사이사이
깊고 낮게 이어가는 소리
가을입니다
아, 활기찬 생명이 출렁거립니다
모든 소리 담아내는
미동도 않는 달빛
빛 아래 남겨놓은 그 향연은
시월 나뭇잎에 색감 들이는 소리입니다
다산초당
만덕산 이고 진 하늘 아래 귤동마을
솔바람 고이는 초당연지 누累가될까
말없이 봉우리마다 감아 도는 산안개
동백꽃잎 시름마저 잊고 내려선 뜰
굽어보는 정자 아래 홀로선 백로야
무심한 빗줄기 속에 구강포만 동무구나
우려낸 차 한 잔 환영으로 뵈는 님아
오고가는 돌계단 끝자락 홀로 서서
동암 서암 마주하는 정 어찌 잊을손가
청령포
서강 휘감아 도는 눈물 시린
땅 안의 땅
시름 잠긴 강줄기마저 몸져누운
수수백년
검푸른 강물 안고 돌아서는
단애
벗어날 수 없어 가슴에서 마른
눈물이여
모진 세월 속 관음송 이리 어찌
청청하랴
푸르고 푸른 저 변절없는 지순한
일편단심
노산대 기둥마다 불타듯 타오르는
저 노을
날아오르는 해오라기라면 실어내었을
푸른 자유여
춘포역*
굽어진 저 철로 끝자락으로
휘어진 마음 내내 지정거리며 머물다
춘포역에 들어서니
함초롬 핀 풀꽃의 환한 얼굴
홀로되었던 적막한 인연을 다시 잇는다
어디서 시작하여 어느 곳 이어진 철로
무궁화호 화물열차 경적을 울리면
스치듯 외면하는 플랫폼 잃어버린 풍경
다시 웅성거리고픈 대합실
노을 뒤로 무인역사는 하냥 서 있었다
슬레이트지붕 담벼락 아래 이울고 있는
역전 꽃다방
고향을 등진 레지들의 슬픈 웃음소리
빈 자리 안쓰러워 떠날 수 없었는지
빛바랜 세월을 들여다보니
잊어버릴 지금이 과거의 기억으로 남는다
존재는 잊은 기억에서 비롯되는가
춘포역이었음을 입간판이 자백을 한다
노을 속 거닐다 무심한 도로 위
내려진 창문마다 거리가 닫혀가고 있다
이름을 잃어가는 치명적인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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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선의 한 철도역명(익산시 춘포면)으로 우리나라
가장 오래 된 역 (2007.6.1일자로 여객취급 중지)
소머리 국밥집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질서가 있는 집
벌써 수십 년 지난 방 안에는
할아버지 때부터 드나들던 낯익은 정서
가뭇가뭇 배어있고
솜씨 좋은 할머니 옷매무새에 남아있다
질펀한 술자리며 언성 높인 술 소리가
듬성듬성 탁자를 괴고
지나치는 술꾼마저 합석하는 자리
투정 같은 욕설이 살갑게 다가 서도
자리 깔면 이곳이 고향,
지정거리는 날 더욱 반가운 국밥집
눈인사하랴 선지 썰랴
분주한 손놀림에도 부엌 한켠
반질반질한 무쇠 솥 한평생 녹아있는 삶이
청명한 햇살처럼 피어오른다
월계이발관
1.
월계골 어귀 붓끝 하나 힘차게 살아있는
양철간판 ‘월계이발관’
시중 요금 절반도 채 안 되는 이발료
늙수그레한 얼굴 생김새 어울리게
꼬맹이 머리통 하나 잘 민다는
절름발이 노 이발사
하얀 가운 속 숨겨진 걸음걸이
어색함이 째깍이는 가위질에 묻혀간다
‘증 ○○군수 김 아무게’ 내걸린
빛바랜 벽시계 속으로 잘려나가는 시간
뇌물수수 의혹이 연일 라디오의 전파를 탄다
2.
시가지 하나 둘 늘어나는 미용실
전기 커트기 잘려 나간 자존심보다
수십 년 동무되어도 미덥지 못한 가위질
기억들이 베어져 나간 틈새마다
지나간 세월 담아내는 벽거울 속으로
걸개그림 만발한 진달래 봄빛이 그리운가
담벼락 올망졸망한 머리통 터뜨리는 함성
여러 순배 말뚝 박는 북새통 끝에
드잡이로 한바탕 지친 몰골들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골목 안
기웃하던 노을빛 품어들면
천근 가슴 지져오는 쇠기침
무싯날, 월계이발관은 무성영화관이다
3.
아침부터 장기판 앞에 눌붙어 있다
동네 꼬맹이 채근질은 안중도 없다
난로 위 주전자 잘라낸 머리카락 올처럼
헝클어진 아우성으로 끓어 지친지 이미 오래
장기 알 미는 것도 장 때리는 것도
담배연기 연신 뿜으며 거듭되는 장고
이기고 지는 것보다 첨지에게 바치는
막걸리 값이 더없이 배알 꿀리는 심사인가보다
타령 한 소절 주고받는 권주가
기어 나온 봄볕 술잔에 잠기고
노란 민들레꽃 같은 단무지 몇 쪽
장기 알 물린 손길로 오고 간다
화단은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
4.
한쪽 무릎 저려오는 아침
메마른 장미덩굴 봄비를 부른다
거칠한 세월과 마주한 의자
거울 정면 펼쳐지는 닮은 꼴 같은
타관바치 살아온 반생
남도엔 무서우리만치 동백이 찬란하리
손마디 굳은 살집 남겨진 가위 소리
움켜쥐어도 힘없이 풀리는 손
내리는 비가 눈물이었을까
이명처럼 울리는 빗소리
덧칠 한번 없었던 양철간판 ‘월계이발관’
봄비 타고 표류한다
5.
아이 손 마주잡고 걸음걸음 한 골목 그 자리
매끈한 아크릴 네온간판 ‘뉴 헤어디자이너 클럽’
‘축 개업 ○○시의회 의원 김 아무게’
매니큐어 색깔 피어난 명자나무 꽃잎
붉은 리본 바람에 펄렁이고
골목 안 누비는 전기 커트기 소리
가슴에 남겨진 월계이발관 노 이발사
말끔한 흰 가운 구름이 되었다
째깍이는 가위소리 바람이 되었다
성하
미루나무 곧게 선 철공소 앞 아침은
동리 길들이 죄다 감아 돌 것 같은
바람난 매미 구애소리를 열면서 시작됩니다
거친 호흡이 삶을 이어내는 철공소 안은
쇠 메질소리 단절음으로 모여지는 쇠의 향연
오케스트라 합주음으로 동리를 돌고 온
매미의 바람난 울음소리 다 빨아들입니다
며칠 더 동리 곳곳에 매미의 열정적인 구애행위로
여름을 동무합니다
풀무질 기다리는 벌건 아궁이 닳은 손금
가보로 간직한 대장장이 평생 훈장처럼
화덕 속에서 빚어낸 쇠의 생기
여름날, 다 방생해 버린 매미 울음
다시 화덕처럼 달아오릅니다
평생 다 녹여도 수그러들 줄 모르는 불꽃처럼
하루 내내 목 터져라 울던 매미의 구애
풀무질 멈춘 철공소 안으로 스러지는 노을을 밀쳐내고
앞산 머리에서 보름달이 담금질을 시작합니다
딱쇠 손씨
주週 이삼 일은 시청으로 출근하는
딱쇠, 손씨
높낮이를 알 수 없는 그의 애창곡
긴 목청 잦아드는 낮은 음으로
계단 구석 자리를 틀고 나면
손금만큼이나 헝클어진 보퉁이 속에서
구두약 솔 헝겊 접착제
수십 년 담아온 내력들이 쏟아진다
그가 지닌 재산의 전부다
서너 번 문지르는 구두 콧등
광택을 내는 솜씨에 찬사가 이어지지만
무지한 학력뿐인 딱쇠, 손씨
구두 수십 켤레 찍어 와도
시계추처럼 흔들거리는 조막손에 들려
빈틈없이 제 자리에 다시 안착시키는
경이로운 기억력
손씨보다 별호가 더 어울리는
딱쇠 ‘여로’
인생 또한 하나의 ‘지나가는 길’처럼
그가 떠난 빈 자리에서 앓고 있는
책상머리 남루한 ‘여로’의 기억
구두 콧등은 지금 ‘지나가는 길’을 포맷 중
빵의 얼굴
길모퉁이 옆 오감에 이끌려 수없이 곁눈짓하며 지나치던 제과점 생일상 오르던 생크림 케이크가 생각나 성큼 문을 열었습니다. 새삼 생경스러울 만큼 교태부리는 빵, 진열장 눈길 닿는 대로 빵을 담았습니다. 한 번에 그 많은 빵, 무심코 주문한 나는 갖가지 빵 이름들이 적힌 계산서를 보면서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다른 모양새로 담겨져 있는 빵, 아이들에게 홀대 받을 빵이지만 부모님 생각하며 봉지를 옭맵니다. 제과점 문을 나서면서 달콤한 냄새는 걸음 옮길 때 마다 함께하자고 아우성입니다. 신호등 기다리다 유혹에 못 이겨 미끈한 크림빵 한입 덥석 물어봅니다. 어디선가 당겨오는 목 메임 그 많은 날들 중 어머니는 몇 개의 크림빵을 드셨을까. 마주한 신호등이 알았다는 듯 깜박입니다.어머니 얼굴이 떠오릅니다.
제3부 집으로 가는 길
나의 옛집 앞 돌우물
푯돌처럼 지켜 서서 누이 눈 닮아 맑게
솟는 샘, 오동나무 아래 옛집 앞 돌우물
두레박 내려졌던 유년의 시간 들어올려
점자책 더듬듯 오래오래 해독하고 있을
그리움이 부푼 옛집 앞 돌우물
우물 안 엿보던 햇살이나 달빛 조각
마른 벽에 숨은 두레박 물질소리는
유년에서 밀려난 낯선 얼굴을 기억할까
평생 집을 갖지 않은 민달팽이
텅 빈 나의 옛집 적막 같은 부끄러움을
에둘러 숨어 우물 벽 비워놓은 자리
마음은 잠겨있고 우물은 열려 있는데
세월은 자꾸 쌓여 푸른 기억을 덮는다
나의 옛집 앞 돌우물 속 참 맑은 물
찰랑이는 물소리 내 마음 열리게
매일매일 햇살 담은 두레박 내려서
불혹의 나이테 선명하게 수혈하는 일
누이의 참 맑은 눈 닮듯 샘솟는
나의 푯돌 그 자리, 옛집 앞 돌우물
시계, 뻐꾹새
벽면에 둥지 틀고 시간 맞추어 우는
하루 내내 빈자리 지켜내는 새
시간마다 빼곡하게 만들어놓은 공허
울음이 허공을 다져가고
걸어둔 옷가지에게 귀가의 존재를 묻고 싶은
시간마다 열리는 두려운 방문
바람 쓸리듯 몰아나간 썰렁한 신발장으로
봉인된 하루의 걸음
살아있어 무료한 시간
낯설지 않게 허공으로 시간을 풀어놓고
교차되지 않는 내내 평행선 찍은
시간마다 우는 새
벽면에서 둥지 틀고
사육당하는 시간은 기억할까
메아리처럼 되돌아서
먼 인기척 먼저 들려주길 바라는
내 귀를 관통하고 지나갔을 소리
뻐꾹 ― 뻐꾹 ― 뻐 뻐꾹 ―
시간마다 우는 새
하루 내내 가족들이 모르는
공허에서 철거되는 시간
골목길
골목 안 밤거리는 늘 다림질 없는
셔츠 등판처럼
꼬질꼬질하게 널브러져 있다
애저녁 광풍이 저지른 초겨울 비가
골목 안 발걸음은 더욱 흉흉하게 한다
노래주점 벽면 네온사인 노골적인 빛
십여 걸음 아래 수척해 보이는
왕대포집 유리문 안으로 기웃거리다
집으로 가던 길 되돌아 선
가난한 가장의 어깨 위로 함께 슬려간다
자책을 풀지 못하고 얄팍한 세상을 윽박지르다
술잔에 풀어놓은 욕구
고스란히 응어리로 쏟아진 밤 골목 안은
상처를 치유하는 마력을 지닌다
가로등 아래 유년의 술래잡기처럼
집 찾아가는 골목길은
가장이라는 무게감으로 눌려진 하루
들키고 싶지 않은 괜한 비장감이 든다
자화상
매일 접하는 일상의 생활이지만
폐부 깊숙이 박혀 지나가는 나이
지천명,
궤도 따라 한 치 어긋남 없이 달려오는
열차의 일상적 질주
깊은 골짜기 터널 속으로 황망히 가버리고
빈 궤도 위
이별 만남의 대상도 홀로 아닌 더불어
가고 넘어야할 발걸음을
풀려진 구두끈이 불러 세운다
얼굴에 숨겨져 있는 굴곡진 기운 들춰내듯
구두코에 내가 비추인다
헐려가는 저만치 청춘이라는 몹쓸 나이
몸짓으로만 청춘이라 뇌이던 말
가면 같았을까
묶여진 구두끈이 나를 놓는다
멀어져가는 나의 발걸음
지나간 시간이 발뒤꿈치에 묻혀가고 있었다
집을 짓는 방식
까치는 저 높은 성근 가지 위 둥지를 틉니다
바람이 꼬이고 햇살이 덮이고
눈비가 머무는 높은 곳에 가정을 꾸립니다
여우는 나무뿌리 얽힌 땅 속에 굴을 팝니다
새싹 움트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세상 밖 기지개 켜는 소리 들리는 곳에 새끼를 낳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나무 위도 땅 속도 아닌
땅 거죽 그곳에 집이 있습니다
햇살도 비껴가고 바람도 돌아앉는
생명이 자라는 소리 외면하는
견고한 집을 짓습니다
그곳에 숨어 엮는 또 다른 집
칸칸이 막힌 방, 아이들이 지은 집
박제처럼 더 단단히 차단된 감정
서로 견고한 집을 짓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먼 이웃처럼 지냅니다
그런 집을 지은 인류를 슬퍼합니다
난, 그곳에 문패를 달고 살고 있습니다
이사
사는 것이 늘 단조롭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사 하는 날
부슬부슬 비 내리는 서글픈 날
동여맨 짐짝 미련 하나 남기지 않을 듯
쓸어내리는 빗질이 또 하나 이별을 낳고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떠나 보내려 한다
이웃, 정다운 얼굴 섭섭하지 않게
나를 보냈으면 좋으련만
동안 전해주지 못한 마음
미소만 보내는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이웃도 가지런히 웃음을 건넸다
엘리베이터 하강하는 압박감
이사라는 것이 늘 생경스런 나를
메마르게 끌어내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굳게 닫친 옆집 현관문
낯 선 이웃 하나 또 늘었구나
생경스럽게 산다는 것을 이사 하고 싶다
노숙
햇빛이 살해된 공원 모서리를 돌아
살바람 구겨 넣듯 오바 깃을 세운
인텔리적 기풍의 사내들
팝콘처럼 쏟아져 나오던
짐승 아가리 같은 지하도를 거슬러 온다
마지막 전동차 전율 빗장 쳐진 어둠 속
신기루처럼 사라지면
앞뒤 모를 뒤엉킨 발자국소리
주섬주섬 어둠을 등지고 순례자처럼 온다
관처럼 세워진 콘크리트 벽면
봉인된 지상의 추도식쯤은 허례일 뿐
비문 한줄 남기지 않는 실직의 순교자
육신도 평온해 그림자도 가벼운 몸 위로
구겨진 신문지가 수의처럼 덮이면
층층지하는 카타콤베 같은 안식처
평화로운 허물들이 방안처럼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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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켜내던 지하무덤
대추나무 시집보내는 날
성근 바람
대추나무 가지를 씻는다
푸릇푸릇 팔랑이는
잎들을 달가워하는
수릿날
가을을 묻어두려는
바쁜 손길
퇴비 한 짐 내려놓은 아비는
돌 하나
얄궂게 끼워 놓고
우수수 열리는 다산을 빌었다
북촌*, 열려 있는 대문
가지런히 뻗은 골목 사이 배낭을 짊어진
파란 눈의 사람들이 찾아든다
수복壽福이 걸려 있는 대문 안으로
문살만큼이나 서로 엮여 있는 마음
Hello, Excuse me?
낯설음이 시작하는 만남이다
푸른 담쟁이넝굴 얽킨 오래된 정원은
역사가 지닌 풍경들로 자리를 편다
담과 담이 서로 잇대어 골목을 만들어놓듯
이질의 문화가 상충하여 동화하는
낮은 기와 서로 맞물린 처마 아래서
대청마루 펼쳐놓은 시간의 소통
마루 밟은 소리 더 정겨운 걸음걸이
머물다 떠날 안부를 묻는 섬돌 위에서
또 다른 길 떠나는 이들의 배웅
담장 밑 봉선화 꽃잎 붉어간다
오래 묵힐수록 더해가는 인연처럼
담아갈 수 없는 구들장 등 따신 체온들
닫힌 마음 열려가는 북촌 골목길
미닫이 펄럭이는 매끈한 빛살처럼
‘안녕…계씨요…’
낯선 곳에서 낯익음으로 전하는 인사
바람 가르는 처마 밑 풍경소리
그 걸음 따라 경쾌하게 울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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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전통 주거지역으로
전통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
집으로 가는 길
평온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발걸음으로 가늠해 보았네
젖니 묻힌 흙담 아래
오랜 추억 더듬어가는 그 자리에서
주렁주렁 부풀어가는 박넝쿨
나는 담담히 수묵화 그려 넣었지
까치 총총걸음 여유로움 채가는 시야 속으로
하늘을 쓸어가는 뭉게구름을 거두며
그곳 푸른 수채화 풀어 놓았지
고추잠자리 붉게 달아오르는 허공
온 몸으로 부셔오는 충만한 시간으로
마중 나온 노을아
유채화 한 폭 걸어 놓고 뒤돌아 선
평온의 종착지는 바로 이 곳
파란 대문이 항상 열려있는
그 길, 나의 옛집 가는 길
마지막 버스
버스가 출발하자 요란하던 빗소리가 구르는 바퀴 속으로 잦아들다 번들거리는 불빛이 차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는다. 거만하던 표정 하나둘 몽상으로 떠나고 지루한 투정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버스에 갇혀 매수된 고요와 함께 간다는 것, 막차를 탄다는 것 어찌 보면 모두 그 끝을 정해서 달려가는 심야버스 공간과 함께 한다는 것
차창으로 스캔 되는 도시의 풍광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겨울비는
버스를 향해 가속으로 덤벼든다
신호등 앞에 잠시 정지한 시간
승객 몇은 잔기침으로
무거운 세상 잠들지 않았음을 고하고
버스가 닿을 종점에도 비는 내린다. 어둠 속에서 휘적이는 불빛 질주하는 바퀴와의 은밀한 거래처럼 부풀려가는 속도 심야버스의 절명으로 반환되는 잠시의 블랙홀, 마지막 버스가 멈추고 깨어난 시간 각자의 걸음으로 귀가하는 잰걸음, 빗물이 흘러들어 어느 낮은 곳으로 모여 다시 강을 이루는 것처럼 삶도 무리 진 곳을 향해간다. 비 오는 날 우산은 맑음을 봉기하는 조용한 반란이다.
민달팽이
허물을 벗는다
발아 안 될 씨방이 자리하고 있다
그 많은 빈터에
그 흔한 집하나 짓지 못하는 내력
민달팽이의 굼뜬 동작이 고스란히 남아
패각 없이 공허를 감고 사는 한 몸의 기교
배밀이로 밤의 흔적을 잰다
거리가 점액질로 덮인다
가로수에 묻힌 어둠을 버겁게 받치던
네온사인 아래 밤이 울먹인다
‘집이… 없는가?’
바람이 지나가며 묻는다
그물을 건져 올리듯 어둠은 거리를 낚는다
스스로 벗은 생채기 추스르지 못한 몸
느릿느릿 밤을 갉아내고
공허를 감고 허물을 벗는다
야행성이다, 집 없는 모든 것들
매미
내 몸에서 육체가 빠져 나가고
내 몸에서 자유가 말라가고
내 몸에서 정신마저 빼앗겨 버리면
남아 있는 것
땅 속 음습한 몽유를 뒤척이며
독기의 더듬이를 갈면서
7년 어둠의 절명
가장 슬픈 비명 같은 노래를
부패하기 전
허물만 남아 있기 전 불러보리라
빈 껍질 같은 여름
다 가기 전 풀어놓는
짧은 지상의 하루
노래만 남긴 나의 빈 집
퇴근길 달을 안고
달이 간다 터벅터벅 걸음 따라
줄줄이 그림자 꿰차고 달이 간다
달이 떠 있는 줄 모르고 사는
나의 그림자마저 잊은 무심한 나
담장을 경계삼아 옹알거리는 바람
공터에서 걸음을 멈추고
가을 타는 노란 은행잎을 질책한다
가로등 아래 서성이다 달빛에 묻힌 나도
잎 새 하나 없는 나목이었다
나목을 향해 달려들던 자동차 클랙슨
휑한 마음 뚫고 지나가고
땅을 밟고 있는 자유로운 취흥마저
시간을 잊고 사는 죄 묻어두었다
한밤 무섬증 안고 달빛에 숨은 나는
주민등록증에 이서된 자리 그곳,
달빛에 엮여 집으로 향한다
뚜걱뚜걱 달빛이 발걸음을 재며 간다
성내집, 그곳에는
십여 평 남짓, 그곳에는 사람의 향기가 핀다
풀 이끼 내린 허름한 기와지붕
하늘을 움켜 안고 살 듯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술막에는
풀 수 없었던 정답이 적혀 있다
둥근 탁자 몇 개, 그곳에는
모르고 만나서 눈인사 건네는 다정多情이 산다
손맛 좋은 주인 아주머니 엉덩이를 타고
육담이 배시시 사발 안으로 담기는 술막에는
바람과 들창문의 분탕질 속에서도
그저 형님, 아우가 전부이다
가슴에 묻어둔 혈기의 노래
취기어린 보챔이 삭는 그곳에는
자유가 흐르는 무대가 들어서고
어울림으로 금새 친구가 된다
멍들은 양은 주전자에 담긴 술이 삭아
욕지거리가 노래가 되고 시가 되는
하늘을 이고 사는 낡은 기와지붕 아래
도심 속에 흐르는 도타운 정
왁자한 삶이 익어 사람 사는 향기가 핀다
제4부 건조주의보
건조주의보
나이 쉰이 되니 다들 건조주의보라 하네
푸른 잎맥을 틔워내던 그런 날도 있었고
내 안의 엽록소들이 팅팅
폭포수 같은 용트림하는 날도 있었던 적에
불현듯 지금 내게 건조주의보라 예보한다면
내 마음은, 오보라고 거절한다네
단풍이 절정인 이 길을 걷고 있노라면
저 나무들도
푸른 잎맥과 엽록소를 팅팅 튕기며
환희를 가지마다 채워내었으리라
정작 마음은 더욱 푸르러
세안된 맑은 눈으로 더 높은 곳을 보는데
사운대는 서정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네
어쩔 수 없이 우기는 신파조의 투정보다
나이가 익는 지순한 이야기 한 줄 더 쓰랴
몸과 마음은 아직 쾌청
비 올 확률은 제로, 최적 습도 45%
나는 어느 일기예보 속에 놓여 있는가
건조주의보에서 펴낸 마음
5월 같이 머물다가는 불 밝힌 자리
고이 사랑하는 법 지피며 걷네
양은 냄비
고전古傳이 해체된 너를
모든 것 금새 팔팔 끓여내었던
하찮은 명칭, 양은 냄비
쉬이 달아오른다는 비속어를 안고서
싱크대 저 밑 어둠을 담고 있었지
한때 쉬이 버릴 뻔 했던 너의 몸통을 조려내면서
고지식한 생각 지금 방목한다
군데군데 흠집이 생기면서 더욱 애착이 가는
양은 냄비의 속성을 사랑한다
누런 깡통 같은 단순함에서
올록볼록 생긴 모양새도 흡족하게 여기는 것은
새롭고 근사한 찰진 맛에 길들여진
5종 바닥 첨단 냄비보다
목젖까지 그 맛을 음미해 내는
쉬이 달아오르는 칼칼한 근성
그것, 쉬이 달아오른다는 것 때문이다
서설
부랑인 한 사람이 동사했다 한다
햇살이 꼬여 낸
영하의 바람 행로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계단 구석에서
기도하는 마리아처럼 얼어있더란다
가지마다 눈꽃처럼 피워놓은 깊은 밤사이
하늘로 인도하는 길
죽음을 기억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수은주가 급사했다는 겨울 긴 밤
밀랍 같은 각질을 만들던 창문에서
발간 살집들이 빛처럼 비쳐오는 아침
밀랍 같은 서설이 그의 몸을 덮은 것은
칼칼한 바람의 행로가 그를 찾았기 때문
인생 전부가 그 날 아침에 뽑혀졌다
영정 없이 세상을 진설하듯 내린 눈
마리아처럼 기도하는 부랑인의 죽음도
서설처럼 기쁘게 아침을 열 수 있었을까
하품
하품이 튕겨져 나오면서 사위가 얼룩거립니다
금새 눈에선 눈물이 굅니다
슬픈 것도 아닌데 눈가에 젖어오는 무게감
혼자 이러는 것인가 싶어 돌아보니
당신의 눈가도 젖어 있습디다
다정도 한 것이 호흡을 통해
하릴없던 적적한 시간 하품이 전해 준
봄날 새삼 핀 연정이라는 말인가
그리워 너무 애틋한 묵시적인 소통이
웃음 아닌 눈물샘으로 보내게 된 걸까
무심결에 날린 소원한 오후의 하품
산허리 과수원 붉게 번지는
봄기운 이곳저곳 푸르게 치달립디다
뜨거운 마음 여미어서 불현듯
사랑을 걸어 두고 싶은 슬프지 않은 눈물
나이테
달빛이 숨어 있는 길모퉁이 노점상
노파의 얼굴
어둠이 빚어 나오는 깊은 주름
노쇠한 나이테일까
몸을 담은 술병들이 거리를 가로지른
네온사인 아래
숨어 피는 민소매 고운 살결의 그녀
포장된 나이테일까
매해 그 어느 것
하나씩 쓰고 안으로 감고 마는
촘촘한 나이테
그 속에 더 담을게 있을까
담을 게 없는 허한 가슴
늘 밝아오는 아침이 어둡다
여름바람
장렬한 태양 아래서 휴식을 채우는 법이란
바람을 멀리서부터 붙잡아오는 것이다
살갗을 보듬다 일순 고요한 바람
그렇지만 마냥 붙잡아 둘 수는 없다
가늠할 수 없는 높이의 옥타브로 채근질 하다
갈증 풀기를 멈추고 사라지는 바람
바람의 세기를 하나하나 짚어가듯
몸은 풍속계 끝 바람개비처럼 돌고 싶어한다
앞산 숲 근처에서 놀던 바람이
빨랫줄 넘어들기까지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아
바람의 빗장을 채울 수 없다면
어느 곳 달아나지 않게 족쇄를 채우면 되는 법
푸르고 짙은 초록을 키우는 여름 밤
내가 안을 수 있는 시원함이란 결코 만만치 않은
열대야 곁에서 잡아둘 수 없는 바람
갯가에서 바람의 투정을 불러들일 일이다
맑은 눈
불편한 눈길 외면하지 않는 눈망울은
가식이 없는 정직입니다
그래서 맑은 눈은
천만년 흐르는 푸른 강물 같습니다
그 눈을 보면서
파렴치한 몹쓸 것 정화시켜 내는
청청한 맑음에 경외심을 갖습니다
저버리지 않은 믿음 한 줄기
맑은 눈을 가진 그,
온전한 세상이 그 눈에 담겨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낄 때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것은
나의 몸 일부를 만졌을 때이다
듬성듬성 자라나는 턱수염을 자르다
날선 칼끝에 묻어 나온
붉디붉은 핏물을 볼 때이다
듣고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
나를 찾을 수 없을 때
거울 앞에 서 있는 꾸덕꾸덕한 얼굴
밀랍인형 같음을 내가 나를 안다
하고픈 말을 쏟아내며
자근자근 목소리를 지켜낼 때
분노로 차오르는 시대의 그림자를 벗겨낼 때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다시 느낀다
내가 살아 있음을 참으로 느끼는 것은
손끝에서 걸어 나오는 한 구절 싯구이다
마음까지 비쳐오는 투명하게
살아 숨 쉬는 설렘으로 당신을 향해 던져지는
그리운 펜을 들 때이다
방뇨
어깨를 내주고 방심을 유혹하는
줄 장미꽃 아래서
몸을 떠나는 그를 흔쾌히 배웅한다
방뇨, 그 희열의 배설
방황하듯 깜박이는 별을 묵시하며
미묘한 감정을 치켜세운 방뇨
무념의 얼굴을 마주하는
넋 놓은 꽃잎의 따끔한 교태
내가 서 있는 것처럼 방뇨도 서 있다
불편한 진실이 참으로 포장되는 세상
채워 넣어도 부족한 해갈을 위해
나를 떠나가는 쇠침 같은 쾌변
배설의 쾌감 세상을 향해 일침한 떨림
전신주 가로등이 환히 응원한다
방치한 방뇨의 끝
줄 장미꽃 나를 보고 웃는다
기울기 23.5°
서 있는 어느 곳도
기운다는 생각을 가늠하지 못한 채
세상의 모든 것이 직립이다
허락하지 않은 직립이라 할지라도
이곳은 모두가 설 수밖에 없는
둥근 지구,
계절은 주기적으로 바뀌고
생명이 자라고 묻히는 순간까지
지구와 직립이 공존하는 기울기
서 있어도 느끼지 못 하는
기울기 23.5°*
직립으로 서서 수평으로 눕는다
------------------------------
*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
세치 혓바닥
뱉어낸 말言
혓바닥에 실린 진실의 무게는,
과포장한 허언들이 화려한 장식을 달고
난무하는 이 판 저 판
바른 입들은 죄다 닫힌다
아무리 지껄여도 미덥지 못한 말
가슴에 꽂혀 아직 서슬이 퍼렇다
불꽃으로 사는 특권을 누리는 허언들
유랑자처럼 떠돌다
뱉어낸 자리에서 비명으로 절명한다
세치의 자유 열린 입으로
욕구를 위해 쏟아내는 무서운 말
입에서 나온 진실의 무게는,
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깃털 같다
말에 지친 말들이여
‘주 예수를 믿으라’ 외치는 사내의 남루한 말이
예수님 목소리로 들리네
흐르지 않는 강
강촌이라는 마을에는 강이 없다
굽이쳐 흐르는 물이 없다
강을 그리워하며 붙여진 이름
강촌,
흐르는 것은 강이 아니라
개발의 배설물이 굽이치는 강촌
기적소리 울리는 서울행 기차
강이 없는 메마른 가슴을 지나간다
플랫포음을 훑고 사라진 기적소리
마른 물소리를 안고 사는 강촌은
침묵으로 살아가는 이웃을 위하여
가슴에 하나 둘 강물을 적셔내고 있다
흐르는 물을 잇는 강이 아닌
빈 강을 안고 사는 강촌은
희망을 흘러내고 싶은 물길이다
착각은 각이 없다는데
노을이 거리를 덮쳤다
빨간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여자
스카프에 번진 불꽃처럼
긴 머리카락이 거리를 확확 내지른다
나이가 무의미하다는 것
그것은 사랑이라 감히 꺼내기도 두렵게
청춘을 다시금 입에 올리고 싶다
참말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방망이질 치는 가슴
의리의 시절 느꼈던 혼미한 술맛으로
울렁거린 열아홉 가슴 열꽃으로 다가왔구나
노을이 불타는 거리를 질주하는
아득하게 빨려가는 빨간 스쿠터 위의 여자
청춘이 살해되어버린 나의 가슴
불꽃처럼 타오르게 하는 거리에서
내 안에 순응해 버린 예의라는 것
우체국 앞 라일락꽃이 흔들고 지나가는구나
빨간 스쿠터 여자가 침몰한 눈동자
몽상을 깬 텅 빈 헛헛함이란
노을이 밀려간 긴 침묵,
거리가 적적하다
노점거리
생기를 담아내는 거리는 활력이다
하이힐 낭낭한 소리
분주한 구둣발 소리
운동화 팔짝거리는 소리
가두어 둘 수 없는,
살아 있는 소리 열리는 거리에서
노쇠한 숨소리 일으키며
우리 모두는 생활을 팔고 있다
빛이 키워지는 거리는 탄생이다
채 솎지 못한 푸성귀 몇 단으로
턱 밑에 찬 숨소리 좌판 위 펼쳐내면
농부의 가슴은 생명을 키우는 들판이다
잎들이 퍼지고 줄기들이 살아나는
꿈틀거리는 생기,
아스팔트 위 돋아난 푸르른 빛들
우리 모두는 생명을 사고 있다
내 안의 내가 그립다
내 안에서 그리움을 찾는 이유는
그리워서가 아닌 그리움을 알기 위한
그리움으로 남는 다는 것,
몇 무리 유영하는 철새의 정중동
고요가 그리움을 피게 하는 것이다
닻을 내린 유람선 빈자리 마다
풀썩 넘어서지 못한 노을빛의 방치는
물이랑 사위어 가는 시간을 따라
남겨졌던 연인의 체온을 기억해줄
이별에 대한 그리운 해후
내 안에 선 내가 그리운 것은
내 마음만이 아닌 모두가 그리운 것
옷깃 속에 머무른 온기처럼
떠나간 곳으로 걸음들이 깊어간다
만추의 사색이 절절 익어 가는데
내 안에서 드리운 그리움은
그리움을 찾기 위한 열병으로 남아
내 안에 선 내가 그리웁게 한다
겨울 광야에서
나무는 한데서는 꽃을 틔우지 않는다, 12월은
불꽃이나 멀리서 비치는 빛이나
어둠이 허락된 시간에 피워낼 맹렬한
꽃 같은 불꽃,
마음을 녹이는 따스한 꽃이라네
불꽃은 타서 재가 되고 산화되어서
망자의 심장이 되었을까
숯덩이를 뒤치면
어둠을 방관하던 빛이 부스스 불티로 살아나
붉은 나비가 된다네
하늘로 이어져 땅으로 귀환하는 저 곡직의 순환
몸으로 맞는 정적의 광야에서
무수한 별은 일시 떠오르고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어둠의 부랑자는
눈물 흘리는 별찌가 된다네
사위가 꽁꽁 언 겨울 광야의 바람이
몸 구석구석 발라내면
불을 빚는 나무 몇 덩이 더 필요한 화덕
아직 남도의 동백은 피기도 전 12월
타오르는 불꽃이 붉은 꽃이라네
제5부 사람의 섬
혀의 깊이
깊이를 잰다는 것,
눈짐작으로 바닥의 끝을 알 수 없다는 것
입술에 갇혀 숨어 있는 존재감으로
더욱 깊이를 알 수 없는 혀
몇 사람의 심장을 관통하고
몇 사람의 희망을 잘라 내고
몇 사람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그것을
악惡이라고 멸시한다면,
한 사람의 짐을 나누어 지고
한 사람의 아픔을 위로하고
한 사람의 기쁨을 모두에게 전하는 그것을
선善이라고 옹호한다면,
입 안에 감추고 있는 혀의 깊이
알 수 없는 선과 악의 간격
간결한 눈금 하나 쯤 더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혀의 깊이는 마음속 진위의 경계
취중
기억 반쯤은 술병에 잠겨버린 시각
면발처럼 풀어진 발걸음이
택시 승강장에 머물다
전화 부스 앞에 선다
채 마치지 못한 늘어뜨려진 수화기
대화가 단절된 입과 생각이
착신음만 희미한 기억으로 옹알거린다
서로의 말이 이어지는 부스 안에서
오늘이 끊긴다
절룩거리며 다가오는 택시 불빛
승강장을 기웃거린다
하루가 빨려 들어간 블랙홀 같은
전화 부스
술병 속으로 언어들이 갇혀있다
막걸리
벗 하나 앞에 두고 다른 벗을 노래한다
앞에 앉은 벗은 노래하는 벗에 대한
존경으로 즐거이 입을 맞추고
옆에 끼고 노래하는 며칠 동안
싫어하는 내색은 끝내 저어한다
가끔 가당치 않은 수치로 거부당하는 몸은
쿠데타에 잠시 휴전을 청하곤 하지만
유혹은 곧잘 협정을 어기고
술청에 앉아 즐거운 인사를 건넨다
벗들 중 텁텁한 맛 친근한 정감은
김치 한 조각 더 이상의 절친은 없다
지금 술막에 끓어 넘치는
막걸리 향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세상 시름 담은 양은주전자에
시덥잖은 모든 쿠데타들이 모여들고
저민 가슴까지 파고드는 맛
탁한 술이지만 맑아오는 정신으로
또 하나 키워가는 봉기하는 양심
낙조
꽃잎이 가슴에 내려앉는다
차마 이별을 고하지 못해
던져 놓은 마지막 징표
환희로 사루는 불꽃
눈물로 쏟아 내어도
자꾸만 부셔지는 현란함
기러기 떼 슬픈 울음 울다
달을 물고 고요가 꿈을 꾼다
소의 눈
들판을 담은 광폭렌즈 같은 눈망울
그 눈에서
거역하지 않은 순수를 봅니다
코를 뚫은 자유롭지 않아도
쇠 방울 짤랑짤랑 울리는
그 눈에서
조급하지 않는 여유로움이 있습니다
땅을 깔고 하늘 섬기는
일상의 들녘에 선
그 눈에서
오랜 눈물 참아온 정신이 보입니다
그 눈을 보면
내 몸에 흐르는 동반자라는 의식
온전히 길러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절벽 새겨진 삼존불 미소보다
더 담아내는 그의 눈에서
어머니, 어머니가 보입니다
하이 힐
자존심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바닥에 비친 얼굴 위로
곧추 세운 하이 힐 걸음
한 시대를 파내듯 콕콕 찧으며 간다
음흉한 눈길 콕콕 걷어내며
높은 벽들을 허물어 낸다
무심한 소리 돋아난 그 자리
저만치 뒤돌아서서 귀 울리는
하이 힐 소리
콕콕 재며 지나간다
미끈한 기름종아리 쭉쭉 뻗으며
유행의 길을 자근자근 쫓아간다
노래팡 도우미
찰랑찰랑 탬버린소리 아득히 귓전에 머물고
비워버린 동공은 이미
뇌수면으로 침잠된 지 오래
격정으로 묻히어 가던 시계소리
각질 벗기듯 뚜각뚜각
잠긴 몸 속으로 파고든다
인간짐승인간짐승,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짐승인간짐승인간, 곤죽으로 주물러 터진
혼돈의 시간
타인의 허물로 풀어져야 하는 밤은
늘 술래잡기 술래가 되는
황량한 밀실 속의 조력자
지폐 몇 장 일시에 무너져버린
노래팡 도우미 그녀의 몸
사이키 조명이 고치실처럼 감겨온다
핸드백
또 나를 보네요
말 한마디 건낸 적 없지만
스쳐간 향기
당신인 줄 알아요
바람이 몹시 차군요
어깨 맨 허전한 무게감에
오늘을 묻혀둔 마음
당신, 폼 나는
숨겨둔 속셈 열어보아요
나, 열고 싶은 당신 마음
간이역
간이역 대합실에 들어서면
늘 혼자인 듯 홀로의 시간을 태운
긴 나무의자 등받이
기대어 머문 사연들이 뭉개져 있다
바랜 벽면 필름처럼 흘러가는
지명수배자 명단
어떤 연유를 달아 표적된 시간을 감추어 내었을까
닮은 눈매 문득 나의 얼굴 같은
호기심이 인물화로 머문 순간
나 또한 검거되지 않은 자유였다
플랫폼 낡은 이정표 지나치는
종착지 어딘지 잡을 수 없는 질주
또다시 급행열차 놓아주는 간이역
햇살이 수몰된 산등성이로
검거되지 않은 지루한 기다림이
다시 시작된다
사람의 섬
바다와 섬은 서로 절절한 소리로
자신을 드러낸 오랜 믿음으로 숭배하고
밀물 썰물을 주고받으며
평화로운 부대낌으로 안부를 대신한다
내가 사는 곳 하루에도 몇 개씩
섬들이 솟아나다 스러진다
꽃피고 둥지 트는 자연의 경외가 아닌
마음의 울화들이 세운 암초 같은
푸르지 못하는 욕망의 숭배
어둠 뒷면에 비겁하게 숨겨두는
경쟁이라는 안개 휩싸인 저 깊은 곳은
위선으로 꽉 채워진 수채 구멍 속이다
화해를 모르는 땅의 섬들
한낮보다 더 흥청거린 현란한 빛줄기
통증없이 잠식당하는 푸른 지성들은
더 진보되지 않는 향유에 중독 되어간다
빌딩 속으로 물자멱하는 걸음걸음
사람의 섬, 한 발짝도 자유를 풀 수 없었다
여자의 마음
세상의 모든 바닥을 가늠할 수 있어도
깊이를 알 수 없는 건,
잔즐거리는 여자의 마음
맥적은 마음 졸임으로
맛맛하게 그녀를 보면서
알 수 있다는 확신을 감지해도
민소매 얇은 속 즐빗한 속살 쯤
눈감고 들춰내도 알 수 없는 것 투성
찰나의 흐트러짐이 또한 기쁨인 것
그녀의 깔끔한 성향이리라 믿어도
내심 건드리고 싶은 그녀의 치부
겨드랑이 털 난 여자,
가끔 헤픈 듯 여울지다
깊은 못 같이 정적인 숲정이 같은
그녀의 민소매 속 감추어진 모든 것
몽근한 눈길 보내다 접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마음
그래도 뜨거운 것이 좋더라
복들임 날
개 모가지 늘임줄처럼
흐느적거리는 더위가 낡은 관악기소리로 남은
거리에
스토커처럼 달라붙는 대취한 열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내 곤두선
발정 난 수캐마냥
온 몸으로 쏟는 땀
저릿하게 찾아낸 뒷골목 그 끝
제철을 만난 듯
보양탕집 앞은 문전성시다
풀어 헤친 셔츠 칼라에서
육식의 포악함이 묻어나고
압력솥에서 낑낑대는 경련으로
더욱 소란스러운 객기로 채워지는 술잔
수육 한 점 헛헛하게 잡힌 입 안으로
살점들이 맹폭하게 잘근거린다
수은주 눈금을 매수한 더 눌은 바람이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 물어오는
복날 거리는
내딛는 발자국마다 컹컹대는
온통 울부짖는 소리들 뿐이다
노을, 황홀함에 대한 예우
매일 느끼는 무상 오늘 하루, 그 처연한 황홀감에 대한 예우를 이태껏 고마워하지 못했다 붉은 건 빛이 아니라 눈을 가리는 부심, 아니 부끄러운 마음이 허락하는 평온이다 그 전율로 이미 나는 마지막 빛의 잔영까지 애무한다 가슴 열린 저 그윽한 눈길 18금 애로다 빛 속으로 빨려들 듯 혼절한 시야 황홀함을 맞는 노을에 대한 예우, 지금 마지막 웅장한 스러짐에 대한 나의 기도 절절한 반성이다
신호등
신호등 빨간불,
그냥 지나갈까, 약속인데
남들 고개 숙이며 건너는데
가면 안 될까
나도 건너고 싶다
지키는 사람 있지 않은데
건너고 싶다,
약속된 길인데
그래서 건널 수가 없네
가야만 하는데
신호등 옆 서 있는, 나
남들 다 지나간 뒤에
켜진 파란불,
나의 발 내딛기도 전
휑하니 택시가 먼저 스쳐간다
세월이
안고 가는 것이 나이런가
세안 하면서 잊었던 나를 본다
서리 맞은 듯 희어진 머리칼
볼우물 페인 입가에
나이를 고시하듯 잔주름이
얼굴 위로 회오리친다
거울 속 비쳐진 얼굴
가슴으로 적시는 쇠잔한 잔기침에
덜컥 내리 앉은 현기증
수도꼭지를 급히 튼다
거실 티브 속에서 또박또박 들려오는
아이돌 스타의 즐거운 탄성이
세면대 내려가는 물줄기 속으로
쓸려가도 남아도는 환청
나이라는 그늘에 비쳐진
또 다른 그림자
가만히 얼굴을 당겨 펴본다
♂&♀
차암, 그렇더군
그녀 들어가 앉은 밝은 자리
향기 나더군
비틀거리는 그런 놈
그 놈 따라 앉은 어둔 자리
컥컥대는 세상
모든 고민 혼자 안고 있더군
그녀 들어간 자리마다
좋은 향기가 오래오래 머무른
그녀와 자리 하고픈
그 자리
발문·해설 | 박문구
딸 셋 애인 넷의 시인
발문 혹은 빗나간 해설
딸 셋 애인 넷의 시인
박 문 구 소설가
Ⅰ.
시집의 발문을 쓴다는, 나로서는 다소 시건방진 일에 끼어든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점을 먼저 말하면서, 사실 긴 글을 쓰는 내가, 시인의 부드럽고 때로는 맵게 파고드는 곡조 사이사이에 다소 엇갈리는 화음을 끼워 넣어서 청중들의 눈살을 비틀게 할 요소가 다분한데도 굳이 거절하지 못한 것은 정석교 시인과의 짧지 않은 인연이 바닥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면 변명이 조금은 될 것이다. 그렇긴 해도 역시 뭔가 2% 모자란다는 점은 어쩔 수 없이 내 붓을 무디게 한다. 그러나 명필 흉내 내는 문단 말단이 무딘 붓을 들고 오십천 거친 바윗돌에 온 힘을 다해 휘두르는 맛도 배경의 풍광이 어느 정도 받쳐준다면 약간의 흠집은 보완되리라 하는 마음뿐이니, 이렇게 글머리를 새기고. 그러니까 내가 이 지역에서 정석교 시인이란 이름을 귀에 꽂고 다닌 지가 거의 이십 년을 넘길 수 있겠다. 작가들의 세계에서 술자리가 없다는 그림이 상상되는가. 요즘 젊은 시인들이 술을 안 마셔서 시의 힘이 없다는 어느 노 시인의 일갈을 인용할 필요는 적어도 그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지역에서는 죄송하지만 사양해야 할 것이다.
누구 집 젓가락이 몇 개라는 정도는 훤히 꿰고 사는 좁은 동네라 사실 싯줄이나 푼다는 ‘인간’ 몇 정도는 쉽게 좁아터진 내 귓속 거미줄일망정 걸리지 않을 리가 없을 터. 그러니 술자리가 깊어지면 슬슬 정석교의 이름 석 자가 굴러 나오는 것에서부터 이십 년.
그러나 처음 그와의 술 한 잔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굳이 고백이란 말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이, 그와 나는 서로의 살아온 길이와 틈새가 어긋나서 움직이는 동선이 합치되기가 어려웠던 이유 때문이었다. 아니다. 그건 나의 ‘건방진 헛폼’ 때문이었음을 고개를 숙이며 밝힌다.
시골 문단에 이름을 박은 것이 이십 년이나 앞선 선배의 ‘고고한 대가리’에서 ‘가냘픈 수습사원’의 풋풋한 몸짓이 걸러질 수 없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안테나를 달고 술집에서 퍼지르고 다닐 때였는데, 우연히 그를 만난 그 때를 잊으면 안 된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하루의 업무를 술집에서 마무리하고 바닷가 어느 곳에서 부르는 꾼들의 자리에 가고자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때 낡은 승용차가 갑자기 내 옆에 섰다. 그였다. 서로 이렇게 호의를 베풀 정도의 친밀감이 생기기 전이었지만, 비틀거리는 내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옆자리에 앉으란다. 사실, 정석교와 그렇게 밀착된 적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호기 있게, 후진 바닷가를 외쳤고, 그는 ‘그러지요’ 한 마디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취흥에 겨워 슬쩍 반말을 흘렸다. 물론 나는 반말의 반작용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의 얼굴과 어투를 눈여겨 살피고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한참 굼지럭대다가 겨우 몇 마디 흘렸는데, 그때의 표정. 나의 무례를 경멸하는, 자신의 존재를 낮게 바라보는 몇 살 더 먹은 인간에 대한 한심함, 자신이 이렇게 취급받는 것에 대한 반작용, 뭐 이런 것들의 혼합체가 그의 얼굴에 들씌워져 있는 것을 나는 순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런 점은 지엽적인 것이라는 점도 알아차렸다. 바로 그의 자존심이었다. 순간적인 그의 표정에서 삼십 몇 년 동안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고 다진 바닥을 술 취한 선배가, 것도 그리 친밀감을 보이지 않던 작자가 건드렸고, 거기에서 그의 숨겨진 자존심이 순식간에 얼굴을 감싼 거였다.
그렇다. 그는 자존심의 시인이다. 그렇다고 그냥 옆구리에 달랑 눌어붙은 자존심 하나가 내면의 세련되지 못한 마음을 타고 표피로 새어나오는 그런 속없는 시인들과는 다른 알량한 자존심이다.
적당한 체격에 일견 예쁘게 생긴 얼굴, 슬쩍 색깔을 넣어 멋을 부린 머리칼 하며, 때로는 타이트한 운동복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은 영락없이 삼십 대 중반의 청년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흘러나오는 멋은 아마 그의 말대로, ‘사랑하는 아내’의 솜씨가 덧붙여졌겠지만 점잖은 공무원의 일반적 행태와는 약간 다른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그를 보이는 대로 그리면 나중에 당황하게 되는 이유다. 일견 부드러움을 남기는 모습이지만, 한 일화를 들어보면 평소와는 전혀 다른 그의 자존심과 만난다. 오래 전 공무원 노조 결성 때 있었던 일.
예나 지금이나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드는 일은 대단한 용기임에 틀림없을 터. 그는 과감히 이 지역 최초 공무원 노동조합 설립에 앞장서서 몸과 마음을 날리고 있을 때였는데, 중앙에 집결한 그 ‘무리’들 선두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의 주머니에서 손전화가 울렸다. 직장 동료이자 평소 이웃 친구로서 친히 지내던 그 목소리를 듣자마다, ‘야 이 새끼야, 지금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내가 목숨 걸고 하는 판에 뭐야, 돌아 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고 있나? 야 썅노므 쌔끼야. 너 돌아가면 모가지를 확 틀어버린다!’
말이 좀 거칠었다. 그러나 시인의 앞길에 놓인 정당성에 대한 자존심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일화임에 틀림없다. 반듯한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러한 무게는 일반 사람들이 한눈으로 살필 수 없는 그의 숨겨진 힘이다. 그 힘이 옮겨진 곳이 잠겨 있는 삶의 굴곡, 딛고 있는 산천을 날카롭게, 때로는 부드럽게 칼질한 ‘딸 셋, 애인 셋’의 작품 속에 검은 자구로 존재하고 있다.
Ⅱ
가족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도 물론이다. 아무리 정신적 높낮이가 곧고 깊어도 손 닿는 곳에서 숨결과 체온을 주고받는 가족의 힘은 두 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그러나 이건 좀 다르다.
한 층 한 충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기진한 아이 체온 허하게 전해온다. 무거운 세상 안고 살아가야 하는 두려움보다 먼저 눈물이 앞선다. 병상 앞에서 울컥 미어지는 범람하는 해일처럼 아득한 마음 여린 얼굴을 들여다본다. 차마 눈 떼지 못하고 입술만 지그시 깨 물은 채 하얀 시트 눈시울 삼킬 뿐이다.
오염된 척수를 늘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 하얀 시트 들추다 마주친 얼굴, 아버지로서 지켜 주지 못한 사랑 알았다는 듯 입가에 미소가 핀다. 가슴에 담는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링거액 혈관 깊숙이 아픔을 세정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에필렙시」부분
자식의 깊은 병을 ‘범람하는 해일’처럼 받아들이는 그의 눈물이 ‘링거액 혈관 깊숙이 세정하고’ 있음을 아픔으로 아버지의 핏줄에 전해지는 부분이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피를 몽땅 쏟아 붓고 싶은, 애절하면서 경건하게 드러난다.
그의 시에는 부모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유난히 많다. 특히 유명을 달리하신 어머니에 대한 정은 간곡하다 못해 통절하게 번진다.
들판을 담은 광폭렌즈 같은 눈망울
그 눈에서
거역하지 않은 순수를 봅니다
코를 뚫은 자유롭지 않아도
쇠 방울 짤랑짤랑 울리는
그 눈에서
조급하지 않는 여유로움이 있습니다
땅을 깔고 하늘 섬기는
일상의 들녘에 선
그 눈에서
오랜 눈물 참아온 정신이 보입니다.
그 눈을 보면
내 몸에 흐르는 동반자라는 의식
온전히 길러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절벽 새겨진 삼존불 미소보다
더 담아내는 그의 눈에서
어머니, 어머니가 보입니다.
―「소의 눈」전문
소의 ‘눈망울’에서 ‘순’수와 ‘여유로움’과 ‘눈물 참아온 정신’ 으로 변주되다가 ‘동반자라는 의식’에서 마음의 던지고 이어 ‘삼존불 미소’를 넘은 ‘어머니’를 발견하고 있다. 평범한 사모곡으로 들릴지 몰라도 그에게는 몇 년간의 병상 생활에서 녹아내린 어머니의 모든 삶이 ‘삼존불의 미소’를 넘어 온화하게 가슴에 각인되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뭇사람들의 마음을 다잡는 효자이고 또한 어린 자식의 아픈 혈액을 온몸으로 느끼는 예민한 피부를 가졌다. 만약 이런 피부가 없었다면 그에게는 빈집으로 절명되는 극한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다음 시를 감상하면,
내 몸에서 육체가 빠져나가고
내 몸에서 자유가 말라가고
내 몸에서 정신마저 빼앗겨 버리면
남아 있는 것
땅 속 음습한 몽유를 뒤척이며
독기의 더듬이를 갈면서
7년 어둠의 절명
가장 슬픈 비명 같은 노래를
부패하기 전
허물만 남아 있기 전 불러보리라
빈 껍질 같은 여름
다 가기 전 풀어놓는
짧은 지상의 하루
노래만 남긴 나의 빈 집
―「매미」전문
오랜 시간을 음습한 땅속에서 견디다가 ‘슬픈 비명 같은 노래’를 부패하기 전에 불러보겠다는 절실한 부르짖음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를 수밖에 없다.
매미의 허물이 상징하는 바, 알맹이는 다 사라지고 노래만 허공으로 날린 빈집은 얇은 껍질로서 존재하지만, 그러나 사람에게 육체와 정신이 빠져나가면 자연 속에서 무엇을 남기고 사라지는지 알 길이 막막하니, 그래도 존재의 목청이 아직은 허공에 남아, 뜨거운 천지에 매미의 정신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진실로 부끄럽다.
작은 미물일망정 이러한데, 뱃구레에 헛양식으로 채우고 걸어 다니는 밥 넣는 통이 바로 ‘나’를 포함한 ‘내 곁’이 아닐까하는. 그의 피부는 이렇게 미물의 울림으로 우리들의 뻣뻣한 고개를 절로 숙이게 만든다.
그가 보내는 시선이 어디 이 뿐일까. 허공을 채우고 난 시선이 아래로 향할 때 드러나는 우리들의 곁 사람 군상.
수은주가 급사했다는 겨울 긴 밤
밀랍 같은 각질을 만들던 창문에서
발간 살집들이 빛처럼 비쳐오는 아침
칼칼한 바람의 행로가 그를 찾았기 때문
인생 전부가 그날 아침에 뽑혀졌다
영정 없이 세상을 진설하듯 내린 눈
마리아처럼 기도하는 부랑인의 죽음도
서설처럼 기쁘게 아침을 열 수 있었을까
―「서설」부분
모든 이에게 희망과 꿈을 전하는 서설 속에서 한세상을 마감하는 낮은 곳. 겨울바람의 행로를 피하지 못하고 어느 건물 계단 밑에서 얼어 죽은 부랑인의 평생을 누군들 짐작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명료하게 보이는 것이다.
마리아처럼 기도하는 자세로 한세상을 마친 주검 속에서, ‘영정 없이 세상을 진설하듯 내린 눈’ 속에 묻힌 그 행적이 바로 너이고 나이고 우리이기 때문이라는. 시인은 첫눈에 알아보았다. 때문에 주검 앞에서 ‘기쁘게 아침을 열 수’ 있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무수히 지나가버리는 ‘낮은 동네의 곁사람’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은 어떠했던가. 그의 눈에 밟히는 뭇 주검이 왜 우리들의 눈에는 걸리지 않는가. 그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총총한 삶의 그물망이 씌어져 있기라도 한가. 그 그물망에 걸려드는 낮은 곁사람에 대한 따뜻한 손끝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주週 이, 삼일은 시청으로 출근하는
딱쇠, 손씨
높낮이를 알 수 없는 그의 애창곡
긴 목청 잦아드는 낮은 음으로
계단 구석 자리를 틀고 나면
손금만큼이나 헝클어진 보퉁이 속에서
구두약 솔 헝겊 접착제
수십 년 담아온 내력들이 쏟아진다
― 중략 ―
인생 또한 하나의 ‘지나가는 길’처럼
그가 떠난 빈자리에서 앓고 있는
책상머리 남루한 ‘여로’의 기억
구두 콧등은 지금 ‘지나가는 길’을 포맷 중
―「딱쇠 손씨」부분
딱쇠 손씨가 떠나고 난 빈자리에는 그는 지금 부지런히 앓고 있다. 삶의 흔적은 ‘구두약과 솔 헝겊 접착제’로 눌어붙었지만 그 보퉁이를 보듬는 시인의 기억 속에서는 남루함을 포맷하는 선뜻한 기운이 쉼 없이 솟아올라 컴퓨터 일처리에 여념이 없는 현실과 자신을 포맷한 후 다시 열린 기억의 미로 사이에서 열병을 앓고 있다. 그런데 시인의 가슴은 나에게는 이상하게도 차분하게 전해진다. 진짜 열병을 앓기나 하는지 어쩐지.
아래로 향하는 다음 한 편을 더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시가지 하나둘 늘어나는 미용실
전기 커트기 잘려 나간 자존심보다
수십 년 동무되어도 미덥지 못한 가위질
기억들이 베어져 나간 틈새마다
지나간 세월 담아내는 벽거울 속으로
걸개그림 만발한 진달래 봄빛이 그리운가.
― 중략 ―
한쪽 무릎 저려오는 아침
메마른 장미덩굴 봄비를 부른다
거칠한 세월과 마주한 의자
거울 정면 펼쳐지는 닮은 꼴 같은
타관바치 살아온 반생
남도엔 무서우리만치 동백이 찬란하리
손마디 굳은 살집 남겨진 가위소리
움켜쥐어도 힘없는 물리는 손
내리는 비가 눈물이었을까
이명처럼 울리는 빗소리
덧칠 한번 없었던 양철 간판 ‘월계이발관’
봄비 타고 표류한다.
―「월계이발관」부분
약간 긴 시를 다시 중략, 중략해서 올리기가 미안할 정도로, 나는 이번 시집 ‘딸 셋 애인 넷’에서 수작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위에는 생략됐지만 ‘째깍이는 가위소리 바람이 되었다’로 마침하는 이발소의 쓸쓸한 풍경은 우리들이 잊으려고 애를 써도 가슴 깊은 곳에 깊게 각인되어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핵심이 자리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저변에 흐르는 이런 시를 실로 오래간만에 보거니와, 정시인이 가끔 사물을 맥없이 색칠함으로써 산뜻한 시인의 내면이 밖으로 곡해되는 그런 난처함에서 벗어나는 글쓰기, 바로 ‘월계이발관’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역시 수작으로 읽히는 한편을 마무리로 붙인다. 시인의 정진을 바라면서.
‘집을 짓는 방식’
까치는 저 높은 성근 가지 위 둥지를 틉니다.
바람이 꼬이고 햇살이 덮이고
눈비가 머무는 높은 곳에 가정을 꾸립니다
여우는 나무뿌리 얽힌 땅속에 굴을 팝니다
새싹 움트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세상 밖 기지개 켜는 소리 들리는 곳에 새끼를 낳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나무 위도 땅속도 아닌
땅 거죽 그곳에 집이 있습니다.
햇살도 비켜가고 바람도 돌아앉는
생명이 자라는 소리 외면하는
견고한 집을 짓습니다
그곳에 숨어 엮는 또 다른 집
칸칸이 막힌 방, 아이들이 지은 집
박제처럼 더 단단히 차단된 감정
서로 견고한 집을 짓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먼 이웃처럼 지냅니다
그런 집을 지은 인류를 슬퍼합니다
난, 그곳에 문패를 달고 살고 있습니다